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0
1화.
“모아야, 생일 축하해!”
팡! 파앙!
꽃가루 같은 폭죽이 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부끼는 조잡한 현수막과 입 모아 건네는 축하.
흩날리는 컨페티 사이에서 이모아는 어느 때보다 힘껏 웃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케이크 위에서 열여섯 개의 초가 일렁였다.
마침내, 그 주황 불빛이 아이의 눈동자에 한가득 담긴 순간.
“정말 감사해요.”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홀 내부의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아늑한 감격을 음미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많은 생과 사가 지나갔고, 살기 위해 죽을 각오로 싸웠으며, 불완전한 존재들이 만들어 낸 완전한 결말을 손에 쥐었다.
누가 그랬던가.
‘생일은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날을 기념하는 거라고.’
이모아는 오늘만큼 그 말을 실감하게 된 적이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같은 눈으로 홀 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음 깊숙이 새겨 넣었다.
아이와 함께 자라온.
어떻게 보면 참석이 당연한 화랑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분명 낯선 얼굴들은 존재했다.
도연, 강민희를 비롯한 타 길드 헌터들. 화면 너머로만 보았던 김 씨 아저씨, 아솜이와 찬민이, 뒷골목의 무명 씨까지.
비록 스스로 만들어낸 인연은 아니었지만, 이모아는 자신의 곁에 남은 사람들을 당연하게도 사랑했다.
그들은 기적의 증거였다.
몇십, 몇백 번의 죽음.
결코 맞이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열여섯 번째 생일을 기어이 만들어내고만.
유산처럼 그녀가 남겨 놓은…….
‘기적.’
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기적 앞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했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적어도 목숨을 걸어 자신을 깎아가며 맞서야 하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기를.
또다시 우리를 지켜보는 신이 있다면.
‘이 세계에 없는 그들에게까지 내 바람이 닿길.’
채희 언니.
후욱.
따듯한 숨결에 촛불이 흔들리고 꺼졌다.
다시 몇 개의 폭죽이 터지고 기분 좋게 불어오는 휘파람 소리, 끌어 안아오는 팔,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이모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살아 있음을 축하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똑똑.
테라스 창을 두드려오는 소리에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모아의 고개가 살짝 뒤를 향했다.
정석적인 예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 생일이라고 캐주얼한 수트를 걸친 이겸이 거기에 서 있었다.
미지근한 봄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곁에 있기를 허락하듯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기자,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이겸 역시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주인공이 없어져서 한참 찾았어.”
그 말에는 조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홀과 테라스는 몇 층 떨어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이곳에서도 들리고 있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 같은 게 아득하게 귓가로 녹아들었다.
명목상 이모아의 생일을 큰 틀로 잡고 있긴 했지만, 실은 오늘의 만남은 그것보단 전투의 회포를 푸는 장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최종 보스를 물리치고 해체됐던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온 이후.
기뻐할 새도 없이 그들의 세상이 한 번 더 뒤집혔기 때문이었다.
이모아는 무언가 움켜쥔 것처럼 쥐었던 주먹을 한 손가락씩 조심스레 폈다.
후욱.
미세한 파동과 함께 희미한 금빛이 손끝에 맴돌았다.
별가루 같은 마나는 바람을 타고 밤하늘 너머로 흩어졌다.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 의미 없는 반짝임만 남길 뿐.
그뿐이었다.
“……전보다 더 약해졌네.”
“응.”
담담하게 답했다.
각성의 힘은 사라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싸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포탈도, 마수도, 차원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모든 생명체의 삶을 뒤흔들었던 그 방식대로 단숨에 없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미션을 받지 않았고, A, B, C, D 같은 알파벳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기준을 잃은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이제 ‘힘’이 아닌 무엇이 질서가 될 것이냐.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하느냐.
그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남은 4대 길드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군중은 결국 완전히 일상이 회복될 때까지 자신들을 지탱해줄 중심을 바랐다.
아무 경계도 구분되지 않는 무질서를 틈타 이번에는 사람이 사람을 해할까 두려워했다.
‘명암’의 일로 남은 학습의 결과였다.
가장 정의로운 사람.
가장 선의를 지닌 사람.
가장 이타적인 사람.
사람들이 찾은 건 결국 자신들을 구한 ‘영웅’이었다.
모든 길드 마스터들은 무언가를 이끄는 책임감에 질린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세계에 자신들의 몫이 남아 있다는 설득에는 결국 전부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누구보다 강력하게 ‘도와 달라’ 찾아가 이야기했던 건 이모아였다.
「“권력이나 힘. 그런 걸 바라서가 아니에요. 각성의 힘을 잃은 우리는 그런 자리를 가져선 안 된다는 뜻에도 동의해요. 이 세상은 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이 이끌어야죠. 다만…….”」
기껏 되돌려 놓은 세상이 다시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잖아요.
울음을 삼켜내는 법을 배운 이모아는 시린 눈을 하고도 절대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모두가.
그 사람이 지켜준 이 땅을 반드시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하에 굳건한 길드 마스터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렇게 또다시 ‘임시’ 글자를 붙인 질서 체계가 탄생했다.
나라 하나를 다시 세우는 꼴이었지만, 한 번 하겠다고 약속을 내뱉은 영웅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를 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게 벌써 세 달 전 이야기였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덕분에 달력이 넘어가는지도 몰랐던 이모아는 자신의 생일이 닥쳐오고 나서야 아, 벌써 이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체감했다.
그동안 채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얼마나 용을 썼는지 몰랐다.
웃긴 이야기였다.
‘언니는 나를 흉내 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내가 언니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흉내 내고 있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라는 건 16살짜리 꼬맹이 이모아가 아니라.
이겸의 동생인 이모아가 아니라, 세상을 구한 영웅 이모아였다.
한때는 그 이름을 간절히 원했던 적도 있었는데, 막상 이 위치에 서자 느껴지는 건 머리를 짓누르는 중압감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책임감.
태어나기 위해 알을 깨는 새처럼 내내 싸우고 있는 느낌.
하지만, 결코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이모아에게 새로운 목표가 남아 있었다.
‘언젠간 언니를 뛰어넘고 말 거야.’
윤채희가 이 몸에 새긴 강인함과 인내.
포기하지 않는 선함을 바탕 삼아 물감처럼 내 삶을 그려 내겠다고.
어떤 힘에도 기대지 않고, 어떤 누구의 삶도 아닌.
‘이모아’의 다음 페이지를.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 둥근 달 언저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겸이 몇 번이나 망설이듯 어물거렸다.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 친구는 안 보이던데.”
모아는 겸이 말하는 ‘그 친구’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듣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이 역시 머릿속으론 없을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홀 안을 더듬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허연 얼굴을 찾기라도 하면 어깨가 바짝 솟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 테라스에 나와 밤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유와도 같았다.
“산영 님.”
한숨처럼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는 세계에 돌아온 이후, 다른 랭커들 못지않은 영웅으로 대우받았지만, 여전히 비좁은 여인숙에서 지냈다.
좀 더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사람들의 물음에도 작게 미소 지을 뿐.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었다.
모아는 종종 산영을 찾아갔었다.
따져보면 몇 번 말도 나눠보지 않은 관계였지만, ‘윤채희’라는 접점 아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하고 밥을 먹었다.
다만 산영은 조금씩 신변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느 날은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던 백골 길드로 인사를 하러 다녀왔고, 오 사장이 있는 전당포를 찾아가거나 뒷골목에도 한 번 다녀왔다.
하루는 ‘기사님, 기사님’ 하고 부르는 장정들을 달고 왔기에 낯이 익다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고 있었는데, 어쩐지 쑥스러운 얼굴로 설명했다.
「“원래 명암 쪽 인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돼서.”」
「“그럼요. 우리 기사님 덕분에 저희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니까요.”」
「“지금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봉사도 다닙니다. 때, 때리지만 마십쇼……!”」
그들은 윤채희에게 얻어맞은 기억이 있는지 산영의 뒤에 숨어 덜덜 떨었다.
그걸 보는 이모아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고 볼 거예요.”」
엄중한 얼굴로 경고한 뒤 픽 웃어 버리는 게 전부.
산영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한 번씩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모아에게 문자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감사했습니다. -고구마」
처음에는 잠결에 고구마가 뭐야? 스팸이야? 했었는데, 깨닫자마자 여인숙으로 달려갔다.
그가 묵었던 한 칸짜리 방에는 모든 전쟁이 끝났음에도 문신처럼 입고 있던 산영의 갑옷과 상처 가득한 검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단지.
‘심장처럼 지니고 있던 핸드폰은 함께 없어진 채로.’
그는 그렇게 훌훌 떠나 버렸다.
이제 이 세계에서 윤채희의 존재를 아는 건.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건 이모아 밖에 없었다.
그게 이렇게나 사무치게 외로운 일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모아한테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진짜 감사를 전해야 할 쪽은 채희 언니고, 이제는 만날 수 없으니까 우리라도 그녀의 조각 하나라도 잃지 않게 오래오래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지.
돌아오기는 하는 건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게나에서 뭘 할 건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떠난 산영이 가끔은 밉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못 만나.”
이모아는 어쩐지 후련하게 답을 내렸다.
달을 올려다보던 몸을 돌려 테라스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 기대있던 겸이 영문을 몰라 ‘왜?’ 하고 묻자, 장난스럽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잠깐 고향에 갔거든. 책임질 게 있어서 되게 오랫동안 못 갔어.”
“아…….”
“근데 다시 올 거야.”
그건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닌 확신이었다.
윤산영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남겨진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만들어 준 새로운 미래에.
‘리오’라는 이름을 되찾은 이곳에.
“그때 반겨주면 돼.”
완전히 테라스를 빠져나간 아이의 드레스 자락이 총총대며 파티장으로 향했다.
***
그리고, 몇 년 뒤 겨울.
찬바람이 뼛속 깊숙이 몰아치고 민들레 홀씨처럼 눈이 쏟아지는 자정이 다 된 길거리.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하던 여자는 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발신자를 안다는 듯이 ‘오빠도 진짜. 가고 있다니까.’ 불퉁하게 속삭이고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알림창은 텅 빈 상태였다.
“……환청인가?”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추위에 붉어진 손등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바삐 움직이려던 그 순간.
“설마.”
뭔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다급하게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또 다른 핸드폰 하나.
조금 더 낡아 보이고, 여기저기 모서리가 깨진 상태였지만, 이모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잠금을 해제했다.
12월 19일, 00시 00분.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이모아의 생일도.
그녀가 아는 그 누구의 생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문의 발신자가 어떤 이를 축하하는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문자 끝에 붙어 있는 이름.
「고구마」
그가 돌아왔다.
이모아는 추위도 모르고 내달렸다.
눈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넘어질 참사를 넘겼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침내,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종종 들러 주인 할머니의 안부를 챙겼던 여인숙 앞에 도착했을 때.
“오랜만이에요. 모아 님.”
윤산영이 웃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붕어빵.
그리고 한 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들은 보일러가 뜨끈한 쿰쿰한 방 한 칸에서 주인 없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물렁한 붕어빵을 나눠 먹으며 오랫동안 윤채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분명 잊어버린 순간들도.
망각에 지워져 버린 모습들도 있겠으나, 그들은 더 이상 윤채희를 떠올리는 게 외롭지 않았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