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8
24.
루시안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잠시 후, 그는 나를 품속으로 꼭 껴안았다.
“아아, 니아. 나의 사랑스러운 니아. 어쩜 그렇게 예쁜 말을 할 수 있어요?”
“…….”
“하지만 안 돼요. 당신은 여기에 있어야 해요.”
그 말에 울렁거리던 가슴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분명 기뻐하며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할 줄 알았다.
나는 소리쳤다.
“왜 이번에는 안 되는데요. 예전에 분쟁 지역으로 떠났을 때는 나와 함께 갔잖아요!”
“그때는 당신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있을 장소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쉬지 않고 이동해서 악시온의 수도까지 쳐들어가야 하죠. 당신이 너무 힘들 거예요. 그때보다 훨씬 위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의 맑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테죠.”
“……!”
“……당신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마주친 루시안의 얼굴은 아이처럼 여렸다.
이제 곧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지휘관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제 발로 나와 떨어졌고, 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전쟁터에 나를 데려간다며 아이처럼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나를 데려가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지금의 그에게 서운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결국 뜨거운 것을 입속으로 겨우 삼켰다.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녀와요. 대신 금방 돌아와야 해요. 조금도 다치지 말고요.”
“그럴게요.”
나는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요.”
루시안은 환하게 웃으며 내 새끼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는 내 새끼손가락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루시안은 손가락에 입을 댄 채 말했다.
“돌아오면 상을 주세요, 니아. 떨어져 있던 기간 만큼 큰 상을.”
* * *
제국군과 함께 루시안이 떠났다. 긴 동맹이 깨지고 전쟁이 벌어졌지만, 의외로 수도는 평온했다.
불패의 기사, 카르디엔이 출정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과 들뜬 분위기만이 감돌았을 뿐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도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
아침이 되면 가게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았다.
“페르니아 영애. 카르디엔 경이 멀리 떠나서 힘들지요?”
“괜찮아요.”
“전쟁터에 사랑하는 남자를 보낸 여자의 마음이 어떻게 괜찮겠어요.”
다른 손님들이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가 종종 페르니아 영애를 찾아와 이야기 상대를 해 줄게요. 수다를 떨면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법이니까요.”
아버지도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첫사랑인 모앙셀 부인과 함께였다.
아버지의 팔짱을 낀 모앙셀 부인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조르디를 따라 수도로 이사를 했어요. 잘 부탁해요.”
그녀는 나를 보더니 눈썹을 내렸다.
“약혼자가 전쟁터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상대로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네요. 눈 밑이 거뭇해요.”
“아…….”
“기다림은 힘든 법이죠. 그래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웃으며 맞이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내게 선물을 건넸다.
“고향에서 챙겨온 라벤더 차예요. 수면에 도움이 될 거예요.”
비록 만나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는 온화하고 따스했다.
과연 아버지가 오랜 시간 잊지 못할 만한 여인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아버지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을 하니 안심이 됐다.
모앙셀 부인이 준 차와 다과를 가지고 온 앤에게 말했다.
“앤, 아버지도 돌아왔으니 휴가를 다녀와. 오랫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잖아.”
앤은 고개를 저었다.
“카르디엔 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면 휴가를 다녀올게요. 그때까지는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앤의 씩씩한 말에 나는 웃었다.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를 걱정했고, 위로해 주었다.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고작 한 달.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늦은 밤. 나는 야외로 이어진 테라스로 나왔다. 모앙셀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 밤도 제대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나는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 도착한 루시안의 편지였다.
워낙 긴박하게 진행된 전쟁이라 병사들의 편지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루시안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었다.
황제에게 올리는 상황 보고서에 나에 대한 편지를 함께 동봉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다.
편지에는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전쟁터에서 보낸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달콤한 편지였다.
그러나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는 절대 상처 입지 않는다. 그러니 부상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가 미쳐 날뛸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부터 그는 내가 없어도 괜찮았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냐고!’
그저 단순한 그리움인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일 텐데.
나는 괴로운 얼굴로 루시안에게 온 편지를 품속에 안았다.
그때였다.
“페르니아!”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치고는 음이 높고, 어딘가 얄미운 목소리.
“테라스에 서서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페르니아 맞잖아.”
한껏 감성에 취해 있는 나의 멱살을 잡아 현실로 소환시키는 대사.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예상을 하며,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벼락 너머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거지는 분명 쿤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쿤이 역시, 하는 얼굴로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문 좀 열어 줘!”
* * *
나는 쿤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빵, 고기, 과일, 쿠키 같은 호사스러운 음식이 차려졌다. 쿤은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입에 구겨 넣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물어뜯고, 몇 겹이나 겹친 빵을 한입에 넣는 쿤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못 본 새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까지 사라진 거예요?”
“시끄러워. 새로운 약초를 찾느라고 몇 주 동안 산속에서 지내느라 쫄딱 굶었다고. 그 배고픔을 팔자 좋은 귀족 영애 따위가 알아?”
하여간. 재수 없는 말투는 변하지 않았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서 뭐라도 좀 먹지 그랬어요. 그럼 이렇게 한밤중에 남의 집에 찾아와 음식을 거덜 내는 민폐를 끼치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 오려면 어쩔 수 없었어.”
“왜요?”
“그야 카르디엔을 만나기 위해서지. 그러고 보니 카르디엔은 어딨어? 충견처럼 네 옆에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보이질 않네?”
쿤은 입 안 가득 넣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지금 막 수도에 도착했다더니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루시안은 지금 수도에 없어요.”
“……뭐?”
“며칠 전에 전쟁터로 떠났어요.”
툭. 쿤이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듯 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쿤은 오랫동안 산속에 있었던 탓에 최근 소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쿤에게 그간의 일을 정리하여 설명해 주었다.
제국과 악시온 왕국의 동맹이 깨졌고, 루시안이 병사를 이끌고 출병했다고.
나는 쿤이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전쟁만 났다 하면 눈을 빛내며 따라나설 정도로 엄청난 전쟁 덕후였으니까.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쿤의 얼굴은 심상치 않았다.
쿤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카르디엔을 혼자 보냈어?”
“당신이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요. 그런데 루시안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떠난 후에 점점 상태가 좋아졌거든요. 전쟁터에 나가도 그가 정신을 놓고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도.
그러나 쿤은 내 말에 안도하는 대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거야 약이 남아 있을 때지!”
“…….”
약?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쿤은 제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만들어 준 약을 거의 다 먹었을 텐데…….”
쿤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다른 약을 찾았나? 제국에 그런 약을 제조할 만한 의사가 있었나?”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쿤을 향해 물었다.
“잠깐만요, 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뭐?”
“약이라니, 무슨 소리냐고요.”
쿤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불길한 말을 듣기 전에 일어나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잠시 후, 쿤이 말했다.
“카르디엔에게 약을 만들어 줬어. 전쟁터에서 극도의 흥분으로 정신이 나간 병사들을 위한 진정제야. ……카르디엔 용으로 강력하게 제조한.”
“……!”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쿤이 그런 나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카르디엔이 비밀로 하고 싶어 했어도, 진작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몰랐던 거야?”
전혀 몰랐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약 때문에 루시안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약을 먹은 직후 상태가 좋아졌으니까. 너도 그날 봤잖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쿤이 말한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무렵 루시안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질투하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나와 눈을 마주한 쿤을 보는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루시안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루시안은 괜찮아졌다.
루시안은 쿤의 얼굴을 보고도 어떤 살의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나 몰래 둘이 특훈이라도 한 거예요?] [……비슷합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행동을 했냐며 기뻐했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이었다.
특훈은 없었다.
쿤이 만들어 준 약만 있을 뿐.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
나는 그냥…… 나의 사랑 때문에 그가 괜찮아진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그렇게 믿었었다.
급격하게 좋아졌던 루시안의 상태를 의심할 생각도 못 하고.
그에 대한 내 사랑에 취해서.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줬다.
‘정신 차려. 지금 청승맞게 울 타이밍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쿤을 바라보았다.
쿤은 감정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리라 기대하는 눈빛.
그러나 나는 그에게 눈을 돌리라고 쏘아 댈 여유가 없었다.
“루시안이 약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야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겠지. 사람을 벌레 죽이듯 죽이고, 너를 독점하는 욕구밖에 없는 미친놈으로 말이야.”
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약을 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건데 말이지. 이제 어쩐담.”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톡톡 치는 쿤에게 말했다.
“어쩌긴요. 당장 쫓아가서 루시안에게 약을 전해 주면 되죠.”
“……뭐?”
“내게 약을 줘요. 루시안에게 직접 전해 줄 테니까.”
쿤은 황당하단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지금 약을 전해 주러 전쟁터로 간다고? 화살이 날아다니고 시체 더미가 쌓여 있는 곳에?”
“네.”
“죽고 싶어?”
“그럴 리 없잖아요. 폐하께 말씀드려서 호위병을 데리고 갈 거예요. 전쟁터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길잡이도 부탁할 거고요.”
황제는 누구보다 루시안의 폭주하는 힘을 경계했다. 그러니 상황을 이야기하면 당장 나를 원조해 줄 것이다.
쿤은 정색하며 말했다.
“그럼 그쪽 편에 전달을 부탁하면 되잖아. 굳이 네가 갈 필요가 없어.”
“루시안의 약이잖아요. 내가 가야만 해요.”
그에게 중요한 약이다. 누구에게도 이 약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접 루시안을 만나 약을 전해 주고 싶었다.
나 모르게 비밀을 간직했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결심을 깨달은 쿤이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정신이 나간 건 카르디엔이나 너나 똑같네.”
쿤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쿤이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나 가는 길에 약이 파손되거나 하면, 다시 제조해야 하잖아. 게다가 나는 전쟁터에는 익숙하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무엇보다…….”
쿤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되게 재밌을 것 같거든. 조금 귀찮을 것 같긴 한데, 평생 보지 못할 구경거리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 저런 남자였지.
재미있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와 구경하고야 마는.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 언젠간 분명 크게 후회할 거예요. 구경도 눈치를 봐가며 해야 하는 거라고요.”
“걱정 마. 생명력 하나는 질기니까.”
쿤은 밉살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덕분에 든든한 길동무가 생겼잖아?”
그 말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 * *
벌써 세 번째, 집을 떠나는 딸을 향해 아버지는 기함을 했다.
아버지는 소리쳤다.
“좋은 곳 많잖니. 한적한 숲속도 있고, 반짝이는 바닷가도 있는데 왜 자꾸 끔찍한 곳으로 떠나려고 해! 절대 안 돼!”
내 손을 붙잡은 아버지를 말린 것은 모앙셀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제 쪽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그만해요, 조르디. 페르니아에게 기다림을 강요하지 말아요.”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는 울먹거렸다.
모앙셀 부인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늘 기다리기만 했어요. 그래서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
“사실은 나도 저렇게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떠나고 싶었답니다.”
아버지는 모앙셀 부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아버지는 나를 잡은 손을 뗐다. 아버지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조심히 다녀오려무나.”
“네.”
아버지는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다음에 카르디엔이 돌아오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저택에 꽁꽁 묶어 둘 테다. 그러면 더는 내 딸도 그놈 때문에 위험한 곳으로 갈 일이 없을 테지.”
급작스러운 장인어른의 집착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
섬뜩한 부녀의 대화였다. 전쟁터에 있을 루시안은 전혀 알 수 없을 테지만.
마차를 탈 만큼 순탄한 길이 아니었기에, 나와 쿤은 각각 말을 탔다. 황제가 임명한 기사들이 우리를 보호하듯 감쌌다.
황제의 휘하에 있는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의 리더인 윌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르디엔 님께 도착하는 길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의연한 눈빛을 한 윌과 기사들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나는 그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나의 루시안을 향해서.
* * *
악시온의 수도 외곽. 그곳은 제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곳곳에 꽂혀 있는 제국군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천막을 치고 쉬고 있는 제국군의 얼굴은 크게 상기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도 카르디엔 님은 대단했지?”
“맞아. 홀로 달려가서 적장의 목을 단번에 베어 버렸잖아.”
“적장도 엄청나게 유명한 기사였는데 적수도 안 되더군.”
그들의 눈빛에는 루시안에 대한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신을 보는 것처럼 황홀해하는 자도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루시안 덕분에 제국군은 엄청난 속도로 악시온을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악시온의 군대는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덕분에 제국군은 출병한 지 고작 2주 만에 악시온의 수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한 달 안에 악시온 왕국을 점령하는 거 아니냐고.”
“……라는 말이 병사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습니다.”
루시안의 부관, 폴은 말을 끝내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차분한 얼굴로 앉아 있는 루시안이 있었다. 묘한 흥분이 일렁이는 바깥과 달리 고요한 막사 안에 루시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못 짚고 있군.”
그렇지요? 아무리 승승장구하는 중이라 해도 한 나라를 고작 한 달 안에 점령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라고 폴은 생각했지만 루시안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한 달은 너무 길어. 앞으로 일주일 후면 악시온의 이름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
폴은 침을 꿀꺽 삼키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폴은 루시안이 처음 군대를 가졌을 때부터 그를 모셨다. 올해로 햇수만 5년 차였다.
전쟁터에서 늘 폴은 루시안의 곁을 지켰다. 그래서 루시안에 대해선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모든 면에서 훌륭한 기사였다.
군대를 통솔하는 카리스마. 적군을 베는 검술. 끝 모를 체력.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폴은 예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기시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폴은 저도 모르게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루시안 님. 혹시 적군을 봐주고 계시는 겁니까?”
“……뭐?”
“전투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느꼈습니다. 더 쉽게 전투를 이길 수 있는데 시간을 끄시는 것 같다고요. 마치 진짜 힘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것처럼…….”
주절거리던 폴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안을 보고는 흡 하고 입을 막았다.
폴은 등 뒤로 두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실언했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
루시안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폴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폴은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루시안이 말했다.
“됐다. 목욕물이나 받아다오.”
“알겠습니다!”
폴은 호랑이 굴을 빠져나가듯 황급히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 뜨거운 김이 가득 찼다.
루시안은 옷을 벗고 간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총 지휘자라는 직책답지 않게 루시안은 병사들과 모든 것을 함께했지만, 목욕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절대 같이 목욕하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는 몸을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사지를 누비는 기사에게 이런 몸은 자랑이 아니라 괴상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위화감을 주기에 딱 좋은.
그래서 루시안은 늘 혼자 몸을 씻곤 했다.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따뜻하군.”
폴은 루시안을 보필하는 데 늘 지극정성이었다.
전쟁터에서 이만한 물을 끓이는 게 쉽지 않을 텐데도 늘 따뜻한 물로 욕조를 채웠다.
그냥 물이면 된다고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꼭 고집을 부려 목욕 시중까지 들곤 했는데 말이지.”
폴은 이제 그런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루시안이 흑화한 후부터였다.
폴은 루시안이 흑화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함께 출정한 병사들 중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그때의 일을 얼버무렸다.
그때 루시안은 잠시 악마의 저주를 받았던 것뿐이라고. 지금은 다시 저주를 풀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병사들은 그 말을 믿었다.
그도 그럴 게 루시안은 이전과 변한 게 없었으니까.
예전보다 차가워졌다는 말이 돌긴 했지만, 여전히 루시안은 병사들에게 자비로웠고,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다.
그렇게 병사들은 루시안에 대한 공포를 잊고 환호했다.
그러나 폴은 아니었다.
루시안이 복귀한 후, 다시 그를 보필하게 된 폴은 여전히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루시안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지. 내가 괴물이 된 걸 말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폴은 진짜 괴물이 된 루시안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약을 먹는 동안에는.
루시안은 손에 든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병 속에는 분홍색 물약이 들어 있었다.
쿤이 루시안을 위해 제조해 준 진정제였다.
쿤은 확실히 실력 있는 의사다.
약은 놀랄 만큼 엄청난 효과를 보여 주었다.
루시안은 더는 예전처럼 이성을 잃지 않았다.
페르니아와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지도 않았고, 그녀를 제 시야 속에서만 가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간을 난도질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쿤이 걱정했던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루시안은 ‘평범하게’ 페르니아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약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길어야 열흘이면 약은 바닥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루시안은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루시안이 진짜 힘을 발휘하면 3일 만에 악시온 왕국을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괴물이란 말을 듣겠지.’
그건 싫다.
페르니아가 슬퍼할 테니까.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모두가 이해 가능한 선에서 전쟁을 끝내야 해.’
그래서 일부러 적당히 시간을 끌며 전투를 벌였다. 이제 일주일 후에 전쟁은 끝날 것이다. 그 후에는 바로 쿤을 찾아 새 약을 받고, 페르니아에게 돌아갈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안함은 늘 남아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처음 약을 먹은 후부터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약의 복용을 멈춘 후에, 제가 어떤 상태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것.
가장 두려운 건, 약으로 억눌렸던 본능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강렬한 욕구.
‘그녀를 내 품 안에 두고 싶다.’
‘나만이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
‘그녀가 소중히 하는 것들은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
약을 먹는 지금은 괜찮다.
지금은, 그 욕망을 참을 수 있다.
물방울이 맺힌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약이 떨어지면……’
에스텔, 라일락 후작, 칼릭스, 앤. 그녀가 아끼는 이들의 시체 더미. 그 사이에서 루시안은 황홀한 얼굴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그 광경은 그의 불안한 상상에 불과했다.
루시안은 초조한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결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그 물건’도 가지고 왔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자신을 다독인 루시안은 욕조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직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미움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를 슬프게 할까 봐 괴로웠다.
잠시 후, 루시안은 욕조 위로 두 팔을 뻗었다. 뜨거운 물속에 있던 근육질의 팔이 드러나며,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졌다.
루시안은 두 팔을 둥글게 감싸, 아무도 없는 허공을 안았다.
마치 그녀를 껴안듯이.
조용한 공간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고 싶어요, 니아.”
* * *
연승으로 한껏 사기가 오른 제국 군대와 달리 악시온 쪽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제국군은 이미 수도에 진입했다. 이제 남은 곳은 왕성뿐이다.
이곳마저 뚫리면, 악시온 왕국은 패배하게 된다.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한 악시온 왕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병사를 더 모아! 최대한 병력을 늘려 성에 들어올 수 없게 방어하란 말이야!”
“이게 최선입니다, 폐하. 제국군과 맞붙었던 병사들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로 붙잡혀 남은 병사가 많지 않습니다.”
고작 며칠 새에 악시온의 병사는 반의반으로 줄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무능한 놈들.”
이를 악문 악시온 왕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타국의 지원은? 왜 아무도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는 거냐.”
이번에도 신하는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나라가 제국의 편에 섰습니다, 전하.”
당연한 일이었다.
만날 때마다 제국에 대한 뒷말을 하며 같이 낄낄거렸다 한들, 결속은 거기까지였다.
진짜 선택의 순간에 왔을 때 그들은 고민 없이 제국의 편에 섰다.
승승장구하는 강력한 군대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더더욱 일말의 미련도 없이.
아이도 예상했던 일이건만 악시온 국왕의 얼굴은 무너져 내렸다.
배신감이 밀려들어 왔다.
악시온 국왕은 품위도 잊고 소리쳤다.
“젠장! 젠장!”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제 옆에 조아리고 있던 노예를 때렸다. 노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인의 폭력을 감내했다.
악시온 국왕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생각했다.
그는 전대 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길러졌다.
모든 이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기분을 살폈다. 그가 조금이라도 불쾌할 것 같은 일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평생을 우월한 자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몰랐다.
자신의 왕국이 제국과 이토록 차이가 날 줄은.
이토록 허무하게 전쟁에서 패배하리라고는.
‘아니야. 이 내가 패배라니, 그럴 리가 없어.’
악시온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저히 실패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대로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퍼억. 그에게 무참하게 얻어맞던 노예가 결국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노예들이 악시온 국왕의 눈치를 살피며 쓰러진 노예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허억, 허억.”
악시온 국왕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악시온 왕은 또 다른 노예를 향해 폭력을 행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나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긴 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그리폰이었다.
“그리폰. 당장 말해 봐. 그대는 늘 내가 원하는 말을 해 주었잖아.”
“…….”
그리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악시온 왕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악시온 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보아도 기묘한 느낌을 주는 붉은 눈동자였다.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맞물려 더더욱.
그리폰은 많은 분야에 박식했다. 마치 평생을 학업에 바친 노년의 학자처럼.
그래서 악시온 왕은 여행자인 그를 제 곁에 두었다. 외국인에게 남작이라는 직위를 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면서까지.
그리폰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전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제국과 악시온은 전투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니까.”
“그건 나도 알아!”
분하지만 그건 악시온 왕도 인정하는 바였다. ‘악시온이 더 용맹하고 강인하다’라는 말은, 전쟁이 터지기 전에나 외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예 바보는 아니었구나. 그래 봤자 바보지만.’
그리폰은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게 뭐냐니까.”
“항복.”
“……!”
“악시온과 제국은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동맹국이었지. 그것도 나라가 만들어진 때부터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의미는 아주 크지. 당신이 이 사실을 부각시키며 항복 선언을 한다면, 제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악시온 왕국을 멸망시키면, 제국은 가지는 게 너무 많았다.
호시탐탐 건방지게 굴던 동맹국 하나를 잃는 대신, 거대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식민지가 생기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악시온 왕이 옛정을 언급하며 항복을 한다면, 제국은 그것을 무작정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맹을 맺었던 나라를 무너뜨린 죄책감과 타국의 시선 때문에.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내가 왜 놈들과 전쟁을 시작한 건데……. 절대 놈들에게 무릎을 꿇진 않을 거야. 악시온에 항복은 없다!”
분노가 어린 얼굴로 말하는 악시온 왕을 보며 그리폰은 키득거렸다.
‘저것도 역시 인간이지.’
어리석은 아집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악시온 왕이 이마를 감싸 쥐며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
그리폰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은…… 적군의 지휘관을 악시온 쪽으로 꼬드긴다?”
이 정도로 전세가 일방적인 것은 다 지휘관인 카르디엔 때문이었다.
그를 악시온의 편으로 만들면, 분명 전세가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자가 다 무너져 가는 적군 쪽으로 붙을 리 없겠지만.’
그리폰은 제가 생각해도 웃긴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시온 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악시온 왕의 부리부리한 눈이 빛났다. 그는 소리쳤다.
“당장 라라를 불러라!”
라라 공주는 눈썹을 찡그렸다.
“카르디엔을 유혹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라고요?”
“그래.”
평소의 라라 공주였다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네!’라고 대답하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라 공주는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바마마. 카르디엔은 예전에도 라라를 거절했는걸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단다.”
“어떻게 다른데요?”
“듣자 하니 수도에 있을 때 카르디엔은 약혼녀의 집에서 지냈다지. 얼마나 여자를 좋아했으면 말이다. 그런 음탕한 놈이 전쟁터로 나와 몇 주 동안이나 굶주렸다.”
“……!”
“그런 때에 네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놈은 분명 네게 빠져들고 말 거야.”
그 말에 라라 공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너는 악시온에서, 아니 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녀지 않니. 게다가 사랑스럽지. 그 어떤 남자도 너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리 없어!”
라라 공주는 감동받은 눈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이내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바마마. 제가 해내 볼게요. 이번에야말로 카르디엔을 제 노예로 만들 거예요.”
“그래. 너를 믿는다, 라라.”
꼭 닮은 부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긴박한 정세와 달리 훈훈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그리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호쾌한 웃음에 왕과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폰은 키득거리며 생각했다.
딸을 적군의 지휘관에게 보내려는 왕이나, 적군의 지휘관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공주나 어느 쪽도 제정신이 아니다.
처음 왕국에 왔을 때도 느끼긴 했으나 정말이지 정신 나간 부녀였다.
두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에 잠시 이곳에 눌러앉았을 정도다.
‘곧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지만.’
어리석은 왕과 공주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대로 떠나기는 아쉬웠다.
그리폰이 말했다.
“내가 라라 공주와 동행하지.”
순수하게 라라 공주를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동안 제게 즐거움을 주었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왕과 공주는 환호했다.
라라 공주는 아이처럼 웃으며 그리폰을 껴안았다.
“정말요? 그리폰이 함께 간다니 정말 기뻐요!”
“역시 그대는 악시온의 편이군. 전쟁이 끝나면 그대에게 더 대단한 직위를 내려 주겠네.”
그리폰은 빙긋이 웃었다.
당신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야. 악시온 왕국은 곧 멸망할 테니까.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주는 나름의 배려였다.
* * *
수도를 떠난 지 3일째.
우리는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월등하게 좋은 기사들은 괜찮았으나, 나와 쿤은 아니었다.
부쩍 해쓱해진 얼굴. 바짝 마른 입술. 퀭한 눈가까지.
며칠 새에 우리는 환자 같은 몰골이 되어 있었다.
쿤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좀 쉬고 가자. 이러다 카르디엔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과로사로 죽어 버리겠어.”
그러나 나는 쿤의 말에 동조하는 대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싹 말려 잘게 자른 와일드 트리였다.
나는 와일드 트리를 몇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나머지 남은 조각을 쿤에게 건넸다.
쿤은 끔찍한 얼굴로 소리쳤다.
“싫어! 난 쓴 약은 질색이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가차 없이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쿤의 두 팔을 잡았다.
쿤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기사들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쿤의 입으로 약초를 욱여넣는 것에 성공했다.
쿤이 독약이라도 삼키듯 눈을 바르르 떨며 욕을 내뱉었다.
“이 악독한 여자 같으니!”
어쨌건 약초의 효과는 직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외쳤다.
“이제 다시 출발하도록 해요.”
“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쿤은 싫다고 소리를 쳤지만, 기사들이 억지로 그의 말을 잡아끄는 바람에 별수가 없었다.
얌전히 따라오는 수밖에.
나도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내 주위를 둘러쌌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친히 붙여 준 기사들은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말을 따랐다.
기사들의 리더인 윌은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페르니아 라일락 님의 명에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여 페르니아 라일락 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거나, 불쾌하게 만든다면, 국가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면서요.]……뭘 그렇게까지 말해. 사람 민망하게, 흠흠.
덕분에 나는 최고의 호위를 받으며, 루시안을 향해 쭉쭉 달려갈 수 있었다.
기사들이 전황을 파악하며 최대한 안전한 길로 안내했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마주칠 때도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악취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옆에 있던 쿤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시체 썩는 냄새네.”
“……!”
“이 정도 냄새면 부패가 많이 진행되었겠어. 숫자도 꽤 많을 테고.”
그 말에 기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윌이 한 발짝 다가와 말했다.
“페르니아 님. 이 숲에서 얼마 전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제대로 시체가 처리되지 않았었나 봅니다.”
“아…….”
“다른 길로 돌아갈까요?”
“…….”
윌의 얼굴에서 나에 대한 걱정이 묻어났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이대로 진입하면 나는 분명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일개 귀족 영애에게는 너무나 가혹할 것이 분명한 전쟁의 참상을.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대로 가요.”
이 길은 루시안에게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
윌의 얼굴에 여전히 걱정이 머물렀지만, 이번에도 그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알겠습니다. 참기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가까이 다가온 쿤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박하 향이 나는 천 조각이었다.
“이걸로 코와 입을 막아. 박하 향이 냄새를 좀 중화시켜 줄 거야. 시체 썩는 냄새를 온전히 맡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눈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테지만.”
“고마워요.”
나는 쿤에게 천을 받아 얼굴에 둘렀다.
그의 말대로 천을 두르는 순간 싸한 박하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나를 확인한 윌이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잠시 후, 예상했던 풍경이 나타났다.
수백 구의 시체들이었다.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이었다. 검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자. 창에 몸이 꿰뚫려 고꾸라진 자. 머리가 박살 나 몸만 남은 자.
잔혹한 풍경에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우욱.”
나는 밀려드는 구토감을 겨우 참았다. 길을 멈추고 토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윌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조금 힘이 드실 테지만 쉬지 않고 쭉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럇!”
말을 모는 소리와 함께,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도 달렸다.
그와 동시에 말발굽이 시체를 밟는 것이 느껴졌다.
들판에 널려 있는 시체를 하나하나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을 짓밟는 느낌이 들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말의 발길질에 머리통이 부서지는 느낌도 생생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전쟁의 참상이 조금도 묻지 않은, 초록색 들판이 나타났다.
살랑이는 풀잎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지옥 같은 광경이 끝이 난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달리던 말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나는 얼굴에 덮은 천을 걷어 낸 후, 말 위에서 깊은숨을 토해 내었다.
아무런 악취도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 이토록 청량한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윌이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쉬는 건 하루에 딱 세 번. 두 번의 식사와 한 번의 수면 시간 때였다.
지금은 식사 시간이다.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야외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한가로운 건 나와 쿤뿐이었다.
처음에는 나만 편히 쉬는 게 너무 미안했지만, 쿤의 한마디로 그 마음을 접었다.
[우리가 뭐라도 하겠다고 나부대 봐야 귀찮기만 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고 체력을 회복하는 게 낫지. 그래도 저 덩치들 체력의 반의반도 못 따라갈걸?]바닥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턱을 괴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쿤이 말했다.
“너, 대단하더라.”
그가 웬일로 내 칭찬을 하나 싶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요?”
“아무리 각오를 했다고 해도, 막상 시체 더미를 그런 식으로 지나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분명 중간에 말을 멈추고 못 한다고 할 줄 알았어.”
“…….”
“생각보다 비위가 좋은가 봐? 아니면 그냥 겁이 없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진짜 칭찬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평소처럼 뻔뻔한 얼굴로 그의 말에 반응할 수 없었다.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주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속은 울렁거렸고, 목 끝까지 구토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표 내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잔혹한 짓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안이니까.
얼마 전 그곳에서 벌어졌다는 전투가 머릿속에 재현되었다.
루시안은 병사들의 머리를 베고, 몸을 꿰뚫었다.
그의 발밑 아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에도, 새하얀 얼굴에도, 붉은 피가 묻었다.
그의 눈동자와 같은.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잔혹한 살육자이며, 무서운 힘을 가진 악마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그를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나는 더는 예전처럼 방황하지 않았다.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가 어떤 모습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만큼.
쿤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널 보면 드디어 결심을 한 것 같아.”
“무슨 결심이요?”
“카르디엔 놈과 같이 미쳐 버릴 결심.”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쿤은 피식하고 웃더니 품속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분홍색 물약은 루시안에게 주기 위해 만든 진정제였다.
“사실 네게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열심히 노력한 것에 대한 칭찬으로 알려줄까 해.”
“……뭐를요?”
“이 약의 또 다른 비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약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비밀이 있다고?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 거 아니에요?”
악독한 쿤이라면 순진한 루시안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씌웠을지도 모른다.
험악해진 내 얼굴에 쿤은 푸핫, 하고 웃었다.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네. 그런데 내가 지금 말해 줄 비밀은 다른 내용이야.”
은근슬쩍 넘어가는 말에 나는 더더욱 찝찝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바가지를 씌웠길래 저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받은 거라면, 약만 뺏고 당장 꺼지라고 엉덩이를 차 버릴 거야.
그러나 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생각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모든 약에는 조금씩 부작용이 있지. 내가 만든 약도 예외는 아니야.”
쿤은 물약을 흔들며 말했다.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독한 약이라면 더더욱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 독한 약으로 인해 내장이 상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뇌가 손상이 되어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
“그래서 내가 너를 따라온 거야. 현재 카르디엔의 몸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없으니까.”
손끝이 차가워졌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나는 그저 루시안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안도 알고 있어요?”
아니길 바랐다.
정말로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을.
쿤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늘 그의 모든 행동은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원하는 루시안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 * *
그 시간, 제국군 막사.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그의 앞에는 의외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이곳이 전쟁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게 꾸민 라라 공주와 그녀의 아름다운 노예들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들은 검을 든 제국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루시안의 옆에 서 있던 부관 폴이 말했다.
“제국군으로 찾아온 이들은 모두 5명으로, 악시온 왕의 막내딸 라라 공주와 노예 3명. 귀족 1명입니다. 라라 공주의 말로는 그들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전쟁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며, 개인적인 일로 루시안 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찾아온 적군의 공주라니.
그런데 전쟁과는 무관하다고?
누구라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루시안은 라라 공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지?”
서늘한 붉은 눈과 마주친 라라 공주가 황홀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야 당신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지.”
“……!”
충격적인 말에 주변에 있던 제국군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으나, 정작 루시안의 얼굴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루시안의 앞에 무릎을 꿇은 라라 공주가 애처롭게 말했다.
“제국에 있을 때, 당신은 내게 찾아와 끔찍한 짓을 했지. 나를 짓밟고, 엉망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왜냐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됐으니까.”
“…….”
“정말이야. 그러니 나를 호위해 줄 전투 노예도 없이 이곳에 찾아왔지. 나를 붙잡아, 능욕하고 죽일 수도 있는 적군에게 말이야.”
그 말은 공주 나름의 어필이었다.
제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조금은 그 말이 먹힌 모양인지, 라라 공주를 둘러싸고 있던 제국군 중 몇몇은 탄성을 내뱉었다.
로맨스 소설을 읽는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진 이도 있었다.
그러나 루시안에게는 그저 개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 개소리라고 표현하는 것도 아까웠다.
지나가는 귀뚜라미 한 마리도 저것보다는 멀쩡한 소리를 낼 테니.
루시안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미친 여자다. 수용소에 집어넣어.”
* * *
라라 공주는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래도 공주라는 신분을 감안하여, 다른 포로들과는 섞이지 않은 독방이었다.
쇠창살로 가로막힌 방에서 라라 공주는 흐느꼈다.
“흑흑, 정말 너무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카르디엔. 오, 카르디엔.”
노예들은 공주를 토닥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공주를 향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구슬프게 우느니, 차라리 저를 때리세요, 아름다운 공주님.’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그리폰은 생각했다.
높은 확률로 그의 예상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라라 공주의 행복만이 생의 목표로 설정된 노예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끌려와 내내 물건 취급을 받았는데도, 저렇게 진심으로 사람을 섬길 수 있다니. 악시온 왕가는 실로 멍청하지만, 노예를 세뇌하는 것만큼은 일류구나.’
그것이 그리폰이 느낀 감상의 전부였다.
그리폰은 울고 있는 라라 공주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그녀보다 관심이 가는 대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전 마주쳤던, 제국군의 지휘관 카르디엔이었다.
오랫동안 제국을 떠나 있었던 그조차 카르디엔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르디엔.
그러나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붉은 눈동자. 은빛 머리카락.
저와 똑같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리폰은 알 수 있었다.
카르디엔의 정체를.
카르디엔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왜냐면 그는 나의…….’
그때 철창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느끼고 있던 라라 공주도 고개를 들었다.
수용소 안에 들어선 인영을 보는 순간 라라 공주의 눈이 커졌다.
갑옷을 벗고, 편안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이는 루시안이었다.
퉁퉁 부은 라라 공주의 눈이 빛났다. 라라 공주는 애정이 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아, 카르디엔. 역시 나를 버리지 않았군요. 사실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 그렇죠?”
루시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묵직한 것을 던졌다.
라라 공주는 흡사 연인에게 선물을 받는 듯 황홀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제 손에 들린 것을 본 라라 공주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것은 핏기 하나 없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몸과 절단되어 얼굴만 남은.
라라 공주는 죽은 자의 머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공주님!”
노예들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안은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는 얼굴이 아닌가? 이곳까지 혼자 숨어들어 왔을 정도면 악시온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일 텐데.”
라라 공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주는 덜덜 떨며 말했다.
“도,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연기일까. 아니면 진심인 걸까.
어느 쪽이든 루시안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악시온이 암살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공주가 제게 온 타이밍에 맞추어.
몇 시간 전, 루시안은 전용 막사 안의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야밤의 숙면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시안은 전쟁터로 떠난 후 하룻밤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저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 루시안의 감각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루시안을 향해 날아온 것이다.
루시안은 허공을 향해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날이 선 단검이었다. 단검은 진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독이었다.
루시안은 검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색 복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은 파충류처럼 섬뜩했다.
말하지 않아도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 능숙한 암살자였다.
루시안은 싸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런 것이었나.”
악시온의 왕이 제정신이라면 이렇듯 순순히 제 딸을 보냈을 리가 없다.
그 너머에 어떤 계략이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악시온 왕이 계획했던 것은 아마 루시안이 제 딸에게 푹 빠져서 침대에서 뒹구는 것일 터였다.
그때만큼 죽이기 쉬운 때가 없으니까.
적장의 목을 베어 버리면 전황은 쉽게 달라져 버린다.
그러나 루시안에게는 헛웃음만 나오는 수였다.
어떤 상황이래도, 어떤 암살자를 보내도, 왕은 그를 죽일 수 없으니까.
그러나 악시온 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눈앞의 암살자 또한.
숨을 죽인 암살자는 제법 실력이 좋아 보였다. 막사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잠입하여, 제게 검을 날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루시안이 그를 죽이지 못할 어떤 이유도 되지 못했다.
루시안이 스산한 얼굴로 라라 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악시온 왕이 소문처럼 너를 아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예상과는 달리 너를 살려두는 건 조금도 이득이 없을 것 같아.”
“뭐?”
“그러니 그냥 지금 죽일래.”
아무런 감흥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웠다.
라라 공주는 잔혹한 것에 면역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노예를 대수롭지 않게 죽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가해자였을 때의 일이었다.
제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를 보니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라라 공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누가 좀 저놈을 막아 봐!”
그제야 굳어 있던 노예들이 그녀를 지키듯 막아섰다.
마른 몸과 예쁘장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충직한 눈빛들이었다.
고작 노예 주제에 어떻게 저런 의연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이 나올 것 같은.
그러나 루시안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는 제 앞을 막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마치 지푸라기를 던지듯, 그는 한 손으로 노예를 잡아 던졌다.
“아악!”
벽으로 날아간 노예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고작 그뿐이었지만 노예의 몸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났다.
노예의 눈은 회까닥 뒤집혔다. 내장이 파열된 것인지 입에선 피가 새어 나왔다. 근육이 놀란 것인지 온몸은 바들바들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것을 본 나머지 두 명의 노예의 얼굴에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루시안의 우악스러운 힘은 그들에게도 자비가 없었으니까.
“으악!”
“으흑!”
두 명의 노예가 사라지니, 이제 남은 건 라라 공주와 그리폰뿐이었다.
루시안이 다가오자, 그리폰은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본 라라 공주가 소리 질렀다.
“그리폰!”
어떻게 자신을 지키지 않고 도망가냐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리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라 공주. 내게 노예들 같은 충성을 바라지 마. 나는 너의 노예도, 부하도 아니란다.”
그 말에 라라 공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 대로였다.
그리폰은 악시온의 귀족이긴 했으나, 그것은 왕이 일방적으로 내린 작위일 뿐이었다.
그는 본래 출신을 알 수 없는 여행자였다.
그리폰은 한번도 왕에게 충성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악시온의 왕과 공주도 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 난 어떡해?’
라라 공주는 울먹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