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5
21.
우아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귀족 여인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앞에 선 아름다운 남자 때문이었다.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우아한 몸짓으로 여인을 향해 인사했다.
“페르니아의 뷰티 숍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작 한마디의 인사일 뿐이었는데 여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저 위험한 존재가 뭔지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여인은 홀린 듯 루시안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섰다.
의자가 줄 맞춰 놓여 있는 공간에는 이미 몇 명의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넋 나간 얼굴로 루시안을 따라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먼저 온 손님에게 화장을 해 주고 계십니다. 차례가 오면 알려 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끄덕끄덕. 그렇게 영혼 잃은 가련한 손님이 한 명 추가됐다.
“기다리는 동안 드십시오.”
루시안이 차 한잔을 제 앞에 내려놓자 여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귀족의 체면도 잊고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웬 품위 없는 행동이냐며 비난할 법도 하건만 그녀의 주위에 앉은 여인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기실을 지나치던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루시안. 무서운 남자!’
루시안은 다시 연 페르니아의 뷰티 숍 1호의 직원이 되었다.
특별히 지정된 업무가 없는 그는 손님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간단한 일을 맡았다.
그것뿐이었는데 파급력은 엄청났다.
“제국 최고의 기사인 카르디엔 경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까요. 워낙에 사람을 피하는 분이셨고, 악마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당했던지라 더는 모습을 보기 힘들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예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예전에는 참 친절하셨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눈빛이 좀 더 차가워지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도 한껏 도도해서는……”
여인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미칠 것 같아요.”
존멋. 존섹. 존잘. 루시안의 활약으로 가게는 대성황이었다.
밀려드는 손님들이 다 들어오지 못해 가게 주변에 옹기종기 서 있을 정도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쓰러지는 내 몸을 안은 건 늘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손님들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고생했어요, 니아. 이제 집으로 가요.”
루시안은 수도로 돌아온 후 계속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저택을 비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진실은 아니었다.
그가 절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서였다.
루시안은 나를 안아 저택에 데려간 후 씻기고, 먹이고, 재웠다.
하루 종일 나를 독점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해소하는 것처럼.
나는 거하게 저녁 식사를 먹고 목욕까지 한 후, 침대 위에 물풀처럼 누워 있었다.
루시안은 내 팔을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가느다란 팔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요. 내가 화장술을 배우면 도움이 좀 될까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안과 눈만 마주쳐도 ‘꺄아!’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들은 그가 화장을 해 준다고 가까이 다가오면 기절해 버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제국 최고의 기사에서 메이크업 전문가로 전직이라니.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요.”
루시안은 그게 뭐 어떻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의 담담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며칠 전, 황제가 가게로 찾아왔다.
황제는 루시안을 보고는 놀란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좋아 보이는구나. 기사단에 돌아올 생각은 없는 것이냐?] [취업했습니다.] [그렇군. 네 사직서는 처리하지 않고 휴직 처리를 해 두었으니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이야기하거라.]루시안은 쌀쌀맞기 그지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끈질기시네요.]그 순간 가게 안이 쏴아아 하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황제는 화내지 않았다.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내뱉었을 뿐.
[짐에게 찾아올 날이 올 거다.]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틀렸다. 루시안은 몇 주일 만에 최고의 고객 만족도를 자랑하는 우수 직원이 되었으니까.
그의 내조가 고마웠지만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복직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해요.”
“니아도 그런 말을 하네요. 제가 옆에 있는 게 싫은가요?”
“그럴 리가요. 다만 기사라는 직책은 루시안이 노력해서 얻은 성과잖아요. 이대로 포기하는 게 아까워서 그러죠.”
나는 심각한 얼굴을 한 루시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소소한 욕심일 뿐이에요. 난 루시안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제야 루시안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는 웃으며 내 몸을 다시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이라는 듯이.
* * *
나와 루시안의 일은 한 단락 해결되었지만, 에스텔은 아직 세브란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특히 신경 쓴 곳은 꽃잔디의 집이었다.
오랜 시간 돌보지 못했던 만큼 에스텔은 병자들을 정성껏 돌봤다. 칼릭스도 함께였다.
에스텔은 칼릭스와의 관계를 표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칼릭스는 아니었다.
‘나는 에스텔의 사랑의 포로다!’라고 대놓고 소리만 안 쳤을 뿐이지 그는 갖은 방법으로 에스텔과 연인 사이라는 것을 표 냈다.
“에스텔. 또 그런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가는 건가. 너의 여리고 가는 손가락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잖아. 어서 내게 줘.”
“에스텔. 너는 머리카락 색도, 얼굴 색도, 입술 모양도 예쁘군. 그런데 마음까지 참 고와. 그런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끝을 모르는 칼릭스의 애정 표현에 꽃잔디의 집에서 치료받고 있던 사람들의 반이 조기 퇴원을 했을 정도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차마 퇴원하지 못했던 환자들은, 칼릭스가 몹쓸 말을 할 때마다 귀를 막고 성서를 외거나 해탈한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당연히 황태후의 귀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황태후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강력하게 부정했다.
“누가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내더냐. 칼릭스가 성녀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는 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일 뿐이야. 고귀한 황태자가 평민과 교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나 이내 황태후는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심어 둔 하인들에게 칼릭스와 에스텔이 확실한 연인 사이라고 증언받았기 때문이다.
황태후는 분노했다.
그녀는 그 즉시 꽃잔디의 집을 찾아갔다.
때마침 에스텔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칼릭스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황태후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황태자와 교제 중이라는 게 사실이냐.”
에스텔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태후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고얀!”
그녀의 손이 매섭게 에스텔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에스텔에게 닿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할마마마.”
절묘한 타이밍에 칼릭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태후는 제 손을 잡은 손주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외쳤다.
“칼릭스 베르체나 프란츠! 정신 차려! 너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황태자야. 지금까지 너를 다른 여인과 짝지어 주지 않았던 건, 네게 가장 어울리는 여자를 고르기 위해서고. 그런데 평민이라니!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할 셈이냐.”
칼릭스의 대답은 더없이 간단했다.
“네.”
“……!”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다만 저희 둘에게 간섭만 하지 마세요.”
간섭만 했다간 봐. 사랑에 눈먼 10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줄 테니.
손주의 모진 말에 입을 쩍 벌린 황태후를 칼릭스는 가차 없이 쫓아내 버렸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황태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꽃잔디의 집을 찾아가 호통을 치고, 칼릭스를 붙잡고 애원을 하고, 에스텔을 찾아가 협박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 통하지 않았다.
결국 황태후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다.
“황태후가 쓰러졌다고요?”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에스텔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사의 진료도 거부하고, 식사도 다 물리신 채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신다고 해요. 연세가 있으신지라 황제 폐하와 황성의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답니다.”
나는 기가 차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할망구가 정말. 잠깐이지만 나와 루시안을 예뻐하기에 좀 괜찮아졌다 싶었더니.’
천성은 역시 어딜 안 간다.
황태후는 여전히 남주와 여주의 불타는 사랑을 갈라놓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악역 꼰대였다.
원작에서는 황태후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 틈이 있었다.
칼릭스가 에스텔을 향한 마음을 스스로 부정하며 열심히 삽질을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황태후가 아무리 끙끙 앓아도, 나 죽는다고 성 위에 올라가서 소리를 쳐도, 칼릭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아니었지만.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셨다는데 그러다 큰일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에요.”
흑흑. 착한 에스텔.
나는 새삼 에스텔의 착한 마음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에스텔처럼 황태후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막장 드라마에서 시어머니가 나 죽네 하고 난리 치는 거 한두 번 봐. 한~명도 안 죽더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방 안에 얌전히 처박혀 있게 두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나는 황태후가 얼마나 끈질긴지 알고 있으니까.
원작에서도, 칼릭스와 에스텔이 교제를 하는 것을 안 황태후가 이런 식으로 단식 투쟁을 했다. 그러다 정말 쓰러져 버렸다.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 황태후의 모습에 귀족들과 사제들은 난리가 났다.
저를 몰아붙이는 이들의 말에 에스텔이 얼마나 힘들어했던가.
에스텔은 결국 도망치듯 칼릭스를 떠났다.
‘결과적으로는 그 이별로 두 사람의 사이가 더 돈독해지긴 했지만……. 지금의 에스텔이 굳이 그런 지지부진한 똥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잖아.’
나는 에스텔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걱정 말아요. 황태후마마의 분노는 곧 풀릴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요.
* * *
과연 어떻게 황태후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고 있지.’
나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내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토록 무해해 보이는 남자지만 루시안은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가진 존재였다.
루시안이 예전처럼 황제를 찾아가 한마디를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잘 좀 하자?’
황제는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황태후를 얌전히 만들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아.’
낮잠 자는 사자처럼 평화로운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강제적인 방법이 효과를 보는 건 잠깐이었다.
언제 또 황태후가 에스텔을 향한 미움을 쏟아 버릴지 모른다.
그런 방법보다는 황태후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좋았다.
거센 바람보다 따뜻한 햇볕이 더 효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법이니까.
일전에 루시안이 나에 대한 황태후의 감정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를 들고 왔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때나 통한 거지. 지금은 얄짤 없이 튕길 거야.’
그날 루시안에게 강제 입덕을 당했던 황태후는 현재 루시안에게 탈덕한 상태였다.
아니. 탈덕보다 더 무섭다는 안티로 돌아섰다.
루시안이 악마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황태후는 아무리 저주를 풀었다 해도, 악마의 저주를 받은 불길한 존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며 루시안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황태후 앞에 루시안이 나타나 보았자 역효과만 날 것이다.
‘그럼 어쩌지.’
잠시 후 나는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안이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 * *
가게가 쉬는 날, 나는 외출을 했다. 물론 금붕어 똥처럼 루시안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우리가 향한 곳은 수도에 있는 한 저택이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를 맞은 이는 제국 최고의 인기 배우, 퓌였다.
새하얀 얼굴.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 신비로운 녹색 머리카락.
확실히 눈 높은 귀족 여인들의 마음을 훔칠 만한 미모였다.
최근 급격히 온순해진 루시안이 오랜만에 격하게 반응할 정도로.
루시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죽이고 싶어요.”
“루시안의 발가락 때보다 더 못생겼어요.”
그제야 루시안은 조용해졌다.
나는 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방문을 허락해 주어서 고마워요. 수도에서 가장 바쁘신 분일 텐데.”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퓌는 어마어마한 인기인이었다.
그의 공연을 예매하는 것조차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고, 그와 사석에서 만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다는 내 요청을 그가 승낙했을 때 나는 너무 놀랐다.
‘열 번은 넘게 졸라도 될까 말까일 줄 알았는데 단번에 허락해 줄 줄이야.’
퓌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두 분을 뵙게 되어 기뻐요.”
나는 당황했다.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라 좀 더 오만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
오만하기는커녕 곰돌이처럼 순박했다.
나는 예상과 다른 퓌의 모습에 놀라며 입을 열었다.
“미리 편지를 보냈으니 제가 찾아온 이유는 아시죠?”
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게 하실 부탁이 있다고. 무슨 부탁인가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저 대신 황태후마마의 병문안을 갈 수 있나요?”
물론 단순히 병문안을 부탁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노리는 건 퓌로 황태후의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리는 것이었다.
황태후는 퓌의 숨겨진 팬클럽 회장이라는 말이 돌 만큼 그의 엄청난 팬이었으니까.
‘물론 쉽게 이런 부탁을 들어줄 리 없겠지.’
다시 말하지만 그는 제국 최고의 배우였다.
이런 사심 가득한 부탁을 간단하게 들어줄 만한 위치가 아니다.
나는 주머니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돈을 챙겨오긴 했지만 이 정도로 움직여 줄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돈으로 안 되면 꿀을 잔뜩 바른 혀로 천상의 아부를 해서라도 설득해 봐야지.’
그렇게 결심을 다지는데 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네?”
“영애의 부탁을 들어 드릴게요.”
너무나 시원한 그의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기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퓌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물론 공짜로 그런 부탁을 들어준다는 건 아니에요.”
당연하지. 나도 뻔뻔하게 공짜로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준비해 온 금액을 말하려는 순간 퓌가 먼저 말했다.
“저, 카르디엔 님의 사인을 받고 싶습니다!”
엥?
나는 생뚱맞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내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퓌는 절대 이 거래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다부진 얼굴로 손가락 두 개를 뻗었다.
“두, 두 장이요.”
……당신. 얼굴 빨개졌어.
나는 그제야 퓌가 왜 내 생뚱맞은 부탁을 덥석 들어주기로 했는지 알았다.
그는 루시안의 왕팬이었다.
“카르디엔 님께서 기사로 이름을 날리셨을 때부터 존경했어요. 출병하실 때 가장 앞줄에 서서 손을 흔들었고, 카르디엔 님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매일 노란 리본을 황성 앞에 달기도 했답니다.”
헐. 저 정도면 찐인데?
퓌는 제 팬심을 절절하게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우러러보는 것조차 황송할 만큼 귀한 분을 이렇게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올 줄 몰랐어요. 카르디엔 님께서 제게 사인을 해 주시면 제 평생 가장 기쁜 선물이 될 거예요.”
배우라서 그런가.
말 한마디가 연극의 한 장면처럼 어여쁘고 애절했다.
그러나 루시안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어려 있지 않았다.
나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 아니면 루시안은 감정이 동요되는 일이 없었다.
싸늘한 루시안의 반응에 퓌의 얼굴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루시안이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루시안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것으로 더는 니아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나쁠 게 없지.
라는 루시안의 속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퓌의 얼굴은 아이처럼 환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퓌는 혹시나 루시안의 마음이 바뀔 새라 쪼르르 달려가 준비해 둔 종이와 펜을 꺼내 왔다.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성의 없는 손짓으로 사인을 했다.
그럼에도 퓌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루시안의 사인이 적힌 종이를 끌어안았다.
“제 평생 카르디엔 님의 사인을 받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건 곤란합니다. 죽더라도 니아의 부탁을 들어준 후에 가도록 하세요.”
“아앗,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볼일이 끝났으면 더는 그녀를 쳐다보지 말고요. 거슬리니까.”
“그럼요!”
“앞으로 그녀를 대할 때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말아요. 평범한 남자와도 이야기를 나누면 불쾌한데, 당신 같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군요.”
“네!”
……저거 뭐지? 미남 조련술? 인간 현혹술?
루시안이 언제 저런 무서운 기술을 익힌 거람.
영혼을 빼앗긴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는 퓌를 바라보며 나는 얼굴을 긁적였다.
어쨌건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어 다행이었다.
* * *
내 계획은 이랬다.
일명 퓌의 황태후 병문안 작전.
황태후는 식음을 전폐하며 병문안 온 사람을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퓌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퓌의 엄청난 팬이니까.
예상대로 황태후는 퓌의 방문을 허락했다.
퓌는 침대에 누운 황태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태후마마. 제국의 백성을 보듬어 주시는 분이 이렇게 침대에 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황태자 전하의 일로 상심이 크시죠?”
“오오. 퓌.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대뿐이야.”
황태후는 감격한 얼굴로 퓌를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제일 힘들 때 내 최애캐가 찾아와 나를 위로해 준 것이니까.
마음이 풀어진 황태후를 향해 퓌는 나와 미리 이야기한 것들을 말할 셈이었다.
에스텔이 얼마나 평민들에게 존경받는 성녀인지를. 그녀가 칼릭스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짝인지를.
‘내 최애가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했건만.
“……쫓겨났다고요?”
“네.”
퓌는 축 처진 어깨를 하며 대답했다. 일전에 루시안이 한 말을 의식했는지 시선은 나와 정반대 쪽을 향한 채로.
퓌가 말을 이었다.
“성녀님에 대해 말을 꺼낸 순간 표정이 바뀌시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죄송해요. 너무 무서워서 그만…….”
이, 이, 쓸모없는 미남 같으니!
조금 화냈다고 도망쳐 나오면 어떡해. 어떻게든 황태후를 붙잡고 마음을 풀어줬어야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엄청났다.
‘당장 루시안 사인 반납해!’
라고 외치지 않았던 건 퓌가 두 손을 모으고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화낼 수도 없잖아.’
나는 화를 참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퓌가 그런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내, 내일 한 번 더 찾아가 볼게요. 한 번 겪어 봤으니 오늘처럼 겁을 먹지는 않을 거예요.”
“됐어요.”
“하지만…….”
퓌는 약속을 행하려는 의지가 넘쳤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실패한 미남계가 다시 먹힐 리가 없다. 또 왔냐며 더 역정만 내겠지.
이 작전은 실패다.
퓌가 입술을 깨물고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꾸벅이고 방을 나갔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솔직히 쉽게 생각했다.
제국 최고의 배우 퓌가 꼬장꼬장한 황태후의 마음을 푸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내 생각보다 퓌는 어벙했고, 황태후의 덕심은 깊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무슨 뜻이에요?”
“니아의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늘 혼자 애를 쓰더군요. 에스텔 님이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그랬나.”
새삼스럽게 듣게 된 나의 평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어요, 아주 많이.”
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하지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걸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남는 게 뭔데요?”
그것만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기뻐요.”
“…….”
나를 빤히 바라보는 루시안의 시선이 멋쩍어 나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좀 천사 같죠?”
“네. ……너무.”
스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지금 내가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루시안이 아니라 에스텔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고 애쓰는 모습은 흑화한 루시안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다.
‘즐겁기는커녕 질투심에 휩싸여 에스텔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을지도 몰라.’
요즘 너무 그가 순해졌다고 실언을 했나 싶어 후회가 됐다.
‘물론 누가 뭐래도 우리 루시안이 짱짱맨이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황급히 말하려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적어도 당장 에스텔에게 몹쓸 짓을 하러 달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화 안 내요?”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일렁이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당신도 좋으니까.”
“……!”
나는 입을 벌리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이내 얼굴이 터질 듯 열이 올랐다.
루시안이 제 분노보다, 질투보다, 날 향한 애정이 더 크다고 말한 순간이었으니까.
* * *
나는 내내 고민하다가 황태후의 마음을 풀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미남계가 안 통한다면 선물을 주면 되지!’
물론 황태후가 선물로 마음을 돌리기 쉬운 존재는 아니었다.
황실의 재산을 손에 쥐고 있는 부유한 여인이었으니까.
“보석이나 금붙이 따위는 안 통하겠지만 이건 어떨까.”
내 손에 들린 건 아버지의 방에서 찾아낸 와일드 트리였다.
언젠가 쿤이 내게 선물로 주었던 약초는 아버지가 열심히 키운 덕에 어느새 세 뿌리로 늘어 있었다.
‘굿 잡. 아버지!’
지금쯤 재회한 모앙셀 부인과 뜨거운 중년 로맨스를 찍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는 약초를 하나 뽑았다.
나는 약초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벌거벗은 근육질의 남자를 닮은 흉측한 모습이었다.
“으윽. 다시 봐도 민망하네. 하지만 효과 하나는 끝장인 대륙 최고의 약제라고 했지.”
원래 노인네들은 건강식품에 환장하는 법이다. 그것은 황태후도 다르지 않을 테고.
‘이것 하나 던져 주면 기분이 풀려서 당분간 조용히 있을 거야.’
뭐가 예쁘다고 이런 것까지 줘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고 했으니까.
나는 와일드 트리를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이라도 황성에 보내야지.”
그런데 다음 날, 에스텔이 찾아와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황태후가 꽃잔디의 집으로 찾아왔다고요?”
에스텔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동안 저를 찾아와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럼 에스텔을 인정한 거예요?”
에스텔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세상에.
나는 믿기지 않아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에스텔의 손을 마주 잡고 웃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네. 그동안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니아 님.”
우리는 신나서 맞잡은 두 손을 아이처럼 흔들었다.
에스텔은 조금 더 수다를 떨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에잉. 오늘은 일도 많지 않다면서요. 좀 더 놀다 가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서요.”
에스텔은 쿡쿡 웃으며 내 옆에 있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에스텔의 말에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알았으면 어서 가라는 듯이.
에스텔은 ‘이래서 머리털 난 놈들은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한탄하는 대신 손을 뻗어 루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고 니아 님의 일도 도와주고 있다지? 장해, 루시안.”
루시안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싫은 기색도 아니었다.
‘보기 줗구먼.’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에스텔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참, 에스텔. 이것 챙겨 가요.”
“뭔가요?”
상자 속에는 곱게 포장한 와일드 트리가 들어 있었다. 황태후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제 굳이 이런 선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몸에 좋은 약초예요. 꽃잔디의 집에 필요한 환자들이 있으면 먹이도록 해요. 에스텔이 먹으면 더 좋고요.”
“고마워요, 니아 님.”
에스텔은 웃으며 내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그때까지 상자 속에 든 와일드 트리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가진 약초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약초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이야기.
에스텔은 품속에 상자를 안고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가 볼게요. 또 봐요.”
며칠 전만 해도 가득했던 근심이 완전히 사라진 행복한 얼굴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에스텔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열심히 흔들던 손을 내리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황태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제 루시안이 일이 있다며 외출을 했으니까요.”
루시안이 내 곁을 떠나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어제는 루시안이 나를 떼어 놓고 외출했다는 사실에 놀라 다른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루시안이 외출을 다녀온 후, 황태후의 행동이 바로 바뀌었어요. 그럼 뻔하잖아요.”
나는 루시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할머니의 이름을 걸고, 황태후의 마음을 돌린 범인은 바로 너얏!”
루시안은 내 말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맞아요.”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막상 그의 입으로 들으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 도대체 황태후를 찾아가 무슨 일을 벌인 거예요? 설마 황태후의 멱살을 잡고 협박이라도 한 건 아니죠?”
“그럼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멋대로 집으로 쳐들어가서 협박을 하는 건 범죄라고요.”
루시안이 흑화한 상태인 것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가 흉악한 범죄자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흑화한 악마 여자 친구는 괜찮아도, 범죄자 여자 친구는 안 괜찮아.
폼이 안 나잖아!
루시안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 말아요. 니아가 걱정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까요.”
헤헤, 그렇구나. 다행이다.
라고 안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협박이 아니라면 어떻게 황태후의 마음을 돌렸단 말인가. 지금의 루시안이 황태후의 비위를 살살 맞췄을 리도 없고 말이다.
루시안이 안심하라는 듯,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정말이라니까요. 니아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했어요.”
“원래 계획이요?”
루시안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입을 열었다.
* * *
황태후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수척했다. 소매 사이로 살짝 드러난 손도 앙상했다.
며칠째 조금도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인기척에 황태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황태후는 며칠째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 찾아오는 이는 그녀의 최측근 시종이나 황제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찾아온 손님은 시종도, 황제도 아니었다.
황태후는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