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84
84화
허황된 연극은 끝났다는 것처럼 이태환이 물러섰다.
소환을 푼 모로스가 재처럼 하늘 위로 흩날렸다.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시간 끌기였구나.’
이태환의 목표는 처음부터 그거 하나뿐이었구나.
깨닫자 허탈해졌다.
너무 많이 알고 있던 정보가 오히려 독이 됐다.
놈이 노리는 게, 당연히 나라고 생각해서.
조금만 천천히 파악했다면 알 수 있었던 이유들을 처음부터 배제했다.
눈앞의 위험에 시선이 뺏겨 저지른 명백한 실수.
비릿한 맛이 날 정도로 깨문 입술을 보며 이태환이 킥킥댔다.
“너무 실망하지 마. 네가 쫓아갔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니까. 대신 걔는 책임을 좀 물어야겠지? 씨발, 초보도 아니고 쪽팔리게 뒤를 밟히고 말이야.”
싸늘함을 머금고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이런 거한테’, 라는 말이 내뱉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던 차.
어깨가 꽉 붙들렸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찌릿한 소름.
미친 것처럼 펌프질하는 심장과 다르게 머리는 어느 때보다 냉정해진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내가 ‘모른다’는 걸 이 자식한테 굳이 떠들어 댈 필요는 없었다.
눈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롭게 노려보면서도,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이태환이 낮게 웃었다.
이 더러운 굴복감.
너무 늦었다는 패배감이 나를 뒤덮었다.
그러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여기까지 오니까 주제 파악을 하네.”
그가 느릿하게 이마 정중앙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겸.”
내뱉는 이름에 주먹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주서윤, 구서복, 권해이, 신하나…….”
“……
“윤산영.”
의도치 않아도 그 이름에 심장이 벌컥 뛰었다.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씨익 웃는 이태환의 얼굴 가죽을 당장에라도 찢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오 사장한테까지 가서 내 뒤를 캐는 놈들이 윤산영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이모아가.
그러니까, 내가 윤산영을 ‘왜’ 돕고 있냐는 것.
‘알 리가 있나.’
그 이유를 알았으면 명암이 윤산영을 살려둔다는 선택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더 각성자들의 카르텔을 공고히 세워 민간인들을 지배하고, 세계의 포식자가 되겠다는 게 이 쓰레기들의 목표인데.
‘이 세계를 박살 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여태껏 윤산영을 가만히 뒀다는 건 아직까지 건드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뜻의 방증이었다.
위험도를 모른다는 것.
즉, 이 새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덤덤함을 되찾은 얼굴을 이태환이 빤히 들여다봤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낮은 침음을 내다가, 순식간에 허리를 낮췄다.
뺨 옆에 얼굴을 딱 붙인 채 속삭였다.
“한미래.”
걘 좀 쓸 만한 거 같던데.
웃음기 뒤에 숨긴 경고.
잘게 내쉬던 호흡이 멎었다.
이태환은 내 등을 상냥하게 토닥이며 조언이라도 하듯 말꼬리를 늘였다.
“너 되게 이상한 애들이랑 많이 다니더라. 친구 좀 가려 사귀지. 오빠 맘 찢어지겠다.”
놈의 차갑고 긴 손가락이 목덜미에서 벌레 다리처럼 움직였다.
“공주님은 저 탑 꼭대기에, 주변에 아무도 없이 소중히 모셔져 있는 게 제일 잘 어울리잖아. 알지? 그런 그림.”
“…….”
“오늘을 두고두고 기억해.”
놈이 낫에 살짝 베인 상처를 손톱 끝으로 세게 긁었다.
소리도 못 지르고 고통에 허리를 굽힌 사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고요해진 거리.
얼굴을 후려치는 찬바람.
불 꺼진 창들은 말이 없다.
새카만 어둠에 혼자 남아 이태환이 짓눌렀던 이마를 매만졌다.
목이 화끈거렸다.
아…….
“씨발.”
빠악!
박 터지는 소리가 나도록 벽돌 위로 이마를 부딪쳤다.
순간 골이 띵하고, 급작스런 통각에 눈앞이 흔들렸지만, 이 열 받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뜨끈한 아픔에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거 되게 자존심 상하네…….”
무결한 냉소로 물든 눈빛이 밤하늘을 꿰뚫었다.
우웅. 우웅.
바지 뒷주머니에 처박아뒀던 스마트폰이 울리는 게 느껴졌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대로로 걸어나가는 시선은 오직 앞만 향하는 것처럼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택시 한 대가 섰다.
“화랑 길드로 가주세요.”
뿌연 연기를 내뿜는 엔진 소리가 텅 빈 도로를 갈랐다.
‘아무것도 못 한다고, 내가.’
으드득.
어금니가 갈렸다.
맞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여태 천문진리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고, 경계만 할 뿐 명암에 관해서도 깊숙이 알지 못했다.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내내 일이 발생한 뒤에서야 흔적을 뒤쫓으며 아등바등하는 무능한 탐정 같았다.
그게 다야? 지금은 몇 없는 주변 인물들로 협박이나 받고 있다.
이겸이나 화랑 사람들은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지만…….
‘여기서 한미래를 건드리네.’
사망 플래그를 제대로 뽑지 못했으니, 명암이 한미래에게 접근할 거라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언젠가 그녀와 싸우게 될 것도 염두에 두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일이 시발점이 된다면.’
이모아가 이태환과 맞붙는 건 존재하지 않을 사건이었다.
내가 아니라면 이 둘이 여기서 만날 일도.
이따위로 싸우게 될 일도.
‘없었다.’
그 여파로 원래 정해져 있는 루트보다 더 빨리, 한미래가 명암에 합류하게 된다면.
혹여나 내가 아닌, 윤산영을 건드리게 된다면.
줄기를 탄 생각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뻗어 나갔다.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생해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모아와 깊게 얽혀있을지 모른다.’
단지 겉만 핥고 있던 ‘내’가 몰랐을 뿐이지.
탁, 숨이 터졌다.
내가 애카로 알고 있던 설정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오랜만에 제대로 한 대 얻어맞았다.
모든 게 계획된 일은 아니었으나…….
“아저씨, 죄송한데 목적지 좀 바꿔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천마산 앞이요.”
차가 부드럽게 유턴했다.
‘그럼 나도 아는 등잔 밑을 쑤셔봐야지.’
천문진리회.
내가 지금까지 놈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건 불필요한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비들의 배후가 명암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랬다.
맘만 먹으면 훤히 아는 내부를 들쑤시고, 파헤치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었으나.
‘이태환.’
그 자식이 자꾸 눈에 걸려서.
하지만 이미 선전포고를 당한 이상 방어적으로 굴 필요는 사라졌다.
미행?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겸사겸사였을 뿐.
‘이태환은 반드시 내가 아닌 그 시체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놈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발견한 지금이 적기였다.
명암은 아직 날.
‘건드릴 수 없다.’
나의 소재, 동선.
모든 것을 파악해 놓고도, 현장에 개입할 여지가 보이자 등장했다는 점.
이태환이 그렇게 살기를 뿜어놓고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 증거였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빛들을 눈으로 붙잡았다.
하아.
창문에 입김을 불어 동그란 자국을 만들어냈다.
삐그극. 손가락을 움직여 작은 그림을 그렸다.
ㅗ.
‘엿 좀 먹어 봐라.’
***
그날 아침, 조간신문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마천 건물, 컨테이너 등 의문의 화재 사고 잇따라…… 원인 규명 불가」
― 이날 새벽, 천마산 주변 이단 천문진리회의 본거지로 알려진 철학관과 인근 공사장 컨테이너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송파소방서 측이 규명 조사를 의뢰.
그러나 외부인을 함부로 교단에 들일 수 없다며 반기를 들고 일어선 천문진리회 측의 의견으로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이에 정부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협조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입장을 발표…….
***
“봐도봐도 너무 이마 정중앙에 붙인 거 같은데.”
하나가 반창고 위를 탁 때리며 개구지게 웃었다.
아, 뭐야아. 맞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입을 비죽였더니 킥킥대며 의자를 돌려 앉았다.
새빛중학교, 종례 시간.
아직 오지 않은 담임 선생님을 기다리며 교실은 언제나 그랬듯이 소란스러웠다.
하나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끄적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모기라도 잡듯이 또 찰싹 이마를 내리쳤다.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적댔다.
“하지 마아!”
“완전 때리고 싶게 만들어 놨으면서 왜 뭐라 그래!”
“에이씨.”
손으로 이마를 완전히 가려 버렸더니 배를 잡으며 깔깔댄다.
아까는 집요하게 목에 베인 상처를 보며 진짜 알레르기 맞냐고 캐묻더니, 이게 명암한테도 공인 된 내 친구라는 게…….
“무슨 일 없지?”
대뜸 물었다.
하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 일? 아, 있긴 했다. 어제 아빠가 내가 냉장고에 숨겨 놓은 젤리 다 꺼내먹은 거임. 와, 진짜 배신감 장난 아냐.”
“…… 그래. 아부지 어머니는 다 건강하시고?”
“건강하신데…… 갑자기 우리 엄마아빠 안부를 니가 왜 물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8시 전에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고. 누누이 말하지만 어두운 길로 다니지 말고, 큰길로만…….”
“느네 아저씨 닮아가나.”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하나의 뒤통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다음에는 매번 길이를 맞추기라도 하는지, 여전한 칼단발로 앞만 응시하고 있는 한미래의 뒤통수를 한 번.
보내놓고 확인이 늦었던 문자를 한 번 들여다봤다.
「별일 없습니다. -고구마」
이태환을 마주친 이후로 매일같이 주고받는 안부 문자였다.
그래 봤자 내가 ‘별일 없죠?’ 하고 물으면 리오도 ‘별일 없습니다’ 하는 식의 짧은 대화였지만, 그거 하나로 좀 안심이 됐다.
‘나 때문에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하냐.’
그걸 구하러 가는 게 더 골치였다.
다른 사람들은 사실 크게 걱정이 안 되는데, 참.
“이게 다 내 친구인 너를 위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잔소리…….”
귀를 틀어막는 하나의 손을 붙잡고 귓구멍에 말을 쏟아붓고 있던 찰나.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렸다.
칠판 위를 나뭇가지로 탕탕 때리며 들어오는 서 선생님 덕분에 소란은 금세 잦아들었다.
그녀는 오늘도 한아름 들고 온 통신문들을 교탁 위로 내려놓고, 제일 앞자리 친구들을 일으켜 세웠다.
“별다른 전달 사항은 없고. 오늘 나눠준 통신문들 잘 읽고, 이번 주 금요일까지 부모님 사인받아와라.”
“네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종례였다.
앞에서 넘어오는 회색 재생지를 지루한 얼굴로 받아들며 학교를 빠져나갈 생각만 했다.
나는, 오늘 찾아가 볼 사람이 있었다.
이번 일과 비슷하게 각성자 실종으로 전단을 등록해 놓았던 연락처.
거의 세달이 지난 사건이라 조사를 종료하고 이제는 제보에만 희망을 걸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명암 놈들이 뭘 위해 그런 가장을 꾸민 건지.
그게 각성자에 한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막무가내로 아무나 죽여 데려가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최대한 비슷한 상황들을 먼저 파 봐야지.’
그래야지만 실마리에 가 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 지 알아내야만 하겠다.
그리고 반드시.
‘이번엔 먼저 선빵 친다.’
혀로 불룩하게 입안을 쓸었다.
‘그것도 안 되면 그냥 교주랑 맞짱 뜨던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에휴…….”
대충 뭉친 가정통신문을 반으로 접었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건 중학생일 게 분명했다.
암살도 피해야 되지, 포탈도 뿌셔야 되지, 학교도 다녀야 되지, 숙제도 해야 되지…….
그리고 그 순간.
청천벽력 같은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싹함이 온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