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0
26.
어떻게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녀를 소중히 하면 된다. 절대 아이 같은 것은 가지지 않게.
소중히. 정말 소중히.
그러나 루시안은 그 결심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의 힘이 커져서 또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아니. 먼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이라도 쿤이 만들어 준 약의 효능이 사라져 버리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루시안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페르니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루시안?”
“…….”
루시안은 늘 생각했다.
페르니아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없애 버릴 거라고.
그리고 이 순간,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내게 말해 봐요. 어떤 이야기도 괜찮아요.”
그녀는 너무나 예뻤다.
당장이라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을 만큼.
평생 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절대 말할 수 없어.
그 말을 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페르니아는 자신을 밀어낼지 모른다. 페르니아의 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싫다.
정말로 싫다.
루시안은 힘겹게 표정을 정돈했다. 그는 눈썹을 내리며 아이처럼 말했다.
“며칠 후에 있을 작위 수여식 때문에 긴장이 되어서 그래요.”
“루시안도 긴장을 해요?”
“그럼요. 나도 사람인걸요.”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었다. 작위 수여식 같은 행사는 전쟁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루시안에게는 극도로 불편한 자리일 것이다.
그것을 아는 페르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썹을 내리며 루시안을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나도 함께 가잖아요. 너무 긴장되면 황제고 뭐고, 다 무시하고 나만 쳐다봐요. 루시안은 그거 잘하잖아요.”
농담 같기도, 진담 같기도 한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페르니아는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당신은 잘할 수 있어요.”
“…….”
“나의 루시안이니까.”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가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루시안은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한없이 불안한 마음을 슬쩍 감춘 것뿐이었다.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향한 갈망과 스스로에 대한 불안함으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 * *
루시안의 작위 수여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위 수여식은 본래 초대받은 몇몇 귀족들과 조용히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황제는 일부러 판을 키웠다.
황성 안에 있는 드넓은 광장에서 작위 수여식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초대받지 않은 평민들도 입장을 허용했다.
파격적인 소식에 수도는 난리가 났다.
“세상에, 카르디엔 님이 공작님이 되는 걸 직접 눈으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설마 자네도 가려고? 30년 동안 한 번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잖아.”
“당연히 가야지. 제국의 역사 속에 남을 순간을 두 눈으로 봐야 하니까.”
“엄마, 나도 꼭 가고 싶어요.”
“나도요.”
평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황실 광장에는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릴 것이다.
그것이 황제가 노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여러 이유로 루시안이 공작이 되는 것에 불만을 품는 귀족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루시안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루시안은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기사가 아니다. 그의 인망은 두텁고, 수많은 국민은 그를 지지한다.
그것은 명망 높은 귀족들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오만한 그들이라도 국민에게 이만한 지지를 받는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귀족 저택. 귀족들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루시안이 공작이 되는 것에 유달리 큰 반감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평민 출신에게 공작 작위를 주는 것도 용납이 안 되는데, 그 자리에 평민들의 참석까지 허가하다니요.”
“폐하께서 평민들에게 관대하신 것은 알았지만 이것은 선을 넘었어요.”
하지만 귀족들은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현재 루시안과 황제의 기세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 몇 명이 힘을 모은다고 해서 꺾을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귀족 한 명이 주먹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이대로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따위 평민 놈이 공작위를 달고 제국을 호령하는 꼴을 봐야 하는 거냐고요.”
이대로 루시안이 공작이 된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오만방자하게 날뛸 것이다.
더불어 황제도 그의 힘을 믿고 귀족들을 억누를 테지.
어느 모로 보나 자신들에게는 조금도 좋을 게 없었다.
그때 가르시안 후작이 나섰다.
“사실 제게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무슨 계획입니까?”
귀족들의 시선 속에 가르시안 후작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승리의 영광에 도취되어 잊고 있었겠지만, 카르디엔은 악마입니다. 그 점만 증명하면 돼요.”
가르시안 후작은 예전부터 ‘카르디엔 악마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중하게 들어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왜냐면 악마라고 하기에 루시안의 상태가 너무 멀쩡했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제외한 곳에서 루시안은 모든 이에게 예의를 갖추었고, 괴상한 행동도 한 적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악마라고 몰아붙이기에는 근거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떻게요? 카르디엔의 멱살을 잡고 네놈은 악마라며 따지기라도 할 겁니까?”
가르시안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한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붉은 보석이었다.
“그게 뭡니까? 루비?”
가르시안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평범한 보석이 아닙니다.”
가르시안 후작은 보석을 손에 들며 말했다.
“이건 바로 악마의 보석이라 불리는 마력석이에요.”
“뭐라고요?”
충격적인 말에 귀족들이 눈을 크게 떴다.
가르시안 후작이 콧김을 내뿜으며 긴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는 악마의 힘을 억압하는 성물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 앞에서 카르디엔이 악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물을 보유하고 있는 신전에도 찾아가 봤지만 거절당했다. 일반인에게 함부로 귀한 성물을 넘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가르시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반대로 돌렸다.
‘성물을 구할 수 없다면 그 반대는?’
가르시안 후작은 엄청난 돈을 써서 겨우 물건을 구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보석일 뿐이지만, 악마의 힘을 가진 자에게는 그렇지 않지요. 악마의 힘을 가진 자가 이 보석을 만지면…….”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들의 시선을 즐기며 가르시안 후작이 말을 이었다.
“악마의 힘이 폭주한다고 하더군요. 마치 상자 안에 꾹꾹 숨겨 두었던 폭탄이 폭발하는 것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귀족들은 놀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가르시안 후작의 말대로만 된다면, 루시안은 절대 공작위를 이을 수 없다.
제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악마가 공작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귀족이 물었다.
“그런데 악마의 힘이라는 게 폭발하면 위험한 것 아닙니까?”
그들은 실제 악마의 힘을 본 적은 없었으나, 그 힘이 막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악마의 힘은 엄청났다.
사자가 작은 쥐 한 마리를 잡는 것보다 쉽게, 수만 명의 인간을 몰살시킨다고 했다.
가르시안 후작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겠지요. 그것에 대비하여 저희는 작위 수여식에 불참하면 됩니다.”
황제가 주최하는 중요한 행사이긴 했으나, 변명을 둘러대면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다.
원체 카르디엔을 탐탁지 않아 하던 이들이니 단체로 자리를 비워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르시안 후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에 황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저희가 알 바가 아니고요.”
악마가 황제를 죽이든.
그 곁에 있는 귀족을 죽이든.
광장에 모인 평민 놈들을 모두 죽이든.
가르시안 후작의 말을 이해한 귀족들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느냐고 가르시안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황제의 눈 밖에 났다. 앞으로 그들에게 남은 건 비참한 몰락의 길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것은 기회였다.
황제와 그가 아끼는 귀족들이 사라지고, 카르디엔을 향한 평민들의 환호성이 비명으로 바뀔 수 있는 기회.
야욕에 눈이 먼 이들의 시선 속에 붉은 보석이 빛났다.
선명한 붉은 빛은 마치 사람의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피 같았다.
* * *
라일락 저택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바로 루시안의 작위 수여식 날이기 때문이다.
라일락 후작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 사위가 공작이 되는 날이야. 이 라일락의 삶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라고. 그러니 코털 하나 삐져나오지 않게 완벽히 치장해야 한다!”
“네!”
하인들이 전투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라일락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2층 방에 있는 페르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앤은 콧김을 내뿜으며 새벽부터 페르니아를 꾸몄다.
“최고의 보석! 최고의 드레스! 최고의 메이크업! 그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해요!”
이게 좋을까? 아니 역시 저게 좋을까? 아니, 아니. 역시 이거?
방 안에 있던 목걸이를 몽땅 꺼내와 몇 번이나 목 위에 대는 앤을 향해 페르니아가 말했다.
“앤. 공작위를 받는 건 내가 아니라 루시안이야.”
“그게 그거죠.”
앤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를 보고 다들 분명 이렇게 생각할걸요. 황제의 편애와 카르디엔 공작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젊은 공작 부인이 눈앞에 있다고요.”
“…….”
“그러니 최선을 다해 도도하고 화려하게 꾸미셔야 해요. 이제는 일개 후작 영애가 아니라 고귀한 (예비) 공작 부인이니까요.”
민망한 말이었지만 페르니아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하아.”
결국 페르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얌전히 앤에게 몸을 맡겼다.
사실 페르니아는 부담스러웠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루시안의 승진. 대놓고 자신을 아끼는 황제의 편애. 그 모든 것이.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들을 모두 부정할 순 없었다.
루시안이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간 것도 이런 이유여서였겠지.’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어서.
해결되지 않은 갈등에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루시안은 아직도 약을 먹고 있고, 그녀를 위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지기엔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 오늘까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자.’
그 후에 페르니아는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제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나를 위해 참을 필요 없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루시안.
소란스러운 라일락 저택과는 달리, 수여식의 주인공인 루시안의 저택은 고요했다.
부관 폴이 홀로 루시안의 단장을 도와주고 있었다.
폴의 솜씨는 훌륭했다.
덕분에 루시안은 아름답게 꾸며졌다.
빳빳하게 다려진 새하얀 제복. 그 위에 달린 수많은 훈장.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얼굴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루시안의 모습을 본 그리폰이 박수를 쳤다.
“와, 멋진데.”
역시 내 아들이야.
라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루시안의 기분을 잡칠 테니까.
중요한 날, 굳이 그런 식으로 루시안을 긁고 싶지는 않았다.
‘공작이라.’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제 발밑에 둘 수도 있는 루시안이, 말 잘 듣는 개처럼 황제에게 작위를 받은 것은 탐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루시안이 원하는 것이라면 지켜볼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친부랍시고 그를 휘두를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리폰은 루시안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폰의 손이 루시안의 목깃에 닿았다.
무슨 짓이냐는 듯 눈썹을 추켜올린 루시안을 향해 그리폰이 말했다.
“셔츠 깃이 삐뚤어졌구나.”
“…….”
“중요한 자리잖니. 제대로 하고 가야지.”
“…….”
루시안은 상관 말라며 그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얌전히 서 있는 아들을 보며 그리폰은 쓰게 웃었다.
‘내가 좋아서 얌전히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저 그리폰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을 뿐이다. 루시안은 그리폰이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는 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길가의 작은 돌멩이처럼.
그래도 아들이 제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에 기뻤다.
셔츠 깃을 정돈한 그리폰이 루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나이의 차는 있었으나, 두 사람은 꼭 닮아 있었다. 각각의 분위기가 달랐기에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 선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깨달을 것이다.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그리폰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잘 다녀오거라.”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방을 나섰다.
싸늘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리폰은 생각했다.
‘불안해 보이는군.’
아무래도 며칠 전 제가 한 이야기가 루시안을 크게 동요시킨 모양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으면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라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그리폰은 그 이야기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루시안이 꼭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겪었던 고된 길을 자식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다.
방을 나선 루시안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마치 깊은 늪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폰에게 며칠 전에 들은 말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비수처럼 제 심장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리 불안한 말이라고 해도 제 심장을 뚫진 못한다. 페르니아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오늘 일을 마무리하자.’
공작위를 받은 후에는 북쪽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루시안은 고민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루시안은 문을 열었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 * *
이른 아침부터 황성의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모두 루시안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백성들이었다.
“카르디엔!”
“승리의 기사, 카르디엔!”
그들은 흥분한 얼굴로 영웅의 이름을 외쳤다.
거대한 소리가 황성에 가득 울려 퍼졌다.
건물 안에 있던 황제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하구나. 짐의 즉위식 때에도 이 정도로 사람이 몰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황제의 곁에 있던 나이 든 시종장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정말 카르디엔 님께 너그러우십니다. 보통의 주군은 당신보다 많은 환호성을 받는 부하를 보며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황제는 그저 웃었다.
시종장은 루시안이 악마의 힘을 개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황제를 아끼는 부하에게 모든 것을 주는 속없는 주인처럼 볼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닌데.’
힘의 우위는 황제가 아닌 루시안에게 있었다.
루시안이 마음먹는다면 황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터였다.
황제가 사랑하는 제국도 마찬가지다. 이내 지옥이 되어 버리겠지.
그러나 지금, 제국은 평화롭다. 황제도 마찬가지다.
루시안이 이 이상 욕심내지 않았기 때문에.
‘바라는 것만 이루어 준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짐의 편이 되어 주겠지.’
황제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지.”
황제는 황금 망토를 펄럭이며 광장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황제 폐하 만세!”
“카르디엔 경 만세!”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황제는 광장에 있는 높은 단상으로 이동했다.
멈춰 선 황제가 손을 뻗었다. 평범한 동작이었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드넓은 광장에 황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황제의 시선이 단상 아래의 백성들을 향했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들은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없었다.
제국의 영웅, 카르디엔이 공작위를 받는 것을 눈으로 본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루시안을 향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황제는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귀족들이었다.
귀족들은 한껏 흥분한 평민들과 달리 분위기가 달랐다.
허리를 쭉 펴고 두 손을 모은 자세는 우아했고, 얼굴에는 차분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참으로 귀족다운 모습이었지만 황제는 속으로 헛웃음만 나왔다.
‘속으로는 별 계산을 다 하고 있을 텐데 말이지.’
루시안이 카르디엔 공작이 된다는 소식에 가장 바빠진 건 귀족이었다.
그들은 쉼 없이 득과 실을 따져 가며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카르디엔과 어떤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가. 어떻게 카르디엔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등등…….
모두 쓸데없는 고민이다.
‘루시안이 원하는 것은 자신과 약혼녀를 귀찮게 하지 않을 만한 힘일 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 욕심이 없지. 그대들이 어떤 달콤한 말을 떠들며 달려들어도 별 관심이 없을 거야.’
물론 황제는 그것을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귀족들은 평소에 너무 편하게 사니까. 저런 고민이라도 하는 편이 낫다.
그 후,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은 라일락 후작과 페르니아였다.
황제를 향해 쌍따봉을 날리며 격한 반응을 하는 후작과 달리, 페르니아는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황제의 반대편, 잠시 후 루시안이 등장할 곳이었다.
황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루시안이, 철없는 제 아들이, 에스텔이 왜 그렇게 저 아이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안다.
사람을 곧은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아이다.
얼핏 평범한 것 같지만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특히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기사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며 추켜세워지는 황태자나, 늘 천사처럼 웃어야만 했던 성녀에게는 더더욱.
‘착한 아이야.’
흐뭇하게 웃는 황제를 향해 옆에 있던 시종이 말했다.
“폐하. 카르디엔 님의 입장을 시작하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루시안이 등장했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 새하얀 제복을 입은 루시안이 황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르디엔!”
“승리의 기사, 카르디엔!”
잠시 조용했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오만한 얼굴로 앉아 있던 귀족들마저 넋을 놓고 아름다운 기사를 향해 시선을 빼앗겼다.
루시안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 카르디엔. 위대한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
황제는 루시안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3년 전, 고작 17살의 평기사가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과연 어떤 자인가 하는 호기심에서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제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던 루시안을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그 아래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까지.
무용을 펼친 기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참 맑았다.
황제는 소년 기사에게 한눈에 반했다.
이성에게 느끼는 끈끈한 애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생 보기 힘든 경이로운 동물, 그러니까 귀한 새 같은 것을 봤을 때의 감정과 가까웠다.
황제는 루시안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루시안이 악마의 힘을 개화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서늘해지고 둘만 있을 때는 예도 갖추지 않지만, 그래도 황제는 여전히 루시안을 아꼈다.
‘공작의 작위. 이 정도면 그동안 주고 싶었던 만큼 주는 것이겠지.’
루시안이 공작이 되면 원하는 것을 다 얻은 셈이니 이제 황제에게 찾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다시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페르니아와 함께 조용히 살아갈 테지.
‘그것도 좋을 거야. 지금껏 너무 많은 피를 묻혔으니까.’
황제의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머물렀다.
제 곁에 겨우 붙들어 놨던 아름다운 새가 결국 떠나가는 듯한 아쉬움과 제가 없는 곳에서도 잘 살기를 바라는 애정이 뒤섞였다.
황제는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안 카르디엔. 그대는 짧은 시간 동안 제국에 수많은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그대의 기적 같은 성과에 짐은 응당한 보상을 주려고 한다.”
“…….”
루시안은 고개를 조아린 채 황제의 말을 들었다.
어느새 조용해진 공간에 황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그대는 루시안 카르디엔 공작이 되어, 북쪽 땅을 호령할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소식임에도 많은 이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제 제국의 누구도 그대를 멸시할 수 없고 적의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할 터이니.”
루시안에 대한 황제의 엄청난 사랑이 드러난 말이었다.
“영광입니다.”
루시안이 짧게 대답했다.
황제가 그들의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정중한 발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왔다.
시종의 손에 들린 금빛 케이스에 반짝이는 단검이 들어 있다.
루시안에게 주는 황제의 증표다.
보통 귀족의 작위를 줄 때는 훈장이 수여되지만, 루시안의 경우는 기사의 상징성을 담아 단검으로 제작이 되었다.
카르디엔을 상징하는 은방울꽃이 새겨진 검은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이 단검을 받는 순간, 루시안은 기사 카르디엔에서 카르디엔 공작으로 위상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황제는 우아한 손길로, 루시안에게 단검을 건넸다.
……그리고 황제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아름다운 훈장에는 추악한 모략이 얽혀 있었다.
루시안의 즉위를 반대하는 귀족, 가르시안 후작이 말했다.
[황제가 루시안에게 건네는 증표에 악마의 힘을 폭주시키는 보석을 다는 겁니다.]그렇게 되면, 가장 절묘한 순간에 보석은 카르디엔에게 닿을 것이다.
물론 일은 쉽지 않았다.
단검을 제작하는 장인을 꼬드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에 대한 충의가 깊을뿐더러 제가 만드는 예술품에 장난질을 할 만한 이가 아니었다.
가르시안 후작은 잽싸게 목표를 바꿨다.
장인의 아래에 있는 세 명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후작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제자를 꼬드겼다.
[내가 너에게 부탁할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저 카르디엔을 위해 만든 훈장에 이 보석을 절묘하게 끼워 넣어 주면 돼. 그렇게만 해 주면 엄청난 보상을 해 주마.]생활고에 시달렸던 제자는 가르시안 후작의 달콤한 회유에 넘어갔다.
[사람을 죽이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보석 하나만 바꿔 다는 건데, 뭘.]다행히 훈장에는 이미 붉은색 보석이 몇 개나 더 들어 있었다. 같은 색의 보석 하나를 끼워 넣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완성된 단검이었다.
황제가 루시안에게 단검을 건네는 순간, 악마의 힘을 가진 루시안은 폭주하여 눈에 보이는 모두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때가 내가 나설 타이밍이지.”
가르시안 후작은 자택에 편안히 앉아 중얼거렸다.
그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물론 꾀병이었다.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가르시안은 누구보다 빨리 황성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수십 명의 병사, 신전의 사제들과 함께.
그들을 호령하여 카르디엔을 섬멸하면, 가르시안 후작은 악마를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이 될 것이다.
* * *
황제가 검을 받기 직전, 루시안은 그답지 않은 상상에 빠져 있었다.
자신과 페르니아의 결혼식이었다.
정식으로 공작이 된 후, 그는 바로 페르니아에게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 후 이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를 것이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답겠지.
라일락 후작은 새신부가 된 그녀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아아. 내 딸이 드디어 이렇게 시집을 가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5살 때까지만 해도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으면서. 이 앙큼한 거짓말쟁이.]그는 너무 말이 많으니 그만 생략하자.
부케는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받는다고 했지.
그럼 에스텔이 받는 걸까.
아니, 예상외로 칼릭스가 받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황태자라면 가능한 일이지. 그는 에스텔 님에게 빠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좀 찝찝하긴 하지만 영 못 봐줄 꼴도 아니었다.
페르니아가 즐거워한다면 그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붉은 보석이 달린 검이 손에 닿는 순간, 루시안은 눈을 크게 떴다.
쿵.
쿵쿵.
쿵쿵쿵.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뜨거운 것이 제 몸을 다 먹어 치우는 느낌.
머리도, 두 손도, 심장도, 모든 것을 다 먹어 치운 후에 남는 것은 오직 본능과 탐욕이었다.
‘어째서?’
왜 이렇게 갑자기?
분명 오늘도 약을 먹었는데?
그러나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루시안의 이성이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돼.’
루시안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잡으려 애썼다.
루시안은 알고 있었다. 제가 이성을 잃을 순간 가장 먼저 할 짓을.
본능만 남은 그는 페르니아가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잔혹하기 짝이 없다.
분명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제부터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옆의 시종도.
황급히 달려올 병사들도, 모두.
그리고 페르니아를 찾아 품에 안고는, 그녀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지.
감히 그녀의 곁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루시안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싫어.’
루시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살육하고 싶지 않았다. 페르니아에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사람들에게 미움받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페르니아, 페르니아.’
루시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페르니아를 찾았다. 먼 곳에 앉아 있는 페르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
페르니아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루시안의 이상을 감지한 것처럼.
그러나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쿵. 쿵. 쿵. 쿵.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붉은 눈동자의 안광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이제 한계였다.
차앙-
루시안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빼 들었다.
쇠붙이 소리와 은빛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검이었으나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루시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
황제를 죽이자.
속으로 온갖 계산을 하며 웃고 있는 귀족들도, 나를 추켜세우며 눈을 빛내는 평민들도 모두.
저들은 날 이용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 놈들이야.
살려둬 봤자 또 내게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할 거야.
그녀와 나를 떼어 놓으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루시안은 검을 휘둘렀다.
“안 돼!”
이쪽으로 다가오던 페르니아가 소리를 질렀다.
풀썩.
황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황제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황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황제의 얼굴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황제의 피가 아니었다.
……루시안의 피였다.
루시안의 난도질당한 두 눈 위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통곡하는 이의 눈물처럼.
“루…….”
황제가 뭐라 말하기 전에 찢어지는 듯한 페르니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시안!”
그와 동시에 루시안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두 눈에 불을 지핀 것처럼 뜨거웠다.
그때, 루시안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루시안은 단번에 알아챘다.
페르니아였다.
그녀는 세차게 떨리는 손으로 루시안을 껴안으며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예요, 왜!”
듣는 이의 마음이 에일 만큼 비통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왜 화내는지 안다.
하지만 루시안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루시안은 고통이 스며들어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어요.”
“…….”
“이성이 사라지고 그동안 억눌러 왔던 힘이 폭주해서 사람을 죽여 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 눈을 베었어요.”
“…….”
그 순간, 페르니아가 숨을 멈춘 것 같다고 느낀 건 루시안의 착각이었을까.
루시안은 페르니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루시안은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다.
앞으로 그녀를 볼 수 없는 건가.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럼에도, 제 행동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제 몸을 찢고 폭주할 것 같았던 힘이 사라졌기 때문에.
루시안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듬으며 말을 이었다.
“늘 생각했거든요. 붉은 눈을 없애면 악마 같은 힘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정답이었어요.”
“…….”
“몸속에 들끓고 있던 힘이 사라졌어요. 이제 조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끔찍한 모습으로 독점하고 싶지도 않아요.”
“…….”
“이제 나, 악마가 아니에요.”
“…….”
스스로 제 두 눈을 베는, 끔찍한 짓을 벌인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은 목소리였다.
마치 자신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처럼.
툭.
루시안은 제 손등에 떨어진 뜨거운 물방울에 움찔거렸다.
그것은 페르니아의 눈물이었다.
툭.
툭.
뜨거운 눈물이 손등에 계속 떨어지자 루시안은 당황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루시안은 서툰 손길로 더듬거리며 페르니아의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니아.”
“…….”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두 눈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은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우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서.
도대체 왜 그녀가 우는 것일까?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웃었으면 좋겠어.
내 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아, 악마!”
저쪽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폐하께 달려들던 순간에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를 다들 보셨지요? 우리는 모두 속은 겁니다. 악마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자는 악마라고요!”
모여 있던 수많은 이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익숙한 말들이 루시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카르디엔 경이 악마였다니.”
“너무 무서워요.”
“아아, 믿을 수 없어.”
“끔찍해.”
루시안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주받은 붉은 눈동자는 사라졌다.
그 증거로 앞은 보이지 않고, 두 눈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야. 나는 이제 악마가 아니야.
괴물도 아니야.
이제는 그녀의 곁에 있어도 되는…….
루시안이 변명을 하고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워!”
소란스러움을 채찍질하는 듯한 날카롭고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페르니아였다.
루시안을 품에 안은 페르니아가 소리쳤다.
“그래. 당신들의 말대로야. 루시안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 따위 5초 만에 죽여 버릴 수 있다고. 그러니 그런 끔찍한 짓을 당하기 싫으면 입다물어.”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흉악한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따질 수 없었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루시안의 눈가에 무언가가 닿았다. 달콤한 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이었다.
페르니아가 목에 걸치고 있던 스카프였다.
페르니아가 천으로 루시안의 눈을 동여매며 말했다.
“피가 멈추긴 했지만 상처가 심해요. 일단 이곳을 나가 빨리 치료를 받도록 해요.”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멍하니 있던 루시안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지만 니아…….”
이런 식으로 떠나 버리면 페르니아의 입지는 정말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악마를 두둔한 여자로 낙인찍혀 버린다.
그러나 페르니아의 중얼거림이 더 빨랐다.
“저 따위로 사람을 쳐다보다니. 망할 놈들. 진짜 다 죽여 버릴까 보다.”
“…….”
서늘한 목소리는 농담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결국 페르니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페르니아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파도 조금만 참고 가요. 더 이상 저런 사람들 시선 속에 당신을 내버려 두기 싫으니까.”
엄한 목소리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조용한 공간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
루시안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침묵 속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쏟아지고 있을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경멸. 공포. 적의. 어느 쪽도 좋은 시선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너무 어둡고 잔혹한 시선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제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은 단단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자신을 지켜 주겠다는 것처럼.
영원히 나만은 너의 곁에 있을 거라는 것처럼.
루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 상황은 그가 원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보호받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루시안은 솔직하게 제 감정을 인정했다.
‘……기뻐.’
그도 결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었던.
지켜 주고, 지킴을 받고 싶었던 그런, 평범한 사람.
루시안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난도질당한 눈이 시큰거렸다. 여전히 불타는 듯 아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말로 다 괜찮았다.
* * *
작위 수여식이 그렇게 끝나 버렸으니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일어났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루시안을 집으로 데려와 내 방 침대에 눕혔다.
쿤이 수도에 머무르고 있어 다행이었다.
내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쿤이 루시안의 눈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고작 하루 만에 상태가 부쩍 좋아졌다.
속살이 다 보이고, 핏방울이 어려 있던 끔찍한 상처가 아물었다.
쿤이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대로 실명이 되겠지만 카르디엔은 아니야. 놈은 괴물이니까 금방 나을 거야.”
평소라면 그를 괴물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심했다.
그가 평범하지 않아서. 이 끔찍한 상처가 다시 나을 수 있어서.
나는 그 말에 안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루시안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적어도 겉으로 봤을 때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루시안은 눈을 뜨지 못했다. 햇빛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마치 칼로 베인 것처럼 아프다면서.
결국 쿤은 다시 루시안의 눈에 약을 바르고, 그 위에 붕대를 감을 수밖에 없었다.
쿤이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상처가 거의 다 아문 것으로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지. 시신경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의조차 모르는 루시안의 상태를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쿤이 진찰을 마치고 돌아간 후, 나는 루시안이 누워 있는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눈에 붕대를 감은 루시안이 아기 고양이처럼 내게 반응했다.
“니아.”
루시안은 자연스럽게 내 곁에 다가와 내 목 위에 얼굴을 대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 향기를 맡는 것이다.
눈을 다친 이후로 루시안은 이런 식으로 나를 느끼곤 했다.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잠시 후 루시안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쪽 하고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
그는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복잡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루시안.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뭐가요?”
“눈이 회복되지 않게 루시안 스스로 막는 중이냐고요.”
“…….”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추측이 정답인 것을 알았다.
나는 심장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루시안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눈을 다친 이후로 약을 먹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감정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마치 흑화하기 전처럼.
그가 휘둘렀던 악마의 힘과 함께 그를 뒤흔들었던 격렬한 감정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정말 눈을 다쳐서 힘이 봉인된 건지, 아니면 루시안이 그렇게 믿어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쉽사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를 말릴 수 없기에.
더 이상 나는 내 욕심 때문에 그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물론 마음이 좀 아프긴 하지만 괜찮아.’
그렇게 결심을 하며 입술을 꾹 깨무는데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니아. 난 항상 내가 붉은 눈동자를 가진 괴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져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나도 다른 기사들처럼 전쟁터에서 난 상처가 훈장처럼 몸에 남았을까. 성녀님께 조금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루시안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하얀 붕대 속에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당신을 좀 더, 잘 사랑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래요?”
루시안은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네.”
“…….”
괜찮다고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심장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구나, 하고 담담하게 웃어 주자.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루시안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싫은 건 아니랍니다. 당신이 내 붉은 눈동자를 좋다고 하니까. 예쁘다고 하니까. 걱정해 주니까…….”
“…….”
“나는 내 붉은 눈동자가 좋아요.”
루시안이 저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기뻐.’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만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눈가에 눈물이 어릴 만큼.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도 루시안은 마치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내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가 나를 품속에 안으며 말했다.
“다만 이 느낌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어요.”
“어떤 느낌이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하겠구나, 하는 느낌이요.”
“…….”
“이 느낌을 제대로 기억해 두면 당신을 더욱더 잘 사랑할 수 있겠죠?”
잔잔한 목소리에 어린 간절한 바람이 느껴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곧 완전한 당신의 루시안으로 돌아갈게요.”
이토록 예쁜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후, 황제가 찾아왔다.
루시안이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나 혼자 황제를 만났다.
“루시안의 눈은 아직 낫질 않았다지.”
“네.”
“……그래도 네 얼굴을 보니 상태가 괜찮은 모양이야. 안심이다.”
“폐하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내 말에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 며칠 귀족들에게 시달렸거든.”
귀족들은 작위 수여식 이후 완벽하게 루시안을 악마로 정의했다.
귀족들은 황제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악마를 제국의 공작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당장 카르디엔에게 내려 주신 작위를 해제하고 그를 척살하십시오.]그러나 황제는 완강했다.
[카르디엔은 제국에 더없는 영광을 가져다준 기사다. 단지 그가 평범한 인간과 조금 다른 힘을 가졌다고 해서 그 공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어.]귀족들은 한탄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더는 강하게 나오지 못했다.
황제의 힘이 너무 강했다. 함께 척살을 외쳐야 할 신관들도 조용했다.(이 부분은 에스텔이 손을 써 준 것이었다.)
무엇보다 카르디엔이라는 이름이 주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귀족들은 누구보다 루시안의 힘을 잘 알았다.
루시안은 아군이라면 더없이 든든했지만, 적군이라면 더없이 두려운 존재였다.
여기서 자칫 제멋대로 움직였다가, 찍소리도 못하고 카르디엔의 검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아직 몇몇 귀족들은 완강하게 루시안을 처형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잦아들고 있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겨 보니 느꼈겠지. 괜한 반발심으로 루시안을 적으로 분류하느니, 그의 정체를 따지지 않고 아군으로 삼는 편이 훨씬 이득이 되는 것을 말이야.”
나는 그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감정이 되었다.
당장 귀족들이 그를 무찌른다며 저택으로 쫓아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저런 식으로 그의 이용 가치를 매기는 건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황제가 말했다.
“불쾌하긴 해도 루시안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지.”
황제가 나를 보며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언제든 루시안과 함께 저택을 나오거라. 짐이 너희를 지켜 주마. 적어도 루시안이 악마라며 돌멩이를 맞을 일은 없을 거야.”
고마운 말이었다.
루시안을 아끼는 황제의 진심이 느껴지는.
그러나 나는 황제의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루시안과 저는 수도를 떠나려고 하거든요.”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북쪽에 있는 루시안의 성으로 가려고 해요. 고요한 겨울의 땅에서 평온한 휴식을 보낼 생각입니다.”
“…….”
황제는 눈을 깜빡이다가 하, 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좋겠구나. 그간 너희는 쉼 없이 달려왔으니.”
* * *
순식간에 북쪽으로 떠날 준비가 끝났다.
더 이상 아버지는 나를 막지 않았다. 단지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을 뿐.
“수도에는 언제 돌아올 생각이니?”
나는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뭐야?”
아버지가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럴 만도 했다.
딸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대답을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잠시 떠나는 여행길이 아니다. 나는 루시안과 북쪽 땅에 정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제 수도의 사람이 아니다.
먼 곳으로 떠나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평생 딸을 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왜 그런 얼굴을 해요. 내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가 북부로 오면 되잖아요.”
“가, 가도 되는 거냐?”
“그럼요. 성에 모앙셀 부인과 함께 묵을 방을 마련해 놓을게요.”
그 말에 크게 안도를 한 듯 아버지는 눈물을 폭포처럼 쏟으며 말했다.
“꼭 가마. 매달 갈 거야. 한번 가면 한 달씩 있을 거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니 벽난로가 있는 가장 따뜻한 방으로 주어야 한다. 거위털을 넣은 이불도. 양털을 넣어 누빈 잠옷도. 북쪽에서 유명한 훈제 요리도 준비해 줘야 해. 이왕이면 곰 요리가 좋겠구나. 그리고 또…….”
아버지의 옆에 있던 모앙셀 부인이 그만하라는 듯 입을 막았다. 아버지는 말을 하고 싶어 웁웁 소리를 내면서도 차마 그녀의 손을 밀치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버지의 곁에 그녀가 있어 다행이야.’
커다란 집에 아버지를 홀로 두고 갔다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아버지의 방을 나오니, 앤이 분주하게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 상자는 옷이 들어 있는 상자니 저쪽 수레에 넣어 주세요. 그 앞에 있는 작은 상자는 아가씨께서 타실 마차에 실어 주시고요. 여행길 내내 사용할 상자니까요.”
앤은 나를 따라오기로 했다.
북쪽 땅은 날씨도 추운 데다가, 열악한 산골이라 수도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 거라고 말했으나 앤은 한마디로 나를 설득했다.
[그럼 그만큼 급료를 올려 주시면 되죠. 성의 하녀들을 관리하는 하녀장으로 승진도 시켜 주시면 더 좋고요.]역시 앤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하녀였다.
짐이 다 꾸려질 무렵 쿤이 현관으로 내려왔다.
“진료는 잘 끝났어요?”
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약병을 내밀었다. 분홍색 물약이었다.
“받아. 새로 만든 카르디엔의 진정제야.”
“…….”
“카르디엔에게 줬더니 네게 주라고 하더라.”
“……고마워요.”
나는 쿤에게 인사하며 약병을 챙겼다.
“루시안의 눈에 바르는 약은요?”
쿤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안 줘. 필요도 없는 약을 굳이 줄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지가 마음만 먹으면 나을 텐데.”
쿤도 이제 루시안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나는 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기껏 훈훈하게 인사를 했건만 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는 정색하며 내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무섭게 왜 이래?”
하여간 이 인간. 분위기 잡치는 데 뭐 있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단순히 감사 인사를 하는 것뿐인데 뭐가 무서워요?”
“지금 수도에서 가장 무섭다고 소문난 사람에게 대뜸 감사 인사를 받았는데 무섭지, 안 무서워?”
“…….”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작위 수여식 이후, 루시안은 사람들에게 완전한 악마로 분류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람들은 나도 두려워했다.
쿤이 말했다.
“니가 악마를 조종하는 실세라느니. 사실은 힘을 숨긴 마녀라느니, 말이 많더라. 도대체 작위 수여식 날 무슨 말을 했기에 귀족들이 그렇게 소란을 떠는 거야?”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한 것뿐이에요.”
“속에 있는 말?”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거슬리는 놈들은 다 죽여 버릴 거야.”
“…….”
쿤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쿤은 너무 웃어 눈물이 어린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역시 넌 최고야.”
나는 그 말에 가볍게 응수했다.
“나도 알아요.”
쿤은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너희 진짜 잘 어울린다.”
나는 그 말에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쿤은 저택을 떠나기 전 내게 말했다.
“어제, 라라 공주가 광장에서 목이 잘려 죽었어.”
전쟁의 끝은 잔혹했다. 패배자에게는 특히.
수도에서는 연일 악시온 왕족과 귀족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라라 공주도 그 중 한명이었다.
비록 적이라지만, 젊고 아름다운 공주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기분을 씁쓸하게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잘됐네요. 남의 남자를 넘보는 년들은 다 조져야 돼.”
쿤은 결국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흡족한 대답이었다는 듯이.
드디어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루시안을 부축해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마차에 앉아 있는 루시안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눈이 붕대에 가려져 있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깨문 입술에서 그의 초조함이 엿보였다.
함께 북쪽으로 가게 되어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말이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두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며 말했다.
“걱정 마요, 루시안. 북쪽에 가더라도 내내 당신과 단둘만 있진 않을 테니까요.”
“…….”
“나는 평범하게 일상을 보낼 거예요. 기회를 봐서 북쪽에 새로운 숍도 오픈 할 거고, 친구도 사귈 거예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생기면 침 튀기며 치열하게 싸움도 할 거고요.”
당신이 늘 바랐던 것처럼.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은 루시안을 향해 말을 이었다.
“물론 그랬다가는 루시안이 나와 싸운 자들을 몽땅 죽여 버릴지도 모르죠. 당신은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용납하지 못할 테니까요.”
“……!”
루시안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신 입술을 좀 더 세게 깨물었다.
그런 그가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때요?”
“……네?”
“그게 당신의 사랑인걸.”
“…….”
나는 루시안의 두 손을 내 두 볼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약간 낮은 체온도, 손바닥에 배어 있는 굳은살도 딱 기분 좋았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더 이상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기뻤다.
이내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저 먼 북쪽으로.
흰 붕대 안에 숨겨진 그의 눈동자 색은 여전히 붉은색이고, 내 옆에 있는 가방 속에는 쿤에게 받은 분홍색 물약이 들어 있다.
여전히 그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럼에도 나는 두렵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그저 내 옆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얼마 후 우리는 새하얀 대지 위에 도착했다.
앞으로 우리가 수많은 추억을 쌓을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