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60
60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키보드 소리.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화면들이 바쁘게 빛났다.
“확인됐나?”
그 앞에서 머그잔을 든 여성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질문해놓고 답을 들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느긋한 숨결로 커피를 후후 분다.
흰 가운 위에 걸친 ID카드 목걸이가 달랑거렸다.
채널대책본부 포탈분석국, 연구팀장 이소니.
서류철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흰 가운의 남자가 그 앞에 섰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직. 아직 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이소니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호로록. 액체가 공기와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뭐 해?”
“네?”
“아직이면 가서 일을 해야지.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니?”
“아, 네, 네!”
후다닥 다시 뛰어가는 남자를 보며 이소니 팀장은 안경을 한 번 추켜올렸다.
데이터를 뽑아내고 있는 기계 화면은 알 수 없는 숫자들의 배열로 치솟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그 속으로 고정되었다.
출렁이는 파동 데이터로 시선이 옮겨졌다.
모든 포탈에는 전조 현상이 존재한다.
과학적으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발산되는 폭발적인 에너지, ‘에테르’.
에테르는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광파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신호.
포탈분석국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전용 스킬이 ‘관찰’, ‘분석’, ‘조사’ 등인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최고연구기관.
데이터를 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석국에서는 에테르 신호의 위치로 미리 포탈을 감지하고,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유사한 포탈의 유형, 등급을 뽑아내 예측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긴급 문자를 보내는 방식이 몇 초 내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늦었단 말이지.’
가끔 전산 체계가 꼬여 문자 발송이 늦어지는 오류는 있었지만 그건 확인이 가능한 경우였다.
이번엔 오류도.
기계의 문제도 아니다.
단순한 기우일까.
미지의 가능성으로 빨려 들어간 까만 눈빛이 서서히 침잠했다.
여전히 화면에서 떼지 않은 시선으로 이소니 팀장이 짧게 물었다.
“현 상황은.”
“열차는 낙성대에서 사당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시한 대로 정차 없이 달리는 상황이고, 내부로 연결을 시도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통신이 모두 끊어진 상태입니다.”
“…… 복구되면 바로 보고 올리도록.”
눈썹을 한번 까딱인 그녀가 자리를 떴다.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인사하던 연구원은 지도가 띄워져 있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열차에 찍어놓은 GPS 신호가 점점 더 빠르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
【제한 시간이 경과 되었습니다.】
【포탈 난도 재분류 중…… 】
【포탈 등급 변경을 알립니다. 결과: ‘B+’】
【상태 및 세부 사항이 조정됩니다.】
【】
“노오오오우!”
그리고 윤채희가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미친 듯이 몰아친 덕분에 8번 칸의 절반을 지나, 어느덧 9번 칸 연결통로 앞까지 도달했지만.
‘등급 업이라고.’
늦었다.
새애애액―!
슬러그가 위협적으로 긴 몸통을 들어 올렸다.
바닥과 맞닿은 배 부분에 칼집을 낸 것처럼 일정하고 시꺼먼 구멍들이 뻐끔거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늘 같은 돌기들이 돋아있다.
틈 사이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물리면 그냥 죽는 거야.’
잠깐 따끔하고 말 수준이 아니라 슬러그 전용 프리패스 수혈팩이 되는 거라고.
뼛속이 저릿하도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뒤쪽으로 넘어갈수록 만나는 건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라 살아남은 슬러그들.
한마디로.
‘처음보다 강하다.’
보기에도 튼실해 보이는 저 묵직함은 물론이고.
거대 슬러그들은 잡아먹은 것들의 피통, 방어력, 공격력 등을 조금씩 흡수한 상태였다.
같은 등급에 같은 마수 종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치는 천차만별.
결국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작은 슬러그들보다 시간이 배는 걸렸다는 소리였다.
“빛의 메아리!”
지금처럼.
마른걸레 쥐어짜듯 스킬들을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확 빠져나간 마나 덕분에 몸이 저절로 굽어들었다.
갈비뼈 근처로 찌릿한 통증이 스쳤지만 죽기살기로 버텨냈다.
등급이 한 단계 더 올라간 순간 선택지는 몇 개 존재하지 않는다.
몸에 무리가 간다는 게 시시각각으로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공격 마무리쯤 등급이 바뀌어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이를 악문 채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광염!!”
푸화악!
쏟아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슬러그가 물풍선 터지듯 폭발했다.
질척한 조각들이 지하철 좌석 위로 떨어지며 철퍽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창에 범벅으로 튄 노란 진액들이 흘러내렸다.
‘드디어.’
9번 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쿠구구구.
멈추지 않고 역을 지나친 열차가 다시 검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연결통로 안쪽을 살폈다.
찌그덕.
슬러그가 기어가며 남기는 점액질 소리가 간간이 울렸을 뿐.
포탈이 터진 근원지답지 않게 고요했다.
…… 아니, 고요한 게 아니라.
‘한 마리밖에 없다.’
뱀처럼 똬리를 튼 슬러그의 몸통이 눈앞으로 느리게 지나갔다.
저 좁은 칸 안에 얼마나 구겨 넣은 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존재감을 알려주듯 터질 것처럼 문을 꽉 채운 노란 덩어리.
거대함과 위압감의 수준이 앞 놈들과 달랐다.
이놈을 죽이면 끝난다.
그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제 발로 들어갈 수밖에.’
긴장감에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인생이 다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라지만, B등급에서 모조리 처리하겠다고 했던 야심찬 각오는 처참히 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마냥 시간을 질질 끌 수도 없었다.
여기서 내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저승행 급행열차.’
물론 내가 아니라 앞 칸에 몰려 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야 다른 슬러그들로 앞이 꽉꽉 막혀있었으니까 이 거대한 놈도 그럭저럭 갇혀 있었지.
여기서 물러서면 그냥 먹이 직통 배달 수준이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살려야 할 이유가 있다.
‘여기까지 개고생해서 왔는데 다이아라도 얻어 가야 될 거 아니냐, 윤채희.’
짧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침착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틈을 기다렸다.
보인다.
꼬리가.
“마나 파도.”
방심하다 파동을 맞은 마수의 꼬리가 사납게 요동쳤다.
단순한 움직임인데도 부딪치는 벽면마다 충격으로 무게 중심이 휘청거렸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몸을 밀고 들어갔다.
새애애액.
기묘한 연기를 내뿜는 슬러그의 주둥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제는.
‘할 수밖에 없다.’
고통이 강해질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목표물에 고정된 시야가 점차 좁아졌다.
내 목표는 오로지.
“죽어!!”
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자신감이 무색하게.
【‘빛의 메아리’를 사용하기 위한 마나가 부족합니다.】
【‘광염’ 스킬 사용 시간이 ‘8초’ 남았습니다.】
“옘병.”
소리치며 지팡이로 슬러그의 아가리를 내리쳤다.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힘법?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살고 보자는 본능이 날린 펀치였다.
사유는, 지금까지 사용한 딜 사이클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에.
‘염화가 아예 안 먹힌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본래, 나에게 사이클을 짠다는 의미는 단 한 순간도 스킬 쿨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비록 그게 아주 약하고, 1만큼의 대미지밖에 들어가지 않는 공격이라고 하더라도 1이 열 번 들어가면 10이고, 백 번 들어가면 100이지.
넣을 수 있는 딜을 손실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기초 스킬이라 그런가?’
날리는 불덩이가 슬러그의 피부 위에서 흩어지기 일쑤였다.
등급이 높은 마수일수록, 고위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벌써.’
안 그래도 마나가 아까운 판에 아예 먹히지도 않는 스킬을 사용하는 건 큰 손해.
그러나.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라고!!”
잠시 움찔거린 놈은 전혀 타격이 없다는 것처럼 다시 매섭게 아가리를 벌리고 돌진해왔다.
사이클이고 뭐고 다시 짤 시간이 없다.
훨씬 민첩하고 훨씬 강력해진 공격을 막아내기도 급급했다.
게다가, 서서히 주변을 조여 오는 슬러그의 몸통.
‘갇히면 끝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온 감각을 예민하게 깨워야 했다.
여차하면 8번 칸으로 물러나기 위해 한 걸음 빼둔 뒷발.
하지만 이건 최후의 방법일 뿐이다.
“빛의 메아리!!”
핑 도는 현기증도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코 밑으로 뭔가 뜨끈하게 흐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기어이 피를 보는구나…….”
허탈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피범벅이 된 손등을 바지춤에 닦을 새도 없었다.
체력 물약을 아무리 퍼붓는다 해도 담는 그릇이 깨지면 별 수 없다.
한계까지 몰아친 이모아의 육체가 드디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입안으로 느껴지는 끈적한 비린 맛.
몇 번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꿀꺼덕.
목 뒤로 넘어오는 피를 체력 물약과 그냥 삼켜 버렸다.
온몸이 시뻘겋게 변하든 말든.
‘절대 멈출 수 없다.’
***
“어우.”
“어떡해…….”
2번 칸과 3번 칸이 맞닿아있는 연결통로 사이.
열차가 일직선으로 운행되는 구간마다 헌터와 거대 마수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피와 진액이 낭자한 전투였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
두려움.
분노.
살기 위해 꽉꽉 압축된 사람들 중에서도, 불행하게 가장 앞 열을 차지하게 된 그들은 계속해서 탄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그사이에 각성자 한미래가 파묻혀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단 한 순간도 이모아를 놓친 적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 오전 9시 30분.
약속했던 역사 내부에 도착했을 때부터.
관조자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평온한 척하고 있지만,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그녀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한미래는 떠올렸다.
살기 위해 밀물처럼 쓸려나가던 인파 속.
그 거센 파도를 묵묵히 거슬러 올라가던 유일한 얼굴을.
자기가 꼭 해야 한다는 것처럼.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단단하고 결연한 시선을 마주친 뒤 괜한 반발심이 솟구쳤다는 것도.
그래서,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저 애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었다.
네가 정말 ‘아무 도움 없이’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냐고.
현실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 헌터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손가락질한다면, 맞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미래가 ‘헌터’의 이름을 단 건 각성의 자격과 명예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장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 먹을 쌀을 사고, 오늘 누울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그러나.
“…… 인벤토리.”
주변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작은 속삭임이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그곳에는 아직 쥐지 않은 한미래의 검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한발 앞서 있는 등으로 꽂혔다.
발걸음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