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8
14.
나는 성을 둘러싼 담벼락의 자그마한 개구멍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드디어 탈출했다.’
이전과는 달리 알리샤 남작 부인이 혼자 외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리는 통에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성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알리샤 부인의 두 딸 덕분이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데 어머님이 왜 저러실까요.] [맞아. 정말 과보호예요.]두 딸은 내게 자신들이 은밀하게 이용했던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다.
덕분에 나는 성을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드레스에 묻은 흙을 탈탈 털며 걸었다. 이내 커다란 나무에 이르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쿤이었다.
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그렇네요. 몸은 괜찮아요?”
“그럭저럭 괜찮아.”
쿤은 열이 내리기도 전에 성을 나갔다.
몸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는데 왜 나갔냐는 내 물음에 알리샤 남작 부인은 감동 받은 얼굴로 말했다.
[쿤 님을 기다리고 있는 상처 입은 병사들을 걱정해서겠죠. 쿤 님은 역시 최고의 의사셔요.]“라고 하던데요.”
내 말에 쿤이 똥 씹은 얼굴을 했다.
“뭔 소리야. 카르디엔한테 죽을까 봐 도망간 건데.”
쿤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도 그날 그놈 표정 봤잖아. 그대로 있으면 침대로 쳐들어와서 배에 칼을 꽂을 것 같아 잽싸게 도망쳐 나왔지.”
“……참 잘했어요.”
나는 그의 위기 대처 능력에 좋은 평가를 내렸다.
설~마 루시안이 쿤을 정말 죽이려고 했겠냐만은, 어쨌건 그날 루시안의 기색이 심상치 않기는 했으니까.
쿤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성에 갇혀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면 다행이고. 그날 이후 카르디엔 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거든. 눈빛이 어찌나 흉흉한지 놈만 보면 꼬리를 흔들던 부하들도 말을 못 걸 정도라니까.”
“……그거야 그 후에 계속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겠죠. 전쟁 중에는 성격이 예민해지는 법이니까요.”
나는 나와 루시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늘어놓지 않고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이것 받으세요.”
나는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최상급 보석이에요. 어디에 팔아도 저택 몇 채 값은 나올 거예요.”
“와, 이걸 주려고 나를 만나자고 한 거야? 보석으로 날 꼬시려고 한 거라면 성공이야.”
“개소리 그만하시고요. 이 보석으로 수도까지 갈 마차를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남은 금액은 수고료로 받으시고요.”
내 말에 쿤이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지금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어머머. 그럴 리가요. 심부름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거죠. 아주 간곡한 부탁.”
나는 ‘부탁’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간절한 눈으로 쿤을 바라보았다.
쿤이 아니면 이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쿤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내 손에 들린 주머니를 가져갔다.
“그래. 부탁을 들어주지. 보아하니 카르디엔이랑 무슨 일 있나 본데, 그럴 때는 한시라도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니까. 제정신이 아닌 놈이잖아.”
아무리 내가 아쉬운 입장이라도 저 말에는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안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죠!”
“이 지경이 돼서도 카르디엔 편을 드는 거야?”
“이 지경이 뭔데요.”
“전쟁터까지 널 끌고 오더니 이제는 집에도 마음대로 보내 주지 않고 있잖아.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루시안은 나를 막을 권리가 없다. 마치 감옥을 탈출하듯, 그 몰래 이런 자리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는 이 문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부탁인데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신경 꺼요. 당신이 뭐라고 이야기해도 우린 잘 사귈 테니까.”
“개뿔.”
“그럼 부탁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다행히 쿤은 더는 나를 붙잡고 시시콜콜한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데려다줄게.”
“됐어요.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 어떤 말을 들으려고요.”
“그럼 나야 좋지.”
“루시안의 귀에도 들어갈 텐데?”
“잘 가.”
의사라 그런가 제 목숨 하나는 똑 부러지게 챙기는 남자였다.
나는 그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성으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우린 단순히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의 이기적인 모습에 내가 좀 화가 난 것뿐이라고. 서로 시간을 가지면 해결이 될 문제야.’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흔들렸다.
‘뭐, 뭐야……?’
공간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쓰러진 몸 위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계집이 카르디엔의 여자가 맞아?”
“확실해. 보라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전해 들은 정보와 외모 정보가 일치한다.”
“하, 정말 웃기는군. 그 괴물 놈이 계집에게 빠지다니.”
“덕분에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지. 카르디엔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기회.”
“여자 하나를 잡기 위해 며칠 내내 잠복해 있던 보람이 있군.”
내가 들은 말은 거기까지였다.
이내 시야가 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시끌벅적한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낯선 모습의 병사였다.
짙은 피부에 가는 눈. 제국군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복장을 보고 한눈에 알았다.
‘반란군이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손목과 발목이 묶여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끔찍한 상황에 이를 악무는데 한 병사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대장님. 여자가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나타났다.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과 검을 보니 그가 반란군의 대장인 듯했다.
그는 기괴한 문신을 한 험악한 얼굴을 실룩이며 말했다.
“누, 눈을 뜨니 더 미인이군. 과연 카르디엔의 여자야.”
징그럽기 짝이 없는 대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떠는 나를 남자는 심드렁하게 바라보더니, 병사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이내 다가온 병사의 손에는 번뜩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병사를 보며 나는 기함을 했다.
‘서, 설마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거야? 나는 인질이라고. 그것도 꽤 쓸 만한!’
샥-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이 움직였다. 검날에 닿은 것은 (다행히도) 내 목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병사는 잘린 머리카락을 대장이라는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구불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손에 올리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라고 하니 머리카락만 보고도 눈치채겠지. 이, 이걸 카르디엔에게 보내도록 해라. 여,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병사를 퇴진시키라고.”
“네.”
병사가 사라지고, 막사 안에는 남자와 나 둘만 남았다.
남자는 상 위에 놓인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섬뜩한 모습이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배, 배가 고픈가? 줄까?”
지금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갈 리가 있겠어?
질색한 얼굴을 하자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야, 얌전히 있으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답지 않게 무슨 소린가 싶어 남자를 바라보니, 그는 이빨로 고기를 뜯어내며 말을 이었다.
“넌 젊은 데다 예쁘니 카르디엔을 박살 낸 후에도 이래저래 쓸모가 많을 거야. 귀, 귀족 여자가 필요하다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끔찍한 말이긴 했으나 그럭저럭 여자를 납치한 악당 놈이 내뱉을 법한 대사였다.
그러나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괴상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그나저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카르디엔은 어디가 예민해?”
“……뭐?”
남자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러니까 신체 부위 중에 예민한 부분이 있잖아. 여, 옆구리라든가, 귀, 귀 끝이라든가. 노, 놈의 여자라면 잘 알 거 아니야.”
“…….”
소름이 쫙 끼쳤다.
도대체 그런 걸 왜 묻는데?
“저, 적군이 퇴진을 한 후에는 혼자 이곳으로 오라고 해 놈을 포획할 계획이거든. 그, 그놈이야말로 원하는 자들이 천지니까. 비, 비싼 값에 팔기 전에 놈이 스스로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려고.”
“…….”
끔찍한 말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자는 흥겨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소, 손톱을 뽑으면 아파할까? 아, 아니면 귀? 아, 아니면 여, 여기 갈비뼈 위를 베어 볼까? 사, 사실 그 빨간 눈동자를 파내는 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 그러다가 회복되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져 버리니까.”
“…….”
목숨이 우선이니 무조건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결심했다.
루시안이 날 구하러 올 때까지 최대한 납치범에게 거슬리지 않게 얌전히 있자고.
그런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루시안을 향해 저따위 미친 말을 지껄이는데?
“야잇, xx xxxxx xxxxxxx야!”
거침없이 튀어 나간 욕설에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넌 절대 루시안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해. 손을 대기는커녕 개박살 날걸. 왠지 알아? 넌 얼굴부터 루시안에게 졌거든. 너같이 썩은 호박처럼 생긴 놈은 등장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어. 그러니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하지도 마, 이 변태 호랑말코 같은 놈아!”
폭포처럼 쏟아진 엄청난 독설에 남자는 먹던 고깃덩이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남자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귀, 귀족 아가씨라고 해서 우아할 줄 알았는데 입이 더, 더럽군.”
“더 더러운 말도 해 줄까? 심심하면 애꿎은 사람 괴롭힐 생각하지 말고 피콜로 더듬이나 빨아, 이 변태 자식아.”
“…….”
남자는 부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뭐. 어쩔 건데.
나는 극도의 흥분 상태라 남자가 두렵지 않았다. 투견처럼 으르렁거리는 나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저, 저 입 좀 다물게 해. 아, 안 그러면 카르디엔을 부르기 전에 없애 버릴 것 같으니까.”
“네엣!”
한 병사가 재빨리 내게 다가왔다.
“……!”
입을 막은 하얀 손수건에서 묘한 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정신이 흐릿해졌다.
* * *
오랜만에 빙의하기 전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방바닥을 뒹굴며 《성녀 에스텔》을 읽고 있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푹 빠져 읽었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서브 남주인 루시안이 흑화하는 순간이었다.
루시안은 에스텔이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나서야, 뒤늦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눈물 어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루시안. 나는 칼릭스를 사랑해.”
“내가 그보다 더 에스텔 님을 사랑한다고 해도요?”
“……그래. 그렇다고 해도.”
여린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루시안은 절망 어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루시안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차피 내가 넘볼 분이 아니었잖아. 에스텔 님의 행복을 기도해 주는 거야.’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 달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녀를 사랑하니까.’
‘바보 같은 소리. 사랑이란 건 쟁취하는 거야. 보다 탐욕스럽게, 구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또 후회할 셈이야?’
그 순간 루시안의 안에 있던 무언가가 툭 끊겼다.
늘 차분했던 심장이 폭발하듯 쿵쾅거리더니, 뜨겁고 진득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힘은 순식간에 루시안을 잠식했다.
루시안도 몰랐던, 악마의 힘이 개화한 것이다.
심상치 않은 힘을 느낀 에스텔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안?”
루시안이 에스텔을 향해 말했다.
“그럼 황태자를 죽이면 되겠네요.”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은 듯한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 부분을 읽는 내내 어찌나 심장이 쿵쾅거리던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그의 모습에 나는 환호했다.
‘섹시 포텐 오져!’
……그 무렵의 나는 얼마나 철이 없었던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은 고요했다. 낯선 방이었지만, 따스함이 느껴졌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포근한 이불.
침대 옆 테이블에 장식된 꽃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
편안한 방의 모습에 안심하고 다시 잠을 자려던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나, 납치됐었잖아!’
끔찍한 말을 늘어놓던 변태 납치범을 떠올리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지금 이렇게 편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황급히 이불을 걷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던 건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릿속이 띵하고 흔들렸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고 눈을 찡그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누워 있어요. 제대로 몸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
나는 황급히 고개를 올렸다.
그곳에는 루시안이 있었다.
평소와 같이 온화한 얼굴로.
나는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나 분명 납치당했었는데? 설마 이거 꿈이에요? 아, 아니면 너무 나대서 죽어 버렸나?”
“끔찍한 말 말아요, 니아.”
루시안은 빙긋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나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꿈도 아니고, 죽은 것은 더더욱 아니에요. 나예요. 당신의 루시안.”
“……!”
루시안은 그런 나를 위로하듯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많이 무서웠죠? 늦어서 미안해요, 니아.”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 순간까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할까.
멋대로 성을 나갔다가 위험에 빠진 것도, 그를 곤란하게 한 것도 나인데.
나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훌쩍이며 말했다.
“루, 루시안이 미안하다고 말할 게 뭐 있어요. 다 내가 잘못한 거지. 루시안이 날 구해 준 거죠?”
“네.”
“어,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나는 그제야 루시안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몸 어디에서도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은 나를 안심시키듯 웃었다.
“네.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 변태 놈이 이상한 말을 해서 얼마나 불안했는데.”
다정하기만 했던 루시안의 목소리가 조금 바뀌었다.
“설마 그들에게 무슨 짓을 당했습니까?”
“다행히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아마도요.)”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얼핏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안은 나를 꼭 끌어안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새삼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고, 소중히 해 주는 남자에게 나는 무슨 말을 했었던 걸까.
“미안해요, 루시안. 내가 모진 말을 해서 많이 속상했죠?”
“괜찮아요.”
“당신이 미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어요. 우리 관계를 앞으로 더 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예요.”
변명 같이 주절거리는 말에 루시안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알아요.”
예쁘게 대답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릿했다.
이제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식으로 그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야.
새삼 그를 향한 사랑을 다짐하며 그의 품속에서 훌쩍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마음이 차분해지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제 방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리샤 남작 성에 마련된 루시안의 방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에 담긴 생각을 눈치챘는지 루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 영지에 있는 진짜 내 방이에요. 니아는 처음 와 봤죠?”
“…….”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루시안의 영지라고? 그의 영지는 저 북쪽 끝에 있는데?’
분쟁 지역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어 거리가 아주 멀다.
설마 내가 며칠이나 정신을 잃어버렸었나?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랜 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진 않은데?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루시안에게 물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 있어요?”
“그야 편안히 쉬기 위해서죠. 니아는 큰일을 겪었잖아요.”
“분쟁 지역의 전쟁은요?”
“전쟁은 끝났습니다.”
루시안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 죽여 버렸거든요, 내가.”
“……!”
끔찍한 말을 꺼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작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루비처럼 빛나던 붉은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섬뜩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설마, 아닐 거야.’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하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루시안?”
“네.”
“……루시안?”
“네.”
연이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재미있는지 루시안이 쿡쿡 웃었다. 그 미소는 내가 알고 있는 루시안처럼 천진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내 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니아. 이제 내 곁에 있어요.”
“…….”
“누구도 보지 말고, 누구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내 곁에.”
섬뜩한 말을 달콤하게 내뱉는 그는 더는 내가 아는 루시안이 아니었다.
나는 끔찍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루시안은, 흑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