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81
81화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자조 섞인 웃음이 입가로 샜다.
저렇게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경계하는 윤산영의 표정은 또 오랜만이었다.
처음이 언제였더라.
‘내 목에 칼 들이밀었을 때였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통성명 타임이었다.
떠올려보면 그땐 윤산영한테 속죄 빠돌이라느니, 구원에 미친놈이라느니.
속으로 욕을 왕창 했었는데, 이번엔 나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짓을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지른 일을 감당 못 해 죄책감에 허덕였고.
온몸 던져 사람 구하는 데 미쳤었고.
…… 윤산영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말을 시리게도 실감했다.
하물며 얘는 이 행성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니 곱절이 뭐야.
수천 배는 더 무거웠을 것이다.
자신이 고른 찰나의 선택이 나아가는 방향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마음이.
매끈한 콜라 캔을 만지며 의미 없는 손장난을 쳤다.
그냥 이래서 그랬다. 그래서 저렇게 됐다.
다 이해할 수 있는 윤산영에게는 팩트만 전달하면 될 일인데도 겁이 났다.
내가 후회하는 것과 남의 입으로 질타받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쳐다봤다.
새카만 바깥.
빛에 반사된 윤산영과 나의 모습이 어둠 위로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아보려고 했어요. 그리고 장렬히 실패.”
윤산영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바닥으로 시선을 처박았다.
서두를 떼기까지 마음먹는 게 어려웠지, 그다음은 멈출 수 없을 만큼 쉬웠다.
“정해져 있는 미래랑 달라지긴 했는데 더 큰 일이 됐고…… 무서웠어요.”
숨길 게 없는 가장 날 것의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얻어맞고, 구르고, 녹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것도 영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좀 늦게 깨달았지만.”
“…….”
“두 번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도와달라고 한 것도 이거 때문이고.”
다 털어놓자 속이 뻥 뚫린 것처럼 개운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아무 계산 없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표현한 건.
그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이겸도, 구서복도.
주서윤, 권해이도 나를 아껴준다는 건 가슴에 와 닿게 알고 있지만 무슨 기분이었냐면…….
이상하게 위로 같았다.
어떤 것도 속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는 그대로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하지만 여전히, 의식적으로 윤산영의 눈을 피하며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실망했어요?”
그가 말하기 전 선수 쳐 물었다.
나도 알고 있다는 일종의 방어막.
네가 여기서 고개를 끄덕여도, 그럴 만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방법.
윤산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다 불어 터진 면발 몇 가닥을 휘젓는 나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을 뿐. 그 침묵이 초조했다.
‘욕할 거면 얼른 바가지로 하든가.’
괜히 속으로 툴툴대며 주머니로 손을 쑤셔 넣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이번만큼은 윤산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가질 않았다.
죄지은 범죄자처럼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고개를 떨궜다.
뭐라고 할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상상 속 윤산영에게 여러 질책의 말들을 시켜 봤다.
실망했다.
오만하고 교만했다.
자기도 못 구하면서 누가 누굴 구하냐. 실패했다고 말하면 다냐 등등.
아니. 그중에 진짜는 사실 아무 말도 안 하고 싸늘하게 대하는 게 더 상처…….
“아니요.”
윤산영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질타.
혹은 원망의 말투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더니 앞에 놓인 초코 우유를 한입 쪽 빨았다.
딱딱하게 굳었던 사람치고는 너무 초연한 반응이라 괴고 있던 팔꿈치가 휘청거렸다.
혹시 나를 달래기 위해 말만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뜯어 보듯 지그시 눈을 살폈지만.
‘…… 진짜다.’
윤산영은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표정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무조건적인 믿음에 나는 좀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뼛속 깊숙이 반성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성공이다.
이 세계를 똑바로 직시한 적 없던 나를 또다시 부끄럽게 만들고 있으니.
‘이게 욕보다 더 심한데.’
옷자락을 쥐고 팔락였다.
확 열이 오른 덕분에 몸이 아주 뜨끈했다.
부산스레 움직이던 손을 딱 멈추게 만든 건 윤산영의 다음 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아 님 때문도 아니구요.”
“…….”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
윤산영의 시선이 내 손등을 더듬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윤산영의 이야기처럼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팠고, 괴로웠고, 무서웠고.
겪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
고통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만 견뎌온 시간의 축적이 주는 무게감이 달랐다.
윤산영은 뭘 버티며 살아가는 걸까.
나는 짧게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오.”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얼굴이 생경한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이 차원에 온 뒤 한 번도 불려본 적 없을 이름.
소실되었던 그리움이 서서히 눈으로 번지는 걸 지켜봤다.
처음 보는 표정.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윤산영이 아니라 리오였다.
온갖 죄악감과 의무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딱딱하게 뭉쳐진 윤산영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었던 리오.
그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숨도 쉬지 못할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한 사람 정도는 진짜 이름 불러줘도 괜찮잖아요. 기분 나쁘면 어쩔 수 없고.”
변명하듯 황급히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윤산영. 너도 놀랐겠지만.
‘미쳤냐? 거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화들짝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윤산영의 전 차원 이름이라니.
나대지마, 윤채희. 나대지마!
시공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소름에 괜히 과장되게 어깨를 휘둘렀다.
뻣뻣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그럼 이제 정리를 해보실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실상은 윤산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삐거덕대는 팔다리로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쏟아붓고, 차곡차곡 쓰레기들을 분류해 버리고, 너무 지저분한 테이블 위를 휴지로 꾹꾹 눌러 닦는 동안.
‘안 움직인다.’
윤산영은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고 멈춰 버린 로봇 같았다.
그렇게 싫었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가요.”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따라오기는 해서 다행인데, 걷는 포오즈가 영…….
‘진짜 뇌가 정지했나 본데.’
윤산영의 팔다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코를 한번 슥 훔쳤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깰 방법은 단 하나.
‘튀자.’
“이제 깜깜해졌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혹시 한 번 더 도와줄 수 있으면…….”
덥썩. 브리핑하던 팔이 붙잡혔다.
휙, 붙잡는 힘에 몸이 뒤로 돌아가고.
“불공평합니다.”
윤산영.
아니, 리오가 톡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가로등 빛이 그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저도 알려주세요.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이름.”
코끝으로 찬바람 냄새가 스쳤다.
“그냥 이모아라고 불러도 되는데.”
어색한 농담에도 윤산영은 웃지 않았다.
이게 맞는 일인가?
괜찮은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옷소매를 꼭 붙잡은 손을 그냥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와하하!
골목길 사이에서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골목.
익숙한 계절 냄새.
그리고 윤산영.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윤채희.”
윤채희예요, 내 이름.
그 순간, 나는 아마도 웃고 있었던 것 같다.
***
펼쳐진 노트 낱장 위를 펜촉이 벅벅 긁어댔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었고.’
선을 마구잡이로 직직 그었다. 분노를 감당하지 못한 종이가 얇게 찢어졌다.
거칠게 내려놓은 볼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1부터 13까지.
개중에는 윤산영을 데리고 다닌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지만 여전히.
“다 아니야아아악!”
미친 과학자처럼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존 서사에 관련이 클수록 변동 폭이 크고, 다이아를 많이 준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내 오른 등급에 맞춰 등급 포탈 보상이 줄어든 걸 보니 재분류는 현재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그때그때 수준에 맞춰 변동이 산정된다는 것도 알아냈는데!
도대체 왜.
‘잠실 참사는 다이아를 못 받았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쏙 빠져 시간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 것 같은 기분.
손에서 다 빠져나가는 모래를 움켜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수 없는 실험으로 평일이고 주말이고.
하교 후고 등교 전이고 포탈을 깨부수며 발견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대사건이었다.
스킬 숙련도가 쌓이는 폭이.
‘지나치게 적어졌다.’
평소에는 거의 투명도 30% 정도로.
시야 끝쪽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숙련치 상승 알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불과 어저께.
‘…… 이게 뭐야?’
어쩌다 발견하고 나서 눈을 찢을 뻔했다.
【Lv.8 마력 친화: +0.00031%】
0.00031?
‘미쳤나?’
아무리 잡는 마수와 등급 격차가 심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극한의 소수점까지 찍히는 숙련도는 문제가 있었다.
마력 친화는 패시브 스킬이니까 혹시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다른 스킬들도 사용해 봤지만…….
【Lv.9 마나 파도: +0.00006%】
【Lv.5 빛무리: +0.0035%】
【Lv.2 화우: +0.072%】
레벨 2짜리 화우까지 저 정도 숙련치를 얻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급 스킬은 캐스팅도 쉽지 않고, 그만큼 수련하는 게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라진 상황은 단 한 가지였다.
‘B- 등급.’
B-등급을 찍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나타내는 바가 확실했다.
움직이는 건 훨씬 자유로워졌는데, 뭔가를 옥죄듯 내부에서 막혀있다는 느낌이 이 정도로 강하게 든 적은 없었다.
아주 대놓고 성장을 막겠다는 것처럼.
‘자물쇠.’
그 저주가 드디어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구도 이모아가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혀로 입 안쪽을 쓸어내렸다.
B등급.
처음 목표로 잡았던 최소 수치이긴 하지만,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을 완벽히 대비하기에 역부족인 건 당연했다.
A, S급의 각성자 앞에서 이 몸뚱이는 아직 파리 목숨이었다.
물론 그 안에 내가 들어있으니 좀 다르기야 하겠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장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제 남은 건 진짜 다이아 뿐인데.’
묶여있는 과거를 뜯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최대한 거슬리는 전력들을 해체시켜 놓거나.
“하아…….”
답답한 얼굴로 눈썹을 문질렀다.
무의미한 손놀림으로 인벤토리 창을 여닫았다.
[보유 다이아 : ◇114,300]많이 모으긴 모았는데, 30만 다이아까지는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노가다로 하루에 B, C 포탈 한 5개씩 돌면 생일 전까지는 될 것 같기도 한데…….
‘어디 다이아 뚝 떨어질 큰 미션 하나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신문을 뜯어 살폈다.
내 유일한 희망.
다이아 수급처!
그 순간, 처음 보는 지면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사각 칸 안에 커다란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문구를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