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1
7.
결국 그날 밤은 잠들지 못했다. 역시 그는 여러모로 수면 건강에 좋지 않은 남자였다.
다음 날,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오랜만에 꽃잔디의 집을 찾았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에스텔이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니아 님!”
“에스텔!”
우리는 백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방방 뛰었다. 그러나 마주친 에스텔의 얼굴을 보고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눈가가 거뭇해요. 어제도 밤새 책을 본 거예요?”
“네.”
사실 요즘 에스텔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의학 공부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한정된 횟수, 한정된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성녀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고쳐 주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 에스텔은 자신의 의술을 더 훌륭하게 갈고닦기 위해 노력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고 의젓한지.’
나는 혀를 쯧, 차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오늘은 나도 있으니까 쉬엄쉬엄하도록 해요. 무리하지 말고요.”
에스텔은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요.”
……주제도 모르고 내가 무슨 말을 떠벌렸던 것일까.
귀족 영애답게 변변치 못한 체력을 가진 나와 달리, 에스텔은 쉬지 않고 씩씩하게 환자들을 돌봤다.
그것도 내내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선 피곤함이나 지친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저렇게 작고 여린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체력이 생기는 거람?”
“내가 묻고 싶군. 저것이 평민의 저력이라는 건가.”
응?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곳에는 꽃잔디의 집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칼릭스였다.
나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전하께서 왜 여기 계신 건가요?”
“볼일이 있어서 들렀어.”
황태자가 이런 곳에 웬 볼일?
믿기지 않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 그대와 성녀만 내가 온 것을 모르더군. 일에 집중을 해서 몰랐던 건지, 모른 척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의료원 분위기가 이상해졌던 것 같긴 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깔렸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죽느니 사느니 하는 환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황태자가 이런 곳에 볼일이라고?’
칼릭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은 여전히 칼릭스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병색이 완연한 노인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칼릭스의 눈빛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에스텔이 잠시 눈길을 준 개미 한 마리에도 질투를 하는 남자가 칼릭스였다.
‘설마 아무리 질투가 심하다고 해도 연약한 할머니께 달려들진 않겠지?’
긴장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환자에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군.”
“…….”
그 목소리에 어린 감정은 분노나 짜증이 아니었다.
부러움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황태자가, 가진 것 하나 없는 병든 노인을 부러워하다니.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새까만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어린 강아지처럼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환자를 다독인 에스텔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스텔은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칼릭스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을.
에스텔은 나와 칼릭스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오신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에스텔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초췌한 얼굴,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피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앞치마까지.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귀부인보다 반짝였다.
칼릭스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에스텔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흥. 평민에게 그런 예의 따위를 기대한 적 없으니 신경 쓰지…….”
아니, 이 자식이! 친히 교정 수업을 해 준 게 어제건만 그새 잊어버렸어.
“쿨럭, 쿨럭!”
나는 파워 기침을 하며 칼릭스의 말을 막았다.
나는 에스텔에게 고개를 돌린 채로 칼릭스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개소리 말고 예쁜 말!’
경멸 어린 내 시선에 그제야 칼릭스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아챘다.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조용히 들어온 것이니까.”
에스텔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다. 에스텔에게 시비를 걸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칼릭스의 모습 때문이었다.
에스텔이 묘한 눈빛으로 칼릭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는지요?”
“아바마마께서 이곳에 대한 칭찬을 하셨어. 이곳 덕분에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던 많은 하층민이 목숨을 구했다고 말이야. 직접 와서 보니 믿기지 않을 만큼 운영이 잘되고 있군.”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에스텔의 얼굴이 수줍게 물들었다.
“훌륭한 사제님들과 봉사자들이 도와주고 계시니까요.”
“그들에게 공을 돌릴 필요 없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빈민가에 이런 의료원을 만든 것은 너니까.”
칼릭스의 말대로였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있는 곳에 의료원을 만든다고 했을 때, 모두 에스텔을 말렸다.
이 제국 최악의 빈민가에 의료원을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빵 하나를 얻으려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멀쩡히 운영하게 둘 리가 없다.
겨우겨우 운영을 할 수 있다 한들, 그들은 사람들의 선의에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타인의 봉사에 고마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영혼까지 바닥인 자들이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에스텔이 꽃잔디의 집을 운영한 지 어언 3년째. 이곳은 폭력이 난무하는 빈민가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공간이 되었다.
에스텔이 만든 업적이었다.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황실 예산을 풀어 빈민가를 정비하려고 해.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변화를 준다면 이곳도 점차 나아지겠지.”
그것은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지금까지 빈민가는 수도의 암 덩어리처럼 취급받았다.
황족과 귀족들은 이 끔찍한 곳을 어떻게 밀어 없앨지를 매번 의논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곳을, 정비하고 싶다 말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황태자가.
에스텔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그런 에스텔을 향해 칼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너를 찾아온 거야. 마을을 직접 보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 나를 안내해 줄 수 있나?”
과연 쓰레기라도 남주는 남주였다.
에스텔의 취향을 절묘하게 노린 신박한 데이트 신청이 아닐 수 없었다.
예상대로 에스텔은 감격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칼릭스는 에스텔과 데이트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다.
과연 남주답다고 할까.
[니아 님도 함께 가시겠어요?]라고 에스텔이 물어봤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괜히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칼릭스의 무시무시한 눈빛 공격을 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빅 이벤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수백 편의 로맨스 소설을 읽은 독자의 촉이 왔다.
이 에피소드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존재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칙칙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저택을 나섰다. 두 사람의 데이트를 미행하기 위해서였다.
빈민가 진입로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니, 잠시 후 칼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릭스를 보는 순간 나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에스텔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조언을 했다.
오늘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빈민가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니, 괜한 시선 끌지 않게 최대한 수수하게 오는 것이 좋을 거라고.
칼릭스는 약속대로 매일 대동하던 호위 기사는 떼어 놓고 왔다. 평소처럼 나 황태자요, 라고 표내는 황태자의 제복도 입지 않았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새하얀 셔츠에, 가슴께에는 반짝이는 화려한 브로치. 손목에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가 찰랑거렸고, 오늘 처음 신은 것이 분명한 구두가 햇빛에 반짝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입고 온 거야? 칙칙한 빈민가와 오백만 년은 거리가 먼 행색이잖아!’
말 그대로 시의적절치 못한 데이트 룩이었다.
조금 후에 나타난 에스텔도 멍하니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릭스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말에 따라 시종에게 평민 옷을 구해 입었는데, 어때?”
뭐가 어때.
암컷에게 구애하기 위해 한껏 기를 모은 공작새처럼 화려하고 요사스럽기 짝이 없지.
그러나 냉담하기 짝이 없는 나와 달리 에스텔은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튀긴 하지만 멋지네요.”
에스텔의 천사 같은 말에 칼릭스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아주 좋아 죽는구나.
그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부터 갈 생각이지?”
“특별히 정한 곳은 없어요. 크기 자체는 크지 않으니 일단 마을을 한 바퀴를 돌아보면 어떨까 싶어요.”
“좋아.”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모습으로 우아하게 걸음을 내딛는 칼릭스. 허름한 원피스를 입고 편안히 걷는 에스텔.
그토록 달랐건만 두 사람의 조화는 절묘했다.
마치 새까만 밤하늘과 아침의 햇빛처럼.
‘과연 작가가 이어 주는 주인공 커플이구나. 확실히 달라.’
그러나 아름다운 두 사람을 둘러싼 배경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빈민가의 모습은 처참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반쯤 무너진 집.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는 악취가 났고, 지나치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창백하고 사나웠다.
‘나도 처음에 이곳에 왔던 날은 많이 놀랐지.’
막연하게 끔찍한 곳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것은 칼릭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갈수록 일그러졌다.
“상황이 열악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금방이라도 마을 전체가 내려앉을 것 같군.”
칼릭스의 말에 에스텔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허름한 풍경만이 다가 아니에요. 더 심각한 것은 범죄와 병이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살인과 폭행, 절도가 일어난답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전염병이 끊이지 않고요.”
그 말에 칼릭스는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얼핏 보면 지옥 같은 광경을 향한 힐난 같았지만, 내게는 그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가 정말 속상한 것은, 에스텔이 이런 위험 속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가 험한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도왔다는 건 알았겠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
칼릭스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인부들을 모아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해야겠어. 예산이 부족하다면 나의 개인 재산을 써서라도 이곳을 제대로 된 곳으로 만들어 주지.”
그것은 화려한 드레스나 신상 구두보다 훨씬 에스텔의 취향을 저격한 선물이었다.
예상대로 에스텔이 눈을 반짝였다.
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여어, 분위기 좋은데?”
뭐야. 이 타이밍에 나타난 저질스럽고 뻔한 대사는.
껌 씹는 소리를 내며 등장한 이들은 험악하게 생긴 양아치 1, 2, 3이었다.
갑작스러운 양아치들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웬 쌍팔년도 전개?’
그러든가 말든가 양아치 1, 2, 3은 이 세상 최고로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칼릭스와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칼릭스는 에스텔을 등 뒤로 숨기며 스산하게 말했다.
“뭐냐.”
칼릭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도 양아치 1, 2, 3은 눈치 없이 경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걸그룹 센터 못지않게 존재감을 뿜어내던 가운데 남자가 상처 난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네놈이야말로 뭔데? 딱 봐도 돈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벌레 같은 놈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이라도 하려고 온 거냐?”
그러더니 입꼬리를 비열하게 올리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러려면 관람료를 내셔야지.”
흑흑, 대사 좀 봐.
틀에 박힌 건달 대사에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 뻔했다.
그것을 겨우 참았건만 이어진 칼릭스의 답에는 견딜 수 없었다.
“흥. 바퀴벌레를 상대하는 것은 딱 질색인데.”
라니.
아아악, 너란 남주!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도 모르는 너란 남주!
나는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칼릭스와 양아치들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호위 기사도 없는 데다가, 혼자인 칼릭스와 달리 양아치들은 머릿수만 셋에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얼핏 칼릭스가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남주답게 엄청난 검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저런 지나가는 양아치 따위는 수십 명이 와도 칼릭스의 코털 하나 건들 수 없다.
물론 양아치 본인들은 모르는 게 문제였지만.
“이 개자식이! 집에서만 귀하게 지내서 상황 파악을 못 하나 본데, 여기서 네놈을 도와줄 놈은 없어!”
“저런 새끼는 말해서 들을 놈이 아니야. 팔 하나가 날아가야 무릎 꿇고 잘못했다며 흑흑거리지.”
“조져 버려!”
양아치답게 정정당당함 따윈 없는 그들은 다 같이 칼릭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칼릭스의 눈빛이 호기롭게 빛났다. 그는 등 뒤의 에스텔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겁먹지 말고 3초만 기다려. 눈을 뜨면 다 끝나 있을 테니까.”
어마어마한 대사를 내뱉은 그가 양아치들을 참교육하려던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등 뒤에 있던 에스텔이 머리를 쏙 하고 내밀었다.
험악한 분위기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얼굴로 에스텔이 말했다.
“유바, 칸, 즈앙비. 오랜만이에요. 잘 있었어요?”
“……!”
“……!”
“……!”
그 한마디에 양아치 1, 2, 3은 일시 정지가 되어 멈춰 섰다.
그들은 눈을 껌뻑이며 빼꼼 튀어나온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이내 험악하기 그지없었던 양아치 1, 2, 3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이고, 성녀님 아니십니까!”
“우와아! 진짜 오랜만입니다요.”
“늘 꽃잔디의 집에만 계시더니 웬일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에스텔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는 분이 마을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셔서 안내를 해 드리던 참이었어요.”
그 말에 세 양아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굳어 버린 이들을 향해 에스텔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설마 지금, 강도질을 하시려던 건 아니죠? 세 분 모두 꽃잔디의 집을 나가면서 저와 약속하셨잖아요.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고 올바르게 살겠다고.”
양아치 1, 2, 3은 머리통이 빠질 만큼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럼요! 성녀님께서 소개해 주신 일터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요. 지금도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이따금 찾아와 재수 없는 눈으로 이곳을 구경하고 가는 악질적인 귀족 놈인 줄 알고 조금 겁을 주려던 것뿐입니다.”
“맞습니다요!”
양아치 1, 2, 3은 쩔쩔매며 에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에스텔이 고요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 양아치는 제발 자신들의 진심을 믿어 달라는 듯 두 손을 모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에스텔은 다부지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폭력은 폭력만 낳을 뿐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험악한 행동은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양아치 1, 2, 3은 순식간에 선량한 신도 1, 2, 3으로 바뀌었다.
“약속합니다!”
“맹세합니다!”
“존명!”
양아치는 혈서라도 쓸 기세로 열정적인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에스텔은 가방 안을 뒤적거린 후, 그들에게 사탕 몇 개를 내밀었다.
“참, 이거 드세요. 세 분 다 달콤한 걸 좋아하시잖아요.”
세 양아치는 마치 여신에게 선물이라도 받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크흡. 잊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성녀님.”
“가보로 지정해 대대손손 간직하겠습니다.”
이 세상 죄를 모두 뒤집어쓴 것 같은 험악한 남자 셋이 사탕을 품에 안고 눈물짓는 모습이라니.
……실로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그 후 그들은 칼릭스에게 성녀님의 일행을 몰라봐서 죄송하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이고 멀어졌다.
에스텔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손을 내렸다.
칼릭스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군. 저런 놈들과도 아는 사이인 건가?”
“저런 놈들이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분들은 이곳의 주민이며 전하께서 보살펴 주셔야 할 백성인걸요.”
“…….”
그러더니 에스텔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그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칼릭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에스텔이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전하, 이곳을 정비하고 싶다고 하셨죠? 수도의 중심부처럼 깨끗하게 만들어 주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전하의 뜻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전하께서 보시기엔 더럽고 추한 곳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태어나고, 자라고, 나이가 들어 삶을 마감하는 소중한 장소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
“이곳저곳 뻗은 골목을 없애 큰길을 만들고, 낡은 집을 모두 허물어 새집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다른 것일지도 몰라요. 당장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빵 한 조각과 아픈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 가난한 이들이 자식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 같은 것들요. 모쪼록 이 점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릭스는 눈을 크게 뜨고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그의 대답에 에스텔은 환히 웃었다.
석양 속에서 반짝이는 에스텔을 칼릭스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마치 여신을 보는 듯한 황홀한 얼굴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이 바로 남주가 여주에게 결정적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장면임을.
* * *
‘성녀, 성녀 하며 무시하더니 결국 에스텔에게 뿅갔구나. 이제부터 얌전히 에스텔의 발닦개나 되거라. 나는 이제 두 사람 사이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마음먹었건만 다음 날 아침,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
칼릭스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두 번째 방문에 나는 찝찌름한 얼굴로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이른 아침부터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요.”
귀찮은 내색이 가득한 내 얼굴에도 칼릭스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칼릭스가 손짓하자, 그와 함께 따라온 시종들이 어마어마한 상자들을 응접실에 늘어놓았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것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고급스러운 상자들이었다.
‘이게 다 뭐야?’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찡그린 내게 칼릭스가 말했다.
“그대의 교정, 효과가 있더군. 그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제야 그가 가지고 온 선물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는 어제 에스텔과의 데이트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하긴, 에스텔이 그런 미소를 지어 주었으니.’
늘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했던 칼릭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겠지.
괜히 선물을 받지 않는다고 해 보았자, 받으라느니 괜찮다느니 말만 길어질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그는 선물을 줬고, 나는 선물을 받았다. 이로써 그의 볼일은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조금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칼릭스가 말했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에스텔을 웃게 할 수 있지?”
“에스텔은 늘 웃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 미소는 귀부인의 미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잖아. 형식적이기 짝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좀 더 꾸밈없고 솔직한 미소를 말하는 거야. 그대에게 보여 주는 그런 미소 말이야.”
칼릭스의 모습은 여전히 오만했다. 그러나 새까만 눈동자에는 이전에 없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이었다.
그토록 에스텔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끌리는 감정을 부정했던 그가, 제 감정을 인지한 게 분명하다.
사랑을 확신한 남자 주인공이라니.
잘생긴 얼굴에서 핑크빛 기운까지 뿜어져 나오니 그 매력이 어마어마했다.
누구라도 그의 물음에 대답하고 싶어질 만큼.
그러나 나는 그에게 선뜻 정답을 말하는 대신 새초롬하게 말했다.
“전하, 일전에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더는 전하와 얽히고 싶지 않다고. 저는 이 이상 전하께 해 드릴 말이 없어요.”
칼릭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는 그에게 내 말은 꽤나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황태자의 직위를 이용하여 협박이라도 하려나 싶어 침을 꿀꺽 삼켰다.
‘덤비려면 덤벼. 조금이라도 날 건드리면 에스텔에게 고자질해 버릴 테니까.’
그러나 칼릭스가 꺼낸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를 도와준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지. 그래, 푸에필랑의 금광은 어떤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푸에필랑의 금광은 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라고 그의 선물을 덥석 받고 싶은 본능을 겨우 참고 도도하게 말했다.
“아무리 가문의 재정이 예전 같지 않다 해도 그런 선물을 덥석 받을 만큼 궁하진 않답니다.”
칼릭스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요즘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우 퓌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지.”
그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제안이었다.
퓌는 엄청난 매력으로 온 제국의 여심을 흔들고 있는 배우였다. 그와 한 번이라도 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내놓을 수 있다는 여인들(과 일부 남자들)도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게 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보다 잘생기고, 아름답고, 빛나는 남자를 알고 있거든.
‘고작 인간계의 일류 배우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지. 루시안은 천상계의 얼굴이니까.’
그래서 나는 도도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살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칼릭스는 흠칫했다.
드디어 포기하나 싶은 순간, 칼릭스가 폭탄 같은 말을 꺼냈다.
“카르디엔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이 있나?”
본 적이 있을 리가.
내가 이 책에 빙의한 시점은 이미 루시안이 성인이 된 후였다. 그래서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어여뻤다는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슬펐는데!
빙의를 할 거면 좀 빨리할 것이지, 하고 말이야.
서글픈 내 눈빛에서 대답을 읽은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어린 카르디엔을 그린 초상화를 발견했거든.”
“……!”
기가 막혔다.
“그, 그런 것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건데요?”
“그것까지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
“이제 내 부탁에 대한 대답을 해. 내 성의를 받고, 나를 도와주겠나?”
그 자신만만한 눈빛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나는 또렷한 눈빛으로 칼릭스와 마주 보았다.
“전하, 고작 그런 것으로 제 마음이 흔들리기를 바라셨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혜안이십니다.”
나는 정말 칼릭스의 유혹을 모두 튕겨 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루시안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니!
이 기회를 도저히 차 버릴 수가 없었다.
‘흑흑. 나는 어쩔 수 없는 카르디엔의 덕후야.’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칼릭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입질에 성공한 낚시꾼의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전하는 에스텔의 진짜 미소를 보고 싶다는 거죠?”
“그래.”
“방법은 단순해요. 에스텔과 가까워지면 된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가장 효과적인 건 나처럼 꽃잔디의 집에서 함께 땀 흘리며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칼릭스에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아니었다.
‘에스텔이 환자들을 돌보는 걸 보고 질투를 할 게 뻔하잖아. 에스텔에게 진상 부리는 환자들을 보면 빡쳐서 칼부림을 해 댈 테고.’
무엇보다 칼릭스의 범상치 않은 기운에 애꿎은 환자들만 주눅 들 게 뻔하다.
그러니 내가 추천할 만한 방법은 지극히 소소하며, 다른 이들과는 얽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일기장을 들어 자랑하듯 흔들었다.
“에스텔은 글로 수다 떠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저와는 이런 교환 일기를 나눌 정도죠.”
“교환 일기?”
낯선 단어인 듯 중얼거린 칼릭스가 내 손에 들린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꽃이 그려진 일기장은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며 물었다.
“나보고 그 교환 일기라는 걸 쓰라는 건가?”
“어머, 그럴 리가요. 이건 순수한 소녀들의 우정의 산물이에요. 전하께서 넘보실 만한 게 아니라고요.”
너같이 속이 시꺼먼 남자는 끼워 주지 않는다는 말에 칼릭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에스텔에게 편지를 써 보세요. 서비스로 편지 한 통 정도는 배달해 드릴 테니까.”
구원자를 만난 듯 칼릭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 * *
다음 날 칼릭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칼릭스에게 편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걸 에스텔에게 전해 주면 되는 거죠?”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보내기 전에 그대가 이 편지를 읽어 봐 줬으면 좋겠군.”
나는 무슨 끔찍한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제가 왜요?”
칼릭스는 그답지 않게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본 게 처음이라……. 제대로 썼는지 판단이 안 돼.”
“…….”
멀끔한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빨갛게 핏줄이 서린 눈동자는 어젯밤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편지를 썼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으이그, 이래서 연애 초보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봉투 속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편지의 첫 문장을 보자마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소리를 처음부터 남발하다니.
나는 굳은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렸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싸늘한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칼릭스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을 깨달았는지 눈치를 살폈다.
“역시 뭔가 이상한가?”
“이상하다는 건 아세요?”
“평민이 알기에 너무 어려운 문장을 썼나? 단어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몇 번이나 고쳤는데.”
“…….”
“그게 아니면 너무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썼나?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당신, 날 빡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성공이야.
진심으로 살인 충동이 일어났으니까.
나는 주저 없이 칼릭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편지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전하가 얼마나 잘난지에 대해서만 늘어놓고 있잖아요!”
칼릭스는 억울하단 얼굴로 당당히 대꾸했다.
“편지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어 보니 첫 편지에는 자기소개를 하는 게 좋다기에 나에 대해 쓴 것뿐이야.”
“그럼 좀 더 평범한 내용을 쓰면 좋잖아요! 전하가 몇 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과목의 선생에게 재능을 칭찬받았는지, 예술가로부터 완벽한 대칭을 이룬 조화로운 얼굴이라는 평을 들었는지 이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
눈을 크게 뜬 칼릭스를 향해 나는 쐐기를 박았다.
“솔직히 이 편지를 읽고 난 후 드는 감정은 하나뿐이에요. 황태자, 재수 없어!”
내 말에 칼릭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런 감상은 도무지 예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이.
엄청난 정적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잠시 후, 칼릭스가 눈을 내리깔고 변명하듯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표현하라고 배웠어. 무조건 고귀하고 강하게.”
어린 시절부터 배운 농도 깊은 잘난 척이라는 말이었다.
저래서야 고약한 왕자병에 걸린 것도 무리가 아니지.
흐린 눈이 된 내게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실 네 지적을 들어도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모르겠어. 아마 그게 내가 에스텔과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일 테지.”
“…….”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내게 힘을 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한 번 더 부탁하고 싶군. 편지를 쓰는 것을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라니!
그 오만방자한 황태자가!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만함도, 어마어마한 위압감도 사라져 있었다.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다는 처량한 눈빛이었다.
‘젠장. 저런 얼굴로 쳐다보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역시 나는 미남에 약하다.
약해진 미남에게는 더더욱 약하다.
나는 결국 그의 편지를 쓰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에스텔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남자를 미리 쓸 만하게 훈련시키는 거라고.’
그렇게 하루를 꼬박 머리를 대고 함께한 후에야 편지가 완성됐다.
처음에 썼던 편지와 달리 수정된 편지에는 칼릭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좋아하는 차는 뭔지, 싫어하는 말은 어떤 것인지 하는 것들.
마지막에는 에스텔과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말까지 살포시 들어가 있었다.
칼릭스는 완성된 편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그대가 조언을 해서 고치긴 했지만 역시 잘 모르겠군.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져가면서 말했다.
“에스텔의 답장을 받아 보면 아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심술궂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녀가 답장을 줬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난 딱 편지를 전해 주는 것까지만 할 거야.
거기까지가 내가 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호의였다.
* * *
꽃잔디의 집에 들어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며칠 만에 온 것뿐인데 뭔가 많이 바뀌었네요?”
침대의 낡은 시트도 새하얀 시트로 바뀌고, 빈곤했던 창고도 식자재와 의료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흐릿했던 등불도 밝은 등불로 바뀌고 말이지.’
내 옆에 선 에스텔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태자 전하 덕분이랍니다. 앞으로 계속 꽃잔디의 집에 후원을 해 주시는 것은 물론, 마을에 학교도 지어 주신다고 했어요.”
칼릭스가 에스텔에게 빈민가를 지원해 준다고 했던 것이 고작 며 칠 전이었는데, 엄청난 실행력이었다.
그래. 괜히 여주에게 관심 끈답시고 되도 않는 말을 이죽거리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효과가 좋지.
에스텔의 얼굴에는 지금껏 없던 감정들이 한껏 어려 있었다.
감동. 기쁨. 행복. 그런 것들.
에스텔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정황이 없어 아직도 하질 못했네요.”
에스텔은 늘 바빴지만 요즘은 더 정신이 없었다.
낮에는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틈틈이 신전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거기에 밤이면 의료 공부까지 하니.
그래서 에스텔은 의외로 만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차라리 꽃잔디의 집에 실려 오는 빈민가의 하층민이, 황태자보다 더 자주 그녀를 만날 수 있을 만큼.
‘그러니 칼릭스가 초조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
새삼 그가 쓴 편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나는 에스텔에게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뭔가요?”
“황태자 전하의 편지예요. 시종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면 에스텔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며 제게 부탁하셨어요. 에스텔에게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
에스텔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편지에 놀란 듯했다.
그럴 만하지.
아무리 그가 남주라도, 아무리 에스텔이 여주라도, 아무리 두 사람이 세기의 사랑을 나눌 운명이라고 해도, 두 사람은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부담스러우시면 받지 않아도 돼요. 내가 전하께 잘 말해서 다시 돌려 드릴게요.”
내 말에 에스텔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아요. 받을게요.”
에스텔은 귀중한 것을 받듯, 두 손으로 편지를 받아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편지를 전해 주셔서 고마워요, 니아 님.”
“…….”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칼릭스를 향한 에스텔의 감정이 깊은 모양이었다.
수줍은 얼굴로 편지를 매만지던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답장을 쓰게 되면 저도 니아 님께 편지 전달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직접 전하를 찾아가거나, 사제들에게 부탁을 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 있어서요.”
칼릭스와 에스텔, 두 사람은 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유명 인사였다. 더불어 아직 짝이 정해지지 않은 인기 절정의 솔로이기도 하고.
그런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나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들킨다면 그야말로 대박 스캔들이었다.
그런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었다. 에스텔에게는 더더욱.
‘으. 편지를 전해 주는 건 딱 한 번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하지만 칼릭스의 편지를 받은 에스텔의 얼굴을 본 후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에스텔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칼릭스의 편지 봉투와 달리 질이 좋지 않은 거친 봉투였지만, 편지에서는 그녀에게서 나는 청량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그럼 부탁할게요.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니아 님.”
그렇게 말하는 에스텔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밤새 편지를 쓴 건지 눈가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마치 칼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황궁으로 가 칼릭스에게 에스텔의 편지를 전했다.
칼릭스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품속에 안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받은 것처럼.
그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성녀에게 쓴 편지를 한 번 더 전해 줄 수 있나?”
싫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귀찮은 일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었다. 커플 사이에 끼는 건 더더욱.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에스텔 때문이었다.
늘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만 생각하던 진중한 눈빛이 소녀처럼 빛났었지.
나는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흑흑. 나 아무래도 두 사람의 오작교가 되어 버릴 운명인가 봐.
* * *
그날 이후, 에스텔과 칼릭스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을 주고받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꽤나 달달한 내용일 것이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점점 사랑이 커져 갔으니까.
“고마워요, 니아 님.”
내게 편지를 받으며 에스텔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광대가 볼록하게 튀어 오른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에스텔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하기도 했다.
루시안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그의 첫사랑인 에스텔의 썸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와.
루시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분노하겠지.
‘흑화해서 나를 부스러뜨릴지도 몰라.’
이전과 달리 나와 루시안의 관계가 가까워졌다는 건 알고 있다. 그가 내게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것들은 그가 에스텔에게 가진 진득한 감정과 비교하면 소소한 것들이었다. 에스텔과 관여된다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애초에 칼릭스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제 와 편지를 건네주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에스텔이 얼마나 그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루시안한테 최대한 잘해 주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조금이라도 나를 덜 미워할 수 있게.
* * *
나는 루시안을 향해 호탕하게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카르디엔 경. 경을 정식으로 식사 시간에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 신경을 써 보았답니다.”
이름하여 후작 영애의 사치스러운 스페셜 디너!
제철 과일이란 과일은 다 긁어모으고, 오리고기,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꿩고기 등 고기는 종류별로.
새벽녘부터 줄을 서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숍에서 파는 디저트까지 모셔 왔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진 어마어마한 테이블에 루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대단하네요. 승전 후 돌아와 황제 폐하와 했던 식사보다 화려합니다.”
“후후. 그런가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하게 웃었지만 사실 주머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이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나는 앞으로 이 주 동안 식빵만 주구장창 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후회는 없어!
‘모름지기 사람은 밥 먹여 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다잖아?’
루시안이 은혜 갚는 까치가 되길 바라는 나의 강렬한 욕망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특별한 저녁 식사라고 해도 둘만 먹기에는 너무 과하게 차린 게 아니냐는 앤의 걱정과 달리,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여 있던 음식들은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루시안 덕분이었다.
음식을 향한 욕구라고는 조금도 없을 것 같은 그는 의외로 대식가였다.
두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식사를 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지만, 그의 배 속에 들어간 음식량은 절대 우아하지 않았다.
입을 우물거리던 루시안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모든 음식이 하나같이 맛있습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많이 드시고 무럭무럭 자라세요.”
그 말에 루시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혹시 제게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습니까?”
“푸훕!”
너무 놀라서 마시고 있던 주스를 뿜을 뻔했다.
나는 표정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하고 당황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내 입가에 묻은 오렌지 주스를 냅킨으로 닦아 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조금도 괜찮지 않아!
나는 콩닥이는 가슴으로 루시안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건데요?”
설마 내가 에스텔과 칼릭스의 편지를 전해 주는 걸 알아챘나?
이게 나의 마지막 만찬이야?
그러나 걱정과 달리 루시안의 대답은 평온했다.
“요즘 만날 때마다 너무 잘해 주셔서요. 며칠 전에도 제게 선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해 주시고요. 그래서 뭔가 제게 잘못한 것이 있으신가, 생각했습니다.”
눈치 빠른 남자 같으니라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쩔 건데요?”
“…….”
“화낼 거예요?”
아니면 단칼에 저세상 목숨으로 만들어 버릴 건가요?
끔찍한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접시에 오른 토마토를 찍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설마요.”
“…….”
“저는 절대 화내지 않아요. 영애는 나의 약혼녀니까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가 너무나 따뜻해서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내가 카르디엔 경이 먹으려고 아껴 두었던 과자를 다 먹어 치워 버려도요?”
“네.”
“카르디엔 경이 엄청나게 아끼는 검을 제멋대로 팔아 버려도요?”
“네.”
“카르디엔 경의 이름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후에 튀어 버려도요?”
“네.”
그는 놀랄 만큼 거침없이 대답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모두, 진심일 것이다.
그는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자신의 것을 쉽게 주는 남자니까. 그런 온화한 사람이니까.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공식적인 문서를 제대로 남기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했다가는 루시안이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우아하게 폈다.
루시안은 두 눈을 깜빡이며 내 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손가락을 다치셨나요?”
“그게 아니고, 새끼손가락 마주 걸고 약속하자고요.”
“……아.”
루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약속,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나처럼 새끼손가락을 곧게 편 그가 내 눈치를 살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냐는 듯이.
맙소사.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약속해 보는 거 처음이에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귓가가 달아오르며 수줍게 대답하는 모습이라니.
으아아, 귀여워!
어쩜 이렇게 서툴고 귀여운 거야.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선생님처럼 차근차근 말했다.
“이렇게 손가락을 걸고…….”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 순간 그가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
나는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감은 채로 엄지를 그의 엄지 위로 꾹 눌렀다.
“도장까지 찍으면 약속이 완료된 거예요.”
“…….”
평범하고 장난스럽기 짝이 없는 손동작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얽혀 있는 우리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엄청난 의식을 마친 것처럼.
잠시 후, 그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했습니다. 영애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도, 저는 절대 화내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 * *
이른 아침, 나는 신전에 도착했다.
새삼 신앙심이 폭주하여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예배실. 그곳에 칼릭스가 있었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햇빛 아래, 의자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모은 흑발 미남의 모습은 무척 멋있었다.
누구라도 넋을 놓을 만큼.
나는 멍하니 기도하는 미남을 감상하는 대신,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서 슬쩍 손을 내밀었다.
“에스텔의 편지예요.”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냉정하고 오만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세상에 더없이 귀한 선물을 받은 아이의 얼굴만 남았다.
‘처음에는 뒤늦게라도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쓰더니 이제는 조금도 하지 않는단 말이지.’
칼릭스는 더는 내게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이 온전히 표정으로 드러난 그는 뭐랄까.
‘그래, 조금 귀여워졌어.’
여전히 입이 험하고, 잘난 척할 때는 재수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봐줄 만한 건 얼굴밖에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칼릭스는 에스텔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성경책 사이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답장은 3일 후 같은 시간, 이곳에서 주도록 하지.”
“알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그는 이 제국에서 가장 핫한 신랑감이었다.
그와 단둘이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에스텔만 한 유명세가 없는 나라도.
그래서 나는 그와 에스텔이 자주 편지를 주고받게 되자 한 가지를 제안했다. 나보다는 믿을 만한 시종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게 어떻겠냐고.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하긴, 칼릭스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냉정하고 고고한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일개 시종에게 편지를 받고 젤리처럼 물렁해진 얼굴을 보여 주기는 싫을 것이다.
‘내 앞에서는 별별 표정을 다 보여 주면서 말이야.’
어쨌건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처럼 은근슬쩍 만나 칼릭스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날 불렀다.
“잠깐. 줄 것이 있어.”
줄 것?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릭스가 품속에서 꺼낸 건 앙증맞은 유리 상자였다. 상자에 그려진 문양을 보는 순간 나는 헉, 하고 입을 막았다.
“서, 설마……! 그, 그건……!”
“그래. 그대라면 알아볼 줄 알았지.”
칼릭스는 한껏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 재수 없는 모션조차 용서할 수 있었다.
왜냐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전설의 초콜릿이라고 불리는 카아나 100주년 기념 한정판 초콜릿이었으니까!
고작 30개만 제작을 해, 초콜릿 덕후들 사이에 피를 튀기게 만들었던 마성의 초콜릿이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가지기 위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나는 패배자였다.
‘고작 30초 늦게 도착했다고 내 바로 앞사람이 가져갔었지. 그렇게 너를 보내며 내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었는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칼릭스에게 초콜릿을 받았다.
“이,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하신 거죠?”
칼릭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황태자의 권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이 세상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 없어.”
오랜만에 들은 왕자병 발언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황태자 최고!
권력 최고!
나는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유리 상자 안에는 10개의 동그란 초콜릿이 들어 있었는데, 초콜릿 위에는 저마다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초콜릿이 아니라 잘 만든 예술 작품 같았다.
‘하지만 카아나 초콜릿의 진짜 매력은 생김새가 아니지.’
나는 홀린 듯한 얼굴로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맛이 입 안에 가득 찼다.
‘으아아! 완전 맛있어!’
코코아 가루가 묻은 겉은 바삭하고, 안에는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 있어 부드럽고 고소했다.
무엇보다 무지막지하게 달았다!
너무 달아서 혀가 굳어질 만큼.
‘그래. 이래야 카아나 초콜릿이지.’
감격에 찬 얼굴로 우물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에스텔의 말이 사실이었군. 초콜릿 하나를 사지 못해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고 해서 정말인가 싶었는데.”
두 사람 얘기만 꽁냥꽁냥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에스텔이 그런 내용을 편지에 썼어요?”
“그래. 그러면서 혹시 내게 그 초콜릿을 구해 줄 수 없냐고 물어보더군.”
흐엉. 착한 내 친구.
초콜릿을 위해 흘린 내 눈물을 알아채 주다니.
“그래서 에스텔에게 부탁받아서 이 초콜릿을 주신 거예요?”
“반은 그래. 그리고 반은 내 성의야.”
칼릭스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
“…….”
“그 표정은 뭐지?”
당신도 당해 보면 알 거야.
에스텔이 갑자기 침을 칙칙 뱉으며 ‘조져 버려!’라고 외치면 딱 이런 얼굴을 할 거라고.
그만큼 칼릭스와 고맙다는 말은 소름 끼칠 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표정만으로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칼릭스가 미간을 모았다.
“네가 그랬잖아. 긍정적인 의미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표현하라고.”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다만.
그가 에스텔이 아닌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신기했다.
짧은 시간, 그가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이.
나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초콜릿을 품에 안았다.
“어쨌건 고맙습니다. 준비해 주신 선물이니 잘 받을게요.”
칼릭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줄 게 있어.”
“어머. 아무리 고마워도 이렇게 선물을 많이 주시면 부담스러운데.”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는군. 그건 선물이 아니라, 약속한 물건이야.”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오늘 그대의 저택에 도착할 테니 잘 받도록.”
약속한 물건이라고?
설마……!
“꺄악!”
앤과 나는 엄청난 비명을 내질렀다.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성의 시종이 직접 저택까지 배달해 준 물건은 바로 루시안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그것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그림을 손수 배달한 시종이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전언입니다. 입수한 원본은 훼손이 많이 된 데다 너무 작은 크기라, 궁중 화가를 시켜 초상화를 다시 제작했다.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최상의 캔버스에, 최고의 실력을 가진 화가가 복원했으므로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더 뛰어날 것이다. 모쪼록 만족스럽길.]으아니. 칼릭스, 이 사람아.
어쩜 이렇게 장한 일을 했어!
나는 감격에 찬 얼굴로 거대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캔버스에는 열 살쯤 된 아이의 얼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커다란 붉은 눈동자. 은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수줍게 웃는 아름다운 아이라니.
“꼭 천사 같아요.”
황홀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앤의 말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천사보다 더 예쁘지.”
앤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림 속의 아이는 아름다웠으니까.
여신을 지키는 어린 천사를 상상해서 그렸다고 해도 이보다 더 사랑스럽지는 못할 것이다.
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런 초상화를 어떻게 구하신 걸까요.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카르디엔 님은 성녀님께서 거두어 주시기 전까지는 이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자라셔서, 제대로 된 기록이 거의 없잖아요.”
“뭐, 권력은 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쉽게 해내는 법이니까.”
원작에서 칼릭스는 황태자라는 권력을 이용해 오만 가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쉽게 해냈다.
빵 가격이 너무 비싸 가난한 이들이 굶는다며 속상해하는 에스텔을 위해 제국에 있는 밀가루 가격을 반이나 낮춰 버리고, 평민들이 전액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학교 설립에, 수천 개의 의료원 설립 등등.
가난한 이를 위한 전례 없는 정책을 펼쳐 희대의 성군이라는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다.
‘모두 에스텔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한 것뿐이지만 말이야.’
어쨌건 요점은 칼릭스가 정말 원한다면 이 세상에 못 할 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떻게 이 초상화를 구했는지보다는 어떻게 이런 초상화를 그렸는지가 더 궁금했다.
‘루시안이 어렸을 땐 사람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할 만큼 경계심이 심했어. 그런 그에게 어떻게 이런 화사한 미소를 짓게 한 걸까.’
자연스러운 그 미소는 화가가 상상해서 그려 낸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후 나는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듣게 되었다.
* * *
오랜만에 에스텔이 저택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흥분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에스텔을 맞이했다.
“서, 성녀님, 오셨군요! 그간 잘 계셨는지요. 며칠 전 행사 때 읊으신 기도는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마치 여신의 목소리로 듣는 것 같았어요. 여신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여덟 살 때, 강아지 포포가 죽어 엉엉 울었던 날, 꿈에 여신께서 나타나 저를 위로해 주셨…….”
절절한 아버지의 투머치토크를 무시하며 나는 힘차게 방문을 닫았다.
“페, 페르니아!”
문을 닫기 직전 나 좀 껴 달라는 아버지의 눈빛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오랜만에 갖는 우정의 시간을 아버지의 수다로 채울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에스텔은 닫힌 방문을 보며 키득거렸다.
“후작님께서는 제가 올 때마다 늘 격하게 환영해 주시네요.”
“우리 아빠, 인기 많은 사람만 보면 친해지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딸 친구에게 저렇게 푼수를 떨어 대다니 조금 부끄럽네요.”
“귀족들 중 저를 이 정도로 솔직하게 좋아해 주시는 분이 없잖아요. 그래서 전 아주 재미있어요.”
크흡, 오늘도 에스텔은 천사였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에스텔을 방 한편에 있는 티 테이블로 안내하며 말했다.
“일단 황태자 전하에게 받은 편지부터 줄게요.”
에스텔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와중 시간을 쪼개 그녀가 이곳까지 온 것은 나와 수다를 떨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칼릭스의 편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편지를 받은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늘 고마워요, 니아 님.”
순수하게 고마운 인사면 좋으련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삐죽였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친구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요.”
“하지만…….”
“물론, 황태자 전하의 심부름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요. 그것도 괜찮아졌어요. 어제 전하께 엄청난 보상을 받았거든요.”
“보상요?”
“네.”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벽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본 에스텔이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루시안의 초상화네요.”
맞습니다!
그 귀한 것이 지금 이 순간 내 방에 있다고요!
소중한 것은 늘 독점하고 싶은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 오덕의 심정이었다.
나는 한껏 어깨를 올리며 말했다.
“예쁘죠?”
“네, 정말요.”
에스텔은 감탄 어린 눈으로 초상화를 살펴보더니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이 그림이 아직 남아 있었군요. 너무 오래전에 그린 것이라 분실되었을 줄 알았는데. 전하도 이런 것을 용케 찾으셨네요.”
“이 초상화를 아세요?”
“그럼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이날, 루시안은 최연소로 기사단에 입단했거든요. 그것을 기념한다며 기사단에서 그려 준 초상화예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게 그때 그린 초상화였구나.’
소설 속에서 짤막하게 나온 일화였다.
루시안은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황실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본다. 원래라면 어림도 없는 나이였기에 많은 이들이 코웃음을 쳤다.
어린 나이에 물불도 모르고 설치다가 다리 하나를 잃어야 정신을 차릴 거라는 말도 들었다.
불신, 무시, 조롱, 걱정.
수많은 불안한 말들 속에서 루시안은 당당히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
물론 아무리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기술이 미숙했기에 여린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남았다.
그럼에도 그가 어린 나이에 기사단 시험을 친 이유는 단 하나.
에스텔 때문이었다.
‘그녀를 지켜 주고 싶어서.’
그 무렵 루시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저주받았다고 멸시받는 붉은 눈동자와 비쩍 마른 몸뚱이 외에는.
에스텔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어린 소년은, 기사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이뤄 낸 기적 같은 성과였다.
스치듯 지나간 짧은 이야기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었는지.
에스텔을 향한 루시안의 참사랑을 응원하며 눈물을 쏟아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상했다. 그때의 기분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짝사랑에 짠해지기는커녕 목 안에 뭔가가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에스텔이 따스한 눈동자로 말했다.
“갑자기 그리게 된 초상화라 루시안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몰라요. 화가가 아무리 웃으라고 해도 딱딱한 표정만 짓기에 제가 화가 뒤에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답니다.”
에스텔은 두 손으로 입꼬리를 올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이 모습이 우스운지 그제야 웃더라고요.”
그제야 알았다.
어린 루시안이 짓고 있던 미소는, 그녀 때문이었구나.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볼이, 사랑스러울 만큼 부드럽게 휜 눈매가 모두.
에스텔을 향한 것이었어.
2권에서 계속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랍니다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