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6
12.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초겨울의 시원한 바람에 기분 좋게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행복한 날이었다.
그를 보기 전까지는.
“안녕.”
쿤이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회전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등 뒤로 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사람을 봐 놓고 너무하는 것 아냐?”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할 만큼 바빠?”
“네. 눈도 못 마주칠 만큼 바빠요.”
졸졸 따라오던 쿤이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갔다. 내 앞에 선 쿤이 말했다.
“선물은 잘 받았어?”
“…….”
결국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쿤과 마주 본 상태로 말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그 선물인지 흉물인지 다시 가져가세요.”
“왜? 마음에 안 들어?”
쿤은 억울하단 얼굴로 구구절절 약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 모르나 본데 그 약초, 지금 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스무 벌은 살 수 있는 귀한 거야. 워낙에 구하기도, 제조하기도 힘들어서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더니 쿤은 밉살스럽게 웃었다.
“어때, 알고 나니 다시 보이지? 너무 고맙지?”
고맙긴, 개뿔.
나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 약초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어도 받을 생각 없으니까 가져가시라고요. 내가 왜 댁한테 저런 걸 받아요?”
선물을 준 사람이 민망할 만큼 선을 그었건만, 쿤은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그야 내가 너한테 관심이 생겼으니까.”
“……!”
나는 눈을 부릅떴다.
쿤이 눈을 사르르 휘며 말했다.
“관심 있는 여자한테 뭐든 주고 싶은 게 사내 맘 아닌가.”
“…….”
“네 취향을 모르겠어서 일단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걸 보냈는데 영 아쉽더라. 그래서 찾아온 거야. 뭘 좋아해?”
“…….”
와, 얘 진짜 미쳤나 봐.
나는 굳은 얼굴로 쿤을 바라보았다. 너무 황당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대, 대체 왜 이래요? 연회 때 일이 아직도 안 풀린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냐고요.”
“괴롭히는 걸로 보여?”
“네! 엄청요!”
내 말에 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괴롭히는 게 아니라 집적거리는 건데. 생각보다 둔하네.”
“……그럼 지금 당신 말이 진심이라고요?”
“난 거짓말은 안 해.”
“…….”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게 더 끔찍했다.
뜬금없이 내가 왜 좋다는 건데!
처음 봤을 때부터 못난이라고 했으니 새삼 내 외모에 반한 건 아닐 테고. 설마 화장술 하나를 가르쳐 줬다고 반한 거냐.
‘그렇게 쉬운 남자였어?’
도대체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미친놈, 아니 쿤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요, 저 남자 친구 있거든요.”
“남자 친구?”
“루시안 말이에요.”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쿤은 ‘남자 친구…….’라고 중얼거리더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놈은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빵빵 터지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키득거리는 쿤을 향해 눈썹을 모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집적거림은 상당히, 매우, 아주, 심하게, 불쾌해요. 그러니 앞으로는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내 너의 목을 쳐 버릴 거야.’라는 기세로 말했건만 쿤은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그 얼굴이 기가 차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나와 쿤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굳은 얼굴의 루시안이 서 있었다.
* * *
나와 쿤은 마주 보고 있었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루시안이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쿤이었다.
“오랜만이야, 카르디엔. 여전히 재수 없을 만큼 잘생겼네.”
루시안은 쿤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단숨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괜찮아요, 니아?”
그의 얼굴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 나왔다.
쿤을 바라보는 내 표정이 험악하기 그지없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나 루시안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쿤이 당신에게 불쾌한 말을 한 거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선뜻 그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쟤가 나한테 관심 있대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죠?’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
그러나 나의 섬세한 걱정이 무색하게 쿤은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쾌한 말이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그제야 루시안의 고개가 쿤을 향해 돌아갔다. 쿤은 루시안의 서늘한 시선에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말했다.
“딱 한마디 한 것뿐이야.”
“…….”
“그녀에게 내가 관심이 생겼다고.”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여파는 굉장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이 났기 때문이다.
‘위험해.’
본능이 알려 왔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소리쳤다.
“멈춰요, 루시안!”
루시안은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은 허리에 찬 검을 잡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뺄 것처럼.
나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지금 검을 휘두르려는 건 아니죠?”
루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섬뜩한 눈동자를 본 것은 착각이었던 걸까.
루시안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루시안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 손은 뭔데요.”
그제야 루시안의 시선이 검을 잡은 손으로 향했다. 루시안은 당황한 얼굴로 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위협적인 상황을 마주할 때 저도 모르게 검을 잡는 기사의 본능일 뿐입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쿤도 마찬가지였다.
쿤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개소리를. 페르니아가 아니었으면 당장 내 목을 베었을 것 같은데.”
“…….”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쿤은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죽을 뻔하긴 했지만 나쁘진 않네. 네가 그렇게 흥분하는 얼굴을 보다니 말이야. 아군이든 적군이든, 누가 죽어 나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네가 말이야.”
쿤은 씨익 웃었다.
“그녀가 특별하긴 한가 봐?”
그제야 알았다.
쿤이 내게 갑자기 집적거린 이유를.
‘루시안 때문이구나.’
쿤은 루시안에게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호의인지 적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또 보자.”
쿤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나와 루시안은 인적이 드문 숲길을 걷고 있었다.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나는 루시안을 향해 물었다.
“쿤과 별 사이 아니라더니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걸요.”
“정말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뿐이에요.”
루시안은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니아, 도대체 며칠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심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루시안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어차피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연회장에서 쿤이 루시안을 괴물이라고 모욕했던 것. 그래서 내가 쿤에게 팩폭을 날린 것. 내가 쿤에게 화장술을 가르쳐 준 것까지 모두.
루시안은 미간을 모았다.
“설마 그때 쿤과 단둘이 방 안에 있었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요?”
“가장 중요한 일이죠.”
이 남자는 가끔 핀트가 이상하다니까.
나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단둘이 있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루시안도 걱정 말아요. 오늘 나한테 다가와서 관심이니 뭐니 한 것도 별다른 흑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흑심이 아니라고요?”
“그래요. 그저 내가 루시안의 약혼녀니까 건드려 보는 거라고요.”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루시안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정색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루시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역시 평범한 남자예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당신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시선이 가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됐을 겁니다.”
“……그 말, 진심이에요?”
“그럼요?”
루시안의 얼굴은 한 치의 장난도, 거짓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당황했다.
아무래도 루시안의 마음속에서 나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인가 보다.
눈만 마주쳐도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난 평범한 악역 조연이라고요.’
나한테 빠진 남자는 당신뿐이란 말이야.
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루시안의 차가운 뺨에 손을 댔다.
“쿤이 내게 그런 감정을 품을 리도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뿐이니까.”
“……!”
“그러니까 그만 화내요.”
나는 이 순간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좋았다.
누구의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은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내 말 한마디에 토끼처럼 순해지는 이 순간이.
루시안은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긴 은빛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이게 나의 루시안이지.
나는 키득거리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아까 말리기는 했지만 사실 좋았어요. 남자 친구가 질투해 주니까 좋더라고요.”
루시안이 귀를 쫑긋거렸다.
“그럼 또 해도 됩니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죽이지만 않으면요.”
그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루시안은 그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이 간 것뿐이라니까요. 정말입니다. 저는 그런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네, 네. 믿어 드리죠.”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쿤 놈 덕분에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는데.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그제야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재회한 후, 처음 보는 예쁜 미소였다.
황제의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동시에 쿤은 완전히 제국에 녹아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쿤은 엄청난 인싸였다.
쿤은 온갖 연회를 다니며 귀족들과 떠들어 댔다.
쿤의 왕성한 수다 활동은 생뚱맞게도 내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세상에. 눈이 두 배는 커졌잖아요. 정말 대단해요!”
귀족 여인은 그란테 남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이셰도를 깔고 짙은 아이라인을 그린 후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매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했다.
남작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긴 속눈썹을 붙인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무리 솜씨가 좋다는 전문가를 불러도 늘 맹숭맹숭한 화장을 해서 만족스럽지 않았거든요. 제가 원하는 건 이렇게 강렬한 화장이었는데 말이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수도의 유명한 화장 전문가는 점잖은 귀족의 화장술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맑은 피부에 은은하고 우아한 화장.
작은 눈이 콤플렉스인 그란테 남작 부인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란테 남작 부인은 한껏 기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부터 영애의 화장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진작 찾아와 화장법을 알려 달라고 할걸.”
옆에서 구경하던 리오 백작 부인이 말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고작 화장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는 건 엄두가 안 났는걸요. ‘그’ 페르니아 영애니까요.”
‘그’ 성격 더럽고 까칠한 페르니아에게 이런 일로 찾아오기는 그랬겠지.
그란테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어요. 이렇게 친절하신 분인걸.”
그녀의 말에 리오 백작 부인이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역시 쿤 님의 말대로예요.”
그렇다.
내가 이렇게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쿤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쿤을 둘러싸고 물었다.
[쿤 님, 처음 만난 날보다 눈화장이 더 깔끔하고 멋져지셨어요. 그사이에 연구를 하신 건가요?]쿤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상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여인들은 놀랐다.
[페르니아 영애요?] [그러고 보니 페르니아 영애의 화장과 똑같네요.]그 후 귀족 여인들이 한 명, 두 명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 화장법을 배우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말 놀랐지. 나는 귀족 여인들이 나를 그리 좋게 평가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니까.’
실제로 ‘미인이지만 너무 드세게 생겼다’, 혹은 ‘표독스럽게 생겼다’가 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였기도 하고.
그러나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취향은 다양한 법.
수도에는 귀족들이 하는 점잖은 화장이 지긋지긋한 이들도 많았다.
누군가는 작은 눈을 크게 만들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흐릿한 이목구비를 화려하고 돋보이게 만들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반항의 의미로 진한 화장을 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적지도 않았다.
한 명, 두 명 나를 찾아오던 이들은 어느새 나를 필두로 모임을 만들었다.
일명 ‘진사모’.
진한 화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란테 남작 부인이 불에 달군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지겨워요. 그놈의 정숙한 남작 부인이 다 뭐람. 난 눈이 부리부리하게 보이고 싶다고요.”
붉은색 루즈를 입술 위로 바르며 리오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화장은 천박하느니 그런 말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화장을 좀 진하게 했을 뿐이잖아요.”
손톱 위를 검은색으로 칠하며 마르엔느 후작 부인이 싸늘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난 어릴 때부터 공주님보다는 마녀가 좋았어요. 이게 내 취향이랍니다.”
획일화된 문화에 억눌려 있던 그녀들에게 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홀로 내 스타일을 지킨 고고한 늑대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나.
그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페르니아 영애 같은 분이 사교계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다 똑같은 화장을 한 와중에 페르니아 영애의 치켜 올라간 눈 화장을 보면 숨통이 탁 트였다니까요.”
여인들은 나를 추켜세우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내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에스텔이 유학을 떠난 후 이렇게 동성과 편안하게 수다를 떠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같은 취향을 가진 동성과 나누는 수다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리오 백작 부인이 말했다.
“참, 페르니아 영애. 이번에 영애가 해 준 화장을 하고 연회장에 나갔더니 로사사 공작 부인도 큰 관심을 보이셨어요. 페르니아 영애께 찾아가도 괜찮은지 여쭤봐 달라고 하셨어요. 괜찮으신가요?”
“로사사 공작 부인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사사 공작 부인은 온순한 성품으로 이런 모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그녀의 방문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리오 백작 부인은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회원이 또 늘겠네요.”
* * *
로사사 공작 부인을 한마디로 칭하자면 ‘자애로운 공작 부인’.
위세 높은 로사사 가문의 공작 부인이지만 아랫 사람을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들었으나, 반대로 그녀가 공작 부인답지 않다며 기어오르는 이들도 많았다.
로사사 공작 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내가 단호하지 못해 그런 거죠. 화장 하나를 바꾼다고 갑자기 성격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해 보고 싶어요.”
그녀는 여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요?”
“…….”
흐린 갈색 눈동자는 누구의 위에도 서지 못할 것처럼 유약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누구보다 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작 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내게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그동안 정말 힘들었다는 뜻일 테니까.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요. 화장 하나로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겉모습에 따라 변하는 법이니까.
그것은 자애로운 공작 부인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티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여우처럼 가는 눈을 가진 메로니 백작 부인이었다.
“호호.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과 달리 얼굴은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티 파티의 주최자는 로사사 공작 부인이니까.
여느 때처럼 그녀는 괜찮다며 용서해 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눈썹을 내리며 웃던 메로니 백작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테이블의 가장 끝에 앉아 있는 로사사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눈꼬리가 처진 유순한 얼굴의 로사사 공작 부인은 그곳에 없었다.
눈꼬리를 한껏 올린 도도한 여인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로사사 공작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쎈 언니’ 메이크업이란, 그런 것이니까.
메로니 백작 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제야 제대로 허리를 숙였다.
“느, 늦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차 바퀴에 문제가 생겨서요. 미, 미리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로사사 공작 부인.”
로사사 공작 부인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야.
‘쎈 언니’ 메이크업이 빛을 발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더 오래, 입을 다물수록 그 진가가 더 ‘쎄’지는 거라고.
예상대로 로사사 공작 부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메로니 백작 부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어쩌겠어.
‘여기가 동네 엄마들 마실 장소는 아니잖아. 알아서 처신을 잘했어야지.’
적어도 자기보다 서열이 위인 상대에게는 조심해야 했다. 상대가 만만하다고 실례를 저지르면서도 호호 웃을 게 아니라.
아무튼 자리에 모여 있던 여인들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진 게 느껴졌다.
늘 로사사 공작 부인의 앞에 서면 한껏 풀어졌던 여인들은 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 어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 * *
로사사 공작 부인이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진사모’의 회원은 엄청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도 바빠졌다.
내게 관심과 호의를 갖게 된 여인들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많은 이들이 복작이는 연회장에서 쿤을 만났다.
“요즘 여기저기서 다 네 얘기더라? 다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난리야.”
“그렇더라고요.”
“다 내 덕분인 거 알지?”
뻔뻔한 말에 나는 뻔뻔한 말로 응수했다.
“그게 왜 당신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죠. 사람의 매력은 언젠간 빛을 발하기 마련이고, 그게 지금 터진 것뿐이에요.”
그 말에 쿤은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잡고 끅끅거리던 그가 말했다.
“카르디엔은 왜 같이 오지 않았어?”
“황성에 회의가 있어 오지 않았답니다. 루시안은 이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기사라 아주 바쁘거든요.”
“흐음.”
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놈이 그렇게 얌전히 일할 놈이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따라오지 말라고 그랬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의 일을 우선시하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쿤은 그 말에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네 생각이지.”
“…….”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그에게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니아!”
커다란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이 미간을 모은 채 나와 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잖아요.”
“회의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그러더니 경계 어린 눈으로 물었다.
“쿤이 또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조금이라도 내게 이상한 말을 했다가는 우주 끝까지 던져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 그의 질투를 응원해 주고 싶었으나, 여긴 평화로운 연회장이었다.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연회를 연 주최자에게 실례지. 또 쿤을 건드렸다가는 루시안과 황실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기도 하고.
나는 루시안에게 팔짱을 낀 채 은근슬쩍 쿤에게서 멀어졌다.
“잠깐 대화를 나눈 것뿐이에요.”
“무슨 대화 말입니까.”
“글쎄요. 너무 별것 아닌 대화다 보니, 기억도 안 나요.”
“니아!”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루시안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함께 있는 건 오랜만이네요. 우리 춤출까요?”
루시안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루시안과 내가 손을 마주 잡자 연회장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잠시 후, 루시안과 나는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긴장이 가득한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키득거렸다.
“다행히 안 잊어버렸네요.”
“한번 외운 동작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제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문제인 거죠.”
루시안은 제가 끔찍한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얼굴이 굳어졌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가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좀 실수하면 어때요. 우리가 주인공도 아닌데.”
“당신이 창피를 당하지 않습니까.”
“…….”
“그건 정말 싫어요.”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늘, 나를 배려해 줄까.
콩닥거리는 심장을 안고 나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빙그르 돌았다.
행복한 밤이었다.
* * *
연회가 끝난 후 나와 루시안은 밤길을 걸었다.
늦은 시각, 텅 빈 거리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겨울바람이 쌀쌀했지만, 루시안이 걸쳐 준 그의 재킷 덕분에 포근했다.
연회장에서 와인을 마신 탓에 취기가 오른 나는 평소보다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다음에는 제가 연회를 열기로 했어요. 화장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덕분에 비상이 걸렸어요. 연회를 준비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즐거워 보여요.”
“헤헤, 티 나요? 사실은 그래요.”
이전까지 나는 그저 악역 조연일 뿐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심술부리는 것뿐인 악녀.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내 실력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줘요. 나와 대화를 하는 걸 진심으로 즐거워하고요.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에요. 루시안도 그 마음 알죠?”
루시안은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바닥부터 시작한 사람이었다.
붉은 눈을 가진 저주받은 아이. 그런 편견 속에서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을 때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말했다.
“루시안만큼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해 보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본격적으로 이쪽 일에 뛰어들 거예요. 다양한 화장법을 연구해 보고 화장품도 개발해 보고요.”
“아…….”
루시안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그 얼굴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좀 생뚱맞나?
하지만 이건 내게 있어 엄청난 기회였다. 내 삶을 좀 더 다채롭고 멋지게 만들 수 있는 기회.
바다표범처럼 뒹굴뒹굴 구르는 여유로운 삶도 좋지만, 불꽃처럼 열정적인 삶도 살아 보고 싶었다.
에스텔과 루시안처럼.
나는 눈을 빛내며 루시안의 손을 맞잡았다.
“두고 봐요. 나도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큼 멋진 사람이 될 테니까.”
“이미 당신은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에요.”
“그거야 루시안에게만 그렇죠.”
내 말에 루시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걸로는 부족한가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늘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다정한 말에 나는 기쁘게 웃었다.
* * *
* * *
나는 완성한 편지를 봉투 속에 넣었다.
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어서 가시죠. 주인님께서 벌써 마차에 오르셨어요.”
“알겠어.”
마차에 올라타니 한껏 차려입은 아버지가 나보다 더 흥분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페르니아의 뷰티숍’이 오픈하는 날이었다.
화장을 해 달라거나, 화장법을 배우고 싶다는 이들이 늘어났을 때 아버지가 놀라운 제안을 했다.
제대로 된 숍을 만들어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고.
나는 놀랐다.
보통 귀족은 딸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으니까. 결혼도 하지 않은 귀족 영애가 가게를 운영한다는 건 그만큼 파격적인 일이었다.
숙녀가 정숙하지 못하면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이 사회에서는 특히.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페르니아, 내가 말했지. 점쟁이가 갓 태어난 너를 향해, 제국을 구원할 존재라고 말했다고.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제국도 구해 줄 존재인데 라일락 가문 하나 구원해 주지 못하겠느냐. 너는 분명 크게 성공할 거야!]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가문의 명운이 달린 배팅을 했다.
아버지는 비상금까지 싹싹 긁어모아 숍을 오픈했다.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곳답게 화사하게 꾸며진 이곳이, 바로 나의 가게였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부쩍 가까워진 진사모(진한 화장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과, 요즘 주목받기 시작한 내 화장법에 대해 관심이 생긴 귀족들이었다.
“축하해요, 페르니아 영애.”
“숍이 정말 멋지네요. 아름답고 세련됐어요.”
아버지는 나보다 더 열정적인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로사사 공작 부인.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테리어가 아주 멋지지요? 수도에서 가장 솜씨가 좋다는 건축업자에게 부탁했답니다. 그 탓에 제 지갑은 텅텅 비었지만요. 아, 그렇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이곳은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곳이 될 테니까요. 하하하하.”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의 호기 넘치는 말을 들은 여인들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시네요. 후작님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셔야겠어요, 페르니아 영애.”
“그러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들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예약을 하고 가시겠어요? 오늘 예약하시면 서비스로 직접 제작한 장미 립스틱도 선물로 드린답니다.”
“호호, 당연히 예약을 해야죠. 저는 숍이 생기기 전부터 페르니아 영애의 단골이었으니까요.”
“저도요.”
많은 여인들이 손을 들고 예약을 했다. 제법 높은 금액을 책정했음에도 누구 하나 돈 걱정을 하는 이들이 없었다.
역시 귀족 손님이 최고야!
자본주의에 눈을 뜬 아버지와 나는 정신없이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이 물었다.
“그런데 카르디엔 경이 보이지 않네요?”
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루시안은 폐하의 명을 받고 황성에 갔어요. 오늘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여인은 아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아닌 루시안을 보기 위해 온 모양이다.
‘하긴. 내가 루시안의 약혼녀라서 다가오는 사람도 많으니까.’
애매해진 분위기 속에 그란테 남작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활기찬 얼굴로 풀 죽은 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르디엔 경을 못 보면 어때요. 오늘의 주인공은 페르니아 영애잖아요. 그녀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가면 되지요.”
그러더니 나를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숍에서 사용하는 화장품은 어디 제품인가요? 못 보던 화장품도 보이네요.”
아아, 그란테 남작 부인!
당신은 어쩜 이렇게 센스 있게 분위기를 바꿔 주나요.
나는 감동받은 얼굴로 그란테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인들에게 숍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루시안은 접견실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앞에는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는 얼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창백했던 안색은 혈색이 돌아왔고, 메말랐던 입술은 생기가 돌았다.
아직 완전하게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자의 상태는 아니었다.
쿤의 치료 덕분이었다.
황제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한 번 더 분쟁 지역에 다녀오거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루시안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곳은 이미 전쟁이 끝났습니다. 적군은 패배를 인정했고, 제국의 병사들이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러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 네가 받아 냈던 협약서와 달리 패잔병과 지역민들이 제국군에게 비협조적이라고 하더구나. 전쟁을 호령하던 무시무시한 카르디엔이 사라져서 그러는 거겠지.”
“…….”
“그러니 네가 필요해. 전쟁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얌전히 제국군의 말을 들을 테니까.”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상황을 수습할 기사는 많습니다.”
루시안의 말에 황제는 불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놈들 열 명을 보내도 너 한 명의 이름값을 못 따라오지 않느냐!”
그러더니 황제는 루시안을 다독이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너를 보내는 것은 귀족들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함이야. 카르디엔이 얼마나 대단한 기사인지를. 네가 그토록 긴 전쟁을 끝내고 왔을 때 귀족 놈들이 너를 얼마나 야박하게 대했느냐.”
황제는 루시안이 승전을 하고 돌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오랜 시간 제국의 골칫덩이였던 분쟁 지역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귀족들은 평민인 루시안의 성과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황제는 몸이 약해 제대로 루시안을 비호할 수도 없었다.
그 탓에 루시안은 엄청난 성과를 이뤘음에도 카르디엔 ‘경’이라는 기사의 칭호 하나와 작은 땅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황제는 내내 그것이 신경 쓰였다.
“네가 다시 분쟁 지역에 가서 그곳의 소란을 정리하고 오면, 그때 주지 못한 지위와 작위를 주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받아야 할 보상을 받는 거야.”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의 계기만 있다면 황제는 루시안에게 주고 싶었던 많은 것을 줄 수가 있었다.
이번 명령은 그걸 위한 수였다.
루시안도 황제의 마음을 알았다. 아끼는 부하를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루시안은 차마 황제의 말에 알겠다고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분쟁 지역은 거리가 멀다. 아무리 말을 타고 달려도 가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황제가 명령한 대로 분쟁 지역의 분위기가 수습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너무 오랜 시간 그녀와 떨어져 있게 돼.’
입을 꾹 다문 루시안을 바라보며 황제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짐의 명령을 거역하고 싶은 거냐?’
루시안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왜? 페르니아가 가지 말라고 하면 꾀병이라도 부려서 가지 않으려고?”
“…….”
루시안의 반응에 황제는 혀를 찼다. 황제는 가늘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여자에게 빠져서는…….”
금방 돌아온다고 하더니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망나니 아들이 생각났다.
그러나 황제는 칼릭스에게 그러했듯 루시안에게는 윽박지르지 않았다.
사랑에 눈먼 청년이 얼마나 골 때리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강하게 나가 보았자 반발만 심해진다. 그보다는 그가 빠져 있는 여인을 미끼로 술술 구슬리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 페르니아와 대화를 해 보거라. 그 아이가 네가 멀리 떠나는 것이 싫다고 하면 이렇게 말해라. 원한다면 함께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럼 선택하기가 좀 더 쉽겠지?”
황제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제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부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배려를 해 주는 것이었으니.
그만큼 황제가 루시안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루시안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루시안은 황성을 나와 말을 타고 페르니아의 가게로 향했다.
오늘은 그녀에게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조금 늦긴 했으나 어서 가서 축하를 해 주고 싶었다.
미리 준비해 둔 꽃다발을 들고 달리며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는 송구스럽지만, 그녀가 원치 않으면 가지 않을 거야.’
황제가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중요한 기회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제대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임을.
하지만 루시안은 그런 것이 하등 욕심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페르니아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하아, 하아…….”
쉴 새 없이 말을 타고 달려온 탓에 이마에 땀방울이 흘렀다.
루시안은 땀을 닦아 내며 말에서 내려 가게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가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벅적이고 있었다.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페르니아가 보였다.
그녀는 너무나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페르니아는 행복해 보였다.
조금도 자신의 부재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온전히 나만 바라본 게 언제였지.’
그녀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며 점점 바빠지더니, 가게를 내기로 결정하면서부터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만난다 해도, 페르니아는 늘 그녀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예전처럼 루시안만 바라보고, 함께 있는 순간을 설레어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서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궁상맞게.”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에 루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든 쿤이 보였다.
쿤은 루시안과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하. 질투라도 하고 있었나 보네.”
그러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기네. 감정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쿤이 전쟁터에서 본 루시안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와 전혀 달랐다.
그는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늘 약한 이들을 챙길 만큼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일말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잘 훈련되어 감정을 습득한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제가 정말 원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에게 주입한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성녀의 존재를 알았다.
카르디엔이 마음 깊이 존경하고 따르는 여인이 있다고.
[그럼 저놈을 움직이는 건 그 성녀라는 여자인가.]그러던 중 성녀가 세브란 왕국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쿤은 단번에 성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외모만 고운 것이 아니라, 곧은 심성과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루시안이 푹 빠져 있는 여자야?]그러나 그녀는 깜짝 놀라며 그 말을 부정했다.
[루시안이 지금 마음에 품고 있는 상대는 니아 님이세요.] [니아?] [네. 루시안 님의 약혼녀요. 얼마나 그녀를 소중히 생각하는데요. 참 잘 어울리는 연인이랍니다.]흥미가 일었다.
그 루시안이 소중히 생각한다고? 잘 어울리는 연인이라고?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쿤은 제국으로 향했다. 반은 병든 황제를 고친 후에 챙길 이득 때문이었고, 반은 루시안의 연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막상 보고는 엄청 실망했지만.’
처음 만난 페르니아는 평범했다. 성녀에게 느꼈던 특별함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진한 향수 냄새. 화려하게 꾸민 외양.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눈동자.
흔하디흔한 귀족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후 보여 준 모습은 쿤의 예상과 달랐다.
[루시안에게 괴물이라고 한 말, 취소하세요.]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루시안에게 푹 빠져 있는 여자를 본 게 한두 명은 아니니까.
그 정도 깡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말은 충격적이었다.
[당신, 아이라인, 짝짝이예요.]……그런 모욕은 생전 처음이었다.
쿤은 그때를 떠올리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얌전한 귀족 영애인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더군. 새침한 겉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투견이야.”
쿤은 짙은 눈매를 반달처럼 휘며 말했다.
“꽤나 재미있어.”
그러나 미소를 띤 쿤과 달리 루시안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어떤 감정을 꾹 눌러 담은 것처럼.
루시안이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쿤, 그만하십시오. 더는 당신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그만하지 않으면? 날 죽일 거야?”
“……설마요. 전쟁터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저 정중하게 부탁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쿤은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푸하하 웃었다.
“부탁 한 번 더 했다가는 사람 죽겠네.”
그 정도로 루시안의 눈빛은 섬뜩했다.
그러나 쿤은 조금도 루시안이 무섭지 않았다.
페르니아가 그걸 원치 않는 한 루시안은 절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쿤은 피식 웃으며 루시안을 지나쳤다.
문을 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여인들이 눈을 빛내며 가게에 들어선 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꺄, 쿤 님!”
“어머머. 카르디엔 경도 오셨네요.”
“두 분이 함께 오시다니 정말 멋진 광경이에요!”
그 사이에 페르니아도 있었다. 상기된 여인들 틈 속에서 페르니아가 걸어 나왔다.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페르니아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왔군요, 루시안. 이대로 못 오는 줄 알았어요.”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 말에 페르니아는 눈썹을 내리며 루시안의 볼을 어루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그런 것 같네요.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중요한 날이지 않습니까. 축하합니다, 니아.”
루시안은 페르니아에게 색이 선명한 보라색 팬지 꽃다발을 건넸다.
페르니아는 그에게 꽃다발을 받으며 웃었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을 본 여인들의 얼굴이 발그레해질 만큼.
이른 봄이 온 것처럼 살랑이는 분위기를 깨 버린 것은 쿤이었다.
“쯧쯧, 커플 놈들이란.”
쿤은 심술궂은 얼굴로 페르니아에게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난 투명 인간이냐?”
“…….”
페르니아는 루시안을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쿤을 바라보았다.
쿤은 페르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똥을 상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 쿤에게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누가 봐도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이고, 귀한 몸께서 누추한 곳까지 와 주시다니 차암 감사하네요.”
누가 봐도 하나도 안 감사한 얼굴이었다.
결국 쿤은 또다시 배를 붙잡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는 페르니아의 눈은 경멸 그 자체였다.
‘진짜 왜 저래?’
* * *
오픈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연회에 참석한 여인들은 흡족한 얼굴로 가게를 떠났다.
가게의 주인인 페르니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지만, 현재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두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텅 빈 가게에는 페르니아와 루시안만이 남았다.
손님들과 마신 몇 잔의 술 덕분에, 페르니아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수첩을 흔들며 말했다.
“무려 한 달간의 예약이 꽉 찼어요. 정말 대박이지 않아요?”
“그만큼 니아의 실력이 뛰어난 거죠. 정말 대단해요.”
“히히.”
루시안의 칭찬에 페르니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돈 많이 벌면 루시안에게 좋은 선물을 잔뜩 해 줄 거예요. 맛있는 케이크도, 요즘 잘나가는 신상 검도, 이름 높은 디자이너가 만든 옷도 잔뜩 사 줄 거예요.”
사랑스러운 말에 루시안도 웃음을 터뜨렸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내 루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토록 즐거워 보이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꼭 해야 할 말이었다.
루시안이 말했다.
“니아.”
“네?”
“분쟁 지역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