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7
23.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황제는 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루시안. 아무리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라 해도 방금 전 말은 너무 심했어. 당장 연회장을 떠나거라.”
싸늘한 축객령이었다.
물론 루시안은 황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것을 안 황제는 영민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페르니아. 어서 그를 데리고 가거라.”
“네!”
로사사 공작 부인의 뒤에 서서 초조해하던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황급히 루시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루시안은 방금 전까지 험악한 말을 내뱉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얌전히 나를 따라왔다.
나는 연회장을 나가기 전,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배려에 대한 인사였다.
황제가 루시안을 내보낸 것은, 단순히 그를 향해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루시안이 양국의 귀빈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리는 끔찍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말이야.’
문을 나서기 전, 나는 연회장 안을 살펴보았다.
기가 찬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제국 귀족들. 분하다는 듯 이를 가는 악시온 귀족들.
……그리고 사냥감을 쫓는 사자처럼 눈을 번뜩이는 라라 공주.
그 눈빛이 너무 섬뜩해 나도 모르게 등 뒤로 오한을 느꼈다.
다행히 그 순간 문이 닫혔다.
겨울밤처럼 싸늘한 곳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 * *
나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황성 바깥으로 나왔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적어도 눈이 회까닥 뒤집혀 다 죽여 버리겠다, 라며 폭주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니아야말로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죠. 그런 걸 왜 물어봐요?”
루시안이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까 그 여자가 나를 바라볼 때 니아의 표정이 엄청났거든요.”
“……어땠는데요?”
루시안이 두 손으로 제 눈꼬리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이랬어요.”
“……거짓말.”
“정말이요. 눈으로 공주를 죽일 것 같았다니까요.”
……루시안답지 않은 호들갑이었다.
게다가 당신. 그 말 하는데 왜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건데.
나는 왠지 놀림받는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딴 여자가 내 남자 친구에게 가지고 싶다느니, 첫눈에 반했다느니, 말을 하니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하잖아요!”
루시안이 키득 웃었다.
“그랬구나.”
아이처럼 웃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날 데리고 나오지 말고 그냥 두지 그랬어요. 그럼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공주의 입을 찢어 버렸을 텐데요.”
이봐요, 남자 친구님. 그런 끔찍한 말은 좀 어울리는 얼굴로 해 줄래요?
해사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좋았겠지만.”
이크.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 흉측한 짓은 마음속으로 해도 충분해요. 중요한 자리였으니까요.”
“…….”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그것도 양국의 내로라하는 귀빈들이죠. 그런 자리에서 난동을 일으켰다가는 당신도 나도 곤란해져요.”
나는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루시안도 참은 거죠?”
루시안이 정말 마음먹은 대로 했다면, 공주는 지금 살아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비록 제 속에 있는 욕망을 입에 담긴 했지만, 정말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너무 기뻤다.
그런 불쾌한 상황 속에서도, 루시안이 잔혹한 본능을 억눌렀다는 사실이.
루시안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냥 당신한테 미움받는 게 싫어서 노력을 한 것뿐이에요.”
그런 이유라도, 내게는 충분했다.
나는 루시안을 껴안았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루시안은 귀한 손님에게 엄청난 말을 해 버렸고, 그것으로 인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런 건 괜찮았다.
어떻게든 수습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그가 이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나는 루시안에게 속삭였다.
“정말 잘했어요. 대단해, 나의 루시안.”
“상, 줄 건가요?”
어린아이 같은 말과 달리, 달빛 아래 보인 그의 얼굴은 무척 야릇한 분위기였다.
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루시안은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 그토록 잔혹한 말을 내뱉었던 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었다.
그는 나를 번쩍 안더니 번개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생각했다.
‘루시안. 마차보다 훨씬 빠르긴 하지만 쪽팔려요. 흑흑.’
천사 소녀 네티처럼 어두운 도시를 달려가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수도에 있는 거대한 저택은 황제가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을 위해 마련해 준 곳이었다.
수도에 있는 동안 최대한 편안하게 지내라는 배려였다.
꼭대기 층에 위치한 저택의 가장 넓은 방은 라라 공주의 방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흐느끼고 있었다.
“흑흑.”
처량 맞은 소녀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곁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여인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한 그녀들은 라라 공주를 모시는 노예들이었다.
그녀들의 몸에 난 상처는, 연회장에서 돌아온 라라 공주가 채찍질해 생긴 상처였다.
평소라면 이 정도 때렸을 때 화가 풀렸을 텐데, 공주의 감정은 누그러지질 않았다.
노예들은 감히 주인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도 묻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방 안에 들어섰다.
남자의 등장에 노예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눈짓에 노예들은 고개를 꾸벅이며 쪼르르 방 안을 나갔다.
방 안에는 남자와 라라 공주만이 남았다.
남자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훌쩍이던 라라 공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감히 내게 그런 불경한 말을 한 놈을 어떻게 그냥 둘 수 있느냔 말이에요!”
남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아끼는 기사라면서. 고작 그런 일로 아끼는 신하를 잃기는 싫었겠지.”
흐느낌을 멈추지 않는 라라 공주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속상하면 당장 악시온 왕에게 말해 버려. 네 말이라면 황제가 아끼는 신하든 말든, 당장 쫓아와 사지를 절단한 후 사자의 먹이로 던져 버릴걸?”
“그건 싫어!”
라라 공주가 소리를 빽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남자는 라라 공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찌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못난이 개구리 같아.’
남자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라라 공주가 눈물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라라는 정말 그가 마음에 들었단 말이에요. 조금도 상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가지고 싶어요.”
그 말에 남자는 키득거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왕의 사랑을 듬뿍 받은 라라 공주는 욕심이 많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꼭 가져야만 했다.
특히 그녀의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을 발견할 때 그랬다.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것.
그러면서도 독이 묻은 검처럼 위험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
그녀는 그런 것을 좋아했다.
“노예로 가지고 싶다는 거니?”
“그런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를 내 남편으로 삼을 거예요.”
그 말에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들은 듯 어깨를 떨었다.
라라 공주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라의 말이 농담 같아요?”
“그런 건 아냐. 그냥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공주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 찼다.
“왜요. 그자의 신분 때문에?”
남자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있긴 하지. 그러나 그건 큰 문제는 아니야. 신분 차이가 꽤 나긴 하지만, 공주님과 외국의 솜씨 좋은 기사가 맺어지는 일은 보기 드문 것도 아니니까.”
희망적인 말에 공주의 얼굴이 대번에 풀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녀의 얼굴은 다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르디엔에게는 약혼녀가 있어.”
“……!”
그제야 공주는 연회장에서 보았던 얼굴이 생각났다.
카르디엔이 섬뜩한 얼굴로 입에 담았던 ‘그녀.’
그리고 황제에게 부름받아 카르디엔과 함께 연회장을 나가 버린 ‘그녀.’
카르디엔과 특별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약혼녀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라라 공주는 한눈에 반한 남자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울상을 짓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그따위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 여자에게는 더 괜찮은 남자를 붙여 주면 되죠.”
그냥 내뱉은 허풍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평민 출신의 기사 따위보다 훨씬 좋은 가문에, 엄청난 재산을 가진 남자를 소개해 줄 수 있었다.
남자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쉽지 않을걸? 왜냐면 두 사람은 황제가 직접 중매를 해 준 사이고…….”
라라 공주가 그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그럼 더 잘됐네요. 황제에게는 두 사람을 파혼시켜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어떻게든 악시온 왕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싶어 하니 좋아할 거예요.”
그럴지도 모른다.
황제는 공주의 포악한 성품을 알기에 제 아들의 상대자로 여기기엔 그녀를 마땅치 않아 했다.
하지만 아끼는 부하의 아내가 된다고 하면 다를 것이다.
황제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황제를 설득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수도에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서로를 향한 애정이 대단하다더군.”
“…….”
“약혼녀의 사랑으로 카르디엔이 악마의 저주를 풀었다는 말까지 들려올 정도로 말이야.”
남자의 말에 라라 공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딴 말을 믿어요, 그리폰?”
라라 공주가 고개를 들어 그리폰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피처럼 붉은 새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카르디엔과 같은.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전혀 달랐다.
카르디엔이 은빛 머리카락의 반짝이는 얼굴이었다면,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느껴지는 분위기도 훨씬 중후했다.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꼭 닮아 있었지만.
그리폰이 말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붉은 눈은 애초에 저주 따위가 아니니까.”
“맞아요. 그러니 그딴 이야기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야깃거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일 뿐이니까요.”
라라 공주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의 의기소침했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만한 얼굴로 턱을 들어 올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그녀의 풍만한 몸매가 드러났다.
“그리폰과 대화를 하다 보니 더 가지고 싶어졌어요.”
“어떻게?”
라라 공주가 도톰한 입술을 올리며 대답했다.
“남자를 가지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가요?”
덮치면 되지.
소녀가 내뱉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말이었건만, 그리폰은 웃었다.
재미있는 유흥거리라도 생긴 듯이.
* * *
연회 다음 날, 라일락 저택에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라라 공주. 수신인은 루시안이었다.
당연히 루시안은 그 편지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가 손도 대지 않은 편지를 본 앤은 정색했다.
“아니. 약혼녀 있는 남자한테 왜 편지를 보낸대요? 재수 없어!”
기민한 감으로 불길함을 느낀 앤은 초대장을 태워 버렸다.
그러나 편지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도착했다. 루시안은 계속 무시했고, 앤은 계속 태워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장에 적힌 수신자의 이름이 바뀌었다.
나의 이름으로.
마음 같아서는 루시안처럼 무시하고 싶었지만, 나까지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벌레라도 잡는 것처럼 끔찍한 얼굴로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어 내렸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노예 운운하며 사람을 죽이니?
나는 기가 찬 얼굴로 편지를 마저 읽었다.
편지의 문체는 정중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네 남자 친구를 알아서 끌고 오라는 그녀의 메시지였다.
“하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쌌다.
공주의 말대로였다.
그 일은 이대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나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나마 제국 귀족을 상대로 벌어진 일이었다면 황제 찬스로 무마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황제마저 조심스레 대하는 타국의 공주였다.
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편지를 노려보다가 결정했다.
“앤. 외출 준비를 해 줘.”
옆에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앤이 물었다.
“정말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내가 보고 싶다고 하잖아.”
정확히는 루시안을 보고 싶어 하는 거겠지만.
앤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가지 않으시면 안 돼요? 그 공주님을 직접 뵌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앤. 역시 너는 신기가 있는 게 분명해.
저택을 나가서 돗자리 깔면 분명 성공할 거야.
나는 앤에게 강력하게 새로운 직업을 추천해 주는 대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 버릴걸.”
“설마요. 아무리 악시온 왕의 사랑을 받는 공주님이라도 고작 이런 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모르지. 의외로 전쟁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불씨를 피우는 법이니까.”
앤의 얼굴이 한결 더 어두워졌다. 괜히 순진한 사람에게 겁을 준 것 같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 없어.”
“그럼 다행이지만…….”
“어쨌건 공주는 만날 거야. 이대로 모른 척해서 될 일은 아니거든.”
직접 공주를 만나서 제대로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앤이 내 고집을 꺾는 것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카르디엔 님과 같이 가시는 건가요?”
“아니. 혼자 다녀올 거야.”
앤의 눈이 커졌다.
“왜요? 함께 가시는 편이 더 좋을 텐데요. 공주님이 아가씨께 못된 말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일개 후작 영애고, 그녀는 일국의 공주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혼자 온 나를 향해 그녀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치욕스러운 말을 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루시안과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었다.
‘노예니 뭐니 온갖 더러운 말을 한 여자에게 루시안을 데리고 가라고? 절대 싫어!’
그녀가 루시안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알량한 질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루시안을 데려가 보았자 상황이 더 나쁘게 흐를 것이 뻔하니까.
이번에야말로 그는 공주의 입을 찢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되지.’
응, 절대 안 돼.
여기에서 일이 더 커지는 건, 원치 않았다.
나는 앤에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나를 지킬 방법쯤은 생각해 두었으니까.”
“그래도…….”
앤은 걱정 어린 얼굴로 눈을 굴리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카르디엔 님께서 아가씨를 혼자 가게 두시겠어요?”
저택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앤은 루시안의 상태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비정상적으로 내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루시안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괜찮아. 최근에도 나 혼자 외출을 한 적이 몇 번 있었잖아. 루시안과 함께 가기 힘든 자리라고 하면 납득할 거야.”
물론 엄청난 보상을 내걸어야 하겠지만.
“그러니 루시안에게는 내가 어디에 가는지 말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결국 앤은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는 루시안이 보였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 선 루시안은 밀짚모자를 쓰고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내게 직접 피운 꽃을 선물해 주고 싶다며 얼마 전에 시작한 취미 생활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 포기했던 욕심이 일곤 했다.
그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지 않았으면 했다.
환한 빛 속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었으면 했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적어도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나락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 * *
예상대로 나는 혼자 외출을 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보여 주지 않고 아껴 두었던 내 어린 시절의 초상화와 전 연령가에서는 차마 밝힐 수 없는 보상까지 걸어야 했다.
내가 향한 곳은 공주가 묵고 있다는 저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린 하인이 나를 맞이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하인의 목에는 악시온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목걸이가 목에 딱 붙어 매여 있는 걸 보고 그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노예구나.’
악시온 왕국에서 왕족과 귀족의 수발을 드는 건 모두 노예라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제국 또한 엄격한 신분 사회지만, 적어도 사람은 사람으로 대한다.
사람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노예라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따라오십시오.”
하인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하인을 따라 걸었다.
나라의 귀빈을 맞는 용으로 제작된 저택은 엄청나게 컸다. 공주의 방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독채 건물이었다.
하인이 문 앞에서 말했다.
“라라 공주님. 페르니아 라일락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꾀꼬리처럼 높은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인이 문을 열었다.
방의 내부가 보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거대한 방의 크기나, 화려한 인테리어에 놀란 것이 아니다.
내가 놀란 건 방을 가득 채운 수십 명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다양한 그들은 제각각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노출이 많고 하늘거리는 악시온의 전통 의상, 제국에서 유행하는 화려한 드레스, 그리고 저 먼 차오의 사람들이 입는다는 심플한 원피스까지.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해사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마치 잘 꾸며진 인형처럼.
그리고 그사이에 화려하게 꾸민 라라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로 그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내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카르디엔은?”
하여간, 예의 없는 계집애.
사람을 불러놓고 먼저 한다는 말이 그거야?
재수는 없었지만 괜찮았다.
나도 마음에 없는 인사를 나누며 하하, 호호거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루시안은 오지 않았어요.”
“뭐, 왜?”
눈을 크게 뜬 공주를 향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물론 근본 없는 뻥이었다.
루시안은 그 어떤 치열한 전쟁터에서 한 번도 상처나 병이 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라라 공주도 아는 사실이었다.
라라 공주의 눈이 뾰족해졌다.
“일부러 그를 두고 왔구나?”
“설마요.”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라라 공주의 얼굴에 어린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게 누군지 알면서 이러는 거니? 너, 내가 만만하구나?”
라라 공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표독스러워진 얼굴에는 섬뜩한 눈빛이 남았다.
당장이라도 붉고 긴 손톱으로 내 얼굴을 휘갈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런 몹쓸 짓을 하기 전에,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 찍힌 문양을 본 라라 공주의 눈이 커졌다.
황금 사자.
황제의 문양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주신 편지랍니다.”
“……뭐?”
“여기 오기 전에 황제 폐하를 뵈었거든요. 공주님과 만나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아쉬운 감정을 풀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답니다. 그간 신경이 쓰이셨는지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
“그러더니 제게 이 편지를 써서 주셨어요. 공주님께 전해 드리라고요.”
나는 라라 공주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라라 공주는 편지를 빼앗듯 가져가 읽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황제의 바람이 듬뿍 들어간 편지였다.
그러나 내게는 편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나의 방패막이다.
이 편지가 있는 한, 공주는 내게 어떤 패악질도 할 수가 없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황제의 기대를 무시해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라라 공주는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생긴 것답지 않게 머리 좀 굴리는구나?”
너는 생긴 대로 노는 것 같은데. 어디서 머리 좋다는 말 들어본 적 없지?
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가 좀 그래요, 호호호.”
공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 * *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공주에게 할 말만 하고 잽싸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주도 내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붙잡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예상보다 오래 공주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배덕한 느낌으로 말이지.’
바닥에는 호화로운 음식들이 깔려 있었고 홀에는 노예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나와 라라 공주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어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 중에 니 취향이 한 명 정도는 있을 것이야.’라는 말이 생각나는 다양한 외모의 노예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라라 공주가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러 왔다며. 그럼 술 상대는 정도는 해 주고 가야지.”
저렇게 말하는데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는 술자리인가.’
속으로 줄줄 눈물을 흘리는데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여인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그래. 이 정도 장단은 맞춰 주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여인이 주는 술을 받았다.
공주가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내 노예들. 하나같이 귀엽지?”
저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썩은 표정으로 웃었다.
딱히 내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닌 모양인지 공주는 술잔을 들이키며 입술을 삐죽였다.
“카르디엔이 올 줄 알고 예쁘게 꾸며서 준비시킨 건데 정말 실망스러워.”
헐. 이런 문란한 곳에 내 남자 친구를 앉혀 두려고 했단 말이야?
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루시안이 오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는 이런 분위기를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거든요.”
“…….”
라라 공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노예들도 모두 얼굴이 굳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는 뻔뻔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라라 공주님. 루시안을 만나려고 한 건, 사과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겠지요?”
당돌한 말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공주는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화려한 화장을 하고 야릇한 옷을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하게 사과를 받으려는 복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마음 넣어 두세요.”
“하. 그의 약혼녀라고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감히 후작 영애 따위가 내게 명령을 하는 거니?”
“아니요. 공주님을 위해 드리는 말이랍니다. 어떤 노력을 하셔도 루시안은 공주님께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입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왜냐면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으니까요.”
“……!”
“괜한 것에 힘을 들이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술잔을 모두 비웠다.
어느새 음악은 들리지 않았고, 춤을 추던 노예들도 멈춰 있었다.
주인의 눈치를 헤아리는 노예들 속에 라라 공주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공주님의 술 상대도 제법 해 드린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공주에게 인사를 했다.
숙인 머리 위로 공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하고 싶은 얘기만 지껄이고 가면 그만이니?”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이 만남을 지켜보고 있다.
공주는 결코 내게 무슨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당장 이 망할 계집애를 붙잡아.”
공주의 말과 동시에 순식간에 곱게 미소 짓던 노예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나의 두 팔을 잡아 억압했다.
나는 소리쳤다.
“제게 손가락 하나 대기라도 한다면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사게 되실 겁니다.”
“걱정 마. 나는 네년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거니까.”
그녀는 붉은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기는커녕 보호해 줄 거라고. 왜냐면 페르니아 영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버리거든.”
그녀가 손짓했다.
노예 한 명이 술병을 들고 다가와 내 입에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콸콸,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술을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공주가 나를 보며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술에 취한 약혼녀를 데리고 가라고 하면, 그가 잽싸게 나타나겠지? 드디어 카르디엔을 볼 수 있어!”
공주는 두 손을 맞잡고 황홀한 얼굴로 웃었다.
* * *
“어때. 나 괜찮아?”
라라 공주의 말에 그녀의 치장을 담당하는 노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누구라도 공주님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달콤한 말을 들으며 공주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보석이 반짝였고,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은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드레스 아래로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내가 봐도 훌륭해.’
라라 공주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도 뭔가 좀 아쉬운데. 가슴 위에 향유를 더 발라 볼까?”
그 순간, 쾅 하고 문이 열렸다.
라라 공주와 노예들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루시안이었다.
라라 공주가 루시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루시안이 훨씬 빨리 저택에 왔기 때문이다.
‘어쩜. 제국 최고의 기사라더니, 속도도 남다르네. 그런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라니.’
서늘한 눈빛으로 서 있는 루시안의 모습은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면서도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웠다.
라라 공주는 온몸이 짜릿해졌다.
‘역시, 이 남자가 좋아.’
그 어떤 노예라도 눈앞에 있는 남자보다 반짝이진 않을 것이다.
라라 공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카르디엔.”
어느새 그녀의 곁에 있던 노예들은 방 안을 나가고 없었다.
흐릿한 등불 속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라라 공주의 모습은 요염했다.
한창 사춘기를 겪는 소년들의 꿈속에 나타날 법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의 얼굴에는 조금의 흥분도 없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니아는 어디 있지?”
공주는 그 말에 기분이 잡쳤다.
‘흥.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내 모습을 보고 동하지 않는 거냐고.’
물론 그 정도로 라라는 기죽지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쉽게 넘어올 남자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유혹은 이제 시작이다.
“그 여자는 지금 다른 방에서 잠들어 있답니다. 라라는 술 취한 사람에게도 다정하니까요.”
공주는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매혹적인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평범한 향수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음지에서 내려져 오는 남자를 유혹하는 향이었다.
라라 공주가 붉은 입술을 야릇하게 벌리며 말했다.
“카르디엔.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 알고 있겠죠?”
그녀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소녀 같으면서도 농염한 여인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죠. 나를 택하면 당신은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영지보다 10배는 더 큰 땅도 줄 수 있고, 이 제국이 주지 못했던 대단한 작위도 줄 수 있어요. 후작, 공작. 당신이 원하는 자리는 무엇이든요. 악시온 왕이 가장 사랑하는 딸인 내게는 그만한 힘이…….”
더 이상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기 때문이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가 말했다.
“니아는 어디 있냐고.”
“…….”
붉은 눈동자가 귀신처럼 섬뜩했다.
* * *
라라 공주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녀는 늘 때리는 입장이었지,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조금만 힘을 주면, 그녀의 턱은 산산조각이 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남자는 조금도 자신의 답을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라라 공주는 겨우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여, 여방에.”
루시안의 손에 얼굴이 일그러져 발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루시안은 거칠게 공주를 놓았다. 공주는 다 쓰고 버려진 물건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뒤돌아서는 루시안을 향해 라라 공주가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서!”
그러나 루시안은 공주의 말을 무시했다.
공주가 악쓰는 소리를 들은 노예들이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저놈을 당장 잡아! 감히 내 몸에 손을 댄 죄인이다!”
몇 명의 노예들이 루시안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루시안은 먼지라도 털 듯, 가뿐히 그들을 던져 버렸다.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무도 루시안을 막을 수 없었다.
루시안이 향한 곳은 공주가 가리켰던 옆방이었다.
자물쇠로 문이 잠겨 있었지만, 그것도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루시안의 발길질 한 번에 단단히 닫혀 있던 나무 문은 부서져 버렸다.
루시안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페르니아가 누워 있었다.
루시안은 다급히 그녀를 품에 안고 숨 쉬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숨소리가 골랐다.
그는 페르니아를 안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잃어버린 주인을 되찾은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품에 안았다.
어느새 몰려든 병사들과 노예들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들 사이로 노예의 부축을 받는 라라 공주가 서 있었다.
라라 공주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연회장에서 그냥 넘어갔다고 또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이번에는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악시온 왕국의 이름을 걸고 어떻게든 네 죄를 물어 목을 잘라 버릴 거라고.”
처음으로 루시안이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루시안이 공주와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저히 미소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도발적인 눈빛에 라라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공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한 손으로 페르니아를 어깨에 들쳐 업은 후, 나머지 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뺐다.
달빛 아래로 날이 번뜩이는 검이 나타나는 순간, 라라 공주와 병사들이 어깨를 흠칫했다.
루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집에 데려가고 싶어. 그런데도 날 막는 자가 있다면 죽일 수밖에.”
섬뜩한 얼굴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 * *
속이 울렁이는 숙취를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눈에 보인 건 라일락 저택의 내 방이었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들어왔고, 그 아래 루시안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빙긋이 웃었다.
“일어났어요?”
그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가 처음 흑화한 모습을 보았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라라 공주의 저택에 갔던 일. 그녀가 강제로 내게 술을 먹였던 일.
그런 나를 바라보며 라라 공주가 했던 말.
[술에 취한 약혼녀를 데리고 가라고 하면, 그가 잽싸게 나타나겠지?]어느새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누가 나를 데려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최악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루시안을 향해 외쳤다.
“서, 설마 죽인 거예요?”
루시안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를요?”
“라라 공주요!”
아니, 라라 공주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에게 손을 댔다면 저택에 있는 이들이 다 몰려들었을 테니.
머릿속에 거대한 저택이 수십 구의 시체로 쌓여 가는 참상이 그려졌다.
창백해진 나를 바라보며 루시안이 다독이듯 말했다.
“진정해요, 니아.”
바들거리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루시안이 말을 이었다.
“방해하는 노예 몇 명을 집어던지긴 했지만 죽이진 않았어요.”
“저, 정말요?”
“네.”
루시안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제야 아주 조금, 안심이 됐다.
왜냐면 그는 절대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가 사람을 죽였다면 솔직하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지 않다는 건 그가 정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깊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며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루시안은 비틀거리는 나를 끌어당겨, 그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저택으로 데리고 온 후 의사에게 진찰을 부탁했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이 든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일어나면 숙취가 심할 테니 잘 보살펴 주라고 했어요.”
나는 그 말에 깊은 빡침을 느꼈다.
‘라라, 이 망할 계집. 그런 수를 쓸 줄이야.’
차라리 그녀가 내게 독을 썼다든가, 감금을 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 반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은 아니었다.
그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세상은 술에 있어서는 너무나 관대했으니까.
‘내가 강제로 마시게 됐다고 떠들어 봤자, 누구도 공주의 행동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지.’
그러기는커녕, 귀족 영애가 타국의 공주가 권한 술을 신나게 마시다가 취해 버렸다며 손가락질이나 당할 것이다.
‘열 받아!’
당한 만큼 되돌려 줄 수가 없어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데 루시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요, 니아.”
무슨 걱정?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이대로 라라 공주를 그냥 두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시는 당신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할 거예요.”
나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죽이면 안 된다니까요!”
루시안이 대답했다.
“죽이지 않을 거예요.”
“…….”
“적어도, 내 손으로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데.
다정한 말투와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잔혹함도 찾아볼 수 없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 * *
이른 아침. 다급한 일이라며 악시온의 귀족이 황제를 찾아왔다.
그들은 황제에게 지난밤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제 폐하! 며칠 전 연회장에서의 일을 원만히 풀고자 라라 공주님께서 페르니아 영애를 만난 것은 알고 계시지요? 라라 공주님께서는 페르니아 영애에게 화해의 술잔을 건네셨고, 페르니아 영애는 제 주량도 가늠하지 못해 술에 취해 버렸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황제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술 취한 약혼녀를 데리고 가라는 연락을 받고 카르디엔 경이 저택에 들어섰죠. 이유 모를 분노에 휩싸인 카르디엔 경은 그를 맞이한 라라 공주님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공주님을 모시는 노예와 병사들에게도요.”
황제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죽었나?”
황제의 말에 악시온의 귀족이 정색을 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요. 공주님께서는 몹쓸 짓을 당한 충격으로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계시고요.”
황제는 안도했다.
죽이지 않았다면, 협상의 여지는 있다.
부드러운 말과 달콤한 보상을 내걸면 그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악시온 귀족은 공주의 뜻을 전달했다.
“카르디엔의 처벌 권한을 공주님께 넘기십시오! 카르디엔은 공주님께 직접 신성한 옥체에 손을 댄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짐의 기사야. 짐의 기사가 죄를 저질렀다면 짐이 벌을 주는 게 맞지.”
“연회장에서의 일도 그런 식으로 넘어갔다가 이런 사단이 난 것 아닙니까!”
악시온 귀족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폐하께서는 카르디엔에 대한 애정에 눈이 멀어 그를 벌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분께 제대로 된 벌을 기대할 수 없어요.”
“…….”
가라앉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악시온 귀족이 말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넘어가지 않으면?”
“긴 시간 지켜오던 두 나라의 우애는 산산조각나 버리겠죠.”
악시온 귀족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비 오는 밤의 폭풍 같았던 악시온 귀족이 돌아갔다.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을 맞은 지 고작 며칠이 지난 것뿐인데, 몇 달은 지난 것처럼 피곤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맑은 목소리가 황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전쟁.”
황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황제의 앞에 루시안이 서 있었다.
루시안은 황제에게 무릎을 꿇어 예를 차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어 물었다.
“몇백 년을 이어온 동맹을 깨뜨리자는 말이냐?”
“오래된 약속이라 해서 지켜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제는 빛바랜 해묵은 약속이라면 더더욱요.”
루시안이 황제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어차피 악시온 왕국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
루시안의 말대로였다.
현 악시온 왕은 호전적이었다.
그는 즉위했을 때부터 제국에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그는 제 발톱을 훤히 드러내지 않고 참았다.
아름다운 막내딸이 제국의 황후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황태자 칼릭스는 다른 여인과 약혼해 버렸다.
제 딸이 제국의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 악시온 왕은 반감을 드러냈다.
올해 사절단과 함께 오지 않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세간에서는 악시온 왕국이 군대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황제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무작정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명분이 너무 부족해.”
라라 공주가 조금 제멋대로 굴었다는 것은 전쟁의 명분이 되기에 약했다.
명분 없는 전쟁은 여러모로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국민의 사기가 오르지 않고, 또한 다른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험이 컸다.
루시안은 웃었다.
“명분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폐하는 압도적인 힘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테니까요.”
제국민들의 사기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더불어 강대한 힘에 주변 국가들은 조금의 불만도 터뜨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을 이해한 황제가 묘한 시선으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출전하겠다는 거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마치 기이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루시안을 곁에 두었지만, 그가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안은 늘 황제가 명령한 만큼만 행동했다. 딱 황제가 기대하는 만큼 싸웠고, 황제가 주는 만큼만 받았다.
루시안에게는 그 어떤 욕구도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먼저 전쟁터에 나가길 자처하다니.
그것도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확신하며 말이다.
“많이 바뀌었구나, 루시안.”
황제의 말대로 루시안은 변했다. 늘 그렇듯 그가 변한 것은 페르니아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시안은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페르니아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검을 내려놓고, 페르니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자신을 향해 많은 이들이 비웃는 것을 알았다.
[악마의 저주를 받은 여파로 바보가 되어 버린 게 틀림없어.] [제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하고 여자에게 홀리다니 한심해.]뭐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이 들어온 후, 상황은 달라졌다.
라라 공주는 페르니아를 제멋대로 휘둘렀다.
페르니아는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라라 공주는 한 나라의 귀한 공주였고, 페르니아는 일개 후작 영애였기 때문이다.
그 신분의 차가, 페르니아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페르니아는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테지.
그것이 미칠 만큼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무시하는 자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녀의 미움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루시안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사람을 베고, 뭉그러뜨려 죽이는 그런 힘이 아니라, 애초에 건들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그런 힘.
권력과 직위였다.
그리고 루시안은 가장 무던히 제게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았다.
황제였다.
이대로 황제의 목을 치고, 황위에 앉는다면, 페르니아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그녀가 행복해하지 않겠지.’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루시안은 황제를 찾아왔다.
황제를 통해 제가 가지고 싶은 것을 받을 생각이었다.
루시안이 말했다.
“악시온 왕국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폐하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시오.”
“왕국을 가지고 싶은 거냐?”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페르니아는 제국을 좋아한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공작 정도의 직위면 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눈에 띄게 편애해 주십시오.”
호화로운 직위. 황제의 편애.
그 정도면 이제 누구도 페르니아를 무시하지 못할 터였다.
황제는 곤란한 듯 웃었다.
예전에는 눈앞의 부하가 뭐라도 제게 요구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였다.
루시안이 제게 요구하고 있었다.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눈빛으로.
이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협박이었다.
‘평생 들었던 협박 중 가장 즐거운 협박이구나.’
여러모로 황제에게 이득인 협박이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프란츠의 성을 걸고 약속하마.”
황제의 수락에 루시안은 두 손을 들어 환호하는 대신 차분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정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은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를 정비하고, 어떤 루트로 적국을 침투할지 작전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짚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루시안. 아직까지 네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며 경계하는 자들이 많다. 지금 ‘그 힘’이 발현한다면 많은 이들이 너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루시안이 악마라고 치부하며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루시안을 신임한 황제와, 그를 감싼 성녀까지 휘말리게 되는 큰 문제였다.
루시안은 절대 악마의 힘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물론 루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저 혼자 쳐들어가 악시온 왕의 목을 따 버리진 않을 겁니다. 병사들을 지휘하여 정석으로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쟁취하겠습니다.”
루시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야만 페르니아의 평화를 지켜줄 수 있으니까.
악마의 악혼녀보다는, 기사 카르디엔의 약혼녀가 그녀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루시안의 속마음을 읽은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페르니아로 귀결되는군. 그 애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겠어.’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단상 위에 선 황제가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제의 명령이다, 루시안. 악시온 왕국을 짐에게 가지고 오거라.”
여자에게 미친 악마가 아닌, 황제의 기사 카르디엔의 이름으로.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루시안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
다음 날, 악시온 왕국의 사절단이 다시 황제를 찾아왔다.
그들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악시온 전하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당장 카르디엔의 사지를 잘라 공주님께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시온 왕가의 분노는 풀리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카르디엔을 저희 쪽으로 넘기십시오.”
제국의 황제는 악시온 왕국과의 관계를 소중히 생각했다. 분명 이 요구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짐은 몇 번이나 말했다. 카르디엔은 짐의 분신처럼 아끼는 부하라고. 그런데도 계속해서 짐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싸우자는 뜻이겠지?”
“……!”
악시온 왕국의 귀족들은 눈을 크게 떴다.
늘 그렇듯 황제의 얼굴은 온화했다. 그러나 미소 띤 얼굴에는 이유 모를 싸늘함이 감돌았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원한다면, 그대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 제국은 악시온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악시온 귀족들은 눈을 부릅떴다.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귀족이 말했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제국과 왕국의 오랜 동맹을 깨뜨리신다는 겁니까?”
“먼저 그것을 원한 것은 악시온 왕국이 아닌가. 몇 년 전부터 그대들은 나를 우스워하며 시비를 걸곤 했지. 마치 짐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시험하는 것처럼.”
“…….”
악시온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악시온 왕국은 제국에게 충성한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절대 무릎 꿇지 않겠다는 듯이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는 이들도 있었다.
수백 년을 이어 온 동맹은 끝난 것이다.
황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제국으로 온 악시온 왕국의 마지막 사절단이니까. 그것이 오랜 시간 동맹을 맺었던 제국의 마지막 호의니라.”
황제는 악시온이 있는 남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고국으로 돌아가 악시온 왕에게 짐의 말을 전하도록 해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악시온 귀족은 도망치듯 제국을 떠났다.
라라 공주와 그녀의 곁을 지켰던 그리폰 남작도 함께였다.
마차 안에서 라라 공주는 소리를 지르며, 노예들의 뺨을 때렸다.
“결국 카르디엔도 갖지 못하고 이게 뭐야! 짜증 나! 다 짜증 난다고!”
그리폰은 다리를 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쟁이라. 재미있게 됐네.”
그렇게 악시온 사절단이 떠난 지 보름이 되었을 때, 제국 군대의 출정식이 열렸다.
총 5만 명의 병사.
총 지휘자는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은 기사, 카르디엔이었다.
* * *
며칠 후, 제국군이 악시온으로 떠나는 날.
출정식 모습은 장관이었다.
갑옷을 입고 정렬을 한 수만 명의 병사.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수십 만의 군중들.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제국군의 승리를 기도했다.
“제국에게 승리를!”
승리를 염원하는 글라디올러스가 뿌려졌다.
열띤 분위기 속. 나는 루시안과 함께 성안에 있는 방에 있었다.
이번 전쟁의 총지휘를 맡은 루시안의 대기실이었다.
이곳을 나가면 루시안은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하게 된다.
나는 복잡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 반짝이는 은색의 갑옷. 푸른색 망토. 허리춤에 찬 긴 검.
그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나는 조금도 환호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겠어. 곧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에게.’
루시안이 장갑을 벗고,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런 표정하지 말아요, 니아. 나는 특별한 힘을 가졌잖아요. 누구도 내게 상처 낼 수 없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라라 공주가 나를 곤란하게 한 바로 다음, 갑작스럽게 전쟁이 결정되었다.
마치 나를 괴롭힌 라라에게 보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루시안이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악시온 왕국과 제국의 분위기는 원래 좋지 않았어요. 언젠간 벌어졌을 싸움이 일어난 거죠. 절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
나도 다른 귀족들에게 전해 들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할 수 없었다.
황제의 기사라는 직위에 미련이 없다고 했던 그가, 군대를 이끌고 악시온을 향하는 것은 나 때문일 테니까.
나는 루시안이 다시 기사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돌아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 가지 말라고 루시안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루시안을 바라보다가 며칠 동안 고민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네?”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있을게요. 혹시 위험한 상황이 와도 루시안이 날 지켜주면 되잖아요. 네?”
전쟁터로 그만 보내는 게 너무 불안했다. 나 없는 곳에서 그가 사람들을 살육할까 봐.
아니, 변명이었다.
나는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