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7
13.
예상치 못한 말에 페르니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얼마나요?”
“확실치 않습니다. 오고 가는 거리만 며칠이 걸리는 곳이니 일이 빨리 끝나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한 달. 긴 시간이었다.
페르니아는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위험한 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잠시 얼굴을 비치면 되는 정도의 일이에요.”
그제야 페르니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그녀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루시안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녀가 가지 말라고 하면 절대 가지 않을 거야. 그것이 폐하의 명이라고 해도.’
페르니아는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가 사랑하는 당찬 눈동자였다.
“알겠어요. 잘 다녀와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루시안의 굳은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페르니아가 말을 덧붙였다.
“폐하의 명이라면서요. 그럼 중요한 일이잖아요.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한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었다.
루시안은 당황했다.
그에게는 너무 낯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신 차려, 루시안.
고작 그녀의 말 한마디에 뭘 이렇게 충격 받는 거야.
그녀는 씩씩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다. 그러니 저렇게 대답한 거야.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저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잖아.’
루시안을 바라보는 페르니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왜 그래요, 루시안? 얼굴이 창백해졌어요. 혹시 어디 아파요?”
페르니아는 혹시나 루시안이 다친 건 아닌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루시안의 이마 위에 손까지 올린 후에야 그의 몸에 딱히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페르니아가 루시안의 손을 맞잡고 그의 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
“그런 거라면 어서 말해요.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서로 숨기지 않고 말하기로 했잖아요.”
루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그의 손을 그녀가 잡아 준 것 같았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에는 자신이 온전히 비치고 있었다.
루시안은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니아, 사실은요.”
“네.”
페르니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원한다면 당신도 함께 가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
“당신이 저와 함께 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심한 어리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답은 쿵쾅이는 루시안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건 좀 곤란해요, 루시안.”
“…….”
“오늘 막 가게를 오픈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당장 예약한 손님도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요. 미안해요.”
루시안을 향한 페르니아의 눈빛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에는 미안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사과할 이유는 없다.
대뜸 그녀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자고 한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막 제 꿈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다.
그러니 화내서는 안 된다.
원망해서도 안 된다.
그녀를 욕심내서는 안 된다.
루시안은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독하게 뜨거운 무언가가 몸속 깊숙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루시안은 그 감정을 꾹 삼키며 말했다.
“사과하지 말아요, 니아. 나야말로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페르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애초에 이건 서로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요. 루시안도, 나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뿐이니까.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너무너무 서운하지만 그래도 이런 고난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페르니아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거리가 멀어져도 우리는 더 불타오를 거예요. 자신 있다고요!”
그 말에 루시안은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루비처럼 선명한 붉은 눈동자 속에 무언가 진득한 것이 일렁였다는 것을.
* * *
가게를 오픈한 후 일주일 동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본만 댈 뿐, 직접 운영하지 않는 여타 귀족들과 달리 나는 직접 고객 응대를 맡았기 때문이다.
몸은 피곤에 찌들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페르니아 영애!”
화려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는 손님들 덕분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다음번에도 이용하도록 할게요.”
게다가 두둑한 보상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니 진짜 최고야!’
정말 즐거웠다.
석양이 질 즘에는 가게 문을 닫았다.
나는 손님도 직원도 없는 텅 빈 가게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 가게라 더 애정이 가기 때문일까.
저택의 방보다 이곳이 편해서, 나는 이곳에서 이것저것을 더 하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다.
지금은 칼자루에 다는 테슬을 만들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줄 선물이었다.
‘멀리 떠나는 기사에게 레이디가 직접 만든 테슬을 주는 것만큼 낭만적인 증표는 없지.’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여 나와 그의 눈동자 색을 닮은 붉은색과 초록색의 비단실을 엮었다.
그때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업이 끝난 가게에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반가운 얼굴로 문 앞에 섰다.
“루시안이에요?”
요 며칠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에 찾아왔다. 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손님이 떠난 시간에 맞추어.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루시안이 아니었다.
“나다.”
나가 누군데?
어딘가 들어 본 것처럼 낯익은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정확히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새삼 경계심을 느끼며 나는 구석에 두었던 하이힐을 손에 들었다.
유난히 굽이 뾰족하고 높은 이것은 훌륭한 살상 무기였다.
‘수상한 놈이면 두개골에 구멍을 내주마.’
그렇게 결심하며 나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라고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제대로 이름을 밝히시죠.”
금세 대답이 들렸다.
“아타나시오 알렉시스 나르샤 프란츠.”
목소리는 하난데 이름은 왜 이렇게 많아? 몸은 하난데 영혼은 여러 개야? 무슨 다중인격이야?
라고 별별 생각을 다 하던 나는 히익 하고 입을 막았다.
바로 황제의 이름이었다
*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은밀하고 포근했던 나의 아지트는 숨 막히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황제 덕분에.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는 나와 달리 황제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크진 않아도 잘 꾸며 놓았구나. 귀족 여인들이 좋아하겠어.”
“과찬이십니다.”
황제의 칭찬에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며 속으로는 도대체 왜 그가 여기에 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건강을 회복해서 이곳저곳 출몰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긴 너무 생뚱맞잖아.
고뇌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나한테 화장을 받으러 왔나?’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미중년이긴 했으나 황제는 너무 부드러운 얼굴이었으니까.
복귀한 기념으로 카리스마 황제로 이미지 변신을 하려는 건지도 몰라.
눈썹을 위로 쭉 뻗게 그리고 아이라인을 과감하게 덧그리면 폭군 메이크업 완성……!
이라며 마음속으로 황제를 희대의 폭군으로 만든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황제였다.
황제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겠구나.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루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볼일이 있다면 언제나처럼 황성으로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내 생각을 읽은 듯 황제가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늘 황제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을 하러 왔거든. 그러니 내가 찾아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부탁이라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건강도 회복하고 세상 권력을 다 손에 쥔 황제가 내게 무슨 부탁을 해?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루시안에게 분쟁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느냐?”
“네.”
“루시안이 네게 뭐라고 말하더냐.”
“폐하의 명으로 잠시 그곳에 다녀와야 한다고요.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황제의 입술 사이로 낮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틀 전 분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
“제국에 항복했던 지역민과 흩어졌던 패잔병들이 뭉쳤다. 그들뿐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외국에서 그들에게 병사와 무기를 지원했어. 남아 있던 제국군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전력이 된 셈이지.”
나는 정치나 국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 것 같았다. 그만큼 황제의 얼굴이 어두웠으니까.
“반란군이 닥치는 대로 제국군과 제국민을 죽이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곳은 끔찍한 지옥이 되었어.”
“그, 그럼 어서 군대가 출정해야 하지 않나요?”
“그래,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지. 그것도 분쟁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자가.”
그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루시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웃으며 평범한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럼 루시안이 또 전쟁에 나가는 건가?
내가 걱정을 할까 봐 말하지 못한 거야?
그래서 황제가 내게 그 사실을 대신 말해 주러 온 건가?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루시안이 기사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네? 그게 도대체…….”
“일주일 전 짐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말하더군. 짐에게 받은 모든 것을 내놓을 테니 자신을 해임해 달라고.”
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쿵 하고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내 얼굴을 보더니 혀를 쯧 찼다.
“전혀 몰랐던 모양이구나.”
이내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운 얼굴에 어린 감정은 분노였다.
“짐이 루시안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출신도 불분명한 어린 평민 기사를 장군으로 발탁하여 전쟁터로 보내고, 끊임없이 짐의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놈이 날 배신한 거야. 그것도 이런 긴박한 상황에.”
그 분노가 어찌나 서늘한지 오한이 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바들바들 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향한 곳은 나였다.
“루시안에게 물었다. 짐이 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네가 가장 도약할 수 있는 순간에 왜 짐을 떠나려고 하냐고. 놈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으냐.”
“…….”
차마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분노를 내뱉는 황제에게 어떻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나 늘 그렇듯 루시안의 행동의 답은 ……나였다.
“너 때문이야, 페르니아.”
“……!”
“루시안은 네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했어. 아주 잠시라도.”
황제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기가 찬 듯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그런 얼간이 같은 이유로 놈은 짐을 등졌다. 그리고 제국민을 등졌어.”
잠시 후,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황제의 얼굴은 차분해져 있었다.
강렬한 분노를 제 속에서 갈무리한 듯이.
황제가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시안의 목을 치고 싶지만, 지금 필요한 건 놈의 목이 아니라 놈의 힘이다. 그러니 페르니아, 부탁한다. 놈을 설득시켜 줘.”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부탁이었다.
* * *
황제가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안이 찾아왔다.
루시안은 언제나처럼 두 손에 달콤한 케이크를 잔뜩 사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샤립스의 복숭아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죠? 복숭아 케이크와 잘 어울린다고 추천받은 차도 사 왔어요.”
루시안의 얼굴에서는 어떤 고뇌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에게 들었던 상황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꺼내 놓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분쟁 지역의 상황이 심각하다면서요?”
“……!”
루시안이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을 보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제의 말은 진실이었다.
루시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디서 그 말을 들은 겁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궁금한 건 루시안의 생각이에요.”
“제 생각이요?”
“네. 그곳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시안의 의사에 대해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정말 나 때문에 그곳에 가질 않는 건지, 아니면 더는 위험한 곳에 가고 싶지 않은 건지.
아무리 그가 이름 높은 기사라 해도 더는 위험한 곳에 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아무리 폐하의 부탁이라고 해도 그를 설득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지난 3년간의 전투를 벌이며 진심으로 분쟁 지역에 안정이 찾아오길 바랐습니다. 이제야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괴로워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럼 그곳에 가고 싶다는 거예요?”
루시안은 대답을 주저했다. 잠시후 그가 말했다.
“아니요.”
“가지 못해 괴롭다면서요.”
루시안이 나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당신이 없잖아요.”
한순간 숨이 멈췄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루시안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오로지 나 때문이었다.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너무나 곧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너무 애달프고 위태로웠다.
황제의 말이 생각났다.
[루시안을 설득하거라, 페르니아. 만약 그것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루시안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그를 아꼈던 짐에게는 신임을 잃고, 그를 거슬려 했던 귀족 놈들은 비아냥거릴 테고, 그를 존경한 병사와 평민들에게는 끔찍한 비난을 들을 테지. 그렇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루시안도, 너도.]그를 그런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루시안, 당신이 그곳에 가지 않는 이유가 나 때문인 거라면…… 같이 가요.”
“네?”
“분쟁 지역으로 함께 가자고요.”
“……!”
그것이 내가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당신이 갈 이유는 없어요.”
“당신이 날 지켜 주면 되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곳이 너무 소중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눈이 마주쳤다. 내 의지를 느낀 루시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루시안이 복잡한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함께 가요, 니아.”
부디 바라건대…….
그의 목소리에 기쁨이 어려 있다고 느낀 것이 나의 착각이기를.
* * *
루시안은 황제에게 분쟁 지역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황급히 군대를 정비했다.
나도 나대로 정신이 없었다.
예약을 잡은 손님들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겨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고 사과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에게도 말했다.
“아버지, 나 루시안과 함께 분쟁 지역으로 떠나요.”
아버지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페르니아! 야만족들이 날뛰는 곳에 네가 왜 가! 절대 안 돼!”
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해 주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아버지. 병사들과 함께 가면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래요. 폐하께서 호위 기사도 철저히 붙여 주신다고 하셨고요.”
“그래 봤자 전쟁터는 전쟁터지. 꼭 가야겠다면 나도 가련다. 같이 손 꼭 붙잡고 가자!”
겁이 많아서 검도 못 잡는 사람이 따라온다니, 솔직히 좀 감동받았다.
나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숨기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버지는 할 일이 있잖아요.”
루시안과 함께 가기로 선택한 것은 나였지만 내게 그런 선택을 강요한 사람은 황제였다.
미안했던 걸까. 제 부탁을 들어준 이에 대한 보답일까.
황제는 라일락 가문에 수도 정비 사업을 맡겼다.
나는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라일락 가문을 대놓고 밀어 주시는 거잖아요.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요. 제대로 일을 해내서, 우릴 무시하던 가문들의 콧대를 눌러 버리자고요.”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다독였다.
그 후 가게로 향했다.
루시안의 말로는 길면 한 달, 짧으면 세 달 정도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적막한 가게를 바라보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아예 가게 문을 닫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잠시 쉬는 것뿐이다.
“곧 돌아올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닫힌 문 위로 팻말을 걸었다.
문을 잠그고 가게를 나오는데 이 순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쿤이었다.
“카르디엔을 따라간다며?”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저 말을 꺼내는 것일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사랑에 눈멀어 위험한 것도 모르고 분쟁 지역까지 따라간다며 비아냥대려는 것일까.
그러나 쿤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황제가 협박했지?”
“…….”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건만 쿤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황제 자식. 기껏 병을 고쳐 줬더니 엄한 데서 기운을 쓰고 있네. 다시 몹쓸 몸으로 만들어 버릴까 보다.”
대찬성! 아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나는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나요?”
황제와 나 사이의 모종의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 다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행히 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 눈치로 알아낸 거지.”
“그럼 다행이고요.”
나는 새침하게 대답하며 쿤을 지나쳤다. 쿤이 나를 졸졸 쫓아오며 말했다.
“화 안 나?”
“뭐가요?”
“카르디엔을 따라가는 건 네 의지가 아니잖아. 황제는 협박하고, 카르디엔은 제 욕심을 양보하지 않았겠지.”
“…….”
“그 사이에 껴서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짜증 낼 법한 상황이잖아.”
“……별로요. 제가 원래 마음이 드넓은 바다처럼 넓거든요.”
“그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천사요?”
“아니. 호구.”
“당신 맨얼굴처럼요?”
쿤의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덤비긴 왜 덤벼.
등 뒤로 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자기가 좋아서 바보짓을 한다는데 말릴 필욘 없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
“이번 일로 끝나지 않을걸. 카르디엔은 앞으로 점점 더 너를 옭매어 올 거야. 언젠간 네가 그놈을 감당할 수 없게 될 만큼.”
저주 같은 말에 나는 뒤돌아 소리쳤다.
“멋대로 내 능력을 재단하지 말아 줄래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내 사랑은 대단하거든요?”
쿤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만만하네. 뭐, 지켜보면 알겠지.”
지켜보긴 뭘 지켜봐!
네놈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난 떠난다!
* * *
루시안의 군대가 출병하는 날이 다가왔다.
병사들의 수가 엄청났다.
이번에야말로 분쟁 지역의 분란을 말끔히 해결하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느껴졌다.
군대의 중앙에 거대한 백마를 탄 루시안이 자리 잡고 그 뒤로 나를 태운 마차가 자리 잡았다.
은색 갑옷을 입고 병사들을 호령하는 루시안의 모습에 감탄이 새어 나왔지만, 나는 이내 똥 씹은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뇽.”
마차 옆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쿤의 얼굴 때문이었다.
‘저놈이 도대체 왜 여기 있냐고.’
쿤은 어제부로 황제의 주치의를 그만두었다.
[황제는 몸을 거의 회복했어. 그럼 이제 떠날 때가 됐지. 건강한 환자는 재미없거든.]그렇게 말하며 쿤은 황제에게 부탁해 군대에 합류했다.
루시안은 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를 막지는 못했다.
쿤은 황제의 더없는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저택을 나서기 전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말했다.
[페르니아, 아침, 점심, 저녁 꼭꼭 챙겨 먹어야 한다.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말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고, 적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째려보지 말거라. 솔직히 네 눈빛이 좀 사나우냐. 괜히 찍혀서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어떡하니.]물론 아버지가 걱정하실 만큼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일은 없을 것이다.
비전투 요원인 내가 전방에 설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후방의 안전한 곳에서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터였다.
‘내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루시안이 지휘하는 제국군이 밀리는 때인데,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루시안이 말했으니까.’
전쟁터에 간다는 것에 대해 크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
황제의 긴 연설이 끝나고 드디어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의 자그마한 창문 밖으로 루시안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시안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방금 전까지 용맹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호령하던 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온화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그 미소에 넋이 나가 풀어져야 하는데 이상했다.
가슴 한편이 찌릿했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숨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 * *
분쟁 지역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병사들은 지휘관인 루시안의 약혼녀인 나를 극진하게 대했고, 루시안도 내게 섬세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팔자에도 없는 공주님 취급을 받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흑흑. 조금만 더 가면 엉덩이에 굳은살이 생겨 버리겠어.’
아무리 최고급 마차라도 며칠 내내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얼얼하기 그지없었다.
가엾은 엉덩이를 매만지던 어느 때, 드디어 마차가 멈췄다.
나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마차를 나왔다. 루시안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니아.”
마차가 선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금빛 밀밭 사이로 작은 성이 보였다.
분쟁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인 알리샤 남작의 성이었다. 전쟁이 벌어질 동안 내가 지낼 곳이기도 했다.
루시안과 내가 들어서자 성의 주인인 알리샤 남작 부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카르디엔 님. 좋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루시안을 반기는 남작의 얼굴에서는 크나큰 기쁨이 느껴졌다.
루시안은 차분한 얼굴로 상황을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요?”
“반란군은 성 뒤에 있는 코랄산맥까지 다가왔습니다. 성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가깝군요.”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해진 얼굴에서 반란군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안의 한마디는 그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애 주었다.
“산맥을 경계로 진영을 펼쳐 그들을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이곳은 절대 전투에 휘말리게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필히 그렇게 될 것을 믿게 만드는 확신 어린 목소리였다. 그제야 남작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작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카르디엔 님께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죠. 아아, 늦지 않게 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안심한 남작 부부는 그제야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알리샤 남작 부인이 내게 다가와 싹싹하게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요, 페르니아 영애. 영애께서 묵으실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따라오셔요.”
나는 방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연분홍색 벽지로 꾸며진 방은 아기자기했다.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낡은 성에 이런 방이 있어도 괜찮나, 싶을 만큼 화사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알리샤 남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이 마음에 드시나요?”
“네, 정말 훌륭해요.”
“다행이네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남작 부인을 향해 물었다.
“제가 이곳에 머무른다는 소식도 어제야 들으셨을 텐데 어떻게 이런 방을 준비하셨어요?”
“카르디엔 님의 약혼녀께서 묵으실 방을 준비해 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밤을 새서 준비했답니다. 수도에서 지내시던 분이니 수준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좋아해 주시니 안심이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게서 대체 왜 이런 곳에 따라왔냐는 한심스러운 눈빛이나 깔보는 마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한 눈동자에는 무조건적인 호의가 담겨 있었다.
‘루시안의 인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분쟁 지역 근처의 제국민은 수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루시안을 존경한다고 들었다.
분쟁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 부부라면 말할 것도 없을 테지.
남작 부부의 환대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차린 것이 많지는 않지만, 정성껏 준비했답니다. 드시지요.”
잘 차려진 식사.
“계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책과 악기, 미술 도구를 준비했어요.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셔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날 위해 준비한 갖가지 유흥거리들.
“의복을 챙겨 오시긴 했지만 지내시는 동안 부족할 수도 있으니 방 안에 의복을 몇 벌 채워 두었습니다. 디자인이나 사이즈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즉시 수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옷장에 가득 차 있는 드레스까지.
솔직히 말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정성은 고맙지만, 내가 지금 놀러 온 게 아니잖아요.’
비록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성 밖으로 보이는 산맥 아래에는 반란군이 득실득실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전시 상황에서 이런 호사라니.
나는 방으로 들어온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남작 부부를 말려 줘요. 나는 쭈구리처럼 조용히 있고 싶다고요.”
그러나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길어야 한 달이에요.”
“…….”
“한 달 내로 반란군을 제압하고 수도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한 달만 편히 있어 주세요, 니아.”
마주친 루시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으, 이런 반짝반짝 공격 오랜만이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런 상황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볼게요.”
라고 말한 것이 고작 3일 전이건만.
“꺄르르. 페르니아 아가씨, 너무 웃겨요.”
“어쩜 그렇게 입담이 좋으세요? 하시는 말마다 웃음이 빵빵 터진다고요.”
“크흐흡. 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났잖아요.”
나의 이 적응력 무엇.
루시안은 병사들과 전투에 나가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나는 이 성안에만 있어야 했고, 성안의 여인들은 수도에서 온 귀족 영애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내가 이런 라이징 스타가 된 것은 필연이랄까.
워낙에 웃음 장벽이 낮은 알리샤 남작 부인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말주변도 좋으시고, 우아하고, 당차고, 아름다우시기까지. 수도의 아가씨는 정말 다르네요.”
엄청난 칭찬 공격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헷헷. 그 정도는 아닌데.”
남작 부인과 두 딸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화장도 직접 하신 거죠?”
“네.”
“정말 예뻐요. 수도에서 유행하는 화장인가요?”
“취향을 타긴 했지만 일부에서는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내 말에 남작 부인과 두 딸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겸손하게 답했다. 그러나 남작 부인과 두 딸의 반응은 엄청났다.
어떻게 화장을 하냐느니, 어떤 화장품을 쓰냐느니. 수도의 유행에 대해서 관심이 엄청났다.
그녀들의 모습은 며칠 동안 억누르고 있던 나의 야망을 자극시켰다.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장, 해 드릴까요?”
아버지.
멀고 먼 이곳에 페르니아는 메이크업 숍 2호점을 오픈하고 가겠습니다.
* * *
제국의 병사들에게 분쟁 지역은 무서운 곳이었다.
기후도 지형도 식물도 낯선 데다가 심지어 흉악한 괴수까지 출몰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적군은 이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역민들이니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눈빛은 생기가 넘쳤다.
루시안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진영을 두루두루 살피고 있었다.
“부상이 심하군. 버티지 말고 후방으로 가도록 해. 이대로 두면 상처가 덧나 상황이 더 악화된다.”
“네!”
루시안에게 관심을 받은 병사는 감격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가장 지위가 낮은 병사들까지 챙겨 주는 자애로운 지휘관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쟁터에서는 더없이 용맹했다.
‘그러니 어떻게 저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관인 폴은 흐뭇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영을 다 둘러본 루시안의 말 한마디에 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잠시 성에 다녀올게.”
보통의 장군은 성에서 편안하게 지내기 마련이지만, 루시안은 아니었다.
루시안은 늘 병사들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는 아니었다.
루시안은 준비된 막사가 있음에도 매일 성으로 돌아갔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날에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성에 들렀다.
차라리 성에 가야 할 피치 못할 이유가 있다거나 본인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서라면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루시안이 매일 성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페르니아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폴의 마음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다.
루시안이 얼마나 페르니아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고 있기에.
얌전히 말을 준비해 온 폴을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만 잠시 보고 올 테니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루시안이 말에 올라탔을 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오늘도 가냐? 누가 보면 성에 꿀 발라 놓은 줄 알겠어.”
쿤이었다.
치료를 하다 왔는지 쿤의 백의 위에는 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루시안은 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등 뒤로 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그거 알아? 너 되게 즐거워 보여.”
“…….”
“페르니아가 너를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게 엄청 좋은가 보지?”
루시안을 태웠던 말이 가던 걸음을 멈췄다. 루시안은 천천히 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쿤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수도에서 너 엄청 속상해했잖아. 페르니아가 안 놀아 준다고. 그랬던 그녀가 가게도 정리하고 널 따라와 줬지.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니 너밖엔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고. 신나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답과 달리 루시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진실이 아닌 말을 억지로 내뱉는 것처럼.
쿤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카르디엔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바뀌었을까 했는데 아니었어. 예전이랑 똑같아. 몸만 곰처럼 컸지, 속은 지긋지긋할 만큼 어린아이지.’
쿤은 루시안에게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왜냐면 페르니아가 여기까지 온 건 네가 아니라 황제 놈 때문이거든.”
“……!”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황제가 그녀에게 추잡한 협박을 했어. 카르디엔이 출정을 하지 않으면, 너도, 그녀도 박살 낼 거라고. 그러니 그녀가 여기까지 오지 않고 배기겠어?”
쿤이 짓궂은 눈빛으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해? 몰랐던 거 아니잖아.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건가?”
“…….”
쿤은 혀를 찼다.
“하여간……. 철 좀 들어라, 카르디엔.”
루시안은 더는 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싸늘한 얼굴로 쿤을 지나쳤다.
[그녀에게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니 너밖엔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고. 신나지?]머릿속에 자꾸 쿤의 말이 떠올랐다.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사랑한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상대를 배려하고 아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루시안은 마음 깊이 바랐다.
페르니아가 그녀를 아끼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원하는 일을 하고, 방긋이 웃으며 행복하기를.
‘그런데 어째서…….’
루시안은 굳은 얼굴로 저 멀리 보이는 페르니아를 바라보았다.
홀로 루시안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페르니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까르르 웃고 있었고, 페르니아는 상기된 얼굴로 조잘대고 있었다.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외로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씩씩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온몸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시안은 황급히 제 감정을 억눌렀다.
루시안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생각했다.
‘그녀가 즐겁다면 나도 좋아.’
그래야 해.
그래야만 해.
루시안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니아.”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페르니아의 주변에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모두 루시안을 향했다.
페르니아가 환한 얼굴로 루시안을 맞이했다.
“루시안!”
“오늘은 평소와 달리 바빠 보이네요?”
루시안의 말에 페르니아가 키득거렸다.
“네, 알리샤 남작 부인께 화장을 해 주고 있었거든요.”
“화장요?”
그제야 평소에 화장기가 거의 없던 알리샤 남작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이 화장을 한 것을 알아챘다.
화려한 눈 화장을 한 알리샤 남작 부인이 루시안을 향해 얼굴을 붉혔다.
“나이 들어 이런 화장을 하니 남사스럽네요.”
“아니에요, 엄마. 얼마나 고운데요.”
“맞아요. 꼭 수도의 도도한 공작 귀부인 같다니까요.”
두 딸의 말에 알리샤 남작 부인이 웃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고. 그래도 네 아버지가 오기 전에 화장을 어서 지워야겠어. 보수적인 양반이니 뭐라고 하실지 모르잖아.”
그러더니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카르디엔 님께서 페르니아 아가씨께 푹 빠져 계신 이유를 알 것 같아요.”
“…….”
루시안은 남작 부인을 향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알리샤 남작 성에 마련된 페르니아의 방.
루시안은 성에 오면 이곳에서 페르니아와 함께 있다가 다시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는 했다.
어떤 때는 페르니아가 잠드는 것만 지켜보고 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떠나기도 했다.
“갑옷을 벗는 걸 보니 오늘은 여유가 좀 있나 봐요.”
페르니아의 말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위급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니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가려고요.”
그러나 페르니아의 반응이 미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루시안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야호, 하고 소리를 질렀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페르니아가 난처한 얼굴로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실은 오늘 알리샤 자매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루시안이 식사까지 하고 가는 날은 드무니까요.”
“아…….”
“그쪽과 먼저 선약을 한 거니 취소를 하기는 힘들고, 알리샤 자매에게 루시안도 식사에 참석해도 되냐고 물어볼게요. 괜찮죠?”
루시안은 잠시 페르니아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싫어요.”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페르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루시안은 아, 하고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아, 아니요. 말이 잘못 나갔어요. 물론 괜찮죠.”
루시안의 말에 페르니아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알리샤 자매가 엄청 좋아하겠네요. 루시안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하루 만에 부쩍 사람들과 친해진 것 같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방 안에서 혼자 있었잖아요.”
나를 기다리며.
루시안이 숨긴 말을 눈치채지 못한 페르니아는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사람들이 저를 너무 어려워 해서 다가가기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 덕분에 금세 친해졌답니다!”
페르니아가 손에 들고 흔든 건 뽀송뽀송한 분홍색 화장 솔이었다.
페르니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폐쇄적인 지방이라 보수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오히려 수도에서 유행하는 화장법이라니까 무척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페르니아의 메이크업 숍 2호점도 가능할 기세라고요.”
“설마 또 가게를 차리려는 겁니까?”
“못할 거 없죠. 먼 곳으로 와 사업을 이어서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엄청난 기회잖아요.”
“…….”
기대감에 찬 페르니아는 예뻤다. 정말 예뻤다.
그런데 루시안은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그녀에게 맞다고, 대단하다고, 응원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난 그런 거 싫어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나만 기다려 주세요.’
튀어나오려는 못된 생각에 루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루시안은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성의 주인 알리샤 남작은 근엄한 얼굴로 성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성에 들어서자마자 히이익, 하고 품위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여보.”
“오셨어요, 아버지.”
늘 얌전한 얼굴로 저를 맞이했던 아내와 두 딸이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켜 올라간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붉은 입술, 무엇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게 없었다.
알리샤 남작은 가부장적인 남자였다. 성에 들어오면 그는 늘 밥부터 찾곤 했다.
그러나 세 여자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녁은?’
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세 여자가 ‘널 어떻게 요리해 줄까.’라고 섬뜩한 말을 내뱉을 것 같았다.
결국 알리샤 남작은 별말 하지 않고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알리샤 남작 부인과 두 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아버지가 왜 저런다니?”
“우리 모습이 너무 예쁜가 봐요.”
“그런가 봐.”
나는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사실 난 알리샤 남작이 왜 그런 얼굴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었다.
알리샤 남작 부인과 두 딸의 화장은 내가 보아도 과했으니까. 화장이 아니라 분장 수준이었다.
‘눈 주위를 새까만 아이섀도로 거침없이 칠했더니 꼭 분노한 판다곰 같아.’
오늘 그녀들과 새로 개발한 화장법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어깨를 움찔할 만한 강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쎈 언니 메이크업의 끝판왕이 완성되겠는걸. 아주 좋아.’
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수도와 다르게 분쟁 지역이 전투가 난무하고 괴수가 날뛰는 탓일까.
알리샤 남작 부인과 두 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담한 메이크업을 지향했다.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더 과감하고 독창적인 메이크업을 개발할 수 있었다.
메이크업을 연구하고, 개발한 방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화장시켜 주면 하루가 훌쩍 지나곤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가지고 있던 화장품을 다 사용해 버린 것이다!
붓 같은 도구는 괜찮지만, 아이셰도나 루즈 같은 소모품은 아니었다.
“이곳에 화장품을 파는 곳이 있나요?”
내 물음에 알리샤 남작 부인이 새까만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워낙에 시골인지라 그런 곳은 없어요.”
“잘못했어요.”
“네?”
“아, 아니. 저도 모르게 헛소리가 튀어 나갔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조금만 헛소리가 더 나갔으면 판다 두목님이라는 말이 나갈 뻔했다.
‘다음에는 아이섀도 색을 더 연하게 해야지.’
벌렁거리는 심장을 안정시킨 나는 다시 화장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앤에게 화장품을 사서 보내 달라고 할까.’
그러나 수도와 이곳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전쟁 중인 이곳까지 화장품을 배달해 주겠다는 업체를 구할 수 있을까.
그때 알리샤 남작 부인이 말했다.
“화장품을 직접 만들면 어떨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요?”
“시골이라도 화장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거든요. 필요한 사람들은 숲에서 꽃이나 약초를 채취하여 필요한 화장품을 만들곤 한답니다.”
오, 그런 방법이!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
‘방법은 대충 알고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게다가 내가 직접 만들면 기존에 없던 색과 질감도 만들 수 있고.’
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사람들이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가는 숲은 어디예요?”
“성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나온답니다. 그런데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해요.”
알리샤 남작 부인의 말에 첫째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형이 복잡해 길을 잃을 수 있어요. 위험한 식물들도 무척 많고요.”
둘째 딸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함께 가 드리면 되잖아.”
그 말에 알리샤 남작 부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숲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딜 나서니? 어디 보자.”
알리샤 남작 부인은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구부터 죽일까.’
라는 섬뜩한 얼굴이었지만 실상은 나를 안내할 마땅한 사람이 없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알리샤 남작 부인이 아, 하고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내일 숲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그분과 함께 다녀오시면 되겠네요.”
남작 부인의 말에 두 딸도 맞장구를 쳤다.
“그분이라면 더할 나위 없죠. 숲길도 익숙하고, 약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화장품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신 분이니 니아 님과도 대화가 잘 통할 거예요.”
세상에. 이런 시골에 그런 인재가 있단 말이야?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분’의 존재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괜찮은 실력을 가진 사람이면 이 말을 해야지.
‘너, 내 동료가 돼라!’
* * *
“그 표정은 뭔데?”
“…….”
소개팅남이 키 180에 존잘인 줄 알고 나왔다가, 미소녀 베개를 든 덕후와 마주쳤을 때의 기분이 이러할까.
아니. 그보다 더 처참할 것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쿤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건데요?”
“병사들에게 쓸 약초를 채취하러 왔지. 덤으로 귀족 아가씨 안내도 하고.”
쿤이 오랜 시간 분쟁 지역에서 전쟁을 치른 인물이었다는 걸 간과했다.
게다가 그가 약초 전문가이자 화장품 애호가라는 것도.
‘누가 봐도 쿤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내가 안일했어.’
쿤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어서 따라오지 않고 뭐해? 이 숲은 위험하니 해가 지기 전에 다녀와야 한다고.”
……그래. 능력치만 보자면 쿤만 한 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오늘 하루 실컷 이용해 버리자.’
나는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고 얌전히 쿤을 따라나섰다.
숲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평범하네요?”
분쟁 지역은 위험한 식물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빨이 날카로운 식충 식물이나 독이 뚝뚝 떨어지는 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숲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연두빛 잔디와 아기자기한 꽃. 푸르른 나무와 우거진 수풀까지.
‘무섭기는커녕 색이 선명한 식물들이 많아 꼭 그림처럼 예쁘잖아.’
쿤이 나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보이는 것에 속지 마. 얌전해 보여도 사람 하나쯤 대수롭지 않게 골로 보내는 식물 놈들 천지니까.”
쿤은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던졌다. 해바라기를 닮은 노란색 꽃에 돌멩이가 닿는 순간이었다.
노란색 꽃이 입을 벌리듯 갈라지더니 돌멩이를 삼켜 버렸다.
와그작.
상큼한 먹방 사운드를 남기고.
“…….”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너무 놀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한 박자 지난 후에야 나는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바, 방금 저거 뭐예요? 뭐냐고요.”
“봤으면서 뭘 물어. 간식 먹는 장면이지.”
“누, 누가 저렇게 무섭게 간식을 먹어요!”
“저 정도면 깜찍한 편인데? 넝쿨로 생물체의 목을 졸라 먹는 놈들도 있고, 가시로 찔러 마취시켜 버리는 놈들도 있어. 그러니까 예쁘다고 함부로 만지지 마.”
급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보시오, 알리샤 남작 부인.
이런 곳이라면 처음부터 날 말렸어야지.
보통 여주는 사람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가 버리지만, 나는 아니라고.
누군가 내게 ‘귀한 목숨 지키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라고 말했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흑흑. 누굴 탓하겠어. 여주가 아닌 내 죄지.’
어쨌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하게 아는 꽃들만 꺾어 가야지. 그럼 적어도 방금 전 돌멩이처럼 먹방 재료가 되진 않을 테니.’
나는 잔뜩 겁이 난 얼굴로 조심스럽게 수풀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꺄아아, 예뻐!”
“꺄아아, 섹시해!”
“꺄아아, 넌 필요 없어!”
먹방 식물들이 난무하는 곳에 왔다고 훌쩍였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잔뜩 신나 있었다.
숲에 장미꽃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색이 진하고 향이 좋아 화장품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였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장미꽃은 색상도 다양했다.
포도가 생각나는 보라색. 눈이 아플 만큼 쨍한 노란색. 솜사탕 같이 사랑스러운 연분홍색.
알록달록한 화장품을 만들 걸 생각하니 너무너무 즐거웠다.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헉헉대며 꽃을 따는 나를 바라보고 쿤은 웃었다.
“꽃 따위가 그렇게 좋아?”
“어머머. 꽃 따위라뇨. 꽃은 위대한 식물이에요. 밖에서 험난하게 자랐는데 이렇게 예쁘기가 쉬운 줄 알아요?”
“보통 여자들은 그런 것보다는 보석을 더 좋아하던데.”
그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역시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라며 작업을 걸려는 느낌이 낭낭한 대사였다.
그만둬! 너 따위 남자에게 그런 남주가 할 법한 대사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쿤이 흉측한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보석은 더 좋아해요! 꽃 따위가 어딜 보석에 비벼요. 보석 최고!”
로맨틱함은 1도 없는 현실에 찌든 대사에 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배를 잡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또 저러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웃길 때마다 돈을 받아야겠어. 그럼 곧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흐린 눈으로 쿤을 지나쳐 다시 열심히 꽃을 따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쿤은 미친놈처럼 웃다가, 잠시 후 내 곁에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그가 능숙한 손길로 약초를 채취하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카르디엔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잘생겼잖아요.”
“……첫 대답부터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렇지만 그것 하나 보고 좋아하기에는 놈이 가진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헐. 무슨 리스크?
우리 루시안은 완벽한 남자 친구인데.
수려한 외모에 다정한 성격, 대륙 최고의 기사라는 명예까지. 어떤 남자가 그렇게 잘났어?
그런 내 맘도 모르고 쿤은 말을 이었다.
“악마의 저주를 받았잖아.”
“그냥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뿐이거든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
“아니야?”
표 내지 않으려 했지만 심장이 철렁거렸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쿤은 루시안의 정체에 대해 큰 의심을 품고 있었다.
루시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루시안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으니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것만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어차피 내가 있는 한 악마의 힘 따위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쿤은 얌전히 내 말을 듣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밉살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나는 그의 말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아 눈썹을 찡그렸다.
쿤이 말을 이었다.
“카르디엔이 더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아니게 되면 좋아하지 않겠다는 거야?”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쿤을 바라보았다.
쿤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게 되면 나랑 사귀어 볼래?”
결국 저 개소리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길게 말을 늘어놓았나 싶어 짜증이 치솟았다.
“아, 좀!”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쿤, 저거 뭐예요?”
“뭐가?”
내 말에 쿤도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초록 들판이었던 곳이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끼 같았다.
붉은색 이끼가 풀밭 위를 덮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끼가 생기는 게 가능해?’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나는 입을 막았다.
이끼가 꿈틀, 하고 움직이나 싶더니 면적이 더 늘어났다. 마치 우리를 향하는 것처럼.
쿤이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꼭 누구처럼 꼴 보기 싫은 놈이 나타났네.”
그러더니 내 손에 들려 있던 바구니를 가져갔다. 바구니 속에는 내가 열심히 모은 꽃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바구니를 뒤적이던 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 때문이구나.”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보라색 장미꽃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왜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시뻘건 놈은 장미 사냥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끼야. 이 보라색 장미꽃이 저놈이 가장 환장하는 먹잇감이거든.”
황당한 이야기였다.
이끼가 이끼면 그만인 것을 웬 사냥꾼?
게다가 보라색 장미꽃을 좋아한다고?
‘이끼 주제에 왜 이렇게 로맨틱한데. 지가 무슨 순정 만화 남주야?’
내 평생 보라색 장미만 좋아하는 사람은 봤어도, 보라색 장미만 찾는 이끼는 처음 본지라 기가 찼다.
쿤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분쟁 지역이지. 이런 미친 지역이 아니었다면 황제 놈이 그렇게 절절하게 카르디엔의 도움을 바랐겠어? 대충 실력 좋은 기사들을 보내 전쟁을 끝냈겠지.”
새삼 이 지역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나는 밀려드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잘 알았으니까 어서 그 장미꽃을 멀리 던져 버려요. 이 장미꽃 때문에 이끼가 쫓아온다면서요? 그럼 줘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렇게 이야기가 쉽게 흘러간다면 좋겠는데……. 놈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에 반응하거든.”
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장미꽃을 버려도 너를 쫓아올걸. 네게 장미 향이 배어 있을 테니까.”
“쫓아온다고요?”
“그래. 점점 자신을 확장시키는 거야. 그런 식으로 먹잇감을 쫓아서 야금, 하고 먹어 버리지.”
“이, 이끼가 사람을 어떻게 먹어요!”
설마 이 땅의 이끼는 사람도 먹는 거야? 그런 거야?
공포에 질린 나를 향해 쿤이 말했다.
“다행히 사람을 먹진 않아. 점잖게 장미꽃만 먹는다고. 그래도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놈은 치명적인 독이 있거든. 피부에 닿으면 사람에 따라 죽음에 이르기도 해.”
나는 마치 연쇄 살인마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도망가야지.”
그러더니 쿤은 보라색 장미꽃을 짓이겨 제 얼굴과 팔에 바르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놈은 후각이 예민하다고 했잖아. 같은 사냥감이라면 좀 더 진한 향기를 품는 사냥감에게 달려들겠지.”
“……!”
쿤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쿤이 떨리는 내 눈을 보더니 흡족한 듯 웃었다.
“왜, 감동 받았어?”
“아니거든요. 이 인간이 미쳤나 싶어 본 거거든요?”
“하여간, 한마디도 순순히 받아 주는 법이 없지.”
웃음을 터뜨린 쿤이 말했다.
“나는 저놈의 독에 내성이 있어. 웬만큼 독이 닿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쿤은 나머지 장미꽃과 바구니를 던지며 소리쳤다.
“그러니 잡생각 하지 말고 달리기나 해!”
* * *
나와 쿤은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이끼가 우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증식했다. 길게 이어진 이끼의 모습은 마치 핏자국처럼 섬뜩했다.
‘무서워!’
나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뒤를 바라보았다.
나를 쫓아오던 이끼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옆에서 쿤의 목소리가 들렸다.
“증식에도 한계가 있으니 멈춘 거야. 그래도 이 정도까지 끈질기게 사냥감을 쫓아오다니 대단한데? 꼭 그놈 같아.”
“그놈이라뇨?”
“카르디엔. 붉은 눈에 불을 켜고 보라색에 환장하는 것까지 꼭 닮았잖아.”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흘겼다.
“이 상황에서까지 루시안에게 시비를…….”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쿤의 몸 군데군데 붉은 이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쿤이 장미꽃을 짓이겨 바른 부분이었다.
“괘, 괜찮아요?”
“안 괜찮아.”
“아깐 내성이 있어서 괜찮다면서요!”
“일반 사람들보다는 괜찮다는 거지. 독은 독이야. 지금 피부에 독 덩어리가 들러붙었는데 괜찮겠어?”
그의 말대로였다.
붉은 이끼가 닿은 피부가 썩어가듯 어두워져 있었다.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증상이었다.
“가만있어 봐요. 내가 없애 줄게요.”
쿤은 내 손길을 피했다.
“건들지 마! 기껏 대신 당해 줬는데 내 노력을 헛되게 만들 셈이야?”
쿤은 제 손으로 이끼를 털어 내더니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마. 네게 이끼가 묻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
“하지만…….”
“감동 받았으면 걱정은 넣어 두고 데이트나 한번 해 줘. 그게 내가 노린 거니까.”
밉살스러운 말만 보면 그가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코 이 상황은 장난이 아니었다.
쿤의 얼굴은 아까보다 부쩍 창백해져 있었다.
쿤은 이후에도 시시껄렁한 말을 내뱉었다.
마치 제정신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혹은 괜찮다고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성에 도착했을 때 결국 그는 쓰러져 버렸다.
* * *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쿤은 내게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면 알리샤 남작 부인에게 마데카소울이라는 약을 달라고 해. 독을 해독할 때 직방이거든.]자신이 정신을 잃을 때를 대비해서 내게 미리 말해 둔 것 같았다.
알리샤 남작 부인은 재빨리 약을 구했고 급히 불러온 의사에게 치료를 맡겼다.
“독에 예민한 몸이 아닌 데다 적절한 해독제를 먹인 덕에 독성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하루 이틀은 열이 나긴 할 테지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 말에 나는 겨우 안심이 됐다.
의사의 말대로 쿤의 몸은 열이 심하게 올랐다.
알리샤 남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도 큰일을 겪으셔서 놀라셨을 텐데 쉬세요. 쿤 님의 곁에는 제가 있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를 도와주다가 이렇게 됐는걸요.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
이건 도움을 준 이에 대한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쿤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시원하게 적신 수건을 이마에 가져다 대자 쿤이 눈을 떴다.
“와, 지금 간호해 주는 거야?”
“날 구해 준 사람을 내팽개칠 만큼 야박하진 않거든요?”
“그러게. 답지 않은 짓을 한 보람이 있네.”
쿤은 키득키득 웃었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은 덕에, 화장기가 사라진 그의 맨얼굴은 천진했다.
‘이럴 때 보면 제멋대로에 능글능글한 사람이라는 게 상상이 안 간다니까.’
나는 금세 뜨거워진 수건을 다시 물에 적시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도 다치지 않고 멀쩡할 수 있었어요.”
“…….”
“데이트는 전혀 해 줄 생각은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꼭 보답하도록 할게요.”
어디서 웃음 버튼이 눌린 건지 쿤이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루시안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다 부르지 못했다.
루시안이 내 손을 잡아끌어 방을 나섰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강압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아파요, 루시안.”
“…….”
“아프다니까요!”
그러나 루시안은 힘을 푸는 대신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말했다.
“왜 쿤과 함께 있었던 겁니까!”
그제야 그가 화난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루시안.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별일 아니에요. 성 뒤쪽에 있는 숲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해서 쿤을 만났고, 위험한 식물이 나타날 때 쿤이 날 구해 줬어요. 그뿐이라고요.”
그러나 루시안은 전혀 화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죠.”
“…….”
“쿤은 당신과 단둘이 있었잖아요. 나는 그 점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적의에 가득 찬 붉은 눈동자는 마치 당장이라도 쿤을 죽일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루시안은 표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은근히 질투가 심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죽여 버려야겠어.”
스쳐 지나간 중얼거림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지금 루시안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내 손을, 루시안이 다시 잡아끌었다.
“일단 이 성을 떠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곳에 오면 이제 당신이 나만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기까지 했어요.”
“…….”
“그런 건 이제 싫어요.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있어요. 일 분, 일 초도 떨어지지 말고.”
그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황제의 협박 같은 부탁에 떠밀려 분쟁 지역에 함께 가게 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이 나에 대한 감정을 조금만 참고 혼자 다녀오면 안 돼요?’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을 애써 마음속 깊은 곳까지 숨겼다.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늘 함께 있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으니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정도를 넘었다.
나는 루시안을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생각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였어요?”
“……예?”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수도에서 일군 것들을 모두 버린 채 당신만 보기를 원해서 이런 선택을 한 거냐고요.”
“…….”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이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와 떨어지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기에 여기까지 따라왔던 거예요! 그 마음 때문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열심히 이룬 것들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이런 이기적이고 유치한 소유욕 때문인 줄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루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애절한 얼굴로 내 두 손을 잡았다.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니아. 저는 그저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그의 절박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
“우리는 그냥 연애를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당신도 당신의 일을, 나는 내 일을, 서로 할 일을 하면서 사랑을 하는 게 정상적인 거라고요.”
루시안이 숨을 멈췄다. 괴로운 얼굴로 굳어 버린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온전치 않았다.
상처받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의 사랑을 비난하는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랑은 원치 않았다.
“우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루시안은 마치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 싫어요.”
“이대로 함께 있어 봤자, 더 끔찍한 말을 주고받게 될 뿐이에요.”
“니아!”
나는 싸늘한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내 뜻을 존중한다면 따라오지 말아요.”
그 말은 마법의 언어처럼 그를 속박했다.
루시안은 내 말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루시안을 지나쳤다.
그에 대한 배신감에 미칠 만큼 화가 났다.
* * *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마음으로 루시안과 가까이 있는 것은 힘들었다.
일그러진 감정을 조용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루시안에게 수도로 갈 마차를 구해 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후로 그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 일째 반란군과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고요?”
내 말에 알리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전까지는 카르디엔 님께서 반란군과 전투를 신중히 결정하셨습니다. 그냥 싸우면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크다고요. 지형적인 요소나, 날씨 같은 것을 이용해 승률이 높을 때만 적군을 공격했죠.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반란군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계십니다.”
알리샤 남작은 루시안을 향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카르디엔 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그깟 반란군 놈들은 죽은 목숨이지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카르디엔 님이 승전보를 들고 돌아오실 겁니다.”
“…….”
그러나 나는 얌전히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알리샤 남작 부인을 찾아갔다.
그녀는 마차를 빌려 달라는 내 말에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날 텐데 왜 그리 서둘러 가시려고 하세요. 혹시 저희의 시중이 부족했나요? 저희가 더 정성껏 모실 테니 모쪼록 마음 푸세요.”
“남작 부인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고 계세요. 제가 돌아가려는 건 이곳의 생활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에요. 그러니 마차를 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루시안이 제게 마차를 주지 말라고 했나요?”
“…….”
남작 부인은 아니라고 부정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매만졌다.
그 모습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내게 호감이 있다 한들, 그녀는 나보다 루시안의 말을 더 중요시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더는 부탁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내가 계속 부탁해 보았자 부인만 곤란해질 거야. 만족할 만한 결과도 기대하기 힘들 테고.’
그러니 그녀에게 매달릴 바에는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빨랐다.
‘하지만 어떻게?’
남작 부인의 반응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루시안은 내가 혼자 수도로 향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루시안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을 찾아야 해. 그러면서도 수도까지 갈 마차 하나를 구할 만큼 수완이 있는 사람.’
그러나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어려운 부탁을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 한 명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