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내 돈도 아닌데 뭐.
“네, 그럼요.”
단정히 웃으며 답하자 박수현은 극진한 태도로 나를 모셨다.
이건 말도 안 돼.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단단히…….
중얼대는 구서복을 입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담아 꾹 참았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 매장 안쪽으로 향했다.
밝은 분위기였던 앞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점점 전시관스러워지고 있었다.
확실히 피팅 된 유물의 레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괜찮은 물건들을 몇 개 담아두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딱 보기에도 ‘나 고급스러워요~’ 하는 카우치와 테이블로 장식된 공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셀러들이 먹음직스러운 케이터링을 착착 운반했다.
군더더기 없이 훈련된 행동이었다.
“샴페인은 혹시…….”
“아, 전 오렌지 주스로 부탁드려요.”
“아가씨가 운전 하실래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월급쟁이 소시민은 좀 취해야 쓰겠는데.”
헛소리를 하는 구서복은 무시가 답이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박수현이 문을 닫았다.
공손한 자세로 맞은편 카우치에 앉았다.
“먼저 레오날드를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저희 점포에서 고객님들께,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조금 더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해드리고자 부탁드리는 간단한 명단 작성이에요.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면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안 하셔도 점포 이용엔 전혀 상관 없으시구요.”
“네. 한번 읽어볼게요.”
이름과 간단히 원하는 계열의 물품을 선택하는 질문지였다.
당연히 서명할 거지만 밀당 좀 해보겠답시고 찬찬히 안내문을 살피는 척했다.
도도하게 이름만 적어 명단을 내밀었다.
박수현이 재빠르게 눈으로 글자를 훑는 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달리 추천 원하시는 상품은 없으신가요?”
“네, 일단 와서 괜찮은 거 있으면 구매할 생각이었거든요.”
“아, 그럼 앉아 계시면 몇 개 엄선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근데, 그,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눈치를 보는 시선에 말하라는 것처럼 턱짓을 까딱했다.
박수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카드 소유자와 이름이 다르셔서…… 매뉴얼 상 확인 차 여쭤봐야 해서요.”
매뉴얼은 개뿔.
비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평일에.
그것도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장비들을 팍팍 사고, 이겸의 이름이 써진 골드 카드를 내미니 지들도 이상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의심이었다.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이모아는 고작 15살.
컨셉에 맞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저희 오빠예요.”
박수현의 눈빛에 안광이 도는 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안에 담긴 뜻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봉 하나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속에 담긴 건 윤채희예요.’
오렌지 주스로 가볍게 입안을 적셨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쉬시고 계시면…….”
“바깥에 자개 고리검이 있던데.”
뜻밖의 이름을 꺼냈는지 박수현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기선제압의 두 번째 단계.
아는 건 전부 다 티내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이 아니란 걸 보여줘야 한다.’
분명 앞에서 한 사재기로 인해, 셀러들의 인식에는 ‘각성 수저 물고 태어나서 빵빵 돈지랄 하는 어린애’로 캐릭터가 잡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여줄 물품들은 뻔했다.
예쁘지만 비싸고 실속 없는 것들뿐.
그러나 예상과 빗나간 제안을 하면 긴장하게 되어 있다.
그 빤한 인식을 뒤집어 엎어주어야 했다.
“아, 네. 맞습니다. 서해안 지역 포탈에서 얻은 크리켄의 전리품을 장인분께서 세공한 것이구요. 또…….”
“부가 속성은 뭐가 붙어 있나요?”
“그, 피격 확률과 관통 능력치가…….”
“그 정도면 괜찮네요. 가져다주세요. 아, 그리고 긍지의 견갑이랑 혹한의 청자 반지도 보여주시면 좋겠네요.”
일단은 제일 비싸고 혹할 것들만.
괜찮은 물건들만 쏙쏙 집어 이야기하니 박수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긴가민가한 기운이 나에게까지 풍겨왔다.
이거, 조금 시험에 들게 해야겠다.
상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매니저님께서 추천하시는 물건들도 볼게요. 많이 가져와 주세요.”
***
“좀 더 잘 빠진 건 없어요? 별로 끌리는 게 없네.”
턱을 괴고 지루하게 말했다.
앞에서 복사꽃 허리띠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던 박수현의 입이 딱 다물렸다.
구서복은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진 쇼핑에 이미 진이 빠져 혼수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뭘 고르고 선택하는 것.
딱 질색이다.
“기본 능력치는 좋은데, 부가적인 면이 좀 덜 붙은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세공된 장식이면 적어도 타격 시에 치명 피해량 정도는 올려줘야 하는데…… 아까 구매한 모란 노리개랑 별반 성능 차이도 없는 것 같고.”
따박따박 별로인 점을 지적해주자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이게 바로 온갖 장비란 장비는 다 꿰고 있는 인간의 눈높이라는 것이다.
무슨 진품명품도 아니고 내내 물건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자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만일 이게 정말 현실이었다면, 박수현이 입장에선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을 것이다.
좋은 건 이미 먼지까지 탈탈 털어 구매해놓고 더 좋은 걸 내놓으라 배 내밀고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나에겐 원하는 게 있다.
그걸 얻을 때까지는 쪼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박수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현재까지 저희 점포에 있는 재고들 중에서는 꽤 상등품이어서요…… 혹시 원하시는 계통의 상품을 말씀해주시면, 재방문하시기 전까지 구해 놓겠습니다.”
“유물 매장 중에선 그나마 낫다고 해서 온 건데. 레오날드에는 이정도 물건이 끝인가요?”
“아, 그게…….”
여기까지 온 시점에선 말도 안 되는 생떼와 다름없었다.
박수현의 얼굴에 큰 그림자가 스쳤다.
죄송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쩔쩔맴에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하고 싶었으나, 눈치를 보며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마침내.
“그럼, 정말 VVIP 고객님들께만 연결해드리는 곳이 있는데, 혹시…….”
끝내 조심스럽게 숨겨 놓은 보물 창고를 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한계까지 몰아쳐야 가장 좋은 걸 꺼내 놓는다.
이 지긋지긋한 이벤트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그러나, 성급하면 하던 일도 망친다.
침착함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어떤 곳인데요?”
“잠시만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박수현은 다급해졌다.
표정에서는 이 상황을 곧 끝낼 수 있다는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그러니까 제발!
박수현이 재빨리 룸을 뛰어나갔다 돌아왔다.
손에는 장지갑 정도 크기의 빳빳하고 검은 카드가 들려 있었다.
저거다. 저 익숙한 자태.
박수현은 공손히 테이블 위로 카드를 건넸다.
“저희 점포에도 매해 열 장 밖에 안 들어오는 초대장입니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유물 경매가 있거든요.
인증된 행사가 아니라 여러모로 위험한 부분도 분명 있지만, 희귀하고 등급 높은 유물들을 가장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루트예요.”
“와아, 이런 것도 있구나.”
“네. 여기 보시면, 이 주소에. 초대장에 연락처랑 이름을 적어서 보내셔야 하구요. 매달 첫 번째 주에 개최되니까…… 아, 얼마 안 남았네요.”
그녀가 달력을 체크하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초대장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위성 뷰까지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냥 도로 한복판이었다.
‘확실하네.’
만족스러움에 웃음을 한바가지 매달고 일어섰다.
지긋지긋한 지금까지의 피로가 싸악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거의 실신해 있는 구서복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양팔에 주렁주렁 종이백을 맸다.
“나머진 다 이겸 앞으로 달아주세요.”
이곳에서의 볼일은 이제 끝이었다.
남은 건, 경매장뿐이었다.
***
“그거 뭐야?”
“응? 뭐…… 그냥 호신용품.”
보석으로 세공 된 부엉이 모양 펜던트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까딱거렸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 부분을 만질 때마다 감겨 있는 부엉이의 붉은 눈 부분이 진짜처럼 깜빡거렸다.
앞자리에 앉은 신하나가 신기한 것처럼 펜던트를 살폈다.
“헐, 귀엽다. 이거 얼마야? 오천 원? 만 원?”
“나도 잘 몰라. 그냥 집에 있던 거 들고 나와가지구.”
사실 개뻥이고 1억 5천짜리 유물이라고 밝히면 무슨 표정을 할까.
백화점에서 사재기를 마친 지 벌써 사흘째.
몇몇 눈이 가는 유물이나 장비 빼고는 모조리 화랑 창고에 박아 둔 지 오래였다.
구서복에게만 정리를 맡기기엔 양심이 찔려 함께 창고에 틀어박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분류만 해도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살 땐 분명 이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시시때때로 눈으로 욕하는 구서복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모르는 건지, 아니면 길드에 돈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이정도 소비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하루하루가 쫄렸다.
그러나, 그 사달을 내게 한 이유가. 나의 목적이!
‘아직도 초대장 회신이 안 왔다.’
오늘은 9월 첫째 주. 그것도 금요일.
그 셀러의 말에 의하면 경매장은 분명 이번 주 안에 개최될 것이고, 그 리미트가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너무 늦게 보낸 걸까?
참석 명단에 들지 못해 다음 달로 밀린 거라면 돈은 돈 대로 쓰고.
낙제도 가까워지고.
첩첩산중으로 문제였다.
오늘 방과 후에라도 목숨을 바쳐 근력 스킬을 얻으러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톡. 톡톡.
어디선가 일정한 박자로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게 났다.
누가 샤프로 손장난이라도 치나.
따분하게 책상 위로 엎어졌다.
내내 가만히 있던 신하나가 갑자기 감탄을 터트렸다.
“요즘 까치들은 겁대가리도 없나.”
“까치? 갑자기 무슨 까치.”
“옆에 봐봐.”
신하나가 가리킨 곳에는 진짜로 웬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창틀에 앉아 계속해서 내 옆의 창문을 쪼아댔다.
톡. 토독. 날개짓하는 까만 몸통을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화들짝 놀란 신하나가 뭐 하는 거냐며 잽싸게 내 손을 막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틈 사이로 들어온 까치가 내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라와 있었다.
“…… 니 애완 까치냐?”
그럴 리가 있겠냐고.
다리에 작게 매달려 있는 줄을 풀었다.
돌돌 말린 손바닥만 한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성북구 선잠로 12-11, 6일 A.M. 00:00』
‘드디어 왔구나.’
적힌 장소와 일시를 보자마자 탁. 숨이 뚫렸다.
6일이라면,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자정.
내내 안달복달하던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들었다.
예로부터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긴다더니.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날려 보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신하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는 까치 맞는 거 같은데…….”
가볍게 웃음으로 넘겼다.
됐다.
목적지도 구했겠다, 이제는 잘 찾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꼼꼼히 종이 조각을 살피고 있는데 신하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정이라고?’
“아무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봐?”
적힌 시간에 한 번, 신하나의 말에 두 번 놀랐다.
진실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신하나를 쳐다보았더니, 곧 종이를 앞뒤로 뒤집어 보며 말했다.
“장난도 한번 고급지게 친다. 쓰레기 묶어서 보낸 거임, 지금?”
찡그린 표정과 이 반응은 진짜다.
그 말은 즉.
‘별거 없어 보이는 이 종이 조각에도 마력을 실어 보냈다는 소리가 된다.’
건조한 표정으로 구겨진 쪽지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