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2
8.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누구도 믿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루시안이,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오직 에스텔의 앞뿐이었을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가슴이…….’
나는 콩콩 뛰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심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릿한 감각.
“니아,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아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방에 들어섰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나는 미간을 모았다.
“아버지, 허락도 받지 않고 숙녀의 방에 들어오는 건 실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실례고 뭐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페르니아.”
늘 실실 웃던 아버지가 정색을 하니 어깨가 움찔했다.
뭐지. 용돈을 탈탈 털어 루시안에게 옷을 사 준 것을 들켰나.
서재에 굴러다니던 아버지의 책사이에 끼어 있던 돈으로 앤의 휴가를 보내 준 걸 들켰나.
칼릭스에게 받은 카아나 초콜릿을 아버지 몰래 하녀들과 나눠 먹은 것을 아셨나.
지은 죄가 많아 침을 꿀꺽 삼키는 내게 아버지가 외쳤다.
“왜 황제 폐하께서 널 보자고 하시냔 말이다!”
갑자기 웬 황제?
* * *
방금 전까지 내 방에서 에스텔과 하하, 호호 대화를 나누던 나는 지금 황성에 와 있다.
그것도 황성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황제의 방문 앞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의 옥체가 편치 않으신지라, 알현실이 아닌 침실에서 손님을 맞는 것을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알현실이든 침실이든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에스텔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텔은 시종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폐하께서 부르신 분은 페르니아 라일락 님뿐입니다. 성녀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 에스텔이 황제의 방에 들어서는 것을 제지당한 것은 처음일 것이다.
에스텔은 여신의 힘으로 죽을 뻔한 황제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었다.
덕분에 황제는 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에스텔의 왕팬이었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권리까지 줄 정도로.
그래서 에스텔은 시종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도대체 폐하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영애를 찾으시는지 걱정이 되어 그래요. 모쪼록 동석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시종은 고개를 내저었다. 단호한 얼굴이었다.
한 번 더 부탁하려는 에스텔을 내가 막았다.
“괜찮아요. 다녀올게요.”
뭐, 에스텔의 절친으로 소문나 있는데 날 어떻게 하진 않겠지.
에스텔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니아 님. 별일 아닐 거예요. 폐하는 자애로운 분이시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엄청 별일일 것 같은데요?
에스텔에게는 온화한 황제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개싸가지 칼릭스의 아빠이며 냉정한 황태후의 아들이었으니까.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많은 이들에게 황제는 무시무시한 호랑이일 뿐이었다.
황제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왜 나를 부른 걸까.’
일개 후작 영애인 나는 황제와 조금도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연결 고리를 찾자면 그가 그토록 아끼는 기사인 루시안이 나의 약혼자라는 것?
‘설마 이제 와서 내가 거슬리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얼마 전 루시안은 황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내가 황태후에게 당한 일을 일렀다.
황제는 루시안의 기분을 달래 주기 위해 내 편이 되어 주긴 했지만, 분란을 일으킨 내가 곱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 사교계에서 내 평판도 형편없고.’
여러모로 내가 루시안의 상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 폐하, 나를 루시안의 약혼녀로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이제 와서 나보고 마음에 안 든다고 타박하려는 거라면 정말 너무한 거예요.’
억울함에 주먹을 바르르 떨던 나는 숨을 멈췄다.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방 안. 휘장이 걷힌 거대한 침대 위에 기대어 있는 황제 때문이었다.
놀랐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카락. 생기라고는 없는 창백한 얼굴. 살짝 처진 눈매 아래로 새까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는 그는 엄청난 미중년이었다.
‘이 모습 어디가 다 큰 아들을 둔 아저씨야?’
남주의 우월한 유전자가 아버지에게서 이어진 것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라.’
오랜 병환 때문일까. 아니면 황제의 제복이 아닌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어서일까.
침대에 편안히 기대어 있는 그에게서는 나른한 분위기가 풍겼다.
유순하고 우아한 고양이 같달까.
그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마어마한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에게선 엄청난 위압감이 풍겼다.
남주인 칼릭스와 서브 남주인 루시안과는 결이 또 다른, 오랜 세월 황금의 관을 지킨 이가 가진 관록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치맛자락을 잡았다.
“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라일락 후작의 딸, 페르니아입니다.”
황제가 내리깐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일단 사과를 하마. 약혼식 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
“병환이 있으셔서 오지 못하신걸요.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황제는 온화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루시안과는 제법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지?”
“그럭저럭 그렇습니다.”
“강제로 시킨 약혼이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루시안이 네게 호의적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에스텔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고. 그저 외모만 고운 귀족 여인인 줄 알았는데, 네게 짐이 모르는 매력이 있었던 모양이야.”
예상과는 달리 술술 나오는 칭찬에 나는 한결 더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일까.
잠시 후 황제가 말했다.
방금까지와는 달리 전혀 다른 엄한 눈빛이 되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황태자와의 스캔들은 곤란하지 않느냐.”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입을 뻐끔거리는 나를 향해 황제가 말했다.
“너와 황태자가 주기적으로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에서 만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게 사실이냐?”
황제의 눈빛에서 제발 내가 그 말을 부정해 주길 여실히 바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칼릭스가 만난 건 사실인걸.’
그와 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는 건 엄청난 오해였지만.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황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사실이구나.”
“하지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며칠에 한 번씩, 젊은 남녀가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냐?”
“그건…….”
황제는 에스텔을 무척 좋아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존재에 대한 고마움과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러나 과연 제 아들의 상대로도 그녀를 반겨 줄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황제는 두 사람이 이어지기 전 수명이 다해 버리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황제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해도 되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두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황제는 고요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지.’
숨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칼릭스와 에스텔이 등장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두 사람은 동시에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칼릭스가 말했다.
“아바마마,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급한 사안이 진행되는 것으로 판단해 이렇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와 관계된 일 때문에 페르니아 영애를 부르신 거지요?”
“잘 알고 있구나.”
“아바마마가 저를 감시하라고 붙이신 놈들은 입이 싸니까요.”
“하여간 녀석들, 또 들켰나 보군.”
황제는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곤란한 눈빛으로 칼릭스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네가 대답하거라. 도대체 페르니아와는 무슨 사이인 거냐. 역시 교제를 하고 있는 거냐?”
“끔찍한 말씀입니다!”
“끔찍한 말씀입니다!”
칼릭스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그럼? 단순한 불장난을 즐긴 건가?”
“아니요!”
“아니요!”
이번에도 동시에 부정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기운 넘치는 두 남녀가 은밀한 곳에서 만나 무얼 했다는 거냐.”
칼릭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제가 쓴 편지를 에스텔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이어, 내 옆에 서 있던 에스텔도 눈썹을 내리며 고백했다.
“그리고 제 편지도 전하께 전해 주셨죠. 니아 님은 저희 둘을 위해 고생하신 죄밖에는 없습니다, 폐하.”
황제의 눈이 커졌다.
황제는 칼릭스와 에스텔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 너희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네.”
다시 한번 대답을 들은 황제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황제는 황태자와 에스텔의 사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 듯했다.
적어도 네가 감히, 라는 눈초리로 에스텔을 노려보거나, 에스텔을 향해 물을 들이붓지는 않았으니까.
그것을 눈치챈 칼릭스가 잽싸게 황제에게 말했다.
“아바마마, 저와 에스텔은 지금 특별한 감정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우정을 말하는 거냐?”
“아니요. 사랑입니다.”
정말 놀랐다.
칼릭스가, 그 개싸가지에 츤데레 칼릭스가, 저런 말을 다이렉트로 입 밖에 내뱉다니.
황제도 그런 칼릭스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뜬 황제의 시선이 에스텔에게 향했다.
“너도 같은 생각인 거냐, 에스텔?”
“네.”
두 손을 모은 에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녀도 칼릭스에 대한 감정을 인정한 것이다!
그 순간 칼릭스의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한 감정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에스텔…….”
“전하…….”
감격에 찬 얼굴로 서로를 마주한 칼릭스와 에스텔을 보자니 마치 소설의 엔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작품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그러나 늘 그렇듯 세상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칼릭스의 얼굴은 황제의 한마디에 일그러져 버렸다.
“그건 좀 곤란한데…….”
방금 전까지 설탕에 절인 듯한 표정을 지었던 칼릭스는 대번에 독약을 마신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녀가 평민이라서입니까? 아니면 그녀가 성녀라서요? 어떤 이유로든 아바마마께서 저와 그녀의 사이를 갈라놓으실 순 없습니다.”
그러기만 해 봐. 그 즉시 황위 계승권 때려치우고 도망가 버릴 거야.
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반항심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철이 덜 든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는 대신 차분히 대답했다.
“설마. 게다가 한쪽이 부족해서 교제를 반대한다면 그건 에스텔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겠지. 어리석은 아들아.”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칼릭스를 향해 황제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어.”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황제는 슬쩍 에스텔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며칠 전 세브란 왕국에서 에스텔의 국립 의료원 입학을 허가하는 통지서가 왔거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와 칼릭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칼릭스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브란 왕국의 국립 의료원은 외국인의 입학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규정대로라면 그렇지. 하나, 짐의 추천서와 에스텔이 정리한 의료 지식을 인정받아, 특별히 허가가 났단다. 입학을 하게 되면 최소 5년은 그곳에서 지내야 해.”
‘그러고 보니…….’
나는 최근 본 에스텔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스텔은 제국의 의술로는 환자를 고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답답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밤 타국의 의료 서적을 미친 듯이 읽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하루하루 얼굴이 초췌해질 만큼.
‘단순히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입학 준비를 했던 거구나. 하지만 왜 자세한 상황을 얘기해 주지 않았던 거야?’
에스텔은 자신의 일을 하나하나 다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큰일을 말해 주지 않다니 서운했다.
칼릭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뒤통수를 거세게 맞은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다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정말이야, 에스텔?”
“네.”
“그럼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에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꼭 잡았다.
잠시 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전하께도, 니아 님에게도 괜한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어떻게 괜한 신경이야! 네 일인데!”
(에스텔 한정) 솜사탕처럼 보드라웠던 칼릭스의 외침에 에스텔이 어깨를 움찔했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혀를 찼다.
“아들아, 그 성질머리 좀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상황을 보니 한눈에 알겠다. 에스텔은 계속 말할 생각이 없었을 거다. 왜냐면, 며칠 전 내게 찾아와 입학을 취소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
나와 칼릭스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는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토록 절실히 원하던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의문이 들었는데 못난 아들놈 때문이었을 줄이야.”
황제는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대로 포기할 셈이냐, 에스텔? 세브란 왕국의 국립 의료원은 입학을 걷어찬 네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네가 그토록 원하던 세브란 왕국의 의학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네.”
에스텔은 결심한 듯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마도 칼릭스 때문일 것이다.
세브란 왕국은 제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가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 무려 5년이나 있어야 한다니.’
에스텔이 세브란 왕국에 간다면, 겨우 가까워진 두 사람의 끈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이제 막 그에 대한 사랑이 꽃핀 에스텔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에스텔이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너무나 그녀다웠다.
사랑이 넘치고, 사람을 좋아하고, 제 것을 희생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에스텔.
‘하지만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해?’
나는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제 꿈을 포기한 여인을 바라보는 칼릭스의 얼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타인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이전의 그였더라면, 이 순간 한없이 기뻐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제 곁에 있고 싶어 하니 그저 좋아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눈이 마주친 칼릭스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타인을 위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숨기지 말고.
내가 그에게 교정 수업을 했던 날 알려 준 말이었다.
칼릭스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는 에스텔을 향해 말했다.
“세브란 왕국으로 가.”
“전하…….”
“몇 번이나 말했잖아. 더는 참지 말라고. 네가 하고 싶은 건 모두 하라고. 내가 그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
“내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게 할 셈이야?”
에스텔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네가 돌보던 사람들은 걱정 마.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돌볼 테니까. 네가 돌아왔을 때쯤에는 제국 곳곳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과 학교도 설립되어 있을 거야.”
“…….”
“편지도 매일 쓸게. 기회가 될 때마다 너를 보러 갈 테고. 그러니까…….”
“…….”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다녀와.”
원작에서 칼릭스는 내내 삽질을 일삼다가 마지막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에스텔이 상처받기 전에, 그녀가 그를 떠나기 전에 철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완벽한 로맨스의 남주, 그 자체였다.
순정적이며, 애정이 충만한.
에스텔은 감격에 찬 얼굴로 칼릭스를 바라보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제발 그래 줘. 내 부탁이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이 제국의 아픈 이들을 모두 고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의술을 배워 올게요.”
에스텔은 마주 본 칼릭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니 부디 기다려 주세요, 칼릭스.”
“물론이야. 영원히 너를 기다릴게, 에스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두 남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뻘쭘해진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열 손가락이 자꾸 오그라드는 탓에 나는 결국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기댄 황제는 흐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예정대로 국립 의료원에 입학한다는 말이지?”
커플 세상에 빠져 있는 에스텔을 대신해 내가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그것참 다행이군.”
황제의 얼굴에선 에스텔이 원하던 유학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가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황제는 에스텔을 아끼는 것 같네.’
그때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처진 눈이 휘어졌다.
“괜한 오해를 해 애꿎은 아이만 잡을 뻔했구나. 용서하거라.”
“그럴 법한 상황이었는걸요. 이해합니다.”
내 대답에 황제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호탕하구나. 소문과는 전혀 달라.”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이라 어떤 소문이냐고 묻지 않았다.
오만하고, 까칠하며, 성격 더러운 귀족 영애 페르니아. 뭐 그런 것이겠지.
나는 ‘막상 보니 제법 괜찮죠?’라는 말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황제의 말이 이어진 순간 얼음처럼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를 알겠어, 루시안.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나오거라.”
화려한 황제의 침대 뒤편에 쳐져 있던 휘장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루시안이었다.
* * *
황성을 나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차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주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능구렁이 황제 아저씨 같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황제는 내가 오기 전 미리 루시안을 불러 침대 뒤편에 대기시켜 놓았다.
[너와 칼릭스가 진지한 사이라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이 루시안이잖니. 그 애는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니, 약혼녀의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부들부들 떠는 나를 향해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나?]라니!
타인의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건 황족의 전통인가 보다.
당연히 기분 나쁘지.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제삼자에게 대화를 듣게 한 거잖아. 그렇게 끔찍한 상황이 어디 있어?
그러나 황제는 나의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애는 아직 순진하구나. 이 방 안에 짐과 영애, 둘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냐?]그제야 깨달았다.
거대한 방, 방을 둘러싼 휘장 사이사이에 얼핏 보이는 그림자를.
아마 황제를 지키는 호위 기사나, 황제의 말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서기. 언제든지 황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준비된 시종들일 것이다.
[황제의 방에는 늘 수많은 귀가 있지. 거기에 루시안이 한 명 끼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황제는 산뜻하게 말했지만, 내 기분은 도무지 산뜻해지지 못했다.
왜냐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루시안에게 숨겨 왔던 일을 알리게 된 셈이니까.
‘젠장!’
루시안은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칼릭스와 에스텔의 편지를 전해 주는 것도, 그 두 사람이 어느덧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도.
아무것도.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게 되다니. 얼마나 배신감이 클까.
맞은편에는 루시안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나는 애써 창문으로 시선을 옮긴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침묵이 점점 묵직하게 가슴을 억눌렀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한참 후,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나를 향한 비난도, 서운함도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영애.”
“……뭐가요?”
“아무리 폐하의 명령이라도 그렇게 숨어서 영애의 이야기를 들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건 영애를 기만하는 행위였으니까요.”
루시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의 잘못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잘못을 생각하는 남자라고 감동받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 싸늘했다.
나는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애써 말했다.
“괜찮아요. 기사에게 주군의 명령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원치 않아도 따라야 하는 거잖아요.”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약혼을 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내 말에도 루시안의 얼굴은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얼핏 차분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그것을 본 순간 심장이 콱 막혀 왔다.
어째서인지 그 순간 루시안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지금 내게 보여 준 싸늘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봄의 햇살처럼 수줍은 미소.
그것은 모두 에스텔을 향한 것이었지.
아무리 그가 지금 나를 약혼녀로서 존중한다고 해도, 나에 대해 호의가 생겼다고 해도, 에스텔을 향한 감정보다 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당신의 약혼녀인데.’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카르디엔 경 몰래 황태자 전하의 편지를 에스텔에게 전해 주어서 화가 난 거죠?”
“…….”
“하지만 에스텔을 돕지 않을 수 없었어요. 왜냐면 에스텔은 황태자 전하와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정말 행복해 보였으니까.”
루시안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에 울컥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이제는 깔끔하게 그녀를 포기하란 말이에요.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쟁이야!”
이 미친 입아.
뒤늦게 입을 막았지만, 이미 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 나가 버린 후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천천히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내 말은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모양이다.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가 저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나를 어떻게 하는 건 아니겠지? 나랑 약속까지 했잖아.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날 용서해 주겠다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그것이 유일한 내 생명줄인 것처럼.
깊게 한숨을 내쉰 루시안의 시선이 내게 와닿았다.
붉은 눈동자는 방금 전보다 훨씬 격정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루시안이 그답지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아직까지도 그런 걸 신경 쓰시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네?”
“성녀님을 흠모했던 건 사실입니다. 영애가 그걸 눈치챘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에요. 몇 번이나, 영애에게 그것을 표현했는데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줄이야.”
“…….”
에스텔에 대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에스텔을 향한 그의 감정이 얼마나 진득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입으로 직접 에스텔에 대한 감정을 부정하는 말을 듣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지금 왜 화가 난 건데요. 에스텔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다면 내게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요.”
“영애가 황태자와 단둘이 만났으니까요!”
“…….”
“압니다. 단순히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서였겠죠. 하지만, 제가 모르는 곳에서 영애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불쾌해요. 아주 더럽습니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이었다.
그게 무섭다고, 어색하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그의 말이 너무 엄청나서.
온몸이 후들거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붉은 눈동자에 절절한 애정을 담고.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이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페르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