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0
16.
도대체 며칠이 지난 걸까.
분쟁 지역에서 떠나온 지 얼마나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계속 루시안의 방에 있었으니까.
나는 커다란 창문 앞에 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새하얀 설원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북쪽 땅에는 작은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우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장식된 꽃에서는 봄의 향기가 났고, 장작을 태우고 있는 벽난로 덕분에 밖의 한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벽 한편에는 수백 권의 책이 꽂힌 거대한 책장이 놓여 있었고, 커다란 침대는 폭신한 이불이 덮여 있었다.
천사가 머무는 방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을 만큼 포근하고 따스한 방이었다.
루시안은 이곳에서 살뜰히 나를 보살폈다.
[니아. 하루 종일 안에만 있어 심심하죠? 당신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 왔어요. 내가 읽어 줄 테니 편안히 누워 듣도록 해요.] [오늘은 따뜻한 귤 차를 준비했어요. 달콤하죠? 내일은 어떤 차를 준비할까요?] [잠이 오지 않아요? 등을 토닥여 줄게요. 그럼 잠이 잘 오겠죠?] [니아, 사랑해요.]그는 마치 톡 하면 부서질 유리처럼 나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매일 밤 나를 향해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루시안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후,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성에 고용인이 몇 명 있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니아, 일어났군요.”
부드럽게 웃으며 루시안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트레이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은 특히 니아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우유를 듬뿍 넣은 치즈 퐁듀,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 그리고 산딸기 샐러드예요. 맛있겠죠?”
그는 끼니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식사를 내왔다. 개중에는 재료부터 쉽게 구할 수 없는 요리도 있었다.
루시안은 해사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로 음식을 세팅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먹어요, 니아.”
“…….”
그 눈빛에 나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그런 내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으, 체할 것 같아.’
부담스러우니 쳐다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왜냐면 지금의 루시안은 흑화한 상태였으니까.
아무리 내게 잘해 주고, 부드럽게 웃어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불이 붙어 버린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내가 한마디 말이라도 잘못하면 그는 화르르 터져 버릴 게 분명했다.
힘겹게 음식을 삼키는 나를 향해 루시안이 두 눈을 휘었다.
“잘 먹네요. 몸이 다 회복된 것 같아요. 내일은 데이트를 할까요?”
“데이트요?”
“네. 하고 싶은 게 있나요?”
루시안은 세상 무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깜빡하면 그의 얼굴에 넘어가 속마음을 말할 뻔했다.
‘날 이곳에서 내보내 줘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실제로 며칠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자 루시안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었다.
[……왜 그렇게 내 곁을 떠나고 싶어 할까. 당신에게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는 걸까요?]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흑화한 루시안은 제국의 반을 날려 버렸다. 그 이유는 오로지, 에스텔 때문이었다.
에스텔이 제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거슬려서.
그 내용을 떠올린 순간 나는 그에게 다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괜한 말로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 버릴까 봐.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이곳을 떠날 방법을 써야 해.’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안.”
“네.”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루시안을 향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우리 결혼식을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결혼식 말입니까?”
“네.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할 때가 되었잖아요.”
나는 치맛자락을 꾹 잡았다.
분명 통할 거야. 다른 것도 아닌 그와 나의 결혼식이니까.
예상대로 루시안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생각 못 했을까.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식을 올리도록 해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식을 올리려는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말했다.
“나,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무슨 일 말입니까?”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드레스? 반지? 부케?”
천진한 대답을 늘어놓는 그에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야죠.”
그 말에 루시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섬뜩해졌다.
“우리 결혼식인데 왜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하죠?”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때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기세에 꺾이면 안 된다.
나는 잘게 떠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제, 제대로 허락을 받아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서 그렇죠. 인생에서 한 번뿐인 결혼식이잖아요. 죄지은 것처럼 사람들 몰래 후다닥 치르는 결혼식은 싫어요.”
나는 루시안의 두 손을 맞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제발 먹혀라, 먹혀.
반짝이는 눈빛은 모두 연기였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시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그럼 함께 수도로 가는 거죠?”
그것이 내가 노리는 바였다.
그러나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있나요.”
“그럼…….”
“황제와 후작님을 이곳으로 부르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 어느 누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황제를 제집으로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여, 여긴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고작 이런 일로 황제 폐하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어요. 아니, 오라고 해도 오지 않으실 거예요.”
“아니, 올 거예요. 당신이 그걸 바라니까.”
“…….”
루시안은 아기를 다루듯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염려 말고 편하게 쉬어요, 니아.”
빌어먹을.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나는 욕설을 삼키며 억지로 웃었다.
나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곳을 바로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괜찮아. 어쨌건 누구라도 오는 거니까. 그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
황제가 이곳까지 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올 것이다.
아버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의 루시안이라면 아버지에게도 얄짤이 없을 테니. 괜한 도움을 요청했다가 아버지가 루시안에게 몹쓸 짓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누군가 에스텔에게 내 상황을 전달해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작에서 흑화한 루시안을 제압했던 사람은 오직 성녀인 에스텔뿐이었지. 그러니 에스텔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든 나를 도와줄 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온 루시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가슴 위에 손을 얹은 나를 보고는 루시안이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아, 해 봐요. 놀라서 혀라도 덴 거면 어떡해요.”
“…….”
마주친 루시안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흑화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이런 다정한 모습을 볼 때면 기대가 일었다.
그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닐까. 악마의 힘 따위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모두 내 착각이었다.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루시안이 말했다.
“폐하와 후작님이 도착했어요.”
“벌써요?”
루시안이 서신을 보낸 지 며칠 되지 않았던지라 나는 놀랐다.
이토록 빨리 도착한 것을 보면 서신을 받은 즉시 움직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가 봐야죠.”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나를 루시안이 제지했다.
“내가 두 사람을 만날 테니 니아는 방 안에 있도록 해요. 괜한 고생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절대 나를 이 방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져 숨이 콱 막혀 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어였다.
루시안은 내가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상대가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루시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루시안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 아버지와 황제 폐하께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요.”
“…….”
“내가 원래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루시안은 우리 사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모두 다 거짓이었다.
행복은 개뿔.
루시안이 언제 변모할지 몰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표 낼 수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으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제발 날 데려가!’
루시안은 골똘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함께 가요.”
* * *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황제가 보였다.
이 성에 온 후 루시안 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버지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추위도 많이 타면서.’
아버지는 약골 중에서도 약골이었다. 고생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전형적인 귀족 아저씨.
추운 날은 절대 질색이라며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빨갛게 언 코와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페, 페르니아! 무사했구나! 카, 카르디엔 경이 널 데려간 뒤로 소식이 없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이곳저곳 수소문을 내고도 네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단다. 카르디엔 경에게 서신을 보내어도 답도 없고.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며칠이나 밤을 지새웠는데 여기 있었구나. 여기 있었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루시안은 단번에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후작님.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 반가운 것은 이해하지만 진정하시지요.”
“뭐, 뭐얏?”
눈을 부릅뜬 아버지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그녀를 만질 수 있는 건 저뿐입니다.”
희대의 개소리에 아버지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려던 차, 황제가 나섰다.
“그래. 일단 자리에 앉게, 라일락 후작.”
“하, 하지만 저놈이……!”
“앉게.”
황제의 위압감 실린 목소리에 아버지는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참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시선은 나를 향한 채였다.
일그러진 얼굴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다.
‘그럴 만하지. 갑자기 이곳으로 끌려와 제대로 연락도 못 했잖아.’
아버지를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데 대뜸 루시안이 나를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루, 루시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닳아 버릴 것 같아서요.”
“……!”
끔찍한 소리를 내뱉은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스럽지 않은지 자신의 망토로 나를 감싸 버렸다.
마치 사냥꾼들에게 새끼를 숨기는 어미처럼.
망토에 휘감긴 덕분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루시안의 얼굴만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가장 망측한 꼴을 보게 된 아버지와 황제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
‘죽고 싶다, 진짜.’
수치심에 쪽팔려 죽을 것 같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안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잠시의 정적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보고를 받아 알고 있긴 했지만 정말 많이 변했구나. 예전에는 페르니아의 이름만 나와도 귀를 붉히더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
“후작님은 그녀와 핏줄이 이어진 분이니 참을 수 있지만, 폐하는 아니거든요. 다른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무척 불쾌합니다.”
말투는 정중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섬뜩한 살기가 스며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알았다, 조심하마.”
그 대답으로 난 황제가 루시안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루시안의 동태를 기민하게 살피며 그를 대하고 있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위험한지, 어떤 부분까지 대화가 통하는지.
황제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할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네. 그녀가 결혼식 전에 제대로 두 분의 허락을 받고 싶다고 해서요. 귀여운 욕심이지요.”
황제는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먼 곳까지 오게 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건 없지. 너희 두 사람의 결혼은 짐이 바라던 것이었으니.”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약혼을 허락했던 건 멀쩡한 카르디엔 경이에요. 저런 미친놈이 아니라고요. 흉악한 납치범 따위와 내 딸을 절대 결혼시킬 수 없…….”
겁을 상실한 아버지의 말을 막은 건 이번에도 황제였다.
“그래서, 우리 둘의 허락을 받은 후에는 결혼식을 치를 셈이냐.”
“예. 이곳에서 조용히 둘만의 결혼식을 올릴 겁니다.”
루시안은 눈을 깔며 행복한 듯 웃었다.
황제가 그런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폐하!”
아버지의 경악스러운 목소리에도 황제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결혼식 때 받고 싶은 선물은 없느냐. 축하의 의미로 보내 주마.”
“없습니다.”
“네가 아니라 약혼녀에게 물어보는 거야. 신부는 필요한 게 있을지 모르잖니.”
“……!”
어떻게 해서든지 황제와 아버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알아챘다.
이것은 황제가 내게 주는 단 한 번의 기회라는 것을.
나는 루시안의 품속에서 꿈틀거리며 말했다.
“나, 나 받고 싶은 게 있어요, 루시안.”
“뭐죠?”
루시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에스텔 님의 축복이요!”
“…….”
“성녀의 축복을 받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고 하잖아요. 누구보다 신성한 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신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인 셈이죠.”
영민한 황제라면 분명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흑화한 루시안을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에스텔뿐이라는 것을.
황제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루시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왜, 왜요?”
“글쎄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마치 그의 본능이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감지한 것 같았다.
루시안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위로하듯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 결혼식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아요.”
“하, 하지만…….”
“에스텔 님의 축복보다 더 귀한 선물을 당신에게 줄게요. 그러니 그 바람은 포기해 주세요, 니아.”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얼굴에 화르르 열이 올랐다.
루시안은 그런 나를 보며 쿡쿡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나를 품속에 가둔 채로.
“두 분께 허락도 받았으니 용건은 이제 끝났습니다. 모쪼록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싸늘한 축객령이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 미친놈아. 내 딸을 돌려줘!”
그 순간 나는 분명 보았다.
루시안의 새빨간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는 것을.
‘안 돼!’
나는 루시안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그를 꼭 끌어안고 소리쳤다.
“아빠, 나 이 사람이 정말 좋아요! 행복하다고요!”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페르니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제발.
내 간절한 외침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내 어설픈 연기를 진심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버지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떨구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루시안은 나를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쾅.
닫힌 문소리가 귓가에 크게 남았다.
닫힌 문을 황망히 바라보는데 머리 위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루시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니아. 당신 말대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
“당신이 나를 끌어안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기분이 꽤 좋았거든요.”
루시안은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 미소는 나를 두근거리게 하지 못했다.
나와 아버지의 짧은 만남을 보고 그가 느낀 감정이란 게 고작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오싹하기만 했다.
이럴 때마다 여실히 느꼈다.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떨림을 눈치챈 루시안이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추워요? 어서 방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나는 그에게 안긴 채 멀어지는 응접실 문을 쳐다봤다.
그곳만이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인 것처럼.
* * *
아버지와 황제는 바로 성을 떠났다.
루시안이 그들에게 하룻밤 묵을 시간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창가에 서서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떠나기 직전까지, 나를 찾는 듯 성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고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나를 데려가라고.
하지만 등 뒤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굴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니아?”
나른한 목소리에는 섬뜩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온통 눈으로 가득 찬 게 신기해서 보고 있었던 것뿐이죠.”
“아아.”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곁에 다가왔다.
다행히 아버지와 황제는 이제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설원뿐이었다.
루시안이 나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이곳은 매일 눈이 내리는 척박한 땅이죠. 누구도 원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그래서 내가 이곳을 받을 수 있었지만요.”
“…….”
“버림받은 땅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땅이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고, 새하얗고, 아름답거든요. 니아는 어때요?”
당장 도망가고 싶어요.
“네?”
나를 조르듯 대답을 재촉하는 루시안에게 나는 말했다.
“나도 그래요.”
어색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루시안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는 우리 둘 다 좀 바쁠 거예요.”
“왜요?”
루시안이 내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둘만의 결혼식이니 허술하게 준비하리라는 나의 예상은 틀렸다.
가장 먼저 디자이너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신부님의 드레스를 맞추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족한 솜씨나마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레스고 뭐고 나의 관심사는 그녀 자체였다.
얼마 전 다녀간 아버지와 황제를 제외하면 처음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게 됐어요? 루시안이 괜찮다고 했어요? 날 쳐다보면 두 눈을 뽑아 버린다고 협박하진 않던가요?”
내 어마어마한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신부님. 필요한 말 외에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셨습니다.”
“…….”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드레스에 관련된 이야기 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내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소소한 사담도 나누지 않았다.
“치수를 다 재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참고하여 하루라도 빨리 드레스를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이너가 돌아간 후에는 보석 상인이 들어왔다.
“최고급 보석들을 종류별로 가지고 왔습니다. 원하시는 보석과 디자인을 말씀해 주시면 신부님께 맞추어 제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플로리스트와 구두 장인까지 다녀갔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가지고 온 물건이 어마어마했으나, 모두가 처음 본 디자이너와 반응이 똑같았다.
그들이 나와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 진득한 좌절감만 남긴 만남이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간 후, 허탈한 얼굴로 쉬고 있는데, 루시안이 방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나요? 최고의 물건만 추려 니아에게 보여 달라고 했는데…….”
‘아니요.’라고 말하면 오늘 다녀간 이들의 목을 날려 버릴 기세라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다행이네요.”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닿는 순간 느껴진 냉기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요?”
“니아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바깥에서 작업을 좀 했거든요.”
“작업이요?”
“따라와 봐요, 니아.”
루시안은 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향한 곳은 성의 정원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투명한 얼음으로 만든 아름다운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꽃, 여우, 새, 물결, 그 한가운데는 자애로운 여신까지.
햇빛에 반짝이는 얼음 조각은 어떤 보석으로 만든 조각상보다 아름다웠다.
마치 마법을 부린 것 같은 광경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반짝반짝 예쁜가요?”
“……언제 이런 걸 만들었어요?”
아무리 루시안이 흑화했다고 해도, 마법사가 된 건 아니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조각품은 며칠 새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시안이 비밀을 고백하듯 말했다.
“실은 오래전부터 준비했어요. 당신이 이곳에 오면 보여 주고 싶어서요.”
“…….”
등 뒤로 다가온 루시안이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언제였을까요. 어느 날 꿈을 꿨어요.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는 꿈이었답니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새하얀 설원 위로 우리는 걸었어요.
그러다가 소복하게 쌓인 눈 위에서 장난을 치고, 벽난로 앞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며 달콤한 핫초코를 마셨죠.
그러다가 노곤해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어 잠이 들었어요. 눈을 뜨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죠.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는 입을 맞췄어요.
루시안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꿈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무리 당신이 내 약혼녀라 해도 당신과 결혼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거든요. ……당신은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였으니까.”
“…….”
루시안이 바람에 휘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꿈이 아니에요. 당신은 이제 이곳에 있으니까.”
루시안은 나를 향해 더할 바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니아. 우리, 앞으로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러나 난 그의 달콤한 고백에 속 편하게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우리는 오직 ‘우리’였다.
서로를 제외한 사람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우리.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서로만 바라보는 우리.
그가 바라는 미래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난 그런 거 싫어요.”
눈을 크게 뜬 루시안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어떻게 서로만 보고 살 수 있어요? 나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어요. 당신이 가장 소중하지만 내 모든 것이 당신뿐인 건 아니라고요!”
아차 싶어 입을 막았다.
‘내, 내가 무슨 말을…….’
나는 바들바들 떨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루시안은 분노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작은 희망이 들었다.
‘원작과는 다르지 않을까?’
원작의 루시안은 끔찍한 살육자였지만, 내 앞의 루시안은 (적어도) 내 앞에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말이 잘 통하고, 내게는 누구보다 다정했다.
그러니 흑화한 상태라고 해도 내 말을 잘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시안이 한마디 말을 내뱉는 순간 작은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럼 가족과 친구가 사라지면 당신에게는 나뿐인 건가요?”
“…….”
“대답해 줘요, 니아.”
누구보다 달콤한 목소리로, 누구보다 끔찍한 말을 하는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완벽하게 절망했다.
그는 미쳤다.
그는 내가 사랑한 루시안이 아니다.
나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이.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어요. 난 루시안밖에 없다고요.”
당신이 예전의 루시안이었다면 내 말이 거짓인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루시안은 내 속마음 같은 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채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의 루시안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존재니까.
“내게도 니아뿐이에요.”
해사하게 웃는 루시안의 얼굴에는 방금 전 내 말에 대한 어떤 고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그토록 바라던 결혼 준비를 하건만 내 마음속에 있는 건 설렘도, 행복함도, 사랑도 아니었다.
그저 두려움뿐이었다.
‘부탁이야. 누가 나 좀 구해 줘.’
* * *
“오늘 완성된 드레스가 오기로 했죠. 정말 기대돼요. 드레스를 입은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루시안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퍽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드레스 따위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왜 에스텔이 오지 않는 거지?’
황제가 이곳을 떠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에스텔에게 나에 대한 소식이 닿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설마 내 이야기를 듣고도 오지 않은 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스텔이 그럴 리 없다. 그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말리더라도 내게 올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예를 들어…….
나는 떠오른 한 가지 변수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제가 에스텔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에스텔을 아낀다. 그녀는 제국의 고귀한 성녀였고, 황제의 은인이며, 황태자의 연인이다.
그런 에스텔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고 싶을 리 없다.
무엇보다 황제는 내가 루시안에게 붙잡혀 있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아니. 극도의 위험 분자가 된 남자가 나만 곁에 있으면 누구도 해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유지하길 원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콱 막혀 왔다.
‘아니야. 아닐 거야.’
나는 끔찍한 예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니아, 디자이너가 도착했어요.”
루시안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방 안에는 디자이너가 서 있었다.
치수를 재고 갔던 이전과는 달리 디자이너의 옆에는 두 명의 조수가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 * *
수천 개의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웨딩드레스을 보며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훌륭한 것 같긴 한데 내가 드레스에 대해서 잘 몰라서요. 니아는 어떤가요?”
지금 나는 웨딩드레스가 어떤지 살필 경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런히 모은 그녀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으니까.
애처로운 떨림에서 혹여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 입에서 혹평이 나오는 순간 제 목이 날아갈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음에 들어요. 정말 예쁘네요.”
그제야 디자이너가 고개를 들고 환히 웃었다.
“그럼 한번 입어 보시지요. 보수가 필요한 부분은 수선을 해야 하니까요.”
디자이너는 쭈뼛쭈뼛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루시안이 아, 하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가 나가 봐야 합니까?”
“네. 속옷까지 갈아입어야 하니까요.”
루시안은 곤란한 얼굴로 한참 있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되겠죠?”
“무, 물론입니다.”
루시안은 디자이너에게 ‘혹시나 내 신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 놓겠다.’라는 흉악한 협박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서늘한 붉은 눈동자를 한 채 한번 쳐다본 것으로 그 말을 대신했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디자이너는 몸을 휘청거렸다.
루시안은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요.”
“……알겠어요.”
루시안이 방을 나갔다.
화려한 웨딩드레스는 혼자서는 입지 못한다.
보정 속옷부터 시작해서, 코르셋, 페티코트까지, 걸쳐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힘을 빼고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입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 곁에 다가온 조수는 분명…….
“에, 에스…….”
“쉿.”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린 여인은 분명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내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장한 것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성공했네요.”
그럴 수밖에.
머리 수건을 깊숙하게 눌러쓰고 고개를 숙여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것은 둘째였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금빛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목 위로는 짧은 밤색 머리카락이 찰랑일 뿐이었다.
경악한 내 시선을 알아챈 에스텔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루시안도, 니아 님도 절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머리 스타일을 바꾼 보람이 있네요.”
그러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많이 기다렸죠, 니아 님.”
“……!”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안 돼. 여기서 울어 버리면 루시안이 그 소리를 듣고 당장 방 안에 들어와 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에스텔이 이곳까지 잠입한 보람이 없었다.
나는 울음소리를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스텔은 그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루시안의 경계가 워낙에 철저해서 들어오는 것이 쉽지가 않았거든요.”
에스텔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왔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짙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덕분이었을까.
에스텔은 못 본 사이 훨씬 늠름해져 있었다.
* * *
“신부님의 준비가 끝났으니 들어오셔도 됩니다.”
디자이너의 말에 루시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뻔하디뻔한 신부의 모습이건만, 루시안은 나를 본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니아.”
“그런가요?”
“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루시안이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이너가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 기사님.”
루시안은 디자이너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뿐이었건만 디자이너는 몸을 움찔하며 벌벌 벌었다.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신부님이 직접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디자인이 다소 부족한 듯 느껴졌습니다. 치마에 꽃 장식을 더 달아 화려함을 더하는 편이 신부님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만들어 와도 될까요?”
“…….”
루시안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디자이너는 한결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내일이면 완성이 됩니다. 워, 원치 않으시면 진행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이편이 신부의 화려함을 더 잘 살릴 수 있는지라…….”
루시안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이너는 루시안에게 머리를 조아린 후 황급히 방을 떠났다.
그녀가 데리고 온 두 명의 조수도 저마다 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나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나누었던 에스텔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에스텔이 말했다.
“오늘 성을 나갈 때 루시안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결계를 만들어 놓을 거예요. 지금 결계를 만들어 놓을 장소를 정해야 해요. 제가 오갈 수 있으면서, 니아 님이 의심받지 않고 루시안을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곳이 있나요? 니아 님과 제가 동선이 어긋나지 않도록 구조물이 확실히 눈에 들어오는 곳이면 더 좋고요.”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성의 정원에 얼음으로 만든 여신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곳은 어떨까요?”
정원은 들어오는 길에 있기에 에스텔이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었고, 여신 조각상은 다른 곳과 헷갈리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내 짧은 설명을 영민하게 알아챈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내일 정오에 다시 성으로 올게요. 니아 님도 그 시간에 맞추어 여신상 앞으로 루시안을 데리고 와 주세요.”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루시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에스텔의 시선은 금세 사라졌다.
에스텔이 방 안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루시안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작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짧게 잘랐다는 이유로.
……아니. 루시안이 고작 저 정도 변장으로 에스텔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지.
그가 에스텔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니아.”
나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내게만 향했으니까.
예전이라면 너무 좋아 미쳤을 그의 시선이 다른 의미로 미칠 것 같았다.
* * *
결국 난 그날 밤 난 잠에 들지 못했다.
내내 내일 에스텔이 오기로 한 시간을 떠올렸다.
덕분에 아침이 되었을 때는 봐주기 힘들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아침 식사를 들고 방에 들어온 루시안은 내 끔찍한 얼굴을 보고 정색을 하는 대신 걱정부터 했다.
“괜찮아요, 니아? 얼굴빛이 좋지 않아요.”
“잠을 좀 설쳤어요.”
그 말에 루시안이 얼굴을 굳혔다.
“어제 먹은 음식이 맞지 않았나요? 아니면 베개를 교체해 볼까요? 수면에 좋은 향초가 있다고 하던데…….”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소중히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이대로 그와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은 동화 속이 아니라 현실이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엔딩 따위 불가능하다고.
지금의 그와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속이 답답해서 산책을 좀 하고 싶어요. 같이 나갈까요?”
예상대로 루시안은 절대 내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이 뭐라고 한껏 기뻐했다.
루시안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간단한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루시안은 내게 보슬보슬한 털로 만든 망토를 둘러 주었다.
“아무리 한낮이어도 이곳은 추우니까요.”
“……고마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여며 준 망토를 잡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여신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웠다.
새하얀 눈 위로 잘 가꾸어진 초목. 그 위에 놓인 반짝이는 장신구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겨울 나라처럼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 광경에 감탄이 나오기보다는 착잡했다.
아름다운 장소에 인기척을 내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나와 루시안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언젠가 루시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성에 우리 둘만 있는 거냐고.
내 말에 루시안은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군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성을 관리하고, 요리를 할 최소한의 일꾼을 고용했답니다.] [나는 한 번도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요?] [그렇겠죠. 당신과 절대 마주치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율이니까요.]그 순간 숨이 턱 막혔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래도 완전 돈 건 아니라 다행이야. 조금이나마 사람의 출입을 허용해 준 덕분에 에스텔이 성에 오갈 수 있게 된 거니까.’
지금쯤이면 에스텔이 성 안에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에스텔과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여신 조각상을 바라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으로 보면 예전과 다른 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곳에 에스텔이 만든 결계가 쳐져 있다는 말이지.’
새삼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과연 결계 하나로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나는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시간이 많지 않아 에스텔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원작을 읽었던 나는 알고 있다.
성녀가 만든 결계는 악마의 힘을 강하게 억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악마의 힘이 강할수록, 강하게 억압한다.
악마의 힘이 최고로 개화된 지금의 루시안이야 말할 것도 없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니아?”
천진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내 속마음을 읽어 내리는 것 같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인가?’
에스텔은 예정된 시각이 되면 루시안의 힘을 억압할 결계가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루시안을 이곳에 붙잡아 둬야 했다.
“그…….”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루시안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예전이요?”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 생활도 나쁘지 않았잖아요. 루시안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황제 폐하께 인정도 받았잖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건 나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나는 어떻게든 루시안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가 스스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루시안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전혀요.”
“…….”
“니아.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버림받았어요.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조롱하고, 때렸죠. 그런 날 구해 준 사람은 에스텔 님이었고요.”
에스텔은 상처투성이인 어린 루시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루시안, 넌 절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야.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어. 네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널 좋아하게 될 거야.]루시안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서 전 노력했어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앞장서서 위험한 일을 자청했습니다. 에스텔 님의 말이 맞더군요. 사람들은 예전처럼 저를 괴물이라고 욕하지 않았어요.”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르디엔.
황제의 신임을 얻고, 귀족의 호의를 얻고, 병사들의 존경을 얻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루시안이 붉은 눈을 가졌다며 멸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루시안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를 당한다 해도 절대 적의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에스텔이 그런 미움과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어요.”
루시안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슬리는 자들은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요.”
“……!”
섬뜩한 말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루시안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차가운 손이 닿는 순간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이 좋아요, 니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할 수 있으니까.”
눈을 내리깔며 말하는 루시안의 모습에 등 뒤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남자는 비현실적일 만큼 돌았다.
그것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구나, 루시안.”
맑은 목소리에 나와 루시안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에스텔이었다.
루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의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 후 루시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스텔 님?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뇨. 제겐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이곳은 나와 니아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루시안이 말하는 뜻은 명백했다.
아무리 에스텔이라 해도, 그에게는 불청객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에스텔은 그 말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대신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건 니아 님도 동의를 한 거니?”
“…….”
“대답해 봐, 루시안.”
루시안은 그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타나면 그런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오길 원치 않았는데…….”
에스텔이 한 발짝 다가오는 순간, 루시안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제 둥지에 침입한 적을 보는 것처럼 경계 어린 얼굴이었다.
루시안은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오면, 잘난 척하는 그 입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테니까요.”
“못된 말을 하게 됐구나.”
“분명, 경고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루시안의 말에 나는 심장이 철렁였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리 흑화했다고 해도 설마 에스텔에게 무슨 짓을 할까 싶었다.
그런데 지금의 루시안을 보니, 상대가 에스텔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말리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에스텔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혼나야겠어, 루시안.”
그 순간, 땅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 위로 새하얀 빛이 올라왔다.
나도 루시안의 곁에 있었기에 빛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따스한 온기를 띤 빛일 뿐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아닌 모양이었다.
“으윽!”
빛 속에 갇힌 루시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비명을 내지르더니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루시안은 마치 심장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바닥에 엎드려 바들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입을 막았다.
원작을 봤기 때문에 결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얼핏 알고 있었으나, 눈앞에서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충격적이었다.
울부짖는 그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 같았다.
끔찍한 광경에 차마 어쩌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에스텔이 다가왔다.
“걱정 말아요, 니아 님. 어디까지나 루시안의 힘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결코 루시안의 몸에 해를 입히진 않아요. 조금 괴롭기는 하겠지만…….”
“하, 하지만…….”
에스텔은 내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소녀 같은 앳된 얼굴에 남은 감정은 엄격함뿐이었다.
에스텔은 웅크려 떨고 있는 루시안의 곁에 다가갔다.
그녀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신의 힘으로 만든 결계란다. 악마의 힘이 개화된 너는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괴로울 테지.”
“이까짓 것쯤……!”
루시안은 눈을 부릅뜨며 제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빛은 그의 몸을 강하게 억압해 그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다.
“으흑.”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루시안을 향해 에스텔이 다독이듯 말했다.
“발버둥을 칠수록 고통스러울 테니 얌전히 있으렴. 악마의 힘을 없앨 방법을 찾으면 다시 돌아와 풀어줄 테니.”
에스텔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요, 니아 님.”
“……!”
그 말에 루시안이 눈을 부릅떴다.
“안 돼.”
“…….”
“안 돼요, 니아. 안 돼. 가지 말아요.”
그의 필사적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를 떠나려고 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뻔했다.
당장 그의 손을 붙잡고, 그를 구해 주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여 버릴게요. 성녀도, 후작도, 이 세상 사람들을 다. 그럼 떠날 이유가 없잖아요. 네?”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보는 순간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의 루시안은 나와 함께 갈 수 없는 존재임을.
나는 에스텔의 손을 잡았다.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 채로.
등 뒤로 사랑했던 남자의 울부짖음을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