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스파크가 터진 것처럼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꽉 막혀 있던 생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있었어도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전제의 순서부터.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으니.’
그들은 예언한 게 아니라 포탈을 생성시킬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즉.
‘세계를 휘두를 수 있다는 뜻.’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해왔던 것처럼.
만들어진 재앙에 죽어 나가야 했던 사람들처럼.
“미친.”
이 미친 새끼들.
심장 박동이 온몸을 내리쳤다.
모든 것은 아직 실험 단계고, 놈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오로지 포탈 발생을 앞당기는 것뿐인 것 같지만 여전히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턱이 아플 정도로 어금니를 짓씹었다.
눈가의 혈관이 빳빳하게 당겨 곧 터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세상 어디에나 암(暗)은 존재한다지만.
‘이건…… 선 넘었지.’
의식하지 않은 손끝으로 작게 빛이 맺혔다.
내 감정에 공명한 것처럼 물방울 같은 빛이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분노로 온몸이 식어 내렸다.
당장에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이 연구실을 폭파시키고 싶었다.
산산조각난 불길 속에서 명암 새끼들의 얼굴에 칼을 꽂고 싶었다.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절망을 안겨주고 싶었다.
오로지 놈들의 목적을 위해 행해졌던 죽음처럼.
그때.
“이제 얼마나 더…….”
“글쎄요, 가장 순도 높은 그릇을 원하시니…….”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을 마친 두 교인이 콜드룸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악 쥘 수밖에 없었다.
살을 파고든 손톱 위로 작게 맺히는 핏방울.
떨리는 눈꺼풀.
그러나,
하지만.
‘때가 아니다.’
되는대로 박살 내고 짓밟을 작정이었다면 여기까지 잠입할 이유도 없었다.
이곳은 빙산의 일각.
지금 이 연구소를 엉망으로 만든다고 해도 명암에게 미치는 타격은 제로일 게 분명했다.
내가 부수고 싶은 ‘진짜’는.
‘이런 게 아니다.’
발을 내디뎠다.
통 사이를 걸으면서도 하나하나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기억하려 노력했다.
일종의 다짐.
그리고 속죄 같은 행위였다.
어느 한 곳에서 발걸음이 우뚝 멈춘 건 본능적이었다.
아는 얼굴.
‘…… 민정운 씨.’
허공에서 흔들리던 다리와, 울먹이던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아이의 모습이 뒤섞였다.
고개를 땅으로 처박았다.
통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용서해주세요.’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당신을 단 한 번도 구해주지 못하는 나를.
쿠우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닫혔다.
콜드룸의 기계소리가 웅웅대며 멀어졌다.
끈적한 슬픔이 등허리를 적시며 따라붙었다.
시렸다.
온몸이.
***
“푸후우…….”
베개 위로 박은 머리가 거친 숨을 색색 내쉬었다.
드디어 돌아온 홈, 스윗 홈.
새벽 내내 추운 곳에서 긴장한 채로 있었더니 몸살기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환약의 지속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아까 집 들어올 때 구서복만 생각하면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어땠냐면…….
“아가씨, 오셨…….”
구서복은 현관문 여는 소리에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마중해놓고, 피곤하다고 중얼중얼 떠드는 소리에도 답이 없었다.
왜 그러나 싶어 신발장에 서서 가만히 쳐다봤더니.
찰칵.
문이 닫힐 때 까지도 심각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마침내 구서복이 중얼거렸다.
“귀.”
‘귀?’
“귀신.”
으아아아악!
소리치며 부엌에 들어가 프라이팬을 드는 구서복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 아직 안 보이는구나.
혹시나 잠입 중에 환약 시간이 떨어져 모습이 들키게 되면 곤란하니까, 알고 있는 레시피보다 좀 더 과하게 재료들을 계량해 조합했더니…….
하지만 딱히 설명해 줄 기력도 없어 비틀거리며 곧장 방으로 향했다.
구서복은 또 자기 혼자 열리는 방문을 보며 소리를 왁왁 질러댔다.
내 방까지 슬금슬금 기어들어 와 ‘나 다 안다, 보인다! 나와라!?’ 허공에 시비 거는 걸 좀 구경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 꿈질꿈질 움직여 문자를 보냈다.
[아저씨 조용히 좀 해요 -아가씨]작은 진동에도 화들짝 놀란 구서복이 뒷걸음질 쳐 문지방까지 빠져나갔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핸드폰을 확인하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요? 갑자기요? -ㄱㅅㅂ] [ㅇㅇ 시끄러움 -아가씨] [아가씨 어디신데요? 저 지금 집인데 -ㄱㅅㅂ] [아저씨 바로 앞 -아가씨]힉.
작게 숨을 집어삼킨 구서복이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곧.
“에이, 아가씨, 장난치지 마요. 숨은 거예요?…… 진짜 집에 있어요? 아가씨이!”
이런 소리나 하며 집 한 바퀴를 돌았다.
뒤이어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저 안 그래도 방금 좀 무서운일 있었는데 아가씨 때문에 더 무서워졌어 지금?? -ㄱㅅㅂ]“장난 아니라니까.”
“아아아악!!”
슬그머니 등 뒤로 가 속삭였다.
경기를 치며 무릎 꿇는 구서복을 보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킥킥대는 소리가 이어지자 벌떡 일어선 그가 과장된 태도로 주위를 경계했다.
구서복한테는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은신 환약 먹어서 그래요. 조금 있으면 돌아올 테니까 저 일단 좀 쉴게요.”
“아가씨? 진짜 아가씨예요?”
“맞다니까 그러네.”
구서복의 등을 쿡 찌른 뒤 터덜터덜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파묻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아가씨. 사고 치고 오셨어요?”
구서복의 물음에 번쩍 얼굴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짓게 되는 질색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이라구요.”
그 선언 이후로, 구서복은 나를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질문을 던져왔다.
‘언제요? 언제 사고 치실 거예요? 내일? 모레? 일주일 뒤? 한 달 뒤? 언제? 언제? 언제?’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구서복에게 먼저 언질을 던진 걸 후회했다.
또 뭔가 질문하려고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베개를 문가로 던졌다.
순발력 있게 닫히는 문을 보며 퍽 소리 나게 엎드려 누웠다.
열 받는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겸한테 말 안 한 걸 감사히 여겨야 되냐, 뭐냐.’
이것도 내 짐작이긴 하지만, 이겸 앞에서는 사고에 사 자도 안 꺼내는 태도나.
항상 둘만 있을 때 조용히 물어온다는 점에서 참작할 만했다.
뭐, 그 사고의 레벨이 아직 어느 정도 되는지 제대로 모르니까, 법석 떨었다가 쪽팔릴까 봐 가만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제 어떻게 해볼까…….”
한숨 섞인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연구소를 보고 온 뒤에도 여전히 ‘가짜 예언’을 터트린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더 빨리 실행해야겠다는 마음만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태환.’
그 자식이 문제였다.
아예 명암이 이번 예언을 물지 않고 뒤로 숨는다면 내가 직접 전면전을 벌이지 않아도 되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누군가 자신들을 건드리려는 목적을 두고 가짜 예언을 퍼트린 이상 놈들은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태환 역시.
‘알게 되겠지. 그 주인공이 나라는 걸.’
정황만 봐도 뻔한 답.
예언을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나 좀 보라고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으니, 이태환이 나를 잡기 위해 움직이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싸이코에게는 글쎄…….
날 죽이러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플래그 뽑고 좋지 뭐.’
이 세계에 들어온 후로부터 예정된 싸움이었다.
딱히 놀랍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이길 것이냐.’
이제는 버티는 것으로는 불가능했다.
내가 SS급 이태환을 상대로 ‘이겨야만’ 하니까.
“하아아…….”
생각만 해도 한숨이 솟구치는 상황.
물론 쓸 수 있는 말들은 많았다.
우리 길드 사람들. 청렴은 당연히 참전할 테고, 잘 구슬리면 백골, 비룡…… 성균관 사람들까지.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이태환과 나.
둘만 남아 대치해야 할 경우를.
눈을 감고 차근차근 알고 있는 정보들을 떠올렸다.
‘주 무기 낫. 부 무기 사슬.’
신성과 암흑.
서로 상극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 공격 역시 보통의 B급들보다는 치명타로 먹힐 수 있겠으나.
‘그건 이태환의 공격 역시 내게 치명적이라는 소리다.’
엄청 아팠지. 그때도.
강령을 이용하면 불리한 건 당연하고.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포탈 근처에서 싸우는 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제일 성가신 건 아이언 메이든을 이용한 출혈 데미지와 시야를 가리는 심연, 또…….
하릴없이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하며 손장난을 쳤다.
우웅.
작게 진동이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고구마]리오였다.
그 문자를 받으니 머릿속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실은, 아주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더 이상의 등급을 올릴 수 없으니 장비 스펙 업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건 당연한 수순.
근데, 하필이면, 내가 암흑계 놈들과 싸울 때 가장 즐겨 쓰고 좋아하던 방어구가…….
‘리오 거라서.’
무저갱의 사슬 갑옷.
윤산영으로 플레이하다 보면 진행할 수 있는 신성계 퀘스트 보상 중 하나였다.
종합 능력치만을 따져보자면 그렇게 좋은 등급의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래 봤자 중, 중상 정도.
게다가 장착할 수 있는 성향도 신성계로 한정된 갑옷이기 때문에, 윤산영이 아닌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는 뭐.
쓰기 불가능한 수준이라 안타까웠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매번 그 장비를 꼭 얻으러 가던 이유는 한 가지.
‘그거 말고 저항, 상쇄가 같이 달린 속성 템이 없었으니까.’
마법 저항, 마법 상쇄.
지금으로서 이태환을 막아내기 위한 최적의 갑옷이었다.
거기에 신성 속성 마석 몇 개만 잘 붙여주면 심연은 무슨.
놈이 스킬을 사용해도 눈앞이 훤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래도…….
“벼룩의 간을 빼먹지.”
아무리 생각해도 상도덕이 아니었다.
요즘이야 처음에 비하면 꽤 많이 등급이 올라온 정도라지만, 여전히 리오는 리오였다.
특히나 무저갱의 사슬 갑옷은 스토리 중반쯤에 얻어서 거의 최종장 코앞까지 장착하던 갑옷이었기 때문에 더 망설여졌다.
내가 떠난 후 이 세계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아무리 봐도 그건 좀 아니다.’
멱살 잡고 끌어 올려준다고 다짐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갑옷이 아니더라도 내 구미를 당기게 할 만한 아이템이 또…….
또오…….
‘없어.’
깡, 깡, 깡!
일정한 쇳소리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솟구치는 불길.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마.
그 앞에서 엿가락처럼 늘어진 칼을 담금질 하고 있는 점프 수트 차림의 여성이 보인다.
「유미철공」
간판을 보며 머쓱하게 코 밑을 훔쳤다.
‘와…… 버렸다.’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대장장이 거리에.
누가 보지도 않는데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변명을 중얼거리며 철공소 안으로 들어섰다.
‘잘 쓰고 돌려주면 되지. 응. 누가 먹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럼,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