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concubine of an obsessed emperor, and she's about to die. RAW novel - Chapter (31)
은 정해져 있다2022.02.17.
엘리제의 생각대로 사실 데몬은 평소 같으면 이런 자리에 나올 일이 없었다. 크레미언가의 가주인 그가 참석하는 자리는 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 황제나 황후와의 독대, 전쟁의 공을 치하하는 축하 파티의 주인공 석 정도이니까. 그가 오늘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되는 존재가 그의 눈앞에서 손끝을 매만지다 이제 그 끝을 뜯고 있었다.
‘저러면 망가져 피가 날 텐데.’
그러면 또 자이드는 그녀의 향기를 맡게 되겠지.
“!”
덥석. 번뜩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크고 뜨거운 두 손에 쏙 들어왔다. 보석처럼 빛나는 금안이 동그랗게 커져 눈이 부셨다. 손이 잡힌 그녀가 작게 외쳤다.
“대, 대공 각하!”
“긴장이 되어 그러십니까.”
끄덕. 엘리제는 그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근사하고 멋져서. 항상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던 그가 오늘은 조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여 엘리제의 심장을 때리고 있었다.
‘윽, 내 심장!’
보지 못할 거라 낙심하고 있어서일까.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기뻐서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마치 활어처럼 팔딱였다.
“안 오실 줄 알았어요.”
“…….”
평소였다면 그랬겠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궁금한 것이요?”
‘아! 데몬 역시 시에델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가 “당신을 보러 왔다” 등의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심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빈말이어도 해주면 어디 덧나나?
‘하긴, 빈말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었다면 좋아하지도 않았겠지.’
엘리제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이중적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
깜짝 놀라 엘리제의 눈과 함께 입도 살짝 벌어졌다. 거짓말은커녕 아부성 발언도 못 하는 그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다니! 그것도 진지하게!! 데몬이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눈웃음 지었을 때, 놓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있던 엘리제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는 성격뿐만 아니라 매력도 봐주는 것이 없었다. 쿵, 심장 아파. 오늘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 로안은 하루하루가 고행이었다. 기도 의식은 너무나 따분하고 지겨웠으며 혈기 왕성한 그에게는 삿된 행동을 금하라는 규율이 너무 가혹했다.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였던 그는 늘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매일 곤혹스러웠다. 끙. 강아지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엘리제를 보게 되면 끓어오르는 본능을 억제할 자신이 없어서 아예 의식이 시작된 이후로 일부러 그녀를 찾지 않았다. 로안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자신의 이런 정성을 신께서 꼭 아셔야 할 텐데. 더불어 그녀도. 오전 내내 집무 회의를 하고, 늦은 오후부터 저녁때까지는 기도 의식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몸이 쉴 틈 없이 바빴으나, 사실 머리와 마음은 틈만 나면 엘리제를 찾았다. 제 마음과 생각이지만 저절로 그녀를 찾고 떠오르는 것까지는 그도 어찌하지 못했다. 로안이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 안을 빙빙 돌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요즘 엘리제의 근황은 어떠하냐.”
일부러 며칠간 묻지 않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 싶고, 어찌 지내나 궁금해서 이야기라도 들어야지 안 되겠다.
“자이드 왕태자님을 도와 모임을 준비하고, 지금은 함께 귀족 자제분들과의 만남을 갖고 계십니다.”
‘나도 황제가 아니라 그냥 귀족 영식이었다면 엘리제와 지금쯤 웃고 떠들며 차를 마시고 있었을 것인데!’
그러다 엘리제의 고운 손을 잡고 자신에 품에 가두어 그대로 그 고운 얼굴에 입 맞추었을 것을. 황제가 아니었다면.
“하아.”
한숨을 내쉬며 로안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지, 황제여서 그녀를 첩으로 가질 수 있었던 거였다. 아니라면 욕심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대공가의 하녀였으니. 대공이 절대 내주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폐하, 얼마 전 자이드 왕태자님과 엘리제 님이 황궁을 둘러보다 왕태자님께서 엘리제 님께 야관문을 전해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야관문을?”
그것은 남성에게 좋은 천연 정력제가 아닌가?
‘설마!’
자이드는 그녀가 자신의 첩임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그는 자신에게 찾아와서 미로니카 귀족 자제들과의 만남을 허락받으며 여러모로 힘이 들 로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엘리제와 나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려는 것인가?’
로안은 순간 감동했다. 속 깊은 이웃 나라 왕태자가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아 충격에 빠진 자신을 돕고 싶은 마음에 타국에 남아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황국의 귀족 자제들과 교류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애첩의 관계마저 신경 써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랬군. 지난번 연회 때도 그렇고, 여러 도움을 주는 왕태자를 불러서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은혜를 받았으니 언젠가 미로니카에서도 보답을 해야겠지. 로안이 스스로의 아량에 미소를 지었다. *** 첫 번째 모임이 잘 끝났다. 아쉽게도, 원하던 정보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데몬은 그 자리에 나가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엘리제를 가까이에서 처음 본 영식들이 너도나도 침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오늘 모임에 참석한 것은 자신을 제외하고 영식 셋에 영애 셋. 붉은 눈에서 빛을 쏘며 노려보았더니 영식들이 금세 꼬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황제의 첩인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엘리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눈길이 가고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녀는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니.’
아름답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입이 열리고 말이 나간 후였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이의 눈을 사로잡는 여인이라고. 예전에도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그녀에게서 눈을 못 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일까. 그녀가 항상 자신의 시선에 들어와 있고,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것이. 데몬은 셔츠의 윗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고운 목소리와 함께 더 고운 얼굴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엘리제였다. 방금까지 그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채우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공간을 채웠다. 쿵쿵. 어디서 땅 파는 소리가 들렸다.
“!”
데몬은 곧 그 소리가 제 몸속에서 나는 소리여서, 자신의 신체만 미약하게 규칙적으로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녀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 엘리제는 여전히 황궁을 도망쳐 나가서 목숨을 구할 방도를 틈틈이 찾는 중이었다. 요즘은 기도 의식 덕에 로안이 자신을 찾지 못하니, 밤이 엘리제에게는 자유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이용하여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 떠올려보고 있었다. 도움이 될만한 자료는 무엇이든 이용해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황후 프시케가 황제와 다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에서 시련을 주는 대상이 바로 엘리제나 외부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은 본래, 말하자면 악녀 역할인 엘리제가 황후를 곤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프시케가 지혜롭게 그 일들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정작 내가 아무런 악행을 안 하고 있잖아?’
그러니 사용할 원작의 정보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기억나는 정보는 모두 로안과 엮이는 데에 유리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엘리제가 황후의 음식에 독을 탔는데, 그것을 알아채고 역으로 그 독을 이용하여 통쾌한 사이다를 선사한다든가. 로안이 주변국과 곤란한 상황을 겪을 때 데몬의 덕으로 상황을 해결하도록 프시케가 지혜를 빌려준다든가. 도움을 준 데몬에게 고마워 그에게 선물을 준다든가. 주로 원작의 내용이 흘러가는 것은 이런 식이었다.
‘아, 그중에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거겠네.’
데몬이 좋아하게 되는 사과파이. 원작에 그 레시피가 있었다. 잘게 다진 사과에 꿀과 시나몬을 섞은 사과파이였는데, 본래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무척 좋아하게 되는 간식이었다. 사과파이는 그녀도 현실에서 좋아하던 음식이라 그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세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데, 기왕이면 그가 좋아하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사과파이 정도면 내가 먼저 만들어준다고 해도 프시케가 이해해주지 않을까?’
원작 내용대로 흘러간다면 데몬은 황후를 사랑하게 되겠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아서 엘리제는 순간 기운이 쭉 빠졌다.
‘내가 그의 마음에 아주 조금만 자리하고 있으면 안 되나? 그 정도도 안 되는 것일까?’
그것조차 지나친 욕심일까. 무거워지는 마음을 애써 끌어올렸다. 확실하지 않을 때는 직진해 보는 수밖에.
‘프시케는 결국 로안과 이루어지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맞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저 핑계를 찾고 싶었을 뿐. 마음을 정한 엘리제는 마가렛과 함께 사과부터 골랐다. 그래서 만든 사과파이를 바구니에 담아 데몬에게 전해주러 왔는데.
‘와, 셔츠 단추 몇 개 풀었을 뿐인데!’
이건 뭐 그냥 화보네. 감사 인사할 겸 선물을 전하러 온 것은 엘리제였는데, 되레 그녀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은혜로운 눈 정화 선물.
‘용기 내서 오길 잘했다!’
기분이 좋아진 엘리제가 배시시 웃어버렸다.
***
“전하, 미로니카의 여식들도 다 홀려놓으시면 어쩌시게요?”
역시 그가 모시는 왕태자는 타고난 바람둥이였다.
“이렇게 아름답게 태어나 미모를 사용하는 것이 어찌 죄가 되느냐?”
그렇게 여러 사람을 홀려놓고 결국 매일 같이 찾아가는 것은 엘리제뿐이었다. 정작 엘리제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자이드는 눈웃음치며 영애들을 홀리고 다닌 후에는 단둘이 만나거나 시간을 내지 않았다. 모임 때마다 그저 까르르 여인들을 웃기고는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서 미로니카의 귀족 영애들은 그에게 더욱 목을 매게 되었다.
“아무래도 다음 모임 때는 대공 각하께 오지 말아주십사 부탁을 드려야겠다.”
“예?”
‘와주세요’도 아니고, ‘오지 말아 달라’고? 크레미언 대공께? 감히 그런 부탁을 할 생각부터가 범상치 않다. 용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엘리제가 아직 내게 넘어오지 않는 것이 대공 각하 때문인 듯하구나.”
데몬이 팔짱을 끼고 영식들을 노려보는 탓에 모임 분위기가 냉랭해지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엘리제를 아직 꼬시지 못한 것이 대공의 탓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저, 대공 각하께서 오지 않으신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 없어 보이는데요.”
이미 틀렸다고요. 그러니까 엘리제 님은 그만 포기하세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바튼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아무래도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을 써야겠구나.”
“더 적극적인 방법이요? 이보다 더요?”
일주일에 2번씩 모임을 갖고, 그 모임 준비를 핑계로 거의 매일 만나고 있는데? 이 정도 미남계가 통하지 않는다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자이드 왕태자의 미남계가 사상 처음으로 실패하였음을. 하지만 자이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게 생각이 있다.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야.”
“글쎄요…….”
불안하다. 저렇게 욕심만 내다가 큰코다치거나,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 기도 의식이 진행된 지 어느덧 2주가 지나고 있었다. 로안은 신나게 두들겨 빨려지고 볕 아래 널려 바짝 말린 빨래처럼, 그의 집무실 카우치에 누워 있었다. 아니, 널려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얀 의복을 벗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이 되어 있었으니까.
‘무슨 기도가 이렇게 힘들지?’
그냥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기운이 쪽 빠졌다. 그리고 세상 사는 낙이 없으니, 점점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에서 즐거움이 다 빠져나가 흥이 나질 않았다. 사실 매일 3시간씩 기도라니, 힘든 것이 당연했다. 숙련된 사제들은 다르겠지만 로안도, 프시케도 체력이 점점 부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기도가 효과가 있는 것인지 연회 이후 어떤 폭발이나 수상한 움직임도 없었다. 여러 날의 조사를 통해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대신 황궁에서 황제 부부가 신실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덕분에 황국이 안전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민심과 더불어 로안과 프시케에 대한 신망이 높아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 순간엔 차라리 왕태자가 되고 싶구나.’
목표한 100일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다. 듣자 하니 자이드가 준비한 모임에서 영애와 영식들이 자이드, 엘리제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폐하, 체스라도 한판 두시겠습니까?”
프시케가 널어져 있는 로안의 곁에 다과상을 들고 다가왔다. 삿된 것을 참아야 하는 신성 의식의 기간 동안 금지된 것에 대한 금단증상이 일어나는 로안은 대신 여러 놀이를 찾아서 했는데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방에서 황후와 하는 체스나 운동경기는 이미 질리도록 했다. 게다가 처음엔 이기던 체스도 이제는 황후한테 번번이 지고 있어서 더 재미가 없어졌다. 뭐 새로운 것이 없을까?
“이제 체스는 질리도록 했소.”
말할 기운도 없어 흐려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는데 시종장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시에델의 왕태자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벌떡! 안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던 이가 제 발로 찾아왔다. 로안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하늘색 옷을 입은 왕태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안의 방에 들어왔다. 새삼 그의 미모가 돋보이는 차림새였다. 밝은 금발의 머리에 하얗고 잘생긴 얼굴이 더해지니, 마치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았다. 모습은 하늘의 구름이고, 성격은 바람둥이로구나. 그런데, 하늘의 구름과 바람 같은 자이드가 황제 부부의 안부를 묻더니 이내 로안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었다.
“지쳐계실 두 분을 위해 새로운 놀이를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함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하러 왔으나 자이드는 로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황제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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