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3
9. 외전 후회하는 남주의 아빠랍니다
“폐하, 카르디엔 경이 도착했습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기댄 황제의 앞에 루시안이 나타났다.
루시안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은색 갑옷에 황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망토. 제대로 갖춰 입은 루시안의 모습은 그림처럼 근사했다.
황제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어서 오거라, 루시안.”
“옥체는 좀 어떠십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다.”
눈을 내리깐 황제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워낙 또렷한 이목구비 덕에 특유의 미색은 여전했으나, 얼굴 전반에 병자의 고통이 어려 있었다.
오래전 삼킨 독으로 인해 내장이 모두 망가졌기 때문이다.
에스텔이 가진 성녀의 힘으로 간신히 생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누구도 입에 담지 못했지만, 황제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에 서 있을지라도 황제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이가 다름 아닌 루시안이었기 때문이다.
“기사 훈련은 잘 끝났느냐.”
“예. 기사들이 잘 따라와 준 덕분에 큰 문제없이 마무리됐습니다.”
루시안의 말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최근 루시안은 황제에게 명을 받아 제국의 기사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체계적인 군사 훈련이라기보다는 기사의 기강을 잡고, 백성들에게 나라의 부강함을 보여 주기 위한 행사였다.
자존심이 센 기사들을 데리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훈련하는 것이었기에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그 어려운 것을 루시안은 문제없이 해냈다.
황제의 기대대로.
“고생이 많았다.”
황제의 칭찬에 루시안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어진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대답하긴 했으나 루시안은 현재 황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기력이 약해진 황제 대신 루시안은 많은 것을 해냈다.
기운 넘치는 기사들과 오만한 귀족들이 차마 황제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루시안 덕분이었다.
붉은 눈을 가진 제국 제일의 기사.
그가 황제를 모시는 한 누구도 쉽사리 반역을 꾀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루시안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던 분쟁 지역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제국은 전례 없는 평화 속에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루시안을 마음 깊이 아꼈다.
“이번 일에 대해 보상을 해 주고 싶구나. 뭐 바라는 것은 없느냐.”
그러나 루시안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이미 넘치는 보상을 해 주셨습니다.”
황제의 넘치는 총애를 받고 있음에도 루시안은 늘 욕심이 없었다.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은 늘 황제 쪽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루시안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비록 단승 작위이긴 하지만, 평민 출신인 루시안에게 경의 칭호를 주었고,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긴 하나 작은 영지도 내려 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그가 주고 싶었던 것이지, 루시안이 바랐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는 아쉬움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번에도 보석과 검을 내려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구나. 얼마 전처럼 네가 솔직하게 바라는 것을 말해 주길 원했는데, 너무 큰 욕심을 부린 모양이야.”
황제의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렸던 다음 날, 루시안이 황제를 찾아왔다.
황제는 크게 놀랐다. 루시안이 황제를 찾아오는 건 공적인 업무가 있을 때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사적인 일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루시안이 무슨 말을 할까 설레고 있는 황제에게 루시안이 말했다.
[폐하, 어제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아시는지요.] [무슨 일을 말하는 거냐.]흥미진진해하는 황제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황태후마마께서는 제 약혼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설마 했더니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사실 황제는 어제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시종이 상세히 보고한 내용 중 특별한 사건을 꼽자면 황태후가 페르니아를 건드린 것이었다.
황제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황태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 영애들을 책잡은 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종적이었던 에스텔이 제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며 황태후에게 한마디 했다는 것이 조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건 황제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제의 일을 입에 담는 루시안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황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마마마가 네 약혼녀를 건드린 것이 많이 불쾌하더냐?]루시안은 예, 라는 대답 대신 한마디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분이 황태후마마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폐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그 말인즉, 상대가 황태후가 아니었다면 참지 않고 적으로 분류했을 거라는 말이다.
주군의 어머니였기에 루시안이 제 감정을 참고 황제를 찾아온 것이었다.
‘직접 손대지 않을 테니 내 선에서 처리를 해 달라는 이야기로구나.’
황제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루시안이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처음으로 청한 것이 제 어머니를 혼내 달라는 내용이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어마마마가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군.’
그러나 황태후도 정도가 지나치긴 했다.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애꿎은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 일을 계기로 황태후의 성정이 누그러진다면 나쁠 게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 페르니아 영애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시라고 말씀드리겠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황제의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이 며칠 전의 일.
루시안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주군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루시안은 짧은 보고를 마친 후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축객령을 기다리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오늘 루시안을 부른 것은 기사 훈련에 대한 업무 보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칼릭스와 페르니아가 밀회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황제는 모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루시안이 두 사람의 밀회를 알고 있다면 저토록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 없었다.
황태후가 약혼녀를 조금 건드렸다고 그토록 분노했던 루시안이 아니던가.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루시안이 칼릭스와 척을 지면 곤란하지.’
아무리 골칫덩이라고 해도 칼릭스는 소중한 후계자였다. 제국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루시안과 사이가 벌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루시안, 약혼녀인 페르니아 영애와 사이가 무척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페르니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침착했던 루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루시안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짐의 고집으로 맺은 정략혼이었는데, 상대가 마음에 든다니 기쁘구나.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네가 그렇게 빠진 게냐.”
황제가 페르니아에 대해 물은 것은 처음이라 루시안은 잠시 당황했다.
루시안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여름의 포도 같은 여인입니다.”
“…….”
“진한 보라색 껍질은 화려하고 다부져 보이지만, 그 속에는 무엇보다 보드랍고 투명한 알맹이가 숨겨져 있죠.”
도도한 모습으로 톡톡 쏘는 모습의 이면에는 누구보다 여린 마음이 숨겨져 있다.
루시안은 그래서 그녀가 좋았다.
작은 머리로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은 본심을 들켜 버리는 그 어설픔이.
누구보다 타인을 배려하면서 스스로 뻔뻔하다고 착각하는 그 어리석음이.
사소한 것 하나에 행복해하는 그 천진함이.
그 모든 것이.
황제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 루시안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 나뿐이라 다행이로군.’
루시안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지고 있는 외모만큼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눈빛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영혼이 없는 예술품이나, 향이 없는 꽃처럼.
그러나 지금의 루시안을 본다면 누구도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루시안의 붉은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세상만사를 다 겪은 황제마저 묘한 감정이 들 만큼.
그러나 지금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에 취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황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래. 그 말만으로 그녀가 네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한 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말에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황제는 루시안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알고 싶으냐.”
“물론입니다.”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이라는 말에 루시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루시안은 황제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온화하고 제 사람에게 많은 것을 베푸는 이였지만, 결코 마냥 무른 호인은 아니었다.
황제는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렇듯 조건을 내걸 때는 더더욱.
“내가 지금 말해 준 이야기 때문에 분노가 일더라도 절대 피를 보지 말거라. 그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루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저런 말까지 꺼내는 것일까.
어찌 됐든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루시안이 들어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맹세할 수 있느냐.”
그럼에도 루시안은 황제의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페르니아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맹세하겠습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풀어졌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야기를 루시안에게 먼저 꺼낸 이유는, 바로 저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루시안은 허투루 맹세를 입에 담지 않는다.
저렇게 맹세까지 한 이상, 절대 칼릭스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칼릭스와 페르니아가 은밀한 사이인 것이 밝혀지더라도 말이다.
‘이로써 아들놈의 목숨은 보장을 받은 셈이니 이야기할 수 있겠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칼릭스와 페르니아가 밀회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
그 순간 루시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물론 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만나는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어. 몇 번의 만남이 단순히 우연이었던 건지, 아니면 어떠한 의도가 있었던 건지.”
“…….”
루시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얼굴에는 숨 막힐 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만약 루시안의 앞에 있는 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황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금 후에 사실 확인을 위해 페르니아가 이 자리에 올 것이야. 그녀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듣는 편이 확실할 테지.”
때맞춰 시종이 방문을 열었다.
“폐하, 페르니아 라일락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황제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약혼녀의 앞에서 진실을 듣겠느냐, 아니면 숨어 있겠느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루시안은 원망스러운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제 편한 대로 할 말을 하고 몰아치다니.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런 짓을 페르니아에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황제의 명을 어기고 방을 나갈 수도 없었다.
단순히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숨 막힐 만큼 두려운 진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시안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휘장이 내려와 그의 모습을 가렸다.
찰나의 순간 황제는 분명히 보았다.
루시안의 얼굴은 패배가 확실시되던 전쟁터로 나가던 날과 같았다.
끔찍한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버린.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