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6
22.
황태후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어, 어떻게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허락도 없이 황태후의 방에 들어온 것은 중죄임을 모르느냐!”
황태후의 진노에도 루시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의 옆에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카르디엔 경이 원할 때면 언제든 황성의 모든 곳에 출입을 해도 된다고 허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시고 온 것입니다.”
“뭐야?”
황태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속도 없는 놈. 아무리 아끼는 부하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권한까지 줬단 말이야?’
물론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루시안이 하고자 하면 어차피 막을 수 없어. 그러니 괜한 피 흘리지 말고, 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얌전히 들어주거라.]라는 것이 황제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들었어도 황태후의 노여움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난 그런 무례한 짓을 허락한 적이 없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루시안의 얼굴이 너무나 무해했기 때문에.
“오랜만입니다, 황태후마마. 인사도 없이 찾아와 놀라셨지요?”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에는 조금의 악의도 분노도 없었다.
제 분노가 민망해질 만큼.
황태후는 결국 축객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형식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다. 보나 마나 에스텔에 대한 일로 찾아왔겠지.
일전에 찾아왔던 퓌처럼 말이다.
그러나 루시안이 내뱉은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관심 없어요. 에스텔 님과 황태자를 괴롭혀 대든, 죽느니 마느니 쇼를 하든 말이죠.”
“……뭐?”
“그런데 니아는 아니더군요. 내내 당신을 신경을 쓰더라고요.”
황태후는 한 박자 늦게 니아라는 이름이 루시안의 약혼녀 페르니아를 지칭하는 것을 알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기분이 아주 더럽죠.”
루시안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러니 더는 그녀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게 해 주세요. 시체처럼 조용히 있어 달라고요. 네?”
지엄한 황태후의 앞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무례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황태후는 제가 그런 말을 듣는지도 몰랐다.
그 말을 내뱉는 루시안의 얼굴이 너무나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황태후에게는 루시안의 말이 이런 느낌으로 입력됐다.
‘그녀가 너무 힘들어하니 부디 당신의 분노를 거둬 주세요.’
황태후는 네, 라고 내뱉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또 이런 식으로 루시안에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황태후는 한껏 휘둘린 감정을 가다듬어, 엄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텔은 칼릭스의 짝으로 한없이 부족한 존재야. 신분도 맞지 않을뿐더러, 황태자가 무던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줄 만한 세력도 없어. 그러니 난 절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강경한 어조였다.
루시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오묘한 압박을 느끼면서도 황태후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만 돌아가게. 예전처럼 그대에게 쉽게 설득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또한 황제를 이용해 협박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이 일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황태후는 루시안이 자신의 단호한 말에 당황해하거나 서운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루시안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이 같은 미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등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한 미소였다.
“뭔가 착각을 하나 본데, 나는 당신을 설득시키려고 찾아온 것도, 협박을 하러 온 것도, 아니에요.”
그럼?
황태후가 의아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루시안이 두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
황태후는 루시안의 미모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일전에 체면도 잊고 그에게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좀 더 사람 같았다.
지금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제 앞에 있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치 신이 변덕스럽게 만들어 낸 환영 같았다.
루시안은 황태후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내가 뭘 하러 왔는지.”
“…….”
황태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멀쩡하게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너무 압도적인 것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성. 세상을 휩쓴 거대한 폭풍우. 수천 년을 산 거대한 나무.
……그리고 카르디엔.
눈앞의 남자는 너무 아름다웠다.
평범한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기 힘들 만큼.
어느새 황태후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불을 쥔 손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황태후의 속마음이 소리쳤다.
너는 제국의 황태후야.
이런 것 따위에 무너지지 마. 조금 괜찮은 껍데기를 가진 남자일 뿐이잖아.
실상은 하층민 출신에, 제대로 된 세력도 없는 한낱 기사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겁낼 필요 없어. 휘둘릴 필요 없어.
……그러나 턱을 치켜든 루시안이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필사적으로 다잡은 의지는 덧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황태후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 그럴게요. 카르디엔 경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노예로 삼아 주세요. 제발요.
그런 말을 하려는 것처럼 허물어진 얼굴이었다.
루시안은 만족한 듯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잘했죠, 니아?”
아니. 하나도 안 잘했어!
나는 루시안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루시안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이.
그러나 나는 조금도 루시안을 우쭈쭈해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래전 루시안이 황태후에게 미남계를 쓴 적이 있었다.
나도 루시안의 상태가 괜찮았다면 한 번 더 그의 미모로 황태후의 마음을 녹여 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루시안이 저런 짓(?)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니아?”
루시안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이 답답해 나는 소리쳤다.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네?”
“손님들한테 하는 것까진 괜찮아요! 고객을 대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황태후의 일은 아예 결이 다르잖아요. 작정하고 유혹하다니…….”
주절주절 나불대다 보니 결국 어린애처럼 유치한 말이 튀어 나갔다.
“싫다고요! 기분 나빠!”
“…….”
루시안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고 헙, 하고 입을 막았다.
흑화한 그에게 이렇게 격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처음이다.
나를 위해 한 일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냐며,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며 조심스럽게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엥.’
루시안은 조금도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예상 못 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뭐야. 좋아하고 있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러고 보니 요즘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화내는 모습조차 재미있다고 느끼는 걸까.
그럼 좀 더 경멸 어린 표정을 해 줘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데, 루시안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물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그런데요?”
“……!”
그 순간 루시안이 나를 그의 품속으로 끌어당겨 껴안았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최고예요, 니아.”
“…….”
“섹시해요. 예뻐요. 귀여워요. 하,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먹어 버리고 싶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농담 같지 않다니까.
나는 오싹함을 느끼고 루시안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알았죠?”
루시안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게에서 손님을 맞는 루시안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루시안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반가워요, 카르디엔 경.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 아침 햇살이 꼭 카르디엔 경처럼 반짝거리던 거 있죠.”
나름 패기 있는 손님들이 그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허물어뜨려 보려고 칭찬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네.”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노잼인 말을 들은 것 같은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
휘이잉. 어디선가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북극보다 더 추워진 가게 안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끼를 떨지 말라고 한 것뿐이지 저렇게까지 찬바람을 날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겨울바람보다 싸늘해진 루시안의 모습을 보고 손님들이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망가기는커녕…….
“꺄! 봤어요? 나를 향한 저 경멸 어린 표정.”
“봤어요, 봤어. 너 따윈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체리 한 알보다 못하다는 그 표정.”
“아아. 위세 높은 공작가에서 태어나 이런 취급 처음 받아 봤어요.”
“불쾌한데 설레!”
평범한 남자가 저렇게 했다가는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냈을 테지만 루시안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남자의 쌀쌀맞은 대응은 다른 의미로 여인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
‘결국 모로 가도, 도로 가도 결론은 똑같구나.’
미남은 밥만 먹고 숨만 쉬어도 치명적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저렇게 생긴 얼굴인 걸 어떡하겠어.’
저래 봬도 루시안은 노력하고 있었다.
정말 루시안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내 여자친구가 기분 나빠 하니까 날 쳐다보지 마.]라는 흉악한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의 눈알을 파 버렸겠지.
‘그런 의미로 저 정도도 대단한 거야. 까칠해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미친놈 같진 않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영업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는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에스텔이었다.
그녀가 연락도 없이 가게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어서 와요, 에스텔.”
루시안도 내 옆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에스텔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우환이 느껴졌다.
황태후가 저를 받아들였다며 좋아했던 며칠 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루시안에게 홀랑 넘어간 줄 알았던 황태후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구박 모드로 변해 버렸나?
아니면 칼릭스 놈과 싸우기라도 했나.
아니면 꽃잔디의 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나는 초조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에스텔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니아 님. 이전에 왔을 때 제게 준 약초 기억나시죠?”
약초?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헤집던 나는 아, 하고 손뼉을 쳤다.
“와일드 트리요?”
“네.”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그 흉측한 놈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요? 혹시 그걸 먹고 누가 잘못되기라도 했어요?”
아버지가 다 죽어 가는 사람조차 살릴 만큼 효과가 좋은 약초라고 했다. 그래서 에스텔에게 준 것이었는데, 혹시나 문제가 생겼나 싶어 왈칵 겁이 났다.
에스텔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필요한 분이 있으면 드리려고 방에 보관을 해 두었거든요. 그것을 어젯밤 칼릭스가 발견했어요.”
칼릭스가 상자 안에 곱게 담긴 와일드 트리를 보더니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니아 님께서 주신 거예요.”
“흠. 가난한 귀족 주제에 제법 괜찮은 선물을 줬군.”
칼릭스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됐다. 이걸로 차를 끓여 줄게.”
“네?”
“며칠이나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일해서 힘들어했잖아. 이 약초를 먹으면 몸의 피로가 싹 풀릴 거야.”
“하지만…….”
에스텔은 머뭇거렸다. 귀한 선물이니만큼 저보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칼릭스가 와일드 트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말했다.
“너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걸 주잖아. 그러니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아. 넓게 생각해도 네가 건강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단호한 목소리에 결국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칼릭스는 신이 나 손수 와일드 트리로 차를 끓였다.
잠시 후, 에스텔의 작은 방에는 소박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칼릭스는 우아한 손짓으로 에스텔을 의자로 안내했다.
‘왕자님 같아. 진짜 왕자님이 맞긴 하지만.’
에스텔은 쿡쿡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칼릭스는 찻주전자를 들고 능숙하게 차를 따랐다.
쪼르르르.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향이 올라왔다.
찻잔을 든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색도, 향도 독특하네요. 엄청 쓸 것 같아요.”
“맞아. 그래도 효과는 좋아.”
“마셔 본 적이 있어요?”
“예전에 할마마마께서 드시는 걸 본 적이 있어. 진상품으로 들어왔거든. 다음 날 무릎 통증이 사라지셨다며 무척 놀라셨었지.”
에스텔은 새삼 놀란 눈으로 짙은 갈색의 차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효과가 대단한 모양이네.’
그렇다면 역시 자신보다는 회복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찻주전자를 든 칼릭스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칼릭스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들은 대부분 그녀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식사, 이부자리, 약.
그래서 칼릭스는 이런 식으로 에스텔에게 직접 무언가를 줄 기회가 생기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꼭 지금처럼.
에스텔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에스텔은 찻잔을 든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칼릭스도 한잔 마셔요. 칼릭스도 며칠 내내 제대로 쉬지 못했잖아요.”
아무리 황제가 강건해졌다고 해도, 황태자는 할 일이 많았다.
몇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터라 더더욱.
거기에 시간이 남을 때마다 에스텔의 일을 도와주었으니 칼릭스도 피곤이 쌓을 것이다.
칼릭스는 고민하는 얼굴로 찻주전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은 웃으며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칼릭스만큼 능숙하진 못했지만, 꾸밈없는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칼릭스는 키득 웃으며 찻잔을 손에 들었다. 에스텔도 눈을 마주치며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따스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그래서요?”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한없이 훈훈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에스텔이 심란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텔은 우물쭈물하며, 나와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그녀가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와일드 트리의 효과는 너무 강력했어요. ……건강한 남녀에게는 치명적일 정도로요.”
칼릭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상하군. 갑자기 왜 이렇게 덥지.’
평소에도 열이 많은 편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당장 옷을 벗고 시원한 물을 들이키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을.
‘내가 무슨 생각을.’
순간 머릿속을 스친 추잡한 생각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그는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는 젊고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이따금 에스텔과 단둘이 있으면 이런 충동이 종종 일어나기는 했다.
평소보다 강도가 세긴 했지만 괜찮았다. 적어도 그녀의 방을 나서기 전까진 억누를 수 있었다.
“에스텔. 난 이만 가 볼게.”
칼릭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에스텔이 이상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텔?”
낮은 목소리에 에스텔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미안해요. 잠시 딴 생각을 했어요.”
“…….”
“그러고 보니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에스텔은 칼릭스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칼릭스를 문까지 배웅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칼릭스.”
“……응.”
칼릭스는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헤어질 때마다 하는 굿나잇 키스였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건 그녀의 입술이었을까, 자신의 입술이었을까.
힘겹게 입술을 뗀 칼릭스는 한 발짝 물러났다. 에스텔도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이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 칼릭스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가 문틈으로 에스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 나 이상해.”
“네? 어디가요?”
화들짝 놀라는 그녀를 향해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그리고 또…….”
“…….”
칼릭스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텔을 향해,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너를 안고 싶어.”
칼릭스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제 욕망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제 말이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용기를 낸 이유는 이상하리만치 솟구친 열기.
그리고 본능적인 직감 때문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원할 것이라는.
에스텔의 뽀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리구슬처럼 맑았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그 순간 칼릭스가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이성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
나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잔 거예요?”
“…….”
에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끝까지 새빨간 사과가 된 채로.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꺄!”
그럴 수밖에.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첫 경험을 했다는 엄청난 이야기가 아닌가.
가뜩이나 전체 연령가라 진도 빼는 게 힘들었을 텐데 말이지.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해!
아니. 와일드 트리의 힘이 대단한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요?”
아무리 봐도 에스텔의 얼굴은 연인과 첫날밤을 보낸 흥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죄인 같았다.
에스텔이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칼릭스는 저보다 나이가 어리잖아요. 제가 그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
그게 문제였나.
그야 칼릭스가 에스텔보다 조금 어리긴 하지만, 에스텔이 저 정도로 죄책감을 가질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칼릭스 또래 남자들 중에는 결혼한 자도 수두룩했다.
게다가 칼릭스가 어떤 놈인가.
결코 순진하게 농락당할 놈이 아니었다. 그러긴커녕 에스텔을 살살 구슬려서 일을 치렀을 놈이지.
녀석에 대한 걱정보다는 차라리 다른 걱정을 하는 게 맞았다.
나는 에스텔과 눈을 마주쳤다.
“피임은 잘했어요?”
“네?”
에스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제국에서는 피임의 개념이 거의 없었다.
아이는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암리 피임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거의 효과가 없었다.
촛농을 배 위에 올려둔다든가, 뱀 껍질을 베개 아래에 깔고 자는 것처럼, 해괴한 방법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약을 조제해 먹는 것은 효과가 있었으나, 그것은 몸을 해쳤다.
게다가 워낙에 특수한 경우였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약을 구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어. 이렇게 두 사람의 진도가 빨리 나갈 줄 알았으면 간단한 피임법이라도 알려줬을 텐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심상치 않은 내 표정에 에스텔의 얼굴이 굳었다.
“하, 하룻밤이었는데 아이가 생겼을까요?”
“가능성이 큰 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죠. 무엇보다 두 사람 다 심신 건강한 젊은이들이잖아요.”
에스텔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제야 내가 너무 그녀를 몰아붙였다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에스텔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일단 이번 달에 달거리를 기다려 봐요. 그 후에 생각해 봐도 늦지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서린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한참이나 에스텔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루시안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루시안과 가게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칼릭스가 찾아왔다.
루시안의 반응은 어제와 전혀 달랐다.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평소의 칼릭스라면 루시안에게 방해하지 말라며 쏘아 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칼릭스는 루시안의 등 뒤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에스텔이 나를 피해.”
초조하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나는 루시안에게 눈짓을 했다. 루시안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탐탁지 않은 얼굴로 길을 비켜주었다.
그제야 칼릭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아 평소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에스텔이 왜 그러는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가 에스텔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
“그리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 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칼릭스는 에스텔의 고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에스텔의 고민을 칼릭스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나는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 잤다면서요?”
“……!”
“그것 때문에 에스텔이 많이 심란한 모양이에요.”
칼릭스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회하고 있는 건가. 나 때문에 그녀의 몸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해서?”
그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그에게 오랜만에 짓는 경멸 어린 미소였다.
나는 칼릭스의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봐요, 칼릭스. 당신 뭔가 엄청난 착각을 하나 본데…….”
“……?”
“고작 하룻밤 같이 보내 놓고 누군가를 더럽혔다는 오만한 생각 따위 집어치워요. 그저 한번 잔 것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니까.”
나는 삐뚜름하게 입매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멋대로 에스텔을 더럽히지 말라고요.”
“……!”
그제야 제가 한 말의 어폐를 깨달은 칼릭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건가. 내가 실수를 했군.”
칼릭스는 쿨하게 제 실수를 인정했다.
그렇다고 그의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칼릭스는 다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도대체 그녀는 뭘 고민하는 거지?”
잠시 후, 그가 정답을 찾은 듯 말했다.
“내가 너무 서툴러서 아팠나?”
“…….”
“아니면 너무 과하게 밀어붙여 너무 힘이 들었나?”
얘, 정말 왜 이러니.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칼릭스를 향해 나는 까칠하게 소리쳤다.
“아, 좀! 그딴 걱정 말고 현실적인 걱정을 좀 하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칼릭스를 향해 나는 말했다.
“임신 말이에요.”
“……!”
그제야 칼릭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이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 앞통수, 옆통수까지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래도 부족할 만큼 대책 없는 짓을 저질러 버렸으니까.
“제대로 피임도 하지 않고 그 짓을 하더니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궁둥이 팡팡 맞아야 해!”
“그, 그땐 정신이 없어서…….”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죠. 아기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야 낳아서 키우면 되지.”
철없는 말에 내 주먹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당신이 임신해서 낳을 거 아니잖아!”
나는 분노한 고양이처럼 눈을 부릅뜨며 폭풍 같은 말을 내뱉었다.
“뱃속에 아기를 열 달이나 품어 낳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임신하는 동안 여자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고요. 거기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껏 쌓아 올린 커리어도 엉망이 되는 거라고요.”
에스텔은 특히 하고 있는 일이 많았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한 공부, 봉사, 선교 활동 등, 모든 것들을 멈춰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결혼 전에 아기를 가지면, 에스텔의 명성은 어떻게 되는데요?”
“……!”
혼전 임신을 하면 여자는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성녀라면 더더욱 비난이 거셀 것이다.
사람들은 에스텔을 ‘더럽다’고 치부하며 그녀를 매도하겠지.
단지 사랑하는 남자와 잤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칼릭스에게 화가 났다.
잘못은 두 사람이 했지만, 하룻밤의 대가를 감당하는 건 오로지 에스텔일 테니까.
‘니 몸이 아니니까 더 조심했어야지! 이 그지깽깽이 같은 놈아!’
나는 분노에 차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칼릭스는 연타로 후려 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보는 그의 겁먹은 모습이었다.
나는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에스텔이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당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았어요?”
칼릭스는 얌전히 무릎을 모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서 쭈그려 있지 말고, 당장 에스텔에게 가 봐요. 그녀를 찾아가서 말해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임신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부담감을 떠안는 건 여자들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책임을 진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당연히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책임진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발짝 떨어진 이가 내뱉은 선심 같아서.
“그런 말보다는 이야기를 나눠요. 만약 임신을 한 거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현실적인 이야기 말이에요.”
“그렇게 하지.”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 칼릭스를 따라 일어서서 말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에스텔을 만나자마자 꼭 안아 주는 거예요.”
“…….”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해도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 거예요.”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늘 고맙다.”
잘생겼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원망스러운 감정이 치솟았다.
‘이 남자야. 그런 필살 미소는 상황을 좀 봐 가면서 하란 말이야!’
칼릭스. 너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난 아니라고.
나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이 형형한 눈빛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칼릭스를 쫓아가 뼈와 살을 발라버릴 기세였다.
“루시안!”
나는 황급히 루시안에게 달려가 그를 안았다.
“괜찮아요?”
“……위험했습니다.”
루시안은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골랐다. 다행히 한계까지 간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이내 그의 눈빛은 평온을 되찾았다.
루시안은 내 품속에 얼굴을 대고는 눈을 감았다.
꼭 주인의 품속에 안긴 고양이 같았다.
나는 그의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두 사람, 괜찮겠죠?”
루시안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 내 옆에 있었다. 그래서 그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안의 대답은 냉랭했다.
“글쎄요. 두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죠.”
예상하긴 했지만 루시안은 두 사람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어떻게 이러지? 아무리 흑화했다고 해도 기억이 사라졌다거나 감정이 사라진 건 아니잖아.’
그렇게 소중했던 에스텔의 존재조차 그에게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게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스텔이 걱정되지 않아요?”
루시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선연한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전혀요.”
“…….”
그 순간 내 표정이 어땠던 걸까.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니아. 당신은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나요?”
생뚱맞은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요.”
루시안이 설핏 웃었다.
“나도 전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막 세상 사람들이 다 눈을 번뜩이는 악령처럼 보이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냉정해진 걸까.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런 색도, 향도 보이지 않아요.”
“…….”
“꼭 흑백 그림처럼.”
루시안이 흑화한 후, 그의 속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달라요. 아무런 색도, 향도 없는 세상 속에 오직 당신만이 알록달록하게 색이 있어요. 당신만이 향도 나고 빛도 나죠.”
루시안이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난, 당신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
“미안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는지.
나는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대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니아, 울어요?”
“당신이 울렸잖아요.”
“……미안해요.”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요.”
나는 새초롬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안은 훌쩍이는 나를 다독이듯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나 때문에 우는 게 기뻐서요.”
“힝. 그건 미안해할 일이 맞네요. 사람이 우는 걸 보고 좋아하다니 못됐어.”
루시안은 정말 곤란한 말을 들은 것처럼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한 번 더 내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고 오싹해서,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 행복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인내하고 있는지를.
그 순간에도 그의 주머니 안에는 작은 약병이 들어 있었다.
분홍색 물약은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며칠 후, 에스텔과 칼릭스가 손을 잡고 찾아왔다.
두 사람은 불안한 얼굴로 내게 따로 찾아왔던 때와 달리 행복한 얼굴이었다.
“세브란 왕국으로 돌아간다고요?”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휴학 기간이 끝나서 복귀해야 할 때가 되었거든요. 임신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한 달은 더 기다려야 알 수 있으니 일단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해요.”
“가는 길이 먼데 괜찮겠어요?”
내 말에 칼릭스가 대답했다.
“걱정 마. 최고의 마차와 배를 타고 이동할 테니. 바람 한 점도 에스텔을 스치지 못하게 할 거야.”
“황태자 전하도 같이 가려고요?”
“당연하지.”
와, 황태자가 뭐 저래. 백수건달이 따로 없네.
툭하면 정무를 내팽개치고 떠나는 그의 모습에 제국의 미래가 살짝 걱정됐다.
‘반대로 에스텔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보내 주신대요?”
아무리 황제가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해 호의적이라 해도, 또다시 에스텔과 함께 떠나는 걸 반길 리가 없었다.
‘작작 좀 하라고 꿀밤이나 안 때리면 다행이지.’
칼릭스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허락해 주어야지 어쩌겠어. 약혼까지 한 사이인데 떨어져 있을 순 없잖아.”
“……!”
칼릭스가 한껏 오만한 얼굴로 에스텔의 손을 잡아 올렸다. 두 사람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수줍게 웃었다.
“어제 청혼 받았어요.”
“와우.”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해 주셨답니다. 어차피 칼릭스와 제가 교제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차라리 공식적으로 사이를 공표하는 게 낫겠다면서요.”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세브란 왕국으로 떠난 후에 정식으로 발표를 할 거야.”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많이 시끄러워지겠네요.”
단순히 사귄다, 라는 것과 약혼을 했다, 라는 것은 파급력이 다르다.
한쪽은 황태자. 또 한쪽은 평민 출신의 성녀. 그런 두 사람이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는 소식은 제국을 뒤흔들 것이다.
칼릭스는 하나도 관심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알게 뭐야. 아바마마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앞으로 불효막심한 놈을 본다면 칼릭스라고 부르겠어요.”
“뭐?”
나는 눈썹을 찡그리는 칼릭스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잘 다녀와요.”
칼릭스는 찝찝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악수를 했다.
에스텔과는 포옹을 했다.
“혹시 모르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확실하게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 주고요.”
“네, 그럴게요.”
에스텔은 환하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했다.
나는 공기처럼 조용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에게 물었다.
“루시안은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루시안은 냉랭한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떠나신다니 기쁘군요. 한동안 당신들이 니아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 여자 친구에게 미쳐 타인에게 한없이 싸가지 없는 사람을 보면 루시안이라고 부를 것이다.
* * *
칼릭스와 에스텔은 세브란 왕국으로 떠났다.
당연히 수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말이 터져 나왔다.
정말 황태자와 성녀가 사귀는 것이냐. 설사 사귄다고 해도 미혼 남녀가 저렇게 붙어 다니는 게 말이 되느냐.
특히 에스텔을 저격한 비난은 더 강도가 셌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성녀가, 결혼 상대도 아닌 남자와 저런 식으로 교제를 하는 것이 보기 민망하다는 말들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황제가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황태자 칼릭스와 성녀 에스텔은 비공개로 약혼식을 치렀다. 앞으로 성녀 에스텔은 황실의 보호를 받는 예비 황태자비니 그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말을 하는 자는 극형에 처하노라.”
내 며느리 건들면 다 죽어.
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온화한 성품이었으나, 할 때는 하는 자라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모두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평민 따위와 고귀한 황태자가 이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몇몇 황족과 귀족이 황태후를 찾아갔다.
“황태후마마. 이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제위를 물려받으시면 평민이 황후가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녀가 성녀라 해도 도저히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들은 황태후가 자신들의 편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
황태후는 이 제국에서 가장 황실의 규범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황태후는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황후의 자격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가문 따위가 아니네. 바로 백성에 대한 사랑이지. 에스텔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제국에 몇이나 있나?”
“……!”
너무 바른 소리를 하는 황태후의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 받았다.
황태후는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용히 받아들이게. 더 이상 제국을 시끄럽게 할 생각 하지 말고.”
“…….”
황태후는 눈을 크게 뜨고 황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눈을 감았다.
‘카르디엔 님. 소인 맡은 바 임무를 다 해냈습니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황제도, 황태후도, 진정으로 에스텔을 차기 황후감으로 생각한다고.
제국의 권력자 두 사람이 그러고 싶다는데 더는 시끄럽게 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평민들의 지지가 엄청났다.
그들은 황제와 성녀가 약혼을 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열광했다.
“이 제국에 최고의 황후 폐하가 탄생하실 거야.”
“와아아아—–.”
수도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하나도 모른 채, 에스텔과 칼릭스는 세브란 왕국에 당도했다.
에스텔은 칼릭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고개를 숙여 배를 바라보았다.
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입덧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임신의 낌새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뱃속에 따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에스텔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판판한 배를 매만졌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 * *
에스텔과 칼릭스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지 한 달째.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가득했던 시기가 지났다.
새로운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바로 며칠 후 찾아올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이었다.
악시온 왕국은 제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국가 중 하나였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제국의 개국 때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선대 황제가 된 프란츠는 자신을 보필한 장군 악시온에게 말했다.
[악시온. 그대의 용맹함으로 대륙을 통일 할 수 있었다. 그 보답으로 네게도 왕관을 주마.]그렇게 악시온 왕국이 만들어졌다.
악시온 왕국은 충성으로 제국을 섬겼고, 제국은 악시온 왕국을 소중히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며 결속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두 나라의 사이는 끈끈했다.
매해 제국이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을 초대하여 성대한 연회를 여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덕분에 수도에 있는 숍들은 정신이 없었다.
악시온 왕국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 여인들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귀한 손님을 맡기 위해, 새 드레스와 보석을 맞췄다.
내 가게에도 그 날 화장을 해 달라는 예약이 밀려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해 주고 싶었지만, 내 몸은 하나라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예약을 한 로사사 공작 부인만 화장을 해 주기로 했다. 그녀는 고맙다며 팁 왕창 얹어 주었다.
‘히히. 역시 돈 많은 손님이 최고야!’
돈 벌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회가 열리기 며칠 전, 나는 로사사 공작 부인의 저택을 찾아갔다.
연회 날, 그녀에게 어울릴 화장을 미리 해 보기 위해서였다.
방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로사사 공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뒤에 서있는 루시안 때문이었다.
“카르디엔 님도 오셨네요?”
“저의 충실한 조수랍니다.”
“어머나.”
그녀가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진짜 이유는 루시안이 껌딱지처럼 딱 붙어 내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루시안은 내 금쪽 같은 화장품이 가득 담긴 무거운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있었으니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짐꾼이었다!
루시안은 화장대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내가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눈치를 줬지만 그는 꿋꿋이 버티며 자리를 지켰다.
마치 그곳이 제자리인 듯이.
그런 우리를 본 로사사 공작 부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는 카르디엔 경이 함께 있어도 괜찮아요. 불편하지 않으니 편하게 있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흑흑. 정말 자애로운 분이셔.
천사같은 내 고객님.
나는 로사사 공작 부인과 마주 앉았다. 맨얼굴의 그녀는 시골 아낙네보다 순박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감은 눈 위에 장미 가루를 톡톡 두들기며 물었다.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요.”
내 말에 로사사 공작 부인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사실 그래요.”
사절단을 맞는 연회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친목을 다지며, 속으로는 나라 대 나라의 국익을 논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자리였다.
그래서 나처럼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영애들은 초대되지도 않았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의 가주와 그의 부인만이 참석하곤 했다.
그런 묵직한 자리이니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 해도 긴장을 하는 게 당연했다.
로사사 공작 부인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게다가 좋게 말해도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은 점잖은 손님은 아니거든요.”
악시온 왕국은 제국과 긴밀한 동맹국이었지만, 여러모로 전혀 달랐다.
특히 다른 것은, 그들의 호전적인 성품이었다.
“소문대로 거친가요?”
“거친 정도가 아니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상대하기가 버거울 정도예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로사사 공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귀족들은 괜찮아요. 무례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선을 넘진 않거든요. 하지만 라라 공주님은 그렇지 않죠. 그분은 정말로 무서워요.”
라라 공주.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수십 명의 공주 중에서도 악시온 왕의 사랑을 가장 독차지하는 막내딸.
더불어 자타공인 소설 속, 최고의 악녀.
그녀는 원작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바로 황태자 칼릭스의 정략결혼 상대자로서였다.
에스텔과의 사이를 인정하지 못한 황태후는 그녀를 차기 황후로 밀어붙였다.
칼릭스는 완강히 그녀를 거부했다.
[내 옆자리에 있을 여인은 에스텔이다. 그러니 할마마마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제국을 떠나.]그러나 그녀는 악녀답게 그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라라는 칼릭스에게 집착했고, 에스텔을 질투했다.
결국 그녀는 에스텔의 목숨을 위협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칼릭스에게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한다.
‘나나 그녀나, 악녀의 최후는 너무 비참해.’
하지만 쉽게 동정할 수 없는 건 그녀가 정말 잔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로사사 공작 부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라라 공주라는 이름을 내뱉은 공작 부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공주가 아니라 흉악한 살인범의 이름을 담기라도 한 것 처럼.
나는 위로하듯 로사사 공작 부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마세요. 성격 더러운 공주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게 화장을 해 드릴 테니까요.”
그제야 로사사 공작 부인이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화장이 끝나고, 로사사 공작 부인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우아하면서도 아주 강인해 보여요. 페르니아 영애의 말대로 이 정도면 악시온 왕국에서 오는 이들도 나를 무시할 수 없겠어요.”
로사사 공작 부인이 진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고마워요, 페르니아 영애.”
나는 한껏 뿌듯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연회 당일에도 이렇게 화장을 해 드리면 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화장 도구를 정리하는데 로사사 공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르니아 영애. 갑작스러울 테지만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연회 당일 날 나의 시녀 자격으로 함께 연회장에 가 줄 수 있나요?”
의외의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의 연회에서는 귀족 시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악시온 사절단 환영회 같은 자리는 달랐다.
참석자들은 제 딸이나 친분이 있는 가문의 영애를 시녀로 데리고 가곤 했다.
아직 이런 자리에 설 일 없는 이들을 데리고 가서 정치적인 경험을 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따님과 함께 가시는 것 아니에요?”
“그러려고 했는데 딸아이가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요. 아무래도 너무 큰 행사인지라 긴장을 많이 했나 봐요. 몸도 성치 않은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괜한 실수라도 할까 겁이 나네요.”
“그래도 중요한 자리니만큼 함께 가시는 게 좋을 텐데요.”
로사사 공작 부인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 욕심이에요. 페르니아와 함께 가면 한결 편안하게 연회를 즐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로사사 공작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곤란한 부탁을 했나요?”
“…….”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곤란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연회장의 분위기가 험악할지언정, 큰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로사사 공작 부인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작 부인이라는 대단한 직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배려 깊고 다정했다.
나와 친해지면서 종종 공작 부인이라는 높은 자리에 대한 부담감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점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한 것은 저쪽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루시안 때문이었다.
‘분명 따라오려고 할 텐데.’
루시안은 상태가 정말 좋아졌다. 내가 절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여전히 나와 떨어지는 것은 힘들어했고, 분명 연회에도 따라오려고 할 것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사고라도 치면 어떻게 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결심했다.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무리한 일을 강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게 거절의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난 괜찮아요.”
루시안이었다.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말아요.”
“…….”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니아.”
얼마 전까지의 그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가 스스로 나가라고 내 등을 떠밀다니.
나는 당장 달려가 루시안을 껴안고 울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나와 루시안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로사사 공작 부인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애꿎은 그녀에게 몹쓸 커플짓을 보여 줄 수는 없지.’
나는 루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돌려 로사사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좋아요. 로사사 공작 부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도록 할게요.”
내 대답에 로사사 공작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 * *
며칠 후, 악시온 왕가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황성에 그들을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에는 기다란 테이블의 놓였다.
한쪽은 제국 귀족들의 자리였고, 한쪽은 악시온 왕국 사절단의 자리였다.
악시온 왕국 사절단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테이블에는 제국의 귀족들만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수장들이었다. 그들의 뒤쪽에는 그 못지않게 대단한 집안의 젊은 귀족들이 서 있었다.
시중을 맡은 이들이었다.
여자들은 단아한 드레스를 차림이었고, 남자들은 단정한 제복 차림이었다.
나도 색이 연한 드레스 차림으로 로사사 공작 부인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만한 귀족 가문들이 모두 모이다니 장관이네.’
나는 이런 행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귀족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테이블의 끝 쪽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가르시안 후작과 에리카 후작 부인이었다.
가르시안 후작은 일전의 연회에서 루시안이 저주를 받았다며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던 빌어먹을 놈이었다.
그는 요즘도 루시안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에리카도 마찬가지고.
‘하여간 부부가 쌍으로 재수 없어.’
그 순간 나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니가 감히 어떻게 여길 와?’
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잽싸게 혀를 집어넣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멀쩡한 얼굴을 했다.
에리카는 나를 향해 이 세상 가장 심한 욕을 내뱉고 싶어 하는 얼굴을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후작 부인이 되어 기고만장해졌다고 한들, 이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분란을 일으킬 만큼 간이 커진 건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시온 왕국의 귀빈들께서 입장하십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은 연회장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등장한 이는 라라 공주였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 온몸을 장식한 화려한 장신구까지.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건 거침없이 드러난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였다.
화려한 드레스 아래로 풍만한 가슴과 매끈한 다리가 과감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악시온 왕국이 제국보다 훨씬 개방적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저 정도야?
‘쩐다.’
라라 공주의 과감한 노출에 몇몇 제국의 귀족 남자들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라라 공주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어 그녀의 뒤를 따라온 악시온의 귀족들도 자리에 착석했다.
‘이래서 로사사 공작 부인이 상대하기 버겁다고 했구나.’
얌전하게 생긴 제국 귀족들과 달리, 하나같이 얼굴이 험악했다.
라라 공주는 도톰한 입술을 보기 좋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1년 만에 다시 보내요.”
“공주님께서는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그럼요. 잘 먹고 잘 컸답니다. 그렇게 보이죠?”
라며 커다란 가슴을 한번 출렁거린 건 우연인 건가. 일부러인가.
만약 의도한 거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 것보다 골 때리는 악녀라는 것을.
라라 공주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제국은 여전히…….”
라라 공주는 정말 실망스럽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미남이 없네요. 라라는 정말 슬퍼.”
도저히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폭탄 발언이었다.
그러나 저 정도는 예상을 했다는 듯 귀족들은 놀라지 않았다.
로사사 공작은 썩은 표정을 숨기며 온화한 얼굴로 묻기까지 했다.
“아직도 공주님께 맞는 배우자를 찾지 못했습니까?”
라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라라는 아름답고, 강하고, 성격이 더러운 남자가 이상형인데 도저히 나타나질 않네요.”
로사사 공작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곧 그런 분이 나타나실 겁니다. 신은 모두에게 꼭 맞는 인연을 준비해 주시는 법이니까요.”
로사사 공작, 리스펙.
저런 황당한 말을 저렇게 멀쩡하게 받아 주는 것을 보니 새삼 존경스러웠다.
‘그나저나 아름답고, 강하고, 성격이 더러워? 그거 꼭 누가 생각나는데…….’
라며 찝찝한 생각에 빠져드는데 라라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나저나 로사사 공작 부인. 화장을 바꿨어요?”
로사사 공작의 옆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로사사 공작 부인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1년 만에 보는데도 알아보시니 눈썰미가 정말 훌륭하시네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득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럴만도 했다.
라라 공주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속마음을 내뱉었고, 마음 여린 공작 부인은 상처를 받기 일쑤였다.
특히 외모에 대한 지적은 더더욱.
그러나 라라 공주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흠. 예쁜데요?”
“……!”
“밍숭맹숭한 두부 같았던 예전보단 훨씬 나아. 누가 해 줬는지 실력이 좋네.”
로사사 공작 부인은 기분 나빠 해야 하는지, 기분 좋아 해야 하는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다행히 라라 공주는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 한 명 한명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격이 더럽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싹싹하잖아, 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리오넬 후작. 요즘 입맛이 도시나 봐요. 2년 새에 살이 오동통하게 올랐어요. 그래도 관리 좀 해요. 그러다 부인한테 미움받는다고.”
“마르티엔 후작 부인.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렁주렁 달다니……. 사치스럽고 재수 없어 보이는 게 딱 내 취향인걸.”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의 가장 끝에 앉아 있던 가르시안 후작과 에리카에게 닿았다.
올해 작위를 받은 가르시안 후작과 에리카는 라라 공주를 처음 만난 것이었기에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젊은 부부를 향해 라라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새 가르시안 후작?”
“그렇습니다.”
가르시안 후작은 제 존재감을 각인시키려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라라 공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콧수염이 진짜 웃기네요. 빙글빙글 한게 꼭 달팽이같아.”
“……!”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가르시안 후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가르시안 후작이 당장 튀어 나가 공주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일전에 보았던 그는 꽤나 호전적인 성격이었으니까.
그러나 가르시안 후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가 치민 듯 눈을 부릅뜨고 콧구멍을 벌렁거리긴 했지만 거기까지 였다.
가르시안 후작은 감정을 꾹 참고 힘겹게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러나 라라 공주는 평범한 대화로 끌고 가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조차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칭찬 아닌데. 머리가 나쁜가 보당.”
아놔. 현웃 터지는 줄 알았네.
나는 입밖으로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나와 달리 가르시안 후작의 얼굴은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져 버렸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 황제가 등장했다.
“이 땅의 지배자, 제국의 고귀하신 황제 폐하 납십니다.”
황금 망토를 휘두르며 황제가 연회장에 들어섰다.
황제의 등장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도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연회장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를 바라본 이들의 눈이 커졌다.
테이블의 중앙, 상석에 앉은 황제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루시안이 새하얀 제복을 입고 서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기사, 카르디엔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환호했다.
‘우유 빛깔 루시안! 잘생겼다 루시안!’
로사사 공작부인의 시녀로 연회에 참석한다고 결정한 날, 나는 물었다.
[정말 나 혼자 보낼 수 있겠어요?] [혼자 보내지 않을 거예요. 저도 연회장에 갈 겁니다.] [어떻게요?]다시 말하지만 연회장은 엄선된 가문의 수장들만이 참석이 가능하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일하는 일꾼으로라도 취업을 하려고요?]장난스러운 내 말에 루시안이 대답했다.
[비슷하네요.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참석할거니까요.]루시안은 황제를 찾아가 청했다. 황제의 시종으로서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황제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오매불망 루시안을 기다렸던 건 황제 쪽이니까.’
나는 흐뭇한 얼굴로 황제의 등뒤에 서있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흰 셔츠를 입고 침대에서 흐트러진 모습도 좋고, 새까만 정장을 입고 가게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도 좋지만, 역시 저 모습이 좋아.’
나는 기사 카르디엔이 좋았다.
그런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모두 루시안의 모습에 넋을 놓았다.
방금 전까지 연회장의 모두를 쥐었다 폈다 했던 라라 공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처음 보는 동물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쏠린 관심을 걷어 낸 건 황제의 목소리였다.
“일단 인사를 하지. 악시온 왕국에서 온 손님들이여. 먼 길을 오느냐 고생했소. 그대들의 발걸음만큼 제국과 왕국의 동맹은 굳건할 것이오.”
황제의 말을 받은 건 라라 공주였다.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악시온 왕국은 늘 제국의 편입니다.”
“라라 공주는 1년 만에 더 성숙해진 것 같군.”
“17살과 18살의 차이는 크니까요.”
18살이었구나.
장난 아닌 몸매에 패기 넘치는 말투를 보고 그보다는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다.
‘고작 18살 된 애가 제국의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과 황제 앞에서 하나도 기가 죽지 않다니. 쟤도 대단하네.’
황제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설풋 웃음이 어렸다.
“그런데 악시온 왕은?”
“아쉽게도 아바마마는 오지 못하셨답니다. 제가 아바마마의 대행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왔지요.”
공주의 말에 제국 귀족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오늘의 연회는 단순히 개인적인 우정을 다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라와 나라의 우호를 다지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런 자리에 왕이 오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결례였다.
황제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칼릭스가 약혼을 해서 악시온 왕이 꽤나 기분이 상한 모양이구나.”
라라 공주와 칼릭스를 결혼시키려는 악시온 왕의 야망은 유명했다. 그 야망이 와장창 부서졌으니 꽁해 질 수 밖에.
‘그렇다고 연회에 불참하다니. 막무가내네. 정치라는 게 저렇게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 텐데.’
라는 내 예상을 라라 공주님은 가뿐히 뒤집어 주셨다.
“맞아요. 폐하께서 정말 너무하셨어요. 아바마마와 제가 얼마나 그 자리를 욕심냈는지 아시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약혼을 추진하시다니요.”
라라 공주는 두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 말했다.
“소식을 들은 날은 너무 화가 나서 아끼던 노예들을 열 명이나 죽여 버렸다니까요.”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들은 거지?’
그러나 아닌 모양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로사사 공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두 손을 꽉 잡은 게 보였으니까.
나는 황당한 얼굴로 다시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끔찍한 말을 담은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 예쁜 노예들이었는데. 속상해.”
“…….”
나는 같은 악녀 캐릭터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동질감이 싸그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악녀 정도의 레벨이 아니잖아.
완전 개똘아이야!
* * *
악시온 왕의 불참으로 조금 싸늘해지긴 했지만 연회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양국의 대표인 황제와 공주가 주로 대화를 했고, 귀족들은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끼어들었다.
양국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 황제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라라 공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군.”
제 앞에 있는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남다른 식욕을 자랑하고 있던 라라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라니요?”
황제가 말했다.
“몇 달 전 악시온 왕국에 나타나 단번에 왕가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남자 말일세. 이름이 그리폰이라고 하던가.”
라라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군요?”
“워낙에 소문이 대단했으니까.”
“그렇군요. 일단 호칭을 수정해 주세요. 이제는 그리폰 남작이랍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자는 외국인이라 작위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남작이에요. 얼마 전 아바마마께서 작위를 내려주셨거든요. 이름만 있는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요.”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악시온 왕국의 계급은 엄격했다. 그들은 제국보다 훨씬 엄격하게 귀족과 평민을 구분 지었다.
그런 악시온 왕이 남작이란 작위를 내려주다니.
그것은 단순한 호의를 넘어선 것이었다.
공주는 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폰 남작은 정말 멋진 분이랍니다. 정치, 역사, 전쟁, 미술, 많은 분야에서 지식이 대단하거든요. 게다가 화술도 어찌나 뛰어난지,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답니다.”
그녀의 말에 그리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외모도 정말 훌륭한데, 특히 눈동자가 정말 예뻐요. 꼭 방금 채집한 어린아이의 핏방울처럼 선명한 붉은색이거든요.”
공주가 긴 손가락으로 황제의 뒤에 서 있는 루시안을 가리켰다.
“꼭 저 남자처럼요.”
그 순간 연회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루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불쾌감의 표시였다.
그러나 라라 공주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으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만 닮은 게 아니네. 생김새랑 이목구비도 비슷해. 신기해라. 혹시 당신 그리폰 남작을 알아요?”
“…….”
루시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개무시였다.
아무리 그가 황제가 가장 아끼는 기사라고 해도,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이후 내내 웃던 라라 공주가 처음으로 정색했다.
“뭐야 지금. 기사 따위가 감히 나를 무시한 거야?”
눈을 부릅뜬 그녀가 붉은 입술을 올렸다.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어!”
충격적인 말에 나는 쩍 벌렸다.
공주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카르디엔 경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런가?”
공주는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정도인 줄 알았다면 진작 그를 보러 왔을 텐데요.”
그러더니 공주는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갑작스러운 공주의 행동에 당황했다.
황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공주는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폐하. 제게 카르디엔 경을 주세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돌처럼 굳었다.
루시안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황제의 목소리가 들린 후였다.
늘 담담했던 황제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대가 짓궂은 성격인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농담은 너무 심하군.”
“농담이라니요. 저는 진심이에요.”
그녀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절단으로 올 때마다 늘 제게 귀한 선물을 주셨잖아요. 제가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로요. 저는 카르디엔 경이 받고 싶어요.”
“…….”
“네?”
라라 공주가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반짝였다.
예쁜 인형을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 같이 천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말을 하는지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누구 맘대로 루시안을 달라 마라 해, 이 미친 여자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 철없는 공주의 따귀를 쳐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것은 황제가 그의 선에서 저 계집을 해치워 줄 것을 알아서였다.
라라 공주를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라라 공주.”
“네.”
“카르디엔은 짐이 가장 아끼는 기사다. 그를 달라는 것은 제국의 황제에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고 싶다는 것이지.”
“…….”
“그런 것이냐?”
어느새 황제의 얼굴에 웃음은 사라져 있었다.
냉기뿐인 얼굴에 남은 감정은 명백한 분노였다.
감히 황제의 것을 탐하는 도둑을 향한.
황제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내내 정신 나간 소리를 내뱉던 라라 공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너무하세요, 폐하. 저는 그냥 카르디엔 경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달라고 한 것뿐인데.”
황제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가 서늘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공주, 이곳은 악시온 왕국이 아니야.”
악시온 왕국에서는 모든 권력이 왕족과 일부 귀족에게 몰려 있다.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그들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국은 아니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 돈 문제로 몸을 파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물건처럼 거래되지는 않았다.
그것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기사라면 더더욱.
황제가 말했다.
“문화가 다름을 감안해도 공주가 실례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짐과 카르디엔에게 사과하도록.”
“……!”
라라 공주의 눈물이 맺힌 눈이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커졌다.
그러나 황제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라라 공주는 철없기는 해도 최소한의 눈치가 있었다. 그녀는 제게 껌뻑 죽는 왕에게 하듯 어물쩍 넘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라라 공주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며 훌쩍였다.
“제가 실언을 했어요. 부디 화 푸세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실수로 알겠다.”
황제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아직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독촉하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사과를 하라는 눈빛이었다.
라라 공주는 하기 싫은 일을 명령받은 아이처럼 입술을 깨물고 머뭇머뭇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시온 왕국의 귀족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폐하. 고작 평민 출신의 기사 따위에게 사과를 하라니요. 아무리 제국의 황제 폐하라고 하시지만 공주님께 너무나 엄격한 말씀이십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악시온 귀족도 그의 말에 동조하며 일어났다.
“맞습니다. 이건 우리 악시온 왕국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제국의 귀족들이 그들을 맞받아치려는 찰나, 라라 공주가 먼저 나섰다.
“다들 조용히 해. 폐하의 명령대로 그에게 사과를 할 거니까.”
라라 공주는 몸을 일으켜 루시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루시안은 화제의 중심이 된 사람답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라라 공주가 그를 향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
“…….”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재수 없는 사과였다.
라라 공주는 몸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랬어.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었거든.”
……하아. 미치겠네.
저 꼴을 계속 봐야 돼?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걸린 중요한 행사고 뭐고, 이쯤에서 미친 척하며 공주에게 달려가 머리채를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충동을 겨우 참을 수 있었던 건 루시안의 반응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파리가 왱왱거려도 저것보다는 관심을 줄 것 같은 얼굴로, 그녀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도 아무 반응 없는 루시안을 향해 라라 공주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이 몸이 사과를 했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설마 벙어리는 아닐…….”
처음으로, 루시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에 라라 공주가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이 맑디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닥치세요.”
라라 공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루시안이 한 말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루시안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당신이 뭐라고 떠들든 알 바가 아니지만, 그녀를 신경 쓰게 만들면 얘기가 달라지거든요. 당신이 내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어요.”
“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녀라니?”
루시안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는 나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중얼거렸다.
“입을 찢어 버리면 조용히 하려나.”
“……!”
끔찍한 말에 라라 공주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질투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절단으로 온 공주에게 저런 불경한 말이라니!
잠시 정적에 휩싸였던 연회장은 금세 불붙은 화약고처럼 불타올랐다.
양국의 귀족들이 모두 의자에서 일어났다.
먼저 소리친 건 악시온 왕국의 귀족들이었다.
“지, 지금 기사 따위가 공주님께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기사라 해도 용납되지 않는 행위입니다.”
“당장 저자의 목을 베십시오, 폐하.”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챈 제국의 귀족들도 상황을 수습하려 끼어들었다.
“고, 공주님께서 먼저 카르디엔 경께 무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르디엔 경의 영혼을 상처 입히기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가뜩이나 카르디엔 경은 악마에게 저주를 받은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그 와중에 루시안의 열혈 안티인 가르시안 후작은 개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저자를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악마로 변해 사람에게 달려들지 모른다고요.”
저 자식이!
개싸움장으로 변해 버린 연회장을 조용히 만든 건 황제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다들 그만!”
늘 온화했던 황제가 그렇게 번개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흥분한 얼굴로 서로를 공격하던 이들이 멈추었다.
황제가 말했다.
“뜻깊은 자리에서 별별 말이 다 나오는 걸 보니 연회의 주최자로서 불쾌하기 짝이 없구나. 누구든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내뱉는다면, 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린 형형한 빛은 섬뜩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