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83
83화
‘깜짝 놀랐네, 이씨…….’
굳은 어깨를 두어 번 털었다.
가로등을 피해 어둠 속에 스며든 이태환은 눈빛만이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명암.
놈들의 이름값을 눈앞에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빛이 있다면 반드시 존재하는 그림자.
그 속을 가장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니는 집단.
놈들이 이모아를 파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신경 쓰고 있던 사실이었다.
유달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터.’
그 명암 간부를 쫓을 때부터?
아니면 이 포탈에 진입했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 미행.’
하고 있었나, 훨씬 전부터.
뒷걸음질 쳐 경계태세를 취하자 암흑 속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명백한 조소.
새까만 인영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 계속 몸을 무르는 나를 가지고 놀기라도 하듯이, 느릿하게.
이태환은 거리낄 게 없다는 사람처럼 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싸워 보자고?”
“…….”
“말 좀 하지, 아까부터 재미없게.”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태환을 노려봤다.
저런 또라이는 살살 웃다가도 언제 태도를 바꿔 달려들지 모르는 부류.
많이 등급이 올랐더라도 B급은 B급일 뿐, 내 한계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놈과 맞붙어 이길 확률은 솔직히 말해서 제로에 가까웠다.
이태환도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터.
그렇기에 더 위험한 존재였다.
한참을 장난치듯 걷던 그가 가로등 빛 정중앙에 멈춰 섰다.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어깨를 으쓱거리고 실망스럽다는 손짓을 취했다.
“진짜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쫓아다닌 거야? 네 그 잘난 수호 기사들도 하나도 없고?”
잘난 수호 기사?
얼핏 구서복이나 윤산영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건 찰나일 뿐이었다.
‘나한테 그딴 게 어디 있다고.’
미행은 개뿔.
아무것도 모르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입매가 비틀렸다.
우와, 진짜 겁 없네. 이태환은 나를 보며 혼자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개도 칭찬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법한 말투였다.
놈이 머리를 한번 가볍게 쓸어 올렸다.
“…… 혼자 나대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실실 웃던 장난기를 싹 거둔 음산한 표정.
지팡이 끝을 이태환의 이마 위로 겨눴다.
그는 전투태세를 갖춘 나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환기하듯 박수를 짝짝 쳤다.
“아니, 좋아. 난 그런 거 좋아해. 되게 하아얗고, 순수하고. 자기가 밟고 자란 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순진함 있잖아.”
“…….”
“그런 거 망칠 때 되게 기분 좋거든.”
놈이 비릿하게 웃었다.
“너도 해본 적 있지? 눈 왕창 내렸을 때 처음으로 딱 밟는 그런 기분. 더러운 신발로 짓이기고, 찢어발기면 흙투성이가 돼가는 모습.
자기는 고결하고 깨끗하다고 믿는 것들이 내 발아래서 더럽혀질 때…….”
그 순간이 얼마나 짜릿한지.
이태환은 꿈결처럼 말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금이라도 가고 싶다고 빌면 조용히 보내줄게, 화랑 공주님.”
깔아보는 이태환의 눈과 내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살벌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놈에게 조준했던 지팡이를 천천히 바닥으로 떨궜다.
이태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가볍게 웃고는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거 아주 웃긴 새끼네.”
기가 차다는 듯 씹어 뱉은 말에 이태환의 몸짓이 우뚝 멈췄다.
듣자듣자 하니 더 이상은 참아줄 수가 없었다.
인터넷이며 사람들이 떠드는 이모아의 호칭?
상관없었다.
이겸만 하더라도 (이)겸(황)제부터 시작해서 왕자, 구원자, 내남친, 아기이순신…….
가지각색 별명으로 빈번히 불리는 판에 이모아라고 다를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렇지만 이태환 같은 부류가 말하는 ‘화랑 공주’.
그게 이모아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못 하는 투명인간의 범주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오로지 모욕이었다.
이겸 동생. 화랑의 딸.
그 딱지를 떼면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조롱.
여전히,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한낱 미물의 움직임이라는 멸시.
그걸 못 알아 처먹을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무시도 유분수지.’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같잖음? 역겨움?
놈에게 건넬 비웃음도 아까웠다.
지팡이를 위로 던졌다 받아내며 가벼운 손장난을 쳤다.
무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이태환의 시선을 옭아맸다.
“순수에 고결에 공주…… 난리 났네. 어릴 적에 디즈니 만화 좀 많이 보셨나 봐.”
턱을 치켜들며 이태환을 내려다봤다.
“여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데.”
놈의 얼굴이 서서히 싸하게 굳어 내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이만큼 보여줬는데도, 모자라다.
이모아는 아직도 이겸의 그늘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손가락을 뚝뚝 소리 나게 꺾었다.
그러나 윤채희에게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길 순 없겠지만, 반대로.
‘지지도 않을 자신이.’
이태환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였다.
놈의 머리 위로 검은 연기가 일순 뭉쳐졌다가 흩어졌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전용 무기, 모로스.
하필이면 또 낫이 무기라 사신이니 저승사자니, 사람들이 이태환을 향해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그래 봤자.
‘그거 빼면 그냥 흑염룡이지.’
카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지팡이와 낫이 부딪혔다.
쇠막대기처럼 양 끝을 붙잡고 버텼다.
급발진하는 엔진처럼 달려든 이태환은 퍼스널 스페이스도 없는지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 근육이 곧 끊어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온다.
압도적인 차이. 그건 간과할 수 없다.
지직. 지지직.
신발 밑창이 돌바닥에 갈려 조금씩 몸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네.”
아랫사람을 평가하듯 단조로운 말투.
답하지 않고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더니 이태환은 예의 그 싸가지없는 눈웃음을 치고 나를 뒤로 떠밀었다.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곧장 귓가에 스치는 사슬 소리.
차르르륵―!
가볍게 땅을 박차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밑으로 쏟아진 머리칼 사이를 사슬이 스치고 지나갔다.
등허리를 노린 날이 매서운 파열음을 내며 공기를 갈랐지만, 공중에서 비튼 몸을 아슬아슬하게 베지 못하고 흘러나간다.
이태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놈의 손안에서 검은 전류가 파직 거리며 튀었다.
동그란 구체로 뭉쳐져 주변의 바람을 미약하게 빨아들였다.
‘카오스.’
저건 맞으면 좀 문제가 생긴다.
아직 재미가 있는지, 야구 선수처럼 제구 자세를 취하는 놈을 보며 이를 아득 갈았다.
‘놀고 있네.’
콰앙―!!!
나를 맞추지 못한 암흑 구체가 날아간 궤도 그대로 처박혔다.
등 뒤의 벽돌담이 와르르 무너졌다.
굉음에 주변 단독 주택이나 빌라 창문에 하나둘 불이 켜졌지만, 직접 내다보거나 나와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침묵에서 느껴졌다.
그저 이 소란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랄 뿐.
창문 너머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태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아무도 안 도와줘. 그러니까 도망가라고 했을 때 갔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놈의 움직임이 점점 더 흉포해졌다.
하지만.
‘뭘 누가 자꾸 도와주고, 구해주고, 기사고 나발이고.’
누가 처맞아줄 줄 알고.
계속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는 스킬들을 보며 이태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희희낙락 장난기를 머금던 공격들은 끝이 날카로워지고, 뭔가 계산하는 것 같은 그 얼굴을 마주치며 묘한 쾌감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태환은 자기 전력의 반도 사용하지 않았다.’
놈은 고작 몇 개의 흑마법과 근접 전투로만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강령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계약 소환수를 꺼내 공격해올 법도 한데, 이태환은 의도적으로 움직임을 최소화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죽일 마음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닌 거 같은데.’
여전히 피부가 찌릿찌릿하도록 살기가 맞닿았다.
그에 비해 하는 공격들이 초라했다는 소리였다.
‘왜?’
이태환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의문스러웠다.
처음에는 놈이 이모아를 상대하면 벌어질 파장에 대해 가늠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명암의 총알받이고, 행동 대장이라고 하더라도 물밑.
저 바닥에서 행동하는 놈들.
반면 이모아는 뜨거운 감자였다.
잘못 물었다간 명암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질 확률이 높은 떡밥이라는 소리였다.
여러모로 불리한 점밖에 없는 매치.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태환인데.’
단순한 경고치고는 과민한 행태였다.
갑작스러운 놈의 등장으로 흐려졌던 논점들이 뚜렷해지기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이 포탈이 명암 놈들과 엮여 있다는 걸 알고 온 것도 아니고.’
본 목표는 실종 사고의 당사자를 구해다 놓는 것뿐이었다.
이태환이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을 우발적인 전투.
덤덤한 살인과 살아 움직이던 시체.
허공에서 흔들리던 가운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퍼지는 검은 연기가 흉통 사이를 가른다.
이미지들이 겹쳐져 베를 짜듯 하나의 직조물이 된다.
지금 명암은.
‘찔리는 게 많다.’
그것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별 게 아닐 정도로.’
이 새끼들이 뭘 더 숨기고 있기에.
이태환을 이대로 대로변까지 유인해 빠져나가려던 계획은 잠시 철회였다.
지팡이 끝에서 쏘아 보내진 빛이 짙은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긴장감에 바짝 마른입. 울대가 아프도록 침을 한 번 크게 삼켰다.
그래 봤자 순전히 내 추론에 의한 전제.
이 모순들을 확실하게 만들어줄 방법은 한 가지였다.
‘빈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이태환에게 목덜미를 내어주는 일.
벽을 타고 위에서 내리 꽂아 덤벼드는 놈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고, 맞는다 하더라도 중상을 면할 수 있게 몸만 살짝 옆으로 빗겼다.
움직이다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 게 포인트였다.
뺨 위로 차디찬 숨결이 스쳤다.
느껴지는 죽음의 냄새.
그리고.
‘이거 봐라.’
이태환이 지나쳤다.
뻔히 보이는 약점을 노리지 않고 위협하는 것처럼 팔만 휘둘러댄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태환은.
혹은, 명암은.
“너 나 죽일 생각 없네.”
낫을 쥔 놈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동에 흔들린 날이 아슬아슬하게 목 끝을 스쳤다.
살짝 베였는지 살갗이 따끔거렸지만 피하지 않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척도 하지 않는 이태환과 눈을 마주쳤다.
눈꼬리가 휘어져라 놈이 웃었다.
“에이, 눈치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