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29
25.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라라 공주는 얼음처럼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힘의 차이가 나는 포식자를 눈앞에 둔 이의.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도톰한 입술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긴 속눈썹을 가진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포악한 심성을 아는 이조차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처연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의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 꿈틀대고 있었다.
루시안이 여기에 온 것은 사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찾아온 암살자는 죽이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그들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이곳을 찾아왔다.
보기만 해도 진저리 나는 여자가 있는 곳으로.
이유는 명백했다.
‘나는 이 여자가 미워.’
그것은 그녀가 적군의 공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제게 추잡한 수를 쓰기 위해 찾아와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페르니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진 후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그날 밤의 일을, 루시안은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이 페르니아를 꾀어냈어. 그리고 그녀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위험에 빠트렸지.’
누군가는 악독한 성품을 가진 공주가 벌인 사소한 해프닝이라며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사자인 페르니아조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루시안은 아니었다.
계속, 계속, 그날의 일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라라 공주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참았다.
일국의 공주를 죽였다가는, 페르니아가 곤란해할 테니까.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다.
본 목적은 전쟁에 승리하여 페르니아에게 남부럽지 않은 자리와 힘을 주려고 한 것이지만, 부가적인 목적은 라라 공주의 파멸도 있었다.
나라가 멸망하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왕과 공주는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라라 공주를 눈앞에서 보니 억눌렀던 살의가 치밀었다.
‘이 여자를 왜 살려두어야 하지?’
게다가 이곳은 전쟁터다.
공주가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어떻게든 말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은 살인범이 되지 않을 것이고, 페르니아도 속상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제 욕망을 포장한 루시안은 손을 뻗었다.
검도 필요 없었다.
공주의 연약한 몸은, 그의 손짓 한 번으로 바스러질 것이다.
“흐읍!”
라라 공주가 눈을 부릅떴다.
루시안의 커다란 손이, 라라 공주의 가는 목을 감쌌기 때문이다.
루시안의 손은 기사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하얗고 가지런했지만,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라라 공주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손가락으로 벌레를 짓눌렀던 것처럼, 그의 손에 자신이 죽을 거란 사실을.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말이다.
그때였다.
죽음의 기운이 들어선 우울한 공간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시안?”
“……!”
그 순간, 라라의 눈이 커졌다.
일말의 감정 없이 자신을 죽이려 들던 루시안의 얼굴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엄청난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루시안의 손아귀에서 힘이 사라졌다.
목을 조르던 힘이 사라지자 라라 공주는 줄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라라 공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살기 위한 발버둥이였다.
그녀는 미친 듯이 숨을 내쉬며 루시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막사 입구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페르니아였다.
페르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니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고 있었어요?”
그 순간 루시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 * *
몇 분 전, 나는 제국군 진영에 도착했다. 나를 맞은 것은 루시안의 부관 폴이었다.
“페, 페르니아 님?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갑작스럽게 전쟁터 한복판에 나타난 내 모습에 그는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에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세세하게 설명해 줄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 당장 루시안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루시안에게 급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당장 그에게 안내해 주세요.”
나의 말에 폴도 긴박한 상황임을 느꼈다.
그는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황급히 나를 루시안의 막사로 안내했다.
그러나 막사는 비어 있었다.
폴은 당황했다.
“분명 주무시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당황해하는 그를 향해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가 다가왔다. 그는 폴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폴이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 님께서 그곳에 가셨다고?”
당혹스러운 폴의 얼굴에 나는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루시안이 어디를 간 거예요?”
“포로수용소입니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폴은 머뭇거렸지만, 재촉하는 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폴을 따라온 것이었다.
수용소에 있는 독방으로 들어서자,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을 뒹구는 사람의 머리. 그 옆에 눈이 뒤집혀진 채 쓰러진 사람들.
그곳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그리고, 공주의 목을 조르고 있는 루시안.
끔찍한 광경에 나는 숨을 멈췄다.
‘결국 약이 모자랐던 건가. 그래서 루시안이 다시 흑화해 버린 거야?’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안?”
그 순간 루시안의 고개가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그 찰나의 순간이 내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가 미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도.
수없이 그의 대한 사랑을 자신했던 것과 달리, 방금 그의 이름을 부른 내 목소리에는 지금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루시안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과 불안감, 수치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나는 아차 싶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뭘 하고 있었어요?”
그를 탓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루시안은 내 목소리가 어떻게 느껴졌던 것일까.
라라 공주의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뺀 루시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절대 이 여자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에요. 조금도 그런 잔인한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내게 변명하고 있었다.
마치 죄를 발각당한 죄인처럼, 혹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내게 미움받을까 봐.
그가 막 흑화했을 때, 내게 뻔뻔하게 타인의 죽음을 논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기뻐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속에서부터 차오른 뜨거운 것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약 때문이에요?”
“네?”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쿤이 만들어 준 약을 먹어서 그렇게 된 거냐고요.”
“…….”
철저하게 숨겨 온 비밀을 들킨 것처럼 루시안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 찼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다 들었어요. 당신, 약을 먹고 있다면서요! 그것도 부작용 위험까지 있는!”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루시안을 만나면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음 깊이 묻어 놨던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제정신이에요? 왜 그런 약을 먹어요? 그러다가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내게 다가온 루시안이 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니아. 부작용은 없었어요.”
그 말에 그렇구나 하고, 안심이 될 리 없었다.
쿤은 내게 약의 부작용에 대해 말했었다.
[부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누군가는 미약하게 지나가지만, 누군가는 엄청난 고통으로 신체가 망가질 수도 있지.] [루시안은 특별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럼 괜찮지 않을까요?] [난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해. 평범하지 않은 신체니 더더욱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치유 능력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몸속이 썩어 가고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그 말을 듣고 불안해서 제대로 잠도 들 수 없었다.
나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이제 약은 먹지 마요.”
“니아. 하지만…….”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게다가 말도 없이 내가 갖고 있던 ‘그 물건’도 가지고 갔죠?”
“……!”
“루시안의 고향에서 가지고 온 목걸이 말이에요.”
어린 시절 루시안이 흑화했을 때, 마을 촌장이 그의 힘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목걸이.
말이 목걸이지 그것은 짐승의 목에 차는 구속구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의 앞에 그 끔찍한 물건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 물건을 쓰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서랍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아무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그러나 루시안이 떠난 후 알아챘다.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내 방에 꼭꼭 숨겨 둔 목걸이를 가져갈 수 있는 건 루시안뿐이었다.
처음엔 당황했다.
왜 루시안이 목걸이를 가져간 것일까.
내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나? 제 손으로 목걸이를 처리하려는 걸까?
그러나 모두 답이 아니었다.
약에 대해 알게 된 지금, 그가 목걸이를 가져간 이유는 명확했다.
루시안은 혹시나 약이 떨어질 상황을 대비해 그것을 가져간 것이다.
제 목을 옭아맸던 목걸이를 스스로 채우기 위해서.
“…….”
루시안은 아니라며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루시안은 내게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
“내가 그렇게 당신을 몰아붙였어요?”
루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니아. 그냥 내가 선택한 거예요. 나를 믿지 못해서.”
“…….”
“안 그러면 또다시 당신을 괴롭게 할까 봐. 당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망치고, 당신을 속박할까 봐.”
진심이 느껴지는 애틋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에게 모든 짐을 지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
“약도, 목걸이도 필요 없어요. 이제 더는 참지 말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요. 내가 늘 당신의 곁에 있을게요. 누구도 보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하면 그가 기뻐할 줄 알았다.
나와 그의 러브 스토리의 엔딩을 장식하는 가장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말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루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그의 얼굴은 절망에 찬 사람처럼 어둡고, 시한부를 선고받은 이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가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안이 말했다.
“싫어요.”
“…….”
“이제 난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은 싫어.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루시안의 마지막 말이었다.
루시안은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나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도망치듯이.
“루시안!”
그를 쫓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아가씨.”
부드러운 목소리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와, 곤혹스러운 듯 입을 우물거리는 폴이 보였다.
두 남자가 여태 나를 지켜봤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얼굴에 훅 하고 열이 올랐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잖아!’
후회가 밀려들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나를 불렀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라라 공주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제야 나는 바닥에 있는 라라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주는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온몸이 잘게 떨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남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공주가 많이 놀란 모양이야. 바로 직전에 죽을 뻔했으니까. 바보 천치여서 티가 잘 안 나긴 하지만 의외로 나약하거든.”
“…….”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죽일 뻔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두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치료를 좀 해 줄 수 있니?”
그때 폴이 나섰다. 폴은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무시하십시오, 페르니아 님. 루시안 님은 조금 전 포로를 처형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예기치 않게 처형이 중단된 바람에 부상을 입은 포로를 고쳐 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폴의 의도는 확실했다.
폴은 루시안이 라라 공주의 목을 졸랐던 것을, 포로에 대한 처형으로 무마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루시안이 라라 공주의 목숨을 위협한 것은, 폴이 말한 이유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이번만 도와줘요, 폴.”
폴은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하지만 추후, 루시안 님께서 포로를 다시 처벌하고자 하시면 그 뜻에 따를 겁니다.”
고쳐 준 보람도 없이, 내일 당장 라라 공주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저 루시안의 폭력에 휘둘린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는 것뿐이니까.
이것이 끔찍한 위선이라고 해도.
* * *
라라 공주와 그녀의 노예들은 군의관이 있는 막사로 이송됐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환자로 인해 분주해진 막사 안에 얼굴을 쏙 내민 건 쿤이었다.
폴이 그를 보고 정색했다.
“쿤 님. 아무리 쿤 님이라도 이렇게 진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군의관이 아닌 외부인이시잖습니까.”
“하지만 난 의사인걸. 환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개뿔. 그냥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 구경하러 온 것뿐이면서.
내 말을 확인 사살하듯 쿤은 자연스럽게 막사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도대체 포로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카르디엔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오고, 반시체가 된 자들이 줄줄이 나왔잖아.”
“……시끄럽고 환자나 고쳐요. 환자가 걱정돼 왔다면서요.”
가차 없는 내 말에 쿤은 입을 삐죽였다.
환자를 보러왔다는 건 아주 속에 없는 말은 아니었는지, 쿤은 바닥에 누운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쿤이 다가가자 군의관들이 고개를 꾸벅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얼마 전까지 루시안의 군대에서 가장 실력 좋은 군의관으로 활동을 한 쿤의 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쿤이 라라 공주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쇼크 상태네.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초를 달여 먹이고 푹 재우도록 해.”
“알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군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쿤은 라라 공주의 옆에 누워 있는 노예들을 진찰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아도 그들의 상태는 라라 공주보다 심각했다. 그들은 몸이 뭉개졌고 피를 흘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쿤이 눈썹을 찡그렸다.
“포로수용소에 곰이라도 나타난 거야? 엄청난 힘으로 가격당한 것처럼, 뼈와 내장이 다 바스러졌잖아.”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라라 공주를 고쳐 달라고 한 후드를 쓴 남자에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 또한 루시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상태가 좋지 않긴 하지만 가능해. 까다로운 수술을 해야겠지만.”
“그럼 쿤이 좀 해 줄 수 있어요? 이 사람들, 꼭 나아야 해요.”
쿤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카르디엔이 그랬어?’라고 물으며 내 마음을 후벼 파지 않았다.
‘루시안이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었을까 봐 겁나?’
라고 묻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군의관들에게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당장 수술을 준비해. 뼈와 장기가 크게 손상된 상태다. 최대한 빨리 치료를 끝내야 해.”
“네!”
군의관들은 흥분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의관 사이에서 쿤이 전설의 명의로 통한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폴은 아니었다.
폴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쿤 님. 다시 말씀드리자면 쿤 님은 외부인으로 현 상황에서 활동을 하실 권한이 없습…….”
“그럼 지금 입대할게.”
“…….”
“그럼 됐지?”
한순간에 환자를 진료할 자격을 획득한 쿤은 군의관들과 수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들은 환자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는 닫힌 천막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인지 꾹 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가득 배어 있었다.
막사를 나온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해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새까만 밤하늘을 보며 나는 생각에 빠졌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이대로 루시안을 만나면 아까처럼 또 싸울 것 같다.
싸움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상처받는 것은 무서웠다.
……그는 너무 약하니까. 너무 약하고 여려서, 내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무너져 버릴 것 같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아까는 내가 너무 루시안을 몰아붙인 것 같아.’
루시안은 자신의 사랑이 통째로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단지 루시안이 걱정돼서 그런 말을 한 것뿐이야.’
약도, 목걸이도 필요 없다고, 루시안과 줄곧 함께 있을 거라고 한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원망하며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를 위해 나를 희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너무 좋아서, 그가 걱정되어서 내가 스스로 한 결정일 뿐이었다.
‘내일 해가 뜨면 루시안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보자.’
감정이 조금 진정된 후면, 분명 더 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건만.
폴이 마련해 준 숙소에서 선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
“루시안이 떠났다고요?”
내게 말을 전한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로요?”
“악시온 성으로.”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시온 성은 육안으로 선명히 확인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며칠 내로 성을 치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성을 치러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쿤에게 말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내가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왜 해.”
쿤이 말했듯이 그는 아무리 장난기가 많다고 해도 이런 노잼 농담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면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 남아 있었으니까.
아무리 피곤에 찌들어 잠들었던 나라도, 병사들이 대거 움직였다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병사들은 대부분 움직이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어제처럼 진영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쿤은 내게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게 오늘의 작전이래. 일명 카르디엔과 정예병 기습 작전.”
지금부터 진영지에 남은 병사들은 곳곳으로 퍼져 적군을 뒤흔들 것이다. 적군은 제국군을 막기 위해 병사들을 내보낼 테지.
그 사이 악시온 성은 비게 된다.
그 틈을 노려 카르디엔과 엄선된 정예병들이 성을 장악할 것이다.
쿤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적군을 칠 전략이지.”
나는 전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알겠다.
‘허울 좋은 개소리잖아! 나랑 마주치기 싫어서 도망간 거 아니냐고, 이 남자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젯밤, 루시안에게 차분히 말해 보아야겠다고 결심한 생각은 사라지고 분노만 차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루시안을 쫓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우발적인 감정으로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큼 태평한 곳이 아니다.
전쟁터다.
내가 괜한 일을 벌였다간 큰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니 얌전히 앉아서 그를 기다릴 수밖에.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루시안 바보, 똥개, 해삼, 말미잘.”
사나운 얼굴로 욕을 내뱉는 나를 바라보며 쿤은 키득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좋은 소식도 있으니까.”
기껏 위험한 곳까지 쫓아왔더니 싫은 소리 좀 했다고 버림받은 나한테 좋은 소식 따위가 뭐가 있는데!
삐뚤어진 마음에 도끼눈이 된 나를 향해 쿤이 말했다.
“악시온의 포로들이 모두 무사해.”
“……!”
“라라 공주는 정신을 차렸고, 수술을 받은 노예들도 경과가 좋아.”
“……다행이네요.”
“노예들이 엄청 고마워하더라. 자신 같은 노예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다니 정말 감사하다며 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그들을 도운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노예를 향한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위선 섞인 내 욕심일 뿐이었다.
전쟁과 같이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루시안이 사람을 죽이지 않길 바랐던.
그들에게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됐어요.”
쿤은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노예 말고 다른 포로는 어때? 그 사람도 널 보고 싶다던데.”
다른 포로?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싶어 나는 눈썹을 모았다.
잠시 후 나는 쿤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어제 내가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 포로 중 유일하게 멀쩡했던 남자였다. 후드를 뒤집어써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남자는 점잖은 목소리로 내게 공주와 노예들의 치료를 부탁했다.
‘악시온의 귀족이라고 했지. 이름이 그리폰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말은 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카르디엔의 일로 네게 할 이야기가 있다던데?”
* * *
나는 포로수용소를 향했다.
라라 공주와 노예들이 떠나 텅 빈 감옥 안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리폰이었다.
나는 철창 바깥에서 입을 열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죠?”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루시안이 진짜 힘을 드러낸 장면을 직접 눈으로 지켜봤다.
그런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몰라, 감옥을 지키던 경비병까지 물린 상태였다.
그리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감사 인사를 하지.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적군의 포로를 치료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감사의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쪽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내 말에 그리폰은 작게 웃었다.
“뾰족한 말투와 달리 눈은 전혀 그렇지 않군. 아주 맑고 곧아. 아가씨는 좋은 사람이지?”
나는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루시안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고 불러대더니 흐름이 왜 이래?
나는 당최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을 했지만, 그리폰은 내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애가 그렇게 빠졌겠지. 뒤틀린 영혼은 자신과 다른 영혼을 가진 이에게 현혹되기 마련이니까.”
그 애? 설마 지금 루시안을 지칭한 거야?
포로가 적군의 지휘관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근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이봐요.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나도 그랬어.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지.”
그리폰은 천천히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긴 은빛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얼굴에 감도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루시안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목소리가 떨려왔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그리폰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눈이 초승달처럼 휘자 더더욱 그의 모습이 루시안과 겹쳐졌다.
“루시안과 같은 피를 가진 존재.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의 생물학적 근원이지.”
……루시안의 아버지라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원작에서 루시안의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루시안에게 그런 존재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루시안도 결국 사람이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사망한 것이 확실시된 루시안의 어머니와 달리 그의 아버지에 대한 생사는 불분명했다.
무엇보다…….
‘루시안과 너무 닮았어.’
루시안보다 훨씬 연배가 높아 보이긴 했지만, 분위기나 외모는 꼭 닮아 있었다.
딱 루시안이 나이가 들면 저런 느낌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주장을 증거 하나 없이 내뱉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의 얼굴을 보니 내 말을 믿나 보군. 다행이야.”
나는 그제야 황급히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런 중요한 문제를 간단히 믿을 순 없죠.”
“그래?”
“일단 납득이 안 돼요. 루시안의 아버지라면, 왜 진즉 말하지 않았죠? 몇 번이나 그에게 정체를 밝힐 기회가 있었잖아요.”
내가 알기로 그는 최근에도 사절단의 자격으로 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루시안을 보지 못했다 해도 며칠 전, 라라 공주가 제국군을 찾아왔을 때는 분명 루시안과 마주쳤을 터였다.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 와서야 아버지라고 나서는 건데요?”
그리폰은 예상했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시안이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은빛 머리카락에 흔치 않은 붉은색 눈동자까지. 거울을 보듯 닮았으면서?
의심이 가득한 눈빛에 그는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내 핏줄이 이어진 자식을 본 것은 처음이거든. 난 내게 생식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그를 처음 보았을 때도, 조금 의심을 하긴 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지. 하지만…….”
그리폰의 붉은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이 났다.
“루시안이 라라 공주와 노예들에게 힘을 드러내는 순간 알았지.”
“…….”
“아, 이 아이는 나와 같은 괴물이구나.”
루시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 * *
이른 아침, 루시안은 정예병들을 이끌고 악시온 왕궁에 잠입했다.
악시온 왕궁에 남은 병사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실력 면에서도 제국의 정예병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승기조차 제국군에 있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루시안은 너무도 쉽게 악시온 성을 점령했다.
악시온 왕은 잠옷 바람으로 끌려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악시온 왕은 저를 끌고 온 병사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무엄한 놈. 감히 존귀한 몸에 손을 대다니!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나 비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앞에 루시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디엔!”
악시온의 왕은 마지막까지 멍청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적군의 지휘관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회유를 시도했다.
“너, 넌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제국에서는 천대받는다지? 악시온은 절대 그런 미신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대가 짐의 곁으로 온다면, 붉은 눈동자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루시안은 모자란 왕의 마지막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촤악.
루시안이 휘두른 검은 악시온 왕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데구루루. 왕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본 폴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적국의 수장, 악시온의 왕이 죽었다!”
“위대한 제국과 기사 카르디엔이 승리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짧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왕이 죽었다고 해서, 왕성으로 쳐들어간 군대가 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적군의 잔병을 찾아 소탕해야 했다.
왕성에 남은 왕족들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휘관이 꼭 필요할 만큼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안의 부관 폴은 제게 이 모든 일이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왜냐면 몇 시간 떨어진 거리에 페르니아가 있으니까.
왕의 목을 치자마자, 루시안은 번개처럼 제 약혼녀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루시안은 성에 남아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폴은 그런 루시안의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그가 아는 루시안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혹시 그날 싸우셔서 이러시는 건가.’
페르니아가 루시안과 재회했던 순간, 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약이니, 목걸이니,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루시안과 페르니아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폴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그래도 아니겠지. (정작 루시안 님은 모르시는 눈치지만) 매일 잠꼬대로 페르니아 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인데. 사랑싸움 좀 했다고 페르니아 님을 피하실 리가 없잖아.’
……놀랍게도 그 예측이 맞았다.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피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다정하지만 엄하다. 자상하면서도, 한번 결심한 고집은 꺾지 않는다.
분명 어물쩍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페르니아는 분명 또 그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루시안이 가장 듣기 싫어할 이야기를.
‘약도 먹지 말고, 목걸이도 사용하지 말라고?’
그녀의 마음은 알겠다. 분명 자신을 위해서겠지.
하지만 루시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승리했고, 이제 곧 황제로부터 원하는 것을 모두 받게 될 것이다.
고귀한 직위, 명예, 부, 그녀를 위한 모든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향해 웃을 것이다.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약은 분명 효과가 있어.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시키면 그녀도 이제 걱정을 접을 거야.’
그러니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해피 엔딩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 * *
악시온 성의 일을 정리한 루시안은 페르니아가 있는 군영으로 돌아왔다.
악시온 성을 습격했을 때도 평온했던 루시안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말도 없이 두고 와 그녀는 분명 화가 나 있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또 약과 목걸이를 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목걸이는 허락 없이 가지고 온 것이니 돌려주자. 하지만 약은 아냐.’
약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막무가내로 고집 피울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부작용이잖아. 차분히 말해 보자. 아직까지 약의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한 달만 더 약을 먹어 보겠다고.’
그 후에도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으면 또 한 달. 그리고 또 한 달.
그렇게 시간을 끌면, 그녀의 불안감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루시안은 3일 만에 재회한 페르니아에게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아버지라고요?”
“네.”
페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루시안에게 그 말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단어였다. 조금도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그러나 페르니아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녀는 약에 대한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 큰 사건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보통 인간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그것을 알기에 루시안은 최소한의 관심을 보였다.
“……만나 보죠.”
당연히 진심 어린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페르니아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했다.
페르니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함께 갈까요?”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란 자를 마주쳤을 때, 감동받은 표정까지 연기할 자신은 없었다. 그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눌 자신도.
그런 비인간적인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이야기를 잘 나누어 봐요.”
페르니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에 루시안이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시안이 이 순간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귀여워. 꼭 안아 주고 싶어.’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루시안이 철창 앞에 섰다.
감옥 안에 있던 그리폰이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을 본 그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왔구나, 루시안.”
“…….”
그는 이전과 달리 후드를 벗고 있었다. 드러난 얼굴은 확실히 자신과 닮았다.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붉은 눈동자는 흔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뭐?’
자신과 닮은 인간이라는 것이. 혹은 자신과 피가 이어진 존재라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리폰은 루시안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게 꽤나 관심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나와는 다르네. 나는 네게 엄청나게 관심이 가거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말이야.”
“알 바 아닙니다.”
그리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지. 뜬금없이 나타난 아버지란 존재가 그리 반가울 리 없을 테니.”
“…….”
“하지만 내가 해 줄 말은 네게 도움이 될 거다. 난 너보다 우리의 ‘피’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든.”
루시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세간에는 붉은 눈동자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지.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이야기야.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오래전 악마의 힘을 가졌던 이의 후손이다. 붉은 눈동자는 그 피가 이어졌다는 증표고.”
루시안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사실이었다.
왜냐면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만 들어왔으니까.
그리폰은 말을 이었다.
“이 피를 가진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눈동자뿐만이 아니야. 보통 사람보다 극단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아주 포악하거나, 아주 냉정하거나. 그리고…….”
그리폰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단단한 철창에 닿았다. 잠시 후, 철창은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그리폰과 루시안 사이를 막고 있던 방해물은 사라졌다. 그리폰은 루시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어.”
“…….”
“너도 그렇지? 어떤 상처가 나도 회복되는 몸과 어떤 생명체라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그리폰은 눈썹을 내렸다.
“그래서 더더욱 기가 차더구나. 그런 힘을 가진 네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르디엔.
당연히 그리폰도 그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카르디엔을 제 핏줄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카르디엔이 너무나 멀쩡했기 때문이다.
카르디엔은 황제에게 복종하고, 성녀를 따랐다.
가난한 이에게 헌신했고, 병사들을 이끌며 싸웠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자라는 소문은 들렸지만, ‘괴물’이라는 말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자가, 인간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폰은 루시안과 페르니아의 대화를 듣고 알아챘다.
루시안이 그토록 ‘평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니. 평범한 척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를.
“페르니아라는 약혼녀 때문이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스로 네 목을 조르고 얌전한 개처럼 살고 있는 거야. 약을 먹으면서까지.”
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놀랍게도 그리폰은 처음 본 아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리폰이 조금 전보다 사나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루시안. 네 피에 새겨진 힘은 강해. 고작 그런 것으로 억눌러지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약을 먹는지 모르지만, 금방 내성이 생길 거야. 악마의 힘을 억누르는 목걸이 같은 성물도 마찬가지지. 너와 난 진짜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도구들로 영원히 속박되지 않아.”
조용히 있던 루시안이 처음으로 그리폰의 말에 대답했다.
“약을 늘리면 돼.”
“…….”
“내성이 생긴다면 더. 내성이 더 생기면 조금 더. 성물도 마찬가지야. 성물 하나로 힘을 봉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성물을 구하면 돼.”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필사적이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아니 그보다 더 처절했다.
그러나 그리폰의 대답은 더없이 냉담했다.
“아니. 넌 해내지 못할 거야, 루시안.”
“……!”
“그것이 이 피를 가진 자의 업보니까. 억눌렸던 힘은 폭주해 버리겠지.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숴 버릴 거야.”
그리폰의 말은 마치 악마의 저주처럼 루시안의 영혼에 쐐기를 박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고 해도.”
“…….”
끔찍한 이야기였다.
루시안은 더는 눈앞에 있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니 뭐니 필요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제게 끔찍한 말을 내뱉는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죽여 버릴까.’
그것은 전례 없는 살의였다.
당장 저 망할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저런 말을 하지 못하게 목을 치고 싶었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가 천천히 그리폰을 향해 다가갔다.
살기를 풀풀 내뿜는 루시안을 바라보는 그리폰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러나 음침한 감옥 안을 가득 채웠던 팽팽한 긴장감은, 맑은 목소리와 함께 깨져 버렸다.
“루시안. 괜찮아요?”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등장한 얼굴은 페르니아였다.
그 순간 그리폰은 보았다.
귀신 같았던 루시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당혹스러움도 잠시, 루시안은 금세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방금까지 보였던 악귀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무해한 얼굴이 됐다. 그가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니아. 여기까진 왜 왔어요.”
“생각보다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서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고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루시안에 대한 걱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루시안은 서로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기쁘다. 그녀가 아직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그러나 루시안은 제 감정을 표 내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단지 말이 좀 길어졌을 뿐이에요.”
“그랬구나.”
그제야 페르니아의 얼굴에 안심이 어렸다.
페르니아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하긴.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죠.”
루시안은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폰을 죽여선 안 되겠다. 적어도 그녀가 그를 신경 쓰고 있는 동안에는.
* * *
그리폰은 수용소에서 루시안의 막사로 이송됐다.
깔끔하게 꾸며진 루시안의 막사는 딱딱한 흙바닥에 벌레가 기어 다녔던 수용소보다는 훨씬 안락했다.
그리폰은 편안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확실히 아들이 있으니 좋구나.”
그러나 루시안의 반응은 싸늘했다.
“착각 마십시오. 당신을 아버지로서 대접해 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이 아니니까.”
그런 따뜻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폰이 마음먹는다면 감옥을 부수고 나올 테니, 수용소에 가두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내내 신경 쓰일 바에는 제 눈이 보이는 곳에 두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폰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공식적으로 악시온의 귀족인데 이렇게 특별 취급을 해도 돼? 부하들 사이에서 괜한 말이 나오면 어쩌려고?”
“걱정 마십시오. 부하들에게는 악시온에서 제국 쪽으로 넘어오고 싶어 하는 귀족이라고 해 두었으니까요. 협상을 주고받을 여지가 있는 이니 특별 관리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
“조용히 입 다물고 있다가 떠나세요. 나는 당신과 부자 놀음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들의 야박한 말에도 그리폰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는 협력하지. 어차피 나도 다른 이들에게 너의 친부라고 밝힐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떠날 생각은 없단다.”
“뭐라고요?”
“붉은 눈을 가졌음에도 너는 너무 불안하거든. 너를 좀 더 지켜보마.”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억누르는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은 실패하여 울부짖을지.
루시안의 손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허리에 두른 검을 빼 들어, 여유롭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참았다.
가장 큰 이유는 페르니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사랑한다고 한들, 친부를 죽인 남자를 사랑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폰의 힘이었다.
그리폰은 자신처럼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와 싸웠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수도로 돌아가면, 루시안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되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무시하고 두자.’
루시안은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그리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들이 귀엽다는 듯이.
* * *
며칠 뒤, 제국군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수도로 귀환했다. 그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 낸 이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디엔!”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르디엔!”
수만 명의 환호 속에, 말을 탄 루시안과 승리에 도취된 병사들이 거닐었다.
행렬은 어마어마했다.
사로잡힌 악시온의 왕족과 귀족이 비참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따라왔고, 그들의 뒤에는 악시온 왕국에서 가지고 온 금은보화를 어마어마하게 쌓은 수레가 따라왔다.
“우와아아!”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소리를 질렀다.
승리는 늘 달콤한 법이다.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이긴 전쟁은 더더욱.
그리고 그것은 황제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흥분이 어려 있었다. 그는 넘쳐나는 감정을 한껏 드러내며 말했다.
“해냈구나, 루시안.”
루시안은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악시온이란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그곳은 제국의 땅이 되어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허울뿐인 동맹국이 사라지고, 드넓은 땅이 생긴 것이다.
황제는 온화한 성군이었지만,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더욱 강대해지는데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감격에 찬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름다운 기사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악마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것도 고작 3주 만에.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니 이제 황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황제는 수많은 대신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했다.
“짐의 기사 카르디엔은 전례 없는 성과를 이룩했네. 그러니 마땅한 상을 주어야지.”
황제의 포상은 파격적이었다.
“북쪽에 있는 카르디엔령을 동서남북으로 100배 확장시키고, 그곳을 지배하는 카르디엔 경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평민 출신 기사, 루시안을 귀족 중의 최고 작위인 공작으로 임명하는 순간이었다.
대신들이 놀란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루시안이 엄청난 성과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보상이었다.
혼란에 빠진 대신들 틈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폐하. 카르디엔 경을 향한 폐하의 애정이 지극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상을 급작스럽게 주시면 다른 귀족들이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은 최대한 부드럽게 황제를 설득시켜려 애썼다.
황제는 제 말만 맞다고 우기는 폭군이 아니었다. 대신들이 한뜻으로 말하면 곤란한 얼굴로 고민하며, 한 발짝 물러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황제가 말했다.
“위화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지.”
“예?”
“카르디엔은 누구보다 충직하고 능력 있는 짐의 기사다. 그런 이를 더 예뻐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예에?”
“짐은 절대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야.”
황제가 공식적으로 루시안을 향한 편애를 선언한 순간이었다.
소란스러워진 대신들 틈에서 루시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머물렀다.
드디어 공작이 된다. 공작위를 받은 직후에 그는 페르니아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할 생각이다.
나와 결혼해 달라고.
그녀는 분명 기뻐하겠지.
* * *
그러나 루시안의 바람과 달리, 소식을 들은 페르니아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제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 내내 그녀의 방에 머물렀던 루시안은 이제 없다.
루시안은 황제에게 받은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데려온 그리폰 때문이었다.
페르니아는 짜증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폰을 감시해야 하니 함께 있기 힘들다고?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할까 봐 불안해서?”
다 거짓말이다.
“그냥 날 피하려고 하는 변명이잖아!”
결국 페르니아는 루시안이 약을 끊을 수 있게 설득하지 못했다.
아무리 떼를 쓰고, 화를 내도, 이번만은 먹히지 않았다.
[미안해요, 니아. 조금만 더 약을 먹을게요. 공작위를 수여 받을 때까지만이라도요.] [나는 공작위 같은 건 필요 없다니까요!] [내가 원해요. 가장 고귀한 신분을 얻어, 당신의 옆에 서고 싶어요.]루시안은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제발요.]그렇게 말하는데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지금도 약을 먹고 있다. 그리고 페르니아를 만나는 시간을 줄였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하아.”
페르니아는 이마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페르니아는 루시안이 어떤 마음으로 전쟁을 나갔는지 알겠다.
단순히 라라 공주에 대한 보복 때문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다.
물론 페르니아의 아버지는 신이 났다.
[으하하! 내게도 이런 봄날이 오는구나. 역시 카르디엔은 최고의 사윗감이었어! 믿어지니, 페르니아? 늘 나만 보면 재수 없게 굴었던 잉가르 공작과 페니안 후작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형님 오셨습니까 하더라고. 나보다 2살이나 어린 주제에 맨날 반말 찍찍 내뱉던 재수 없는 두 놈이 말이야. 그뿐만 아니란다. 귀족 가문 여기저기서 제발 한 번만 만나서 차나 한잔하자고 난리야. 암, 그럴 만하지. 내 딸은 미래의 카르디엔 공작 부인이니까!]그러나 페르니아는 아니었다.
“난 정말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냥 루시안만 옆에 있으면 되는데. 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애틋하고, 순수한 애정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그저 조금 답답할 뿐이었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루시안이.
* * *
수도에 있는 루시안의 저택.
드넓은 저택 안에는 수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다. 수많은 귀족이 카르디엔에게 보내는 선물들이었다.
그리폰은 감탄 어린 눈으로 선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석, 황금, 진귀한 동물까지. 하나같이 귀한 선물들뿐이군. 카르디엔 공작이라는 이름의 여파가 대단해.”
그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루시안은 실력에 비해 저평가를 당했다. 평민이라는 출신 때문이었다.
그를 총애하는 황제조차 귀족의 눈치가 보여 그에게 많은 것을 주지 못했다. 루시안도 황제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바뀌었다.
황제는 대놓고 루시안을 총애할 것을 선언했고, 루시안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말은 앞으로 루시안이 명실공히 이 제국의 두 번째 권력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껏 루시안을 무시했던 귀족들까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몰려들 수밖에.
‘정작 귀족들의 꿀 바른 아부를 받는 당사자의 얼굴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지만.’
그리폰은 걸음을 옮겼다. 텅 빈 저택에 그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향한 곳은 루시안의 방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 루시안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문을 열었지만 루시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철저한 무시였다.
루시안은 제 저택으로 그리폰을 데리고 오기까지 했으나 그뿐이었다.
루시안은 말 그대로 그리폰을 감시만 했다.
그가 혹여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지.
그 외에는 그리폰이 무얼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웃기게도 그리폰은 그것이 조금 서운했다.
‘평생 남에게 감정을 기대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이란 것이 이런 건가 싶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폰이 입을 열었다.
“루시안.”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리폰은 루시안이 반응할 만한 말을 알고 있었다.
“공작위를 받으면 페르니아와 결혼할 생각이니?”
페르니아.
그 이름만 들어가면 루시안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반응했다.
루시안이 눈을 뜨고 그리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폰은 만족스럽다는 듯 두 눈을 휘며 말했다.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다.”
루시안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그리폰이 페르니아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랍시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따위를 하려는 셈일까.
그러나 그리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루시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네 친모를 기억하니?”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요.”
루시안은 조금 놀랐다. 왜냐면 누군가와 친모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제 ‘아버지’와.
그리폰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녀를 만난 것이 벌써 20년 전이구나. 아직도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생생해.”
* * *
그리폰이 그녀를 만난 것은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에서였다.
마을 사람들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행자를 경계했다. 보통은 붉은 눈동자가 불길하다고 여겨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리폰을 보면 고개를 돌렸고, 불길하다며 집안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 그리폰을 향해 외쳤다.
“이곳은 신의 가호를 받은 성스러운 마을이다. 악마의 저주를 받은 자는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적의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그리폰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하군.”
긴 여행으로 준비했던 물건은 모두 해졌다.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식량도 다 먹어 버렸다. 며칠간 쉬지 못해 피로도 극에 달했다.
지금 들른 마을에서 식사를 하고, 장비를 챙겨야 했지만 그건 무리인 것 같았다.
“……어쩌나.”
얼핏 보아도 인구가 100명도 채 안돼 보이는 작은 마을.
마을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는 것은 숲속에 들어가 사냥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조금만 힘을 드러내면 모든 이들은 시체가 되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을 테니까.
그러나 손가락을 까닥거리던 그리폰은 곧 단념했다.
새삼스럽게 죄책감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좀 귀찮았다.
“조금 더 마을을 둘러보자.”
붉은 눈을 가진 이에게 유독 배타적인 마을이긴 했으나, 그렇지 않은 한두 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리폰은 한 여인과 마주쳤다.
여인은 이곳저곳 찢어진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언제 잘랐는지 모를 긴 머리카락은 뒤엉켜 있었다.
얼굴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얼굴 곳곳에 거뭇거뭇한 얼룩을 묻힌 여인은 그리폰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마치 처음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거지인가. 들러붙으면 귀찮은데.’
그리폰은 그녀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바구니 때문이었다.
바구니 안에는 갓 구운 빵과 과일 몇 개가 담겨 있었다.
거지의 손에 있는 것치고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다.
그리폰은 생각을 정정했다.
‘부유한 거지인가.’
이러나저러나 거지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그리폰은 고민했다.
‘빵을 좀 나눠 달라고 하면 주려나.’
그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우, 우와.”
“…….”
“이, 이렇게 이쁜 사람은 처, 처음 봐, 봤어.”
더듬거리는 말투나 아이 같은 발성이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여인은 그리폰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내, 내 이름은 마, 마, 마, 마리야.”
“마마마마리?”
“아, 아니. 마, 마리.”
“…….”
“마마, 마리! 마, 마리!”
“……마리?”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어눌한 말투와 달리 적극적인 말을 꺼냈다.
“마, 마리 집에 노, 놀러 올래?”
“……뭐?”
“마, 맛있는 빵 받았어. 사, 사과도 있어. 어, 어제 만든 재, 잼도 있어.”
“…….”
다행히도 그리폰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믿기지 않지만, 눈앞에 있는 모자라 보이는 거지 여인은 자신을 유혹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쩐다.’
그리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사람은 싫다. 냄새나는 사람은 더 싫고. 하지만…….
‘빵이 맛있어 보이는군.’
무엇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 얼핏 보이는 여자의 눈동자가 나쁘지 않았다.
아이처럼 맑은 눈이었다.
바보 같아 보일 만큼.
그리폰은 그런 자들을 좋아했다.
적어도 그런 자들은 자신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으니까.
그리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한껏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마리가 안내한 곳은 마을 외곽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제대로 씻지 않은 몰골의 마리처럼 집은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먼지가 무수히 쌓여 있었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마리는 아차 싶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쪼르르 달려가 의자 위에 있는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의자를 닦은 마리가 말했다.
“아, 아, 앉아. 깨끗해. 깨끗해.”
혹시나 그리폰이 갈까 봐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그리폰은 마리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았다.
마리는 재빨리 테이블 위도 치웠다.
그 후에 주방에 있던 그릇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을 찾아, 바구니 안에 있던 빵과 과일을 담았다.
마리가 그리폰의 앞에 접시를 놓아 주며 말했다.
“아, 안나 아주머니가 준 거. 마, 맛있어. 먹자.”
그리폰은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접시 위의 음식은 마리의 앞에 놓인 음식보다 훨씬 많았다.
마리는 그리폰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내, 내 꺼 더 줄까?”
그 말에 그리폰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폰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너 착하구나?”
“…….”
고작 한마디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칭찬의 말을 들은 것처럼 뿌듯한 얼굴을 했다.
저녁 식사가 다 끝날 때쯤, 마리는 다시 한번 그리폰을 유혹했다.
“치, 침대 좋다. 푹신푹신.”
마리는 제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통통 튀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침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폰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봐도 딱딱하고 낡은 침대잖아.’
그러나 그리폰은 이번에도 그녀의 유혹에 얌전히 넘어가기로 했다.
밤이 늦은 데다, 긴 여행으로 피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마저 차가운 흙바닥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폰은 서슴없이 마리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마리는 화들짝 놀라며 그가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침대는 작았다.
그리폰이 눕자 침대가 꽉 찼다.
도저히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폰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어쩌지? 내 품속에서 잘래?”
여인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추, 추, 춥지 않다. 나, 나, 나는 바, 바닥에서 잘 잔다. 치, 침대를 시러한다. 사, 사실 나 자, 잠을 자지 않는다.”
어떻게든 한 침대에 눕지 않으려고 온갖 변명을 긁어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유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리폰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다정한 말투에 세련된 매너까지.
그래서 여행을 하다 보면, 여인들의 유혹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혼자 사는 외로운 여인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과 자고 싶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식사, 잠잘 곳, 그리고 귀찮은 일까지 모두 해결되고 나니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리폰은 눈을 감았다.
침대 옆에 서 있는 마리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그 시선에는 조금의 적의도, 계산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황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리폰은 눈을 떴다.
밤새 숨겨져 있던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폰은 침대에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요정이 다녀갔나.”
그도 그럴 게, 어제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이었던 집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바닥에 쌓여 있던 먼지는 사라졌고, 쌓여 있던 물건들은 서랍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집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보니 꽤 쓸 만한 집이네.’
어제는 폐허인지 집인지 구별이 안 갔는데, 깨끗이 청소를 한 집을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벽난로도 있고, 창문도 여럿 있다.
만든 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따스한 집이었다.
그때 달칵하고 나무 문이 열렸다. 마리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꾀죄죄하던 마리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헝클어져 있던 긴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빗질이 되어 있었고,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얼굴은 깨끗했다.
누더기 같았던 옷도 달라졌다.
낡고 허름하긴 했으나, 평범한 여인의 복장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마리가 한순간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처럼 된 것은 아니었다.
마리는 미인이 아니었다. 동그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평범한 얼굴이었다.
굳이 외양의 특이점을 꼽자면, 유독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 정도?
그럼에도 어제의 그 거지 같던 모습과 비교하니 인상이 크게 달랐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 마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세, 세수했다. 내, 냄새나지 않는다. 머, 머리도 가, 감았다. 어, 엄마 옷도 입었어. 제일 이쁜 옷이야.”
그리폰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보이네.”
마리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마리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마, 마리가 아침 만들어 줄게. 마, 마리 요리 잘해!”
그제야 그리폰은 마리의 손에 들린 바구니 속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얻어 온 어제의 음식과 달랐다. 방금 땅에서 캔 것이 분명한 흙이 묻어 있는 야채들이었다.
사용한 지 오래된 것 같던 주방에는 냄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음식을 하고 있던 건가.’
그리폰은 이곳에 오랫동안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볼 것 없는 마을이었다.
굶주린 배를 채웠으니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 아침 먹고 가라. 응?”
마리의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가 신경 쓰였다.
잠시 후 그리폰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그 녀석을 닮았구나.’
언제였을까. 오래전에 키웠던 작은 강아지.
꼬리를 흔들며 천진하게 다가오던 작은 강아지의 눈동자와 꼭 닮았다.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기약 없는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잠시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그리폰은 마리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은 조용하고 따스했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이라,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들지 않아 더욱 좋았다.
그 와중에 마리는 그리폰을 챙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가장 잘 구워진 쿠키, 풀밭에서 본 가장 예쁜 꽃, 하나 남은 빵을 갈라 더 큰 쪽을 그리폰에게 주었다.
그리폰은 그녀의 빵보다 훨씬 큰 빵을 받으며 웃었다.
그녀는 마치 짝짓기를 하기 전, 필사적으로 구애하는 수컷 같았다. 아니 암컷인가.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귀여웠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보석과 황금 더미를 주며, 제발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울부짖었던 여인들보다 훨씬.
“아…….”
마리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그리폰이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인을 향한 남자의 손짓과는 많이 달랐다. 그것보다 훨씬 담백했다.
마치 어린 시절, 아빠가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은 손길.
그럼에도 충분했다.
“헤헤.”
마리는 실실 웃으며 그리폰의 손에 닿았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얼굴로.
바람이 불어오는 고요하고 한적한 때면, 마리는 그리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마, 마리. 태어났을 때 아팠대. 그, 그래서 바, 바보가 됐어.”
다행히 마리의 부모는, 모자란 딸을 평범하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모자란 딸을 혼내기도 하고, 감싸기도 하며, 마리를 키웠다.
마리는 말이 잘 통하는 친구도, 또래 여자처럼 사랑을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곧 비극이 찾아왔다.
마리의 부모가 사고로 급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고작 세 달 전의 일이었다.
“어, 엄마. 아빠.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아,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 다시 오지 않았어.”
마리는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울었다. 하지만 끝내 ‘죽었다.’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차마 쓸 수도 없는 슬픈 말인 것처럼.
부모님이 사라진 후 마리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집도, 마리도 엉망이 되었다.
웃긴 건 그 와중에 배가 고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는 이따금 마을로 가, 이웃들에게 음식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정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바보 마리를 동정했다.
그 덕에 마리는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리폰을 처음 만난 날, 마리는 특별히 자신을 신경 써 주는 안나에게 갓 구운 빵을 푸짐히 받았다.
마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걸로 당신을 꼬셨어. 안나 아줌마의 빵은 역시 최, 최고야.”
이 부분에서 그리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사람 한 명 얼씬거리지 않았던 마리의 집에 험악한 얼굴을 한 이들이 우르르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이었다.
“며칠 전 마을에 나타났던 붉은 눈의 남자가 이곳에 있다는 게 사실이냐?”
안색이 창백해진 마리가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들은 우악스럽게 마리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집에는 그리폰이 있었다.
그리폰은 긴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곱게 땋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부드럽다며 감탄한 마리가 만든 작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과는 다른 그리폰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뭐, 뭐야. 저 꼴은?’
그들은 붉은 눈의 남자가 마리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막 달려온 참이었다.
악마의 저주를 받은 자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각자 손에 농기구와 몽둥이까지 들고.
그러나 마주친 남자의 모습은 무해해 보이기만 했다.
‘아니지. 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
가장 앞에 서 있던 촌장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촌장은 마을에서 가장 독실한 신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붉은 눈을 가진 자는 불길하다는 옛 이야기를 신봉했다.
눈앞의 남자가 아무리 멀쩡해 보인다 한들,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남자는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지극히 위험한 분자였다.
촌장이 한 발짝 나서서 그리폰을 노려보았다. 누구에게나 인자했던 얼굴에는 경계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모자란 아이의 곁에 머물며 뭘 얻어 낼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신의 가호를 받은 신성한 마을이다. 너 같은 불길한 자는 절대 머무를 수 없다.”
마을을 나가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그리폰은 말없이 촌장을 바라보았다. 색이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촌장은 더더욱 긴장했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 감히 나를 내쫓느냐며 횡포를 늘어놓으면?’
촌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는 힘으로 제압한다.’
척 보기에도 남자는 무인이 아니었다. 무기도 가지지 않은 데다가, 섬세한 외모는 싸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고된 농사로 단련된 이쪽이 훨씬 체구도 크고 강해 보였다. 게다가 숫자까지 훨씬 많으니 붉은 눈의 남자를 처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그리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
너무 순순한 대답에 촌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폰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어. 그러니 이만 돌아가렴. 내일이면 난 이곳에 없을 테니.”
촌장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알겠습니다’, 라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촌장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사이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촌장의 기세는 대단했다. 뒤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
가까이서 그리폰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촌장은 어깨를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처럼 무해해 보이던 남자의 분위기가 변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위압감이 촌장을 압박했다.
숨이 턱 막히고,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다.
‘마, 마을 사람들이 보고 있어. 악마 놈에게 겁을 먹을 순 없어.’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는 촌장을 향해 그리폰이 말했다.
“나는 분명 내일 떠난다고 말했어. 그것도 허용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촌장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폰이 한 말의 뜻을.
제가 이곳에 있는 걸 완강히 싫어하니 어쩔 수 없이 지금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계속 자신을 귀찮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행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아주 끔찍하고 잔혹한 방법일 것 같았다.
결국 촌장은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촌장은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입으로 내뱉은 약속이니 꼭 지키거라. 내일 오후에 다시 왔을 때도 이곳에 있다면 그때는 이렇게 순순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든지.
그리폰은 고개를 까닥였다.
폭풍우처럼 몰아닥쳤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갔다.
그리폰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여기까지인가. 비교적 마음에 든 곳이었는데……. 아쉽네.’
진심이었다.
평소의 그리폰이었다면 떠나라는 말에 주저 없이 이동했을 것이다.
그런 일로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이 작은 집의 주인인 마리 때문이었다.
마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폰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저보다 마리에게 경멸 어린 눈빛을 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렇지, 이런 남자를 집에 들이다니.]마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었다. 저 때문에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으니 곤란할 것이다.
‘나를 이곳에 머물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폰이 말했다.
“내가 떠나면 그들에게 이야기해. 내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럼 그들은 다시 너를 포용해 줄 거야.”
그러나 마리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리폰을 덮쳤다.
무방비하게 앉아 있던 그리폰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리가 그의 위에 자리 잡았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그리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무례한 행동이라며 마리를 밀치진 못했다.
제 위에 자리 잡은 마리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마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 처음 봤을 때 처, 천사인 줄 알았어. 너, 너무 예, 예뻐서.”
“……어디가?”
“다.”
“…….”
“누, 눈동자도. 머, 머리카락도. 다. 다, 다 예뻐.”
마리의 손이 그리폰의 얼굴에 닿았다.
마리의 손은 작고, 따뜻하고, 거칠었다.
제 손으로 직접 물을 묻히고, 땅을 파고, 불을 만지는, 가난한 이의 손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폰은 순순히 마리의 손에 제 얼굴을 맡겼다.
“그, 그래서 씨, 씻었어. 깨, 깨끗한 옷도 입었어. 나, 나도 당신처럼 예, 예뻐 보이고 싶어서.”
마리의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마, 마리. 다, 당신이 좋아. 그러니까…….”
그 순간 툭, 하고 뜨거운 것이 그리폰의 얼굴에 떨어졌다.
마리의 커다란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었다.
마리가 말했다.
“나랑 자.”
“…….”
그리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말하는 것일까.
마리와 눈을 마주친 그리폰은 깨달았다.
그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늘 강아지처럼 천진했던 커다란 눈동자에 진한 열기가 머물렀으니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그녀도 여자였던 것이다.
마음에 든 남자를 강하게 열망하는.
그리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폰은 손을 뻗어, 마리의 얼굴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승낙한다는 말이었다.
마리와 그리폰은 그렇게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다.
불꽃처럼 뜨거운 밤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까만 밤도, 찬란한 아침도 아닌, 애매한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그리폰은 생각했다.
마치 그녀와 자신의 관계 같다고.
그녀는 귀엽다.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그것은 최근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는 다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어 달라고 붙잡지도, 함께 떠나고 싶다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그리폰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가질 수 있는 눈앞의 남자는 딱 여기까지라는 듯이.
그 순간 그리폰은 지금껏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정정했다.
‘너는 아이가 아니었구나.’
그녀는 어른이었다.
제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아는 어른.
마리가 말했다.
“자, 잘 가.”
그리폰이 말했다.
“안녕.”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함께 있었던 시간은 고작 5일이었다.
“…….”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폰을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부모의 이야기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지금 와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짜증이 조금 솟아났다.
루시안은 냉소적인 얼굴로 말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제멋대로 몸을 뒹굴고 다녔다는 거군요.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생각도 않고.”
“…….”
“당신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사람은 그렇지 않았어요. 당신의 그 더러운 씨앗이 몸속에 남아 버렸으니까.”
루시안의 말대로였다.
단 하룻밤으로 마리는 임신했다.
마리는 필사적으로 임신한 것을 숨겼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제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그건 싫었다.
마리는 배 속의 아기를 낳고 싶었다.
마리는 날이 갈수록 커다래지는 배를 커다란 옷 속에 숨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임산부의 몸으로 먹을 것을 구걸하고, 밭일을 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이따금 느껴지는 아기의 움직임은 모든 피곤함을 날려 버렸으니까.
아기에게 줄 인형을 만들던 마리는 배 속에서 꼼틀거리는 아기의 움직임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는 배 위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어, 어서 보, 보고 싶어.]그러나 마리는 아기를 볼 수 없었다.
작은 집에서 홀로 출산하던 도중,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어난 아기를 보지도 못했다.
으아앙-
으아앙-
작은 아기는 움직이지 않는 엄마의 곁에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작은 집을 지나가던 아낙네 한 명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얼굴로 마리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낙네는 신음을 내뱉었다.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마리의 두 다리 사이, 새빨간 피 속에 아기가 울고 있었다.
아기는 작은 몸에 덕지덕지 묻은 제 엄마의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물론 루시안은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룻밤의 인연이 여인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다가왔을지.
여인은 자신을 낳고 죽었다.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주받은 아기를 낳은 여인의 삶이란 뻔하니까.
그러니 루시안이 그리폰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경멸과 원망뿐이었다.
루시안의 형형한 눈빛에 그리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 나의 불찰이지. 어리석게도 그때는 임신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어. 왜냐면 나는 정상적으로 임신을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으니까.”
루시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루시안. 우리는 악마의 힘을 이어받은 괴물이지. 그래서 평범한 관계로는 절대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물의 씨가 자리 잡기에 인간의 몸은 너무 연약하거든.”
“…….”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 생을 갈망하는 씨앗이 여린 몸속에 자리를 잡을 때가 있지.”
마주친 그리폰의 아름다운 얼굴이 섬뜩했다.
“씨앗은 어미의 배 속에서 악착같이 자라나 몸집을 불리지.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미를 죽여 버리고 말아. 너와, 나처럼.”
끔찍한 말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나 때문에 죽은 어미에게 죄책감이라도 가지란 말인가.
그러나 이어진 그리폰의 말은 루시안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내가 페르니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거란다.”
“……”
“그녀가 너의 아기를 가질까 봐.”
루시안은 마치 세상이 한 바퀴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루시안. 너는 그녀를 사랑하지? 평생 그녀와 함께 있고 싶겠지. 그럼 넌 시시때때로 엄청난 유혹을 받게 될 거야.”
유난히 뜨거운 열기가 오르는 날. 활짝 미소 짓는 그녀가 사랑스러운 날.
혹은 시원한 여름 바람이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날.
루시안은 치솟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페르니아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겠지.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갈구하는 순수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면, 페르니아의 배 속에도 괴물의 씨앗이 자리 잡겠지.”
“…….”
“아기는 그녀의 배 속에 뿌리를 내리고는 기다릴 거야. 제 엄마의 생명을 짓이기고 태어날 날을.”
루시안은 더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닥쳐!”
루시안의 손이 그리폰의 목을 잡았다.
이대로 머리통을 통째로 뽑아 버리면, 시끄러운 말을 내뱉는 입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허튼 협박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폰도 루시안의 어마어마한 힘을 느꼈다. 그러나 목이 박살 날지라도 그리폰은 입을 열어야 했다.
목이 잡혀 있어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그러니까, 당장, 헤어져.”
“…….”
괴물은 절대 사랑하는 이와 어울릴 수 없어.
괴물은 그런 바람 따위를 가져서는 안 돼.
“나처럼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기 전에.”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눈빛에 어린 것은 크나큰 절망이었다.
* * *
똑똑거리는 소리에 창문을 연 페르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창가에 루시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루시안은 흑화한 후, 고용인의 눈을 피해 종종 이렇게 창가로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왜냐면 요 며칠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피했으니까.
페르니아가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 입술을 삐죽였다.
“뭐예요. 내가 만나자고 할 땐 바쁘다는 핑계로 졸졸 피하더니.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흥흥거리면서도 페르니아는 루시안을 제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맞잡은 루시안의 손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바깥에 오래 있었어요?”
어느새 페르니아의 얼굴에 어려 있던 원망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몸이라고 해도 막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페르니아는 서둘러 루시안을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그의 위로 둘둘 말았다.
루시안을 이불 번데기로 만든 후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녀는 이불 밖으로 쏙 나온 루시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볼도 얼음장 같아.”
걱정이 가득한 눈빛. 따뜻한 손.
페르니아의 온기 속에서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페르니아.
나 오늘 그 남자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어요.
나는 괴물의 아이래요. 내 어머니는 나를 낳아서 죽은 거래요.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당신을 죽게 만들 수도 있대요.’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루시안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너무 무서웠다.
4권에서 계속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랍니다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