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19
15. 외전 그날 밤의 이야기
[사랑해요.]페르니아가 수줍게 그 말을 속삭인 순간 루시안은 따스한 무언가가 제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늘 비어 있다고 느꼈던 자신이 처음으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꽃의 달콤함에 푹 빠진 벌꿀처럼 루시안은 페르니아에게 빠져들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그녀와 닿을 때마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스텔의 말이 맞았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고귀하며, 아름답다.
온 생을 바쳐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계속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리는 그냥 연애를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당신도 당신의 일을, 나는 내 일을, 서로 할 일을 하면서 사랑을 하는 게 정상적인 거라고요.]페르니아의 말을 듣는 순간 루시안은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누군가가 제 목을 단칼에 베었다고 해도 이만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니아. 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하잖아요. 그러니 늘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러니 싫어요.
난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러나 루시안은 페르니아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쫓아가는 순간, 벌어질 일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녀에게 들을 말이 두려웠다. 제가 그녀에게 내뱉을 말이 무서웠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그래서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피해 전쟁터로 돌아왔다.
그 뒤로 매일 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누군가는 루시안이 끈질긴 반란군에게 분노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루시안이 지지부진했던 전쟁을 끝내고자 마음먹은 것이라 했다.
그 무엇도 답은 아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뭐라도 베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을 견디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마음이, 늪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이성이, 다시 평온했던 이전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무리 적을 베어도, 말을 몰아도, 날을 새어도, 루시안은 진정하지 못했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속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루시안 님. 반란군이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루시안의 부관 폴이 창백한 얼굴로 내민 상자 속에 든 것은 보라색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함께 온 서신에는 페르니아 님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으면 당장 군대를 퇴진시키라는 내용이 있었…….”
루시안은 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폴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폴이 루시안을 말릴 새도 없었다. 왜냐면 그건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으니까.
루시안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루시안이 도착한 곳은 수천 명의 적군이 모여 있는 진영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루시안의 모습에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저, 저거 카르디엔 아니야?”
제대로 갑옷도 걸치지 않은 채, 한 손에 검 하나를 쥐고 홀로 적군 앞에 나타나다니.
그 모습은 불과 어제까지 전쟁터를 호령하던 위대한 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리 잘 봐야 미친놈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병사 중 누구도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루시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위압감 때문이었다. 어찌나 그 얼굴이 섬뜩한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루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를 돌려줘.”
그 말과 동시에 루시안은 병사들이 있는 무리로 달려들었다.
그의 몸놀림은 빛처럼 빠르고, 그의 검은 번개처럼 매서웠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수백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초월적인 힘이었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압도적인 힘에 병사들은 루시안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 살려 줘!”
누군가는 두 손을 비비며 빌고, 누군가는 네발로 기어 도망쳤다. 그러나 결과는 다 똑같았다.
루시안이 그들에게 베푼 건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그, 그만둬, 이 괴물!”
날카로운 소리에 루시안은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루시안을 보고 움찔한 이는 분명 적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축 처진 페르니아를 안고, 한쪽 손으로는 날카로운 검을 그녀의 목 끝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지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 여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검을 내려놔…….”
그러나 사내의 말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목소리를 내어야 할 얼굴이 데구루루 바닥을 뒹굴었기 때문에.
머리를 잃은 사내의 몸이 한순간 무너졌다.
루시안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쓰러지는 페르니아를 품에 안았다.
루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페르니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가 작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녀가 있기에는 너무 위험해.”
그리고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이곳을 떠나려면 어떡해야 하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루시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그날 밤, 루시안은 진짜 괴물이 되었다.
* * *
폴이 병사들을 이끌고 적군의 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해가 떠오른 후였다.
폴은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 분명한 적군은 몰살되어 있었다.
목이 베이거나, 혹은 몸이 두 동강이 난 끔찍한 모습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겼을 때, 폴은 루시안을 발견했다.
루시안은 그의 연인인 페르니아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폴은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렇게 끔찍한 몰살을 감행한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루시안의 얼굴이 평온했기에.
‘그, 그래. 적군을 저렇게 만든 건 루시안 님이 아닐 거야. 루시안 님이 페르니아 영애를 구하러 왔을 때에 맞춰 괴수 같은 것이 나타난 것이겠지.’
그러나 이어진 루시안의 말은 폴이 가진 일말의 희망을 부서뜨렸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니 나는 이제 돌아가겠어.”
밤새 수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은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래서 더더욱 섬뜩했다.
폴은 변해 버린 루시안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루시안은 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루시안은 페르니아와 함께 사라졌다.
루시안이 바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그의 영지였다.
저 먼 북쪽.
귀찮은 이들은 아무도 없는 나만의 땅.
제 영지에서 환하게 웃는 페르니아를 떠올리자 루시안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품에 안은 페르니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자요, 니아. 깨어나면 내 집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와도 당신을 공유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장소에.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