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41
41화
“몇 등?”
“딱 2000등 정도예요.”
“오케이.”
내가 까딱 턱짓하자 윤산영은 알겠다는 듯 마수 몇 마리를 더 해치웠다.
놈은 막무가내 연합을 맺은 것 치고는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반쯤 강제적이긴 해도, 높은 등수를 각오한 우리는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내 목표는 일단 1500등에서 1800등 사이를 유지하는 것.
히든 보스를 만나기 전까지 너무 눈에 띄는 등수는 아니면서도, 1위를 찍었을 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선에서 움직이는 게 중요했다.
1800등.
그게 내가 정한 리미트 라인이었다.
‘슬슬 랭킹도 굳어지네.’
순위권 창을 살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차원이 개최된 지 이제 1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등장하는 마수보다 인간들의 숫자가 많아질 때가 왔다.
수요와 공급의 조건에 따라 한 마수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작은 포인트도 나눠 먹는 시기가 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인지 5천 등 이하의 지하 말고는 크게 리드미컬하고 유의미한 등수의 변화는 없었다.
올라 봤자 백몇 등? 십몇 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도.
‘지금이 타이밍이다.’
나는 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각성자들과 큰 차이 없이 평범하게 움직였다.
아마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겸과 구서복, 많아봤자 화랑 사람들.
그 외엔 없을 것이다.
행여나 분노에 멀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ex.홍영찬), 변장까지 했으니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므로, 완벽히 히든 보스를 마주치기 전 까지는 더 조심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그 루트를 향해 가고 있는지 걸리지 않게끔.
‘송출되는 건 조금 운에 맡길 일이긴 하지만…….’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포인트가 급격히 상승하는 순간부터는 이 8번 채널이 나와 윤산영의 단독 중계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장이 엄청나겠지.
그런 건 시작할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
‘과정이 들킨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히든 보스? 그거 나도 ‘우연히 발견했다’고 변명하기 위해서.
나도 정말 모르는 일이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라고 발뺌하기 위해서.
최대한 내가 화면에 송출되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일단 우연히가 아니면 제일 먼저 이겸의 추궁을 받아내야 할 것.’
그 싸늘한 눈을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뭐라고 변명해.
내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고 또 대국민 고백이라도 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서 누군가가 일을 치고 있기를.
나 대신 이목을 끌어주고 있기를 맘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윤산영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지금부터는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토 달지 마요. 빨리 움직이고, 묻지도 말고, 무엇보다.”
“…….”
“평범하게.”
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한번 뚝뚝 꺾었다.
옷매무새를 단단히 가다듬었다.
***
“쉿.”
입가에 검지를 대고 고갯짓하자 윤산영은 알겠다는 것처럼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부러 지나가던 헌터인 척…….
그냥 둘러보는 신참인 척…… 하며 텅 빈 돔 안으로 들어섰다.
C-존과 C존에 걸쳐져 있는 첫 번째 보스방.
강철 마수, 페인트.
이미 털린 지 오래인 보스방 한가운데에 우리는 진입하고 있었다.
페인트는 흔히 볼 수 있는 폐깡통, 쇠, 철들을 이어붙인 인간형 로봇 마수였다.
사실, 원래 이름은 어딘가 간지나 보이는 ‘메탈릭’ 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단순했다.
‘대가리가 페인트 통이라…….’
정말 한국인스러운 별명이었다.
가끔 뭔가에 부딪히는지 딱 딱 소리가 나는 것 빼고는 사방이 고요했다.
이미 한참 전에 사냥을 끝낸 차원 보스 방에 또 들어올 각성자들은 없다.
그걸 아는 나는 중앙에 쓰러져 있는 페인트의 시체 쪽으로 천천히 향했다.
수상하지 않게 움직이는 게 제일 중요하다.
수상하지 않게, 수상하지 않게…….
“뭐 찾아야 되는 거예요?”
옆에 쭈그려 앉은 윤산영이 속삭이듯 물었다.
물어보지 말라고 했지.
욕하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자 놈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앙 다물었다.
여기부터가 내 계획 성공의 갈림길이다.
안 그래도 강도 비주얼인데, 둘이 같이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이니까 윤산영에게는 돔 안을 둘러보는 척 좀 돌아다니라고 지시했다.
타박타박.
평온한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재빨리 페인트의 가슴팍에 날붙이를 강하게 꽂아 넣었다.
이 깡통 마수의 중심에는 보라색 동력원이 존재한다.
지금이야 처치된 후라 아무 빛도 나지 않지만 싸울 때는 몸을 태우는 것 같이 발광한다.
물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그런 마수인 줄 아니까.
틈이 생긴 깡통 안으로 푸쉬시식. 요란한 소리를 내며 증기 같은 게 새어 나왔다.
‘이거 손 넣어도 되는 거냐?’
잠시 의심했지만 도망칠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철 조각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텅 비어있을 거란 생각과 다르게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느껴졌다.
묘한 오싹함을 느끼며 팔을 조금 더 안 쪽으로 움직였다.
딱딱한 전선 같은 게 만져진다.
손으로 모양을 따라가니 산호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곳도 있고, 나무 곁가지처럼 쫙 펼쳐진 부분도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매끈하다.’
정체를 확인할 수 없으니 자꾸만 끔찍한 쪽으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머릿속으론 자꾸만 초침이 똑, 딱, 똑, 딱 움직였다.
지금까지 걸린 시간은 최소 20초.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있는 힘껏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서 걸리는 뭉툭한 감각과 함께 미지근한 무언가를 붙잡았다.
만져지는 각진 모양.
‘이게 분명하다.’
힘주어 끄집어내니 물체를 붙잡고 있던 어떤 것들이 우두두둑.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손과 함께 보라색 정육면체 모양이 딸려 나왔다.
그 아래 너덜너덜한 붉은 실들이 마구잡이로 엉켜져 있었다.
“우웩.”
혈관이 억지로 뜯어진 것처럼 처참한 비주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동력원을 얼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이상한 탄 내 같은 게 났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재빨리 인벤토리에 처넣고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고요하다.
송출 됐을까?
긴장한 어깨가 바짝 솟았다.
“따라와요. 천천히.”
까앙! 털거덕, 툭.
동력원을 완전히 잃은 페인트의 몸이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깐 살피던 윤산영이 뒤를 바짝 쫓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헌터들이 사냥하고 있는 공간으로 섞여 들었다.
히든 보스의 방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달성되어야 했다.
일단 첫 번째가 이 동력원.
그리고 두 번째는.
‘입구.’
입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정말정말 안타깝게도.
‘보통 입구는 항상 열쇠 근처에 있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뭔가 하나 발견한 후에는 여긴 끝났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게임하는 인간들의 심리였다.
그리고 그런 심리를 농락하듯 애카의 중요한 입구는 항상 열쇠를 발견한 그곳.
거기에 있는 게 국룰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시 페인트의 보스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냥 그대로 가면 되지 않냐? 싶겠지만 잠깐 빠져나온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약 동력원을 꺼내는 순간 자체는 들키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그 보스방 안에 있는 장면이 잡혔다면 ‘쟤네 뭐해?’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있도록.
그리고 서두르지 않아도 나는 이미.
‘입구를 봤다.’
무려 페인트의 시체를 뒤지기 전부터.
‘5분. 아니, 10분만 기다리자.’
성급히 움직이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이 중요했다.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마수를 한 대 후려쳤다.
【실시간 랭킹 순위 : 1636 (↓28)】
***
“갑니다.”
“네.”
윤산영은 굳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다닥.
우리는 조심스럽고 재빠른 걸음으로 어느 대리석 기둥 앞에 섰다.
천사나 장미, 뱀이 조각된 이 대리석 기둥은 선발 차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배경 장식이었다.
단 한 가지.
천사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후우…….”
이제 진짜 시작이다.
눈을 감고 있는 천사 조각 앞에, 품에 숨기고 있던 동력원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밝은 보라색이 아주 잠깐 반짝 빛나더니 손안에서 설탕처럼 파삭 부서졌다.
가루가 된 동력원의 잔해가 바닥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알 수 없는 정사각형 문양이 그려졌다.
“이리 올라와요.”
내 손짓에 윤산영은 서둘러 주문 위를 밟았다.
눈앞으로 허여멀건 한 글자들이 지지직거리며 떠올랐다.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잃어버린 것은 몇번이고 맹세를 해도 지키지 못하며 때때로 우리 위를 날아간다.』
“수수께끼인가……. 풀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윤산영이 글 아래 깜빡이는 숫자패드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애카에는 가끔 이렇게 퍼즐 형식으로 통과할 수 있는 미궁이 존재했다.
녀석도 그 존재를 알고 있는지 몇 번이나 문장을 읽으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미래? 현재? 과거?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니 관념적인 단어만 남아 둥둥 떠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런 윤산영을 머쓱하게 쳐다봤다.
가볍게 코를 한 번 훔치고 손을 놀렸다.
[7241152].망설임 없이 숫자를 입력하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고 누르시는 겁니까?”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주문진이 반응했다.
점점 더 강해지는 보랏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주문에서 떨어져 나온 문자들이 허공에 둥둥 떠 연기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모를 수가 없지.’
애카의 퍼즐 문구는 많아도 50개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첫 문장만 봐도 답이 딱 떠오르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윤산영은 경외롭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억지로 한번 입꼬리를 올려 웃고, 로봇처럼 딱딱한 얼굴로 설명했다.
“이건 다 시간에 대한 명언들이에요. 근데 답은 숫자로 넣게 되어 있으니까, 시간을 ‘ㅅ’, ‘ㅣ’, 이런 식으로 분해한 다음 한글 자모 순서대로 입력해본 거예요.”
애카에서는 아주 흔한 방식이었다.
윤산영은 내 말에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놈을 위한 설명은 아니었다.
‘혹시나 송출되고 있을 화면을 위해서.’
근데 난 연기는 안 되겠다.
경련이 이는 광대를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딛고 있는 바닥이 갯벌처럼 물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는 바닥을 뚫고 주문 아래에 허벅지까지 잠겨 있었다.
낯선 감각에 놀란 윤산영이 조금 버둥거렸다.
놈의 상체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해줬다.
윤산영이 조금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감사…….”
고맙긴 뭘.
더 힘을 줘 주문진 안으로 놈의 몸을 팍팍 밀어 넣었다.
미끄럼틀 타듯 끌려 내려간 윤산영의 마지막 엄지마저 문양 안으로 사라질 무렵.
흡. 숨을 참고 다이빙하는 것처럼 상체를 숙여 뛰어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