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4
10.
앤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가씨, 카르디엔 님이 오늘도 선물을 보내셨어요.”
직속 하녀인 앤 외에도 저택의 하녀들이 모조리 몰려들었다.
쉴 새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물건들을 보며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우와! 저거 루이뷔롱에서 새로 나온 가방 맞지? 황금 실로 수놓았다는 그 가방.”
“맞네, 맞아.”
“그 옆에 있는 건 샤넬르가 만든 드레스잖아. 치맛자락에 박힌 오만 개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때문에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도 힘들다는 소문이 정말이었어. 실명할 것 같아!”
“저 드레스를 가질 수 있다면 난 평생 실명해도 괜찮은데.”
그녀들이 내뱉은 말에서 알 수 있듯 루시안이 보내온 물건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했다.
가방, 드레스, 구두, 목걸이, 귀고리, 팔찌.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최고급 브랜드의 상품이었다.
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만한 선물을 매일 보내시다니 역시 카르디엔 님은 대단하세요. 과연 이 제국 최고의 신랑감!”
얼마 전, 루시안은 제국 최고의 기사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별명이 바뀌었다.
황제에게 받은 그의 작은 영지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잭팟이 터진 것이다.
덕분에 그는 엄청난 부자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하하. 카르디엔 경도 참, 광산 하나 발견했다고 씀씀이가 너무 헤프구나. 매일 이런 선물을 보내다니. 보낸 선물이 너무 과해서 낡은 저택이 터져 버릴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며칠간 그가 보내온 선물들로 저택의 방들이 꽉 차 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물건이 자리를 몽땅 차지해서 잠잘 공간까지 사라져 버리겠어.’
나는 새침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 물건들 모두 카르디엔 경에게 되돌려 보낼 테니까요.”
그 말에 신났던 아버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었다.
“꼭 그래야 하니, 페르니아? 약혼녀에게 호의로 보낸 선물이 아니냐. 주는 선물은 받는 게 예의야.”
“선물도 선물 나름이지, 이건 너무 과하잖아요.”
“하지만……. 그럼 이 로랭스 시계만이라도.”
“제자리에 두세요.”
“루이뷔롱 가방이라도.”
“제자리에 두시라니까요.”
“그럼 이 다이아몬드 단추라도.”
“아, 쫌!”
나의 매서운 시선에 아버지는 큼직한 다이아몬드 단추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얼굴로 한탄했다.
“페르니아, 아빠의 다이아몬드 단추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는 못할 게다. 열일곱 살 때 데뷔탕트에서 일어난 일이었단다.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었기에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으로 꾸미고 연회장에 나갔지. 정말로 모든 것이 완벽했어. 그런데 실비아,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 걸려 입고 있던 재킷의 첫 번째 단추가 떨어진 거야. 그것도 어딘가로 대굴대굴 굴러가 보이질 않았지. 절망에 빠진 나를 향해 실비아가 말했어. 제가 여분 단추를 가지고 있어요. 다이아몬드 단추라 조금 무겁긴 하지만 잘 어울…….”
“앤, 문 닫아.”
“네.”
앤은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아버지의 투머치토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천장까지 쌓인 상자를 뒤로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앤, 외출 준비를 해 줘. 마차도 준비시키고. 카르디엔 경의 저택에 갈 거야.”
앤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선물을 모두 되돌려 주시려고요?”
“그렇다니까.”
“예전에는 카르디엔 님께서 주신 선물은 다 받으셨잖아요. 양이 좀 많긴 하지만 호의로 보낸 선물을 굳이 돌려보내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때는 단순히 친구로서의 호감이라고 생각했으니 받은 거지.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라.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보낸 선물이라고.’
같은 선물이라고 해도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부담스러워 미치겠다.
앤에게 그런 상황을 다 말할 수도 없는지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카르디엔 님께 고백이라도 받으신 거예요?”
나는 헉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앤을 바라보았다.
순간 너무 놀라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도 못 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황제처럼 나를 감시라도 한 거야?”
한껏 놀란 나와 달리 앤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황제 폐하를 뵙고 온 후에 아가씨가 부쩍 달라지셨으니까요.”
“내가?”
“네. 그날부터 제대로 잠을 못 주무시잖아요. 카르디엔 님의 이름만 나오면 어깨를 움찔거리고, 얼굴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르셨죠. 꼭 지금처럼요.”
“……!”
이럴 수가. 다 표가 났었다니.
나는 뜨겁게 열이 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앤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어요. 머지않아 카르디엔 님이 아가씨께 고백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새삼 앤이 달라 보였다.
유순한 얼굴의 앤이 마치 세상만사를 다 꿰뚫고 있는 무당처럼 용해 보였다.
“몸에 신이라도 들어선 거야?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앤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 아가씨와 함께 있는 카르디엔 님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눈치챘을걸요. 카르디엔 님은 아가씨 앞에서만 분위기가 완전 달라지니까요.”
“……그랬어?”
“네.”
앤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디엔 님은 저 같은 고용인들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시죠. 늘 친절하시고요. 그런데도 대하기 어려운 감이 있어요. 뭐랄까. 분명 바로 앞에 서 계신데도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분이 아가씨와 함께 있을 때면 아이처럼 웃으시더라고요. 그러니 그분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지요.”
“…….”
“카르디엔 님은 아가씨를 정말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시는 게 분명해요.”
앤의 말이 머릿속에 파고들어 떠나질 않았다.
젠장.
그에게 고백을 받았던 그날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 * *
루시안의 저택에 온 건 오랜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잊고 있던 루시안의 부관 폴이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페르니아 님.”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폴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요. 매일같이 루시안 님께 페르니아 님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아서 보고해야 했으니까요.”
“……아.”
“게다가 구입한 물건과 그 청구서는 하루에도 몇십 개가 날아오는지. 물건이 제대로 왔나 일일이 확인하고, 결제를 하고, 물건을 재포장하여 페르니아 님 댁으로 발송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더군요. 그 탓에 전쟁터에 있을 때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고생이 많네요.”
내가 그를 괴롭힌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이는 건 왜일까.
슬며시 시선을 돌리는 내 눈을 따라와 시선을 맞춘 폴이 말했다.
“그러니 감히 부탁하건대, 제발 루시안 님을 말려 주십시오. 이러다가 저는 과로사로 쓰러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절박하던지. 그것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생사를 오가는 이의 구조 신호였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그 말에 폴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폴은 희망에 부푼 얼굴로 나를 루시안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전에 보았던 경계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루시안이 얼마나 괴롭게 했기에 저러는 거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폴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방의 전경에 홀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었다.
‘우와.’
방의 벽면에는 수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루시안은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빛이 무척 진중했다.
‘수십 개의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미남자라니.’
그 모습이 무척 근사해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르디엔 경.”
내 목소리에 루시안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본 루시안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소리쳤다.
“페르니아 영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경에게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어요.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언제든 찾아오시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환하게 미소 짓는 루시안의 얼굴에는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만이 가득했다.
엄청난 환대에 나는 멋쩍은 얼굴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다 뭐예요. 그림 수집이라도 시작한 거예요?”
그림 중에는 예술에 문외한인 나도 알 만큼 유명한 작품도 있었다.
나는 눈썹 없는 남자가 웃을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모나리오 맞죠? 설마 진품이에요?”
“네.”
루시안의 대답에 나는 감탄을 내뱉었다.
모사품은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원작을 본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진품이 다르긴 하네요.”
형태도, 색감도 훨씬 아름답고, 무엇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엄청났다.
보는 내 마음이 묘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어려 있다고 할까.
그림에 심취한 나를 향해 루시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애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영애께 보내 드리려던 작품 중 하나거든요?”
작품 중 하나?
‘설마…….’
나는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방에 있는 그림을 모두 내게 보낼 건 아니죠?”
“맞습니다.”
루시안은 눈치챘냐는 듯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모나리오만 해도 대저택 한 채 값은 훅 넘어간다고. 거기에 다른 그림들까지 치면…….’
복권 당첨이 부럽지 않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평생 업고 다니겠습니다.’라는 말이 튀어 나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말했다.
“카르디엔 경,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 낡은 저택에 이 그림들을 몽땅 걸었다가는 벽이 무너져 버릴걸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아는 건축가에게 의뢰를 할까요? 몇백 년 된 저택도 튼튼하게 복원해 주는 곳이라 영애의 저택도 새집처럼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자기가 보낸 선물을 받으라고 집까지 증축해 주는 너라는 남자.
한 발짝만 더 나갔다가는 아예 저택을 새로 지어 줄 기세였다.
무척 끌리는 제안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경에게 이런 선물을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
“그러니 며칠 동안 보내신 선물도 모두 가져가 주세요. 그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온 거예요.”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부담스럽다고 확실하게 선을 긋는 말이었다.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루시안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잠시 후, 루시안이 말했다.
“언젠가 영애께서 그런 말을 하셨죠. 제게 고백을 받으면 싫어할 영애는 없을 거라고. 무조건 대박이라고 외칠 거라고.”
“그건…….”
당황한 내가 말을 잇기 전에 루시안이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적어도 제가 영애에게 마음을 품은 것이 싫으신 건 아니죠?”
“…….”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 싫을 수 있을까. 이렇게 잘생기고, 예쁘고,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의 고백이.
그래서 나는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건 아니에요.”
그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럼 모쪼록 선물은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드리는 선물은 제 고백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저 영애에게 주고 싶어 주는 것뿐이랍니다.”
루시안이 두 눈을 곱게 휘며 말을 이었다.
“세상의 예쁘고 근사한 것들을 모두.”
생크림처럼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 위험한데.’
루시안은 왜 저렇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의 시선은 왜 그의 도톰한 입술로 향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점점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는가.
바싹 마른 입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 님, 성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나는 입을 막았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렸다.
정작 루시안은 내가 하려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에스텔 님을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요?”
“그럼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에스텔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텔은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니아 님이 와 계실 줄은 몰랐어요. 놀러 오신 거예요?”
“카르디엔 경에게 할 말이 있어 잠시 들렀어요. 에스텔은요?”
“유학을 가기 전에 세브란 왕국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문화에 대해 알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루시안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왔답니다. 루시안이 세브란 왕국의 용병들과 일한 적이 있어 그곳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요.”
나는 황급히 가방을 챙겼다.
“두 사람 사이에 선약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쳐들어온 셈이네요. 미안해요. 난 이만 가 볼게요.”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지른 셈이라 잽싸게 자리를 피해 주려는데, 루시안과 에스텔이 동시에 소리쳤다.
“괜찮은데!”
“괜찮습니다.”
에스텔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동안 유학 준비하느라 바빠서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요. 루시안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니까 괜찮으면 함께 있어요. 루시안도 좋지?”
“그럼요. 매우 좋습니다.”
두 사람이 필사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이 집을 나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 두 마리 같았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따스한 햇볕 아래, 세 사람의 티 파티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에는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한 달콤한 디저트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타르트를 우물거렸고, 내 옆에 앉은 에스텔은 루시안의 말을 열심히 메모했다.
“세브란 왕국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예민한 이들 중에는 자신을 동정하는 거냐며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도와준다는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에스텔은 그 말에 얼굴이 파리해졌다.
“할머니가 이만한 수레를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지나가면?”
“알아서 잘 끌고 가실 겁니다.”
“길 가다가 다친 사람을 보면 어떡해.”
“곳곳에 의료원이 널린 곳이니 알아서 찾아가겠죠.”
“하지만…….”
에스텔의 암담한 얼굴을 향해 루시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먼저 도와주지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괜한 욕설만 들을 거예요.”
“……알았어. 명심할게.”
에스텔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루시안은 그런 에스텔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언제는 에스텔 님만 보면 사람들이 이것저것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싶다고. 이제 그 기회가 온 것이니 기뻐하셔야죠.”
“그거야 너무 힘들어서 했던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
그저 사소한 대화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본 것처럼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걸까.
나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며 타르트 한 조각을 더 입에 넣었다.
* * *
몇 시간 후, 에스텔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스텔은 열심히 메모한 수첩을 품에 안고 루시안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루시안. 덕분에 세브란 왕국에 가서도 실수를 덜 할 것 같아.”
“별말씀을요.”
덤덤하게 대답한 루시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영애도 가실 건가요?”
그는 가지 말라는 눈빛 공격을 시전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똑 부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무작정 쳐들어와서 저녁까지 얻어먹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아요.”
“……염치없는 일 아닌데. 아주 올바른 일인데.”
중얼거리는 루시안을 향해 나는 매정하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리고 아까 부탁드렸던 건 꼭 들어주시길 바랄게요.”
“……알겠습니다.”
루시안은 더는 내게 싫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대신 축 처진 귀와 꼬리가 아른거릴 만큼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끌려가서는 안 돼.’
그렇게 나는 에스텔과 함께 저택을 나왔다.
우리는 마차를 타지 않고 걷기로 했다. 이렇게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에스텔에게 물었다.
“유학 준비는 잘되고 있죠?”
“네. 폐하께서 많은 것을 준비해 주셔서 제가 할 건 많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에스텔이 제국을 떠날 날이 무려 이 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긴 여행을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에스텔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다만, 아직도 사제님들의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에스텔이 세브란 왕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사제들이었다.
사제들은 한목소리로 에스텔의 유학을 반대했다.
[제국을 수호해야 할 성녀가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어찌나 반대가 극심한지, 꽃잔디의 집까지 우르르 몰려와 절대 유학을 가서는 안 된다고 시위를 할 정도였다.
나는 험악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하여간 꼰대들. 언제까지 성녀라는 이름으로 에스텔의 발목을 잡으려는 건지. 그렇게 성녀가 좋으면 지들이 성녀를 하든가.”
불만이 가득한 말에 에스텔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사제에게 성녀란 신의 가호를 받은 소중한 존재니까요. 제가 그분들의 품을 떠나는 것이 불안하고 싫은 건 이해가 가요.”
“그 꼰대들의 허락을 꼭 받아야 해요? 폐하도 가라고 하셨는데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되잖아요.”
“성녀가 사제님들과 척을 지고 떠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든 떠나기 전까지 설득을 해 봐야죠.”
에스텔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 안 되면 최후의 방법을 쓰면 되니 걱정 마세요.”
“최후의 방법요? 그게 뭔데요?”
미인계? 눈물 공격? 아니면 사제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인질로 잡은 협박?
에스텔은 상큼한 얼굴로 대답했다.
“루시안이 잘 말해 주면 사제님들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에스텔의 미모에도 흔들리지 않던 이들이 루시안의 곱디고운 외모에 뻑이 가 분노를 멈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제들이 카르디엔 경을 무서워해요?”
에스텔은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더니 내게 오래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처음 에스텔이 루시안을 데리고 왔을 때, 사제들은 그를 경계했다.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붉은색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루시안은 얌전한 아이였다.
하루 종일 그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에스텔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루시안에 대한 경계심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런 사제들의 생각이 급변하는 사건이 생긴다.
에스텔이 성녀로서 참가하기로 한 중요한 행사에 지각을 해 버린 것이다.
에스텔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행사가 엉망으로 끝이 난 후였다. 늘 에스텔을 예뻐했던 사제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에스텔은 차마 변명도 못 하고 두 손을 모은 채 바들바들 떨며 서 있었다.
사제들은 엄한 얼굴로 그런 에스텔을 혼내기 시작했다.
“늘 알아서 잘하시기에 독립을 시켜 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원을 나가자마자 이런 모습을 보이시다니 정말 실망이 큽니다.”
“역시, 성녀님의 독립은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다시 사원으로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에스텔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사원에 들어가면 모든 자유를 속박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냉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에스텔의 짐을 꾸리려 했다.
그 순간 루시안이 튀어나왔다.
루시안은 에스텔을 보호하려는 듯, 그녀와 사제 사이를 막아섰다.
에스텔은 루시안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안을 정면에서 마주 본 사제들은 아니었다.
잠시 후, 사제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치 야밤에 호랑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사제님들은 더는 제게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다시 사원으로 돌아오라고도 하지 않으셨고요.”
그렇겠지. 아무리 신을 섬기는 사제라 해도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제들은 루시안의 눈빛을 보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에스텔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면 종종 루시안의 도움을 받는답니다. 루시안만 나타나면 사제님들이 조용해지시니까요.”
그녀의 미소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무조건적으로 자기편이 되어 주는 루시안에 대해 어떤 고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에스텔은 자신을 향한 루시안의 마음을, 깊은 충성심이나 오랜 시간 쌓인 오누이의 정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닌데.’
루시안이 그녀에게 품은 마음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질척하고 위험하고 필사적인 애정이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애달프게 만들 만큼.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내가 좋다니……. 그 말을 덥석 믿을 수 있을 리 없잖아.’
* * *
다음 날, 루시안의 부관인 폴이 찾아와 지금까지 보낸 선물을 모두 가져갔다.
“다시 필요해지면 언제든 말씀하시라는 루시안 님의 전언입니다.”
그렇게 사라진 폴과 스무 개의 수레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거냐, 페르니아. 독하다. 너는 정말 독해. 네 엄마를 똑 닮았어. 절대 가지 말라는 나를 두고 그녀도 가 버렸잖아. 매정한 사람 같으니.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나랑 살겠다고 했으면서. 내게 그런 지독한 짓을 하다니…….”
울먹이는 아버지의 옆에 선 앤도 씁쓸한 얼굴을 했다.
“하나같이 아가씨께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는데 아쉽네요. 저것들을 다 걸치고 연회에 나갔으면 아가씨가 궁핍해졌다고 무시하던 사람들의 콧대를 단번에 눌러 줬을 텐데 말이에요.”
나라고 아깝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떡해. 이게 내 알량한 자존심인걸.
* * *
그 뒤로 나는 루시안을 찾아가지 않았다. 루시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에게서 다시 선물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아가씨,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가을의 장미꽃보다 화려하고 밤하늘에 뜬 달보다도 화사합니다.”
앤의 아낌없는 칭찬에 나는 입술을 한껏 올렸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커다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에스텔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은 바로 에스텔이 유학을 떠나는 날이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성녀의 유학은 제국을 뒤흔들었다. 성녀가 개인적인 일로 제국을 떠나는 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학 소식에 많은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으나, 세 남자의 힘으로 상황은 곧 진정됐다.
[성녀님은 이 제국의 귀중한 보물입니다. 그런 분이 밖으로 나돌았다가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그렇게 되면 제국은 엄청난 손실을 입는 것입니다.]이의를 제기한 한 귀족의 말은 황제의 한마디 말로 정리가 됐다.
[손실이 아니라 이득을 생각해 보게. 세브란 왕국이 외국인에게 의료원 입학을 허가해 준 건 이례적인 일이야. 그녀가 성녀이니 가능했던 일이지. 성녀가 세브란 왕국의 의술을 배워 온다면 제국의 의학은 극적인 발전을 이룰 거야. 이보다 더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나?]국익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에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성녀가 걱정되면 사비로 호위 기사를 붙여 주든가. 몇백 명을 붙여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에스텔에게 직접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는 평민들의 경우에는 귀족들보다 반응이 더 거세었다.
특히 꽃잔디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은 필사적인 얼굴로 에스텔의 손을 잡았다.
[성녀님이 저희를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성녀님이 없으면 저희는 절대 살아갈 수 없어요.] [제가 다시 건강해질 때까지 도와주신다고 했잖아요.] [제발 가지 마세요.]어린아이부터 아기 엄마, 일꾼, 노인까지 절절한 얼굴로 에스텔에게 매달렸다.
그들을 막아선 건 칼릭스였다. 칼릭스의 새까만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나약한 자들, 걱정 마라. 앞으로 이 몸이 친히 그대들을 돌봐 줄 테니.]칼릭스는 에스텔이 떠난 꽃잔디의 집을 돌봐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에스텔만큼 잘 돌봐 주자. 그것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야.
사랑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칼릭스와 마주친 사람들은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온몸이 멀쩡합니다!] [그러니 어디든 다녀오십시오, 성녀님!]칼릭스는 에스텔도 고치지 못했던 이들마저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평민들도 일단락.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은 사제들이었는데, 그들이 가장 끈질겼다.
성녀는 절대 먼 곳으로 가면 안 된다며, 그들은 단식투쟁을 벌이고 꽃잔디의 집으로 몰려들기까지 했다.
그토록 시끄럽게 굴던 사제들을 입 닥치게 만든 건 바로…….
저택 앞에는 거대한 마차와 루시안이 서 있었다.
루시안이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페르니아 영애.”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나는 그것을 숨기며 도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도 루시안은 조금도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며 웃었다.
“그럼 가시죠.”
나를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하는 그의 얼굴은 한없이 맑았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파리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할 만큼 무해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소중한 것을 위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차에 앉은 나는 새초롬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에스텔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끈질기게 에스텔의 유학을 반대했던 사제들이 찾아와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더군요. 에스텔은 이제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다며 무척 기뻐했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듯 말하는 루시안의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루시안이 사제들을 찾아간 후에 그들이 말을 바꾼 거라면서요. 도대체 어떻게 그 꼰대들의 마음을 돌린 거예요? 검을 휘두르며 협박이라도 했어요?”
루시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사제님들께 그런 불손한 짓을 할 리가요.”
“그럼?”
궁금해 죽겠다는 내 눈빛에 루시안이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 눈을 마주쳤을 뿐입니다. 조금 오래요.”
나는 루시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루비가 생각나는 한없이 예쁜 저 붉은 눈동자가 얼마나 오싹하게 변했던 걸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은 갔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십 번 죽였을 만큼 섬뜩한 눈으로 쳐다봤겠지.’
오로지 에스텔을 위해서.
“……페르니아 영애, 왜 그러십니까?”
“뭐가요.”
“화가 나신 것 같아요.”
“아닌데요.”
“…….”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시안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흥칫뿡이라고.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리 내가 선물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해도 어떻게 바로 안 보낼 수가 있어. 그렇게 내게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으면 고집 좀 부려도 되잖아.’
‘아니. 그리고 선물을 가져가라고 했다고 정말로 가져가냐. 그것도 다음 날에 바로? 이미 준 걸 어떻게 가져가냐고 못 가져간다고 진상 좀 피워도 되잖아.’
‘그리고 어떻게 내가 연락을 안 한다고 자기도 연락을 안 할 수가 있어? 예전에는 내가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 왔으면서.’
‘그래 놓고 에스텔과는 두 번이나 더 만났다면서?’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속에서 열불이 났다.
나를 좋아한다며!
그러면 내가 싫다고 해도 좀 끈덕지게 질척거려야 되는 거 아니야, 이 바보 같은 남자야!
“페르니아 영애, 도착했습니다.”
“……!”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며칠 내내 머릿속을 돌고 돌았던 생각에 또 빠져 버린 모양이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자괴감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고 먼저 선을 그은 주제에, 그가 더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원망하다니.
‘추하다, 페르니아.’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루시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문제없어요. 에스텔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가죠.”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루시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차 문을 열었다.
루시안의 손을 잡고 내린 곳은 울창한 숲속이었다.
나무가 우거진 숲길에 에스텔과 칼릭스가 서 있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이었다.
칼릭스의 말에 까르르 웃던 에스텔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니아 님! 루시안!”
“우리가 늦은 건 아니죠?”
“그럼요.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그런 말 말아요. 마음 같아서는 세브란 왕국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고요.”
세브란 왕국은 외국인에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2주 만에 입국 허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에스텔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칼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나라에서 용케 입국 허가증을 받으셨네요.”
“이 몸은 제국의 황태자다. 감히 누가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멋있는 척하기는.
당장 입국 허가증을 내주지 않으면 전쟁이니 뭐니 하며 진상을 피워서 겨우 함께 갈 수 있게 된 주제에.
‘뭐, 에스텔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칼릭스가 그런 난리를 친 덕분에 에스텔은 홀로 먼 곳으로 떠나지 않게 되었다.
칼릭스가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있어 준다면 에스텔이 세브란 왕국에 적응하는 것도 더 수월할 테지.
무엇보다 제국의 황태자가 저렇게 귀하게 여기는 걸 보면, 세브란 왕국의 누구도 에스텔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큰 걱정 없이 에스텔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에스텔에게 건넸다.
“건강하게 잘 다녀와요.”
이내 에스텔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를 닮은 새하얀 꽃다발을 안고 에스텔이 웃었다.
“고마워요, 니아 님.”
“편지지는 넉넉히 챙겼죠?”
“그럼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편지 쓸게요.”
에스텔이 먼 곳으로 떠나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에스텔이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까.
에스텔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겠지.
원작에서는 없던 전개였다.
나는 이편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애틋한 인사가 끝나고 다음은 루시안의 차례였다.
에스텔은 루시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루시안, 항상 떠나는 건 너고 남는 건 나였는데 이번에는 반대네.”
“그러게요.”
에스텔은 이제야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좀 서운했었어. 넌 늘 말도 없이 편지 한 장만 남겨 두고 떠났었으니까.”
에스텔의 말에 루시안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성녀님께 괜한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거짓말.
에스텔의 얼굴을 봤다가는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면서.
그의 뻔뻔한 거짓말을 에스텔은 순진하게 믿었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고. 하지만 이제 그 마음 풀게. 오늘만큼은 네가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줬으니까.”
에스텔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정말 마음을 준 이들에게만 보여 주는 천진한 얼굴이었다.
그런 에스텔의 모습에 루시안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평범한 배웅이었다.
어떤 질척한 감정이나 아쉬움도 느낄 수 없는.
그렇기에 질투의 화신 칼릭스마저 이를 으득거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루시안의 손을 잡아당겨 버린 것일까.
더는 에스텔을 보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라는 것처럼.
루시안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에스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선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차.’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루시안의 손을 잡은 어정쩡한 상태로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손이 좀 시려서요.”
머리 위로 햇빛이 이렇게 쨍쨍하게 쏟아지고 있는데 손이 시리다니.
누가 들어도 개뻥이었다.
다행히 루시안은 내 헛소리를 지적하지 않았다. 에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텔은 쿡, 하고 웃더니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두 사람의 결혼식 때는 돌아올게요. 그러니 하루빨리 좋은 소식 들려주세요.”
‘사랑의 천사 웨딩피치’ 같은 말을 남기며 에스텔은 떠났다. 그녀의 껌, 아니 연인인 칼릭스와 함께.
어느새 숲속에는 나와 루시안 둘만 남았다.
나는 차마 루시안을 볼 수가 없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에스텔과 루시안의 사이를 질투한 것도, 되도 않는 변명을 내뱉은 것도 모두.
그래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런데 떨어진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것도 나처럼 어정쩡하게 잡은 것이 아니라, 깍지를 껴 단단하게.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말했다.
“저도 손이 좀 시려서요.”
“……!”
“조금만 더 제 손을 잡아 주시겠어요?”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귀 끝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다부졌다.
절대 내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는 복잡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르디엔 경, 사실 아까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손이 시린 게 아니라, 당신이 에스텔을 보고 있는 게 싫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루시안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분명 고백하던 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영애만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요. 에스텔 님께는 이제 어떤 마음도 없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고 아, 그렇구나, 하고 쉽게 인정이 안 되는 걸 어떡해요!”
나는 여주인공이 아닌 일개 악역 조연일 뿐이었다.
에스텔처럼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훌륭한 인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에스텔처럼 루시안을 구원해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나를 그가 좋아한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밀어냈다.
한 번 밀어내면, 두 번 다가오겠지. 두 번 밀어내면, 세 번 다가오겠지.
그렇게 그가 열 번 다가오면, 못 이기는 척 그의 마음을 받아 주려고 했었는데…….
“선 좀 그었다고, 고백한 적 없었던 것처럼 구는 건 너무하잖아요. 남자가 근성이 있어야지!”
루시안은 나의 호통에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저는 그저 영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영애가 싫어할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서 조심한 것뿐입니다.”
“절대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그 싫어할 것 같은 짓, 팍팍 해 보라고요!”
그 순간 그가 나를 잡아당겼다. 넓은 품속에 나를 가둔 루시안이 말했다.
“이렇게 껴안고 싶었어요.”
“……!”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댄 루시안이 속삭였다.
“좋아해요.”
청량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루시안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나를 꼭 껴안을 뿐.
그의 품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뭔데요?”
“그건…….”
루시안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
어휴, 답답해.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뒤통수를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와 나의 입술이 맞닿았다.
마치 천상에서 만든 생크림이 입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였다.
나는 마음 깊이 반성했다.
‘이렇게 좋은걸. 되도 않는 청승을 왜 떨었을까.’
역시 나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감은 아닌 모양이다.
이 남자의 진심이 뭘까 하고 겁내거나, 내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나는 루시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내게 속삭였을 때보다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 오늘부터 사귀어요.”
* * *
따스한 햇볕도,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가을바람도, 귓가에 울리는 새소리도, 모두 아름다웠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까지도.
짙은 분홍색 드레스에 프리지어가 달린 모자를 쓴 내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특히 화장이 아주 잘 먹었어.’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앤에게 말했다.
“머리 장식이 필요하다고 했지? 예쁜 장식품을 발견하면 사 가지고 올게.”
“정말요?”
“그래. 언제나 앤이 나를 위해 수고해 주잖아. 그 정도 보답은 해 주어야지.”
“아가씨!”
앤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입을 막았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앤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자 아버지와 마주쳤다.
“페르니아, 오늘도 카르디엔 경을 만나러 가는 거냐.”
“네.”
아버지는 나를 향해 흐뭇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한창 좋을 때다. 너를 보니 네 어머니와 했던 데이트가 생각나는구나. 그녀는 늘 내게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자고 말했지. 그래 놓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곳에 가면 입이 부루퉁 튀어나왔어.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무기 전시관에 갔을 때는 좀 무서웠지만 말이야. 총, 칼, 대포. 그 흥미진진한 것들을 보며 그녀는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어. 도대체 레이디의 취향은 안중에도 없는 거냐고 내게 소리를 빽 지르더구나.”
열심히 나불거리던 아버지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는 나를 향해 아버지가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얌전한 거냐. 평소였으면 진작 나를 무시하고 사라졌을 타이밍 아니냐.”
“어머,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진심이었다.
평소에는 한 구절만 들어도 지긋지긋했던 아버지의 수다조차 감미롭기만 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웃었다.
“좀 더 들려주세요, 아버지.”
“……!”
아버지는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뒷걸음질 쳤다.
“이, 이야기를 듣다가 늦으면 안 되지 않느냐. 어서 가거라.”
“네. 그럼 다녀올게요.”
나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매일 타고 다녔던 (겉모습만 멀쩡하지 승차감이 개떡이라 엉덩이에 불이 났던) 낡은 마차가 아닌, 번쩍번쩍한 새 마차가 서 있었다.
루시안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영애의 엉덩이가 아픈 건 싫어요. 늘 구름처럼 폭신한 곳에 앉아 다니셨으면 좋겠습니다.]그의 바람대로 마차의 승차감은 최고였다.
‘최고의 목수가 만든 마차는 역시 달라.’
최고급 양가죽 의자는 엉덩이와 허리를 편안하게 감싸 주었고, 절묘하게 설계된 바퀴는 물 흐르듯 돌아갔다.
그 와중에 속도는 어찌나 빠르던지, 금세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수고했어요. 덕분에 편히 왔네요.”
마부에게도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화려한 건물이 보였다.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인 오페라 하우스였다.
바닥에 깔린 새하얀 대리석과 수십 개의 조각상. 여신의 궁전처럼 아름다운 그곳에 루시안이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새하얀 정장을 입고, 고개를 숙여 회중시계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예술 작품 같았다.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힐끗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도 잊고 노골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여인들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봄날처럼 온화한 마음은 평온했다.
‘그래, 다 이해해.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쳐다보게 되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그를 보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루시안.”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루시안이 미소를 머금었다.
“니아.”
내 애칭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정략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으니까.
나는 루시안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이번에야말로 루시안을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또 실패했네요. 도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예요?”
“저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거짓말. 아마 그는 훨씬 전부터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첫 데이트부터 쭉 그랬으니까.
세 번째 데이트를 했던 날도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나온 그를 향해 나는 말했다.
[도대체 매번 왜 이렇게 일찍 나오는 거예요. 내가 미안해지잖아요.]루시안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그랬습니다. ……불편하면 다음부터는 시간에 맞춰 나오도록 할게요.]나는 그때처럼 그를 타박하는 대신, 단단한 그의 팔에 내 팔을 끼웠다.
“들어가요.”
내가 처음 이렇게 팔짱을 꼈던 날, 루시안의 얼굴은 어마어마하게 빨개졌었다.
빵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래도 지금은 적응이 된 모양인지 그때처럼 빨개지지는 않았다.
귓가가 조금 발갛게 물들기는 했지만.
‘귀여워.’
나는 속으로 그의 귓불을 수십 번 깨물며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공연은 수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바투스 백작의 짝사랑》.
이 작품의 인기 비결은 연출도, 스토리도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퓌였다.
무대 위에 선 퓌는 진녹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가진 어마어마한 미남이었다.
그런 미남이 공연 내내, 여인의 마음을 갈구하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니 여인들이 껌뻑 죽을 수밖에.
그가 무릎을 꿇고 절정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많은 여인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새끼손가락을 올리고 이마를 감싸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린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잘생긴 외모인 건 알겠는데, 왜 와닿지가 않지? 나도 모르는 새 내 시력에 문제라도 생겼나?’
의아함에 무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찌릿한 시선을 느꼈다.
시선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으앗, 하고 작은 비명을 질러 버렸다.
마주친 루시안의 얼굴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으악. 내 눈!’
그제야 퓌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옆에 이런 천상계 미남이 있으니, 눈이 한껏 높아졌을 뿐.
‘다행이다.’
안도하는 나와 달리 루시안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내용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니아의 눈에도 저 남자 배우가 멋진가요?”
뭐야, 뭐야. 지금 질투하는 거야?
네, 라고 대답하면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들어 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전혀요. 루시안과 비교하면 저 남자는 오…….”
아니. 솔직히 오징어까지는 아니지.
나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미남에 대한 예우로 말을 정정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흔해 빠진 인간일 뿐이라고요.”
루시안은 입가를 실룩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역시 내 눈엔 내 남자 친구가 세계 최고 짱짱맨이야!
* * *
우리는 매일 데이트를 했다.
미술관에서, 도서관에서, 공원에서, 꽃밭에서, 성 앞에서, 숲속에서, 호수에서, 훈련장에서, 거리에서, 디저트 숍에서.
참 신기한 건 만나면 만날수록, 헤어지는 순간이 힘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루시안이 나를 저택에 데려다준 것은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그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한마디만 더 한다는 것이,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어 버렸다.
‘옴팡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루시안을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도대체 왜 연회 따위에 가야 하는 거냐고.’
나는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 귀찮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와 달리 앤은 화르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랜만의 연회잖아요. 그동안 아가씨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기회예요!”
수백 개의 상자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최근 루시안이 선물해 준 것들이었다.
수십 벌의 드레스와 보석, 구두와 장신구.
개수도 어마어마했지만, 물건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뛰어났다.
그 점이 앤을 흥분시켰다.
몇 벌 안 되는 드레스와 유행 지난 보석으로 나를 꾸며야 했던 앤에게 있어 최고의 환경이 마련된 것이었으니까.
“샤넬르에서 만든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애플랏 루비 목걸이로 포인트를 줄까요?”
고민하던 앤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티 파티인데 너무 튀는 것 같아요. 아이보리색 드레스에 다이아몬드를 매치하면,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칠 거예요.”
앤은 또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얌전하죠? 아가씨는 역시 화려한 스타일이 잘 어울리잖아요.”
나는 귀찮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충 욕먹지 않을 정도로 입으면 돼. 루시안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뭘.”
약혼식 때, 에스텔의 편을 들어준 이후로 나는 또래의 영애들과 멀어졌다.
거기에 황태자의 생일 연회 때의 일로 황태후와도 불편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 사교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지만, 안 봐도 뻔했다.
‘공공의 적일 테지, 뭐.’
황성에서 열리는 정기 연회만 아니었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꾀병을 부려서라도 가고 싶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아버지가 곤란해질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구석에서 케이크나 먹고 얌전히 있다 와야지.’
다행인 것은 품위를 중요시하는 귀족이 시비를 걸어 봤자 말 몇 마디 내뱉는 것뿐이랄까.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며 머리끄덩이를 잡아 뜯지는 않을 테니, 듣기 싫은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시작했다. 앤도 흥분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
(앤의) 고심 끝에 샤넬르가 만든 자주색 드레스에, 에메랄드 목걸이를 하고 황성에 도착했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구두를 한 발짝, 두 발짝 내디디며 마음을 다잡았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분명 모두 개정색을 할 거야. 귀족 여자들이 사람을 엿 먹일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니까.’
절대 반응하지 말고, 앉을 자리나 살펴봐야지.
가문의 이름이나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높을수록, 연회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앙의 테이블에 앉는다. 내가 노리는 자리는 그런 곳과는 딱 반대되는 곳이었다.
찾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아싸 자리, 거기가 내 자리다!
그곳에 앉아 준비된 디저트를 종류별로 다 먹고 오는 거야.
숨 막히는 연회지만 황성의 파티셰가 만든 케이크만큼은 최고니까.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먼저 도착해 떠들고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앉을 자리를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오셨군요, 페르니아 영애!”
“어쩜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신 거예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미소를 지으며 우르르 몰려드는 여인들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흡사 내가 빙의하기 전, 페르니아가 사교계를 휘어잡았던 때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열렬한 반응이었다.
동그랗게 나를 둘러싼 여인들은 감탄 어린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샤넬르에서 무려 스무 벌의 드레스를 맞추셨다고 하더니, 역시 샤넬르의 드레스를 입고 오셨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목걸이와 귀걸이는 샤르만산 에메랄드가 맞죠? 이런 영롱한 빛깔의 보석은 그곳이 아니면 나오질 않잖아요. 영애의 눈동자색과 너무나 잘 어울리네요.”
“페르니아 영애는 늘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더더욱 빛이 나네요. 약혼자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시니 그렇겠죠? 정말 부러워요.”
그제야 깨달았다.
몇 달 사이, 그녀들의 온도가 이토록 달라진 이유를.
‘루시안 때문이구나.’
이전에도 루시안은 내게 친절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략적으로 맺어진 약혼녀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즘의 루시안은 전혀 달랐다.
카르디엔의 재산이 모두 거덜 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수많은 가게에서 내게 줄 선물을 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수도에서 루시안이 내게 푹 빠져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이며, 황제에게 가장 신임받는 신하, (영지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 광산 덕에) 신흥 재력가의 타이틀까지 거머쥔 루시안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무시는커녕 어떻게든 친해져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어야지!’
아마 많은 여인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나에 대한 마음을 바꿨을 것이다.
여인들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꽃처럼 환한 미소만 걸려 있을 뿐이었다. 철저한 자본주의의 미소였다.
나는 흐린 눈으로 쓰게 웃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바닥 참 치열해.’
* * *
나는 다시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수많은 여인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마 전까지 나를 무시하던 이들이 그러는 게 어이가 없어, 대충 듣고 넘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카르디엔 경과 페르니아 영애가 함께 의상 숍에 있는 걸 보았는데 정말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마치 여신께서 이어 주신 인연 같았어요.”
“눈동자의 색부터 잘 어울리잖아요. 붉은색 눈동자에 녹색 눈동자라니 꼭 봄날의 딸기 같아요.”
흑흑, 이 언니들. 내 취향을 너무 잘 알아.
한창 연애 중인 내게 그와 잘 어울린다는 말만큼 듣기 좋은 말이 없었다.
꿀을 잔뜩 바른 아부에 자꾸 광대가 튀어 나갔다.
어쨌건 예전 같은 적의 어린 눈빛보다는 (아부라도) 살랑대는 눈웃음을 마주 보는 편이 더 즐거웠다.
물론 모든 여인들이 내 편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힐끗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황태후가 있었다.
이 연회의 주최자였으며, 이곳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그녀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 때 나를 건드렸다가 된통 당해 버린 일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비도 걸지 않고 조용하네. 에스텔과 루시안이 내 편을 들어주었던 게 충격이긴 했나 봐.’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황태후도 얌전히 있으니 적당히 수다를 떨다가 갈까나.
찻잔을 홀짝이던 나는 황태후의 옆에 앉아 깨방정을 떨고 있던 에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에리카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눈을 치켜떴다. 마치 적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쟤는 여전하네.’
내가 에리카를 잘못 판단했던 모양이다.
상대가 약해져야 건드리는 비겁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를 보아도 태세가 변하지 않았다.
생각 외로 근성이 있는 여자였다.
에리카가 황태후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더니 내게 다가왔다.
“페르니아 영애.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나와 에리카는 서로를 향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미소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쪽이 지는 거야.’
그것은 귀족 여인들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는 사교계 정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석 자리로 쫓겨나 쭈구리가 될 것이다.
주변에 있던 여인들은 그것을 눈치채고 침을 꿀꺽 삼키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선빵은 에리카가 날렸다.
“페르니아 영애. 카르디엔 경과 이곳저곳에서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두 분 사이가 무척 좋으신 것 같아요.”
“맞아요.”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에리카는 웃으며 말했다.
“카르디엔 경은 평민 중에서도 하층민 출신이시잖아요. 영애는 후작 가문의 적녀고요. 그런데도 두 분이 잘 통하다니 신기하네요. 그만큼 두 분의 사랑이 깊다는 거겠죠?”
지금 루시안의 출신을 까는 거지?
그러나 그건 공격 축에도 들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나섰다.
“에리카 영애. 카르디엔 경이 얼마나 우아한 분이신데요. 그분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절대 하층민 출신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걸요.”
“그리고 하층민 출신이면 어때요. 그래서 카르디엔 경이 더 존경받는 거잖아요. 오로지 실력만으로 여기까지 오신 거니까요.”
1차 공격이 무산되자 에리카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번엔 내 차례지?’
나는 에리카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그런 의미로 에리카 영애야말로 약혼자와 대화가 아주 잘 통하시겠어요. 영애의 약혼자인 가르시안 님은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이니까요.”
“당연하죠. 귀족은 귀족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랍니다.”
에리카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최근 위세 높은 가르시안 후작과 약혼을 했다. 그녀가 이토록 간이 담대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최고의 약혼을 했다는 생각에 한껏 상기되어 있지만, 과연 얼마나 더 웃을 수 있을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얼마 전 가르시안 후작님이 하녀와 밀회를 즐긴 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겠네요. 귀족은 귀족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니까.”
가르시안 후작은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으나, 소문난 바람둥이기도 했다.
약혼녀가 있음에도 다른 여자를 만날 만큼.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개뼈다귀 같은 놈이란 말이지.
에리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날 공격했다.
“그러고 보니 페르니아 영애의 꾸밈새가 눈에 띄게 훌륭해지셨네요. 모두 카르디엔 경이 사 주신 거라면서요? 아직 결혼도 안 한 사이인데 약혼자의 돈을 그렇게 거침없이 쓰시다니……. 저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내가 남자의 돈을 팍팍 쓰는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몰아가고 싶은 거다.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어머. 사실을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제가 그의 돈을 쓴 게 아니라, 루시안이 자신의 돈을 쓴 것뿐이랍니다. 그나마 말려서 이 정도인 거예요. 그에게 선물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라고 했으면, 이 거리에 있는 드레스와 보석이 남아나지 않았을걸요.”
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덕분에 보석 상자와 드레스 룸에 쓰지도 않은 물건이 넘쳐나서, 몇몇 물건은 이번에 열리는 자선 바자회에 내놓을까 생각 중이에요. 필요한 분들은 저렴하게 물건을 살 수 있고, 저는 짐을 줄일 수 있고, 수익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으니 일석삼조잖아요.”
내 말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손뼉을 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질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꿀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말이었으니 기뻐할 수밖에.
에리카는 이를 으득거렸다.
자, 다음 공격은 뭐냐. 뭐든 받아 주마.
에리카는 다부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르디엔 경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시죠. 페르니아 영애는 약혼녀이니만큼 카르디엔 경의 미모에 대해 잘 아시겠죠?”
“알고말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기쁜 것 중의 하나가, 그의 얼굴을 당당히 감상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예쁘고 멋진 것이라도 매일 보면 익숙해져서 감상이 무뎌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루시안은 전혀 안 그래요.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매번 놀란다니까요. 너무 잘생겨서요.”
에리카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썩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배우 퓌를 흔해 빠진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건 너무하셨어요.”
엥. 신나게 루시안의 이야기를 하다가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영애가 카르디엔 경과 퓌의 공연을 관람하셨죠? 그때 영애가 카르디엔 경께 그렇게 말한 걸 들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랍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분들이 모두 퓌의 대단한 팬이었기에, 다들 큰 불쾌감을 느꼈다고 해요.”
에리카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내뱉기는 했다. 흥분해서 목소리가 조금 크게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섭게 쳐다보기에 바로 입을 다물었는데…….’
그러니까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갈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걸 원치 않는 모양이다.
‘도대체 저 얘기는 어디서 들어서 이런 타이밍에 써먹는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여인들의 표정이 한순간 싸늘히 변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건들면 상대가 누구라도 용서가 안 되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설령 그게 당장 잘 보이고 싶은 상대라고 해도.
한순간 나는 연회장에 있는 여인들의 적이 되었다.
저 멀리 앉아 있던 황태후는 특히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예의 황태자 생일 연회 때 보았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퓌의 왕팬이었으니까.
암암리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교계에 만들어진 퓌의 비밀 팬클럽 수장이 그녀라는 말도 있었다.
손에 땀이 찼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뗄까.’
아니다. 그런 말을 했다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거짓말쟁이라는 꼬리표까지 얻게 된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실언을 했다고 말할까. 루시안을 칭찬하려다 보니 나온 말일 뿐이라고. 퓌 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존잘남이라고 소리쳐 버려?’
그것이 가장 무난한 해결 방법이었으나 쉽게 그 말이 나가지 않았다.
……왜냐면 그건 사실이 아닌걸.
우리 루시안이 이 세계 최고 미남이란 말이야!
루시안과 비교하면 퓌는 그냥 이목구비가 제대로 달린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고.
에리카는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별말을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그 말 진심이었나 봐요.”
에라, 모르겠다.
다시 쭈구리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내 신념(?)을 택하겠어!
나는 에리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내 반응에 에리카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어렸다.
“하. 아무리 카르디엔 경이 미남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건 너무…….”
에리카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멈추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심상치 않은 기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도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
‘뭐야?’
나는 그녀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내 나도 그녀들과 똑같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루시안이 있었으니까.
환한 햇빛 아래, 루시안은 진녹색의 작은 올리브 나무를 들고 서 있었다.
작은 나무를 손에 든 루시안의 모습은 꼭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그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니었다. 바로, 황태후였다.
입을 벌리고 굳어 버린 황태후의 앞에 선 루시안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루시안 카르디엔, 고귀하신 황태후마마를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맑은 목소리가 정적이 휩싸인 공간에 울려 퍼졌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황태후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대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지?”
오늘의 연회는 황족과 귀족 여인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가끔 남성이 참석하기는 했다.
부인과 떨어지기 싫은 팔불출 남편이거나, 딸을 유별나게 걱정하는 아빠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눈치 없이 여자들의 자리에 껴든다며 욕을 바가지로 먹곤 했다.
황태후는 그들을 떠올리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그대의 약혼녀 때문에 온 건가. 내가 또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이내 황태후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 찼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 때 나를 건드린 일로 루시안이 황제를 찾아가 황태후를 저지해 달라고 압박했으니까.
황태후는 아직 그때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 한 번 약혼녀 편을 들며 나를 건드려 봐. 이번에는 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굳은 결의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안이 내뱉은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닙니다. 이곳에 찾아온 건 황태후마마를 뵙기 위해서랍니다.”
“……나를?”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황태후는 눈을 끔뻑거렸다. 루시안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전의 일로 마음이 많이 상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약혼녀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루시안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날의 일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황태후에게 감정을 추스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황태후를 더 불쾌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화내지 않았다.
루시안이 올리브 나무를 내밀며, 세상에 없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올리브의 꽃말은 평화.
그 이름처럼 세상 모든 분노와 슬픔이 정화되어 버릴 것 같은 엄청난 미소였다.
황태후는 말없이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황태후는 손을 뻗어 루시안이 내민 화분을 받았다.
시녀를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군. 마음을 풀어 보도록 하지. 카르디엔 경과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 좋을 것도 없으니 말이야.”
츤츤대는 말과 달리 황태후의 귓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리부리하던 눈도 풀려 있었다.
나는 저 얼굴이 어떨 때 나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강제 입덕 당하는 순간 사람은 저런 표정이 된다. 영혼까지 팔린 그런 얼굴 말이야.
올리브 나무를 소중히 안은 황태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군.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하지.”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대는 제국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그 정도 자격은 있지.”
“그럼 페르니아 영애도 불러 함께 앉아도 될까요?”
루시안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황태후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잠시 잊었던 퓌 모욕 사건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황태후를 향해 루시안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이렇게 셋이 만나게 되었으니 황태후마마와 저희 사이에 틀어진 관계를 풀고 가고 싶습니다. ……많이 불편하신가요?”
“……!”
두 눈을 반짝이는 루시안의 필살기에 결국 황태후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후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당연히 되지! 안 될 게 뭔가. 페르니아 영애. 어서 이리 와서 앉지 않고 뭐하나.”
카리스마 넘치는 말에 나는 황태후와 루시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옆자리에 앉은 루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루시안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나 잘했죠?’
세상 물정 모르는 순둥이인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외모를 능숙하게 써먹는 수완이 있을 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 * *
황태후는 루시안을 살뜰히 챙겼다.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시어머니에서, ‘인간극장’에 나오는 푸근한 동네 할머니로 바뀐 느낌이랄까.
그 덕에 연회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한껏 기를 모아 나를 공격했던 에리카는 썩은 얼굴로 구석 자리로 들어가 보이질 않았다. 들썩이는 뒷모습을 보니 훌쩍이는 것 같기도.
‘그러니까 덤비긴 왜 덤벼. 너는 만년 엑스트라 악역이라니까. 아무리 애써도 나를 물 먹일 수가 없어요.’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여유롭게 연회를 즐겼다.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안은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황태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곁에 다가온 여인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명실공히 그는 오늘 연회의 꽃이었다.
연회가 끝나 갈 무렵에는 어느새 이곳은 루시안의 팬 미팅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시안이 연회장을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태후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녀는 간다는 이를 붙잡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다. 대신 올리브 나무를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카르디엔 경. 오늘 정말 즐거웠네. 지금까지 그대를 오해한 것 같아.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지.”
루시안은 제국 최고의 기사지만 적이 많았다. 연회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평민이라는 신분임에도 황족과 귀족에게 친근히 다가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안 좋은 시선도 이젠 끝이다.
황태후라는 어마어마한 팬클럽 회장님이 생겼으니까.
“카르디엔 경. 앞으로도 종종 연회에 참석해 주세요!”
“페르니아 영애께 초대장을 보낼 테니 시간이 되시면 함께 오세요. 꼭요!”
엄청난 숫자의 소녀 팬들까지 말이다.
나는 연회장을 나오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루시안이 갑자기 찾아와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루시안이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영애를 정말 지켜 주고 싶다면 강하게만 나가지 말고, 끌어당겨 보라고. 그편이 훨씬 효과가 좋을 거라고요.”
그런 말을 하다니 황제는 황제였다. 엄청난 수완이야.
“도움이 되었나요?”
루시안의 말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다들 내게 얼마나 상냥한지 봤잖아요.”
루시안의 호의를 받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모로 가나 기어가나 그들이 내 편이 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해 퓌 비하 사건(?)도 묻히고 말이야.
루시안 덕분에 남자 친구의 덕을 톡톡히 봤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속삭였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요. 저 많은 여자들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빠져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질투 난다고요.”
내 말에 루시안은 해사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말을 들은 것처럼.
* * *
그 장면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바람 좀 쐴 겸 거리를 걷던 나는 루시안과 그의 부관 폴을 발견했다.
‘자기야!’
당장 루시안에게 뛰어가려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있는 곳은 여성용 액세서리를 파는 숍이었다. 온통 핑크색으로 꾸며져 있는 곳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나는 키득거렸다.
‘내게 줄 선물을 사러 왔나 보네.’
이런 식으로 그가 선물을 고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루시안이 내게 보내는 선물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고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로 진열대에 걸린 머리핀을 바라보았다.
심란한 얼굴로 그 옆에 있는 핀을 보고. 더 심란한 얼굴로 또 그 옆에 있는 핀을 보고.
그렇게 한참이나 핀을 둘러본 루시안은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흐린 눈으로 그의 옆에 서 있던 폴이,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럼 모두 구입하시죠.”
그렇게 루시안은 진열되어 있는 머리핀을 모두 구입했다.
일주일 치 판매할 핀을 한 번에 팔게 된 사장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입하신 물건 모두 인기가 많답니다! 선물 받는 분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그 말에 루시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 미소가 어찌나 예쁘던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결국 그날은 루시안에게 아는 척하지 못했다.
그것이 며칠 전의 일.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페르니아로 빙의한 이후, 역대 최고의 고민일 것이다.
바로 루시안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귀고 나서 처음 맞는 남자 친구의 생일이라니!’
뭘 주면 좋아할까?
나는 루시안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에게 준 건 많지 않았다.
종종 그의 저택에 사 들고 간 케이크나 그를 숍으로 데리고 가 옷을 사 준 것 정도?
사실 그것들은 모두 순수하게 그를 위했다기보다는 내 욕망의 표출이었으니 진정한 선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선물을 해 주는 거야. 그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으로.’
나는 루시안의 첫 생일을 챙겨 줄 생각에 화르르 불타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정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돈이, 돈이 없어!’
매일 데이트하는 데 정신이 팔려 이렇게 돈을 펑펑 쓴 줄도 몰랐다. 저금통도, 지갑도,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께 용돈을 더 달라고 할까?’
아버지에게 빈곤한 재정은 늘 예민한 문제였다.
내가 용돈을 더 달라는 말을 하면 아버지는 ‘크흡. 미안하다, 페르니아!’라고 외치며 울어 버릴지도.
그러니 이 방법은 빼자.
‘그렇다고 예전처럼 루시안에게 돈을 빌릴 수는 없고.’
그의 선물을 사는 데 그에게 돈을 빌리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잖아.
그러나 이 구역 아웃사이더인 나는 그를 제외하면 돈을 빌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을 빌릴 수 없다면 만들면 되지. 발에 차이는 게 명품이잖아.’
내 방에는 온갖 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루시안이 준 선물들이었다.
작은 보석 하나라도 팔면 꽤 두둑한 돈이 생길 것이다.
목걸이 하나를 잡고 음산한 미소를 짓던 나는 이내 고개를 휙휙 저었다.
‘무슨 생각이야, 페르니아. 모두 루시안이 준 소중한 아이들이라고. 후작가가 망해도 가지고 있어야지.’
사실 돈이 있다고 해도 루시안을 흡족하게 만들 만한 선물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루시안은 놀랄 만큼 물질적인 욕망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굳이 그가 원하는 걸 찾자면…….
“역시 나인가?”
으아악!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손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오글거렸다.
하지만 정말인걸.
루시안은 오로지 나만을 원할 뿐이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가 가장 기뻐할 만한 선물을 줘야지.”
그렇게 나는 그에게 줄 선물을 정했다.
* * *
오늘은 평소보다 화장에 신경을 썼다. 뽀얀 분을 바르고 눈가에는 연분홍색 아이섀도를 발랐다. 그 위로 아이라인을 길게 빼서 고양이 같은 눈을 살려 주는 것이 포인트.
앤이 완성된 얼굴을 보며 물개 박수를 쳤다.
“역시 아가씨는 손재주가 좋으세요.”
할 줄 아는 건 없어도 화장술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나는 씨익 웃으며 앤에게 말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은 구불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땋은 후, 그 위로 수많은 작은 꽃들을 장식했다.
그 후 다이아몬드로 만든 꽃 모양의 장신구를 착용했다.
앤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아가씨. 카르디엔 님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겠지?”
“그럼요!”
앤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루시안의 저택으로 향했다.
나를 맞아 준 건 그의 부관인 폴이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기에 폴은 놀라지 않고 나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정대로 루시안 님은 외출 중이십니다. 저녁때야 저택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려 주어서 고마워요. 그럼 폴은 어서 가 보세요.”
아무리 충성심이 강한 폴이라도, 조기 퇴근의 달콤함은 이길 수 없었다.
폴은 가방을 싸며 주절주절 말했다.
“어디까지나 영애께서 강력히 요청하셔서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무단 퇴근이 아니에요. 루시안 님께 그 부분을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폴은 절대 퇴근할 수 없다고 하는 걸, 내가 귓방망이를 때려서 쫓아냈다고 말할게요.”
그러니 제발 가!
그렇게 나는 이 저택의 유일무이한 지박령을 해치웠다.
* * *
드넓은 저택에 혼자가 된 나는 재빨리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알록달록 고깔모자, 별과 하트 장식이 반짝이는 가랜드.
루시안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생일 파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생일은 그저 신분증을 발급하기 위해 만든 날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생일에 무심하냐면,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건 옳지 않아.”
나는 중얼거리며 쏟아 놓은 물건들로 저택을 꾸미기 시작했다.
조금 유치한 편이 좋았다.
생일 파티는 원래 이런 맛이니까.
* * *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저택의 안쪽으로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드넓은 공간에 루시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폴?”
심장이 콩콩거렸다.
“이상하군. 어딜 간 거지.”
루시안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수없이 쌓인 경력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나설 타이밍이라는 것을!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헴일 축하합니다.”
아, 젠장. 긴장했더니 목소리가 삑사리 났어!
그러나 이제 와 어쩔 도리는 없었다. 내게는 직진만이 있을 뿐.
“생일 축하합니다.”
어둠 속에서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만이 아롱아롱 빛났다.
나는 환하게 빛나는 케이크를 들고 루시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린 루시안을 바라보며 나는 노래를 이어 불렀다.
“……사랑하는 루시안.”
그저 노래일 뿐인데 뭐가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또다시 삑사리가 날 뻔한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노래를 끝마쳤다.
“생일 축하합니다.”
어느덧 나는 케이크를 들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루시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루시안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늘 바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당연히 뻥이죠. 생일 파티는 서프라이즈가 생명이니까요. 놀랐어요?”
루시안은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아 그의 가슴 위로 올렸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루시안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주 많이요.”
“그런 것 같네요.”
나는 흐뭇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참, 생일 선물도 있어요.”
“선물이요?”
루시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놓고 그에게 손짓했다. 그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내 손짓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의 머리에 앙증맞은 고깔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선물인가요? 귀엽네요.”
“어머, 이게 선물일 리 없잖아요?”
나는 발끝을 들었다.
이내 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이 닿았다.
닿은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대고 말했다.
“사랑해요.”
입으로 내뱉은 나의 첫 고백이었다.
“……!”
루시안의 얼굴에 방금 전까지 보였던 여유로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입을 맞췄다.
이번엔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베이비 키스가 아니었다.
혀와 혀가 얽히는 강렬한 키스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적극적으로 입을 맞춘 것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그러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입맞춤은 너무 달콤했으니까.
‘그런데 이 자세, 좀 위험하지 않아?’
처음에는 분명 평범한 입맞춤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소파 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루시안은 그런 내 위에 덮칠 듯 자리 잡고 있었고.
누가 봐도 야릇한 포즈였다.
‘이, 이렇게 진행해도 돼? 이 소설 전연령가라고?’
위기감에 살짝 눈을 뜬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루시안이 열기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결심했다.
전연령가니 뭐니 내가 알 게 뭐야! 나도 루시안도 다 큰 성인인데!
이제부터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이 스킨십이 어디까지 농염해지나’가 아니라, 오늘 늦게 귀가를 하게 되면 아버지께 어떤 변명을 하나였다.
‘앤, 너만 믿어.’
눈치 빠른 앤이 그럴듯한 변명을 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쾅쾅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져 버렸다.
“루시안 님, 계십니까? 폴입니다!”
예상치 못한 폴의 목소리에 나와 루시안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폴은 문밖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리 페르니아 영애께서 부탁하신 일이라고 해도 이래서는 안 됐습니다. 상사에게 제대로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퇴근을 하다니요.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루시안 님.”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데요.
나는 마주 본 루시안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그런 루시안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첫사랑 토크 공격을 당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짙은 붉은 눈동자에선 살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열심히 그와 깨를 볶아 대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루시안은 가슴에 흑염룡을 품고 있는 남자였지.’
그러나 예전처럼 그가 겁나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았으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한 그는 흑화하지 않는다.
나는 루시안을 안으며 말했다.
“생일이잖아요. 엄한 사람 죽이면 안 돼요.”
내 말에 루시안의 험악한 기운이 금세 사라졌다. 루시안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안 죽입니다.”
“정말요?”
“……1초 정도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폴,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어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요.
* * *
다음 날 루시안이 말했다.
어제의 들뜬 얼굴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한 얼굴로.
“니아, 밤새 생각해 보았는데 어제는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무슨 실수?
결국 폴을 죽이지 않고 함께 케이크를 먹었던 것? 아니면 폴이 돌아간 후에 다시 한번 날 유혹하지 않았던 것?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고 죄를 고하듯 말했다.
“우리는 아직 결혼 전이잖아요.”
나는 입을 벌리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쇠도 씹어 먹을 만큼 건강한 스무 살 남자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순진한 대사였다.
그러나 이내 납득했다.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이 세상 모든 여자를 홀릴 만큼 아름다웠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만 짝사랑을 했을 만큼.
‘그런 남자이니 결혼 전 순결이 중요할 수도 있지.’
그러나 내심 서운했다.
당신은 어제 느꼈던 뜨거운 열망을 참을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아닌데.
우리가 하지 못한 뒷부분을 상상하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을 정도라고.
그러나 이어진 루시안의 말은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당신과 밤을 보내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설레는 일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겠죠.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들킨다면 분명 영애에게 큰 흠이 될 겁니다.”
루시안의 말대로였다.
귀족 사회는 보수적이었다.
아무리 약혼을 한 사이라고 해도, 결혼 전에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뒷말이 나돌게 된다.
비난은 대부분 여자에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정숙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나는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난 상관없어요. 그런 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죠.”
“그렇겠죠. 당신은 늘 당당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싫어요.”
“…….”
“당신이 누구에게도 나쁜 말 듣지 않고,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한 축복 속에서 나와 결혼을 했으면 좋겠어요.”
루시안이 내게 한 걸음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그의 품속은 봄처럼 따스했다.
“그러니 결혼 전까지는 당신을 소중히 하고 싶어요.”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루시안은 단둘이 있을 때면 늘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내 입술 위를 쪽. 그 후에는 코끝, 감은 눈 위, 볼, 이마, 귓불. 그리고 목선을 따라 내려오기까지.
그리고는 늘 열기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니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찌르르 떨려 왔다. 당장이라도 그를 넘어뜨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참아야 해, 페르니아.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첫날밤이 기다리고 있잖아.’
“아버지! 도대체 언제 딸을 결혼시킬 건데요. 약혼한 지 벌써 2년이나 되었잖아요!”
아버지는 며칠째 스무 살 된 딸의 진상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나의 결혼 타령에 지친 아버지가 소리쳤다.
“나를 들들 볶아도 소용없다니까.”
“도대체 왜요.”
“황제 폐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니까!”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당하게도 나와 루시안의 결혼식을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파워를 가진 이는 나도, 루시안도, 아버지도 아닌 황제였다.
황제가 주선한 약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도 알잖아, 페르니아. 황제 폐하께서 요 근래 부쩍 병세가 심해지셨다는구나. 그런 분위기 속에 어떻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느냐.”
아버지는 내 어깨를 잡고 다독이듯 말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결혼 날짜를 잡은 이들조차 날짜를 옮기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너도 얌전히 기다리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가에 비친 풍경을 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황제는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황제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지배자였다.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은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 * *
……라고 생각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이건만.
“오랜만이구나, 페르니아.”
“제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성으로 오라는 명을 받고 나는 황제를 찾아왔다.
‘뜬금없이 왜 나를 보자는 거지?’
아무리 미중년이라 해도, 황제와 만나는 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단둘이 얼굴을 마주 보는 상황은 더더욱.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든 나는 놀랐다.
‘예전보다 안색이 더 나빠졌잖아.’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처럼 황제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고, 살이 빠져 핼쑥했다.
황제의 병은 독에 의한 내상이었다. 그 독은 해독제가 없었다.
해독되지 않은 독은 핏속에 머물며 장기를 손상시키고, 내장을 갉아먹었다.
그러니 에스텔의 힘으로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몸속에 있는 독을 해독하지 않는 한, 황제는 낫지 않는다.
이대로 점점 독에 침식당해 죽어 갈 테지.
“그런 얼굴 하지 않아도 된다.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테니.”
이 아저씨, 정말 독심술을 쓰나.
도대체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아는 거야.
황제는 나를 향해 속이 다 보인다는 듯 웃더니 입을 열었다.
“에스텔에게서 편지가 왔다. 세브란 왕국에서 귀한 분을 찾아 보냈다고. 세브란 왕국의 소문난 명의라는구나.”
명의라고?
설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대륙에서 그만큼 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을 거라더군. 그라면 짐의 몸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이건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빙의하면서 원작의 내용이 많이 바뀌었지.’
루시안은 에스텔이 아닌 나를 좋아하게 됐고, 에스텔은 험난한 굴곡 없이 칼릭스와 사랑을 이루었다. 원작에는 없던 유학까지 가게 되고 말이다.
그런 에스텔이 저명한 의사를 찾아 제국으로 보냈다.
‘어쩌면 황제도 살 수 있을지 몰라.’
가능한 이야기였다.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긴 했으나, 루시안의 출셋길을 쥐고 있는 초강력 황금빛 동아줄이자 에스텔을 황태후의 구박으로부터 보호해 줄 최강의 방패막이였다.
황제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얼굴을 하다니, 내가 쾌유하는 게 꽤 기쁜 모양이지. 기분이 나쁘지 않구나.”
무엇보다 미중년이기도 하고.
어쨌건 황제의 병이 호전된다면 이래저래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에스텔의 눈은 정확하잖아요. 분명 대단한 실력의 의사를 찾아 보냈을 거예요. 그분은 꼭 황제 폐하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실 거예요.”
“고맙다. 하나, 내가 널 부른 것은, 어린 여인의 격려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지.”
난 당황했다.
할 줄 아는 것은 독설에, 꾸미기, 루시안 덕질밖에 없는 나한테 무슨 도움을 바라?
황제가 말했다.
“페르니아, 네가 제국에 도착한 명의를 황성까지 에스코트해 주렴.”
에스코트라니.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는 내가 괜한 실수를 해서 그를 불쾌하게 만들면 어쩌려고.
“폐하,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 더 능숙한 사람을 뽑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솔직히 제 인상이 손님 맞는 데 적합하지는 않잖아요.”
미인이라 그나마 순화되어 보여서 그렇지, 나는 인상이 더러웠다.
황제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말했다.
“그가 너를 지목했어.”
“네?”
“에스텔의 절친한 친구이자, 루시안의 약혼녀인 페르니아 라일락이 궁금하다고 하더군. 네게 꼭 에스코트를 받고 싶다고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 순간 본 황제의 얼굴은 절대 부탁하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건, 황제의 명령이었다.
거절할 권리가 없는.
* * *
내가 세브란 왕국에서 오는 의사 쿤의 에스코트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루시안의 반응은 이랬다.
“당신이 왜 그런 일을 맡아야 하는 겁니까.”
늘 나만 만나면 뜨거운 날의 젤리처럼 흐물흐물거리던 루시안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황제 폐하께 괜한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애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러지 말아요. 폐하께서 시키신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다고 자원한 거예요.”
“……영애가요?”
루시안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거짓말이었지만, 반은 진실이었다.
중요한 손님을 맡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처음에는 피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페르니아로 빙의한 이후로 이런 식의 일을 맡은 건 처음인걸.’
페르니아에게 주어진 일은 화사하게 꾸미고 연회장에 가는 것뿐이었다.
화려하고 유유자적한 귀족 영애의 삶도 즐거웠지만, 이런 무게감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
세브란국의 의사가 황제를 고치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황제를 건강하게 해 주는 데 작게나마 도움을 준 사람이 된다.
그건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바로 루시안과 나의 결혼식을 진행해 달라고 말해도 들어주시겠지? 황제 폐하도 건강해지시면 우리의 결혼을 진행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고 말이야.’
그것이 나의 야욕이었다.
나는 루시안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내게는 좋은 기회예요. 그러니까 루시안도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응원해 줘요.”
“…….”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도 절대 하지 않는다.
루시안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히히 웃는 나를 보며 루시안은 못 말린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당신이 에스코트할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그렇게 좋아하시는 겁니까?”
“간단한 정보는 들었어요. 세브란 왕국에서 손꼽히는 명의에…….”
나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루시안과 친분이 있다면서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군요. 그와는 절대 친분이라고 말할 관계가 아니에요. 단지 전쟁터에서 알게 된 사람일 뿐이지요. 그는 전쟁 용병이었거든요.”
귀가 쫑긋해졌다.
루시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특히 전쟁터에서의 일은 더더욱 말하는 일이 없었다.
“의사도 용병이 있어요?”
“돈이 필요하면 의사도 전쟁에 지원을 하죠. 하지만 그는 좀 특이한 경우였어요. 돈을 벌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기보다는…….”
루시안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생사를 오가는 이들을 치료하는 걸 즐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일수록 열성적으로 맡더군요.”
“…….”
거기서 조금 불안해졌다.
아니, 아니지. 한 분야에 미친 사람이라면 저런 특이점이 있을 수도 있잖아.
괜한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
“그래도 실력은 좋죠?”
“실력은 최고입니다. 의술로만 따지면 제가 아는 이 중 손에 꼽힐 정도죠. 확실히 그자라면 황제 폐하의 몸도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환해졌다.
“희망이 보이네요. 그런 분이 제국에 와 주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귀 뒤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니아, 당신은 늘 다른 사람을 위하네요.”
‘……그렇게 순수한 의도는 아닌데.’
인간으로서의 연민도 분명히 있었지만, 황제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는 나의 사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루시안의 황금 동아줄! 에스텔의 미래의 시아버지! 거기에 나와 루시안의 결혼을 진행시켜 줄 수 있는 실세!
이런 수많은 이유를 다 말할 필요는 딱히 없기에 나는 빙긋이 웃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루시안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저는 그냥 당신이 좋아요.”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나는 루시안의 두 볼을 잡고 입을 쪽 맞췄다.
* * *
오늘의 화장 컨셉은 차분함. 평소보다 한 톤 낮은 색조로 화장을 했다. (눈 화장은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점잖은 드레스를 입었다.
왜냐면 오늘은 세브란 왕국의 의사 쿤을 맞이하는 날이니까.
루시안은 나와 함께 오고 싶어 했지만, 다급한 용무가 생겨 오지 못했다.
[괜찮겠습니까?]걱정이 가득한 루시안을 향해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루시안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왜냐면 이건 이 세계에 온 뒤로 내가 처음 맡게 된 중요한 업무였으니까.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고 싶었다.
잠시 후, 성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아는 것 역시 많지 않았다.
세브란 왕국의 소문난 명의.
독약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라는 것뿐이었다.
매서운 눈빛을 가진 철두철미한 인상일까. 아니면 깊은 지식이 느껴지는 학자 같은 타입일까.
그러나 마차에서 나오는 쿤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