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1
17.
토옥, 토옥,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보며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앤이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고 한 걸 무시한 것이 새삼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아침만 해도 해가 쨍쨍했단 말이야. 변덕스러운 날씨 같으니.’
나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도서관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비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 볼까.’
언제 멈출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우산을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귀족 아가씨가 하기에는 파격적인 방법을 떠올리며 고민을 하는 순간이었다.
“니아.”
진한 보라색 우산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루시안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법이야? 신기루야?
아닌데.
분명 내 남자 친구 맞는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떻게 이 타이밍에 루시안이 나타나요? 남주만이 가진다는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기’ 스킬이라도 익힌 거예요?”
루시안은 내 허무맹랑한 말에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도서관에 간다고 했잖아요. 오후부터 갑자기 비가 왔고요. 혹시 니아가 우산을 챙겨가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어 왔답니다.”
그러더니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오기를 잘했네요.”
“…….”
비 오는 풍경마저 아름답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는 멍하니 루시안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바쁜 일이 있다고 했으면서…….”
루시안은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알고 있을까.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고, 늘 차분했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항상 깔끔했던 바지 끝자락과 구두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이곳을 향해 얼마나 서둘러 달려왔는지 알려 주는 것처럼.
나는 심장이 뭉클거리는 것을 느끼며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루시안이 기쁜 얼굴로 내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나는 힐끗 눈동자를 돌렸다.
내 시선은 루시안의 반대쪽 어깨에 닿았다. 비에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는 나와 달리 그의 어깨는 처참하게 젖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는 어깨를 루시안에게 붙였다.
그러나 루시안은 여자의 어깨에 닿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저쪽으로 어깨를 피했다.
‘순진한 남자 같으니.’
답답한 나는 어깨를 붙이는 자잘한 수를 쓰는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그의 팔에, 내 팔을 두르는 순간 루시안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마치 잘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들어간 계란처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난 남자 친구랑 걸을 때는 팔짱을 끼는 게 좋더라. 비 오는 날은 특히 더.”
“……!”
“루시안은 어때요?”
루시안은 톡 하고 손가락으로 누르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 그렇습니다. 아, 아니 필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귀여운 반응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빗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이 보라색 우산. 루시안의 우산이에요?”
“네.”
“의외로 화려한 우산을 들고 다니네요. 평범한 신사용 우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튀는데.”
“……제가 예쁜 걸 좋아해서.”
“아하.”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키득거렸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을 속삭였다.
“그런데, 나를 위해 우산을 들고 와 줄 만큼 배려 깊은 내 남자 친구는 어째서 우산을 하나만 들고 왔을까요?”
너무 짓궂은 말이었던 걸까.
루시안은 결국 펑 하고 터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귀여워. 귀여워.
정말 귀여워.
“페르니아. 이 나이가 돼서 딸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게 썩 유쾌하진 않구나.”
“……!”
루시안과 달리 텁텁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 두 손에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루시안이 아니라 힘겨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질색하며 소리쳤다.
“왜 아버지가 여기에 있어요?”
“겨우 집에 돌아온 딸이 잘 자고 있나 살펴보러 왔지. 자면서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어 왔는데, 망측한 소리나 해대다니. ……역시 내 딸내미야.”
청승맞게 눈물을 또르르 흘릴 때도 있거든요? 아버지가 이상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그렇지.
억울함에 입을 삐죽인 나를 향해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씩씩해 보이니 됐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놨으니 어서 내려오렴. 오늘 아침 메뉴는 보들보들한 핫케이크야. 기억나니. 네가 3살때 처음 핫케이크를 먹었을 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음식이 있냐는 얼굴로…….”
“준비하고 내려갈게요.”
“…….”
나의 거침없는 방어에 아버지는 흡 하고 입을 막았다.
“내 딸이 정말 돌아오긴 했구나. 저 야박한 반응이라니…….”
그리고는 한껏 감동받은 얼굴로 방을 나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지 3일이나 되었는데 언제까지 저럴 건지.’
집에 돌아온 첫날, 아버지는 잃어버린 딸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나를 안고 엉엉 울었다.
3일이 지난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지만, 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종종 죽은 딸이 돌아온 것처럼 감격스러워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시안은 홀로 북쪽 땅에 갇혀 있으니까.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메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3일이면 충분히 쉬었어.”
이제 그를 위해 움직일 차례였다.
* * *
나는 에스텔에게 보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에스텔은 바로 나를 찾아왔다.
에스텔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몸 상태는 어떤가요, 니아 님.”
“편히 쉬었더니 제 컨디션으로 돌아왔어요.”
“다행이네요.”
미소 짓는 에스텔은 3일 전 보았을 때처럼, 짧은 단발머리였지만, 머리카락 색은 아니었다.
짙은 밤색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 색은 다시 금발로 돌아와 있었다.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칼릭스의 반대가 너무 거세서 머리를 감으면 색이 빠지는 약으로 염색을 했었거든요. 짧아진 길이는 어쩔 수 없지만요.”
황태자 전하가 아닌 칼릭스라.
보지 못한 동안 에스텔은 그와 돈독해진 모양이다.
그것에 묘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물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어디 있어요? 에스텔 뒤를 쫄쫄 쫓아올 줄 알았는데 계속 안 보이네요.”
“실은 좀 싸웠어요.”
“싸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에스텔이, 칼릭스와 싸웠다고?
아무리 옆에서 쌍욕을 해도 방긋이 웃으며 ‘기운이 넘치시니 보기가 좋네요’, 라고 말하는 에스텔이?
놀란 나를 바라보며 에스텔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니아 님을 구하기 위해 저 혼자 루시안의 성으로 간다고 했을 때, 칼릭스가 무척 화를 냈거든요.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저만 보낼 수 없다고요.”
“…….”
그럴 만했다.
흑화한 루시안에게 제 연인을 혼자 보낼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칼릭스와 함께 성에 잠입할 수는 없었어요. 그와 함께하면 여러모로 더 위험 요소가 커지니까요.”
그 말도 맞았다.
루시안은 모든 사람에 대해 예민했지만, 특히 남자에게는 더더욱 자비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 준비를 위해 찾아온 디자이너와 상인들도 모두 여자였다.
그런 상황에 칼릭스가 나타난다?
절대 안 되지.
설령 여장을 하고 들어왔다고 해도, 워낙 덩치가 덩치인지라 금세 걸렸을 테고.
무엇보다…….
‘신의 힘을 가진 에스텔과 달리 칼릭스는 일개 황태자 나부랭이일 뿐이잖아.’
그가 아무리 수십 명의 엑스트라를 일격에 해치울 만한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
악마의 힘을 개화한 루시안의 앞에서는 꼬꼬마보다 못한 허접한 힘이었다.
‘와 봤자 도움은커녕 민폐만 됐을을 거야. 에스텔을 따라오지 않은 게 백번 잘한 거지.’
그러나 세상은 결과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텔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까지 칼릭스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상태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거니 니아 님도 이해하세요.”
못난 놈 같으니.
그까짓 남주 존심이 뭐라고 저러고 있담.
마음 같아서는 칼릭스에 대한 호박씨를 좔좔 까고 싶었으나, 지금의 난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에스텔. 현재 루시안과 관련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요.”
아버지는 루시안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 미친놈 얘기는 하지도 마라, 당장 파혼해 버릴 테니까!’라며 길길이 날뛰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오늘 내가 에스텔을 부른 건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시안이 흑화했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루시안이 흑화하여 끔찍한 살육을 펼친 것을 보았던 유일한 목격자인 폴과 병사들이 루시안에 대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루시안의 부관인 폴은, 병사들 앞에서 엄하게 말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오늘 본 것에 대해 입을 놀리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그러나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제국의 위대한 기사, 카르디엔이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적군을 모두 몰살시킨 자극적인 이야기라면 더더욱.
알음알음 떠돌기 시작한 루시안의 소문은 점점 끔찍한 내용으로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카르디엔이 웃음 띤 얼굴로 하룻밤 새 수만 명의 인간을 죽여 버렸다.
사랑하는 약혼녀를 잡아가 산 채로 먹었다.
카르디엔은 이 땅을 멸망시키기 위해 현신한 악마다.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기사니만큼, 사람들의 반응은 거셌다.
누군가는 루시안을 옹호했다.
[아군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적군에 한해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카르디엔 경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일지언정, 악마에게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보다 제국에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 힘을 잘만 이용하면 제국은 이 세계를 완전히 제패하게 되는 겁니다.]나는 그 말에 분노했다.
“루시안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는 놀이판의 장기말이 아니라고요!”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세상에는 늘 타인을 이용 가치로 판단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놀랍게도 많은 귀족들이 이 말에 대해 동조를 하고 있어요.”
“…….”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에스텔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반대로 루시안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많답니다.”
그들은 오래전 예언된 악마의 힘이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공포는 곧 적의로 바뀌었다.
[악마를 죽이자! 우리의 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마를 없애야 한다!]“정의감에 불타는 이들과 절대 악마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독실한 기사와 사제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다고 해요.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진용을 갖추면 루시안을 없애기 위해 떠난다는군요.”
끔찍한 말에 나는 입을 막았다.
그런 사람들까지 모이고 있다면 상황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물론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봤자 루시안에게 어떤 타격도 주진 못할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루시안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할 테니까.
설령 상처를 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루시안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가 가진 악마의 힘에 의해 완벽하게 치유될 테니.
그러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후의 상황이었다.
‘루시안이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면?’
그건 반란군을 몰살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번에야말로 루시안은 온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악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건 안 돼!’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원작에서 그녀는 루시안의 반대편에 섰다.
오로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는 루시안을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루시안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건 에스텔이었다.
그것이 루시안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에스텔이 원작과 같은 마음이라면…….’
불안함에 마주 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
그런 내 두 손 위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에스텔의 손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듯, 에스텔은 내 두 손을 감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스텔이 온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텔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빨리 움직여야 해요.”
“…….”
“분명 루시안을 원래대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힝. 요즘 너무 자주 울어서 더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 진짜 이런 캐릭터 아닌데.
씩씩한 친구의 말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주책맞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대로 루시안을 결계 안에 평생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의 힘을 넘보는 이들에게 이용되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애꿎은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며 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그를 되돌릴 것이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나의 루시안으로.
* * *
어떻게 루시안의 흑화 모드를 풀수 있을까.
‘동화책을 보면 이런 경우 사랑하는 여자의 키스를 받으면 땡이지만…….’
나는 내가 루시안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루시안은 너무너무 행복해하며 이렇게 말하겠지.
‘당신의 키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혹시 모르니 이 세상 사람들의 혀를 잘라 버려야겠어요.’
……미친 상상 같지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내리 고민을 하던 나는 잊고 있던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루시안이 흑화하면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그의 고향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은 몇 초도 되지 않아 그에게 처참하게 짓밟혀 버렸다.
시체 더미를 바라보며 루시안은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이제 지긋지긋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그때는 단순히 루시안이 자신을 학대한 이들에게 복수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감이 묘하지 않은가.
나는 거기에서부터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에스텔에게 말했다.
“루시안의 고향으로 가 보면 어떨까요?”
“루시안의 고향이요?”
“네. 그곳은 루시안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잖아요. 어떤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 말에 에스텔이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 그래도 저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렇게 나와 에스텔은 루시안의 고향을 향해 떠나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나를 잡고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집을 떠나! 집 떠나면 개고생한다는 걸 몸소 겪었잖니, 페르니아. 딴 생각 말고 얌전히 집에 있거라. 아빠가 맛있는 음식 해 줄게. 용돈도 잔뜩 줄 거고.”
아빠의 절절한 마음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콧등을 꽉 잡고 말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길이 아니에요. 에스텔도 함께 갈 거고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죄송해요.”
울먹이는 아버지를 토닥이며 나는 생각했다.
‘아빠가 그렇게 좋아했던 사윗감을 다시 데리고 올 방법을 찾아올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여행을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밤새 울어 토끼 눈이 된 아버지를 한 번 더 다독여 주고, 나는 에스텔을 만나기 위해 성문 앞으로 향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텔의 옆에는 그녀의 껌딱지 칼릭스가 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칼릭스와 싸웠다고 했지. 설마 아직까지 화해를 안 했던 건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둘을 지켜보았다.
칼릭스가 매서운 눈으로 에스텔에게 말했다.
“카르디엔의 성에는 혼자 보냈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네가 뭐라고 해도 함께 갈 거라고. 또 날 막으면…….”
근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칼릭스가 소리쳤다.
“삐져 버릴 거야. 이번처럼 잠깐이 아니라 아주 길게. 최소 한 달. ……아니 삼 주.”
……칼릭스는 못 본 사이 초딩력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에스텔은 어이없는 협박에 ‘이 유치한 놈아!’라며 꿀밤을 먹이는 대신, 눈썹을 내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니아 님의 상황이 좋지 않잖아요. 제가 전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니아 님의 상처를 헤집게 될지도 몰라요.”
그제야 에스텔이 왜 그렇게 내게 칼릭스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던 건지 깨달았다.
단순히 싸웠기 때문이 아니었구나.
그녀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 왔다.
물론 칼릭스는 전혀 아니었겠지만.
칼릭스는 상처받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스텔 너는 정말……. 말해 봐. 나야, 페르니아야?”
칼릭스가 답 없는 청승을 떠는 순간 내가 나섰다.
“난 같이 가도 상관없어요.”
내 목소리에 에스텔과 칼릭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뜬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절친의 남친이라도 황태자는 황태자.
칼릭스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칼릭스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숙였던 허리를 다시 곧게 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칼릭스가 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카르디엔에게 끌려가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얼굴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군. 잘 키운 아기 돼지처럼 포동포동해졌어.”
그야 루시안에게 갇혀 있는 동안 하루 종일 온갖 산해진미를 먹었으니까.
덕분에 나는 며칠이나 감금당한 사람답지 않게 혈색이 좋았다.
그 점을 알아챈 칼릭스가 얄미워 나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전하는 못 본 사이 많이 변하셨네요. 삐짐 선언도 하실 줄 아시고.”
“……!”
이제 수치심이라는 것이 좀 생긴 모양인지 눈을 부릅뜬 칼릭스가 뒤끝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건방진 여자가 속마음을 숨기지 말라고 가르쳐 준 덕분이지.”
“애써 가르쳐 준 내용을 잊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리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옹다옹하는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 건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내게 물었다.
“니아 님, 정말 괜찮으세요?”
“그럼요. 전하가 함께 가면 오히려 좋죠.”
호위 기사 겸 물주로 이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
에스텔은 혹시 내가 자신을 위해 무리를 하는 건 아닌지 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함께 가도록 해요.”
그 순간 칼릭스의 얼굴은 엄청났다. 기쁨을 주체 못해 광대를 실룩거리는 표정이라니.
‘에스텔의 훌륭한 발닦개가 되어 돌아왔네.’
예전이라면 도대체 왜 저러냐며 썩은 표정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을 테지만,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내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 급격히 겸손해졌다.
‘그래. 저 정도는 귀엽지. 암.’
나는 칼릭스의 어깨를 툭 치며 짓궂게 말했다.
“3주 동안 삐지지 않게 돼서 다행이죠? 그랬다면 전하가 너무 힘들었을 텐데.”
그 말에 칼릭스는 흥, 이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내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우리 곁에 다가온 에스텔이 한쪽에는 내 손을 잡고, 반대쪽에는 칼릭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씩씩하게 말했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가요, 우리.”
* * *
루시안의 고향은 깊은 산 속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원작에서 루시안은 태어났을 때부터 저주받은 아이라고 학대당했다.
그래서 흉악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음습한 마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랐다.
산 아래 작은 집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산 중턱에는 염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도 무척 선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을 경계하긴 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조금의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평범한 시골 마을이네요. 사람들도 순해 보여요.”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오래전 독실한 신자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거든요.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더 잔인하지만요.”
잔인하다고?
나는 에스텔의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으려는 순간, 저 멀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인을 향해 에스텔이 웃었다.
“네, 맞습니다.”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막았다.
“세상에. 정말 성녀님이군요! 예전에는 제 허리춤 밖에 오지 않으셨는데……. 아름다운 숙녀분이 되셨네요.”
“이곳에 들른 지 10년이 흘렀으니까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저를 기억하고 계시네요.”
“기억하고 말고요.”
여인은 풀어헤친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소녀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만든 여인이 에스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에 성녀님께서 이곳에 방문하셨을 때 제가 따라다니며 안내를 해 드렸거든요. 성녀님께서는 저 같은 건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요.”
“아……. 수잔! 수잔 맞죠?”
에스텔의 말에 수잔의 얼굴이 감격에 찼다.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제게 참 친절하게 대해 주셨잖아요. 그때와 똑같네요. 아니, 더 예뻐졌어요.”
그 말에 수잔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에이, 무슨. 저는 이제 아줌마가 다 되었죠. 벌써 애가 둘이나 있는걸요.”
“아이를 낳았군요. 늦었지만 정말 축하해요.”
수잔은 기쁜 얼굴로 웃었다.
“성녀님께 축하 인사를 듣다니 영광이에요. 제게는 정말 기적 같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나요?”
수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스텔의 뒤에 서 있는 나와 칼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제님들과 함께 오신 건 아닌것 같은데…….”
“개인적 용무 때문에 왔답니다. ……한 분은 지금 저와 교제 중인 분이시고요.”
“어머머.”
수잔은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칼릭스는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 이 몸이 바로 에스텔의 남자 친구야.’라고 자랑하듯이.
쯧쯧.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몹쓸 왕자병이 다 고쳐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칼릭스의 똥폼이 무색할 만큼 에스텔은 빠른 속도로 내 소개로 넘어왔다.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루시안의 약혼녀예요.”
“……!”
그 순간 수잔의 눈빛이 변했다.
따스하던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에스텔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실은 루시안의 일로 촌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수잔이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촌장님은 잘 계신가요?”
“그리 좋지는 않아요. 작년부터 부쩍 건강이 악화되셔서 침대에만 누워 계시거든요.”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수잔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잔이 안내한 곳은 마을 안쪽에 있는 집이었다.
어둠이 깔린 집에는 곧 죽을 것처럼 쇠약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에스텔을 본 노인은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부르르 떨었다.
“오, 성녀님! 성녀님이시군요.”
“오랜만이에요, 촌장님.”
짧은 인사 속에 노인의 에스텔을 향한 엄청난 경외심이 느껴졌다.
노인은 감격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때가 되었으니 들르실 줄 알았습니다. 그 악마 놈을 처단할 물건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지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악마 놈이란 루시안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에스텔이 차분히 말했다.
“제가 올 걸 알고 있으셨나요?”
“물론이고 말고요. 친분이 깊은 사제를 통해 놈이 악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거든요. 놀랍지도 않았습니다. 놈이 악마를 품고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요.”
노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성녀님께서 놈을 교화시킨다고 데리고 갔을 때도, 놈이 최고의 기사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놈을 오해했다며 과거를 쉬쉬했을 때도, 전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놈은 악마다. 언젠간 제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이 희열 찬 얼굴로 말했다.
“보십시오. 결국 이날이 오지 않았습니까.”
움푹 파인 노인의 눈동자에는 제 믿음이 맞았다는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봐요, 할아버지. 루시안은 악마가 아니거든요? 정신 나간 소리 그만하세요!’
그렇게 와다다 따지고 싶었지만, 내 옆에 있던 칼릭스의 얼굴을 보고 겨우 참았다.
‘흥분하지 마. 일을 망칠 셈이야?’
칼릭스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저 노인이 루시안을 돌아오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에스텔이 말했었잖아.
어떻게든 노인에게 그것에 관한 말을 들어야 했다.
노인이 말했다.
“이날을 위해 ‘그 물건’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성녀님께 그것을 드릴 테니, 모쪼록 악마 놈을 이 세상에서 박멸하는 데 이용해 주십시오.”
노인이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내 에스텔에게 내민 것은 은으로 만든 목걸이었다.
* * *
우리는 노인의 집에서 나왔다.
나는 에스텔의 손에 들려 있는 은목걸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대체 그게 뭐예요?”
“이건…….”
에스텔이 씁쓸한 얼굴로 은목걸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설명하기 전에 니아 님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디요?”
“어린 시절 루시안이 지냈던 곳이요.”
“…….”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이 나를 안내한 곳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은 폐가가 하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창문은 겨우 붙어 달랑거리고 있었다.
낡은 테이블 위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지 모를 이 빠진 그릇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오랜 시간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열악한 환경이었다.
칼릭스도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쓰레기장도 이보다는 깨끗하겠어. 카르디엔은 이런 곳에서 자랐던 건가.”
에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아니에요.”
“네?”
“제가 루시안을 발견한 건 저곳이에요.”
“…….”
에스텔이 가리킨 곳으로 나와 칼릭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제대로 된 방 하나 없는 작은 집 한편에는 입구가 뻥 뚫린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칼릭스가 말했다.
“지하실이군.”
제국의 저택 중에는 바닥 아래에 지하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설마…….’
나는 굳은 얼굴로 에스텔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를 칼릭스가 쫓아왔다.
지하실에 도착한 나는 신음을 흘렸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작고 어두운 공간에는, 사람이 살았던……. 아니 사람이 갇혀 있던 흔적이 있었다.
벽에는 죄수에게 매다는 사슬이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곰팡이가 핀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허름한 옷가지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살풍경한 광경에 나는 입을 막았다. 칼릭스도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꼭 감옥 같군.”
에스텔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맞아요. 감옥이죠. 제가 처음 루시안을 만났을 때, 그 아이는 이곳에 갇혀 있었거든요. 쇠사슬에 묶여 자유를 억압당한 상태로요.”
“……!”
원작을 읽어서 알고는 있었다.
루시안이 태어났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다는 것을.
그러나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가슴을 에는 듯해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에스텔이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노인에게 받은 은목걸이를 꺼냈다.
“이건 그때 루시안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예요.”
에스텔은 1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내게 말해 주었다.
* * *
12살의 에스텔은 사제들과 함께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주로 가던 곳은 사원이 없어 사제들의 축복을 받기 힘든 시골 마을이었다.
그중 하나가 산골짜기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오래전, 독실한 신자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었다.
어린 성녀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특히 가문 대대로 마을을 지키던 촌장의 감격은 더했다.
“성녀님을 뵙게 되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모쪼록 부족한 저희들에게 신의 뜻을 전파하고 가 주십시오.”
진심 어린 환대에 에스텔은 마음이 따스해졌다.
에스텔의 안내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소녀가 맡았다.
“수잔입니다. 성녀님께서 마을에 있으신 동안 안내를 맡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스텔은 수잔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보살폈다.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하고, 삶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이들을 다독이고, 신의 가호를 바라는 이들에게 기도를 해 주었다.
그들의 삶은 비록 궁핍했지만, 신에 대한 마음은 충직하고 순수했다.
그래서 에스텔은 더더욱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에스텔은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집을 발견했다.
“저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나요?”
늘 에스텔의 말에 친절히 대답했던 수잔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서, 성녀님께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
대답이 이상했다.
사람이 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라니.
에스텔은 어렸지만 영민했다.
특히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에스텔은 수잔이 말리는 것을 무시하며 작은 집으로 향했다.
먼지가 무성한 집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먼지가 쌓인 바닥에는 어느 한 곳을 왔다 갔다 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에스텔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작은 지하실이었다.
그녀가 텁텁한 내부로 발을 내딛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비릿한 냄새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수많은 병자를 보았던 에스텔은 이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피비린내였다.
에스텔은 눈썹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등불을 앞으로 뻗었다.
등불이 비춘 광경을 보는 순간 에스텔은 눈을 크게 떴다.
어둡고 축축한 바닥에는 어린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쓰러진 바닥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다.
“세상에!”
에스텔은 놀라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에스텔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이의 앞섶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옷자락은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히 잘려 있었다.
날카로운 흉기로 아이의 몸을 벤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에스텔은 보다 자세히 상태를 살피기 위해 황급히 옷자락을 헤집었다.
이내 에스텔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상처가 없어?’
피투성이가 된 옷 속에 있는 아이의 피부는 말끔했다.
마치 상처가 사라진 것처럼.
‘나 같은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고쳐 주고 간 건가? 아니면…… 스스로 고친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생각하다 에스텔의 눈빛이 다부지게 빛났다.
지금 이런 것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상처가 보이진 않았지만 아이를 이런 곳에 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정신을 잃은 아이를 부축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찰랑.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에스텔은 그제야 아이의 목에 옭아맨 목걸이에 긴 쇠사슬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투박한 쇠사슬의 끝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
그 순간 차분했던 에스텔의 얼굴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곳에 아이를 가두고 있었던 거야? 사나운 짐승을 묶는 저런 쇠사슬로?’
충격으로 바르르 떠는 에스텔의 곁으로 수잔이 다가왔다. 수잔이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서, 성녀님, 어서 나오셔요. 아무리 성녀님이래도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저주가 옮을지도 몰라요. 이놈은 악마니까요.”
“…….”
‘악마.’
수잔은 피 묻은 아이를 그렇게 지칭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이를 향한 어떠한 걱정이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경멸과 두려움뿐이었다.
에스텔은 황급히 촌장을 찾아갔다.
아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기 위해서였다.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목걸이를 풀 수 있는 건 촌장뿐이라고 했다.
상황도 모르고 환한 얼굴로 에스텔을 맞이한 촌장은, 에스텔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변했다.
“지하실에 갇힌 아이를 봤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아이를 그런 곳에 가두는 것은 죄예요. 그 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풀어 주세요.”
촌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얘기는 들었어요. 그 아이가 붉은 눈동자를 가져서 그런 곳에 갇혔다지요. 하지만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악마라는 건 오래된 미신일 뿐이에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일수록, 고립된 시골일수록,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일수록, 악마를 미워한다.
에스텔은 그런 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건 추상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성녀가 제대로 설득을 한다면 촌장도 생각을 바꾸리라 믿었다.
그러나 촌장은 에스텔의 말에 동조를 하는 대신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성녀님이야말로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놈은 진짜 악마가 맞아요.”
이어진 말에 에스텔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놈은 3년 전에 고작 7살의 나이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제 아들을 말입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에스텔은 숨을 멈췄다.
촌장은 괴로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그 목걸이는 악마의 힘을 정화시켜 주는 성물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물이지요. 그러니 그것을 함부로 건들지 마십시오. 악마를 세상에 풀어 둘 수는 없어요.”
다시 현재로 돌아와 성인이 된 에스텔의 얼굴에는 착잡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저는 그때 촌장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어요. 그때의 루시안에게는 어떤 불길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온 마을이 어린아이 한 명을 학대했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 부풀린 이야기라고 생각했죠.”
“…….”
“그래서 저는 아이의 구속을 풀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어요. 사제들과 함께 강하게 요구하자 촌장은 어쩔 수 없이 루시안의 목걸이를 풀어 주었죠. 그렇게 루시안은 이곳을 나올 수 있게 된 거예요.”
루시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가 이토록 잔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칼릭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에스텔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목걸이가 정말 효력이 있는 거야?”
“촌장의 말로는 루시안이…….”
잠시 말을 멈춘 에스텔이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였을 때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 나타났다고 해요. 그런데 이 목걸이를 채우자 그 힘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이 목걸이가 악마의 힘을 정화시키는 성물이 아닐까 싶어요. 좀 더 연구를 해 봐야 알겠지만요.”
나는 마른입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꺼내기 힘든 말이었지만 제대로 확인을 해야 했다.
“……루시안이 어렸을 때 사람을 죽인 일은 사실인가요?”
“…….”
에스텔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죄악을 지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모두 일치했어요. 루시안이 7살 때, 자신을 보살펴 주던 촌장의 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해요.”
그 순간 겨우 지탱했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기사다.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것과, 일곱 살짜리 아이가 사람을 죽인 것은 차원이 달랐다.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피 묻은 검을 들고 있을 작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니아 님.”
에스텔이 나를 위로하듯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칼릭스가 말했다.
“여기서 질질 짜 봤자 아무 소용 없어. 하루라도 빨리 목걸이를 연구해서 카르디엔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지.”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카르디엔이 돌아오면 다같이 술 한잔하자. 아바마마의 술 저장고를 몽땅 털어 제대로 대접해 줄게.”
나는 그 말에 눈썹을 내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곁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그는?
새하얀 눈이 내리던 그곳에 지금 그는 혼자 있겠지.
……이곳에 있었던 때처럼.
가슴이 콱 막혀 왔다.
* * *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수도로 돌아가 목걸이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해가 져 버렸다.
밤길을 걷는 건 위험할 수도 있기에 마을에서 하룻밤 묶고 가기로 했다.
수잔은 우리들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갔다.
집은 작지만 따스한 곳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스프 냄새와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수잔을 꼭 닮은 쌍둥이 남매는 화려한 손님의 등장에 흥분했다.
“엄마, 누구예요?”
“공주님이랑 왕자님 맞죠?”
“그런데 왜 공주님이 두 명이지?”
“보면 모르겠냐. 왕자님이 바람둥이인거지.”
“으앙. 난 그런 거 싫은데.”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어린 남매를 상대한 건 의외로 칼릭스였다.
“이봐, 어린이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을 내뱉지 마. 내가 왕자인 것은 맞지만 바람둥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럼 왜 공주님이 두 명인 건데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일단 전제가 잘못됐어. 두 사람은 공주가 아니야.”
“하지만 책에서 왕자님과 같이 다니는 예쁜 언니는 다 공주님이라고 했어요.”
“……하아. 뻔한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봤군. 아이들을 다 망쳐 놨어.”
칼릭스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말했다.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지. 그렇게 궁금하다면 진실을 제대로 알려 주마.”
칼릭스는 아이들을 앞에 앉히고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시작했다.
‘모르는 새에 아버지의 라이벌이 나타났구나. 새로운 투머치토커의 등장이야.’
심드렁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나와 달리, 에스텔은 따스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들이 정말 귀여워요, 수잔.”
“귀엽기는요. 보시다시피 말 안 듣는 망아지 새끼들 같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수잔의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루시안을 가둔 것을 방조한 마을 사람 중 한 명이지.’
이제와 마을 사람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어린 그에게 너무 가혹했던 그들이 밉기는 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을 아니까.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은 자신들이 아니라 루시안일 것이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수잔은 표정을 굳히며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이 많지는 않았으나 내내 이런 식이었다.
‘내가 루시안의 약혼녀라 싫어서 저러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눈빛이 묘했다.
두려움이나 미움보다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지은 죄라도 있는 것처럼.
‘도대체 뭐지?’
나는 찝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벽녘, 나는 침대에 누워 은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수도로 돌아가는 즉시, 에스텔은 사제들과 함께 목걸이를 연구하겠다고 했다.
촌장의 말이 진짜라면, 이 목걸이는 루시안의 악마의 힘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목걸이의 힘이 검증되면 즉시 루시안에게 가자고.
그런데 왜일까.
내가 그토록 원했던 답을 찾은 것인데 마음이 복잡했다.
오늘 알게 된 루시안의 끔찍한 과거 때문일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과거가 무섭고, 슬퍼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니면…….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귀를 쫑긋하니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수잔입니다.”
그녀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새벽에 방문을 두들길 정도로 다급한 일이 생긴 건가.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의외로 잠귀가 어두워 저런 소리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내 얼굴에 수잔의 눈이 커졌다.
“에스텔은 지금 잠들었어요. 깨워 줄까요?”
최대한 평범하게 말하려고 했는데도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역시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나 봐.’
내 까칠한 말투 때문인지 수잔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페르니아 님이라고 하셨죠. 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제게요?”
“……그 아이, 그러니까 루시안이 7살 때 벌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 말에 나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갑자기 내게 루시안의 이야기를?
내게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은 건가.
어떤 이유든 듣고 싶지 않아 나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그때의 이야기라면 대략적으로 들어 알고 있어요.”
“아니요. 아가씨께서 아시는 내용과는 조금 다를 거예요. 그러니 부디 들어주세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 죄를 고하듯이.
* * *
마을에 붉은 눈동자를 한 아기가 태어났다.
친부는 누군지 알 수 없었고, 친모는 그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아기에게 루시안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루시안은 친모가 살던 작은 집에 그대로 방치됐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마을 사람들 덕분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아기를 돌보았다.
연민은 아니었다.
붉은 눈을 한 아기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면 저주가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열심히 루시안은 돌본 건 촌장의 아들 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하는 소년의 인품을 추켜세웠다.
“역시 촌장님의 아드님은 달라.”
하지만 존이 작은 집에 간 것은 순수하게 루시안을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반은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고 또 반은…….
“상처가 저절로 낫는다고?”
수잔의 말에 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놈은 진짜 악마야.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하루만 지나면 싹 낫는다니까.”
수잔은 눈썹을 찡그렸다.
붉은 눈의 아이가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수잔의 손을 잡았다.
“못 믿겠어? 그럼 따라와 봐. 직접 눈으로 보게 해 줄 테니.”
사실 수잔은 존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런 불길한 곳을 가?’
그러나 수잔은 아무 말 못 하고 존과 함께 작은 집을 향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누구보다 성격 좋은 존이었지만, 존은 소꿉친구인 제 앞에서는 이따금 불처럼 화를 낼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수잔은 코부터 막았다.
‘냄새.’
제대로 치우지 않아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곳에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잘 있었냐?”
존의 목소리에 아이가 가녀린 어깨를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본 수잔의 눈이 커졌다.
붉은 눈의 아이가 있는 집에 갔다가는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잔은 한 번도 이 집에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또래보다 훨씬 작은 체구에, 한 손에 작은 인형을 들고 있는 루시안은 유순해 보였다.
‘생각보다 평범하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워낙에 더러운 몰골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생각했던 흉악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사 안 해?”
그런데 존이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루시안의 얼굴이 바뀌었다.
커다란 붉은 눈동자에 머문 감정은 공포였다. 루시안은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존은 그게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으며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잔뜩 움츠린 루시안의 손목을 낚아채 수잔에게 내밀었다.
“이것 봐. 어제 분명 내가 유리로 손등을 긁었거든. 그런데 상처가 하나도 없잖아.”
“……!”
존의 말대로 루시안의 손등은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긴 했지만, 상처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존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죽지도 않고 살았나 했더니 이 능력 때문이었어.”
수잔은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알게 된 저주받은 루시안의 비밀 때문이 아니었다.
존의 모습 때문이었다.
꼭 제가 아는 존이 아닌 것 같았다.
수잔은 그날 처음 안 사실이지만, 존이 사람들에게 보여 준 온화한 모습은 모두 가면이었다.
존은 내면에 잔혹한 본성을 숨기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이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를 둔 덕에 존은 제 욕망을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고 자랐다.
처음에 루시안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러나 존은 식사를 가지고 간 첫날, 이 귀찮은 짓거리에서 재미를 찾게 되었다.
존은 어머니가 싸 준 스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짜증스럽게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낡은 의자에 앉아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는데, 하는 짓이 가관이었다.
스프를 본 아이는 짐승처럼 헉헉대며 다가왔다.
어찌나 다급하던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그릇 조각에 발이 찔리기까지 했다.
발바닥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스프를 먹는 아이를 보며 존은 생각했다.
‘정말 끔찍해. 이참에 죽어 버렸으면. 그럼 나도, 마을 사람들도 편해지잖아.’
라고.
그렇게 존은 루시안을 뒤로하고 집을 나왔다.
‘살아 있으려나.’
다음 날 집에 들어선 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은 마치 어제 일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멀쩡한 것이다.
작은 발바닥에 나 있던 상처는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거 진짜 악마의 자식이 맞나 봐.’
루시안이 악마의 자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눈으로 보니 새삼 두려워졌다.
그래서 며칠은 얌전히 있었다.
수프만 두고는 재빨리 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은 흐려졌다.
루시안은 너무나 무해했으니까.
제가 스스로 상처를 회복시킨 것만 빼면 보통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부터 존의 악의적인 장난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이의 볼을 때렸다.
저보다 한참 작은 아이를 때리는 순간 느껴졌던 그 쾌감.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예상대로 다음 날 살펴본 아이의 볼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존은 잔혹하게 웃었다.
그 후 폭력의 수위는 점점 심해졌다.
때리고, 차고, 꼬집고, 짓이기고…….
루시안에게는 고통이었지만 존에게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오늘은 뭘 할까…….’
존은 제가 가지고 온 스프를 헐레벌떡 먹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뜨거운 물 붓기? 못으로 피부에 그림 그리기?
소년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잔혹한 발상이었다.
사실 존이 아무리 잔인한 성정을 가졌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몇 달째 루시안을 괴롭히며 행위가 점점 잔혹해졌다.
루시안의 반응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 정도로 고통을 받으면 비명을 지르잖아? 근데 이놈은 아무 반응도 없어.”
존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존의 가차 없는 발길질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루시안은 바들바들 떨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한 번도 악 소리를 낸 적도,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빈 적도 없었다.
그 점이 존의 가학성을 부채질했다.
“악마라서 그런가?”
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수잔?”
“…….”
수잔은 창백한 얼굴로 존을 바라보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아는 건, 존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수잔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는 잘 모르겠어.”
수잔의 말에 존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이.
존은 제가 한 짓을 봐 줄 관람객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겁이 많고, 입이 무거우며, 저를 따르는 수잔에게 딱 어울리는 역이었다.
그날 이후, 존은 종종 수잔을 작은 집으로 데리고 오곤 했다.
수잔은 그곳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존의 폭력적인 모습을 본 후에는 너무 무서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벌벌 떨며 존이 루시안에게 무참한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존은 아버지 몰래 가지고 온 채찍으로 루시안의 작은 등짝을 한껏 휘갈겼다.
존은 오만한 왕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루시안은 제대로 된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것이 영 아쉬웠다.
이제 존은 단순히 루시안을 상처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저 작은 아이가 제게 울고불고,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저놈을 어떻게 울리지.’
고민하던 존의 시선에 닿은 것은 루시안이 품에 안고 있는 인형이었다.
인형의 상태는 끔찍했다.
눈알은 하나만 달랑거려 겨우 붙어 있고, 새까맣게 얼룩이 지고, 곳곳이 터져 솜 뭉텅이 튀어나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기함을 하고 도망갈 만한 꼴이었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그것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마치 소중한 보물처럼.
작은 등이 피투성이가 된 지금도 인형을 손에 놓지 않고 있을 만큼.
‘누가 여기까지 들어와 저런 걸 주고 갔을 리는 없으니, 놈을 낳은 여자가 남기고 간 건가.’
존은 대수롭지 않게 추측한 것이었지만, 그 말이 맞았다.
인형은 루시안의 친모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이었다.
늘 혼자였던 루시안의 곁에 있어 준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존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다른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놈이, 저 인형만 엄청 좋아한단 말이지.’
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섬뜩한 미소였다.
존은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루시안은 존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루시안의 작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루시안은 차마 존을 피하지도 못했다.
저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강한 이를 마주했을 때, 몸이 굳어 버리는 작은 야생동물처럼.
존이 손을 뻗는 순간 루시안은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존은 루시안의 머리통을 휘갈기지도, 살 없는 볼에 따귀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는 루시안이 소중히 안고 있던 인형을 빼앗았다.
“아……!”
루시안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형을 손에 든 존이 눈썹을 찡그렸다.
“으. 썩은 냄새. 이런 쓰레기를 잘도 안고 있네.”
“주, 주세요. 주세요.”
루시안은 거의 혼자 있었기에 제대로 말할 줄 몰랐다.
루시안은 서툰 발음으로 존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존이 키득거렸다.
‘이걸 건드니까 반응이 바로 오잖아.’
드디어 좋은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존의 얼굴이 상기됐다.
존은 인형을 번쩍 들고는 흔들었다.
“이 쓰레기가 그렇게 소중해?”
루시안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14살의 존과 7살인 루시안의 체격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루시안이 손을 올려도 인형에 닿지 않았다.
그 모습이 우스워 존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존의 가학성에 불을 붙었다.
좀 더 괴롭혀 주고 싶었다.
존의 시야에 굴러다니는 유리 조각이 보였다.
얼마 전 루시안의 손등을 긁었던 유리 조각이었다. 유리 조각에는 붉은 피가 메말라 들러붙어 있었다.
존은 인형을 들지 않은 손으로 유리 조각을 잡았다.
존은 제 밑에서 바둥거리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악마 새끼 주제에 무슨 인형이야? 너 따위에겐 이런 것도 과분하다고!”
존의 손에 들린 유리 조각이 인형을 향했다.
“……!”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커졌다.
유리 조각이 인형의 배를 파고들었다.
쫙, 쫙. 거친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은 인형을 난자했다.
천으로 만든 낡은 인형은 너무 약했다.
속에 있던 솜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천은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
“하……하지 마.”
루시안은 차마 소리치지도 못하고 괴로운 소리를 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존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야 좀 악마 자식이 사람처럼 보였다.
인형은 본연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제 존의 손에 남은 것은 낡은 천 쪼가리일 뿐이었다.
그것이라도 루시안에게 주었으면 좋으련만 존은 끝까지 잔인했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인형의 얼굴을 두 손으로 찢어발겼다.
그 순간, 두 갈래로 갈라진 인형 사이로 드러난 존의 얼굴은 악마였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있는 루시안의 얼굴 역시.
“……!”
존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눈물이 고여 있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일렁였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존은 더 자세히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루시안이, 존이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빼앗아 심장에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수잔은 비명을 지르며 촌장의 집에 달려갔다. 존이 루시안에게 습격당했다는 말에 촌장은 서둘러 작은 집을 향했다.
그러나 이미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존이 죽은 후였다.
아니. 온몸이 갈가리 찢긴 시체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촌장은 아들의 참상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이성을 잃었다.
그 순간만큼 촌장은 절대 무고한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교리 따윈 잊었다.
그는 당장 루시안을 잡아 죽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루시안은 7살 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결국 뒤따라 온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이 힘을 합쳐 루시안을 겁박했다. 촌장은 아이의 가는 목에 은목걸이를 채웠다.
언젠간 악마가 나타났을 때 쓰일 것이라며 대대로 내려왔던 보물이었다.
다행히 목걸이는 효력이 있었다.
그제야 루시안은 잠이 들듯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루시안을 죽이자고 했다. 악마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촌장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 순간 가장 이 작은 악마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차마 손이 나가질 않았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의 손으로 악마를 죽이면 그곳에 지독한 저주에 내린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이 끔찍한 존재를 내버려 두지 않았는가.
잘못하면 이 작은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결국 촌장은 지금까지처럼 루시안을 방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지금까지와 달리 루시안은 철저하게 감금되었다.
루시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 안이었다.
목에는 은빛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고,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더는 누구도 루시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루시안이 할 수 있는 일은, 비가 고인 물을 핥거나 썩은 동물의 시체를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 * *
수잔이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그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에요. 무, 물론 그 아이가 악마가 맞긴 하지만요. 존도 너무 심한 짓을 했어요.”
나는 횡설수설하는 수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온몸이 차가워졌다.
손끝이 싸늘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분노였다.
나는 힘겹게 물었다.
“왜 그 이야기를 이제야 해요? 조금만 일찍 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루시안이 그 끔찍한 곳에서 갇혀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적어도 마을 사람들이 루시안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악마로 치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분노 어린 호통에 수잔이 눈을 꾹 감고 말했다.
“그, 그때는 절대 말할 수가 없었어요. 마을 분위기가 너무 흉흉해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악마를 두둔한다며 저도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누가?”
“촌장님이요.”
“…….”
3권에서 계속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랍니다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