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1
2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낯선 천장.
바스락거리는 이불과 익숙하지 않은 바닥 요.
낯선 잠자리에 배긴 등이 꾸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아직 잠이 덜 깬 정신이 그 생각 하나에 번쩍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가빠져 오는 호흡.
황급히 혼란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면.
“왈!”
앙증맞은 짖음 소리와 함께 토독토독,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달려왔다.
인기척을 눈치채고 다가온 털 뭉치가 가차 없이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어푸푸.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는 아이의 머리통을 붙잡고 쓰다듬었다.
그제야 목구멍을 치고 오르던 심장 박동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따듯한 체온이 뺨에 맞닿았다.
“코코, 잘 잤어?”
왈!
또다시 대답하듯 명쾌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부엌의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혼자였던 자취방에서는 절대 날 리 없는 훈기.
곧 익숙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코코야, 언니 일어났으면 얼른 나와서 떡국 먹으라 그래.”
그래. 여기는 703호, 엄마의 집.
설날을 맞이해 나는 본가에 와 있었다.
***
“간 괜찮아?”
“응. 딱 맛있어.”
심심한 대화를 나누며 설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수면 잠옷 차림으로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먹는 떡국이었지만, 하나도 불편한 게 없었다.
일상적인 편안함.
이게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런 생경한 기분을 문득문득 느낄 때면, 나는 종종 그 세계에 다녀온 게 꿈이 아니었을까.
미쳐 버린 내가 꼼꼼하게 만들어 낸 망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윤채희의 세계’로 돌아왔던 그 날의 기억만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엄마, 엄마! 엄마아!”」
내 방에서 눈을 뜨자마자 정신없이 달려갔던 아파트.
집 비밀번호를 알면서 떠올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철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정신없이 엄마를 불렀다.
아마 아파트 주민 누군가 들었다면 길 잃은 아이라도 있나 생각할 법한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주먹이 벌겋게 물들고, 뼈가 찌르르하게 울릴 지경이 되었을 때.
「“채희야?”」
복도 반대쪽에서 엄마가 나타났다.
시장이라도 다녀왔는지 한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 한팔에는 코코를 안고.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린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꺽꺽 울어댔다.
엄마는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와 우는 딸이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장 본 봉지도 내팽개치고 나를 안아주었다.
「“왜 그래, 우리 딸. 무슨 일 있었어? 응?”」
묻는 말에는 하나도 답하지 못했다.
대신 앉은 자리에서 왕왕 짖으며 빙글대는 코코와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복도 끝까지 굴러가 터진 귤들은 눈물에 퉁퉁 불어터진 얼굴로 내가 다 맛있게 까먹었다.
엄마는 그 뒤로도 종종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내젓기를 반복했다.
‘사실 내가 한 세계를 구하고 돌아온 영웅이에요.’
이런 걸 말해도 믿어줄 사람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 이후로 나는 한번도 컴퓨터를 켜보지 않았다.
방구석 게임 폐인 윤채희에게 달라진 점이라면 그것뿐이었다.
“귤 좀 더 먹어. 한과 먹을래? 고구마 쪄줄까?”
“지금도 배 터져 죽을 거 같아, 진짜. 그만, 그만.”
“넌 좀 쪄도 돼. 애가 피골이 상접해 가지고선.”
도대체 어디가 피골이 상접했다는 건지.
건장한 21세기 여자 표준 체중을 지니고 있는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게 본가에 돌아온 대가요, 생각하며 군말 없이 입으로 들어오는 한과를 씹어 삼켰다.
한 끼 식사가 지나고 내가 설거지도 마쳤으니 별일이 없을 텐데도 엄마는 계속해서 부엌을 어슬렁거렸다.
보일러가 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비비적대는 나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여사님. 좀 쉬시라니까.”
걱정 어린 타박을 내뱉으며 뭘 하는지 들여다봤더니, 엄마는 음식들을 조금씩 밀폐 용기에 나눠 담고 있었다.
잡채, 산적, 동그랑땡…… 떡국까지.
내가 한소리를 할까 신경이 쓰였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우다다다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우리 맞은편에 빌라. 거기에 너만 한 여자애가 하나 이사왔거든. 저번에 분리수거 나가다가 쏟아져서 난리였는데 그때 그 친구가 도와줬어. 얼굴 안 김에 오며 가며 인사도 하고, 코코 산책시킬 때도 종종 마주쳐서 친해졌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애라 설에도 일 때문에 가족들 보러 내려가지도 못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음식 좀 가져다주려고 그래. 설날인데 그래도 떡국은 먹어야지.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사람처럼 날 쳐다보지도 않고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 뒤통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내가 가져다주지 뭐.”
“네가?”
“응. 추운데 엄마는 집에 있어. 몇 호인데?”
롱패딩을 챙겨 입으며 물었다.
그러나 엄마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옷 입는 나를 귀신 보듯 바라보며 쥐고 있던 집게를 놓았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이, 뭐래 진짜.”
“평소에는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누굴 주냐, 그런다고 걔네가 감사해할 거 같냐, 먹고 쏙 튀는 게 전부다 그랬으면서.”
듣자 하니 남에 입에서 나오는 내 언변이 상당히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딱 저렇게 말하고 다녔으니 뭐라 부정할 수도 없고.
괜히 머리만 털어 만지며 ‘얼른 줘. 마음 바뀌기 전에.’ 하고 심술을 부렸다.
엄마는 은근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로 내 손목에 도시락 통들을 걸어줬다.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고 현관문 앞까지 배웅했다.
“앞동 401호야. 음식은 따듯해야 맛있으니까 꼭 데워먹으라고 전해주고.”
“알았어.”
말은 곧 나설 것처럼 했지만, 나는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조명등 빛이 꺼지지 않고 머리 위로 쏟아졌다.
왜. 뭐 필요해? 장갑 줘? 묻는 엄마에게, 목도리를 둘둘 감아 반쯤 가려진 얼굴로 고백했다.
“엄마, 나는…….”
“…….”
“나만 잘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어.”
한숨처럼 웃고 발끝으로 툭툭 바닥을 쳤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라비틀어져서 죽든 말든, 나만 능력이 있으면. 그럼 무슨 일이 생겨도 다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어.”
“…….”
“근데 아니더라.”
쌉싸름한 낯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갈비뼈 인근이 찌르르하게 저려오고, 심호흡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끝까지 나와 함께 걷던 발자국들과 빛을 믿던 눈들을 기억했다.
“엄마가 맞았어.”
문을 열었다.
상쾌한 찬바람이 몸을 감쌌다.
“다정함이 결국에는 이기더라고.”
띠리릭.
닫히는 문소리에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엄마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손목에 걸린 도시락의 무게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
그날 밤.
할 일도 없는데 하룻밤 더 자고 가라는 엄마의 간청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코코 역시 가지 말라는 것처럼 내 발을 깔고 앉았지만, 또 오면 되는 걸 뭘, 하는 말로 둘을 밀어냈다.
하루 더 머물다 가는 것.
내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때 되면 엄마가 밥도 줘, 등도 따수워. 옆에 눕는 코코를 쓰다듬다가 깜빡 낮잠에 드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탁.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냉기가 느껴졌다.
사람의 온기가 없었던 티가 나는 집.
있는 거라고는 다 낡은 침대 매트리스와, 맥주나 소주밖에 들지 않은 미니 냉장고가 놓여 있는 방 한 칸.
그리고.
패딩도 벗지 않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웅웅대며 돌아가는 모터 소리에 손발이 차가워졌다.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은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온 이후 내내 궁금했지만, 두려움에 묻어 놓았던 호기심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원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매순간 포기하길 반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주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계속 그 세계에 얽매여 있을 수 없으니까.’
분명 ‘윤채희의 세계’에 돌아왔지만, 글쎄.
나는 아직 제대로 윤채희로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현실에 발붙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재난 문자음이 울리며 어디서든 포탈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고, 습관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건 이상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이모아가 아니니까.’
누군가의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윤채희니까.
‘확인하자.’
더 이상은 피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다.
파란 바탕화면이 켜진 기계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딱 하나.
화면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로고 하나.
.
게임이 시작되는 로딩창이 떠올랐다.
짧은 업데이트가 진행되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똑같은 시작 화면, 똑같은 배경, 똑같은 설정과 똑같은 음악.
그러나.
“…….”
START 버튼 위에서 커서가 맴돌았다.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 눌러야 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내 손은 절대 새로운 세계를 시작해낼 수 없었다.
그 끝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방황하는 손은 결국 설정창이며 기타창, 게임과 상관없는 설정들을 깔짝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래.”
멍하니 뜬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게임을 종료했다.
길게 벌어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딱 한 줄.
100%를 찍었던 나의 달성도에서 달라진 한 가지.
【히든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Continue)】
그거면 충분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윤채희의 이야기 역시.
몇 번의 밤이 찾아오고, 다시 아무것도 기대되지 않은 아침이 다가와도, 내가 다시 ‘START’ 버튼을 누르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