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46
136화
‘정말…… 오랜만이다.’
퍼억!
박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실뱀이 휘두른 장검에 날아가든 말든.
살갗을 쭈뼛 세우게 하는 뱀의 숨소리가 귓가에 맞닿든 말든 괘념치 않은 윤산영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이 내는 빛에 박혀 있었다.
안개 속에 감춰진 거대한 형상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한낱 인간으로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하거나, 그 이상의 격을 상대한다면 경이로움 대신 두려움이 전신을 먼저 차지하는 게 이치일 텐데 그녀는 말 그대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뭐라고 할까.
움직임 하나하나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듯 골몰하던 눈이나, 행동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이고 있는 사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단순한 즐거움으로 격양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 오락 거리를 마주한 것처럼.
‘웃는 얼굴.’
윤채희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아무리 SSS등급에 랭킹 1위.
‘얘는 나한테 뱀이 아니고 지렁이’ 발언까지 했다지만, 상대는 최종 보스로 향하는 관문의 수문장이었다.
고대 신화에나 존재할 법한 웅대한 마수를 마주한 순간 채희가 걱정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전투.
특히나 그녀가 ‘이모아’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정보를 잠시 잊게 만드는 마수와의 전투에서, 채희가 무모해지는 걸 보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달리 자기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달려들지.’
그녀는 산영에게 종종 ‘네 목숨 깎아가면서 사람 구하지 말아라’.
‘제발 희생정신 좀 버려라’ 쏘아붙이곤 했지만, 그건 산영이 고스란히 채희에게 해당 된다 일러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채희는 매번 한계를 시험하듯 스스로를 몰아쳤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일단 육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확인한 뒤 그 바닥이 겨우 찰랑찰랑 남을 때까지 자신을 쥐어 짜내는 것 같았다.
오직.
‘자신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처럼.’
채희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매번 포기하고 싶은 상황마다 역전패를 들고 나타나 산영을 구해주는 그녀의 능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채희가 산영을 그렇게 여기듯, 산영 역시…….
‘뭔가를 짊어지고 계신 채희 님이 위태로워 보였을 뿐.’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달랐다.
‘구드’는 그녀가 그동안 마주쳐 왔던 마수들과 격이 다른 존재임이 명백할 텐데, 싸우는 채희나 보는 산영에게까지 불안한 감정이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유롭고 노련했다.
공격에 우세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마수가 암석 기둥을 오르면, 채희는 그 모든 움직임과 뒤이어 올 공격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달렸다.
얼핏 보면 다급히 쫓기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으나, 산영이 다가갈까 망설이는 사이, 채희는 모든 상황을 끝내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푸핫! 멍청한 자식.”
딱! 딱딱!
앞에 놓인 먹잇감을 씹어 삼키기 위해 부딪히는 뱀의 턱 아귀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긴 몸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채희가 유인한 대로 매듭 묶여 있는 구드의 혀는 그녀에게 절대 닿지 못한다.
쉬익. 쉬이이익.
거친 숨소리가 그 앞에선 작은 인간의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든다.
송곳니에서는 청록색 독이 뚝뚝 떨어지고, 메마른 땅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치지지직. 타들어 가지만.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
빙글거리는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꽈아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눈이 멀 정도의 빛이 터진다.
안개에 비친 희뿌연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이제 기절한 머리 하나를 덜렁대며 움직이는 구드의 인영이 산영에게도 보인다.
채희는 이곳의 지배자라는 뱀 마수보다도 더 지형에 대한 이해를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당연하게도, 구드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바싹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그녀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오랜 기간 체감한 대로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인간의 차원을 뛰어 넘은 실력을 보일 때에는 찬탄이 잇새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모든 공격을 유연하게 피해나가며 허점을 찾아 정확히 적의 급소를 때린다.
움직임을 읽은 것처럼 예측하고 한 발 앞서 나간다.
미끼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놈의 공격성을 역으로 이용한다.
그게 아무리.
‘재앙 끝에 선 마수일지라도.’
광풍이 몰아쳤다.
실뱀.
그러니까, 채희가 일컫기로는 ‘쫄’들이라 불리던 구드의 소환수들은 전부 힘없이 바람에 휘말렸다.
가벼운 종잇장처럼 뱀들이 허공에 날아다녔다.
산영 역시 급히 방패와 검을 지면에 꽂아 버텼지만,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날 정도의 세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버티기도 힘든 폭풍 속에서 산영은 채희의 인영을 찾기 위해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바람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을 때.
“하드 모드는 이런 맛이 있다니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녀가 중얼거렸다.
자욱하게 깔렸던 안개는 사라지고, 선명한 햇살이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었다.
대지에 떨어지는 빛기둥 사이로 구드의 머리통을 밟고 있는 채희가 웃었다.
“내가 별거 아니라고 했죠.”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1 관문 ‘구드의 지배지’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다음 관문의 입장 권한을 부여합니다. (입장 시간 29분 59초)】
***
쿠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구드의 지배지 한가운데 박혀 있던 문이 조금 열렸다.
멀끔하게 트인 시야에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문까지 찾아냈으니 이제야 속이 다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좀 정리해야 될 일이 있거든요.’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죽어 있는 구드의 머리통을 의자 삼아 앉고,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앉아요.”
“아…… 네.”
리오는 아직 구드의 시체가 얼떨떨하다는 것처럼 주춤대며 비늘을 밟고 올랐다.
반질반질한 바닥이 익숙하지 않은지 종종 발을 헛디디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올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인사했다.
“나름 쫄들 어그로 잘 끌어 주던데요?”
“예? 어그…… 로, 그게 무슨 뜻인지…….”
“실뱀 처리 잘 해줬다고.”
“아, 노력했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말하는 리오는 어딘가 머쓱해 보였다.
칭찬을 해줘도 왜 이러지?
말한 대로, 내가 구드를 상대하는 동안 빠우져! 있으라고 수십 번 외친 리오에게 전투 중 부탁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버텨!”」
「“예?!”」
「“저 새끼가 쫄들 소환할 거니까 버티라고오!”」
고오, 오, 오…….
달리며 소리친 목소리는 메아리쳐 그에게 제대로 닿았는지 의문이었지만, 리오는 웬일로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구드의 입에서 구웨에엑.
쏟아낸 실뱀들을 죄다 자신의 쪽으로 몰고 갔다.
소환수라고 해도 구드의 능력을 카피한 최소 S급 이상 분신이었을 텐데, 리오는 잘 버티기도 버티고, 적당히 상대하기도 하고, 때때로 또 구드가 쏟아낸 소환수들을 쫓아 데려가기도 하면서 충분한 제 몫을 해냈다.
중반쯤엔 ‘이게 바로 파티플레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기대 이상이었다는 뜻이었다.
‘대충 죽지만 않아도 감사하다 빌 판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똘똘하게 큰 건지.
오랜만에 조카를 만났을 때, 옹알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엄마! 아빠!’ 말을 뗀 걸 발견한 이모의 심경으로 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감동스럽고 그윽한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흠칫 어깨를 떨며 딴청을 피우다가, 이윽고 철퍽.
“…….”
“어우.”
훼까닥 뒤집혀 있는 구드의 눈동자에 손을 처박았다.
찐득하게 딸려오는 정체불명의 점액을 바라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눈이…… 생겼네요.”
“그러니까. 네모가 떨어졌어.”
그게 바로 내가 이 마수의 대가리에 앉아 있는 이유였다.
【MISSION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지우지 않아 아직 눈앞에 떠 있던 알림창을 대충 밀어내고, 새로 뜬 창들에 시선을 박았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불가능한 전투)】
【3,0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찌르면 터지는)】
【1,5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스네이크 슬레이어)】
【2,000 다이아를 얻으셨습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슉, 슈슉, 슉, 피했지롱)】
…….
…….
높은 등급 마수를 한 대도 맞지 않고 처치했기 때문인지 새로 얻은 업적이 많았다.
개중에는 애카에서 얻었던 것도, 처음 보는 업적명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런데, 전이라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이제 다이아 어따 쓰냐고.’
버프 패키지도 있는 대로 끌어다 썼고.
뭐 특별히 살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기분만 내는 업적명 같은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보는 듯 마는 듯 눈으로 훑은 뒤, 가장 밑에 숨어져 있던 미션 창을 끄집어냈다.
#
【MISSION】
▷ 무지의 유죄 (1)
― 분류 : 서브
구드를 처치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완료)
보상 : ‘서’
#
‘서?’
이렇게 뼈 빠지게 고생을 해놓고 얻은 글자는 서.
한 글자뿐이었다.
그것도 어디에 들어가는 글자인가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 결과…….
–
【상태】
이름 : 이모아 / 16세
칭호 : ‘시작에 선 자’, ‘■드■■의 해방자’, ‘수레바퀴의 조율자’, ‘개척자’, ‘한계를 깨트린’, ‘천칭을 쥔’, ‘■■ 종결자’
–
상태창은 변경된 사안이 없었다.
“웃기지 마라, 진짜!!”
구드의 대가리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리오가 화들짝 놀란 게 느껴졌지만 사과할 정신머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글자도 내가 다 얻고, 뭐, 단어 맞추는 놀이까지 해라?’
이런 싹바가지 없는 시스템 같으니.
곧 만나게 될 최종 보스 놈이 이 미션 내용에 관여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시스템에 빡친 몫까지 다 패 버린다.’
***
그리고, 서울의 밤 한복판에선 조각난 무지갯빛 파편이 눈처럼 흩날렸다.
흐르는 피에 간신히 한쪽 눈을 치뜨고 있는 서윤에게 누군가 조용히 속삭였다.
“부길드장님, 저건.”
아가씨가…….
흩어지는 입김 속.
하늘을 가둔 채널을 바라보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맞아.
“그 애한테 걸 수밖에 없는 거지. 우린 또다시.”
치지지지직.
노이즈가 울렸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