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4
20.
나는 루시안의 성으로 향했다.
그사이 북쪽 땅은 더 추워지고,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났을 때보다 훨씬 길이 험했다.
그럼에도 계속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칼릭스와 에스텔 덕분이었다.
칼릭스는 황태자의 힘으로 제국에서 가장 튼튼한 썰매와 썰매견을 구해 주었고, 에스텔은 신의 힘을 이용하여 매일 밤 내 몸에 쌓인 피로를 풀어 주었다.
눈보라가 치는 밤. 우리는 천막을 치고 잠시 쉬기로 했다.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을 앞에 나는 뜨거운 스프를 손에 들고 앉았다.
그런 내 옆에는 에스텔과 칼릭스가 있었다.
에스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니아 님. 아무리 제가 성력으로 체력을 회복시켜 준다고 해도 이런 험한 길을 며칠이나 쉬지 않고 가는 건 너무 무리한 일이에요. 가까운 마을에 들러 하루라도 쉬고 가는 게 어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틈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루시안에게 가고 싶었다.
에스텔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보다가, 내 손을 잡고 신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금세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병자를 고칠 만큼 어마어마한 성력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나를 치료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꽁꽁 언 몸에 온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루시안을 떠올렸다.
내가 이렇게 친구들의 따스한 보호를 받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정원에 홀로 갇혀 있을 것이다.
에스텔의 말로는 루시안에게 쓴 결계는 악마의 힘을 억압시키는 동시에 사람을 치유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루시안이 결계 안에만 얌전히 있으면, 배고픔도 추위도 느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럼에도 나는 루시안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루시안에게서 빠져나올 생각만 했다고 해도 그렇지, 왜 그런 곳에 결계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까. 이왕이면 그의 침실에 결계를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푹신한 침대에 맛있는 간식과 책도 잔뜩 쌓아 놓고 왔으면 루시안이 덜 괴로웠을 텐데.’
나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다가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에스텔을 향해 품위라고는 하나도 없는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에스텔. 나도 추워.”
“저런. 성력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 드릴까요?”
“난 네가 성력을 쓰는 게 싫다고 했잖아. 조금이라도 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더니 두 손으로 에스텔을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꼭 껴안았다.
“이러면 되지.”
“카, 칼릭스!”
……얼씨구. 잘한다, 잘해.
틈만 나면 저런 짓을 해 대는 통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에스텔을 향해 괜찮다고 손짓하며 칼릭스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왜?”
“물어볼 게 있는데요.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고 해도, 난 니가 싫다고 온몸을 꽁꽁 묶어 버리고 도망가 버리면 좀…… 밉겠죠?”
에스텔은 내 상황을 말한 것을 알고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칼릭스는 아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얄짤없는 놈.
나는 속으로 흐느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 저런 반응이 당연하지. 나만 해도 루시안이 집착 좀 했다고 그렇게 모질게 대했잖아.
그랬으니 루시안이 내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나를 보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낼 테지. 애증이 뒤섞인 마음으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흑화한 상태니까.
‘그럼 뭐 어때.’
물론 그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더는 그를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나는 주먹을 꼭 쥐며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성이 있는 곳이었다.
* * *
3일이 지났을 때, 드디어 루시안의 성에 도착했다.
새하얀 눈밭에 고고히 서 있는 성은 고요했다.
에스텔이 말했다.
“루시안을 결계 안에 가둔 후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켰거든요. 요 근래 성에 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예요.”
그 말에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게 내가 루시안을 떠났던 그때와 똑같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새하얀 빛 속에 눈을 감은 루시안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설마…….’
혹시나 그가 잘못되었나 싶어 그의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나는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루시안?”
잔뜩 긴장해 버려 목소리는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작고 가늘었다.
그럼에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오랜 시간 왕자님을 기다린 공주님처럼.
혹은, 어린 왕자를 기다린 장미꽃처럼.
긴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나타나는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화를 낼까.
나를 원망할까.
울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루시안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너무도 행복하게.
“니아.”
“…….”
마치 우리가 행복했던 그 시절처럼 달콤하기만 한 목소리에 숨이 콱 막혀 왔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루시안은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간 나를 향해 그가 내뱉은 첫 말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그를 버려두고 온 것은 나니까, 절대 눈물로 이 상황을 무마시키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자고.
그런데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이토록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는 그의 앞에서.
루시안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에스텔이 결계의 힘을 풀었기에, 그의 손은 내 얼굴 위에 닿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손이 작게 떨렸다.
그는 내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니아.”
“…….”
“당신이 울면 마음이 아파요.”
“……진짜 바보야.”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그가 기쁜 얼굴로 나를 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당신이 무서워요.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도 없어요. 그런데 노력해 보고 싶어요.”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려는 노력.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내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줄래요?”
마주친 붉은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 결의에 대한 어떤 고뇌나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안은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루시안이 내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그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나만을 사랑했고, 붉은 눈동자에는 섬뜩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런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나는 루시안의 얼굴을 잡아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이내 부드럽고 서늘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공주님이 왕자님을 구하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나는 에스텔과 칼릭스에게 성을 떠나 달라고 했다. 에스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루시안은 평범한 상태가 아니잖아요. 그런 루시안과 니아 님을 단둘이 있게 둘 수는 없어요.”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없으면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에스텔은 걱정이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반짝이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촌장에게 받아 온 은목걸이였다.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요. 혹시 루시안이 포악하게 변해 버리면 니아 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에스텔이 알아낸 바로, 목걸이는 악마의 힘을 정화할 수 있는 고귀한 성물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를 박탈하는 끔찍한 구속구였으며, 제 모습을 강제로 없애 버리는 무기였다.
이제 이런 끔찍한 것을 그를 얽매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에스텔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에스텔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게 니아 님이 선택한 길이라면.”
그녀는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사랑하는 내 친구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성녀의 축복에 나는 웃었다.
에스텔의 인사가 끝난 후에는 칼릭스 차례였다. 그는 내게 검푸른 보석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황실에서만 내려오는 보물이야. 보석을 깨뜨리면 황성에 배치된 마력석이 빛나 위급한 상황인 것을 알려 주지. 언제든 카르디엔을 벗어나고 싶으면 이걸 사용해. 황실 기사를 모두 끌고 달려올게.”
황실 기사를 수십만 명 데리고 와 보았자, 지금의 루시안한테는 전혀 소용이 없을 텐데요?
에스텔 한 명이 훨씬 더 강할걸요.
라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귀한 보물을 선뜻 내게 주는 칼릭스의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칼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라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나와 똑같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그의 주먹에 내 주먹을 마주치며 말했다.
“고마워요. 모쪼록 제가 부탁한 일도 잘 처리해 줘요.”
“흥. 제국의 황태자를 사사건건 잘도 부려 먹는군.”
“친구 좋다는 게 뭐예요.”
그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루시안이 왜 내가 돌아오지 않느냐며 나를 찾으러 나올 것이다.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요. 조만간 나도 루시안과 함께 수도로 돌아갈게요!”
두 사람을 떠나보낸 후, 나는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내 계획은 이랬다.
루시안의 지금 모습을 강제로 없애거나 않을 것이다. 대신 그를 조금 변화시키기로 했다.
일명 흑화한 서브 남주 훈련 대작전.
그게 가능하냐고?
나는 가능하다는 말에 베팅을 해보기로 했다.
왜냐면 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조련사 캉 박사님께서는 이런 명언을 남기셨거든.
‘세상에 나쁜 동물은 없다.’
아무리 포악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훈련시킨다면 사람과 어우러져 살 수 있다.
그런 지론을 가지고 평생을 야생 동물과의 교감에 매진한 캉 박사님의 업적은 엄청났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이 많다는 미어캣이 박사님의 얼굴에 뿡 하고 방구를 뀌고, 그토록 고고하다는 늑대가 하루 종일 박사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놀아 달라고 졸랐단다.
사람만 보면 피했던 도도한 길고양이들은 캉 박사님과 눈만 마주쳐도 넙죽 누워 배를 까 보이며 나를 키워 달라냐옹, 이라고 했다고.
그토록 대단한 캉 박사님이 쓰신 책을 보며 나는 희망을 가졌다.
온갖 동물들이 사람과의 교감에 성공해 함께 살아가잖아.
루시안이라고 왜 못해!
난, 아니 나와 루시안은 꼭 성공할 거야.
나는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루시안이 있었다.
루시안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심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바로 내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정리된 책자였다.
나는 루시안의 고향을 떠날 때쯤 칼릭스에게 물었다.
라일락 저택에서 가지고 올 물건이 있는데, 그것들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고.
황태자의 권력은 대단했다.
칼릭스는 순식간에 제국에서 가장 발이 빠른 이들을 불러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저것이었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챙겨 오길 잘했어.’
캉 박사 야생 동물 훈련법 1장.
동물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라.
기본적으로 동물은 경계심이 많다. 일단은 그들의 기분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
개라면 고깃덩어리가 좋을 것이고, 판다라면 대나무가 좋을 것이고, 루시안이라면 페르니아가 좋을 것이다.
효과는 대단했다.
루시안은 내가 던진 몇 장의 그림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사이 내가 에스텔과 칼릭스에게 인사를 하고 올 수 있을 정도로.
물론 루시안이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이 정도로 효과를 본 것이겠지만, 어쨌건 나는 저 모습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느꼈다.
‘루시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미친 것 같아. 아니. 더 미친 건가.’
어쨌건 중요한 건 루시안에게 나와 관련된 물건이 무척 잘 먹힌다는 것이었다.
‘꼭 어렸을 때 키웠던 복실이 같아.’
내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복실이가 멍멍 짖으며 쫓아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개껌을 하늘 위로 힘껏 던졌다,
복실이가 개껌을 향해 달려가는 틈을 타 나는 집을 나갈 수 있었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좋네. 저런 것쯤 앞으로 팍팍 주지, 뭐.’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루시안에게 줄 다른 개껌들, 아니 내 물건의 목록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루시안.”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루시안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니아.”
“아직도 내 그림을 보고 있었어요?”
“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한 얼굴로 두툼한 책자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책자가 조금 닳은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관심이 엄청났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화가를 불러 내 모습을 그리게 했다.
덕분에 내게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온전히 담긴 앨범이 있었다.
바로 이 책자였다.
루시안과 나란히 침대에 누운 나는,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가장 첫 페이지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그려져 있었다.
이때의 나는 미모고 뭐고 없었다.
그저 터질 것 같은 볼때기와 푸짐하게 겹쳐진 턱살만이 있을 뿐.
도대체 뭘 먹고 자랐는지 덩치도 대단했다. 우람한 어깨에 팔뚝은 비비 꼰 마시멜로처럼 살이 올록볼록 접혀 있었다.
내가 딸인 걸 증명하는 건 오로지 근엄한 얼굴 위를 장식한 분홍색 왕리본뿐이었다.
“보통 초상화 그려 주는 사람들은 눈치껏 미화시켜 그려 주잖아요. 그런데 라일락 후작가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는 안 그래요. 완전 극사실주의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꼭 심통 난 두꺼비 공주 같잖아요.”
“예뻐요.”
루시안의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두꺼비를 발견한 것처럼.
“흠흠.”
그의 반응이 새삼 멋쩍어 나는 헛기침을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나의 4살 무렵을 그린 그림이 나왔다.
몇 년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두꺼비에서 요정이 되어 있었다.
적당히 살이 오른 동그란 얼굴. 커다란 눈. 앙증맞은 리본이 장식된 옷을 입고 있는 나는…….
‘귀여워!’
이건 내가 봐도 찐이다. 찐 귀여움이야.
그러니 루시안은 오죽할까.
루시안은 마치 세상의 기적을 눈앞에서 본 얼굴로 초상화를 만지작거렸다.
“예뻐요.”
그리고 다음 페이지, 또 다음 페이지. 내 그림을 볼 때마다 루시안은 ‘예뻐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을 보게 되어 그는 무척 기뻐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캉 박사 야생 동물 훈련법 2장.
동물의 경계가 풀어졌다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훈련을 시작해라.
“있죠, 루시안.”
“네.”
“내가 같이 있으니까 좋아요?”
“그럼요.”
“나도 루시안과 함께 있어서 좋아요.”
그 말에 루시안이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말을 들은 것처럼 두 눈을 부드럽게 휜 루시안을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둘만 있을 수는 없어요. 왜냐면 내게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나를 찾는 고객님들도 있으니까요.”
그 순간 천사처럼 웃던 루시안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 건 싫다고, 다 죽여 버릴 거라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요. 앞으로 그런 말을 하면…….”
캉 박사 야생 동물 훈련법 3장.
동물이 이를 드러낸다면 적절한 제재가 필요하다.
채찍질은 권하지 않는다. 그것은 야생 동물을 제압시킬 수는 있으나, 그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면서, 야생 동물이 가장 싫어할 만한 벌을 주는 것이다.
나는 루시안과 또렷하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미워할 거예요.”
나는 잔혹하게 보다 자세한 형량을 덧붙였다.
“일주일 내내 눈도 안 마주칠 거라고요.”
“……!”
루시안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루시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안 할게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와, 진짜 먹히네.
역시 캉 박사님이 최고시다!
나는 속으로 엄청난 희열을 느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루시안이 조금만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 인싸가 돼서 온갖 연회장에 얼굴을 내밀고 사람들과 어울리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저 조금만, 그러니까 내가 아빠랑 식사를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고객님들에게 웃어 주는 것을 이해해 주면 돼요.”
“…….”
루시안은 예전처럼 싫어요, 그러기만 해 봐, 다 죽여 버릴 거야, 라는 답 없는 중2병 같은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싸늘한 눈동자는 내가 당장 저대로 했다가는 온 세상을 박살 낼 것 같은 기세였지만.
‘좋아, 좋다고.’
여기까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성과였다.
그것에 기분이 상기된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부터 훈련을 조금씩 해 볼까요?”
“훈련요?”
“네. 당신이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훈련요.”
“그런 훈련 같은 것을 내가 왜…….”
“성공하게 되면 선물이 있어요.”
“선물요?”
캉 박사 야생 동물 훈련법 4장.
야생 동물에게는 보상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내 감정을 빌미로 내가 바라는 것을 요구하지 말아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보상이다.
그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제대로 된 보상을 해라.
“볼에 뽀뽀해 줄게요.”
“…….”
“양 볼에. 쪽쪽.”
이 세상 모든 잔혹함과 피폐함을 몸에 두른 것 같은 남자에게 과연 이런 장난 같은 보상이 먹힐까 싶었다.
내가 왜 당신 말을 따라야 하지?
내가 가지고 싶은 만큼 취하면 그만인데?
라며 나를 강제로 덮치는 게 더 흑화한 서브 남주답잖아.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먹히지 않았나 싶어 어깨를 움찔거리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한번 해 보죠.”
존경합니다, 캉 박사님!
* * *
그렇게 나는 적절한 채찍과 당근으로 루시안의 재활 훈련(?)을 시작했다.
적어도 그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참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처음은 가볍게 시작했다.
나는 꽃나무가 핀 화분을 손에 들었다.
“어때요? 짜증나요? 요 앙증맞은 아이를 뿌리까지 파헤쳐서 불태우고 싶어요?”
“……전혀요.”
루시안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행히 식물은 괜찮나 보다.
다음은 귀여운 사슴벌레였다.
(이곳은 너무 추워 곤충이 많지 않아 겨우 구해 왔다.)
나는 톱밥 속에서 쉬고 있는 사슴벌레를 살짝궁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때요? 거슬려요? 이 작고 귀여운 아이의 뿔을 무참히 뽑아 버리고 싶냐고요.”
“……아니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흐음. 곤충도 괜찮구나.
자, 그럼 다음 차례.
평온했던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내가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내 품에 안긴 강아지를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아지는 그의 험악한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낑낑거리며 내 품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루시안. 애가 겁먹잖아요. 엄마한테 떨어져서 먼 곳까지 온 강아지인데 그렇게 쳐다보면 어떡해요.”
“……니아. 그 개를 어서 품에서 놓아주세요. 보기가 괴롭습니다.”
농담이 아니었다.
험악해진 루시안의 분위기에 나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네네, 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냥 강아지잖아요. 얘는 인간도 아니고, 나랑 대화도 못 해요. 할 줄 아는 건 똥 싸는 거랑 귀여운 것밖에 없다니까요.”
“그게 싫다는 겁니다.”
“똥 싸는 거요?”
“아뇨. 당신이 귀여워하잖아요.”
“…….”
“뭐든 당신의 감정이 향하면 싫어요. 너무 불쾌합니다.”
젠장, 이 빌어먹을 집착남.
아니. 아무리 요즘 집착남이 대세라지만, 이건 아니잖아.
누가 개한테 질투를 해.
그래도 아까 사슴벌레한테는 질투를 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참아요.”
“……!”
“이 상황을 넘겨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요.”
“하지만…….”
나는 루시안이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당장 거슬리는 그 개새끼의 가죽을 다 벗겨서 보글보글 끓는 물에 끓여 버리고 싶어요.
라고 말해도 놀랍지 않았다.
다행히 아까 전 내가 한 협박으로 인해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엄한 눈동자로 말했다.
“30분만 버텨 봐요.”
과도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루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겨워하는 그를 위해 나는 한 번 더 달콤한 보상을 상기시켰다.
“볼에, 뽀뽀.”
“……!”
그 순간 험악하기 그지없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마음을 다잡은 듯 차분해졌다.
힘내. 당신은 할 수 있어!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땡.
시간을 확인한 나는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내 품에 안겨 자신을 당장 죽이려는 포악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가여운 강아지는 머엉- 하고 슬픈 소리를 내뱉으며 잽싸게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루시안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한계에 다다른 듯, 몸을 휘청거리더니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된 건가요?”
“네, 끝났어요. 정말 잘했어요, 루시안.”
어마어마한 성과에 내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루시안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짝이는 눈동자가 원하는 바를 깨달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쪽. 그리고 쪽.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랑해요.”
캉 박사 야생 동물 훈련법 5장.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 * *
루시안의 성으로 오는 길에 묵었던 농장에서 나는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푸른 눈에 도톰한 털,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간 꼬리. 시베리안 허스키를 닮은 강아지의 모습에 나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귀여워!
농장 주인은 태어난 강아지가 너무 많으니 키울 수 있다면 데려가 달라고 했다.
지금의 루시안에게 그게 가능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잖아. 분명 루시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다행히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구아구, 우리 귀여운 봉봉이.”
내게 완전히 정을 붙인 봉봉이의 복슬복슬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봉봉이는 기분이 좋은지 갸릉갸릉 거리며 행복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무시무시한 시선이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의 모습은 얼핏 봐도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의 원수라도 바라보는 듯한 섬뜩한 눈빛. 금방이라도 욕을 내뱉을 것 같이 꽉 다문 입. 폴폴 새어 나오는 싸늘한 냉기.
그럼에도……!
‘봉봉이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있잖아!’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루시안의 훈련 이 주일째.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첫날은 내가 봉봉이를 안고 있는 것조차 괴로워했지만, 둘째 날은 내가 봉봉이를 쓰다듬는 것도 참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가.
나는 그의 앞에서 봉봉이의 이름을 부르며 쪽쪽 뽀뽀까지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적절한 보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나는 안고 있던 봉봉이를 놓았다. 첫날과 달리 봉봉이는 여유롭게 내 품을 벗어났다.
봉봉이의 실룩이는 엉덩이에서 눈을 뗀 나는 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그 순간 루시안이 나를 꽉 안으며,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루시안과 눈을 맞췄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잘했어요. 나의 루시안, 멋져. 예뻐. 최고야.”
“…….”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 제가 정말 바라는 말은 나오지 않은 것처럼.
나는 키득거리며 루시안의 입술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
그 순간 세상을 파멸시킬 것 같던 섬뜩한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남자로 변신했다.
루시안은 행복한 얼굴로 두 눈을 곱게 휘었다.
누구도 지금의 그를 보고 흑화했다거나, 악마라고 비난하지 못할 만큼.
나는 이제 어느 정도 루시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그의 집착과 독점욕은 비정상적이었고, 동시에 애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 사랑을 아이처럼 갈구했다.
뽀뽀, 포옹,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키스.
나는 루시안의 품속에 안겨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흑화하기 전에도, 그는 입맞춤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입맞춤은 차원이 달랐다.
‘야해.’
그의 혀가 어찌나 집요하게 입속으로 파고드는지 숨 쉬기 힘들 정도였다.
동시에 너무 달콤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그에게 몸을 맡기고 전 연령의 늪을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 돼.’
(캉 박사님의 책에 따르면) 보상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 강한 훈련(?)을 할 때 써먹을 게 없으니까.
나는 겨우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만해요, 루시안.”
그러나 앙큼하게도 루시안은 내 한마디에 냉큼 물러나진 않았다.
루시안은 마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다.
쪽- 하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주 잠깐 입 맞추기로 했잖아요.”
“잠깐입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았어요.”
억울한 듯 말하는 루시안의 말에 나는 인상을 더 찌푸렸다.
이 남자가 어디서 약을 팔아.
나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한 시간은 훌쩍 지났거든요. 여기 봐요. 내 입술 퉁퉁 부은 거 보이죠?”
“…….”
아, 그러니까 이 타이밍에서 왜 다시 눈빛이 야릇해지는 건데.
나는 루시안이 다시 내게 다가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동물까지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가야죠.”
“다음 단계라면…….”
“사람이요.”
루시안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도 그럴 게 사람은 동물과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나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고, 교감을 하고, 미소를 짓는다.
루시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은빛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는 게 싫어요. 당신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도 싫어요. 하지만…….”
“…….”
“노력해 볼게요. 니아,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으흑. 루시안이 흑화했다며 걱정했던 아빠, 에스텔,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 다들 보셨어요?
우리 루시안이 달라졌다고요!
나는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루시안의 각오와 별개로 사람을 데리고 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오랜 시간 루시안의 섬뜩한 눈빛을 받아 내야 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엉엉 울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며 도망가 버리겠지.’
게다가 혹시, 정말 호오오옥시 루시안이 분노를 참지 못했을 경우 생기는 위험 부담도 생각해야 하고.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악마의 눈빛을 견뎌 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스텔이 가장 적격이지만…….’
에스텔을 또 이곳까지 왔다 갔다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에스텔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여러 위험을 감수하고도 이 일을 맡아 줄 만한 정신 나간 사람이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왜 그가 떠올랐는가.
“그러니까 왜 또 나야?”
“그야 당신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죠.”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당신도 루시안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을 거 아니에요, 쿤.”
“……그거야 그렇지만.”
쿤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안 그러는 척해도 엄청난 루시안 덕후잖아. 에스텔에게도 몇 번이나 찾아가서 루시안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지.’
그런 쿤이었으니, 나와 루시안을 도우러 와 달라는 말에 이토록 재빨리 여기까지 와 준 것이다.
쿤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현재 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급하게 만든 그의 변신 복장이었다.
나는 흡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꼭 유령 같아요. 거슬리는 얼굴도 안 보이고.”
“이봐.”
쿤은 이를 으드득거렸지만, 나는 절대 그의 온몸을 덮은 커튼을 벗겨 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루시안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사람 얼굴이 알짱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마치 커튼이랑 대화하는 것 같을 거야.’
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던가.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본 루시안을 보고 히익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루시안의 얼굴은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광채가 돌았다.
루시안이 치솟는 감정을 꾹 내리누르는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니아. 더는 못 참겠어요. 당장 저자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어.”
“안 돼요, 루시안. 참아야 해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쿤이 끼어들었다.
“나 도망가면 안 될까?”
“안 돼요!”
나는 똑 부러지게 소리쳤다.
내 기세에 쿤은 한 마리의 유령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루시안은 내 두 손을 꼭 잡고, 제 안에서 튀어나오려는 흑염룡을 억누르는 듯 숨을 후욱 내쉬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말했다.
“이제 됐어요.”
그와 동시에 루시안이 나를 꼭 품에 안았다. 나는 바들바들 떠는 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잘했어요. 대견해.”
그리고 쿤에게도 말했다.
“고마워요, 쿤. 이만 나가 보세요. 진짜 끔찍한 꼴을 당하기 전에.”
멍하니 나와 루시안 쪽을 바라보던 쿤이 하, 하고 웃더니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와, 진짜 니들 가관이다.”
다행히 그는 눈치가 빨랐다.
루시안을 더 자극하기 전에 그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나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아직 제 감정을 다 억누르지 못한 것 같았다. 루시안은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내 얼굴을 매만졌다.
“니아, 니아.”
아이처럼 조르는 목소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루시안에게 내건 보상이었다.
사람, 그것도 쿤과 내가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루시안에게 엄청난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약속한 건 무조건 지켜야 해.’
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루시안이 목줄이 풀린 개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자, 잠깐만……!”
성급하게 달려드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루시안의 입술은 너무나 부드럽게 내 이마 위에 닿았다.
그렇다. 내가 루시안에게 오늘 주기로 한 보상은 바로 입맞춤이었다.
지금까지처럼 내가 그에게 하는 입맞춤이 아니라, 그가 내게 하는 입맞춤.
‘으, 떨려.’
그의 신체의 한 부분이 내게 닿는 것뿐인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입을 맞추었다.
눈썹 위에,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는 감은 눈 위에, 코끝에, 두 개의 귀 위에.
“으읏.”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귀에 닿은 그의 입술이 너무 간질거려 소리가 새어 나왔다.
루시안은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는 듯 쿡쿡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여기까지라면 적당히 설렘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루시안의 입술이 내 입술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목 위를 미끄러졌다.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목에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루, 루시안!”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쇄골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소리쳤다.
“거기까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엄하게 말했다.
“입맞춤은 딱 10번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지금 10번 딱 채웠어요.”
“…….”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들키면 안 돼. 내가 지금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당당해야 해.
루시안은 한참을 눈을 마주치더니 말했다.
“알겠어요.”
그제야 쇄골에 닿아 있던 그의 입술이, 아쉬움을 가득 표현하며 떨어졌다.
루시안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지켰어요. 그러니 니아도 약속을 꼭 지켜야 해요. 쿤을 참는 훈련을 해낼 때마다 입맞춤을 할 수 있는 숫자를 늘려 준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먼저 그런 보상을 제시한 건 나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 몸 곳곳에 입맞춤을 할 줄은 몰랐다고!
그저 뽀뽀나 열 번 할 줄 알았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루시안은 아쉬움이 가득 남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내일이 기대돼요.”
세상 야하게 웃는 남자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 안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입을 맞추려는 생각이야?
……싫은 건 아니지만.
* * *
그 후로 훈련은 원활하게 진행이 됐다. 커튼을 뒤집어쓴 유령 모드의 쿤과 나는 루시안의 앞에서 대화를 했고, 루시안은 점차 차분하게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흠흠. 물론 훈련이 끝난 후 보상은 철저히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오늘은 쿤이 커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지금까지 사실 쿤은 일개 유령일 뿐이었다. 커텐을 벗어던지고 사람의 모습을 한 쿤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루시안의 시각을 자극시킬 것이다.
의자에 앉은 루시안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
“…….”
잠시 후 루시안은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을 향해 말했다.
“쿤,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이 열리고, 쿤이 들어왔다.
들어선 쿤의 모습에 나와 루시안은 돌처럼 굳었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뭐, 뭐예요. 그 꼴은?”
“정식으로 카르디엔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잖아. 아무래도 갑자기 진짜 내 모습을 보여 주면 너무 자극이 심할 것 같아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쿤은 지금 여장을 하고 있었다. 찰랑이는 머리 장식과 반짝이는 액세서리. 게다가 화려한 드레스까지.
쿤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봐 줄 만하지? 카르디엔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을 거야.”
절대 아닐 것 같은데요.
내가 루시안이면 당장 쓱싹했다.
그러나 다행히 힐끗 바라본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아니. 쿤이 무슨 꼴을 하고 있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괜찮은 건가.’
나는 속으로 안도를 하며 쿤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오늘은 딱 5분간 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루시안으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멀쩡한 인간과 내가 대화를 하는 모습이었다.
굳이 루시안을 자극할 만한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소한 대화면 됐다.
나는 쿤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여장이 잘 어울리긴 하네요.”
“내가 좀 곱상하잖아.”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거 창피하지 않아요?”
“진실을 말하는데, 왜?”
나는 경멸 어린 눈으로 쿤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역시 열 받아.
내 모습을 본 쿤이 키득거렸다.
“여전하네. 역시 카르디엔에게 조종당한다는 말은 소문이었구나.”
황당한 말에 나는 눈썹을 모았다.
“누가 그렇게 끔찍한 말을 해요?”
“기껏 성녀의 힘으로 카르디엔의 손에서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가, 다시 카르디엔에게 가 버렸잖아. 그러니 수도에는 별별 소문이 나돌았어.”
“…….”
“카르디엔이 악마의 힘으로 널 조종했다든가. 혹은 니가 카르디엔의 악마의 힘에 매혹당했다든가. 혹은……”
쿤이 생각만 해도 웃긴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니가 카르디엔을 사랑해서 제 발로 돌아갔다는 말까지.”
“어머. 뜬구름 잡는 소문만 있었던 건 아니네요.”
“나는 그 말이 제일 뜬구름 잡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는 쿤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근성이 있단 말이지.”
“근성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 주실래요?”
“그러니까.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어떻게 저런 놈을…….”
쿤의 눈이 커졌다. 나는 쿤의 시선을 바라보고, 헉하며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은 루시안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루시안은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안광이 섬뜩했다.
쿤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봐. 저거 위험한 거 아냐?”
그 순간, 루시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향해 이동한 것이었다.
내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루시안이 쿤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고 있었다.
루시안은 맨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흉악한 무기였다.
그러나…… 콰앙, 하고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루시안의 손이 튕겨져 나왔다.
쿤이 걸고 있는 새하얀 목걸이에서 나온 빛 때문이었다. 그건 칼릭스에게 부탁해 받은 황실의 보물이었다.
오래전 대마법사가 만들었다는 보물은, 차고 있으면 어떤 물리적인 힘도 막아 낼 수 있다고 했다.
보물의 가호를 받은 쿤은 멀쩡했다.
하지만, 쿤이 서 있던 바닥과 벽은 아니었다.
루시안이 그저 손짓 한번 했을 뿐인데, 바닥이 패었고 벽에 붙어 있던 장식물들은 모두 박살이 나 버렸다.
루시안은 눈을 번뜩이며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제 앞에서 휘둘러지는 엄청난 힘에 쿤이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 좀 어떻게 해 봐!”
아무리 보물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해도, 눈앞에서 저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를 보는 건 끔찍한 일이다.
무엇보다 보물이라도 힘의 한계가 있을 테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됐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루시안을 붙잡았다.
“그만둬요, 루시안!”
내 손이 닿는 순간, 루시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그의 숨은 여전히 거칠었다. 루시안이 섬뜩한 눈으로 대답했다.
“놔줘요, 니아. 저자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어요. 귀를 뭉개 버리고, 입을 찢어 버릴 거예요.”
“그럼 절대 안 돼요!”
“왜요? 감히 당신을 쳐다봤잖아요.”
“……!”
그 순간 나는 엄청난 절망을 느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아니야. 예상했잖아.’
나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루시안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 짓 하면 싫어요.”
“…….”
“미워할 거예요.”
“…….”
“나의 루시안은 내 말을 들어줄 거죠?”
조금씩 조금씩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가 평온해졌을 때는 어느새 쿤이 사라진 후였다.
루시안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고작 몇 초간, 루시안은 이성을 잃었다. 그러나 피해는 컸다.
루시안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엉망이 되어 버린 방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그의 얼굴을 잡고 말했다.
“괜찮아요.”
“…….”
“내가 너무 당신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어요.”
“…….”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노력해 줘서.”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루시안을 껴안았다.
진심이었다.
지금의 나는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저 그를 사랑할 뿐이었다.
* * *
새벽녘. 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화장을 지운 맨얼굴로 잠든 그의 모습은 한없이 편안해 보았다.
비록 몇 초나마 생명의 위협을 받는 큰일까지 겪었으니 잠이 솔솔 왔다.
그런데 누군가 쿤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쿤은 모르는 척하고 눈을 꾹 감았다.
그는 남을 위해 애써 잠에서 깨어날 만큼 호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귓가에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일어나십시오, 쿤.”
아침 녘,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생각나는 맑은 목소리를 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쿤은 눈을 뜨고 헉, 하고 비명을 질렀다.
루시안이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쿤은 황급히 목걸이를 확인했다. 황실의 보물을 손에 꽉 쥐고 쿤이 말했다.
“아까 봤지?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나한테 손댈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재수 없어도 못 죽인다고.”
반은 허세였다.
칼릭스가 보물을 건네며 했던 말이 있다.
[아무리 강력한 마력을 가진 보물이라도 완벽한 건 아니다. 일정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부서져 버리지. ……. 과연 이걸로 카르디엔의 힘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군.]황태자의 말대로였다. 아까 전 루시안의 폭주로 보물은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루시안이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보물은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박살이 나 버리겠지.’
루시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기는 하지만요.”
“와, 그렇게 말해 주니 엄청 고맙네.”
루시안의 눈빛은 섬뜩하긴 했으나, 적어도 아까처럼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았다.
‘페르니아가 없어서 그렇구나.’
그녀가 얽힌 문제가 아니라면 루시안은 생각보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쿤은 조금 안도를 하며 몸에 힘을 뺐다.
“그래서. 이런 야밤에 왜 나를 찾아온 거야?”
쿤의 말에 루시안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루시안은 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그래서 그의 실력이 얼마나 유능한지 알았다.
쿤은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도 대단했지만, 약을 제조하는 실력도 뛰어났다. 그는 종종 마법사가 아닐까 싶을 만큼 신기한 약을 만들기도 했다.
그 약도 그중 하나였다.
계속된 전투로 인해 병사들 몇몇의 정신이 이상해졌다. 그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잠도 자지 못하고, 잔혹한 폭력을 드러냈다.
“전쟁터에서 당신이 만든 약을 복용한 병사들이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찼았죠.”
“그랬지.”
“그러니 내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약도 만들 수 있겠죠?”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쿤의 눈이 커졌다.
‘날 이곳까지 오게 한 이유가 그거였구나.’
사실 쿤은 이곳으로 와 달라는 페르니아의 연락을 받았을 때 의아했다.
그녀가 수많은 사람 중 자신을 택한 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자신을 골랐는지는 쉽게 알아챘으니까.
쿤이 의아했던 건 루시안이 그것을 허락했다는 사실이었다.
루시안에게 있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거슬리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니던가.
그 의혹이 지금 풀렸다.
쿤은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안이 제게 원하는 것이 있다고 밝힌 지금, 더는 그에게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쿤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네. 너 지금 되게 행복해 보이는데.”
쿤은 이곳에 왔을 때 루시안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전에 보았던 루시안과는 확연히 달랐다.
온화했던 얼굴은 사라졌다. 붉은 눈동자는 섬뜩하게 빛났다.
그럼에도 그는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비로소 페르니아를 온전히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페르니아가 괜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루시안은 누구보다 현 상태를 만족해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그가 왜, 페르니아가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있게 노력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처음에는 루시안이 적당히 페르니아의 비위를 맞추려는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예측이었다.
‘카르디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어 하고 있어. 꼴 보기도 싫은 내게 이런 도움을 청할 정도로 말이야.’
그 점이 쿤을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기 때문이다.
쿤은 반질거리는 눈빛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의외로 필사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쿤은 그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며 말했다.
“전쟁 때 병사들에게 먹였던 약은 일종의 진정제야.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어 비정상적으로 흥분한 상태를 가라앉히는 거지.”
“제게도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쿤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악마의 힘이다 뭐다 하지만, 결국 너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잖아. 큰 확률로 효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이 돼. 물론 병사들에게 주었던 약보다 훨씬 강력하게 제조를 해야겠지만.”
원하던 대답에 루시안이 눈빛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쿤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정도로 강한 약이면 아무리 너라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환각이나 환청이 들릴 수도 있고, 자칫 몸에서 거부 반응이 와서 내장이 망가질 수도 있지. 그래도 괜찮아?”
꽤 섬뜩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안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쿤은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눈빛은 약의 부작용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뭐, 애초에 그런 걸 겁내는 놈은 아니었지.’
악마의 힘이 개화되기 전에도, 루시안은 겁 없이 수천 명의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그의 모습은 놀라웠다.
쿤이 기이한 것을 바라보는 얼굴로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 가만히 있으면 네가 바라던 대로 페르니아를 독점할 수 있잖아.”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쿤의 말이 맞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 페르니아는 제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루시안이 정말 안 될 것 같다고 한다면, 그녀는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 줄 것이다.
그의 옆에 있어 줄 것이다.
누구도 보지 않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온전히 제 소유가 된 채.
하지만…….
[정말 잘했어요.] [루시안이 최고예요.] [사랑해요.]페르니아가 그렇게 웃어 줄 때마다, 가슴에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녀를 더 기쁘게 해 주고 싶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
루시안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쿤은 지금 보는 루시안의 얼굴만으로 그의 대답을 알았다.
‘상태가 좋아진 게 아니라 더 나빠진 거였잖아.’
한결같은 루시안의 소유욕에 새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내게는 좋은 기회지만.’
쿤은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좋아. 약을 지어 주지. 그런데 무료로 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물론입니다.”
루시안은 쿤이 어마어마하게 바가지를 씌워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돈이란 큰 의미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쿤이 내뱉은 대가는 의외의 것이었다.
“그럼 — —-해 줘.”
쿤의 말을 들은 루시안은 눈빛으로 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서늘한 바라보았다.
그러나 쿤의 얼굴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아쉬운 건 그쪽이니까.’
루시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잠시 후 루시안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쿤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거래 성립.”
쿤이 루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루시안은 그 손을 말끔히 무시했다.
대신 서늘한 협박을 한마디 남겼다.
“제대로 약을 만들어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살려 둘 이유가 없어요.”
쿤은 저도 모르게 목걸이를 잡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미친놈은 역시 미친놈이었다.
‘나도 같은 미친놈이라 할 말은 없지만.’
* * *
루시안이 쿤에게 폭주하며 달려든 날로부터 나는 며칠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중얼거렸다.
“오늘쯤이면 다시 시도해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날 보았던 루시안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의 질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거셌고, 그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무리를 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해.’
자칫하면 쿤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만다.
무고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루시안에게도 끔찍한 죄의 낙인이 찍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당분간 수도에 돌아가는 건 포기하자.”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기로 했잖아.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느 때처럼 방에 들어온 사람은 루시안이었다. 그리고…….
“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다른 사람과 함께 내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쿤이 나를 향해 키득거리며 말했다.
“카르디엔이 먼저 말했어. 나보고 함께 너를 보러 가자고.”
“정말요?”
믿기지 않는 말에 나는 입을 막으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쿤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쿤.”
“벌써 한낮이야. 웬 아침 타령.”
나는 쿤의 재수 없는 반응을 무시하며 루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우와아.’
나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으며 쿤에게 조금 더 들이대 보기로 했다.
나는 한 발짝 가까이 쿤에게 다가가 눈을 맞췄다.
“그런데 눈 화장이 번졌네요. 기껏 열심히 가르쳐 줬는데 이런 꼴이라니 실망이에요.”
“헐, 진짜야?”
“네. 왼쪽이 조금.”
“제기랄. 화장품을 바꿔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한번 루시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아까보다 표정이 살짝 굳기는 했으나 여전히 평온했다.
‘세상에나! 혹시 이런 것도 되는 건가?’
조심스럽게 쿤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어디 한번 봐요.”
그 순간 루시안이 엄청난 속도로 내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더는 안 돼요, 니아.”
“…….”
루시안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 붉은 눈동자도 섬뜩했다.
그럼에도 그때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폭주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적어도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껏 흥분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좀…….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설마 나 몰래 단둘이 특훈이라도 한 거예요?”
“……비슷합니다.”
“그랬구나.”
어떻게 그런 깜찍하고 기특한 생각을!
나는 루시안을 안으며 소리쳤다.
“진짜 대단해요. 역시 나의 루시안이 최고야! 예뻐! 멋있어!”
내 칭찬에 두 볼이 살짝 붉어진 루시안의 뒤로 쿤이 입을 삐죽였다.
“나는? 내가 도와준 덕분이라고.”
“루시안, 짱짱맨! 대존멋! 존잘탱!”
쿤은 괴상한 주문을 외는 나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만.”
나는 쿤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루시안에게 물었다.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거예요?”
“아마도요. 쿤을 참아 냈으니 다른 사람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암, 그렇겠지.
레벨로 따지자면 쿤은 엄청난 하드코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는 성에 있는 고용인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어 볼게요. 그래도 괜찮겠죠?”
성에는 루시안과 나를 돌봐 주는 몇몇의 일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루시안이 내가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참아 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을 극복(?)했다면, 그들 정도는 무던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안은 선뜻 내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런데 니아.”
“네?”
루시안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위험한 짐승처럼 눈을 내린 깐 그는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노력해 줬으니 상을 줘야죠.”
“아……!”
그가 원하는 바를 깨달은 나는 귀 끝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발가락까지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잠깐!”
쿤이 질린 얼굴로 나와 루시안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희들, 또 내 앞에서 몹쓸 커플 짓을 하려는 거지. 그따위 것 구경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내가 나간 후에 해.”
그러더니 쿵, 하고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이스, 쿤.
저런 면은 참 마음에 든다니까.
나는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다시 감정을 가다듬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이 두 번째 훈련이니, 열한 번의 입맞춤을 허락해 줘야 맞지만…….”
나는 째째한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줄 때는 팍팍 주는 여자 친구란 말씀.
“루시안이 노력한 덕분에 한 번에 진도가 엄청 나갔으니까……. 열두 번의 입맞춤을 허락해 줄게요.”
그 말에 루시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너무 적어요.”
“그럼 열세 번?”
“니아.”
그가 보기 드물게 엄한 목소리를 내며 나를 다그쳤다.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무서운데 귀엽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눈빛을 또렷이 하고 물었다.
“그럼 루시안은 몇 번의 입맞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원하는 만큼요.”
이 양아치!
대뜸 횟수 제한을 풀어 버린 루시안의 말에 나는 정색했다.
“말도 안 돼요. 그런 걸 허락했다가 언제 끝날 줄 알고요. 1년 내내 멈추지 않고 뽀뽀만 한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예요.”
루시안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끌리는 제안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당신이 너무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루시안이 내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마주쳤다.
“당신이 배가 고프기 전까지만 입을 맞출게요.”
“…….”
“네?”
와, 씨.
너무 섹시해서 욕이 나갈 뻔했다.
어찌하여 내 남자 친구는 미쳤어도 이렇게 섹시하단 말인가. 아니. 미친 후에 오히려 섹시 포텐은 더 강력해진 것 같다.
나는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점심을 먹은 지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해가 질 때쯤에나 배가 고플 것이다.
그러니까 저건 무리한 요구야.
어차피 루시안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내뱉은 말은 아닐 거야. 일단 가격부터 올려 치고 그 뒤에 딜을 해 보려는 속셈이지.
내가 깎을 것을 계산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좋아요.”
흑흑.
그러니까, 흑화한 서브 남주의 섹시 파워는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의 이성 따위를 쉽게 박살 내 버리는 법이다.
꼭 지금처럼.
* * *
다음 날, 쿤은 짐을 꾸렸다.
“이제 날 이용할 만큼 이용했잖아. 카르디엔이 어떤 상태인지도 직접 눈으로 봤으니 이제 가 볼래.”
나는 루시안과 함께 쿤을 배웅했다.
쿤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온몸을 꽁꽁 싸맸네?”
그의 말대로 나는 목까지 덮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목이 훤히 드러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좀 추워서요. 감기 기운도 좀 있는 것 같고.”
“아~ 그렇구나~”
쿤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눈치가 백단인 놈이라 내가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온몸에 어제의 흔적이 여실히 남았기 때문이다.
‘특히 쇄골 주변의 키스 마크는 너무 선명해서 도저히 목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을 수가 없었어.’
다행히 쿤은 ‘어젯밤 뜨거웠었나 봐.’ 같은 저질스러운 희롱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의 행보를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야?”
“루시안이 감정 제어를 확실히 할 수 있게 되면, 수도로 돌아갈 거예요.”
“수도?”
“그래요. 언제까지 이곳에 단둘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쿤은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모았다가 말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게 가능하겠어? 네가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수도에 들렀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루시안이 흑화했다는 소문은 수도에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루시안에 대한 존경이 깊은 평민들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귀족들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루시안을 탐탁지 않아 했던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시안을 깎아내렸다.
카르디엔은 끔찍한 악마가 되어 버렸다!
개중에 당장이라도 루시안을 죽이러 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라면 루시안을 수도에 데리고 가 보았자 좋을 꼴은 못 볼 것이 뻔했다.
아무리 루시안이 상태가 좋아지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쿤이 수도에 들렀던 건 몇 주 전이잖아요.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내 말에 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사이 무슨 수를 쓴 거야?”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쿤은 하, 하고 기가 찬 듯 웃더니 말했다.
“의외로 머리가 좋단 말이지.”
“어머, 말은 바로 해요. 의외가 아니라 역시나겠죠.”
“하여간, 뻔뻔해.”
“당신만 할까요.”
마지막까지 지지 않는 나를 향해 질린 얼굴을 한 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고마웠어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
쿤은 고개를 숙인 날 보더니 중얼거렸다.
“카르디엔을 위해서라면 넙죽넙죽 고개를 잘도 숙이는구만. 명색이 귀족 아가씨인 주제에.”
그러더니 어깨를 움찔하며 황급히 말 위에 올라탔다.
“난 이만 가 볼게. 조금만 더 너와 노닥거렸다가는 카르디엔이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것 같거든.”
좋은 결정이었다.
나도 옆에 서 있는 루시안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툭툭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다가 등 뒤에서 칼 맞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흥. 너야말로 카르디엔을 잘 간수해. 조금만 방심했다간 언제 사람을 물어뜯을지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재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쿤은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잠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이 레이저빔이라도 나올 것 같은 눈으로 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으아. 위험했네.’
나는 황급히 루시안에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참 잘했어요!”
* * *
오늘은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 겨울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겨울 연회 준비로 황성은 정신이 없었다.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 황성에 있는 모든 연회장이 개방됐고, 수많은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연회장을 꾸몄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 연회장 곳곳에서 반짝였고, 향긋한 술과 알록달록한 음식이 세팅됐다.
바쁘게 움직이는 곳은 연회장만은 아니었다.
연회의 주최자인 황성의 주인, 황제의 준비도 대단했다.
황제는 수십 명의 시종에게 둘러싸여 치장 중이었다.
그의 옆에는 그와 꼭 닮은 아들인 황태자 칼릭스가 서 있었다.
시종들에게 몸을 맡긴 채 황제가 입을 열었다.
“루시안과 페르니아가 정말 오늘 연회장에 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칼릭스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얼마 전 에스텔이 찾아와 요청했다.
루시안과 페르니아가 수도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니 두 사람에게도 겨울 연회의 초대장을 보내 달라고.
루시안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에스텔이 그런 부탁을 하다니.
황제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에스텔의 눈빛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평온했다.
그래서 황제는 루시안과 페르니아에게 겨울 연회의 초대장을 보냈다. 놀랍게도 참석하겠다는 답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이 놓인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루시안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섬뜩하고 싸늘했지.’
미친 자의 눈이었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루시안이 원상태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믿을 수 없었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사제들과 기사들까지 준비시켰으나 불안함은 가시질 않는구나. 이번 연회 때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하니 말이다. 혹시나 루시안이 사고를 친다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 될 거야.”
걱정이 가득한 황제와 달리, 칼릭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에스텔이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황제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기껏 제국의 지배자로 낳아 주었더니만 아들은 훌륭한 에스텔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에스텔의 말이라면 똥이 복숭아 잼이라고 해도 먹을 기세였다.
‘그나마 빠진 여자가 에스텔이라 다행인 건가.’
그렇지 않았다면 아들은 역사상 가장 한심한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에스텔이라면 마음 놓고 아들을 조종하게 둘 수 있었다.
그만큼 황제는 에스텔을 믿었다.
‘어마마마는 아닌 모양이지만.’
황태후는 황제가 루시안과 페르니아에게 초대장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다.
[아무리 성녀가 부탁했다고 한들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요. 카르디엔의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까. 악마라는 말이 도는 이가 어떻게 신성한 황성에 들어오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반대요!]결국 황태후는 오늘 연회에 불참했다.
표면상으로는 몸이 좋지 않아서였지만, 진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루시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마마마도 참. 지금까지 루시안을 잘못 본 것 같다며 웃으실 때는 언제고, 그렇게 휙 하니 돌아서시다니. 하여간 변덕스러운 분이야.’
어쨌건 황제로서는 황태후가 참석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루시안이 연회장에 나타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멀쩡한 상태로 나타난다고 한들, 그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려고 할 텐데.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로군.’
황제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칼릭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황제의 생각과 달리 칼릭스는 완전히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영혼까지 에스텔에게 사로잡혔을지언정, 칼릭스는 여전히 영민한 황태자였다.
그가 이토록 여유로운 것은 단순히 에스텔이 괜찮다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 겨울 연회는 루시안과 페르니아가 성공적으로 돌아올 무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준비를 해 두었으니까.
* * *
겨울 연회가 시작됐다.
연회장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리고 부채를 살랑이는 공작 부인. 그녀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멋지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공작.
그러나 화려하게 꾸민 모양새와 달리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황제가 직접 초대했다는 기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안 때문이었다.
이제 수도에서 루시안이 악마가 되어 버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많은 귀족들은 루시안이 언제 수도로 쳐들어와 흉악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그것은 겨울 연회의 화려함으로도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나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께서 납시옵니다.”
“황태자 전하 납시옵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귀족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칼릭스가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단상에 마련된 황금 의자에 착석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제야 귀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단상에 앉아 있는 황제와 칼릭스를 본 귀족들의 눈빛에 깊은 존경심이 어렸다.
인자한 얼굴에도 위엄이 넘치는 황제와, 18살이란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 못지 않은 기운을 가진 황태자.
제국의 현재와 미래가 얼마나 밝은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황제가 말했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 귀한 이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니 정말 기쁘군. 올해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드넓은 제국의 역사에 녹록한 해가 없다지만, 여러모로 올해는 더 의미가 있었다.
“일단 짐이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병환을 이겨 냈다.”
황제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언제고 기회가 생기면 황제를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던 야심 있는 귀족 몇몇을 빼고는, 귀족 대부분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그들은 성군으로 손꼽히는 황제가 건강을 되찾아 정말 기뻤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이어졌던 분쟁 지역이 완전히 정리됐다. 이로써 제국은 또 다른 곳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
그 말에 거짓말처럼 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물론 분쟁 지역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몇 번이나 축배를 들어도 모자를 만큼.
그러나, 그것을 해낸 이가 카르디엔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카르디엔은 한때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사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악마의 저주를 받은 두려운 존재일 따름이었다.
조용해진 귀족들 사이로 손을 든 것은 가르시안 후작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후작가의 가주가 된 대단한 야심가였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말이 나왔으니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카르디엔 경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연회장에 있는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차마 황제에게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루시안을 향한 황제의 애정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개의치 않듯, 가르시안 후작이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분쟁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반란군을 전멸시킨 것은 제국군이 아니라, 카르디엔 경 한 명이라고요. 아무리 카르디엔 경이 훌륭한 기사라고 하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요.”
황제는 내리깐 눈으로 가르시안 후작을 바라보았다.
가르시안 후작은 말을 이었다.
“카르디엔 경이 악마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자칫하면 제국 전체의 안전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 일은 제대로 공론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황제 폐하의 눈치가 보여서요.
제아무리 패기 넘치는 가르시안 후작이라도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그의 눈빛에는 황제를 향한 비난이 어려 있었다.
가르시안 후작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저희에게 확실한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카르디엔 경은, 악마가 된 것입니까?”
“…….”
황제는 영민했다.
가르시안 후작뿐만 아니라,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순간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다.
안 그래도 황제가 루시안의 일을 쉬쉬하여 귀족들의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마저 대답을 회피한다면, 그들의 불만에 불을 지필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혹시나 루시안이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황제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어쩐다…….’
황제가 고뇌하는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새벽바람처럼 청량한 목소리에 황제도, 가르시안 후작도, 그리고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도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 입구에 들어선 이들을 본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수많은 이들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존재가 서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그의 곁에 페르니아가 있었지만, 그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티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제복을 입고, 붉은 눈동자를 루비처럼 반짝이는 루시안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누구도 악마라고 비난할 수 없을 정도로.
페르니아와 함께 걸어온 루시안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충실한 검, 루시안 카르디엔.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 * *
“페르니아 라일락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루시안의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나도 재빨리 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인사를 하나 마나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것에 어떤 불만도 느끼지 못했다.
‘후후. 그럴 만도 하지.’
이날을 위해 루시안의 미모 가꾸기에 엄청난 열을 올렸으니까.
세상은 미인에게 관대하다!
아무리 흉악한 소문이 났다고 해도, 루시안이 세상 청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모두 셧 업 마우스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였다.
힐끗 시선을 돌려 바라본 사람들의 얼굴은 경멸이나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는 영혼이 잠시 탈출한 듯 입을 벌렸고, 또 누군가는 황홀한 얼굴로 입을 막았다.
(몇몇은 입을 막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까지 했다.)
어떻게 봐도 루시안에게 뿅 간 얼굴들이었다.
그것이 흐뭇해 흐흐하고 음산한 미소를 짓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두 사람 모두 잘 돌아와 주었다. ……루시안. 몸은 이제 괜찮아진 거냐.”
나는 그 말에 얽힌 속뜻을 읽을 수 있었다.
‘집 나갔던 정신이 좀 돌아왔니?’
루시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 말의 속뜻도.
‘적어도 정신이 회까닥 돌아 황제의 머리통을 깨부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눈치 빠른 황제는 루시안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에 남아 있던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말 다행이구나.”
황제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황제가 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페르니아.”
“네.”
“고생이 많았다.”
“……!”
“카르엔이 이만큼 좋아진 것은 모두 너의 극진한 간호 덕분일 테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노력에 존경을 표하고 싶구나.”
어머어머어머. 웬일이야?
생각지도 못한 극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컴백한 루시안을 보고 기뻐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나를 신경 쓸 줄은 몰랐다.
입바른 말은 아니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전보다 깊은 호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살짝 민망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모두 폐하께서 기다려 주신 덕분입니다.”
나 역시 그냥 뱉은 말은 아니었다.
물론 황제에게 서운한 적도 많았다.
잘 있던 루시안을 분쟁 지역으로 가라며 자극한 것도 황제였고, 그게 마음대로 안 되자 협박 아닌 협박으로 나를 등 떠민 것도 황제였다.
그러나 적어도, 루시안을 향한 애정은 진짜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루시안을 기다려 주지 않았을 테니까.
알음알음 번지는 소문까지 막을 순 없었지만, 황제는 루시안이 악마가 되었다는 것을 공표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선언된 사실과 ‘카더라’라는 소문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덕에 루시안과 나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황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서운한 감정은 모두 털어 버릴게요. 한창 내가 루시안에게 갇혀 있을 때 에스텔을 불러와 준 사람도 폐하였으니.’
그렇게 묵은 감정을 정리하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아주 보기 좋아.”
그러더니 가까이 앉아 있던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
“네.”
“관례대로라면 연회의 주최자인 짐이나 네가 연회를 시작하는 춤을 춰야 하지. 허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두 사람에게 그 영광을 넘기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칼릭스의 대답에 루시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내가 알려 준 대본에는 없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 멋대로? 내가 만만해? 죽여 줄까?’
루시안이 희대의 악당 같은 소리를 내뱉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난 좋아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인지 보여 줄 기회잖아요.”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와 루시안은 넓은 홀에 마주 보고 섰다.
황제와 칼릭스, 에스텔. 그리고 세 사람을 포함한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루시안과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속이 조금 뒤틀리긴 하지만 참을 만합니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루시안의 머릿속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알을 하나하나 파내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이었지만, 괜찮았다.
그가 그러지 않을 걸 아니까.
나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얼마 전이라면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해도, 루시안이 참아 내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치열한 훈련으로 루시안은 이제 (거의) 완벽하게 감정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나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이러고 있으니까 꼭 약혼식 날 같네요. 그날도 우리가 주인공이었잖아요.”
“……그렇군요. 그날도 당신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대박 아름다웠죠?”
“네. 그리고 오늘도…….”
루시안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박 아름다워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흑화했다고 해서 춤신춤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스텝은 어설펐고, 툭하면 반대로 몸을 틀고, 움직임은 음악과 반 박자 엇나갔다.
나는 그래서 좋았다.
‘춤 못 추는 거 귀여워!’
‘방금도 박자 놓친 주제에, 그런 적 없는 척 표정 관리하는 거 귀여워!’
‘티 안 내려고 하는데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 난 것도 귀여워!’
하여튼 졸라 귀여워!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박살 낼 수 있는 남자가, 고작 왈츠 하나에 절절매는 모습이 깜찍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루시안에 대한 두려움이 반은 사라질 것이라는.
나의 예상대로였다.
춤이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지 않았다.
두려움은커녕, 아름다운 남자의 깜찍한 재롱 잔치에 한껏 흡족한 얼굴들이었다.
그 사이에 에스텔도 껴 있었다.
예전에 내가 선물해 준 샤넬르의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은 상기된 얼굴로 물개 박수를 쳤다.
박수 타임이 끝나자마자 에스텔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니아 님! 루시안! 정말 보고 싶었어요.”
루시안의 성에 있는 동안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몇 달 만이었다.
“나도요.”
나는 기쁜 얼굴로 에스텔을 껴안았다.
그 순간 에스텔이 긴장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긴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루시안은 질투 어린 눈으로 에스텔의 여린 몸을 붙잡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는 대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에스텔 님.”
워낙에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 티가 덜나긴 했지만, 이전과 비교한다면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에스텔은 마치 울 것처럼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한창 반항을 하다가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중2 아들놈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에스텔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오랜만이야. 루시안.”
힝. 아름다운 장면이야.
눈물이 새어 나올까 봐 코끝을 찡긋거리는데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니아 님. 라일락 후작님을 모시고 오는 건 실패했어요. 저택까지 찾아가 함께 가자고 했는데도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그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에스텔이 꼬드겼는데도 버텼단 말이야? 하여간 고집은.’
내가 제 발로 루시안의 성에 돌아간 후, 아버지는 단단히 삐져 있었다.
편지를 써도 돌아오는 답장은,
따위의 내용이었다.
뭐,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니까.
‘살살 달래서 풀어 주면 돼. 안 되면 말고.’
불효자식답게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말끔히 털어 버리는데, 저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니아 영애.”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진한 화장을 한 이들은 바로 진사모(진한 화장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었다.
나는 반가운 얼굴로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로사사 공작 부인. 마르엔느 후작 부인. 리오 백작 부인. 그란테 남작 부인. 정말 오랜만이에요. 다들 잘 지내셨죠?”
나의 환대에 여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요. 저희는 잘 지냈죠.”
“페르니아 영에께서 분쟁 지역으로 떠난 후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흉흉한 소문만 자꾸 들려오고…….”
나는 그 말에 눈썹을 내려 웃었다.
어떤 소문을 말하는 것인지 대략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악마가 된 카르디엔. 그에게 잡아먹힌, 혹은 홀려 버린 페르니아.
조금씩 변형이 되긴 했지만, 어떤 소문이든 끔찍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리오 백작 부인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역시나 다 헛소문이었어요. 카르디엔 경도, 페르니아 영애도 이렇게 건강하기만 한걸요.”
“맞아요.”
적어도 지금, 그녀들은 루시안이 악마라고 떠들어 대는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해한 얼굴로 서 있었으니까.
(물론 겉모습만 멀쩡할 뿐 마음속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것까지는 여인들이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루시안의 성스러운 미모에 ‘하하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고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부인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우리가 입장하기 전, 황제에게 루시안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남자, 가르시안 후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의 부인이 서 있었다. 에리카였다.
‘그사이 결혼을 했다더니 정말이구나.’
에리카. 나와 에스텔을 괴롭혔다가 본전도 뽑지 못했던, 능력치 형편없는 악역 엑스트라 중 한 명.
후작 부인이 된 그녀는 어정쩡했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높게 올리고, 반짝이는 금은보석으로 온몸을 장식하고, 드레스도 영애 때 입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에리카는 흥, 하고 시선을 돌렸다.
‘계집애. 결혼 전이나 후나 재수 없는 건 똑같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에리카가 아니었다. 나의 시선은 다시 가르시안 후작으로 향했다.
후작은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러분. 이 자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잊으셨습니까? 아무리 천사 같은 미소로 우리를 현혹시킨다 한들, 이 자는 악마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루시안이 악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와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뭐,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으니까.’
악마하고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루시안의 모습에 단번에 경계를 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루시안이 악마가 되어 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루시안이 수만 명의 적군을 학살한 것을 본 수천 명의 병사들이 있었기에, 증거도 없는 뜬 소문이라고 무마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 와 아니라고 부정해 보았자 그들의 의심과 불안감은 커지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맞아요. 루시안은 악마의 저주에 걸렸어요.”
“……!”
그 순간 가까이에 있던 여인들의 얼굴이 경악에 가득 찼다.
가르시안 후작과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카더라’라고 하는 소문과 당사자의 측근으로부터 ‘그렇다’라고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카르디엔이 악마가 되어 버렸다고? 역시 그게 사실이었어?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하는 것 아니야?
수많은 혼란이 뒤섞인 눈빛 속에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나는 애달픈 표정으로 준비한 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이야기랍니다. 루시안은 저주에서 풀려났거든요.”
“……풀려났다고?”
가르시안 후작은 눈을 깜빡이더니 물었다.
“지금, 카르디엔이 교화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의 진실 어린 기도를 들은 신께서 루시안의 영혼을 구해 주셨답니다.”
물론 다 뻥이었다.
루시안은 애초에 악마의 저주를 받지 않았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힘과 성격이 발현된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굳이 그런 말을 왜 해. 괜히 루시안을 없애 버려야 한다는 사람들만 들끓을 텐데.’
루시안이 저주받았던 것은 인정하되,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편이 여러모로 훨씬 좋았다.
가르시안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악마의 저주보다 더 흔하지 않은 이야기가 악마가 된 이들이 교화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악마의 힘을 가진 이들의 말로는 처참했다.
사제나 성녀의 손에 죽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교화보다는 처단이었다.
그러니 가르시아 후작은 이곳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자신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었다.
‘저런 유치한 거짓말을 믿을 리 없지.’
라고.
그러나 가르시안 후작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역시 그런 거였군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소리친 사람은 바로, 가까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오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페르니아 영애께서 카르디엔 경의 성으로 제 발로 찾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실 저도요.”
“저도.”
이보세요들. 아까까지만 해도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면서요.
그러나 나는 몇 분 만에 말이 바뀐 여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내뱉을 말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리오 백작 부인이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정말이지 아름다운 사랑이에요. 마치 그 소설 같아요.”
‘소설’이라는 말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몇 달 전 출간이 되자마자, 수도의 여인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휩쓴 소설.
번개처럼 나타난 신예 작가, 에릭스가 쓴 초대박작이었다.
리오 백작 부인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남자 주인공인 기사가 저주를 받아 악마가 되어 버리잖아요.”
옆에 있던 그란테 남작 부인이 말을 받았다.
“여자 주인공을 납치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죠. 평민이 감히 넘볼 수도 없다며 애절하게 바라만 보던 귀족 아가씨를 데리고 가 자신의 성에 가두어 버리다니.”
다른 여인들이 너도 나도 이야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저러면 당장 사형감인데, 소녀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더라고요. 남자 주인공이 나올 때마다 작가가 장장 3페이지에 걸쳐 묘사를 할 만큼 엄청난 미남이라서일까요.”
“그런가 봐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남자 주인공을 보고 그제야 여자 주인공이 제 마음을 깨닫잖아요.”
여인의 입술이 기사의 입술 위에 닿는 순간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이 울먹이는 얼굴로 입을 뗐을 때, 기사는 다시 눈을 떴다.
눈물이 가득한 여인을 바라보며 기사가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동시에, 그토록 끔찍했던 악마의 저주가 풀렸다.
여인들은 그 장면의 감동을 떠올리듯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결말이었어요.”
“저는 마지막 장을 읽고 하루 종일 울었답니다.”
“저는 아직도 읽을 때마다 울어요.”
“정말 역사에 남을 최고의 로맨스 소설이에요.”
여인들은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책 하나로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물론 가르시안 후작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그는 일그러진 여인들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설마 지금 소설책 하나를 보고 카르디엔 경의 저주가 풀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귀족 여인들은 네, 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왜. 그럼 안 돼?’
가르시안 후작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여인들을 바라보더니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정신들 차리십시오! 이건 현실입니다. 이 세상에 교화된 악마 따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카르디엔은 여전히 흉악한 악마이며, 어떻게 하면 우리들을 영혼째 잡아먹을까 고민하는 중일 거라고요.”
그러나 그의 말은 어떤 여인의 마음도 흔들지 못했다. 흔들기는커녕 여인들의 눈빛에는 불쾌감이 일었다.
후작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리오 백작 부인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후작님. 사랑하는 여인의 정성 어린 기도로 다시 돌아온 분을 환대하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몰아붙이시다니요.”
“그러니까 그 말은 모두 거짓…….”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스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무슨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가르시안 후작을 향해 웃었을 뿐이다.
눈썹을 내리며, 정말 곤란한 진상이 다 있다는 듯이.
“……!”
가르시안 후작은 눈을 부릅떴다.
성녀는 악마와 반대편에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루시안의 편을 든다는 것은, 그가 악마가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젠장.”
가르시안 후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제도, 성녀도, 여인들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루시안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지금은 루시안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로 넘어가 있었다.
여기서 그가 계속 떠들어 보았자 지지부진한 싸움만 벌어질 것이다.
결국 가르시안 후작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며 꼬리를 내렸다.
“악마는 악마일 뿐, 절대 변할 수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내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저 가면을 꼭 벗겨 낼 테니까!”
전형적인 악당의 엔딩 대사를 내뱉으며 그는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아니 도망가 버렸다.
그의 아내인 에리카와 함께.
그가 떠나자 여인들은 후련한 얼굴을 했다.
“드디어 갔네요.”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되어, 뭐라도 보여 주고 싶은 의욕은 인정하지만 너무 과해요.”
“그러니까요. 카르디엔 경에게 너무 무례했어요.”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저를 둘러싸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일말의 불쾌감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처럼 고요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초연하게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여인들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분명 가르시안 후작님처럼 시비 거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맞아요.”
“페르니아 영애의 약혼자이며, 제국의 영웅이신 카르디엔 경이 계속 그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카르디엔 경을 지켜줘요.”
“좋아요.”
여인들은 다부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루시안 방위대가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는데, 루시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그자. 죽여도 되나요?”
……안 된다니까요.
* * *
그 후로 연회장은 평화로웠다.
나와 루시안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웃으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연회가 끝날 무렵에는 루시안을 향한 사람들의 경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연회 내내 루시안은 온순한 토끼처럼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루시안은 마음속으로 내게 말을 건네는 이들의 혀를 뽑고,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알을 뽑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끔찍한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면 그는 너무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물론, 루시안이 숨기지 못한 감정이 바깥으로 흘러나갈 때도 있었다.
“페르니아 영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이젠 후작가의 도라…….”
단순히 인사를 하러 왔던 그는 제 이름을 다 말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본능적으로 제 목숨을 위협하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느낀 섬뜩한 기운이 루시안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루시안의 모습이 청초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이렇게 오싹하지? 몸이 허해졌나.’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모두가 루시안의 미모에 홀려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루시안의 앞에 선 칼릭스는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흉악한 발톱을 감추고 잘도 얌전히 앉아 있구나.”
루시안은 칼릭스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그런 루시안이 괘씸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흥. 건방지기는.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게 누구 덕인지 모르고 말이야.”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루시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소설, 내가 썼어.”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찡그린 루시안을 향해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아까 귀부인들이 떠들어 대던 그 소설, 내가 쓴 거라고. 네가 돌아왔을 때 여인들이 네 편이 될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말이야.”
“……!”
칼릭스의 충격적인 고백에 루시안의 눈이 부릅떴다.
칼릭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
의 저자 에릭스의 정체는 바로 칼릭스였던 것이다! 빠밤!
나는 칼릭스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루시안이 다시 수도로 돌아갔을 때, 그를 감싸 줄 만한 이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달라고.
그러기 위해 실행했던 것 중 하나가 나와 루시안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책을 출간하는 것이었다.
‘칼릭스가 직접 쓸 줄은 몰랐지만.’
모든 영역에 재능이 있는 천재라고 했던 건 허풍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감격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널 위해서 한 일은 아니니까. 난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거든.”
친구.
그가 지칭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루시안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 순간 루시안의 무표정이 깨졌다. 루시안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가 칼릭스에게 달려들기 전에 손을 썼다.
“상!”
그건 마법의 말이었다.
루시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쏟아질 뻔한 분노를 참았다.
입술을 깨물고 감정을 추스른 루시안을 바라보며 칼릭스가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훌륭한 개가 됐군.”
“……칼릭스. 이리 와요.”
칼릭스는 결국 에스텔에게 끌려나갔다.
그런 사건이 있긴 했지만 어쨌건 성공적인 컴백 무대였다.
* * *
연회가 끝날 무렵 나와 루시안은 성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마지막까지 연회를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가 아니라 루시안이.
우리는 황급히 기다리고 있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말을 해 둔 터라, 마부는 자리에 없었다. 둘뿐인 은밀한 공간에서 루시안이 내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나 잘했어요?”
“응. 정말 잘했어요.”
“그럼, 상을 줘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오늘 니아가 내게 주기로 한 상은 100번의 입맞춤이에요.”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에 뜨거운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안에 어린 감정은 환희였다.
루시안은 내가 주는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를 향한 미소.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건 내게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루시안의 입맞춤은 늘 이마에서 시작하곤 했다.
동그란 이마에 쪽.
감은 눈 위로 쪽쪽.
두 볼에 쪽쪽.
코끝에 쪽.
그리고 입술에 쪽.
내 입술에 입을 맞춘 루시안이 조그맣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워요.”
그리고 한 번 더 쪽.
‘으.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그의 숨결이 온전히 느껴질 만큼 좁은 마차 안이라서일까.
전에 없는 긴장감과 설렘이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자그맣게 루시안을 불렀다.
“루시안, 잠깐만.”
“아직 68번 남았어요.”
고집스러운 루시안의 목소리에는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머지는 조금 후에 이어서 해요.”
“싫어요.”
“이대로 여기서 밤을 지새울 생각이에요?”
“그럼 안 되나요?”
마차에서 입을 맞추다가 밤을 새우자고? 그것 참…… 한 번쯤 해 볼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겨우 루시안을 밀어내며 말했다.
“오늘은 안 돼요. 아버지를 보러 가야죠.”
“…….”
마주친 루시안의 얼굴에는 불만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가 다시 한번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버지가 나를 걱정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속상해요.”
“……!”
“마음이 아파요.”
“…….”
“루시안도, 그건 싫죠?”
이건 내가 루시안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루시안은 달콤한 상에도 약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에도 약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패배한 장군처럼 괴로운 얼굴을 하더니 나를 껴안고 말했다.
“알았어요.”
나는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착한, 나의 루시안.
* * *
나와 루시안은 라일락 후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예상대로 대박 삐져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릴 보고 내뱉은 첫마디가 이랬다.
“뉘신지.”
예상했던 바라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딸과 사위요.”
“난 댁 같은 딸 둔 적 없는데요. 정신 나간 사위는 더더욱요.”
“그러시구나. 그럼 이건 어쩌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위해 기껏 선물을 잔뜩 챙겨 왔는데.”
선물이라는 말에 아버지의 경계가 잠시 풀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버지의 앞에 거대한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카르디엔 영지의 특산품인 다이아몬드예요.”
“흥. 필요 없어. 이런 다이아몬드 따위로 내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나는 굵직한 다이아몬드 한 알을 잡아 아버지의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이거 한 알이면 못해도 5000골드는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5000골드.
아버지가 사랑해 마지않는 로렝스 시계 수십 개는 구입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아버지는 입을 쩍 벌리고 내 손에 들린 다이아몬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황급히 표정을 다잡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조르디 라일락. 그런 것 따위에 흔들리는 속물이 아니다.”
아빠. 대사는 완벽했어요.
몸은 아니었지만.
기개 있는 대사와 달리 아버지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상자를 품에 안고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좋아. 다 넘어왔어.’
준비한 건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분을 풀리게 할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었다.
나는 루시안의 팔을 툭툭 쳤다.
루시안은 아버지 앞에 한 장의 봉투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루시안을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뭔데. 백지 수표? 땅문서? 그런 걸 챙겨온 거라면 소용없어. 나는 정말 그런 세속적인 물건 따위…….”
라며 봉투를 연 아버지의 말이 멈췄다.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바라본 아버지의 눈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대답했다.
“모앙셀 부인의 주소입니다.”
“……!”
아버지는 번개라도 맞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모앙셀.
이름부터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름은 바로…… 아버지의 첫사랑이었다. 코 찔찔했던 어린 시절과 장성한 청년 사이의 풋풋했던 16살을 빛냈던 여인.
아버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자, 자네가 어떻게 모앙셀 부인을 아는 거지?”
“언젠가 제게 이야기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을 하기 전, 스쳐 지나갔던 많은 여자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그녀라고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루시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감동이라는 파도가 밀려왔다.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으흑.”
울먹이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 이거 다 내가 시킨 거예요.’
모앙셀 부인에 대한 정보를 찾은 것은 루시안이었지만, 큰 그림을 그린 것은 나였다.
루시안은 아버지가 모앙셀 부인을 그리워하건 말건 조금도 관심 없었다.
그 증거로 루시안은 타이밍에 맞춰 입꼬리를 한 번 올린 후로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앙셀 부인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품에 안고 길고 긴 이야기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내가 16살, 그녀는 18살 때 우리는 만났어. 모앙셀 영애와 나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버렸지.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만나 매일 같이 사랑을 속삭였어. 그런데 비극이 찾아왔어. 그녀가 외국 남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거야. 나는 그녀에게 말했어. 파혼해요. 내가 성년이 되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 내가 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은 망해요. 미안해요, 조르디. 그렇게 그녀는 내 곁을 떠나 버렸어.”
“…….”
애절한 사랑 이야기였지만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은 건, 너무 자주 들어서 일 것이다.
흐린 눈이 된 내게 루시안이 물었다.
“이제 된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말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루시안은 안도한 얼굴로 설핏 미소 지었다.
“다행이군요.”
절대 아버지를 가리키고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속상하지 않아 다행이다, 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자기를 보고 한 말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루시안의 두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 가슴 아픈 첫사랑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역시 내 사위야.”
“…….”
루시안은 아버지의 접촉이 불편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떼어 놓는 대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앙셀 부인은 지금 혼자입니다. 남편과 사별을 한 지 꽤 되었다는군요.”
“……!”
“재혼 자리가 들어올 때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매일 밤 그리움이란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요.”
아버지의 젖은 눈이 순식간에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아버지는 루시안에게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집사. 당장 떠날 준비를 하도록!”
응접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지, 지금 말입니까?”
“그래. 라잇 나우!”
“밤길이 어둡습니다, 주인님. 날이 밝은 후에 출발하시는 게…….”
“그녀가 1초라도 더 베개를 적시게 할 수 없어! 그러니 당장 마차를 준비해.”
사춘기 소년처럼 눈을 번뜩이는 주인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빨랐다.
아버지는 내가 챙겨온 다이아몬드 몇 알을 잡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럼 다녀오마.”
그렇게 아버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
나는 황당한 얼굴로 아버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루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은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조금도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괸 얼굴은 그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여유 있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루시안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이제, 둘이네요?”
“……!”
루시안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다 받지 못한 상을 이어서 받고 싶어요.”
헐. 이러려고 우리 아빠를 보내 버린 거야?
이것이 바로 계략남이라는 거야?
하, 진짜…….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 나갔다.
입을 막았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루시안의 귓가에 닿은 후였다.
루시안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열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죠. 당신의 방으로.”
* * *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나는 눈을 떴다.
내 눈에 보인 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루시안이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안 잤어요?”
루시안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밤을 샜구나.’
흑화했다고 해서 루시안이 초월적인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팠고, 상처가 나면 고통스러웠고, 잠을 자지 못하면 피곤했다.
그럼에도…….
아침이면 그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면 그는 해사한 얼굴로 대답했다.
[니아가 자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워요.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더군요.](가끔) 코도 골고, 험악한 욕으로 잠꼬대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나는 눈썹을 내리며 두 팔을 펼쳤다.
“피곤해 보여서 안 되겠어. 좀 자요.”
루시안은 기다렸다는 듯 아이처럼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장가도 불러 줄까요?”
루시안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내 새근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살펴보니 루시안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을 보자 심장이 매여 왔다.
어젯밤, 루시안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불만 어린 얼굴로 말했다.
[100번도 부족해요. 손가락에만 입을 맞춰도 20번은 다 채워 버리는걸요.]루시안의 귀여운 칭얼거림에 나는 웃었다.
[원래 조금 아쉬운 편이 더 즐거운 법이래요.]그는 내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나는 아니에요, 니아. 나는 늘 당신의 모든 걸 가지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당신을 놓친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어요. ……그래서 오늘을 참을 수 있었던 거예요.]어둠 속에서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있는 당신의 모습도 보고 싶어졌으니까.]루시안은 내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웃는 얼굴, 소리치는 얼굴, 당황한 얼굴, 장난스러운 얼굴. 내게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다르더군요. 질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내게는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어요.]루시안은 내 손을 입가에 댄 상태로 말했다.
곤란한 듯 두 눈을 휘며.
[미안해요, 니아. 나 아무래도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아요.]그 순간을 떠올리자 얼굴에 다시 열이 올랐다.
‘그저 웃은 것뿐인데 어쩜 그렇게 섹시해 보이던지.’
이번에는 내 차례예요, 라며 그에게 달려들어 뽀뽀 100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정말 그랬다가는 밤새 뽀뽀를 할 것 같아 겨우 참았지만.’
나는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오히려 내 쪽일지도 몰라요.”
루시안의 비상식적인 독점욕이 예전처럼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밀려드는 민망한 생각에 나는 차마 루시안을 바라볼 수가 없어 눈을 꾹 감았다.
* * *
루시안이 눈을 뜬 후, 우리는 늦은 식사를 했다.
앤이 내 방으로 음식을 가져왔다.
앤은 자석처럼 딱 붙어 있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저택의 하인들에게는 주인님이 여행을 떠나시며 카르디엔 님께 아가씨와 집을 부탁하셨다고 말했어요. 카르디엔 님의 방도 따로 정리를 해 두었고요.”
두 분이 이렇게 정답게 붙어 있으니 그 방은 쓸 일은 없겠지만요.
라고 이죽거리는 대신 앤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두 분이 함께 밤을 지새운 것을 아는 사람은 저뿐이랍니다.”
아아. 어쩌면 저렇게 총명한 사람이 나의 하녀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새삼 앤을 향한 존경심과 고마움에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소리쳤다.
“휴가 한 달 당첨!”
“감사합니다, 아가씨!”
우렁찬 앤의 대답에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귀족 아가씨와 그녀를 모시는 하녀치고는 꽤나 훈훈한 풍경이었건만, 루시안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루시안이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니아.”
“단순히 인사를 한 것뿐이에요. 앤과 저는 늘 이렇게 노는걸요.”
“싫어요.”
“…….”
“지금은 일하는 것도,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만 봐요.”
짙은 소유욕이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에 얼굴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 편히 그의 칭얼거림을 받아 줄 수 없는 건, 가만히 서 있다가 못 볼 꼴을 보고 있는 앤 때문이었다.
혹시나 그녀의 양손이 오징어 다리처럼 오그라드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며 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앤은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앤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계세요. 일전에 주인님께서 카르디엔 님의 영지에 다녀오신 후 귀에 딱지가 붙을 만큼 말씀을 하셔서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루시안의 품속에서 꿈틀거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빌어먹을 커플 놈들. 다 죽어 버려.”
하여간, 이 아저씨 딸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 * *
나는 루시안의 품속에 안겨 아기 새처럼 그가 떠 주는 밥을 먹었다.
나는 마지막 한 입을 먹으며 말했다.
“오늘은 좀 바쁠 거예요.”
바쁘다는 말에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심각한 얼굴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이런 얼굴을 할 때마다 움찔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루시안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자연스럽게 펴 주며 말을 이었다.
“가게 재오픈 준비를 해야 해요. 청소도 하고 간판도 닦고 화장품도 새로 구입해서 들여놓아야 하고 할 게 많다고요.”
“천천히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나랑 놀자.
라는 의미가 담긴 루시안의 말은 제법 달콤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어제 연회에서 받은 예약자 명단이에요. 가게 문을 닫은 지 몇 달은 지난지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예약을 했답니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가게 문을 열어야죠. 루시안이 이해를 좀 해 줘요.”
물론 그는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겠지.
또 어떤 상으로 루시안을 설득시켜야 하나 고민하는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오잉 오잉? 웬일이야?
예상과 달리 순순한 반응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이 나를 향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 숍이라면 직원 한 명 정도는 더 있어야겠죠?”
순진한 아이 같기도, 짓궂은 악동 같기도 한 미소였다.
* * *
나는 루시안이 일머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어린 시절이 불우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기보다 허술한 구석이 많은 남자라, 절대로 평범한 일은 하지 못 할 거라고.
……나의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