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0
0.1초도 되지 않아 창문을 다시 닫아 버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창문 아래에 쭈그려 앉아 가슴 을 진정시키는 나를 향해 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창문 바깥에 누가 보이는지 좀 말해 줄래?”
괴상한 부탁에 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열었다.
몸을 내밀어 창문 밖을 유심히 살펴보던 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분은…….”
제발 내가 잘못 본 것이길 바랐건만, 언제나 현실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왜 여기까지 오신 거죠?”
내가 묻고 싶다, 정말.
* * *
칼릭스를 지나치게 닮은 잡상인이길 바랐던 나의 희망은 와장창 부서졌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저택에 들어선 이는 칼릭스가 맞았다.
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갑작스럽게 저택을 방문한 칼릭스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전하. 그런데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지요? 아, 물론 불쾌하다거나 곤란한 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황태자 전하와 제 사이에 은밀한 우정이 싹트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
“페르니아 영애를 만나러 왔는데.”
역시 칼릭스는 루시안처럼 아버지를 받아 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을 칼처럼 끊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향한 곳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나였다.
“영애와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군.”
난 싫거든?
나는 필사적인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저 개초딩 황태자를 막아 봐, 아버지.
그러나 상대가 누구라도 도망칠 때까지 신나게 말을 늘어놓던 아버지도 칼릭스가 내뿜는 숨 막히는 위압감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네.”
내 아버지가 저렇게 짧은 대답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순순히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칼릭스를 따라왔던 호위 기사들도 나가고, 순식간에 방에는 나와 칼릭스만 남았다.
묵직한 공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칼릭스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네놈이 왜 날 찾아온 건데?’
소설 속에서 페르니아와 칼릭스가 엮이는 일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페르니아가 에스텔에게 깐죽거리다가 칼릭스에게 눈빛 공격을 당하며 깨갱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잖아.’
지금의 나는 에스텔을 괴롭히기는커녕, 그녀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도 연회장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으니 알고 있을 텐데.
‘설마?’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하며 눈썹을 찡그리는데, 칼릭스가 말했다.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성녀와 그렇게 친해진 거지?”
그랬다. 칼릭스는 에스텔에게 제대로 자기 마음도 표현하지 않는 주제에, 에스텔이 귀여워하는 길고양이에게도 눈을 부릅뜰 정도로 치졸한 질투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 제발 친하게 지내 달라고 애걸이라도 한 건가?”
“설마요.”
“그럼 그녀의 약점이라도 잡은 거냐?”
“애꿎은 사람을 왜 범죄자를 만드시는지요.”
“유능한 술사를 불러 최면이라도 걸었나 보군.”
“그런 게 가능했으면 황태자 전하께 최면을 걸었을 텐데요. 그럼 이런 식으로 이른 아침부터 무례하게 찾아오시진 않았을 텐데.”
칼릭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내 목을 조르는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부르르 떠는 그의 주먹을 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 아무리 성격 더러운 남주라도 여주의 절친에게 손을 댈 순 없겠지. 그러는 순간 여주가 영영 멀어질 테니까.’
칼릭스는 분노를 억누른 눈동자로 매섭게 말했다.
“성녀는 실실 웃고 다니는 것 같지만 의외로 사람들에게 자기 곁을 허락하지 않아. 그런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네게만은 그런 미소를 지어 주냔 말이야!”
그렇게 에스텔을 잘 아는 놈이 이러고 있냐. 이래서 후회 남주는 답이 없다니까.
나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대답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그래.”
“그야 제가 에스텔의 취향이니까 그렇죠.”
“……취향?”
칼릭스의 눈빛이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한껏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에스텔은 솔직하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해요. 제가 보기보다 성격이 좋거든요.”
“하. 고작 그런 이유로 성녀가 그대에게 빠졌다고?”
“그런 이유라니요. 성격 미인이 얼마나 귀한 건데요. 뭐, 전하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요.”
“그게 무슨 의미지?”
“…….”
“어설프게 말 끊지 말고 확실히 말해. 이제 와서 무엄한 말을 지껄인다며 그대의 입을 찢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듣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전하는 성격이 엄~청나게 별로잖아요. 그런 분이 성격 미인의 매력을 알아보시겠어요?”
칼릭스의 얼굴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내가 별로라고?”
“네.”
“이, 내가?”
“네.”
“도대체 어디가?”
날카로운 목소리에서 내 말을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절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물론 칼릭스는 남주답게 많은 것을 가졌다.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
귀족들도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엄청난 카리스마에 영특한 머리.
외모 또한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사람 말 무시하는 건 일상에, 내뱉는 말은 자기 자랑이나, 죽이느니 마느니 험악한 말뿐이잖아요. 정신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절대 그런 남자 안 좋아해요.”
“……!”
칼릭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잠시 후, 칼릭스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 내게 그런 말을 한 여자는 그대가 처음이군.”
헐. 저건 남주가 사랑에 빠지는 플래그인데.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며 두 팔로 몸을 가렸다.
“설마 제게 관심이 생기신 건 아니죠? 전 약혼자가 있어요.”
다행히 칼릭스도 나와 같은 표정을 했다.
“무슨 개소리야.”
역시 남주가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라는 루트로 한눈에 반하는 건 여주 한정이구나.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무튼, 제게 궁금했던 물음에 대한 답은 들으신 거죠? 제가 오늘 좀 바빠서요. 황송하옵니다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잽싸게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긴 다리가 튀어나와 나를 막았다.
“네 말은 꽤 흥미진진했어. 기분이 매우 더럽긴 했지만, 조금은 납득이 되더군. 지금까지 내 행동이 너무 제멋대로였을지도 모르겠어.”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그대가, 나의 이 별로인 성격을 좀 고쳐 봐.”
고치긴 뭘 고쳐. 내가 무슨 AS센터인 줄 아나.
‘싫거든요?’라고 거절하려다가 문득 에스텔이 떠올랐다.
어쨌건 칼릭스는 이 소설의 남주였다.
두 사람의 연애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이 남자가 쓰레기 짓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고쳐 놓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에스텔의 마음고생이 덜할 거 아냐.’
나는 칼릭스를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시선이 아래에 있음에도, 마치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오만한 남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토록 애걸복걸 부탁하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내가 언제 애걸복걸…….”
셧업. 나는 과감하게 칼릭스의 말을 끊었다.
“황태자 전하의 더러운 성격을 바꾸는 데 성심성의껏 도움을 드려 보겠습니다.”
* * *
칼릭스의 성격 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명 개초딩 남주 사람 만들기 대작전.
“교정을 시작하기 전에, 전하께서 지켜 주셔야 할 약속이 있어요.”
“그게 뭐지?”
“첫째. 교정 중에 제가 다소 험한 말을 하거나 무례한 언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교정의 일환일 뿐이에요. 이것에 관해 어떤 죄목을 적용하거나 개인적인 감정을 품으시면 안 됩니다.”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건. 내게 작정하고 욕이라도 퍼부을 셈인가?”
움찔. 어떻게 알았지?
나는 최대한 결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원활한 교정 수업을 위한 조건일 뿐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다 보면 듣는 이가 불쾌할 만한 말을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황태자 전하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면, 제대로 된 교정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칼릭스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째. 제가 지시하는 말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성실히 따라 주세요.”
이번에도 칼릭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대가 내게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여기에 동의하지? 내게 연회장에서 속옷만 입고 춤을 추라는 지시를 내려도 얌전히 따르란 말인가?”
오호, 그거 꽤 끌리는데.
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는 모르시겠지만, 전하의 상식은 일반인이 가진 상식과 많이 어긋나 있어요. 여리고 섬세한 여인들의 생각과는 더더욱요. 제가 어떻게 하라고 말씀드릴 때, 전하는 대부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실 거예요. 그때마다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미리 조건을 걸어 두는 것뿐이에요.”
칼릭스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아쉬운 건 그였다.
잠시 후,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칼릭스는 긴 다리를 꼰 채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움 받는 처지면서 쓸데없이 건방진 그를 향해 ‘의자에서 내려와 꿇어. 그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라고 기선 제압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나는 칼릭스의 건너편에 앉아 말했다.
“일단 황태자 전하의 성격에 문제 있는 부분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칼릭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중 가장 먼저 고쳐야 할 건, 바로 입이 쓰레기라는…….”
나는 말을 조금 순화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너무 거침없으시다는 거예요.”
“그대의 말은 이상하군. 나는 이 제국의 황태자야. 아바마마를 제외한 모든 이가 나의 아랫사람인데,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정중하게 존댓말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렇게까지 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존중은 하시는 게 좋다는 거죠.”
별 개소리를 다 듣는다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칼릭스를 향해 말했다.
“황태자님의 막말에 에스텔 님도 얼마나 상처받았는데요.”
에스텔의 이름이 거론되자 칼릭스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역시 저 남자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에스텔만 한 미끼가 없었다.
“……내가 성녀에게 막말을 했었나?”
“네. 성녀라고 부르며 제대로 된 이름도 부르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온갖 똥 같은 말을 내뱉으셨잖아요. 차림새가 초라하다느니, 평민은 어쩔 수 없다느니 무안만 주기 일쑤고요.”
말하다 보니 새삼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이거 너무 쓰레긴데.
역시 남주고 뭐고 지금이라도 이놈을 암살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칼릭스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냥 보이는 대로, 사실을 말했던 것뿐이야.”
“설령 사실이라 해도 왜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냐고요. 황태자 전하도 제가 지금 성격 더럽다고 하니까 기분 나쁘시잖아요.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요.”
“……!”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최상의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
주위 사람들은 그의 눈치만 살피며 어떤 말이든 네, 네, 하고 대답해 주었겠지.
그래서 그는 제 말을 들을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지, 말지에 대한 판단 능력이 제로라는 말이다.
칼릭스는 한결 풀 죽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말하면 되지?”
나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알려 주었다.
“그냥 닥치세요.”
“……뭐?”
“아, 죄송. 제 평소 말버릇이 튀어 나간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러니까 제 말은, 그냥 조용히 있으시라고요. 웃어 줄 수 있다면 더 좋지만, 그것까진 힘들 테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배려라고는 없는 독설로 사람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바에는, 입 꾹 다물고 봉인하는 게 세상에 이로운 일이었다.
잠시 후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얌전히 닥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지.”
어째 말에 뒤끝이 있다?
그 후에도 나는 칼릭스에게 개선해야 할 점들을 알려 주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해도 타인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요. 제 약혼식 때처럼 에스텔 님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나가는 행위 같은 것 말이에요.”
“여자들은 야성적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니었나?”
“황태자 전하는 다른 여자가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지나가도 참 야성적이라며 좋아하시겠어요?”
칼릭스는 내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성격 미남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팁을 알려 주었다.
“이건 정말 고급 기술인데요. 고맙다는 말이나 칭찬 같은, 타인을 향해 긍정적인 말은 속으로 삼키지 말고 바로 하도록 하세요.”
“그런 말을 쉽게 내뱉으면 품위가 떨어지는 걸 모르나.”
“에스텔이 전하가 너무너무 잘생겼대요.”
“……!”
“라고 말한다고 그녀의 품위가 떨어져 보여요?”
“…….”
절대 아닐 것이다.
내가 말을 내뱉는 순간 칼릭스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가는 것을 분명 보았으니까.
“좋은 말이란 그런 거예요.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사람을 기분 좋게 하죠. 어떨 때는 금화 천 개보다 훨씬 훌륭한 가치가 있어요. 그러니 마음껏 내뱉도록 하세요.”
그가 내 말에 충실히 따른다면, 그는 에스텔을 향한 모난 독설 대신 애정 어린 말을 늘어놓게 되겠지.
예뻐. 귀여워.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독자로서 소설을 읽었을 때는 남주가 내뱉은 독설에 여주가 상처받는 장면이 흥미로웠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지금 에스텔의 친구니까.’
에스텔이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루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지금 그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 아닐까. 그의 연적을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내내 떠들던 내가 조용한 게 이상한지 칼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열심히 떠들더니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지?”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남자 생각을 좀 한 것뿐이니까.”
“나를 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한다고?”
칼릭스는 희한한 생명체를 발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아, 저 빌어먹을 왕자병.
상황 판단 못 하고 밑도 끝도 없이 치고 들어오네.
내가 질색한 얼굴로 바라보자, 칼릭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교정 수업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아무튼,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오늘 알려 드린 것만 조심하시면 어디 가서 성격 더럽다고 독침을 맞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라는 뉘앙스를 팍팍 담아 마무리 인사를 했건만 칼릭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마음에 차지 않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끝인가.”
“예. 그런데요.”
“호기롭게 나를 교정한다고 했던 것치고는 허무하군. 교정이라는 건 실제로 행동이 바뀔 때까지 확인하고 봐줘야지.”
“설마 또 보자고요?”
“그래.”
칼릭스는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뭐가 재밌는지 눈가에 살짝 웃음까지 어린 채.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었다.
세상 사람을 다 자기 아래로 보는 오만한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의 미소 따위는 조금의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저 미소보다 훨씬 예쁜 미소를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가 무척 바빠서 전하께 더는 시간을 내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대는 최근에 연회장에도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는 거지.”
그 소문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나는 꿋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귀족 영애라고 사교 활동에만 매진하는 게 아니랍니다. 제가 집중하는 일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에요. 그러니 모쪼록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제발 꺼져!
칼릭스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 이상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칼릭스는 저택을 떠났다.
저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오라는 서브 남주는 안 오고 애꿎은 남주만 왔다 가네.”
칼릭스는 이 세상 누구보다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건만, 그의 잔향은 내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머릿속을 채운 건 오직 루시안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내일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오지 않으면 이쪽에서 찾아가지, 뭐.”
* * *
구름 한 점 없는 한낮의 햇볕은 무척 뜨거웠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백옥처럼 관리해 온 피부가 탄다며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그런 날, 나는 뙤약볕 아래에 앉아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부채까지 살랑거리며.
‘후우. 오늘 정말 덥다.’
그럼에도 나는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훈련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원형의 경기장 안에는 수백 명의 기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맨 앞에는 은빛 갑옷을 입은 루시안이 있었다.
관람석과 경기장의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한눈에 그가 보였다.
‘정장을 입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엄청 다르네.’
새삼 그가 기사라는 게 실감이 난달까.
아침까지만 해도 고민했다.
약혼녀가 이런 곳까지 찾아온 걸 알면 그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경기장을 둘러싼 관람석에는 나 말고도 기사들의 연습을 구경하러 온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들과 어우러져 앉아 있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로 기사단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했다.
‘꼭 아이돌을 구경하러 온 소녀 팬들 같네.’
여인들은 제가 좋아하는 기사가 앞으로 나설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많은 건 루시안이었다.
“카르디엔 님이 지금 이마의 땀을 닦았어!”
“꺄악!”
“카르디엔 님이 지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어!”
“꺄아악!”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그녀들은 루시안의 자그마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아챘다.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망원경 덕분이었다.
‘저거 괜찮은데? 내일은 나도 챙겨 와야겠어.’
오페라글라스로 루시안을 선명하게 훔쳐볼 것을 생각하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는데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의 얼굴이 완벽할 수 있지? 이목구비의 모양과 위치, 심지어 인중 길이까지 모두 완벽하잖아!”
“난 카르디엔 님의 피부가 더 신기해.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 있으셨던 분이 어떻게 어제 결혼한 우리 언니보다 피부가 뽀얄 수 있냐고.”
“머리카락은 또 어떻고. 은빛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거려서 너무 예뻐!”
끝없는 찬사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최애를 사랑하는 이들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한 소녀가 눈썹을 내리며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런데 계속 무표정하시네. 조금이라도 웃으시면 좋을 텐데.”
“바봇!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그토록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더 매력적인 거라곳!”
“그런가. 하지만 너무 표정이 없으니 좀 무섭단 말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루시안은 기본적으로 친절하지만, 타인에게 철저히 선을 그었다. 그래서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도 그래서 처음 루시안을 만나던 날 무척 긴장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실제로 만난 루시안은 우유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여름의 복숭아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에스텔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니까 그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내가 유일할지도 몰라.’
그 순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에 든 부채를 살랑이는데 소녀들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카르디엔 님, 약혼녀가 있지 않았나.”
“맞아. 라일락 후작가의 아가씨라고 했어. 이름이 페…… 페…….”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나는 후작가의 영애일 뿐이었다. 사교계라면 몰라도 평민 소녀들에게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설마 평민 소녀가 내 이름을 알까?’
생각지도 못한 유명세 테스트에 나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소녀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페퍼로니!”
“…….”
아니거든.
평범한 귀족 영애를 한낱 피자 토핑으로 만들어 버린 소녀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는 이름만 후작가지 기울어 가는 가난한 집안의 아가씨래.”
그건 맞다.
“그래도 귀족 아가씨니 예쁘겠지?”
“그럭저럭 예쁘긴 한가 봐.”
그 말도 맞아.
“그런데 성격이 엄청나게 고약하대. 우리 같은 평민들은 가까이만 있어도 따귀를 날려 버린대. 고약한 냄새가 나니 꺼지라고.”
삐- 그건 오답!
예전의 페르니아라면 그랬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소녀들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다.
“왜 카르디엔 님 같은 분께서 그런 여자랑 약혼한 거야?”
“황제 폐하께서 강제로 약혼을 시키신 거래.”
“불쌍한 카르디엔 님.”
나는 소녀들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너희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도 소설을 읽으며 저 소녀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가진 것도 없는 악독한 귀족 영애와 강제 약혼을 하다니, 얼마나 안쓰러운가.
‘그렇다고 지금 타이밍에 끼어들어 변명하는 것도 우습잖아.’
제가 페르니아인데요. 못돼먹은 것은 모두 옛날 일일 뿐이에요. 지금은 아주 선량한 시민이 되었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라는 말을 해 보았자, 어린 소녀들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포악한 귀족 영애가 제 입을 찢지는 않을까 겁만 먹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따위 말을 얌전히 듣고만 있는 거야.”
그곳에는 칼릭스가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릭스의 뜬금없는 등장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것은 참새처럼 짹짹이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들은 넋을 놓고 칼릭스를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칼릭스의 범상치 않은 기운과 그의 곁에 서 있는 호위 기사의 위협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라진 건 소녀들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텅 빈 관객석에 멀뚱히 앉아 있는 건 나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라며 타이밍을 재는 나를 향해 칼릭스가 말했다.
“내게는 교정을 빌미로 온갖 무례한 말을 늘어놓더니, 정작 평민 들이 떠드는 건 가만두다니. 영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군.”
“저야말로 이해가 안 가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왜 이런 곳에 계시는지요.”
이곳은 너 같은 황족 나부랭이가 올 곳이 아니란 말이야!
기사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꺄악거리는 순수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자리라고.
“아바마마 대신 훈련을 살펴보러 왔지.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군. 매우 중대하고 바쁜 일정이 있다는 페르니아 영애가 말이야.”
명백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어린애들이랑 뒤섞여 품위도 없이 기사단을 훔쳐보는 내가 우습다는 듯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몇 시간 전에 가르쳐 드렸건만 그새 잊어버리셨나 보네요.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말투는 좋지 않다고 했잖아요. 이대로 평생 성격 더러운 남자로 살고 싶으세요?”
내 말에 칼릭스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너무 심했나 싶어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기껏 그런 얼굴로 태어났는데 아깝잖아요.”
일명 병 주고 약 주기 전법이었다.
내 칭찬이 먹힌 것인지 칼릭스는 화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도 다 보았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신나게 카르디엔을 구경하더니 가 버리겠다고? 아니면 날 피하는 건가?”
세상에. 이 남자에게 이 정도 눈치가 있었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황태자 전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다가 또 어떤 소문이 돌지 모르잖아요.”
미혼에 잘생기기까지 한 황태자이니 칼릭스는 툭하면 스캔들이 났다. 상대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악녀 페르니아라면 더더욱 자극적인 소문이 나기 딱이었다.
“저는 누구에게도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요.”
에스텔에게도, 그리고 루시안에게도.
칼릭스는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놈도 저렇게 나와 그대를 쳐다보고 있는 건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가 싶어서?”
‘저놈’이라는 호칭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챈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서 있는 루시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고 놀랄까. 오랜만이라며 어색해할까. 아니면…….’
에스텔에게 그랬듯, 칼릭스를 향해 질투할까?
그러나 나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루시안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마치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혹은 나와 다른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장면이 아무런 감흥도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순간 두근거리던 심장이 멈췄다.
나는 멍하니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심한 얼굴로 다른 기사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하지는 않았다.
귓가로 칼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반응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저놈은 그대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나 마나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진중한 거죠. 업무 중에 그런 감정을 표 낼 만큼 불성실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고작 이런 장면으로 오해를 할 만큼 유치한 사람도 아니랍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까.
루시안이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말했다.
“바라건대, 제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세요. 햇볕이 너무 뜨거워 더는 이곳에 있기 힘드네요.”
칼릭스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만하기만 했던 새까만 눈동자에 전에 없던 오묘한 감정이 보였다.
잠시 후, 그는 한 발짝 걸음을 뒤로 옮겼다. 나는 간단하게 고개를 꾸벅이고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허리를 곧게 펴고,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도도하게.
몇 번이나 고민했다.
다시 뒤를 돌아볼까? 루시안이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결국 나는 경기장을 나서는 순간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내게서 시선을 돌리던 그의 무심한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
분명 나를 보았음에도,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양산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노곤한 얼굴로 저택에 들어서니 앤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역시 양산 하나로 이 더위를 버티는 건 무리였어요. 뽀얀 얼굴이 가을 사과보다 빨갛게 익으셨잖아요.”
“햇빛 때문에 빨개진 것만은 아닐걸.”
“네?”
“아니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잠시 후, 나는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 앉은 앤의 손에는 감자를 곱게 갈아 만든 팩이 들려 있었다.
앤은 능숙한 손길로 내 얼굴 위에 팩을 바르기 시작했다.
“감자 냄새 나.”
“참으세요. 열에 익은 피부를 진정시켜 주는 데에는 감자 팩만 한 게 없답니다.”
피부가 많이 그을린 건 사실이라 나는 얌전히 그녀에게 얼굴을 맡겼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
“있지, 앤.”
“예.”
“내가 아는 영애의 이야기인데.”
“예.”
“그 영애가 다른 남자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약혼자에게 들켰는데, 그 약혼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더래. 신경을 안 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했다고 하더라고. ……그건 무슨 의미일까?”
“그 약혼자, 혹시 남색 아니에요?”
생뚱맞은 대답에 나는 진심으로 정색했다.
“절대 아니야!”
커다란 내 목소리에 앤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예요. 약혼녀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거죠.”
“……역시 그런 건가?”
“보통 귀족의 약혼은 가문 대 가문으로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정략으로 이어진 관계에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겠어요.”
앤의 말이 맞다.
가문 대 가문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혼. 그뿐이다.
거기에 새삼 어떤 감정이 피어나는 게 이상한 거지.
예쁘다는 말도, 에스텔에게 질투가 난다는 말도, 그저 조금 호의가 생긴 사람에 대한 관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우울한 거냐고.’
내 얼굴에 감자 팩을 다 붙힌 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폈다.
“다 됐습니다, 아가씨. 팩이 피부에 흡수될 때까지 잠깐 누워 계세요.”
“응. 고마워.”
내 인사에 앤은 흐뭇하게 웃었다.
“저녁 식사로 드시고 싶으신 메뉴 있으면 말씀하세요. 준비시키도록 할게요.”
“식사는 됐고, 달콤한 케이크와 과일이나 듬뿍 준비해 줘.”
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으시겠어요? 최근에 살이 쪄서 옷이 맞지 않는다고 그런 음식은 드시지 않았잖아요.”
“원래 다이어트는 딱 삼 일만 하는 거야.”
앤은 충실한 하녀답게 더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앤은 과연 유능한 하녀였다.
감자 팩을 얼굴에서 떼어 냈을 때 눈앞에는 무려 다섯 조각의 케이크와 세 종류의 과일이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생크림 케이크와 진한 초콜릿 케이크, 씁쓰름한 녹차 케이크, 앙증맞은 딸기 케이크, 진한 치즈 케이크까지.
그 옆에는 색이 선명한 포도와 자두, 복숭아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나는 포도 한 알을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린 후, 한 스푼을 듬뿍 떠 입 안에 넣었다.
그렇게 달콤한 케이크를 삼키고, 또 삼켰다.
가슴속에 뭉쳐진 감정의 응어리를 삼키려는 것처럼.
* * *
머리 위로 햇볕이 뜨거웠다. 텅 빈 관람석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칼릭스였다.
“그래서 저놈도 저렇게 나와 그대를 쳐다보고 있는 건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가 싶어서?”
칼릭스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루시안이 보였다.
루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루시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럇, 하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가 말을 몰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백마는 순식간에 관람석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관객석 안으로 뛰어들었다.
쿵, 소리를 내며 착지한 그가 내 앞에 섰다.
갑옷을 입어 평소보다 커진 그의 그림자가 나를 보호하듯 덮쳐 왔다.
루시안이 칼릭스를 향해 말했다.
“제 약혼녀에게서 떨어지십시오.”
평소의 맑은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그러나 칼릭스는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싫은데?”
그는 루시안의 뒤에 있는 내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영애와 이야기를 해 보니 꽤 대화가 잘 통하더군. 밑도 끝도 없는 불경한 말을 내뱉을 때도 있지만 무척 재미있어. 앞으로도 우리는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있…….”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안이 들고 있던 검으로 칼릭스의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꺄아악!”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막았다.
루시안은 바닥을 뒹구는 칼릭스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떨어지라고 했잖아.”
천천히 루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머리통이 날아간 칼릭스도, 졸지에 사람 목숨을 하나 날려 버린 루시안도 없었다.
이곳은 테이블 위에 다 먹은 케이크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 방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아까 일이 많이도 서운했다. 이런 끔찍한 꿈을 꿀 만큼.
‘아무리 정략혼이라고 해도 나는 약혼녀라고. 약혼녀를 그렇게까지 무시하는 건 너무하잖아. 그러니 이런 끔찍한 꿈을 꾸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오래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얇은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왔다.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분으로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인적이 드문 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앞마당과 달리 뒷마당은 허허벌판이었다. 휑한 곳에 보이는 건 저택을 빙 둘러싼 울타리뿐이었다.
‘이름만 있지 실상은 빈곤하기 그지없는 후작 가문답달까.’
그래도 이 시기에는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울타리를 휘감은 장미꽃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나는 진한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밤하늘 아래, 아름다운 장미꽃 벽을 따라 걷는 나. 오늘따라 가을바람이 쓸쓸하구나.’
세 달 뒤에 떠올리면 우주 너머로 이불 킥을 할 만큼 오글거리는 감성에 한껏 젖어 있을 때였다.
부스럭.
풀잎이 맞닿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내 눈에 희뿌연 잔영이 보였다.
“으허억!”
우아함 따위 개나 주고 본능적인 비명을 지른 나는, 이내 희뿌연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장미꽃이 만개한 담벼락 너머로 보인 하얀 얼굴은 유령도, 강도도 아니었다.
루시안이었다.
“여, 영애. 괜찮으십니까?”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루시안을 향해 외쳤다.
“안 괜찮아요! 도대체 이 야밤에 왜 남의 집 담벼락 앞에 서 있는 건데요.”
“그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루시안을 향해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허락도 없이 담벼락을 넘어 들어오려던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그럼 도대체 그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당장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널 도둑 나부랭이로 판단하겠다는 나의 결연한 눈빛에 루시안이 다급히 말했다.
“지나가는 하인이 있으면 조용히 부탁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무슨 부탁요?”
“…….”
루시안은 곤혹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더니 나를 향해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얼굴에 살짝 열이 올랐다.
“날 만나러 온 거예요?”
“네.”
“……그런 거라면 그냥 정문으로 들어오시지 그랬어요. 조금 시간이 늦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기뻐하며 문을 열어 주셨을 텐데요. 카르디엔 경을 만나기를 무척 고대하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영애에게 몰래 쪽지를 보내려던 겁니다. 후작님을 만나면 일전에 끊긴 연애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아…….”
“그렇게 되면 내일 아침이 되어도 영애를 만날 수 없었겠죠.”
더할 나위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이제 경의 행동이 이해가 됐어요.”
그제야 긴장이 역력했던 루시안의 얼굴이 풀어졌다.
루시안이 울타리 쪽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울타리에 설치된 조명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우와…….’
밤하늘 아래, 만개한 장미꽃 사이에 파묻힌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라니.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낮에 있었던 일로 그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의 페르니아가 아니야!
삐진 페르니아라고!
나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데요?”
다분히 공격적인 말투였다.
루시안은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내리며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거죠?”
나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뭐야, 이 남자. 내 마음을 알고 있었어?’
본심을 들켰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콩거리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날, 술에 취해 영애께 무례한 짓을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루시안의 사과는 오늘 낮의 일이 아니라 황태자의 생일 연회 때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가 삐진 진짜 이유를 그가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입술이 배로 튀어나왔다.
나는 뚱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요?”
“그때 했던 행동, 말, 모든 것들요.”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요?”
“……물론입니다.”
루시안은 울타리를 두 손으로 잡고 참회하는 죄인처럼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영애에게 예쁘다고 말했었죠.”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가 어찌나 달콤한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새침하게 물었다.
“그리고요?”
“그리고 또…….”
시선을 내린 루시안이 말을 이었다.
“에스텔 님을 질투한다고 했습니다.”
“…….”
뭐야,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것도 저렇게 또렷하게.
단순히 술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큰 의미를 두지 말자고. 그는 기억하지도 못할 거라고. 혹여 기억한다고 해도, 온전한 정신으로 내뱉은 말은 아닐 거라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때 한 말, 진심이었어요?”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의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삐졌을 때는 언제고 방정맞은 입꼬리 같으니라고.
나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나를 무시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경기장에서 말이에요. 내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셨잖아요. 내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그건……!”
루시안은 누명을 쓴 듯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영애를 봐서 당황해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영애를 무시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요?”
“그럼요.”
진심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일을 입에 담았다.
“……그럼 내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는 것도 신경 쓰였어요? 조금이라도요.”
그 말에 루시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입술을 깨무는 순간 그가 말했다.
“조금 정도가 아닙니다.”
“…….”
“아주 많이 신경 쓰였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의 약혼녀인데.”
그 순간 마법처럼 사르르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풀렸다.
나는 한 발짝 걸어 울타리 앞으로 다가갔다.
울타리가 아니라면 맞닿을 만큼 루시안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울타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알겠어요. 용서할게요. 오늘의 일도, 그날의 일도, 모두.”
내내 어두웠던 루시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며칠이나 보지 못한 만큼 할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오늘 처음 훈련하는 걸 보러 갔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 놀랐어요. 대부분 루시안의 팬이더라고요.”
“그런가요?”
“네. 루시안의 몸짓 하나하나에 여자들이 꺄악거리던데, 몰랐어요?”
“훈련 중에는 관람석을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거든요.”
나는 키득 웃었다.
“그런 상황에 용케 나를 알아봤네요.”
그 말에 루시안이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황태자 전하와는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겁니까.”
“헐, 끔찍한 소리 하지 말아요.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는 척한 것뿐이라고요. 경도 알다시피 황태자 전하가 친구가 없잖아요. 많이 심심하셨나 봐요.”
내 대답에 루시안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눴을까.
루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요?”
라고 말하고 아차 싶었다. 벌써, 라고 하기에는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뭐가 그리 기쁜지 미소를 머금은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훈련이 끝나고 쉬지도 못하고 바로 와서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어서 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애, 가기 전에 영애께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허락이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허락받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잠시 후, 루시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번만, 저도 당신의 애칭을 불러 봐도 될까요?”
“……!”
그는 이따금 이런 식으로 방심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훅 치고 들어오곤 했다.
애칭, 그게 뭐라고.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쁜 얼굴을 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루시안은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이내 쪽, 하고 작은 입맞춤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다!
너무 놀라 커다랗게 눈을 뜬 상태로 얼음이 된 나를 향해 그가 웃었다.
환한 달빛 아래,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그가 속삭였다.
“좋은 꿈 꾸세요, 니아.”
청명한 목소리는 귓속이 아니라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가 사라진 후였다.
나는 영혼이 채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저 남자, 너무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