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1
27. 에필로그
제국 북쪽에 있는 거대하고 고요한 겨울의 땅.
카르디엔.
카르디엔 공작이 다스리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카르디엔 공작이 조용한 휴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카르디엔 성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성에서 일할 일꾼들이 충원되고, 성문으로 많은 사람과 다양한 물품이 드나들었다.
카르디엔 공작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때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입고 있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새로 맞춘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루시안이 흑화했을 때 만들었던 드레스를 찾아 다시 꺼내 입은 것이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루시안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듯 말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 예뻐요.”
예상했던 답이었기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루시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너무 예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감히 당신을 눈에 담는 자가 있다면 두 눈을 뽑아 버릴지도 몰라요.”
“…….”
흉측한 말을 그렇게 예쁜 얼굴로 말하기 있기, 없기?
그렇다. 루시안은 이제 완전히 돌아왔다.
나를 독점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잔혹한 남자로.
붉은 눈동자가 회복되고, 약도 먹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슈슈슈슉.
내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준 앤과 루시안의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던 부관 폴이 재빨리 방을 나가는 소리였다.
다행히 루시안은 그들이 나가는 순간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위험할 뻔했어요.”
“그런 것 같네요.”
아마 앤과 폴이 조금이라도 늦게 방을 나섰다면 정말로 루시안의 손에 의해 맹인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잘 참았다는 뜻으로, 루시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죠?”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루시안은 합의를 보았다.
평소에는 약을 먹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먹기로.
쿤이 말하길, 그렇게 가끔 먹는 거라면 부작용 걱정은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분홍색 물약을 마시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나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 성에 도착했을 때는 나와 루시안, 앤 셋뿐이었다.
그러던 중,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한 명은 루시안의 부관 폴이었다.
[루시안 님. 군대를 사직하고 나왔습니다. 곁에서 모시게 해 주십시오!]그때 본 루시안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루시안은 정말, 정말 놀란 얼굴을 했다. 한참 후에야 루시안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폴은 크게 기뻐하며 루시안의 부하로 복직했다.
현재 폴의 직책은 카르디엔 공작저의 집사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쿤이었다.
폴의 방문과 달리 쿤의 방문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어 준 약값을 받으러 왔어.]의기양양한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도대체 약값이 얼마기에? 설마 이 성을 팔아도 모자란 거 아냐?
그러나 쿤이 밝힌 약값은 상상 이상이었다.
[루시안의 몸으로 실험을 하기로 했다고요?] [그래. 카르디엔만큼 의사가 실험하기 좋은 몸이 없으니까. 그게 약을 만들어 주는 조건이었어.]그 순간 나는 흑화했다.
비록 루시안처럼 벌레 죽이듯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순 없었지만, 분노 어린 눈빛과 기운만큼은 그에 뒤지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물건들을 다 던져 버린 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또 그따위 거래를 하기만 해 봐요. 그때는 두 사람 다 진짜 지옥을 맛보게 해 줄 테니까.]루시안과 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맞잡은 채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쿤은 반강제로 오랫동안 성에 머물렀다.
북쪽 땅은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다. 마을에서 똑똑한 이를 몇 명 뽑아 쿤에게 의학과 약초를 배우게 했다.
물론 쿤이 일방적으로 착취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쿤에게는 북쪽 땅을 자유롭게 탐방하고 채집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쿤은 나를 악독한 여자라고 욕하면서도, 새로운 약초를 발견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성의 군식구로 지내던 쿤은 어제 떠나 버렸다.
[남의 결혼식을 구경하며 박수 치는 취미는 없어.]참으로 그다운 이유였다.
나는 창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쿤은 카르디엔령을 떠났겠네요.”
“그렇겠죠.”
대답하는 루시안의 얼굴이 묘하게 기뻐 보였다.
“쿤이 가서 좋아요?”
“그럼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불쾌했는데요.”
루시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잠든 후에 몰래 쿤의 방에 찾아간 적도 있어요. 죽일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만두었답니다.”
당신이 슬퍼할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지금이라도 쿤이 떠나길 잘한 것 같아.’
그때 똑똑 하는 노크와 함께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황태자 전하 부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다.
“어서 방으로 안내해 줘.”
가장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었다.
이내 방으로 황태자 전하 부부가 들어왔다. 에스텔과 칼릭스였다.
두 사람의 품에는 각각 아기가 한 명씩 안겨 있었다.
반년 전, 에스텔이 낳은 쌍둥이였다.
두 사람은 내가 루시안과 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황태자와 평민 출신의 성녀라는 조합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신부의 봉긋한 배였다.
전례 없는 황태자비의 모습에 귀족들은 난리가 났지만 황태자의 한마디로 상황은 정리됐다.
[거슬리는 말로 그녀의 몸에 조금이라도 무리를 가게 하는 놈이 있다면 황손 시해 죄를 물어 엄벌로 다스리겠다.]그때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귀족들은 무서워서 에스텔의 앞에서는 딸꾹질도 못 했다고 한다.
어쨌건 지금 두 사람은 평민들에게도, 귀족들에게도 사랑받는 황태자 부부였다.
“니아 님, 결혼 축하해요.”
“결혼 축하, 아니. 이건 빨면 안 된다니까. 때찌. 축하한, 아니. 저것도 빨면 안 돼.”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아기에게 다가갔다.
오늘이 처음 아기들과 만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아기들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정말 예쁘다. 안녕, 루시. 안녕, 페시.”
내 인사에 아기들은 꺅꺅거리며 대답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지만 두 아이의 모습이 달랐다.
딸인 루시는 엄마를 꼭 닮은 금빛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아들인 페시는 아빠를 닮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엄청난 미남 미녀로 크겠지만.’
나는 키득거리며 아기의 작은 손가락을 만졌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손이었다.
“우와.”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다니. 아기는 대단해.
나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안도 한번 만져 봐요. 엄청 기분 좋아요.”
“아…….”
내 옆에서 어색한 얼굴로 서 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쉽게 아기를 만지지 못했다. 차마 제가 절대 만져서는 안 되는 보물인 것처럼.
주변을 서성거리는 그의 손가락을 아기가 홱 잡았다.
“앗.”
갑작스러운 기습에 루시안은 당황했다.
그러나 아기는 어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아기는 작은 손으로 루시안의 손가락 하나를 꽉 잡고는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새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루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헤실 웃었다. 커다란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이거 줄 거죠?’
눈을 크게 뜬 루시안은 이내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자연스럽게 나온 미소였다. 그래서 더 크리티컬이었다.
나에게도. 그리고 아기에게도.
“아우! 아우아오! 아아!”
아기는 갑자기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전투적으로 루시안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아기를 키워 본 적 없는 나도 알 것 같았다.
자기를 안으라는 것 같았다.
루시안이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는데, 칼릭스가 황급히 아기를 안고 저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칼릭스가 루시안을 향해 눈을 이글이글거리며 말했다.
“감히 내 딸을 유혹하다니 두려운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카르디엔 공작.”
……표정이나 말투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 저런 사람 아는데.’
루시안이 흑화해서 내게 집착할 때와 존똑이었다.
당장이라도 군대를 이끌고 카르디엔령에 쳐들어올 것 같은 흉악한 황태자의 기세를 꺾은 건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은 칼릭스를 타이르듯 말했다.
“칼릭스. 루시가 워낙 반짝이고 예쁜 걸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루시안에게 반응하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요.”
“하, 하지만……!”
“자꾸 그럼 루시가 싫어해요.”
“……!”
그 말에 칼릭스는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칼릭스는 품속에 안은 루시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정말이니, 루시? 아빠를 싫어할 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우아우아아.”
……못 본 사이에 더 바보가 됐구나, 칼릭스.
그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딸 바보.
나는 흐린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다가, 루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기를 보는 루시안의 얼굴이 묘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나의 기분도 복잡했다.
루시안과 나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아기를 가지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아니. 평생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폰이 루시안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자의 아기는 잉태하기 힘들어. 혹여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출산 시 어미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지.]실제로 루시안의 어머니가 죽었기에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기는 예쁘네.’
커다란 눈동자, 통통한 볼, 보드라운 살결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와 루시안을 바라보던 에스텔이 말했다.
“니아 님. 루시안. 원한다면 노력해 보면 어때요?”
“……네?”
에스텔이 따스하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문서를 찾아보았어요. 붉은 눈을 가진 이를 출산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요. 물론 많은 이들이 아기를 낳으며 사망했어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답니다. 드물지만 아기를 낳고도 건강한 사람이 있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정말이요?”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반 산모의 출산보다 사망률이 높은 건 사실이죠. 그래서 도대체 이유가 뭘까, 연구를 해 보았더니 이런 결론이 나왔어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자를 출생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가진 불안정한 환경이 문제라고요.”
에스텔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들은 정식으로 결혼하는 일이 드물었다.
악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들과 관계를 가진 여인들은 대부분 홀로 임신과 출산을 감당해야 했다.
아비 없는 아이를 임신하여 낳아야 한다는 사실은 여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것을 안 외부의 눈초리 또한 곱지 않았다.
그러니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아기를 낳아야만 했다.
그로 인해 출산 시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더더욱 그랬겠죠.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라 떳떳하게 남에게 보이지 못했을 테니까요. 출산 후 약해진 몸을 제대로 조리하지도 못했으니 사망률이 높아질 수밖에요.”
“…….”
“그러니까 제가 내린 결론은, 그리폰이란 자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더는 그 말에 휘둘리지 않아도 돼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와 루시안은 놀란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상기된 내 얼굴과 달리 루시안의 얼굴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바닥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싫어요.”
“…….”
“출산 시에 산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저는 니아가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아요.”
루시안의 얼굴은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내가 아기를 가지는 순간부터, 목숨의 위협을 당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는 너무 극단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에스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루시안에게 한 발짝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니아 님이 임신을 하게 되면 내가 그녀의 곁에 있어 줄게.”
“…….”
“아기를 낳는 순간까지, 계속. 그럼 좀 마음이 놓이겠니, 루시안?”
에스텔의 말은 단순히 함께 있어 준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 온전히 성녀의 힘을 써 주겠다는 말이다. 그녀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을 뒤로하고.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자 황태자비인 그녀가 말이다.
루시안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라는 얼굴이었다.
에스텔은 루시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고, 니아 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걸. 두 사람을 위해서는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 순간 내가 본 루시안의 표정이란.
난 알 것 같았다.
지하실에 갇혀 있던 루시안이, 처음 에스텔을 만났던 순간.
그는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런 얼굴.
루시안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에스텔 님.”
짧은 인사에 에스텔은 환하게 웃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는 듯이.
* * *
성문이 열리고 초대된 손님들이 모이면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성의 드넓은 정원이 테이블로 꽉 채워졌고 수많은 이들이 자리했다.
에스텔과 칼릭스. 아버지와 모앙셀 부인. 폴과 앤. 그리고 먼 길을 찾아와 준 나의 진사모(진한 화장을 사랑하는 모임) 친구들.
루시안과 나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제국의 귀족들이었다.
루시안은 1년간 북쪽 땅에서 조용히 은거했다. 그사이 루시안이 악마라며 경계하던 이들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루시안이 악마인 것을 부정하진 않았으나, 위험 인자라고 분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카르디엔 공작과 사교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들도 생겼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정중한 편지를 보낼 만큼.
놀랍게도 루시안은 그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 날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좋겠네요. 당신과 내가 진짜 부부가 되는 특별한 순간이니까.]앞일을 위해서도 괜찮은 결정이었다.
어쨌건 우리는 카르디엔 공작 부부니까. 우리에게 우호적인 이들과 최소한의 관계를 맺어 둘 필요가 있었다.
‘루시안과 단둘이 있는 것도 좋지만, 이런 날은 역시 사람들이 벅적거리는 게 좋네.’
하객석 한편에는 슬픈 얼굴로 훌쩍이는 귀족 여인들도 보였다.
루시안의 팬클럽이었다.
원래는 아는 사람만 알던 음지의 팬클럽이었다고 하는데(나도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눈으로 본 건 처음이다.) 루시안이 악마가 된 직후, 그들은 양지로 나왔다.
그들은 루시안이 악마라며 비난하는 귀족들을 향해 두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고 한다.
[그래서 뭐요! 카르디엔 님은 여전히 아름답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그 눈빛이 어찌나 흉흉하던지, 루시안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고.
“흑흑. 카르디엔 님이 정말로 가시다니.”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기사님으로 계실 줄 알았는데.”
울먹이는 여인들을 조용히 시킨 건 황태후였다.
“누가 감히 카르디엔 님의 결혼식에 초를 치느냐. 당장 그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그 요망한 눈구멍을 촛농으로 막아 버리겠다!”
팬클럽 회장님의 박력에 회원들은 순식간에 울음을 멈췄다.
‘황태후. 나이스!’
이래저래 나를 고생시킨 황태후에게 현재는 아무 유감이 없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루시안의 편이 되어 주고 있으니까.
팔짱을 낀 나와 루시안이 멈춰선 곳에는 황제가 서 있었다.
오늘의 주례사였다.
이날을 무척 고대했다는 황제는 아득할 만큼 긴 주례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꽃과 나무가 소생하는 봄날, 귀한 이들의 축복 속에 루시안 카르디엔과 페르니아 라일락의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신랑 루시안 카르디엔은 척박한 시골 땅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재능과 노력으로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어 고국의 명예를 드높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카르디엔 공작이라는 고귀한 자리에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요. 그리고 신부 페르니아 라일락은 라일락 후작가에서 태어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레이디로 자랐습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솔직하며…….”
본인 토크에는 적극적이나 남의 토크에는 한없이 약한 아버지는 고통 어린 얼굴로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주례가 끝난 것은, 칼릭스의 품에 안겨 있던 루시의 커다란 울음소리 덕분이었다.
“으아아앙!”
아기 천사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우렁찬 울음소리였다.
칼릭스가 어린 딸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바마마. 루시는 따분한 것에는 쥐약입니다.”
어떻게 내 딸을 이런 끔찍한 분위기 속에 있을 수 있게 하냐는, 힐난 어린 눈빛이었다.
“…….”
다행히도 황제는 딸 바보인 제 아들이 괘씸하다며 혼내는 대신, 빠르게 주례를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나와 루시안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 후에는 반지를 교환했다.
결혼 반지에는 각각 다른 보석을 달았다.
나의 반지에는 그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 루비가. 그의 반지에는 나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보랏빛 자수정이.
부케는 앤이 받았다.
부케는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에스텔은 이미 결혼을 했고, 내게 남은 친구는 그녀뿐이었다.
“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가씨.”
앤은 부케를 들고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사실 그녀는 부케를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카르디엔 성의 하녀장으로 일하는 데 집중하느라 한동안 연애도, 결혼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앤. 저쪽에 있는 남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걸.’
앤과는 달리 폴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앤에게 청혼할 기세였다.
마지막으로 식을 장식한 것은 아버지였다.
결혼식 내내 울 듯 말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아버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흑. 고작 용돈을 이것밖에 안 주냐고 입이 대빨은 나왔던 내 딸이 이렇게 공작 부인이 되다니. 너무 좋아! 이제 하고 싶은 사치는 다 하고 살겠구나.”
……이봐요, 아버지.
다른 아빠들이랑 우는 포인트가 좀 다른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아버지의 반응에 기가 찼다.
그러나 딸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는 루시안을 꼭 껴안았다.
“고맙네, 사위.”
그러니까, 내 폭탄을 받아 줘서 고맙다는 그런 말투, 뭐냐고요.
아버지는 눈물을 훔치며 루시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무표정했던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라일락 가문의 인장이 그려져 있는 상자에 든 것은 와일드 트리였다.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키우는 와일드 트리 중에 고르고 고른 아이들이란다. 뿌리 한 쪽을 먹으면 연약한 여인도 힘이 불끈 생겨 나무 물통을 옮기고, 뿌리 두 쪽을 먹으면 맹인도 눈을 떠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맞추고, 뿌리 세 쪽을 먹으면 70살 먹은 부부도 늦둥이를 낳는…….”
주절주절 와일드 트리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전에 없던 자부심이 엿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최근 아버지는 제국 최고의 와일드 트리 재배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알고 보니 아버지는 와일드 트리 재배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00년에 한 번 나올 인재라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손만 닿으면 시름시름했던 와일드 트리도 금세 불끈불끈하게 생기를 되찾는다나 뭐라나.
아버지가 재배한 와일드 트리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덕분에 라일락 가문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딸은 메이크업 숍을 운영하고, 아빠는 약초 재배사라. 명색이 후작 가문인데 이래도 괜찮은 거야?’
적어도 아버지의 피앙세인 모앙셀 부인은 매우 괜찮아 보였다.
1년 새 부쩍 살이 오른 모습으로, 온몸에 보석을 치장하고 웃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역시 돈 많은 남자 친구가 최고지, 암.’
그사이 루시안은 아버지가 준 와일드 트리를 제 품으로 쏙 챙겼다.
두 볼 위로 홍조가 살짝 오른 것이 아버지의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다. 악마로 소문난 카르디엔 공작의 결혼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행복한 풍경이었다.
그러던 중 루시안이 내게 속삭였다.
“니아. 나, 이 이상은 무리예요.”
“……!”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을 깨문 루시안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마치 속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나왔다.
나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진 곳에 가서야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약으로 겨우 진정시켰던 감정이 폭발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오늘 하루 종일, 그는 너무 많은 자극을 견뎌야 했다.
나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터였다.
루시안이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니아. 아무래도 약을 더 먹는 게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어차피 식도 끝났는걸요. 손님들끼리 즐기다 가면 돼요. 혹시 우리가 안 보이거든 손님들에게 잘 말해 달라고 앤에게 부탁해 두었어요.”
“…….”
나는 루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에게 순종적인 동물처럼, 루시안은 허리를 숙여 내게 안겨 왔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편하게 있어요. 나를 독점하고 싶은 루시안으로.”
그 순간, 마치 단단히 묶여 있던 목줄이 풀린 것처럼 루시안은 내게 달려들었다.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델 것처럼 뜨거운 혀였다.
이내 그의 혀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말캉한 혀는 부드러우면서도 집요했다.
입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심장의 고동 소리도 거세졌다.
입술을 맞댄 채 루시안이 말했다.
“니아.”
그가 내 허리를 거세게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해요.”
“내 곁에만 있어 주세요.”
“나만, 나만 바라봐 주세요, 제발.”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당신의 곁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
오늘 막 결혼한 새신랑이 말하기에는 너무 섬뜩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두 눈을 휘었다.
그의 말이, 어떤 말보다 달콤한 사랑 고백임을 알기에.
“얼마든지요.”
나는 어떤 사랑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나는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니까.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랍니다
fin
외전 1 악마 공작님과 약혼녀
제국의 북부.
그곳은 거대했지만 척박했다.
1년의 반 이상이 추운 겨울이었고, 높은 산맥이 즐비하여 다른 지역으로 오고 가기도 쉽지 않았다.
산맥 너머로는 사나운 야만족과 괴수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제국의 어떤 귀족도 그곳을 통치하기를 원치 않았다.
통치자의 부재였다.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으니 주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고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은 일상이었고, 매일 지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날이 좀 풀리는가 싶으면 야만족과 괴수들이 침입하곤 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극한 생존이었다.
그러던 중 황제에게 정식으로 북부 전역을 위임받은 통치자가 나타났다.
제국 최고의 기사로 불리는 카디엔 경, 아니 카르디엔 공작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카르디엔 공작이 악마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카르디엔 공작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악마의 힘으로 악시온 왕국을 혼자 멸망시켰다면서요?”
“악시온 왕과 공주를 산 채로 잡아먹었대요.”
“무서워라.”
카르디엔 공작이 이곳에 오자마자, 북부에 사는 이들을 잡아먹어 버릴 거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러나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던 소문과 달리, 카르디엔 공작은 조용했다. 그는 작은 성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겁먹은 토끼처럼 움츠렸던 주민들은 의아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왜 저렇게 얌전히 있는 거죠?”
“그러게 말이에요. 벌써 3개월째잖아요.”
그때 한 남자가 나서서 말했다.
“수도를 왔다 갔다 하는 상인에게 들은 말인데, 카르디엔 공작님은 약혼녀에게 미쳐 있다는군요. 일분일초도 그분을 놓아주기 싫어서 성에 처박혀 있는 거라고요.”
“세상에.”
끔찍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입을 막았다.
“젊은 아가씨가 안쓰러워 어떡해요.”
“그러게 말이에요. 악마 공작님에게 붙잡혀 얼마나 무서울까.”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안타깝다 해도, 악마 공작을 향해 쳐들어갈 만한 용기는 누구도 없었다.
“……어쨌건 다행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녀에게 미쳐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
주민들은 죄책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쨌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북부의 주민들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 * *
“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한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짧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흰 사슴 마을의 어린 목수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달려온 사람은 그녀의 소꿉친구인 토미였다.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토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핀은 열심히 휘두르던 망치를 내려놓고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가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너, 카르디엔 성으로 간다는 게 정말이야?”
토미의 말에 핀은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서둘러 왔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구나.’
핀의 얼굴에서 답을 들은 토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미쳤어? 왜 제 발로 악마의 입으로 들어가!”
악마.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지배자인 카르디엔 공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부임 후 1년이나 보이지 않았던 카르디엔 공작은 최근 성문을 열고 공고를 걸었다.
공고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다가오는 봄에 치를 공작의 결혼식 준비를 도울 일꾼들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악마 공작님이 결혼식이라니.”
사람들은 기함을 했다.
더 충격인 건 구인 조건이었다.
“하루 일당을 20골드나 준다고?”
“푹신한 침대에 식사도 하루 세끼를 다 준대.”
가난한 북부의 주민들에게는 놀랄 만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장 짐을 싸 들고 달려가고 싶을 만큼.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런 것에 현혹되면 안 돼. 그 ‘악마’ 공작님이라고. 꿀 향기에 취한 벌처럼 갔다가는 끔찍한 꼴을 당할걸.”
“일꾼을 구한다는 건 허울뿐인 거짓이고, 실은 잡아먹을 제물을 구하는 것일지도.”
“성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누구도 그곳에 나선다며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 촌장이 나섰다.
촌장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리석은 놈들! 공작님의 이름으로 공고를 붙였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촌장은 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감히 공작의 말을 무시하냐며 이런 작은 마을 따윈 쑥대밭을 만들어 놓을 거다.”
“……!”
촌장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지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제 한 몸 희생하자는 결연한 마음 때문이었고, 누군가는 강제로 떠밀려서였다.
그러나 핀이 일꾼으로 지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핀은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하게 말했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면 총보수로 500골드를 받을 수 있대. 그 돈을 받아 수도로 떠날 거야.”
핀의 말에 토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이유로 지원을 했냐는 얼굴이었다.
토미의 생각을 읽은 핀이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토미. 이곳에 있으면 평생 제대로 된 목수로 인정받을 수 없을걸. 수도에 갈 만한 돈도 마련할 수 없고.”
핀은 평생 목공 일을 했던 할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웠다. 우람한 남자들 같은 힘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섬세한 손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하건대, 핀은 마을의 목공 중에서 손꼽힐 만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핀에게는 제대로 된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는 애초에 제대로 된 일거리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핀에게 들어온 일감은 기껏해야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고쳐 주거나, 노인의 지팡이를 만들어 주는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런 핀에게 성에서 내려온 공고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돈을 벌어 수도에 가면 분명 수많은 일감이 있을 것이다. 목수로서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소꿉친구인 토미도 핀이 얼마나 간절하게 이런 기회를 바랐는지 알았다.
하지만 토미는 핀의 계획에 속 편하게 호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해. 성에 갔다가 악마 공작님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핀도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잔인무도한 악마 공작.
그러나 핀은 그 소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정말 소문처럼 흉악한 악마라면 저렇게 제대로 된 공고를 올릴 리가 없잖아.’
당장 사람을 보내라고 마을 사람들을 협박하는 게 더 악마답다.
핀은 그것에 희망을 걸었다.
‘악마 공작님은 의외로 평범한 분일지 몰라. ……아니면 망한 거고.’
모 아니면 도.
핀에게는 목숨을 건 도박인 셈이었다.
며칠 후, 지원한 일꾼들이 공작 성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공작 부부의 결혼식을 돕는다는 화려한 타이틀과 달리 분위기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흡사 악마에게 끌려가는 제물들 같았다.
“여보. 무사히 다녀와야 해요.”
“으앙. 가지 마요, 아빠.”
“나도 같이 가야 하는데 혼자 보내 미안하네.”
훌쩍이는 이들 속에 토미도 있었다.
토미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핀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렸을 때랑 똑같아.’
토미는 울보였다.
그런데 그 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묵직한 공구 상자를 어깨에 멘 핀이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 토미. 호주머니에 돈을 가득 채워서 돌아올 테니까. 돌아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핫케이크를 만들어 줘.”
토미는 글썽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핀이 좋아하는 산딸기도, 건포도도, 듬뿍 올려서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꼭 건강하게 돌아와야 해.”
핀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람들을 태운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르디엔 성을 향해서였다.
* * *
일꾼들은 새하얀 설원 위에 있는 카르디엔 성에 도착했다. 한적한 곳에 서 있는 성은 어딘가 으스스했다. 일꾼들은 불안한 얼굴로 속삭였다.
“공작이 사는 성이라고 하기에는 심하게 조용하잖아.”
“그러게 말이야. 불길하네.”
끼이익.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뚜벅뚜벅. 안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일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근육으로 뒤덮인 팔이 팽팽해졌다. 그들은 어깨에 멘 가방에 손을 넣어 가장 위협적인 연장을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록 악마의 앞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카르디엔 성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카르디엔 성의 집사 폴입니다.”
“안녕하세요, 하녀장 앤입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나타난 이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상냥하고 정중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 눈을 끔뻑이는 일꾼들을 향해 폴이 말했다.
“바삐 오느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을 테니 일단 주방으로 가시죠.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
예상치 못한 환대에 일꾼들의 눈이 커졌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대한 테이블에는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하녀장 앤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 주실 분들이니 열심히 준비해 보았답니다.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말처럼 식탁 위에 놓인 음식에서 정성이 듬뿍 느껴졌다.
감자가 푸짐하게 들어간 따뜻한 스튜, 두툼한 산양 고기, 말랑말랑해 보이는 빵까지. 솔직히 말해 집에서 먹던 밥보다 훨씬 맛있어 보였다.
일꾼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남자가 홀린 듯한 얼굴로 식탁에 손을 뻗자, 옆에 있던 이가 막았다.
“그, 그만둬! 이런 음식 따위에 현혹될 셈이야?”
“하, 하지만 너무 맛있어 보이는걸.”
“다 속임수야. 분명 독이 들어 있을걸. 아니면 강력한 마취제가 들어 있거나.”
“……!”
“우리가 쓰러지면 저 성격 좋아 보이는 척하는 여자가 우리를 요리하고 말 거라고! 제가 모시는 악마 공작을 위해서 말이야.”
끔찍한 이야기에 일꾼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뜻밖의 환대에 현혹당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악마의 성이다.
언제 목숨을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의도가 수상한 음식을 먹을 순 없었다.
그때였다.
찹찹.
무언가를 입에 넣은 듯한 찹찹거리는 소리에 일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테이블의 가장 끝 쪽에 앉아 있던 어린 목수, 핀이었다.
핀은 빵을 우물거리며 눈을 빛냈다.
“우와. 진짜 맛있어.”
그러더니 핀은 제 앞에 놓인 스튜까지 한 스푼 가득 입에 넣었다.
“스튜도 엄청 부드럽네. 으으. 혀가 녹는 것 같아.”
핀은 손을 뻗어 커다란 접시에 놓인 고기 한 덩이를 포크로 찍었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려 욱여넣었다.
입에 고기를 가득 채운 핀은 행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아. 역시 고기님이 최고야!”
“…….”
일꾼들은 경악한 얼굴로 핀을 바라보았다.
마치 미친놈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핀은 빵빵해진 볼로 해죽 웃었다.
“다들 안 먹는 거예요? 그럼 내가 다 먹어도 되죠?”
두 번째 고기 한 조각을 손에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일꾼들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멈춰!”
“괘씸한 녀석! 고기는 n분의 1이다!”
독이 발라져 있다고 해도, 마취제가 들어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먹고 죽지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이 순간만큼은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굶주린 인간의 본능이었다.
일꾼들이 본격적으로 테이블로 달려들어 먹기 시작하자, 엄청난 속도로 음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앤은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음식을 채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접시 위에는 커다란 뼛조각만 남았다. 스튜 국물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앤은 기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공작 성의 요리가 입맛에 맞는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정말 잘 먹었…….”
인사를 하려는 남자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쿡 찔렀다. 그제야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껏 배를 채우자 돌아온 현실 감각 때문이었다.
이곳은 카르디엔 성이다.
미친 악마 공작이 사는 성!
다행히 아직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자는 없지만,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된 일꾼을 향해 집사 폴이 나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숙소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푹 쉬시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폴을 따라가며 일꾼들은 아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수군거렸다.
“방으로 가는 척하다가 감옥에 가둬 버리는 것 아냐?”
“가능성이 있는 말이야. 그 후에 살이 가장 통통하게 오른 놈부터 잡아먹겠지.”
그 말에 일행 중 가장 푸근한 몸집을 가진 남자가 히익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가장 먼저 먹힐 거야, 라는 절망 어린 얼굴이었다.
훌쩍이는 남자를 옆에 있던 이가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폴이 안내한 곳은 멀쩡한 방이었다. 그것도 침구가 깔끔하게 정리된.
일꾼들은 푸짐하게 차려져 있던 음식을 마주쳤을 때처럼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가 우리가 쓸 방이라고?”
그들에게 일터에서 제공하는 숙소란 제대로 된 집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눈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지붕 하나가 달랑 달린 창고가 대부분이었다.
험한 일을 하는 일꾼에게 이런 좋은 방을 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폴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꾼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침대만 노려보고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몸은 녹초가 된 상태였다.
배도 가득 찼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편히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저 침대에 눕는 순간, 마법이 발동돼서 몸이 굳어 버릴걸.”
“그 후에는 저 침대째로 공작의 앞으로 가져가겠지.”
“그리고 꿀꺽이라는 건가.”
끔찍한 말에 일꾼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순간이었다.
풀썩.
듣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소리의 주인은 이번에도 핀이었다. 핀은 두 팔과 다리를 벌린 채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포즈였다.
“와, 폭신폭신해. 집에 있는 침대랑은 비교도 안 되네.”
그러고는 베개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뒹굴더니 하품을 했다.
“하아암.”
그 순간, 또다시 일꾼들의 이성이 끊겼다.
‘잡아먹으려거든 그렇게 하라고 해!’
뭐든 상관없었다.
당장 저 푹신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들어 버릴 테다!
핀의 말대로였다.
침대에 등을 대자마자 온몸이 녹을 것처럼 나른해졌다. 꼭 구름 위에 올라간 것 같았다.
게다가 베개는 어찌나 폭신한지.
이불에서는 향긋한 향기까지 났다.
“젠장. 너무 좋아.”
그것이 일꾼들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이내 방 안에는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의 코 고는 소리는 전쟁이 난 것처럼 엄청났다.
하지만 누구 한 명 깨는 사람이 없었다.
핀도 마찬가지였다.
“우냠냠.”
핀은 침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핀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가 외쳤다.
‘토미. 함께 수도로 가자! 호강시켜 줄게.’
토미는 글썽이는 얼굴로 자신을 꼭 껴안았다.
‘좋아!’
핀은 베개를 꼭 껴안으며 히죽 웃었다.
* * *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다음 날 일어난 일꾼들은 모두 멀쩡했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통이 날아가거나, 귀 한쪽이 없어진 자도 없었다.
일꾼들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잡아먹히지 않은 거야?”
“그러게.”
잠시 후 하녀장인 앤이 나타났다.
앤은 어제처럼 상냥한 얼굴로 산더미처럼 쌓인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가 끝나자, 집사 폴이 일꾼들에게 일을 지시했다.
그가 지시한 일은 당장 몸을 깨끗하게 씻고 공작님께 가서 오늘의 식사가 되라는 내용 따위가 아니었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결혼식장 내부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조와 결혼식에서 필요한 소품을 제작하는 조로요.”
일꾼들은 이게 뭐지 싶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들은 폴의 시선을 피해 수군거렸다.
“평범한 일이잖아?”
“그, 그러게.”
“어떻게 된 거지?”
서어어얼마 카르디엔 공작이 일꾼들을 부른 이유가 정말 순수하게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였단 말인가!
일꾼들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찼다.
며칠이 지났다.
조용했던 성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뚝딱, 뚝딱. 망치질 소리.
쓱싹대는 톱질 소리.
이곳저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까지.
일꾼들의 얼굴에는 이제 예전 같은 경계심이나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피부에는 광택이 흐르고 보기 좋게 살까지 올랐다.
하녀장 앤이 삼시 세끼 푸짐하게 해 먹인 덕분이었다.
그들은 이제 이곳이 최고의 일자리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성에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말이야.”
“큭큭큭. 잭 놈. 절대 이런 끔찍한 곳에는 갈 수 없다고 도망갔는데 꼴 좋다.”
하지만 공작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카르디엔 공작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와 결혼을 하는 약혼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하늘 높은 공작이 굳이 일꾼들의 얼굴을 봐야 할 이유가 없긴 하지만, 이렇게 작은 성에서 스쳐 지나간 적도 없다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집사 폴은 눈썹을 내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사람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꾼들은 순수하게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맨 위층에 있는 약혼녀님의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거 맞지?”
“맞아. 약혼녀에게 미쳐 제정신이 아니라잖아.”
“쯧쯧.”
약혼녀가 안됐다며 혀를 차는 이까지 있었다.
이제 그들은 공작이 악마라는 소문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적어도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하게 자신들을 살려 둘 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곱게 미치신 것 같아 다행이야.”
“이 정도로 대접해 준다면 여기에서 계속 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며칠 전 집사 폴은 일꾼들을 향해 말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계속 성에 남아 일할 일꾼을 구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분이 계신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평범한 공작 성이었다면 ‘저요!’라며 달려들었을 테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일꾼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잠깐 잘해 준다고 사자 입 속에 내내 머물렀다간 무슨 꼴을 볼 줄 알고. 정해진 일만 끝나면 돈만 챙겨 잽싸게 돌아갈 거야.”
“그렇긴 해.”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핀은 목공장 한편에서 조각칼로 나무 공예품을 다듬으며 생각했다.
‘성의 목수라.’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며칠간 이곳에서 지내며 성을 둘러본 핀은 느낀 게 있다.
‘공작님이 황제 폐하께 성을 받았을 때는 공작이 아니라 일개 기사였을 때라고 했지.’
그래서 그런가 성은 작고 소박했다.
평범한 귀족의 성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북부 전역을 지배하는 공작의 성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앞으로 성을 증축시킬 계획이라면 목수가 할 일이 어마어마할 거야.’
드높은 성벽, 튼튼한 건물, 고급스러운 가구, 화려한 장식품.
핀은 모두 제대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핀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수도로 가서 목수로 대성하는 것이었다.
북부에 있으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밖에는 되지 못한다. 카르디엔 성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무엇보다 귀족의 아래에서 쭉 일할 생각을 하자 상상만으로 숨이 턱 막혔다.
‘딴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결혼식까지 제대로 일을 끝내자. 그래야 약속한 보수를 받고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핀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손에 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핀이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신랑 신부의 얼굴이 새겨진 조각상이었다. 당연히 실제로 두 사람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러나 폴은 카르디엔 공작과 약혼녀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 두 장을 핀에게 주었을 뿐이다.
[초상화를 참고하여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초상화보다는 한 번이라도 직접 대면하는 편이 좋아요.]그러나 폴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왜요? 공작님이 사람을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셔서요? 그런 거라면 정말 조심할게요.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기만 할게요.] [그래서 안 된다는 겁니다.] [네?] [공작님은 바라보는 것조차 참지 못하시거든요.]폴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핀은 더 이상 요구할 수 없었다.
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약혼녀는 미녀다.
그러나 그녀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카르디엔 공작은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붉은 눈동자.
악마가 되기 전, 아름다운 기사로 이름 높던 카르디엔답달까.
하지만 핀은 감탄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귀족의 초상화는 미화가 엄청나게 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색인 이들조차 초상화에서는 절세 미남 미녀라고.
그러니 진짜 미남이야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미남으로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초상화 속 카르디엔 공작은 너무 아름다워서,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신이나 천사를 종이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여기 있지.”
남자의 목소리에 핀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핀과 함께 온 마을 목수 중 한 명이었다. 남자의 손에는 익숙한 망치가 들려 있었다.
핀의 망치였다.
“왁, 거기 있었구나.”
핀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빼앗으며 소리쳤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 쓰지 말라고 했죠!”
“허락받았어!”
“언제!”
“일주일 전에!”
핀은 남자의 머리통을 망치로 휘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왜냐면 오늘은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던 카르디엔 공작님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니까.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흉악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하여간 다음에도 이래 봐요. 진짜 혼쭐을 내줄 테니까.”
눈을 흘기며 핀은 망치를 챙겨 허리춤에 매단 연장 통에 넣었다.
그런 핀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어디 가게? 설마 일하려고?”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살펴보고 오려고요.”
그 말에 일꾼들은 질린 얼굴을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 분주하게 일한 일꾼들은 오늘 하루 휴가를 받았다.
일꾼들은 오늘 숙소에서 신나게 뒹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핀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일꾼들은 혀를 쯧쯧 찼다.
“하여간 유별난 놈이야.”
“유별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왜 저렇게 힘들게 사나 몰라.”
수군거리는 말을 무시하며 핀은 숙소를 나섰다.
물론 핀도 오늘만큼은 실컷 먹고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음 편히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작업물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핀이 향한 곳은 성의 정원에 만들어진 결혼식장이었다.
아직 손님이 오지 않아 고요한 결혼식장은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버진 로드, 양옆에 놓인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 주례를 보는 단상, 주위를 꾸며 놓은 다양한 장식품들.
잠시 후 핀의 눈이 빛났다.
“이상 있는 녀석, 발견!”
핀이 발견한 것은 결혼식장 입구에 놓인 장식품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식품이었는데, 움직이는 게 영 이상했다.
빙글빙글 도는 게 아니라 비잉글비잉글 도는 느낌?
핀은 몸을 웅크려 장식품을 살펴보았다.
튼튼히 만든다고 못을 여러 개 박은 탓에 이음매가 뻑뻑해진 모양이다.
“못 하나만 빼면 되겠네.”
핀은 허리춤에 묶어 둔 주머니에서 공구를 꺼냈다. 못에 장도리를 가져다 댄 핀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기 시작했다.
“끄응.”
못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흣차!”
핀은 아침에 먹었던 고기를 떠올리며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뽕.
그 순간 단단히 박혀 있던 못이 빠졌다. 거기까진 좋았다.
좋았는데…….
“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핀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렸다.
비명의 주인을 확인한 핀은 히익, 하고 입을 막았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아도 귀족인 것이 분명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빨갛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날아간 못이 스쳐 지나간 자리였다.
“괘, 괜찮으세요?”
핀은 놀란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손으로 얼굴을 매만진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피가 나잖아!”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젠장!”
남자는 분노한 얼굴로 콧김을 뿜고 씩씩거렸다. 핀은 남자의 앞에 바짝 몸을 웅크렸다.
속으로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 손님은 왜 하필이면 이 순간 이곳을 지나갔던 것일까. 아직 하객들이 입장할 시간도 아닌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예기치 않게 벌어진 일이야.
그럼에도 핀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바들거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귀족이었기에.
핀은 일개 시골 출신 목수였다. 감히 귀족을 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귀족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카르디엔 공작을 악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찍소리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귀족은 오만하며 잔인하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저 같은 평민은 벌레보다 쉽게 눌러 죽이는 존재다.
핀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더 소리쳤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나으리.”
어떻게든 남자의 기분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어진 남자의 목소리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느냐. 하층민 주제에.”
그러더니 남자의 발이 핀의 어깨로 날아왔다.
“아악!”
핀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핀을 바라보며 콧김을 뿜었다.
“북부의 놈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야만족과 다름없다더니 정말이군. 감히 귀족에게 이런 짓을 하고 말뿐인 사과로 넘어가려 하다니.”
남자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역시 이런 곳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천박한 북쪽 땅이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아버지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악마 놈의 결혼식 따위 오지 않았을 텐데.”
그러더니 남자의 스산한 눈빛이 핀에게 닿았다. 핀은 아픈 티도 내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일하는 일꾼이면 카르디엔 공작을 잘 알겠구나. 어때, 놈은 정말 악마냐?”
“네?”
핀은 예상 못 했던 질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마주친 귀족의 눈동자는 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핀은 이 순간 귀족이 제게 기대하는 답을 알아챘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제 불쾌한 기분이 사라질 만큼 자극적인 말을.
그렇다면 마을에 퍼져 있는 소문을 다 떠벌리면 그만이다.
공작님은 무서운 악마랍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아 마을 사람들이 겁에 질릴 정도지요.
약혼녀에게 미쳐 있다는 말은 사실이더군요. 한 번도 그녀의 방에서 나온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핀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싫어.’
얼굴도 보지 못한 공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일꾼들에게 엄청난 호의를 보여 주었다.
자신 같은 일꾼들에게 따뜻한 방과 푸짐한 식사를 주는 건 아무나 보여 주는 호의가 아니었다.
그런 공작에게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만, 가난한 목수에게도 의리가 있다.
입을 다문 핀을 바라보는 귀족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하, 이거 보게. 악마 놈도 주인이랍시고 감싸는 거야?”
“…….”
“정말 웃기네. 덕분에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어.”
그리고는 귀족이 한쪽 발을 들었다. 그 순간 핀은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귀족의 발길질은 날아오지 않았다. 또렷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맑은 목소리에 핀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핀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오늘의 신랑이 분명했다.
악마라고 불리는 카르디엔 공작.
그러나 핀이 놀란 건 악명을 떨치던 공작을 마주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초상화보다 아름답잖아!’
화가가 양심을 버리고 한껏 미화한 것이 분명하다고, 실물은 분명 이것보다 평범(?)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카르디엔 공작은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이 세상 어떤 보석보다 빛나는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거기에 몸에 딱 들어맞는 검은색 정장이라니.
핀은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쓰러질 뻔했다. 그만큼 강렬한 미모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앞에서 포악질을 떨었던 귀족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카르디엔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카르디엔 공작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카르디엔 공작은 노래하듯 유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썩 유쾌한 일을 벌이고 있던 건 아닌 것 같군요. 그건 곤란해요. 그녀는 이날을 많이 기대하고 있거든요. 괜한 잡음을 내어 그녀를 속상하게 만든다면 둘 다…….”
카르디엔 공작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일 거예요.”
세상 어느 것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로, 저런 섬뜩한 말을 하다니.
‘무, 무서워.’
털썩.
귀족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극한으로 겁먹은 건 핀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핀은 애초에 쓰러져 있었기에 더 자세를 낮출 수 없었다.
귀족 남자와 핀은 바들바들 떨며 카르디엔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심하게 위압적이었다.
핀은 차마 눈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울먹였다.
‘조금만 더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겠어.’
그때 핀의 앞으로 새하얀 면사포가 휘날렸다. 핀은 눈을 크게 떴다.
핀의 앞에 선 것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구불거리는 청보라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핀은 이분 또한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공작님의 약혼녀!’
카르디엔 공작의 약혼녀, 페르니아 라일락이었다.
그녀는 공작만큼 많은 소문에 휩싸인 인물이었다.
공작에게 영혼이 잡아먹혀 육체만 남은 가련한 아가씨. 공작의 비정상적인 집착에 매일 눈물을 흘리는 비참한 귀족 영애.
그러나…….
“루시안. 그렇게 두 사람을 뭉뚱그려서 화내면 어떡해요. 아무리 봐도 저~쪽이 나쁜 놈이고 이~쪽이 우리 편인데.”
카르디엔 공작을 향해 새초롬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는 무성한 소문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더 놀라운 건 카르디엔 공작의 반응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위압감을 풍기던 남자는 순식간에 온순한 개처럼 변했다.
카르디엔 공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런 건가요?”
“그래요. 그러니까 저쪽 사람에게만 화내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카르디엔 공작은 땅에 엉덩이를 붙인 귀족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한 명에게 집중된 눈빛은 아까보다 엄청났다.
귀족 남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었다.
그에게는 이제 귀족의 체면 같은 건 상관없어 보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금방이라도 제 목을 뜯어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맹수 앞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본능적으로 제 목숨줄을 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남자가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정답이었다.
페르니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핀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핀을 일으켜 세운 페르니아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잘못한 거 알았으면 당장 이 아이에게 사과하세요.”
방금 전까지 제가 발로 찬 하층민에게 사과를? 게다가 잘못은 저쪽이 먼저 했는데?
라는 말 따위를 할 여유는 귀족 남자에게 없었다.
아직도 저를 향하고 있는 카르디엔 공작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당장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산 채로 심장을 꺼내 갈기갈기 찢어 주마.’
귀족 남자는 핀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짓을 왜 해. 애초에 사고였잖아.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러면 안 되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핀도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괜한 말을 해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있는 것도 핀에게는 너무 벅찼다.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페르니아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여기까지 하죠. 여러 가지로 바쁜 날이니까.”
페르니아가 남자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이만 가 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귀족 남자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만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사라졌다.
페르니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에 온 손님인데 너무했나?”
페르니아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겁도 없이 우리를 건드는 놈들은 다 조져 버려야 해. 그래야 앞으로 우리 애들을 안 건들지.”
핀은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 애들이라니.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믿기지 않지만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은 친부모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쁘기는커녕…….
“괜찮니? 조금 더 혼내 줄 걸 그랬나?”
상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페르니아를 보며 핀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페르니아는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치켜 올라간 눈매와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은 도도하고 새침해 보였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페르니아가 말했다.
“어서 숙소로 돌아가렴. 곧 하객들이 몰려와 혼잡해질 테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핀은 저쪽에서 오고 있는 하객들을 보았다.
초대된 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가문의 귀족과 왕족이라고 들었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네. 그,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핀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꾸벅 인사를 하고 가려는 찰나, 페르니아가 말했다.
“참,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했네. 결혼식장을 멋지게 준비해 줘서 고마워.”
“…….”
예상치 못한 인사에 핀은 멍하니 페르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카르디엔 공작의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 눈빛에 어린 감정은 엄청난 질투와 집착이었다.
핀은 잽싸게 몸을 돌려 숙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마주친 카르디엔 공작과 약혼녀. 그들과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핀은 많은 것을 알았다.
카르디엔 공작은 소문보다 약혼녀에게 더 미쳐 있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누구라도 죽여 버릴 만큼.
그럼에도 소문과는 달랐다.
‘공작님은 약혼녀님에게 꼼짝을 못 하잖아!’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공작님이 아니라 그의 약혼녀였다.
그녀의 손짓 하나에 공작은 움직였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개처럼.
엄마의 말을 따르는 아이처럼.
정말 다행인 것은, 페르니아가 이 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날 보고 우리라고 했어.’
오랜 시간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었던 북부의 주민 핀에게 그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걸 좋아하게 되는 법이야.’
그러니 페르니아가 이 땅을 사랑하는 한, 카르디엔 공작도 분명 이 땅을 아낄 것이 분명하다.
척박한 대지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그리고 그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황량하고 척박했던 북부는 점차 풍요롭게 변하겠지. 늘 핀이 꿈꿔 왔던 수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벌컥. 핀은 일꾼들이 묵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
숙소에선 어느새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일꾼이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뜯으며 말했다.
“하녀장님이 음식을 잔뜩 보내 줬어. 결혼식 음식이래.”
옆에 있는 일꾼이 치즈 덩어리를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젠장. 타이밍 좋게도 왔네. 네 몫까지 다 먹어 버리려고 했는데.”
얄미운 말을 하는 동료들을 향해 세 번째 손가락을 날리는 대신 핀은 외쳤다.
“나, 정식으로 성의 목수가 될 거예요!”
적막했던 카르디엔 성에 충실한 일꾼이 한 명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악마 공작님과 약혼녀,
fin.
외전 2 공작 부부의 첫날밤
페르니아와 루시안의 결혼식 다음 날.
성의 하녀장인 앤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신혼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앤입니다. 기상하셨는지요.”
‘아직. 어젯밤 너무 무리를 시켰는지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는군.’
라는 루시안의 말을 기대하며 입꼬리를 올렸건만 들려온 목소리는 페르니아의 것이었다.
“응. 일어났어.”
“……!”
여기서 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불꽃 같은 첫날밤을 보낸 새 신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목소리가 멀쩡하신데?’
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 준비할까요?”
‘아니. 그럴 여유가 없군. 아직 그녀를 더 사랑해 줘야 하거든.’
이라는 루시안의 말을 기대했건만 이번에도 담담한 페르니아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래.”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앤은 하얀 앞치마를 꽉 쥐었다.
‘평소랑 똑같잖아?’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결혼 전, 페르니아와 루시안은 엄청난 애정을 자랑했다. 특히 페르니아를 향한 루시안의 집착은 누가 보아도 정상은 아니다, 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루시안은 매일매일 페르니아를 품에 안고 사랑을 속삭이곤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선을 넘지 않았다!
앤은 결혼식이 끝난 후 있을 첫날밤을 위해 루시안이 참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주인님도 남자일 뿐이지. 욕망에 가득 찬 한 마리의 거친 늑대.’
참았던 욕구의 크기만큼 첫날밤에는 어마어마한 것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페르니아가 괜찮을까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에.”
음식이 든 트레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선 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모습을 본 듯 입을 막았다.
그녀가 며칠 동안 세심하게 꾸민 신혼 방. 꽃으로 장식한 커다란 침대 위에는 페르니아가 홀로 누워 있었다.
어제 앤이 입혀 준 슈미즈를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게 걸친 채로.
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 아가씨. 아니 마님. 설마 아니죠?”
페르니아는 짧은 말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그 설마가 맞아.”
“……!”
페르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나와 루시안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새신랑이 신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도망가 버렸거든. 호호호.”
분명 웃고 있음에도 페르니아에게서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 페르니아의 섬뜩한 모습에 앤은 겁먹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페르니아의 앞에는 앤이 다급히 가져온 수많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페르니아는 조각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루시안은 지금까지 내게 손끝도 대지 않았지.’
악마의 아이를 가지는 순간 여자의 몸이 위험해진다는 그리폰의 말은 저주처럼 루시안을 사로잡았으니까.
북부로 온 후 매일 붙어 있었지만, 루시안은 극도로 페르니아를 만지는 것을 조심했다.
[니아, 사랑해요.]달콤하기 짝이 없는 속삭임과 달리 그의 스킨십은 가벼운 입맞춤이나 손을 잡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나 눌러 담은 제 욕망이 뛰쳐나올까 봐 극도로 조심하는 것 같았다.
페르니아는 나는 괜찮다고, 겁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루시안이 어떤 마음으로 저토록 조심하는지 알았기에.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생각했다.
[그래. 이런 사랑도 좋아. 플라토닉이라, 아름답잖아.]하지만 결혼식 날, 하객으로 찾아온 에스텔의 말에 상황이 바뀌었다.
에스텔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니아 님이 루시안의 아이를 가져도 큰 위험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니아 님이 임신을 하게 되면, 제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줄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그 말에 페르니아의 잔잔했던 마음이 화산처럼 뜨겁게 솟구쳤다.
‘플라토닉 따위 개나 줘! 난 혈기 왕성한 젊은이라고!’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억눌렀던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페르니아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스텔의 말을 듣는 순간 루시안의 눈빛도 크게 흔들렸으니까.
그래서 페르니아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첫날밤, 봉인이 풀린 대마왕처럼 제게 저돌적으로 돌격할 루시안을.
어스름한 조명이 깔린 신혼 방. 페르니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쾅!
페르니아는 디저트가 수북이 쌓인 테이블을 손으로 치며 소리쳤다.
“신부를 방에 두고 갑자기 뛰쳐나가다니, 이게 말이 돼?”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줄 알았던 루시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한마디를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요, 니아.]그렇게 사라져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페르니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아니, 기가 찬 정도를 넘어서 화가 났다.
“진짜 미친 거 아냐? 나를 너무 사랑해서 세상 사람을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냐고. 바보, 멍청이! 진짜 미워, 루시안!”
루시안이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할 거라는 마음 따위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페르니아는 그저 루시안이 원망스러웠다.
물론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루시안은 장장 1년 넘게 그리폰의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절대 손대서는 안 될 성역처럼 페르니아를 대했다.
그런 그였으니 아무리 에스텔에게 괜찮다는 말을 들었어도, 막상 페르니아를 손대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루시안은 페르니아와 관련된 것에서만큼은 엄청난 겁쟁이였으니까.
“…….”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페르니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쩌면 내 예상보다 루시안이 그리폰의 말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늘 곁에 붙어 있던 루시안이 제 발로 떠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루시안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싫어.”
페르니아가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더 이상은 못 참아.”
페르니아의 녹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노 빠꾸. 노 유턴. 나는 무조건 직진뿐!
* * *
그날 밤.
끼이익, 공작 부부 방의 문이 열렸다.
촛불의 빛이 은은하게 일렁이는 방 안에 들어선 이는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의 얼굴은 하룻밤 새 부쩍 초췌해져 있었다.
루시안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인 같은 발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루시안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나가면 안 됐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자신은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루시안은 침대에 앉아 있는 페르니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인 루시안은 페르니아의 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많이 화났겠지. 이번에야말로 나를 싫어하게 됐을지도 몰라.’
갖가지 상상에 루시안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형을 선고받기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그러나…….
“기다렸어요, 루시안.”
“……!”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루시안은 눈을 크게 떴다.
페르니아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아니, 달콤하기까지 했다.
‘……뭐지?’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루시안은 눈을 부릅떴다.
침대에 앉아 있는 페르니아는 하늘거리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안에 별도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인지 가운 사이로 가는 쇄골과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거기에 살짝 젖어 있는 청보라색 머리카락에, 연한 화장을 한 얼굴이라니.
“……!”
눈을 내리깐 그녀를 보는 순간 루시안은 얼굴을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코피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누가 봐도 크게 동요하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페르니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극이 너무 셌나?’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루시안을 흔들 수 없을 것이다.
어제처럼 도망가 버리거나, 혹은 그녀의 손을 잡고 절대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겠지.
페르니아는 루시안에게 절대 그따위 짓을 할 여유를 주지 않을 셈이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침대를 톡톡 쳤다.
“내 곁으로 어서 와요.”
“……!”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페르니아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공격은 제대로 먹혔다.
루시안은 성난 소처럼 제게 달려들 것이다!
‘얼마든지 달려들라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이내 페르니아의 눈이 커졌다.
……루시안이 그녀에게서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처럼.
페르니아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페르니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또 도망가기만 해 봐요!”
“…….”
“다시는 루시안을 보지 않을 테니까.”
“…….”
협박 같은 페르니아의 말에 루시안의 걸음이 멈췄으나 그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루시안은 바위처럼 굳은 채로 페르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페르니아를 향해 다가올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페르니아는 복장이 터졌다.
“에스텔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임신을 하면 곁에서 날 지켜 주겠다고도!”
페르니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도 나랑 밤을 보내는 게 무서워요? 그리폰의 말이 그렇게 신경 쓰이냐고요. 소중한 첫날밤을 망쳐 버릴 만큼?”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감정은 원망과 힐난이었다.
겁에 질려 사랑하는 여자를 품에 안지도 못하는 남자를 향한.
그러나 페르니아는 잘못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니아.”
루시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내가 도망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루시안의 대답에 페르니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왜……?”
“같이 있다가는 이성을 잃고 당신에게 달려들었을 테니까요.”
“…….”
“당신이 버티지 못할 만큼 끈질기게. 당신이 날 미워할 만큼 지독하게. 당신이 울음을 터뜨릴 만큼 포악하게. ……참아 왔던 가슴속의 불꽃이 사라질 때까지, 난 당신을 향한 열망을 멈추지 못할 거예요.”
페르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 섬뜩했기에.
사냥감을 눈앞에 둔 굶주린 사자 같았다.
아니. 저 무시무시한 눈빛조차 루시안이 제 욕망을 절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욕망을 모두 발현한다면 저 정도가 아닐 테지.
루시안의 말대로 페르니아는 버티지 못하고, 그를 원망하며 울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진심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바라던 바예요.”
그 순간, 붉은 눈동자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루시안이 페르니아의 위를 덮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페르니아는 마치 날렵한 표범에게 사로잡혔다는 착각이 일었다.
루시안이 페르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요, 니아.”
지금부터 나는 당신을 많이 힘들게 할 거예요.
하루 늦은 첫날밤은 새신랑의 정중한 사과부터 시작되었다.
* * *
며칠이 지난 걸까.
페르니아는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5일? 일주일? 아니면 한 달인가. 설마 1년은 아니겠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날짜를 가늠할 수 없었다.
루시안과 몸을 섞은 밤부터 그녀는 제정신일 틈이 없었으니까.
“니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루시안의 목소리에 페르니아는 어깨를 흠칫했다.
루시안이 페르니아를 품에 안으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질거리던 베이비 키스가 진한 입맞춤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스르르 눈을 감았던 페르니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 돼!’
또 이렇게 흘러가다간 오늘도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면 페르니아는 이제 정말 한계였으니까.
하룻밤만 더 이렇게 지냈다가는 뇌가 녹아 버려 진짜 바보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페르니아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끌어모아 루시안을 밀었다.
“그만해요, 루시안.”
평소에는 페르니아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네네 했던 루시안이건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루시안은 페르니아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조금도 참지 않겠다는 듯이.
페르니아는 결국 그의 혀를 입 안에 담은 채, 빌어야 했다.
“제발, 루시안. 제발…….”
안 그러면 나 진짜 죽어 버릴지도 몰라.
이제 막 결혼한 공작 부인이 복상사라니. 너무 망측하잖아.
진심이 통한 것일까.
루시안의 입술이 페르니아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페르니아는 안도한 듯 작은 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의 불꽃이 조금은 수그러든 건가. 다행이다.’
페르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루시안은 맑고 아름다웠다.
며칠 내내 짐승처럼 달려들었던 남자라고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루시안이 페르니아를 향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사랑해요, 니아.”
며칠간의 고생이 눈 녹듯이 잊힐 만큼 예쁜 미소였다.
멍하니 루시안을 바라보는 페르니아를 향해 그가 다가왔다.
“그런데 아직 당신이 부족해요.”
“……!”
“미안해요.”
루시안이 페르니아를 덮쳐 왔다.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일렁이는 눈동자에 페르니아는 비명을 질렀다.
* * *
공작 부부의 첫날밤 이후, 방문이 열린 건 정확히 보름이 지난 후였다.
페르니아의 호출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었던 앤은 이내 안도했다.
핼쑥할 줄 알았던 페르니아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페르니아는 피부가 반들반들한 데다, 보기 좋게 살까지 올라 있었다.
페르니아는 앤이 가지고 온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식사는 빠뜨리지 않고 잘했거든. 방에서 나오질 못해서 그렇지.”
페르니아의 말에 앤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끼니때마다 열심히 문 앞에 식사를 놓고 간 보람이 있었다.
‘게다가 아가씨. 가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온몸이 불긋불긋해! 목소리도 쉬어 있으시고!’
15일이나 방에 있었던 것에서부터 예상하긴 했으나 격렬한 밤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열망했던 목표를 이룬 것처럼 앤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 찼다.
그 얼굴을 본 페르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앤, 도대체 그 표정 뭐야? 입꼬리가 수상하게 올라가 있잖아.”
“어머나, 죄송합니다. 두 분이 드디어 합방을 했다는 게 기뻐서 그만.”
페르니아는 과하게 솔직한 앤을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루시안은 오늘 언제쯤 들어온대?”
루시안은 오늘 폴과 함께 성을 나갔다. 영지에서 중요한 일이 생긴지라 루시안이 꼭 가 봐야 한다며 폴이 사정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페르니아도 이렇게 그에게서 풀려나(?) 자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앤은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현장만 확인하고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까요. 금세 마님의 품속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까르르 웃던 앤은 페르니아를 바라보더니 헉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아가씨?”
“……응.”
“왜, 왜요? 공작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
“…….”
“아니면 공작님이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는 게 너무 기뻐서요?”
“……둘 다.”
마음에도 없는 개뻥이었다.
그것은 다가올 지옥 훈련을 앞둔 선수의 심정과 같았다. 혹은 출산을 앞둔 임산부의 마음이 이러할까.
페르니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마구마구 입에 넣더니, 꿈틀거리며 이불 속으로 갔다.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공작 부부의 밤은 만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공작 부부의 첫날밤,
fin.
외전 3 공작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
페르니아는 눈을 떴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눈을 찡긋거리며 페르니아는 입을 열었다.
“루시안.”
그를 깨우는 것은 단 한 번,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페르니아의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고 있던 루시안이 눈을 떴다. 루시안은 페르니아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일어났어요?”
“네.”
“더 잘까요?”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말했다.
“안 돼요. 오늘은 일하는 날이잖아요.”
“…….”
“어서 일어나서 아침을 시작해야 해요. 당신도, 나도.”
루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말이 조금도 즐겁지 않다는 듯이.
그럼에도 루시안은 싫어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니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알겠어요.”
카르디엔 공작 부부는 남들과는 다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만나는 대외 활동을 하는 날이 일주일에 딱 이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르디엔 공작, 루시안은 딱 이날만 약을 마셨다. 쿤이 만들어 준 진정제였다.
물약을 삼키는 루시안을 바라보며 페르니아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안은 페르니아와 결혼한 후, 놀랄 만큼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제 페르니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페르니아의 몸과 마음을 제 것처럼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날은 약을 먹었다.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면 큰일이니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지금까지 약에 대한 부작용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쿤은 지금까지 이상이 없는 걸 보면 앞으로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을 했다.
준비를 마친 페르니아는 성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탔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혼자였다.
루시안은 마차 바깥에 서서 불안한 눈으로 페르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니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흡 하고 입을 막았다.
‘혼자 집에 남겨진 강아지 같아. 졸귀!’
만약 루시안의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다면, 분명 꼬리가 추욱 처져 있었겠지.
순간 마음이 약해져 마차에서 다시 내릴 뻔했다.
페르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의 손잡이를 꾹 잡았다.
‘안 되지, 안 돼. 귀한 외출 날인데.’
페르니아는 겨우 표정을 관리하며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일을 마치면 저녁에야 돌아올 것 같아요. 그러니 식사 잘 챙겨 먹어요. 루시안도 오늘 바쁠 텐데 힘내고요.”
루시안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페르니아를 잡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루시안은 의젓하게 페르니아에게 인사를 했다.
“알겠어요. 나는 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와요, 니아.”
달콤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작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
페르니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고, 루시안도 수줍게 웃었다.
보기만 해도 꿀 냄새가 날 것처럼 달콤한 신혼부부의 모습이었다.
달그락달그락.
루시안이 페르니아를 위해 만든 최고급 마차(어떤 산길을 가도 엉덩이에 조금의 타격도 없는)가 성을 떠났다.
루시안은 저 멀리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보이지 않은 후에도 한참을 서 있던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감정을 가다듬는 것처럼.
잠시 후 루시안은 몸을 돌렸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만큼 사랑이 넘쳤던 얼굴에는 섬뜩한 무표정만이 남았다.
불꽃처럼 일렁이던 붉은 눈동자도 핏빛처럼 빛났다.
온 세상이 두려워하는 북부의 악마, 카르디엔 공작의 모습이었다.
저 멀리에 서 있던 집사 폴이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루시안 님. 벌써 많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 *
카르디엔 공작의 접견실.
그 앞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카르디엔 공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북부에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있던 귀족과 지역 유지들. 카르디엔에게 충성의 서약을 맺은 충직한 가신들.
먼 곳에서 온 타지의 귀족도 있었다.
긴 줄을 선 사람들은 혀를 쯧쯧 찼다.
“젠장, 오늘도 사람이 많군.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걸리겠어.”
“찾아오는 이들은 이렇게 많은데, 성문을 여는 날이 고작 이틀이니 그럴 수밖에.”
때문에 카르디엔 공작을 한 번이라도 만나려면 적어도 세 달 전에는 방문 예약을 잡아야 했다.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식당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다.
아쉬운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에.
현재 북부는 제국에서 가장 떠오르고 있는 지역이다.
카르디엔 공작 덕분이었다.
결혼식 이후, 제대로 영지를 돌보기 시작한 카르디엔 공작은 가장 먼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던 괴수와 야만족을 쓸어버렸다.
그 후에는 제국 각지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카르디엔 공작은 본격적으로 북부의 특산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추위밖에 없는 줄 알았던 북부는 의외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다.
두툼한 양털과 질 좋은 고기, 최상급 나무와 기름.
날이 갈수록 북부의 사업장은 커졌고, 교역을 원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남부에서 온 카카오 백작과 츄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남부에서 터를 잡고 있는 두 귀족은 카르디엔령의 교역권을 얻기 위해 이곳에 왔다.
카카오 백작이 금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말했다.
“카르디엔령의 교역권은 우리 카카오 가문의 것이오. 우리 가문은 오래전부터 교역을 진행한 내력이 있으니까.”
그 말에 츄스 백작이 핫,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부터 ‘나는 얄밉습니다. 나는 천하의 악역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는 츄스 백작은 뱁새 같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흥, 그따위 내력이 뭐라고. 중요한 건 자금이지. 가난한 당신 가문과 달리 우리 츄스 가문은 부유하지. 우리 가문과 손을 잡으면 얻을 게 많단 말이야. 그럼 카르디엔 공작이 누굴 택하겠나.”
카카오 백작가는 성실했지만, 워낙 우직하게 돈을 관리했기에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츄스 백작은 영악하게 돈을 굴리는 법을 알았다.
당장 보이는 힘의 차이가 명확했다.
그러나 카카오 백작은 기죽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꾹 쥐며 반박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잠시 후, 카르디엔 성의 집사 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부에서 오신 츄스 백작님과 카카오 백작님의 차례입니다. 들어오시지요.”
츄스 백작과 카카오 백작은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카카오 백작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북부의 지배자, 카르디엔 공작.’
그리고 붉은 눈을 가진 악마.
강대한 악마의 힘은 수천 명의 사람을 단번에 학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카르디엔 공작은 두려움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최근 제국에는 떼쓰는 아이를 다그칠 때 ‘카르디엔 공작님이 잡아간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괜찮아.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는 분은 아니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라고 생각했건만.
고개를 든 카카오 백작은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뻔했다.
그것은 츄스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츄스 백작은 입 밖으로 소리칠 뻔했다.
‘살려 줘, 엄마!’
그도 그럴 것이, 알현실에 앉아 있는 카르디엔 공작의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허리를 곧게 펴고 정중하게 앉아 있었음에도, 내뿜는 분위기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피 묻은 검을 혀로 핥으며 ‘어디부터 썰어 줄까.’라고 물어볼 것 같았다.
한겨울처럼 싸늘해진 공기 속에 카르디엔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 다 카르디엔령의 남부 교역권을 가지고 싶어 찾아왔다고요.”
……분명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건만 온몸에 닭살이 돋는 건 왜일까.
카카오 백작보다 츄스 백작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습니다.”
그는 재빨리 두려움을 지우고 능숙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카르디엔 공작가는 남부에 정식 교역을 맺은 가문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츄스 백작가는 어떠십니까. 분명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츄스 백작은 간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백작의 뒤에 서 있던 하인이 잽싸게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
“이것이 그것을 증명할 증표입니다.”
하인은 상자를 덮고 있는 천을 뺐다.
옆에 있던 카카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저건……!’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든 것은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이었다.
물고기는 마치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츄스 백작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희귀 동물인 다이아몬드 피쉬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반짝이는 물고기로 유명한 아이들이지요. 보기조차 힘든 물고기지만 저희 츄스 가문의 영지에서는 어획이 가능합니다. 츄스 가문에게 정식 교역권을 주시면, 매해 이 아이들을 카르디엔 님께 바치겠습니다.”
희귀한 동물은 고명한 화가의 작품보다 값어치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피쉬는 특히 그랬다.
물고기 한 마리의 값은 다이아몬드 한 덩이보다 비싼 값에 거래됐다.
그러니 어느 귀족이라도 그것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이 악마라 불리는 카르디엔 공작이라도 말이닷!’
츄스 백작은 호기로운 얼굴로 카르디엔 공작을 바라보았다.
‘으잉?’
……그러나 츄스 백작의 기대와 달리 카르디엔 공작의 얼굴에는 조금의 감흥도 보이지 않았다.
츄스 백작은 당황했다.
‘왜, 왜지? 우리 애들이 사랑스럽지 않나?’
저렇게 봐도, 이렇게 봐도, 너무 예쁜데?
그것을 지켜본 카카오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자신만만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지고 왔나 했더니. 카르디엔 공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단순한 츄스 백작은 최고급 물건이면 모두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산이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것.
‘공작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이것이다!’
카카오 백작이 승부사의 얼굴로 카르디엔 공작에게 내민 것은 바로……!
* * *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카르디엔 공작의 눈이 커졌다.
카카오 백작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저도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바로 카르디엔 공작님과 공작 부인을 그린 그림이랍니다. 모자란 실력이나마 그림에 뜻을 둔 저의 딸이 그렸지요.”
카르디엔 공작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림 속에는 카르디엔 공작과 팔짱을 낀 공작 부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공작 부인이 뻗은 손 위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눈의 결정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카르디엔 공작의 넋 나간 얼굴을 바라보며 카카오 백작은 눈을 번뜩였다.
‘역시, 통했어!’
카카오 백작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실은 제 딸이 카르디엔 공작님과 부인의 엄청난 팬입니다. 이 세상에 두 분처럼 잘 어울리는 부부는 없다고 늘 울부짖더군요. 덕분에 제 딸은 한 달에 한 번씩 두 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
“……그럼 이런 그림이 또 있다는 겁니까.”
“네. 너무 많아 집에 도배가 되어 있을 정도랍니다.”
그 말에 카르디엔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카카오 백작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카르디엔 공작님께서 원하시면 딸아이가 그린 그림을 몇 장 더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 보내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면 딸아이도 무척 좋아할 겁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츄스 백작은 기가 찼다.
‘잘 그린 그림인 건 인정하지만 결국 아마추어 귀족 영애가 그린 거잖아. 애들 장난도 아니고 누가 저런 그림 따위를 받고 싶어 한다고…….’
“좋습니다.”
그러나 카르디엔 공작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 순간 카카오 백작은 환호했고, 츄스 백작은 절망했다.
선물을 받았다는 건, 계약을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카카오 백작은 기쁜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럼 카르디엔령의 남부 교역권은 저희 카카오 가문에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죠.”
“좋은 선택이십니다. 주신 권한을 이용해 성심성의껏 일을 진행하여 흡족할 만한 결과를 내보이겠습니다.”
카르디엔 공작은 어느새 카카오 백작이 가져온 그림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츄스 백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나의 다이아몬드보다 비싸고 어여쁜 물고기들이 저따위 그림에게 지다니.’
결코 이대로 카카오 백작에게 교역권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츄스 백작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도 머리가 있어 상황을 파악했다.
카르디엔 공작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자신과 아내가 그려졌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악마 주제에 아내에게 푹 빠진 사랑꾼이라는 소문이 정말이었군.’
소문 그대로의 모습에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츄스 백작은 이 상황을 타개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포인트가 카르디엔 공작 부인이라면, 이쪽도 한 번 더 반격을 할 여지가 있었다.
츄스 백작이 카르디엔 공작에게 소리쳤다.
“카르디엔 공작님! 아내분을 위하신다면 더더욱 제가 가지고 온 다이아몬드 피쉬를 받으셔야 합니다. 귀부인들께서 특히 이 아이들을 좋아하시니까요. 카르디엔 공작 부인께서도 분명 이 아이를 본다면 푹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실 겁니다.”
어때, 이 아내 바보야.
이 말을 들으니 혹하지?
나의 다이아몬드 피쉬가 탐나 죽겠지?
그러나 츄스 백작은 이번에도 틀렸다.
츄스 백작은 얼음처럼 서늘한 카르디엔 공작의 답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싫다는 겁니다.”
“네?”
“그 끔찍한 것을 가지고 떠나십시오. 지금 당장.”
츄스 백작은 도대체 왜 싫은 건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카카오 백작의 손에 끌려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후, 혼자가 된 카르디엔 공작은 그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관심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저 물고기들을 몽땅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순식간에 멸종 위기에 처해 버린 다이아몬드 피쉬였다.
* * *
카르디엔 공작이 수많은 이들을 접견하는 동안, 카르디엔 공작 부인인 페르니아의 하루도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이다.
페르니아가 운영하는 이곳은, 제대로 된 뷰티 숍이 없던 북부의 사교계에 혁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부의 귀족 여인들이 숍으로 몰려들었다.
페르니아가 숍에 나와 직접 화장을 해 주는 날은 일주일에 고작 이틀이었기에, 더더욱 그녀의 손길은 귀하게 여겨졌다.
여인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페르니아를 향해 열렬히 환호했다.
“페르니아 님, 보고 싶었어요!”
“페르니아 님을 보지 못한 5일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어서 저를 변신시켜 주셔요. 아무도 저를 무시할 수 없게 무시무시하게요!”
페르니아는 능숙한 손길로 여인들의 얼굴을 손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댈 때마다 흐릿한 눈매는 진해지고, 병자처럼 혈색 없던 입술은 활기가 돌았다.
페르니아는 화장을 해 주며 여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귀부인들에게 빠질 수 없는 사교 활동이었다.
정치, 문학, 패션, 다양한 분야의 주제 속에 가끔은 사적인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어휴. 정말 남편 때문에 못 살겠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만 먹고 서재로 쌩하니 들어가서 체스만 두는데……. 제가 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렇게 체스가 좋으면 체스 말이랑 결혼하지.”
“그래도 부인은 남편이 집에 들어오기라도 하잖아요. 내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얼마나 가끔 들어오면, 며칠 전에 남편을 보고 새로 들어온 일꾼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새 수염을 수북하게 길렀더라고요. 자기 딴에는 멋있는 줄 아나 봐요. 누가 봐도 숲속에 사는 설인이던데.”
페르니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유부녀가 되기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한 후에는 왜 그렇게 여자들이 만나기만 하면 남편 욕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네 남편이든 내 남편이든 흥미롭기 그지없군.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완전 꿀잼이야.’
여인 한 명이 제 눈 위에 인조 속눈썹을 붙이는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카르디엔 공작님은 페르니아 님을 끔찍하게 사랑하시니 속상할 일 없으시죠?”
“에이. 어떻게 부부 사이가 완벽할 수 있겠어요. 나도 속상할 때 많아요.”
“어떨 때요?”
페르니아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페르니아는 그날 루시안과 오랜만에 거리로 데이트를 나갔다. 무엇이 하고 싶냐고 묻는 루시안에게 페르니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 화제가 되고 있는 공연이 있대요. 우리도 한번 보러 가요.] [좋아요.]그렇게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음악에 맞추어 댄서들이 춤을 추는 예술 공연이었다.
수많은 댄서들이 손가락 하나까지 동작을 맞추어 추는 군무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페르니아의 시선을 가장 많이 빼앗은 건 호프라고 하는 댄서였다.
북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댄서라더니 정말이었다.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호프의 모습은 예술 그 자체였다.
[우와, 쩐다.]페르니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공연의 막이 내려간 후였다.
페르니아는 아차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수준 높은 공연에 너무 열을 올렸던 것이다.
제 옆에 누가 있는지도 잊고.
페르니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을 보는 순간 페르니아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도깨비처럼 섬뜩한 얼굴을 한 당신이 내 남편이 맞나요?
페르니아는 그것을 묻기 전에 소리쳤다.
[죽이면 안 돼요, 루시안!]재빨리 루시안을 말리지 않았다면, 전도유망한 댄서 호프의 생명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날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흑흑. 데이트 한번 하는 게 뭐가 이렇게 어렵냐고.’
방심하면 분노의 초사이언이 되는 남편을 데리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페르니아는 이런 이야기까지 여인들에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해 봤자 아내에게 미친 카르디엔 공작의 흉측한 소문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니까.
대신 페르니아는 여인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소재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 달에 수도에서 온 귀족들이 파티를 여는 것 아시죠?”
그 말에 여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현재 북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관광업도 있었다. 예전에는 위험하고 척박한 땅이라며 누구도 놀러 올 엄두를 못 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전해진 데다 편안히 올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새하얀 설원과 신비로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북부는, 수도의 귀족들에게 색다른 여행지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행을 온 수도의 귀족들이, 북부의 귀족들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수도의 여인들은 북부의 모든 것이 투박하고 촌스럽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의 이야기. 북부의 여인들은 달라졌다.
“우리에게는 카르디엔 공작 부인이 있어요. 기죽을 이유가 없다고요.”
“맞아요. 고 연약하고 새침한 수도의 여인들에게 북부의 강인한 매력을 보여 주는 거예요!”
눈빛으로 곰도 때려잡을 강렬한 메이크업으로!
호불호가 갈리긴 할 테지만 적어도 그전처럼 대놓고 비웃진 못할 것이다.
‘누구라도 앞에서 입꼬리도 못 올릴 만큼 ‘쎈 언니’들로 만들어 줄 테니까 모두 나만 믿어!’
페르니아는 눈을 빛내며 귀부인들의 화장을 시작했다.
* * *
해가 질 무렵, 카르디엔 공작 성에 몰려들었던 손님들은 모두 돌아갔다.
한나절 동안 벅적거렸던 성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카르디엔 공작은 알현실을 나와 성문 앞에 섰다.
잠시 후, 저 멀리서부터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르디엔 공작은 눈을 빛내며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잠시 후 마차가 성문 앞에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카르디엔 공작이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왔어요, 루시안.”
페르니아였다.
그 순간 카르디엔 공작의 얼굴이 바뀌었다.
얼음처럼 싸늘했던 남자는 사라지고, 봄빛처럼 따사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더 이상 악마 공작이라 불리는 북부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페르니아를 사랑하는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손을 내밀었다. 페르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어땠어요? 별일 없었어요?”
페르니아의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물을 받았어요. 니아에게도 보여 줄게요.”
“어머. 당신이 그렇게 말하다니 어떤 선물일지 궁금하네요.”
페르니아는 눈을 반짝이며 루시안에게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조잘거리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거대한 카르디엔 성문이 닫혔다.
쿵.
앞으로 카르디엔 성문이 열리는 것은 5일 후가 될 터였다.
그때까지 카르디엔 성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북부의 철옹성도, 악마 공작이 지키는 암흑의 공간도 아닐 것이다.
그저 루시안과 페르니아 두 사람의 스위트 하우스일 뿐.
* * *
타닥타닥.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
은은한 불빛을 내는 촛불.
그곳에 루시안과 페르니아가 있었다.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은 함께 하얗고 폭신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루시안의 팔에 머리를 댄 페르니아의 손에 들린 건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이게 카카오 백작의 딸이 그린 그림이라고요?”
“네. 정말 예쁘죠?”
그러나 상기된 루시안의 얼굴과 달리 페르니아의 얼굴은 미묘했다.
‘이게 나라고? 내가 언제 이렇게 우주 최강 미녀였지?’
다시 말하지만 페르니아는 평범한 미녀였다. 그런 저와 비교하면 그림 속의 자신은 심하게 미화되어 있었다.
저 그림의 모델이 접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 봐요. 니아의 고양이 요정 같은 새초롬한 눈매와 장미꽃 같은 입술을 정말 잘 살렸어요.”
“……그래요?”
“네. 그리고 이 청보라색 머리카락도 봐요. 물감을 절묘하게 섞어서 당신의 머리카락 색처럼 청량하고 아름답게 표현했잖아요.”
“…….”
아무래도 루시안은 저 그림과 자신이 똑 닮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페르니아는 금세 적응했다.
‘뭐, 루시안이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페르니아는 (루시안 피셜)우주 최강의 미녀다운 도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무척 어려웠을 텐데 나의 수준 높은 미모를 제법 잘 표현했어요.”
“그렇죠?”
페르니아에게 인정받은 루시안은 제가 그린 그림처럼 뿌듯한 얼굴을 했다.
“카카오 백작이 영지로 돌아가면 그림을 더 보내 준다고 했어요. 다른 그림에는 어떻게 당신의 아름다움을 담았을지 기대가 되네요.”
두 눈을 반짝이는 루시안의 모습에 페르니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잔혹하고 무섭다는 카르디엔 공작이 고작 그림 한 장에 이렇게 좋아할 줄은 아무도 모를 거야.’
페르니아는 그런 그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키득거리던 페르니아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너무 예뻐서요.”
“아.”
페르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순식간에 루시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쪽.
어린 아기에게 하듯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솜털 같은 입맞춤은 이내 불꽃처럼 격렬해질 터였다.
페르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루시안의 넓은 등을 껴안았다.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다. 창문 바깥으로는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작 부부의 방 안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공작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
fin.
외전 4 당신의 배 속엔
‘붉은 눈을 가진 자의 아기를 잉태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폰의 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페르니아와 루시안은 피임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계속 소식이 없자 주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 다 젊고 건강하신데 아기가 들어서지 않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공작님이 평범하지 않으시니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계속 아기가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큰일이네요.”
정작 페르니아는 태연했다.
“난 아기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아기를 낳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니까.”
페르니아의 말에 루시안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왜인지 미안함이 듬뿍 담긴 미소였다.
루시안은 매일매일 더 많이 페르니아를 사랑했다. 어제보다 더, 오늘보다 더.
그래서 페르니아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니아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루시안. 나 임신이래요.”
루시안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 * *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무리 겨울의 나라인 북부라도 봄이 되면 날이 풀린다.
게다가 오늘은 유독 햇볕이 따스했다.
겨우내 집 안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까르르 웃으며 뛰어놀았고, 여인들도 두툼한 외투를 벗고 화사한 옷을 입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페르니아만 한겨울이었다.
방 안에 있는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온몸을 둘러싼 담요 사이로 페르니아는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니아, 춥지 않아요? 장작을 더 넣을까요? 외투를 한 겹 더 입는 게…….”
페르니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루시안. 날 쪄 죽일 생각이에요?”
루시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말을…….”
그러더니 루시안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니아가 기침을 했잖아요. 감기라도 걸린 거면 어떡해요. 혹시라도 당신이 잘못되면 난…….”
“그건 콧구멍에 먼지가 들어가서 재채기를 한 거라니까요. 나 엄청 건강하다고요. 주치의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지만…….”
루시안은 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식사를 못 하고 있잖아요.”
……그 얼굴이 어찌나 서글퍼 보이는지.
‘누가 보면 내가 죽을병에 걸린 줄 알겠네.’
페르니아는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덧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다.
페르니아는 며칠 전부터 입덧이 시작됐다.
입덧은 식욕이 왕성해지는 ‘먹덧’과 어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 버리는 ‘토덧’이 있는데, 페르니아는 후자였다.
페르니아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먹덧이었다면 루시안이 페르니아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모두 가져다주기 위해 온 세상을 들쑤셨을 테니까.
‘당장 잘 익은 복숭아를 가져와! 아기 엉덩이처럼 동그랗고 선명한 분홍빛을 띤 유월의 복숭아를 말이다!’
‘지, 지금은 한겨울이라 복숭아를 구할 수 없습니다, 공작님. 끄아악!’
남자의 목이 철겅 날아간다.
……분명 이런 일이 수십 번 반복됐을 거다.
물론 루시안의 입장에서는 페르니아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좋았을 테지만.
루시안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페르니아에게 각가지 음식을 내밀었다.
“니아, 이거라도 먹어 봐요. 흰 사슴 마을에서 난 산딸기예요.”
“우웁. 못 먹겠어요.”
“그럼 이거라도……. 자작나무 마을에서 만든 말린 과일이에요. 어제 이건 먹었잖아요.”
“우욱.”
손사래를 치는 페르니아를 본 루시안이 다급히 음식들을 치워 버렸다.
페르니아가 입을 막으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뭔가 먹고 싶어지면 바로 말할게요. 지금은 좀 쉬고 싶어요.”
“……그래요.”
루시안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페르니아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페르니아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 주었다.
잠시 후 쌔근쌔근하는 페르니아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루시안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힌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잠시 후 루시안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 * *
루시안이 전쟁터에 나갈 때처럼 결연한 얼굴로 향한 곳은 조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루시안의 등장에 조리실은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게, 그들에게 루시안은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메인 요리사 산체스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고, 공작님이 어쩐 일로 이런 곳에 오신 거지?”
카르디엔 공작은 꽤 괜찮은 고용주였다.
아랫사람을 막 다루지도 않았고, 까탈스럽게 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공작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악마의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방 하인 중 한 명이 산체스에게 속삭였다.
“마님께서 며칠째 음식을 거의 드시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신 것 아닐까요?”
그 말에 산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그래도 산체스가 요 며칠 가장 신경 쓰고 있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다해 만들었지만 거의 입도 대지 않고 돌아온 음식을 보며 어찌나 마음이 착잡하던지.
제 솜씨가 부족한 건가 싶어 좌절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루시안과 마주한 산체스는 벌벌 떨었다.
당장이라도 루시안이 제게 검을 휘두르며 소리칠 것 같았다.
‘형편없는 놈. 공작가의 요리사라는 놈이 내 아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지도 못해? 죽어라.’
그러나 루시안이 꺼낸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요리를 만들고 싶어.”
“네?”
저를 요리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고요?
산체스는 토실토실한 몸을 감싸며 눈을 깜빡였다.
다행히 루시안이 한 말은 그런 끔찍한 내용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알다시피 요즘 아내가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직접 아내의 식사를 만들어 주고 싶은데 요리에 대해 아는 게 없군.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진지한 루시안의 얼굴에 산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새하얀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른 루시안이 나타난 순간 산체스는 생각했다.
‘나보다 더 일류 요리사 같잖아!’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차분한 붉은색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과 우아한 몸짓은 뭐든 잘 해낼 것만 같았다.
루시안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산체스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떤 요리를 할지는 정하지 않았어. 그대의 조언을 듣고 싶군.”
산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은 빵을 아주 좋아하시지요. 부쩍 식사를 못 하시는 요즘도 그나마 잘 드시는 게 빵이고요. 그러니 빵을 만들어 보시면 어떻습니까.”
“좋아.”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에게 요리를 가르쳐 준다는 영광스러운 상황에 산체스의 퉁퉁한 볼이 실룩였다.
산체스는 상기된 얼굴로 루시안을 작업대로 안내했다.
작업대 위에는 새하얀 밀가루가 담긴 포대와 설탕, 계란이 놓여 있었다.
산체스가 계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빵 반죽을 만들어야 하니 계란을 깨 주십시오.”
루시안은 바구니에 담긴 계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그제야 산체스는 루시안이 생각보다 더 요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긴. 이전에는 기사였고 지금은 공작님이시니. 언제 계란을 깨 보셨겠어.’
산체스는 다 이해한다는 듯 친절하게 웃었다.
“잘 보세요.”
산체스는 톡, 하고 계란을 그릇 모서리에 두드려 금이 가게 한 후 껍데기를 깠다. 그릇 안에 노른자와 투명한 흰자가 예쁘게 떨어졌다.
“참 쉽쥬?”
“…….”
루시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계란을 하나 들어 그릇 모서리에 툭 두들겼다. 계란 껍데기에 바사삭 금이 갔다.
그 틈에 손가락을 넣어 껍데기를 톡 깨드리면 계란이 쏙 튀어나오는…….
“…….”
“…….”
산체스와 루시안은 말없이 그릇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날계란만 들어가 있어야 할 볼에는 계란 껍데기와 날계란이 뒤섞여 있었다.
산체스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하. 처음이라 그러실 겁니다. 한두 번 해 보면 금방 잘하시게 될 겁니다. 3살 난 제 딸도 곧잘 하니까요.”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시간이 흘러 20개째를 깨도 루시안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투명한 날계란 속에서 바스라진 계란 껍데기를 골라내던 산체스는 결국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송구합니다만 빵을 만드는 건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노력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산체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는 이 이상 무고한 계란이 희생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산체스는 루시안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빵 말고 다른 요리를 해 보시면 어떤가요?”
“……어떤 요리?”
“고기 요리요. 아무래도 마님께서는 임산부이시니만큼 고기 섭취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리고 고기 요리가 더 쉽습니다. 고기를 잘라서 구우면 끝이니까요. 공작님은 제국에서 최고로 검을 잘 쓰시는 분이니 분명 고기도 잘 썰 수 있을 겁니다.”
“…….”
루시안은 살짝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작업대 위에는 계란과 밀가루가 사라지고, 단단한 나무 도마와 식칼이 올려졌다.
산체스가 도마와 식칼을 가리키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이름난 장인에게 의뢰하여 맞춘 도마와 칼이랍니다. 제 자식 같은 놈들이지요. 식칼은 단단한 소뼈도 단번에 자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도마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져서 어떤 음식을 잘라도 냄새가 배지 않는답니다.”
산체스가 식칼을 두 손에 들고 말을 이었다.
“누구도 빌려주지 않는 소중한 아이들이지만, 오늘만큼은 공작님께 빌려 드리겠습니다.”
“……성의를 기억하지.”
루시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산체스에게 식칼을 받아 들었다.
식칼을 든 루시안을 보는 순간 산체스는 또다시 감탄했다.
루시안의 손에 들린 식칼이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성검처럼 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산체스는 도마 위에 색이 선명한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오늘 들어온 소고기입니다. 이 정도 두께로 썰어 주시면 됩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칼을 준 손에 힘을 주었다.
확실히 계란보다는 칼 쪽이 훨씬 손에 익었다. 잘 해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들었다.
베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루시안은 현란한 손길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슉슉. 샥샥.
“…….”
“…….”
그러나 잠시 후 산체스는 울상을 지었다.
산체스는 믿기지 않는 것을 본 얼굴로 바르르 떨며 소리쳤다.
“고, 공작님. 고기만 자르시면 되는데 왜 도마까지 자르신 건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힘 조절에 실패한 것뿐.
루시안이 가진 힘은 너무 강했고, 아무리 그가 세심하게 힘을 조절한다 한들 고깃덩어리는 심하게 부드러웠다.
“흑흑. 도마야.”
산체스는 반 동강이 난 도마를 품에 안았다. 그는 울먹이는 얼굴로 루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 송구합니다만 이 요리도 공작님께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칼은 돌려주시지요.”
루시안은 얌전히 식칼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산체스는 루시안과 함께 수많은 요리에 도전했다.
“감자 수프 어떠십니까. 부드러운 수프라면 꼴깍꼴깍 잘 넘기실 겁니다.”
“좋아.”
산체스는 루시안의 앞에 칼과 감자를 놓았다.
“일단 감자 껍질을 까 주십시오. 칼로 요렇게 요렇게 깎아 주시면 됩니다. 참 쉽쥬?”
“그래.”
그러나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산체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고, 공작님, 그 많던 감자는 어디 갔나요?”
“……여기.”
루시안이 가리킨 접시에는 콩알보다 작아진 감자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감자보다 더 두꺼운 감자 껍질이 쌓여 있었다.
“허어.”
산체스는 한탄이 가득한 신음을 내뱉었다.
* * *
페르니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 밖은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벌써 저녁이 됐네. 또 한참 잤구나.’
임신을 한 후로 툭하면 잠이 쏟아졌다.
페르니아는 하아암, 하품을 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늘 껌딱지처럼 곁에 붙어 있던 루시안이 보이지 않았다.
페르니아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어딜 간 거지? 설마 내가 걱정된다고 구석에서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이없는 생각 같아도 신빙성이 있었다.
페르니아가 임신한 후 루시안은 극도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페르니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도록 노력하자.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루시안의 불안감이 해소될 테니까.’
그때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페르니아는 하녀장인 앤이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임신한 후에는 늘 방에서 식사를 했으니까.
그런데 열린 문으로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안이었다.
‘왜 루시안이 여기서 나와? 게다가 저 옷은 또 뭐고?’
루시안은 새하얀 셔츠 위에 주방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요리사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페르니아를 향해 루시안이 빙긋이 웃었다.
“잘 잤어요? 깨워야 할까 고민했는데 일어났네요.”
그 후 루시안은 트레이에 있던 음식을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갓 구운 버터 빵. 채소와 함께 볶은 찹 스테이크. 부드러운 감자 수프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 새빨간 산딸기와 연녹색 잎이 어우러진 샐러드와 톡 쏘는 레몬 티까지.
모두 페르니아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페르니아가 커다래진 눈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이 음식들을 다 루시안이 한 거예요?”
루시안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네,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현실은 가혹하더군요.”
루시안은 주방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루시안은 산체스와 함께 여러 가지 요리에 도전했다.
그러나 파스타도, 샐러드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산체스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요리치라는 것을.
하나를 알려 주면 셋을 까먹고, 셋을 가르쳐 주면 일곱을 까먹는!
‘흑흑. 나란 놈은 도저히 공작님이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도와줄 수 없어.’
루시안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산체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방을 둘러보았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주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모두 루시안의 손이 스쳐 지나간 곳이었다.
루시안도 이제 알았다.
페르니아에게 음식을 해 주고 싶다는 것이 크나큰 욕심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더 해 보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크나큰 민폐였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페르니아의 식사 준비가 늦어질 것이다.
루시안은 결정을 내렸다.
“직접 음식을 만드는 건 포기하지.”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대답하는 산체스에게 루시안이 말을 이었다.
“대신 뭐라도 좋으니 일을 줘.”
“예?”
“어떤 일도 괜찮아. 음식 재료를 옮기거나, 채소를 씻거나, 그릇을 닦는 일이라도.”
“…….”
“그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부인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두 눈을 깜빡이던 산체스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후, 루시안은 주방 구석에 쭈그려 앉아 뽀득뽀득 야채를 씻고, 요리가 담길 그릇도 반짝일 만큼 깨끗하게 닦았다.
페르니아는 그 말을 듣고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세상에 어느 공작이 그런 일을 해.’
루시안은 이 성의 주인이며,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카르디엔 공작이었다. 도무지 그런 자질구레한 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당신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어요.”
그러더니 그는 포크로 콕 하고 색이 선명한 산딸기를 찍었다. 그는 산딸기를 페르니아의 입 앞으로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러니 부디 맛있게 먹어 주세요, 니아.”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페르니아는 제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루시안이 벌려진 입 속으로 산딸기를 넣어 주었다.
새콤달콤한 딸기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페르니아는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맛있어요.”
“정말요?”
“그럼 이것도 먹어 봐요.”
루시안은 부드러운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페르니아의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그 후에는 뽀송뽀송한 빵. 그 후에는 잘게 자른 고기까지.
아기 새처럼 순순히 음식을 받아 먹는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루시안의 얼굴이 한껏 상기됐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입덧이 괜찮아진 거예요?”
“그러게요.”
페르니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루시안이 열심히 만들어 준 요리라서 그런가 봐요. ……고마워요, 루시안.”
그 말이 뭐라고, 루시안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루시안은 벅찬 얼굴로 페르니아의 식사를 도왔다.
* * *
그날 밤, 주방은 난리가 났다.
“마님의 방에 들어갔던 그릇이 싹 비워져 왔어요. 마님께서 식사를 하셨다고요!”
메인 요리사인 산체스는 두 손을 위로 치켜들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살았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페르니아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페르니아가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배가 부르니 또 잠이 와요. 정말 돼지가 되려나 봐.”
루시안이 페르니아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원래 아기를 가지면 잠이 많이 온다잖아요. 푹 쉬어요.”
루시안은 페르니아의 가슴을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어느덧 창문 밖에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이불은 포근했고, 사랑하는 남자의 손길은 다정했다.
페르니아는 반쯤 감긴 눈으로 말했다.
“루시안.”
“네.”
“……아직도 내가 아기를 낳는 게 두려워요?”
루시안은 한 박자 뒤에 대답했다.
“……네.”
그럴 만한 이유는 많았다.
붉은 눈을 가진 이의 아기는 제대로 출산할 수 없을 거라던 그리폰의 저주 같은 말.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출산의 위험은 크다.
많은 여인이 아기를 낳으며 생명을 잃거나 몸을 해치곤 했다.
다행히 그 부분은 에스텔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성에 도착한 에스텔이 출산 때까지 페르니아의 옆을 지킬 것이다.
몸을 치유하는 성녀의 능력과 해박한 의술을 갖춘 그녀가 곁에 있는 한 페르니아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안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루시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미쳐 있는 내가 진심으로 아기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그것이 루시안의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루시안은 여전히 페르니아의 사랑만을 원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이 싫었다.
태어날 아기에게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기를 질투하고 미워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당신은 날 경멸하겠지.’
일그러진 루시안의 얼굴은 섬뜩했다. 꾹꾹 눌러 왔던 추악함이 바깥으로 새어 나온 것처럼.
그러나 루시안에게 들려온 건 페르니아의 맑은 목소리였다.
“사랑할 수 있어요.”
그녀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보물이니까.”
“…….”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을 당신이 사랑하지 않을 리 없잖아.”
조금의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였다.
잠시 후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쌔근쌔근.
루시안은 잠든 페르니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자신을 구원해 준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듯이.
당신의 배 속엔,
fin.
외전 5 아기가 태어났어요 (부제: 공작님의 현실 육아)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던 날, 카르디엔 공작 성에 아기가 태어났다.
카르디엔 공작 부부의 첫아기였다.
“으아앙!”
에스텔이 우렁차게 우는 아기를 안으며 말했다.
“우는 소리가 아주 힘차네요. 아주 건강해요.”
그리고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예쁜 공주님이랍니다. 축하해요, 니아, 루시안.”
아기를 낳느라 한껏 초췌해진 페르니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루시안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처럼 훌쩍이는 루시안을 보며 페르니아는 당황했다.
“아기 낳느라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루시안이 울어요.”
“그러니까 그렇죠. 당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긴요. 루시안, 나한테 머리카락 반은 뜯겼잖아요. 평생 들을 욕도 다 들었고. 그 정도면 됐지.”
“…….”
그러더니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어서 아기한테 인사해요.”
루시안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던 에스텔이 모포에 둘러싼 아기를 안고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페르니아가 루시안에게 눈짓했다.
“루시안이 먼저 안아 봐요.”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루시안의 눈이 흔들렸다.
갓 태어난 아기는 으레 엄마가 가장 먼저 안지 않던가.
그러나 페르니아의 다부진 눈빛에 루시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이 루시안의 두 손 위로 아기를 건넸다.
아기를 안은 루시안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가벼워요. 꼭 깃털 같아.”
그 말에 에스텔이 쿡쿡 웃었다.
“그러니? 다른 아기들보다 많이 묵직한 편인데.”
루시안의 옆에서 아기를 바라보던 페르니아가 말했다.
“어쩐지. 임신 내내 엄청나게 무겁더라니. 사람들한테 쌍둥이냐는 말도 엄청 들었잖아요.”
“보기 드문 우량아예요. 우는 소리도 이렇게 우렁차잖아요.”
“으아아앙!”
아기는 아까보다 크게 울고 있었다.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안고만 있을 거냐는 듯이.
페르니아는 그제야 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시안이 어색한 손짓으로 페르니아의 품속에 아기를 놓았다.
드디어 아기를 안은 페르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랑은 인사 잘했니?”
“으아앙!”
“잘생긴 아빠를 먼저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랬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
페르니아는 에스텔의 도움을 받아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그제야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엄마 젖을 빨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멍하니 엄마의 젖을 쪽쪽 빠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아기를 안았던 느낌이 손에 남아 있었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지.’
페르니아가 젖을 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기, 정말 예쁘네요. 그렇죠, 루시안?”
갓 태어난 아기는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대로 뜨지 못해 눈동자도 보이지 않는 눈. 한껏 눌려 납작한 코. 태반이 묻어 있는 새빨간 얼굴.
꼭 못생긴 원숭이 같았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두 번이나.
진심이었다.
‘너무 예뻐.’
흑화한 후 처음으로 페르니아가 아닌 사람이 예뻐 보이는 순간이었다.
* * *
“앞으로 6개월간 카르디엔 공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고요?”
“네. 공적인 일을 모두 물린답니다. 피치 못할 만큼 중요한 일만 서류로 받아 처리하신다고요.”
“도대체 왜요? 설마 몸이라도 아프시답니까?”
“……아기를 보셔야 한다는군요.”
“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해괴한 말을 들은 얼굴을 했다.
세상 어느 공작이 아기를 본다고 일을 쉰단 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페르니아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키울 생각이었다. 그것은 부유한 귀부인이 누릴 수 있는 찬스니까.
당연히 루시안은 별생각 없이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눈으로 아기를 보기 전까지의 일.
루시안은 아기가 태어난 날,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내가 직접 아기를 보겠습니다. 나와 당신의 소중한 보물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시작된 카르디엔 공작의 육아였다.
다행히 루시안의 곁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원래 아기를 돌보기 위해 고용한 유모였다.
그녀는 무려 13명의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내고, 그 외에도 수많은 아기를 키워 낸 베테랑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루시안에게 말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중요한 건 먹고, 자고, 싸는 것이에요. 먹는 것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이니 공작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자고 싸는 건 충분히 하실 수 있지요.”
루시안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가 말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되어요. 어른의 하루가 아기에게는 3일과 같다는 것을요. 아기는 잠자는 시간도, 일어나 있는 시간도, 음식을 소화시키는 시간도 어른보다 훨씬 짧답니다.”
잠깐 자고, 금방 일어나고, 자주 먹고, 자주 싼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 * *
“으아앙!”
유모가 알려 주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고 우는 거예요.”
루시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한 시간 전에 젖을 먹지 않았나.”
“아기는 배가 작아서 한 번에 먹는 양이 적지요. 그러니 금방 소화가 되고, 자주자주 먹여 줘야 해요.”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 거세지자, 루시안은 황급히 아기를 안아 페르니아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던 페르니아가 문소리를 듣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고 아기를 안았다.
젖 냄새를 맡은 아기가 허겁지겁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배가 고팠나 보네.”
페르니아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두 사람을 지켜보는 루시안의 눈빛은 심란함이 가득했다.
페르니아는 그런 루시안을 보더니 괜찮다는 듯 말했다.
“나는 계속 쉬었잖아요. 젖 먹이는 것 정도는 힘들지 않아요. 루시안이 고생이죠.”
며칠 만에 부쩍 해쓱해진 루시안의 얼굴을 살피며 페르니아가 말했다.
“오늘 밤은 내가 유리아나를 재울까요?”
루시안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신경 쓰지 말고 쉬어요. 그래야 하루빨리 몸이 회복되죠.”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젖을 다 먹인 페르니아가 루시안에게 다시 아기를 건넸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서인지 아기는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으아아앙!”
아기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기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혹시 아기가 아픈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다. 그러나 유모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잠투정을 하는 거예요. 아기는 아직 자는 법을 잘 모르거든요. 너무 졸린데 어떻게 자야 할지는 모르겠으니까 이렇게 우는 거예요.”
졸려 죽겠는데 방법을 모른다니.
어쩜 그렇게 바보 같고 애처로울 수가.
루시안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지?”
유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통은 그냥 울게 둔답니다. 몇 번 울다 보면 아기도 적응을 해서 그냥 잠이 들거든요.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지는 거죠.”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 말에 유모가 눈을 반짝였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공작님과 저는 육아관이 맞는 것 같네요.”
유모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기가 잠들 때까지 안아서 토닥여 주세요. 편안히 잠들 거예요.”
루시안은 그녀의 지시대로 아기의 작은 등을 열심히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아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으아아아앙!”
“흐으응.”
“히잉.”
울었다가, 찡얼거렸다가, 그렇게 점점 소리가 작아지더니 이내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고개를 숙여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입을 헤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천사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기의 모습에 넋이 나갈 여유는 없었다.
루시안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상처가 나는 여린 생명처럼.
그러나…… 침대에 아기의 등이 닿는 순간 루시안은 생각했다.
‘망했다!’
아기가 다시 눈을 번쩍 뜬 것이다.
“으아아아앙!”
감히 나를 내려놓는 거야? 안아! 안아서 재우란 말이야!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결국 루시안은 다시 아기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장……. 자장…….”
루시안은 자장가를 부르며 아기를 토닥였다.
아기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한 번 덴 루시안은 다시 아기를 침대에 눕힐 생각을 않았다. 루시안은 아기를 토닥이며 방의 끝에서 끝을 걸었다.
하루 종일 안고 있던 아기를 밤에도 안고 있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쌓인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이 루시안에게는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우는 아기를 달래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거나, 씻기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안고 토닥이면 된다.
‘내게는 황금보다 귀한 휴식 시간이야.’
루시안은 아기를 토닥이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평화가 길지 않음을 알기에.
길어야 두 시간 후면 아기는 일어나 다시 울음을 터뜨릴 테고, 끝없는 육아가 다시 시작될 터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와 함께 있는 루시안의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으아앙!”
“그래, 쉬야를 했다고? 금방 기저귀 갈아 줄게.”
“으아앙!”
“밥 먹을 시간이구나. 엄마에게 가자.”
“으아앙!”
“심심하니? 우루루, 까꿍!”
“으아앙!”
“아이코, 응아를 잔뜩 쌌네. 엉덩이 닦는 김에 목욕도 하자.”
“으아앙!”
“그래, 어느새 깜깜이가 왔네. 코야 하자.”
은은한 촛불의 빛이 일렁이는 방. 루시안은 흔들의자에 편안히 앉아 아기를 안고 토닥였다.
“히잉.”
아기는 많이 졸리다는 듯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조금 컸다고 예전처럼 죽어라 울며, 저를 안아서 걸어 다니라고 떼쓰지 않았다.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토닥여 주는 것만으로 괜찮았다.
‘혼자 자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아기는 루시안의 품속이 아니면 잠이 들지 못했다. 루시안이 조금이라도 떼어 놓으면 잠이 들었다가도 일어나 서럽게 울고는 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아침까지 아기를 품속에 안아 재웠다.
누군가는 아기를 그렇게 키우면 안 된다고 혀를 쯧쯧 찰지도 모른다.
특히 귀족가의 아기는 독립적이고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그러나 루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딸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그때였다.
달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페르니아였다.
페르니아가 방으로 들어서며 입을 움직였다.
“잠들었어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금요.”
페르니아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다행인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페르니아는 루시안이 앉아 있는 흔들의자 곁에 다가갔다.
달빛 아래, 잠이 든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피부. 장밋빛의 보들보들한 뺨. 병아리 솜털처럼 뽀송뽀송한 연보라색 머리카락.
감겨 있어 지금은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붉은색이지만, 아기는 전체적으로 페르니아를 많이 닮았다.
페르니아는 그 사실이 아쉬웠다.
‘아빠가 세계 미모 랭킹 1위잖아! 그럼 아빠를 쏙 빼닮았어야지. 그랬으면 세상 사는 게 오백 배는 즐거웠을 텐데 말이야, 딸아.’
그러나 루시안의 생각은 페르니아와 정반대였다.
그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당신을 닮아서 정말 예뻐요.”
“…….”
아기에게 적당히 콩깍지가 씐 페르니아와 달리 루시안의 콩깍지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눈도, 코도, 입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꼭 신화 속에 나오는 달의 요정 같아요.”
그 눈빛이 어찌나 달콤한지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페르니아는 이런 그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루시안의 많은 모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흑화하기 전, 제 본심을 숨기고 한없이 조심스러웠던 루시안도. 흑화한 후에, 제가 사랑하는 이에 대해 무서울 만큼 집착하는 루시안도.
그러나 요즘의 루시안은 그녀가 몰랐던 또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어느 누구도 지금의 루시안을 본다면 그를 악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악마가 저렇게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어린 딸을 바라볼까.
페르니아가 루시안을 뒤에서 껴안으며 속삭였다.
“오늘도 약 안 먹었죠?”
“아……. 그러네요.”
루시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기를 돌보기로 결정한 후, 루시안은 매일 약을 먹기로 결심했다.
오랜 시간 페르니아와 떨어져 있어야 했고, 혹시나 제가 정신이 나가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심과 달리 루시안은 첫날부터 약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다.
도무지 약을 챙겨 먹을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루시안은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아기를 보는 것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심지어 비정상적이었던 페르니아에 대한 독점욕조차 수그러들었다.
꼭 흑화하기 전처럼.
루시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문득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혹시 출산과 함께 제게 깃들어 있던 악마의 힘이 유리아나에게 옮겨 간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녀의 대답에 루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페르니아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유리아나가 울고불고 떼쓸 때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악마가 뭐야. 마왕 강림이지. 어떻게 이런 조그만 몸으로 그렇게 지독하게 울어요?”
“니아!”
페르니아가 농담한 것을 안 루시안이 작게 소리쳤다.
페르니아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루시안이 황당한 말을 하기에 나도 황당한 말을 해 본 것뿐이에요.”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쉽게 생각하라고요. 그냥 당신이 평범한 아빠가 되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가진, 평범한 딸바보 아빠 말이에요.”
페르니아의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풀어졌다.
마치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흐응.”
아기가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 것이다.
“……!”
그 순간 눈을 번뜩인 루시안은 기민하게 손을 움직여 아기의 가슴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아기가 달의 요정처럼 예쁘다고 했던 말이 무색해질 만큼,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손동작이었다.
아기가 태어났어요
(부제: 공작님의 현실 육아),
fin.
외전 6 악마 공작가에 입양되었습니다
이제 막 7살 되었을까.
조그만 아이는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천장에 매달려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
누워 있는 침대 또한 구름 위처럼 푹신했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리고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 * *
제대로 먹지 못해 또래보다 훨씬 작긴 했지만 아이는 올해로 8살이었다.
아이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주변에 돌봐 줄 어른이 하나도 없는 고아였으니까.
대게 아이처럼 어린 나이에 길거리 생활을 하게 된 아이들은 집단을 이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곳에서마저 거부당했다.
붉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세상에, 저 눈동자 좀 봐. 피처럼 새빨갛잖아.”
“악마가 분명해.”
“어서 피해. 눈이 마주치면 저주받을지도 몰라.”
‘악마의 저주를 받은 자는 붉은 눈을 가졌다.’라는 미신은 제국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것은 북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폐쇄적인 곳이니만큼 불길한 미신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컸다.
그것을 안 아이는 어디선가 주운 낡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붉은 눈동자를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친절했으니까.
(적어도 아이를 보고 도망가거나 욕을 내뱉진 않았다.)
이따금 빵도 얻고, 돈도 받았다.
아이는 그렇게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 갔다.
그러나 늘 모습을 숨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아이는 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술 한잔을 걸친 것인지, 붉어진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는 사내는 꽤 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본디 사람은 행복할 때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지는 법.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면 작은 것이라도 하나 던져 주기 마련이다.
아이는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 나리. 오늘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한 푼만 주세요.”
뼈마디가 드러난 손을 내미는 조그마한 아이는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사내는 츳, 하고 혀를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내가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동전 하나를 아이에게 주려는 순간이었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었고 아이가 뒤집 어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동시에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때 구정물이 묻어 칙칙한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피처럼 선명한 붉은 눈동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주받은 놈이잖아.”
정색한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이는 눈치챘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고.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아이는 사자에게 정체를 들킨 토끼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사내의 손이 더 빨랐다.
사내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요즘 마을에 붉은 눈을 한 놈이 얼쩡거린다더니 너였구나.”
“죄, 죄송합니다.”
아이는 뭐가 죄송한지도 모르고 일단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살벌한 사내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사내는 이를 갈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만만하니 이곳에 머무는 거지? 다시는 이곳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혼쭐을 내주마.”
아이의 붉은 눈동자가 공포에 질렸다.
퍼억, 퍼억.
어린아이를 향해 가차 없는 폭력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비명 한 번 내 지르지 못하고 몸을 둥글게 감쌌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보았자 돌아오는 건 더 큰 폭력밖에 없음을.
“흐읍.”
그럼에도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 신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사내는 거친 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장 마을을 떠나. 한 번 더 눈에 보이면 그때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이는 제대로 된 답도 못 하고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울어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이런 일이 터지면 눈물이 새어 나오곤 했다.
투둑.
쓰러진 아이의 위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순식간에 거센 비가 되어 아이를 덮쳤다.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아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야옹.”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니. 어서 일어나서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가렴.’
그러나 아이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내에게 맞은 몸이 너무 아파서이기도 했고, 3일 전부터 계속 굶어서이기도 했다.
아이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고양이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 깜깜아. 죽지는 않을 테니까.”
허세가 아니었다.
아이는 제 몸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사흘 밤낮 배를 곯아도, 수십 명의 사람에게 맞았을 때도, 걸리면 죽는다는 전염병에 걸렸을 때조차도 아이는 죽지 않았다.
며칠 뒤면 상처는 거짓말처럼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까 가.”
아이는 고양이를 향해 눈짓했다.
고양이는 이야옹, 하고 울더니 아이의 곁을 떠났다. 떠나가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흐릿해졌다.
제아무리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라도 배고픔과 육체의 고통, 추위를 동시에 견뎌 내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고장 난 인형처럼 스르르 눈이 감기는 순간이었다.
“냐!”
희뿌연 빗방울 사이로 제게 다가온 건 방금 전 떠나갔던 새까만 고양이와 사람의 인영이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은 인영이 외쳤다.
“세상에, 괜찮니?”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아이는 제게 다가온 사람의 얼굴 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 * *
아이는 쓰러졌던 때를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렇게 쓰러졌었지. 누군가 내게 다가왔고.’
그 누군가는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이 분명하다.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진한 눈 화장을 한 여인은 한눈에 보아도 고귀한 신분인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여인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눈을 뜨니 갑자기 낯선 곳에 있어서 많이 놀랐지? 하지만 걱정 마. 나는 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
까.”
그러더니 그녀는 충격적인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내 이름은 페르니아 카르디엔이란다. 카르디엔 성의 안주인이지.”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카르디엔.
북부의 주민이라면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이 북부를 지배하는 공작의 이름이었으니까.
‘카르디엔 성의 안주인이라면 공
작 부인? 내가 그런 분께 도움을 받은 거라고?’
아이는 너무 놀라 제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였다.
“이야옹.”
익숙한 소리에, 그제야 아이는 페르니아의 품 안에 있던 새까만 고양이를 발견했다.
깜깜이였다.
페르니아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 녀석이 내게 너를 안내해 주었어. 비 오는 거리에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작게 한숨을 내쉰 페르니아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밤새 열이 많이 올라서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거든.”
그녀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진심이었다.
‘저렇게 대단한 분이 나 같은 걸 걱정했다니…….’
아이는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지금은 상태가 어떻니? 의사를 다시 불러올까? 아니면 식사부터 할래?”
친절한 말에 아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쓰러진 저를 데려와 돌봐 주신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저는 이만 가 보겠…….”
습니다, 라고 말하며 씩씩하게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하고 천둥 소리가 났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 없으니까 당장 뭐라도 입에 넣어! 안 그러면 안 움직인다?’
라고 몸이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타이밍에 이렇게 민망한 소리를 내는 건 너무하잖아.’
아이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상태로 배를 감쌌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페르니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다. 잠깐만 기다려.”
* * *
잠시 후 방 안에 음식이 차려졌다.
보기만 해도 몰랑몰랑한 갓 구운 빵. 모락모락 김이 나는 새하얀 크림 수프였다.
바닥에는 고양이를 위해 잘게 자른 육포까지 놓여 있었다.
페르니아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식사를 못 한 것 같아서 소화하기 쉬운 음식들로 차렸어. 혹시 속이 놀랄지 모르니 천천히 먹으렴.”
그러나 아이는 페르니아의 조언을 따를 수 없었다.
3일이나 굶은 몸은 탐욕스럽게 음식을 원했으니까!
찹찹찹찹!
아이는 이성을 잃고 작은 입 안에 음식을 욱여넣었다.
아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접시에 있던 음식은 이미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있었다.
페르니아는 놀란 눈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육포를 다 먹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아이는 아차 싶었다.
‘바보.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 주신다고 해도 그렇지. 공작 부인 앞에서 이렇게 추잡하게 밥을 먹으면 어떡해.’
아이는 자애롭기 그지없던 공작 부인이 제게 오만 정이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정신도 차렸고, 배도 채웠으면 이제 나가라고 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번에도 페르니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기운이 났으면 좀 씻을까?”
“예?”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금세 제 꼴이 어떤지 깨달았다.
누군가 옷을 갈아입혀 깨끗한 잠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더러운 몰골인 건 여전했다.
손톱에는 새까만 때가 덕지덕지 껴 있었고, 몸에서는 찌든 냄새가 났다.
제대로 자르지 못해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은 먼지로 뒤엉켜 있었다.
아이는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에, 깨끗한 침대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넋을 놓고 편안하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 더러워진 이불은 빨고 갈게요. 오, 옷도요.”
그 말에 페르니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밤새 열이 나서 땀이 많이 났거든. 찝찝할 테니 씻으라고 한 거야.”
“…….”
“뭐, 건강상의 이유도 있긴 하지만. 아이에게 청결은 중요하니까.”
그러더니 페르니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 어서 씻자. 따듯한 물을 듬뿍 받아 놨단다.”
* * *
아이는 쭈그려 앉아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혼자 있기에 너무도 커다란 욕조에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욕조의 물은 온몸이 나른해질 만큼 따뜻했다.
‘기분 좋아.’
거리에서 자란 아이는 이렇게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한 게 처음이었다.
북부는 1년의 대부분이 겨울이니까.
여름에야 숲속에 있는 호수에서 이따금 물장구를 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계절은 씻을 엄두도 못 냈다.
‘아까는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아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를 욕조로 안내한 페르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만세!]아이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들었다. 그 틈을 타 페르니아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윗옷을 벗겼다.
아이는 당황한 얼굴로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뭐, 뭐하시는 건가요?]페르니아는 눈을 깜빡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뭐긴. 씻겨 주려고 그러지.] [네?] [자, 바지도 벗자.]충격적인 말에 아이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괘, 괜찮아요!]누군가 저를 씻겨 주는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게다가 처음 보는 귀부인에게 알몸을 보이다니.
아무리 자신이 8살밖에 안 된 꼬마라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괜찮기는. 어린아이가 혼자 씻는 건 힘들잖아.] [하, 하지만 전 남자아이인걸요!]아이는 긴 머리카락과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여자아이로 오인받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페르니아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에 페르니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런데 그게 왜?]자신이 남자아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우물거렸다.
다행히 페르니아는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아쉬운 얼굴로 입을 삐죽였을 뿐.
[알겠어. 그럼 필요하면 부르렴.]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이는 물에 얼굴을 반쯤 담그고는 생각했다.
‘마님은 엄청 특이한 분이신 것 같아.’
아이는 금방 욕실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커다랗고 화려한 욕실을 저 혼자 쓴다는 게 눈치 보였다.
아이가 욕실을 나오자마자 새까만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며 아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던 페르니아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보자.”
그녀는 아까 말한 대로 아이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 비눗방울이 남아 있지 않은지. 귓등은 잘 닦았는지.
“아~”
아이가 동그랗게 벌린 입 속까지 본 후에야 그녀는 흡족한 듯 웃었다.
“혼자서도 야무지게 잘 씻었네.”
그러더니 그녀는 제 앞에 아이를 앉히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아이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페르네아의 체온에 눈을 꾹 감았다.
‘뭐, 뭐야? 왜 마님이 나 같은 애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있는 거지?’
그러나 아이의 마음도 모른 채 페르니아는 살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어쩜 이렇게 반짝반짝할까. 꼭 아침 이슬이 맺힌 거미줄 같아.”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칙칙한 머리 색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어 보았지만.
아이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작은 얼굴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공작 부인의 충격적인 행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라고요?”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페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말로는 밖에서 오래 지내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하더라. 영양 상태도 좋지 않고. 며칠간 푹 쉬고 잘 먹어야 한대.”
“…….”
“무엇보다 지금 밖은 큰 눈보라가 치고 있거든. 이런 날씨에 나갔다가는 큰일 나. 그러니까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렴.”
그렇다고 이름도 모르는 거리의 아이를 성에서 지내라고 하다니.
아이는 도대체 공작 부인이 제게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제가 불쌍해서인가요?’
‘아니면 공작 부인의 지나가는 변덕인가요?’
어떤 것도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이유였건만, 아이는 어떤 이유라도 괜찮았다.
장작불이 타고 있는 방은 너무나 따스했고, 제가 입은 옷에서는 좋은 향이 났으며, 무엇보다…….
“씻으니까 더 예뻐졌어.”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는 공작 부인이 좋았다.
이렇게 순수하고 따스하게 저를 맞아 준 사람은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이는 그녀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단 며칠이라고 해도.
아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꾸벅였다.
“가, 감사합니다, 마님.”
어찌나 머리를 깊게 숙였는지 아이의 작은 머리통이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페르니아는 인사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그녀는 아이를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성에서 일하는 하인이 아니잖아. 굳이 말하면 내가 데리고 온 손님이지. 그러니까 마님 같은 호칭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편이 어떨까?”
“이름이요?”
“그래. 페르니아라고 말이야.”
말도 안 돼.
아무리 배운 것 없는 자신이라도 알 건 알고 있었다.
감히 저 같은 하층민이 공작 부인의 존함을 부르다니.
그러나 페르니아의 초록색 눈동자는 진심 같았다. 농담을 하는 것도,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그렇게 할게요. 페르니아 님.”
페르니아는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을 모르네. 이름이 뭐니?”
“…….”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후 아이가 수줍게 대답했다.
“……로즈라고 해요.”
로즈의 두 뺨이 장미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그날 밤, 로즈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폭신한 이불과 좋은 향기, 그리고 가득 찬 배 덕분에 당장이라도 잠들기 충분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꿈인가?’
그러나 볼을 꼬집어 쭈욱 늘려 보니 꿈이 아니었다.
“아파.”
얼얼해진 볼을 붙잡고 눈을 찡그리는 로즈를 향해 다가온 까만 고양이가, 둥그런 앞발로 로즈를 꾹 눌렀다.
‘바보짓 그만해야옹.’
이라는 듯이.
새까만 고양이가 로즈의 옆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렸다.
하아암- 하고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은 고양이를 보며 로즈는 중얼거렸다.
“깜깜아. 설마 너 나를 위해 마법이라도 부린 거니?”
고양이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 로즈의 손에는 빵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하루 종일 동냥을 해서 얻은 돈으로 겨우 산 빵이었다.
둥그런 빵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냐-]어디선가 나타난 새까만 고양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로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첫 끼인데.
나 혼자 먹기에도 이 빵은 너무 작은데.
하지만 다시 한번 고양이가 냐, 하고 우는 순간 로즈는 쭈그려 앉아 고양이에게 빵을 한 조각 나눠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까만 고양이와 로즈는 거리에서 종종 마주쳤고, 그때마다 로즈는 뭐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고양이에게 나눠 주곤 했다.
고양이는 마녀의 사랑을 받는 마법의 힘을 가진 동물이라지. 그렇다면 오늘의 기적 같은 일은 이 아이가 제게 준 선물이 아닐까.
로즈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내가 쓰러졌을 때 깜깜이가 마님, 아니 페르니아 님을 불러와 준 건 사실이니까.”
로즈는 페르니아를 떠올렸다.
거리의 아이인 로즈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카르디엔 공작 부인.
악마의 힘을 가진 공작님이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내.
황제도 두려워한다는 무서운 공작님이 부인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작님만큼 공작 부인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악마의 힘을 가진 자를 호령하는 여인이니 분명 무시무시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봄날의 햇볕처럼 따뜻한 분이었어.”
무엇보다 페르니아는 로즈의 붉은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경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너무나 기뻤다.
로즈는 까만 고양이의 발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깜깜아, 어떡하지. 눈보라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분 곁에 있을 수 있을 테니까.
* * *
아침이 밝았다. 로즈는 쪼르르 달려가 창문부터 살펴보았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 로즈가 성 밖으로 쫓겨날 일은 없을 것이다. 로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안도한 로즈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뭘 하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혼자 뒹구는 것은 8살 난 아이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깜깜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새 어딜 갔는지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심심한데. 배가 좀 고프기도 하고.’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네, 들어오세요!”
로즈는 페르니아가 들어올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쾅, 하고 터프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12살쯤 되었을까.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로 엄마가 주워 왔다는 애구나? 어떤 앤인지 구경 좀 하러 왔어!”
그 말에 옆에 있던 소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어린 소녀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14살 정도로 막 어린이라는 신분을 벗어난 티가 났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루나.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라고 했지?”
“뭐가 실례야. 사실을 말하는 건데.”
“하여간 기품 없어.”
로즈는 아옹다옹하는 소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녀들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녀들은 청보라색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즈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설마…….’
로즈를 향해 두 소녀가 말했다.
“반가워. 나는 유리아나 카르디엔. 카르디엔 공작가의 장녀란다.”
“루나 카르디엔. 카르디엔 공작가의 차녀야.”
설마가 맞았다!
두 소녀는 카르디엔 공작 부부의 두 딸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녀들은 또래의 소녀와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위압감이었다.
그래서 로즈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로즈는 작은 얼굴을 바닥을 향한 채로 말했다.
“로, 로즈라고 합니다.”
“로즈?”
루나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루나!”
유리아나가 버릇없는 동생을 힐난했지만, 루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남자애 이름이 로즈라니 웃기잖아.”
까르르 웃는 루나의 모습에 로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로즈는 이 말을 해도 되나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 제 눈이 붉은색이라서…….”
“……뭐?”
“붉은색 중에 가장 예쁜 것을 찾아 지은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놀리지 말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짠 것이 느껴졌다. 꼭 모은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
그제야 루나는 웃음을 멈췄다. 유리아나도 조금 놀란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루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루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왜, 뭐.” 하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생각보다 괜찮은 뜻을 가진 이름이네.”
이름을 칭찬해 준 사람은 페르니아 이후 두 번째였다. 어젯밤 페르니아도 로즈의 이름이 참 예쁘다며 웃었다.
그때를 떠올린 로즈의 얼굴이 조금 더 빨개졌다.
로즈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루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묘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 엄마 말로는 누군가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은 채로 발견됐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야?”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일까.
로즈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은 지 이틀이 지나 로즈의 얼굴에는 상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의사의 치료와 로즈가 가진 치유 능력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루나는 페르니아가 로즈를 성에 데리고 왔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새파란 멍이 들어 있었고, 몸에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끔찍한 폭력의 흔적이었다.
루나는 그것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가 저랬는지 범인을 찾아서 박살을 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실 관계를 따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루나는 로즈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로즈가 먼저 잘못했을 수도 있다.
거리의 아이가 돈을 훔치는 건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랬다고 해도 어린애를 저 모양으로 만든 건 용서가 안 되지만. 개미 똥구멍만큼 참작은 해 줄 수 있지.’
그러나 로즈의 대답은 루나의 이성을 뚝 끊어지게 만들었다.
“제가 가진 붉은 눈동자 때문이에요.”
“……뭐?”
루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다. 눈을 내리깐 로즈가 손가락을 주물거리며 말했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마을에 있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장 떠나라고요.”
“…….”
“…….”
그 순간 루나도, 유리아나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작 성에서 온실 속의 꽃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아버지는 악마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고, 사람들에게 붉은 눈동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성 바깥의 인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맞았단 말이야?”
루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불꽃같은 기세에 로즈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 바보야, 왜 사과를 해! 억울하다고, 당장 그놈을 찾아내서 목을 잘라 달라고 말해야지.”
어린 소녀가 내뱉기에는 너무 끔찍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옆에 있던 유리아나는 말리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런 자들은 그냥 두어서는 안 돼. 당장 수배를 내려 잡은 후에 삼대를 멸해 줘야지.”
“네?”
“그자의 인상착의가 어땠니?”
“그, 그게 생각이 안 나요. 죄송합…….”
루나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 좀!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 진짜 듣기 싫거든?”
“죄, 죄송합…… 아.”
로즈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로즈는 다시 죄송하다는 말이 나갈까 두려운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려진 입 위로 동그란 눈동자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잔뜩 겁먹은 토끼 같았다.
루나는 그런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사자 같았고.
씨익씨익 콧김을 내뿜는 루나를 바라보며 유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해, 루나. 로즈가 놀랐잖아.”
“하지만 답답하잖아, 언니! 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꾸 사과를 하냐고.”
루나는 아직 어린 데다 단순했다. 그래서 유리아나가 아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유리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꾸짖듯 말했다.
“저 아이는 곁에 지켜 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랐으니까. 세상에 제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저게 당연한 거야. 너처럼 하나하나 화내고 따졌다가는 살아남지 못했을 테지.”
열네 살의 귀족 영애로서는 꽤나 어른스러운 통찰력이었다.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로즈는 유리아나의 말에 감동받은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루나는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너.”
“네?”
루나는 로즈의 손을 잡아챘다. 남자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는 손목에 눈썹을 찡그리며 루나가 소리쳤다.
“교육이 필요하겠어!”
* * *
로즈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을 다녀 본 적은 없지만 교육 비슷한 것을 한 번 받아 본 적이 있었다.
열렬한 신의 추종자였던 한 여인에게서였다.
그녀는 어린 로즈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아. 불쌍한 아이구나. 매일 신께 기도드리면 저주를 풀어 주실 거야.]로즈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따랐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너무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어 온몸이 저릿하고 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로즈의 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여인의 얼굴이 변했다.
[악마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평범한 기도로는 신께 용서받기 부족한 거야. 네게는 더 강한 방법이 필요하겠다.]여인의 손에 들린 것은 신의 문양이 그려진 단검이었다. 여인은 머리 위로 검을 들며 말했다.
[눈알을 모두 베어 내면 저주가 풀릴 거야.]여인의 눈빛에 어린 것은 선연한 광기였다.
로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다행히 그 후로 여인을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로즈의 기억 속에 있는 교육의 전부였다. 로즈에게 교육이란 강압적이게 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즈는 루나의 말이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교육을 한다는 걸까.’
잠시 후, 루나의 손에 이끌려 로즈가 도착한 곳은 드넓은 홀이었다.
루나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금방 준비해 올 테니까.”
잠시 후 나타난 루나는 몸에 착 달라붙는 팬츠에 하얀 셔츠 차림이었다. 그리고 양손에는 어린아이에 맞게 제작된 듯한 목검을 쥐고 있었다.
‘뭐, 뭐지?’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 로즈를 향해 루나가 말했다.
“여긴 내 전용 훈련장이야. 나는 검술을 배우고 있거든.”
그러더니 루나가 왼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로즈를 향해 던졌다. 로즈는 어정쩡한 포즈로 목검을 받았다.
그것을 본 루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히 운동 신경이 나빠 보이지는 않네.”
그녀의 말대로였다. 로즈의 신체 능력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로즈는 여린 외모와 달리 보통 사람보다 발도 빠르고 힘도 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루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루나가 말했다.
“붉은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널 건드는 건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야. 그들은 네가 약하니까 우습게 보는 거라고.”
“…….”
“제대로 힘을 길러서 보여 주면 누구도 너를 우습게 보지 못할 거야. 네가 붉은 눈동자를 가졌든, 악마이든 말이야.”
루나가 손에 쥔 목검을 로즈를 향해 뻗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널 강하게 만들어 줄게. 검에는 자신 있으니까!”
거만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루나는 아빠의 재능을 이어받아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12살의 나이인데도 엔간한 성인 남성은 손쉽게 박살 낼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새 훈련장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한 유리아나가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가르치는 건 쥐약이지. 루나는 바보니까.’
루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로즈를 향해 말했다.
“그럼 덤벼!”
로즈는 황당했다.
갑자기 이런 곳으로 끌고 와서 덤비라니. 게다가 로즈는 이런 목검을 쥐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 아가씨. 전…….”
로즈는 울먹이는 얼굴로 루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가차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토끼 같은 얼굴 하지 말란 말이야. 중요한 건 기선 제압. 처음부터 날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건드는 놈들이 반은 줄어든다고.”
대신 날 죽이려는 놈들도 반쯤 많아지겠지만. 상관없다.
“다, 없애 버리면 되니까.”
어느새 다가온 루나가 로즈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 * *
놀랍게도 로즈는 루나의 공격을 피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이었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내가 너무 봐줬나?’
루나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으앗!”
이번에도 로즈는 루나의 검을 피했다.
다음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루나가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너, 뭐야? 지나가던 사람한테는 형편없이 얻어터졌다고 했잖아!”
로즈가 루나의 검을 가까스로 피하며 울먹거렸다.
“하, 하지만 그 사람한테 맞는다고 죽을 것 같진 않았는걸요.”
그런데 루나의 검은 아니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휘두르는 목검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신체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로즈라 해도, 저 검에 맞는 순간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다.
로즈가 히잉 울면서도 요리조리 피하자, 루나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게, 정말.”
참고 있던 힘이 폭발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루나의 검이 로즈를 향했다.
‘맞는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로즈가 눈을 꾹 감았다.
찰나의 순간 날아오는 검에 머리통을 맞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그러나…….
토옥.
루나의 검은 로즈의 머리통을 솜털처럼 가볍게 쳤을 뿐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로즈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눈을 떴다.
목검을 쥔 루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로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뭐야? 설마 내가 널 죽이기라고 할 줄 알았어?”
“네.”
저도 모르게 대답한 로즈는 흡 하고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루나가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랬단 말이지. 지금이라도 죽여 줄까?”
“죄, 죄송합니다.”
“너, 또…….”
꾸벅거리는 로즈를 향해 루나가 다시 한번 화를 내려던 찰나, 유리아나가 나섰다.
“이제 그만해, 루나.”
“하지만 언니. 저 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오랫동안 몸에 밴 버릇이 쉽게 없어질 리가 있니. 너도 여전히 제멋대로 굴며 사람을 괴롭히잖아.”
“뭐?”
루나의 눈빛이 매서워졌지만, 유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오늘 일을 엄마가 알면 분명 엄청 혼낼걸?”
“……!”
그제야 루나의 붉은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나!]엄마는 무서웠다. 제국의 반을 날려 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아빠보다 훨씬 더.
루나는 재빨리 로즈의 손에 있던 목검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로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일은 우리만의 비밀이야.”
루나는 불안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알겠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고양이 같은 반짝이는 눈동자와 치켜 올라간 눈썹은 새침하고 귀여웠다.
로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훈련도 끝났으니 밥 먹으러 가자.”
“저, 저도 같이요?”
“그래. 굳이 따로 먹을 이유가 없잖아.”
거침없는 루나의 말에, 유리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말라니까. 로즈의 의견을 들어 봐야지.”
그러더니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구부려 로즈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랑 같이 먹어도 좋지만, 혼자 먹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돼. 어떻게 하고 싶니?”
혼자 먹고 싶다고 했다가는 루나가 다시 한번 아기 호랑이처럼 돌변해 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로즈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루나가 씨익 웃으며 로즈의 손을 잡았다.
루나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래서 로즈의 얼굴에 살짝 열이 올랐다.
* * *
세 사람의 식사는 녹록지 않았다.
적어도 로즈에게는 그랬다.
루나가 옆에서 자꾸 잔소리를 해 댔기 때문이다.
“이렇게 깨작깨작 먹으면 어떻게 해. 팍팍 먹어야지.”
루나는 식탁 위에 있던 모든 고기 음식들을 종류별로 로즈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고기를 많이 먹어야 돼. 그래야 기운이 난다고.”
유리아나가 한숨을 내뱉었다.
“로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같이 육식동물인 건 아니야.”
“풀떼기만 먹는 언니는 조용히 해.”
자매의 아옹다옹하는 말다툼 속에서 로즈는 열심히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유리아나와 루나는 사라졌다. 가정 교사와의 수업 때문이었다.
루나는 로즈에게 목검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나 없는 동안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 돌아와서 확인할 테니까.”
무서운 말이었다.
그래서 로즈는 시키는 대로 방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얍, 얍.”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던 로즈는 동작을 멈추었다.
저를 향한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왔는지 방에 들어온 깜깜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냐옹.”
웃기는 짓을 하고 있구나, 라는 눈빛이었다.
로즈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루나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로즈를 찾아와 검술 훈련을 강행했다.
잠시 후 유리아나도 놀러 왔다. 그녀의 손에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모처럼 놀 사람이 세 명이나 있는데 게임을 해야지.”
루나가 하,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 얜 겨우 8살이야. 꼬맹이가 무슨 카드 게임을 해.”
라고 비웃었건만…….
“로즈, 잘하는구나. 이번에도 2등이야.”
유리아나의 감탄에 로즈가 수줍게 웃었다.
“운이 좋았어요.”
“운이라니. 카드 게임에서 운은 플러스알파일 뿐, 중요한 건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가냐인 걸. 나이보다 훨씬 영특한 편이야.”
“가, 감사합니다.”
로즈가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끝내 로즈를 이기지 못하고 부동의 꼴찌가 된 루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를 으득거렸다.
“인정할 수 없어! 다시 해!”
그렇게 카드 게임으로 또 한나절을 보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루나는 결국 로즈를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 유리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호호 웃었다.
“루나. 너는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잖아.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뭐라고? 그게 동생한테 할 소리야?”
“진실을 말한 것도 죄니?”
“이게 진짜.”
“뭐, 이게?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붙들고 데굴데굴 구를 것처럼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로즈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껏 안절부절못했다.
‘어,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격돌하려는 자매를 말린 건 페르니아의 목소리였다.
“너희들 지금 남의 방에서 뭘 하는 거니.”
막 방으로 들어온 엄마를 향해, 루나가 먼저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엄마. 글쎄, 언니가 나보고 자꾸 바보라고 하잖아.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어머니. 루나야말로 언니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어요.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언니를 이거라고 부르는 건 잘못된 거잖아요.”
페르니아는 서로 제 편을 들어 달라는 자매에게 답해 주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어떤 상황인지 더 자세히 들어 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너희들 때문에 로즈가 겁에 질려 있다는 거.”
그제야 유리아나와 루나의 시선이 로즈를 향했다.
로즈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창백해진 얼굴이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그제야 두 사람은 토끼 같은 아이 앞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유리아나가 먼저 사과했다.
“미안해, 로즈. 널 놀라게 할 셈은 아니었는데.”
루나도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우리들만의 커뮤니케이션 같은 거랄까. 그러니까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
뚝.
유리아나와 루나의 눈이 커졌다.
로즈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로즈는 당황한 얼굴로 눈물을 닦았다.
“아, 죄, 죄송해요. 아, 안심이 돼서.”
“…….”
“…….”
“두, 두 분이 심각하게 싸우는 줄 알고 많이 놀랐어요.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눈물을 훌쩍이며 배시시 웃는 남자아이라니.
페르니아와 두 딸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귀엽잖아!’
페르니아는 로즈를 꽉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두 딸에게 말했다.
“아무튼 시간도 늦었으니 둘 다 방으로 돌아가렴. 하녀들이 잠자리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유리아나와 루나는 조금 더 놀다 가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벌써 9시가 넘었기 때문이다.
‘8살밖에 안 된 꼬맹이는 자야 할 시간이지.’
‘암. 그래야 키가 쑥쑥 크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순순히 대답을 했다.
“알겠어요.”
두 사람은 페르니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로즈의 곁으로 다가갔다.
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로즈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
로즈의 양쪽 볼에 각각 두 사람이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유리아나와 루나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잘 자, 꼬맹아.”
어쩐지 로즈는 펑, 하고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두 소녀가 나간 후 로즈의 방에는 페르니아만 남았다.
그녀는 손수 로즈의 잠자리를 봐 주었다.
페르니아는 로즈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일이 바빠 오지 못했단다. 혼자 뭘 할지 걱정을 했는데 딸들과 잘 지낸 모양이더구나.”
“네. 두 분이 정말 잘 대해 주셨어요.”
장미꽃처럼 뺨을 물들인 로즈를 바라보며 페르니아가 웃었다.
두 딸은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꼬리를 살랑이는 온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이 첫날부터 이렇게 관심을 보이다니.’
페르니아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역시 내 딸들은 보는 눈이 있어.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 단번에 알아보거든.”
“예?”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즈를 향해 페르니아가 말했다.
“나도, 그 애들도 네가 좋다는 말이야.”
“……!”
로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꼭 가을날의 잘 익은 사과 같았다.
너무 놀라운 말이라 로즈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못 했다.
페르니아는 그런 로즈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으며 작은 가슴 위를 토닥였다.
“어서 자렴. 시간이 많이 늦었어.”
“네.”
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바로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작은 요정이 몸속에 들어와 심장을 마구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 * *
그 후로 로즈는 나름 바쁘게 지냈다.
오전에는 루나에게 검을 배웠다. 피하기 급급했던 첫날과 달리 이제는 루나의 검을 막을 수 있었다.
검과 검을 맞대고 있을 때 루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꼬맹이가, 건방지게.”
험악한 말과는 달리 루나의 눈빛에는 로즈를 한껏 대견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흡사 걸출한 재능을 지닌 제자를 보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에는 늘 화를 냈다.
“그러니까 왜 지금 공격을 하지 않는 거냐고! 나한테 한 방 먹일 기회였잖아!”
“죄, 죄송해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루나 님이 다치잖아요.”
“뭐? 너 같은 초보자에게 이 루나 님이 다칠 것 같아?”
“죄, 죄송…….”
“그놈의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말랬지!”
루나는 잔뜩 열 받은 얼굴로 로즈의 머리통을 콩 쳤다. 제법 힘이 들어간지라 로즈는 머리통을 감쌌다.
천진한 얼굴로 머리를 매만지는 로즈를 바라보며 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은 충분한데. 너무 순해.’
저런 성격으로는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히기엔 무리였다.
다른 사람의 공격을 막을 만한 수비 능력을 갖추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루나가 중얼거렸다.
“뭐, 그걸로 충분하려나.”
꼬맹이를 괴롭히는 놈은 내가 응징해 주면 되니까.
루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리아나와 루나가 수업을 하러 간 후에는 로즈만의 시간이었다.
로즈는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로즈는 어느새 성의 하인들과 많이 친해졌다. 로즈는 여기저기 다니며 하인들을 도와주었다.
주로 짐을 나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일을 돕겠다는 로즈를 보고 하인들은 손사래를 쳤다.
콩알만 한 아이에게 무슨 도움을 받느냐고.
그러나 로즈가 어른도 버겁게 드는 바구니를 번쩍 드는 순간 하인들은 생각을 바꾸었다.
‘붉은 눈은 붉은 눈이구나.’
로즈 또한 그들이 모시는 공작가와 비슷한 괴물, 아니 종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두 아가씨에게 보기 힘들었던 해맑은 성격이었다.
“더 도울 게 있나요?”
“아니, 이만하면 됐어. 고맙다, 로즈.”
간단한 인사에도 로즈는 기쁘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되레 부끄러워질 만큼.
오후가 되면 수업을 마친 루나와 유리아나를 다시 만났다.
카드 게임을 한 것은 단 며칠뿐이었다. 요즘 로즈는 유리아나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다.
유리아나는 로즈가 쓴 글씨를 보며 손뼉을 쳤다.
“익히는 속도가 정말 빨라. 며칠이면 루나보다 훨씬 수준이 높아지겠는걸.”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이제 막 글을 배운 애랑 내가 같을 리가 없잖아.”
“그럼 받아쓰기라도 한번 해 볼까?”
“언니 미워!”
아무래도 루나는 글쓰기에는 젬병인 모양이었다.
또다시 아옹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로즈는 웃었다.
이제는 자매가 싸우는 모습을 봐도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는 이 모습이 일상인 걸 알았기 때문에.
두 사람과 함께 있는 건 무척 즐거웠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야.’
멸시와 비난, 외로움이 익숙했던 로즈에게는 무척 낯선 감정이었다.
그러나 결코 싫지 않았다.
밤이 되면 페르니아가 로즈의 방으로 왔다.
“자, 이제 잘 시간이란다. 다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유리아나는 아쉬운 얼굴로, 루나는 불만이 있는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싫다고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어린아이의 수면 시간은 중요한 것이니까.
‘가뜩이나 로즈는 또래보다 훨씬 작잖아. 쑥쑥 클 필요가 있어.’
그래서 유리아나와 로즈는 굿 나잇 인사를 하고 순순히 방을 나왔다.
페르니아는 로즈의 이부자리를 살펴 주었다. 그녀가 제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고 가슴을 토닥여 줄 때마다 로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즈가 얼굴의 반을 이불로 덮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르니아 님.”
“응?”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 뭐가 궁금하니?”
로즈가 두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게 왜 그렇게 잘해 주세요?”
“…….”
사실 그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페르니아가 제게 잘해 주는 이유가 동정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감사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한 건 이유를 알고 노력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라고 하시면, 거리 생활이 너무 힘드니 조금 더 이곳에 있게 해 달라고 부탁드릴 거야. 무슨 일이라도 열심히 하겠다고.’
그러나 페르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로즈. 너는 그 사람을 많이 닮았거든.”
“그 사람이요?”
“그래. 내 남편 말이야.”
로즈의 두 눈이 커졌다.
유리아나와 루나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기는 했다.
[넌 아빠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 아빠도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거든.] [정말이요?] [그래. 물론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야. 아빠는 인간계에서 비교할 자가 없는 엄청난 미남이거든. 너같이 동그란 복숭아처럼 생긴 녀석과는 전혀 다르다고.]라고 했었다.
그래서 로즈는 페르니아에게서 제가 카르디엔 공작과 닮았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페르니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만이 아니야. 눈빛이 많이 닮았어. 그 사람도 너처럼 맑고 여리단다.”
제가 말해 놓고도 페르니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대한 북부의 지배자. 악마의 힘을 가진 카르디엔 공작이 맑고 여리다니.
그것은 흉악한 사자가 사실은 잎이 여린 당근을 좋아한다는 말만큼 어이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그 말을 들으면 불신에 가득 찬 얼굴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로즈의 얼굴에는 조금의 의심도 머물지 않았다.
로즈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군요.”
“……내 말을 믿는 거니?”
로즈는 조금의 의심 없는 얼굴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공작님과 닮은 점이 있다니 기뻐요.”
배시시 웃는 로즈를 바라보며 페르니아는 눈썹을 내렸다.
‘어쩜 저렇게 예쁜 말을 하지?’
로즈는 영특하면서도 순수했다. 홀로 매몰찬 세상을 살았음에도 티 하나 묻지 않고 맑았다.
아이는 제게 마음을 연 상대에게 서슴없이 마음을 열었다.
그래서일까.
페르니아는 로즈에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갔다.
그건 단순히 루시안을 닮았다든가, 험난하게 사는 아이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선 것이었다.
페르니아는 로즈의 가슴 위를 토닥이며 생각했다.
‘루시안이 돌아오면 로즈에 대해 제대로 말해야겠어.’
* * *
며칠 후, 무섭게 내리던 눈보라가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로즈는 생각했다.
‘오늘 페르니아 님께 말씀드리자.’
저를 성의 하인으로 써 달라고.
건방진 말인 것은 알고 있었다. 거리의 아이가 감히 공작가의 일꾼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니.
하지만 필사적으로 청해 볼 생각이었다.
‘저는 힘도 세고, 조금만 더 배우면 글도 읽고 쓸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니 분명 쓰실 데가 많을 거예요. 따로 급여를 주지 않으셔도 되고요.’
성에만 있게 해 주시면 돼요.
평소라면 이런 뻔뻔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로즈는 이대로 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곳에 있고 싶었다.
애정이 넘치는 공작 부인과, 똑똑하고 씩씩한 두 명의 아가씨가 있는 이곳에.
이토록 강렬한 바람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냐옹.”
로즈를 바라보고 있던 깜깜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힘내, 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로즈는 깜깜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로즈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페르니아가 있는 곳을 물었다.
“마님께서는 지금 남쪽 온실에서 물을 주고 계신단다.”
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쪽 온실을 향했다. 며칠간 여기저기 성을 둘러본 덕에 길이 익숙했다.
남쪽 온실은 특수한 마법이 걸린 유리로 만들어진 곳으로, 추운 겨울에도 온갖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다.
온실에 들어서서 페르니아를 찾던 로즈의 눈이 커졌다.
저 멀리 보이는 페르니아의 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선명한 붉은 눈동자.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얼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카르디엔 공작님!’
로즈는 루시안을 본 적이 처음이었다.
로즈가 머무른 며칠 동안 루시안이 성을 비웠기 때문이다.
‘오늘 돌아오셨구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일단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건 그는 이 성의 주인이었고, 로즈는 며칠이나 이곳에 신세를 진 손님이었다.
그러나 로즈는 섣불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루시안의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페르니아도, 유리아나도, 루나도, 카르디엔 공작가의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기가 셌지만, 루시안은 차원이 달랐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랄까.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이나, 산처럼 거대한 호랑이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로즈는 어쩐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런 분이 나랑 닮았다니, 말도 안 돼.’
공작님을 닮았다는 말을 듣고 좋다며 생글거렸던 것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때, 페르니아가 루시안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루시안. 편지로 이야기했죠. 지금 성에 머무르고 있는 아이 말이에요.”
거리가 꽤 멀었지만 로즈는 페르니아의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보통의 사람보다 뛰어난 청각 덕분이었다.
‘설마 내 얘기인가?’
루시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아. 이름이…… 로즈였던가요.”
세상에.
로즈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입을 막았다.
‘공작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작은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페르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 데리고 온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유리아나와 루나도 푹 빠져 있을 정도로요.”
“알아요. 유리아나와 루나가 쓴 편지에 온통 그 아이 이야기뿐이었으니까요.”
운동 신경이 좋으면서도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게 귀엽다.
처음 글을 배워서 그런지 더듬더듬 읽는 모습이 귀엽다.
무슨 말을 해도 바보처럼 헤실 웃는 게 귀엽다.
뭐든 ‘귀엽다’로 종결이 되는 내용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빠져 있다니.]루시안은 처음으로 소중한 두 딸의 편지를 불태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페르니아는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내려 웃었다.
루시안이 성을 떠나는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을 먹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노한 루시안은 편지와 함께 대륙을 불살라 버렸을지도 모른다.
페르니아가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안. 나 그 애가 신경 쓰여요. 계속 그 애를 돌봐 주고 싶어요.”
“…….”
“그래도 될까요?”
따스한 온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그러나 로즈의 심장만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너무 커서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로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페르니아가 먼저 저런 말을 해 주다니.
내가 이 따뜻한 곳에 있어도 된다니.
꿈같은 이야기였다.
잠시 후, 유리알처럼 맑으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루시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과 아이들이 그 아이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 충분히 알았어요. 하지만 내게 그 아이는…….”
로즈는 숨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루시안은 잔혹하게 말을 이었다.
“허락도 없이 나의 성에 스며든 불쾌한 존재일 뿐이에요.”
콩콩 뛰던 로즈의 작은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 * *
툭, 툭.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험난한 인생이었지만 로즈는 눈물을 흘린 적이 많지 않았다. 눈물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어 봤자 로즈에게 가해지는 건 재수 없다는 욕설과 매질뿐이었다.
그래서 로즈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닦았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라는 듯.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유리아나와 루나가 로즈의 방을 찾아왔다.
루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오늘 아빠가 돌아왔거든. 아빠랑 인사를 나누느라 좀 늦었어. 시간이 늦어서 검술 연습은 못 하겠네.”
유리아나가 잘됐다는 듯 말했다.
“매일매일 그런 지옥 훈련을 하다가는 몸이 상하고 말 거야. 아니면 끔찍한 근육 덩어리가 되어 버리든가.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좋아.”
그러더니 유리아나는 테이블 위에 알록달록한 케이크를 잔뜩 늘어놓았다.
“오늘은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면서 수다나 떨자.”
카르디엔 공작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유리아나와 루나는 로즈와 노닥였다. 로즈는 빙긋이 웃으며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진 후, 유리아나와 루나는 로즈의 볼에 굿나잇 키스를 했다.
“잘 자.”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인사였다.
로즈도 살짝 붉어진 얼굴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유리아나는 로즈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한 루나를 끌고 나갔다.
쿵.
문이 닫힌 후, 방 안에는 로즈 혼자 남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벅적거렸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로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뽀송뽀송한 이불이 덮인 침대. 따뜻한 물과 곰 인형이 놓인 작은 테이블. 바닥에 깔려 있는 화사한 카펫.
따뜻하고 예쁜 방이었다.
로즈는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곳은 내 집이 아니야.”
결코 욕심내서는 안 되었다.
방도, 사람도, 그 어느 것도.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로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로즈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성의 분위기가 달랐다.
성의 주인인 카르디엔 공작이 돌아와서였다. 하인들은 실수라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부쩍 경직되어 있었다.
페르니아도 로즈를 찾아오지 않았다.
유리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아마 오늘은 어머니가 오지 않으실 거야.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랑 할 말이 많으신 모양이거든.]루시안의 페르니아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과 집착을, 어린아이에 맞추어 순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즈는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분명 나 때문일 거야.’
페르니아는 로즈를 성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고 했고, 카르디엔 공작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치열하게 의견이 대립했을 것이다.
로즈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 꽁꽁 언 몸으로 쓰러진 어린 로즈를 거두어 준 사람은 동그란 얼굴의 아낙네였다. 그녀는 밤새 어린아이의 곁을 지켰다.
깨어난 로즈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도 그녀의 따스한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다.
빙긋 웃는 그녀는 꼭 천사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등장한 순간 상황이 바뀌었다. 남편은 험악한 얼굴로 로즈를 노려보았다.
[깨어났으니 됐잖아. 어서 저 악마 놈을 집에서 내보내.]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거세졌고, 그녀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쫘악.
남편이 여인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는 순간, 로즈는 그곳을 뛰쳐나왔다.
로즈는 그때를 떠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런 건 싫어.’
얼음보다 차갑고, 악마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카르디엔 공작.
아무리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기로 유명한 자라 할지라도, 제가 싫어하는 말을 늘어놓는 아내에게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로즈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을 떠나는 것.
카르디엔 공작이 돌아와서인지, 그날따라 성은 어두웠고 복도를 거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로즈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거대한 성을 나올 수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도 쉽게.
성 밖에 선 로즈는 처연한 얼굴로 성을 바라보았다.
안에 있었을 때보다 성은 고고하며 아름다웠다.
저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것이 로즈에게는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몸을 돌리려던 찰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옹.”
드높은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건 어두운 밤하늘만큼 새까만 고양이, 깜깜이였다.
누구에게도 제 모습을 들키지 않을 줄 알았던 로즈는 당황해 눈이 커졌다.
그런 로즈를 향해 깜깜이가 다시 한번 울었다.
“이야옹.”
‘어딜 가니. 여기는 맛있는 밥도 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있는데.’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로즈는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내 집이 아닌걸.”
“…….”
깜깜이를 데려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깜깜이는 내 고양이가 아닌걸.’
깜깜이는 제 발로 성에 들어와 머물렀다. 나갈 때도 자신이 선택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 깜깜이는 이곳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런 아이를 억지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로즈는 깜깜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너는 작고 귀여우니까, 아무리 냉정한 카르디엔 공작님이라도 성에 머무는 걸 허락해 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로즈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로즈가 돌아간 곳은 원래 자신이 살았던 마을에 있는 작은 폐가였다.
워낙에 흉흉해서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이곳은 로즈의 은밀한 보금자리였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군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즈처럼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거지 떼였다. 그들은 로즈를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붉은 눈깔이잖아.”
같은 길거리 출신이기에 그들은 로즈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호의나 친분 같은 것이 있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서 로즈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마주쳐 봤자 재수 없다고 한 대 맞거나, 악마 새끼라는 욕설만 듣게 될 것이다.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러나 거지 한 명이 내뱉은 말은 로즈의 몸을 멈추게 만들었다.
“저놈, 공작 부인에게 끌려가지 않았나?”
끌려갔다고?
황당한 말에 로즈의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지 떼는 키득거리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야. 공작 부인에게 끌려가서 한껏 예쁨 받을 줄 알았더니 왜 돌아왔을까.”
“예쁨이 너무 과했나 보지. 공작 부인은 붉은 눈을 가진 남자에게 흥분하는 마녀라잖아. 그런 고약한 취향을 가진 마녀가 어떻게 예뻐했겠어. 달군 꼬챙이로 등을 찌르거나 손톱을 뽑았겠지.”
거지들은 추잡한 말을 나누는 걸 좋아했다.
특히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인 카르디엔 공작 부부는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어젯밤 죽은 나나 알지? 사고로 죽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카르디엔 공작이 찾아와 잡아먹었다는군.’
‘그런 악마와 함께 살을 맞대고 살다니 카르디엔 공작 부인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따위의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곤 했다.
길거리 생활을 오래 한 로즈는 알고 있었다.
가진 건 시간밖에 없는 자들이 심심해서 내뱉는 말이야.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상대하지 말고 도망가.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저토록 더러운 입으로 페르니아를 욕하는데.
거지 떼를 향해 몸을 돌린 로즈가 말했다.
“당장 그 입 다물어요.”
“……뭐?”
얌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로즈가 예상과 다른 반응을 하자 거지 떼가 인상을 찡그렸다. 로즈가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쓰레기 같은 말, 그만하라고요. 페르니아 님은 절대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니까.”
거지들이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하, 하고 웃었다.
“페르니아 님? 설마 공작 부인을 말하는 거냐?”
거지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 미치겠네. 진짜 공작 부인한테 예쁨 받다 왔나 봐.”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저 겁쟁이 자식이 편을 들다니. 역시 공작 부인의 붉은 눈깔을 홀리는 기술은 대단해.”
그 말에 로즈의 이성이 날아갔다.
어떤 폭력과 폭언도 묵묵히 감내하던 어린 소년은 사라졌다.
커다란 붉은 눈동자에는 섬뜩한 기운만 남았다.
어린 소년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마지막 말을 내뱉은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도망갈 새도 없이 거지는 로즈의 밑에 깔렸다. 로즈는 거지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작은 주먹이 얼굴에 맞부딪치는 순간 거지의 눈이 새하얘졌다.
제대로 비명도 나오지 않을 만큼 로즈의 손은 매서웠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로즈는 고작 8살의 어린아이였고, 거지는 골격이 다 자란 청년이었다.
신체적인 조건부터 달랐다.
이렇게 맞을 사람은 그가 아니라 로즈여야 했다.
“우윽.”
그러나 아래에 깔려,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하는 사람은 로즈가 아니라 거지였다.
퍼억, 퍼억.
작은 주먹이 지나칠 때마다, 거지의 얼굴은 눈에 띄게 뭉개졌다.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거지들이 뒤늦게 소리쳤다.
“이 악마 자식이, 어딜 감히!”
수십 명의 거지가 로즈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보통 사람보다 힘이 센 로즈라도 열 명이 넘는 어른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퍼억.
거지의 발길질에 작은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세를 잡은 거지들은 작은 몸을 짓밟기 시작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착해 빠진 척하는 얼굴 뒤에 사실은 악마의 힘을 숨기고 있을 줄 알았다고!”
어린 몸에 가해지는 폭력은 매서웠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들에게 달려든 어린아이에 대한 응징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이 아이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붉은 눈을 가진 저주받은 놈이야.
조금만 더 커서, 제대로 된 힘을 가지면 분명 우리에게 보복할 거야.
그때가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작은 악마를 죽여 버려야 해.
“흐읍.”
로즈의 입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온몸이 구타당하는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다.
‘페르니아 님을 모욕했는데, 제대로 혼내 주지 못했어.’
루나 님께 좀 더 열심히 검을 배울걸. 그랬다면 절대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시는 페르니아 님을 모욕하지 않게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꼬맹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앳된 목소리와 달리 험악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내뱉은 사람은 분명 루나였다.
로즈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그러나 루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분노한 얼굴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간 로즈와 훈련할 때 썼던 목검이 아니라 날이 시퍼런 진검이었다.
루나는 이를 으득거리며 말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루나는 포효하는 짐승처럼 거지 떼에게 달려들었다.
로즈의 얼굴이 경악에 가득 찼다.
로즈도 루나가 나이답지 않은 실력자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거지들 중에는 무기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다치기라도 하면…….’
엉망이 된 몸을 일으키려는 로즈를 막은 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들어 올린 로즈는 다시 한번 눈이 커졌다.
로즈의 손을 잡은 사람은 유리아나였다. 유리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상처가 심하니까.”
“…….”
로즈는 그제야 생각했다.
‘아, 꿈이구나.’라고.
그게 아니라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다.
하지만 엉망이 된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은 환상이 아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유리아나가 위로하듯 로즈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잠깐만.”
고개를 든 유리아나가 저쪽에서 신나게 검을 휘두르는 루나를 향해 소리쳤다.
“죽이는 건 안 돼, 루나.”
“뭐, 왜?”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루나를 향해 유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공작 영애가 재판도 없이 검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많으니까. 성으로 데려가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후 제대로 된 형벌을 받는 게 맞아.”
그 말에 루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거지 떼들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 울먹였다.
그러나 그건 뭘 모르는 것이었다.
유리아나는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형벌은 내가 직접 집행할 거야. 더러운 말을 한 혀를 뽑고, 무참한 폭력을 가한 손목을 잘라 주마. 제발 죽여 달라고 두 손을 모아 빌 때까지.”
섬뜩한 말에 거지 떼들은 마치 지옥으로 곤두박질쳐진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루나의 검이 날아들었다.
“형벌은 형벌이고, 회초리는 회초리지!”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루나의 검에 상처를 입은 거지들은 바닥을 뒹굴며 흐으으,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다.
지옥 같은 광경 속에 서 있던 루나는 검을 검집 안에 넣었다.
루나의 얼굴에도 작은 상처가 몇 개 났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서자마자 쪼르르 달려가더니 그새 일을 끝냈구나. 하여간 내 딸들은 성격도 급해.”
익숙한 목소리에, 유리아나의 품속에 안겨 있던 로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저쪽에서 우아하게 걸어오는 이는 분명 페르니아였다.
그녀의 앞에는 새까만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의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를 보며 로즈는 알아챘다.
이곳까지 그녀들을 안내해 준 존재가 바로 깜깜이라는 것을.
로즈의 곁에 다가온 페르니아가 무릎을 꿇었다. 로즈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니, 로즈?”
로즈는 목에 뜨거운 것이 차올라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페르니아가 말을 이었다.
“네가 밤사이 성을 떠나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
“당장 너를 찾으러 가려다 고민을 했어. 네가 스스로 나간 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혹시 성에서 지내는 게 싫었니? 우리가 무언가 너를 불편하게 한 거니?”
이 순간에도 그녀는 로즈에게 서운함이나 괘씸함을 느끼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에 가득한 것은 진심 어린 걱정뿐이었다.
로즈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울면 안 돼.’
페르니아 님은 따뜻한 분이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제 본심을 알아차려 버릴 것이다.
사실은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는 걸. 사실은 따뜻한 성에 머무르고 싶다는 걸.
사실은……, 사실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을.
그때였다.
맑은 목소리가 로즈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 때문인가?”
로즈의 작은 어깨가 흠칫했다.
로즈는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 카르디엔 공작이 서 있었다.
돌처럼 굳어 버린 로즈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너, 어젯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지?”
루시안은 제국 최고의 검사였다. 거리가 좀 있었다 한들, 작은 아이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 그게…….”
로즈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그런 로즈를 향해 루시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했던 말은 사실이야. 나는 내 아내의 애정을 빼앗아 간 네가 싫어. 너를 향한 딸들의 관심 또한 마찬가지지. 나는 감히 내 것을 빼앗아 가려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아.”
“루시안!”
페르니아가 루시안을 혼내듯 소리쳤다.
그러나 루시안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를 내 곁에 두기 싫다는 건 아니야.”
“……네?”
믿을 수 없는 말에, 로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로즈는 처음으로, 아름다운 공작과 얼굴을 마주쳤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멀리서 보았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색이 선명했다.
루시안이 말했다.
“네가 떠난 이유가 내 말 때문이라면 성에 머무르거라.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너를 원하니까.”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내가 허용하는 애정까지지만.”
엄한 목소리였지만, 한순간의 변덕 같지는 않았다.
루시안이 로즈를 허락한 것이다.
로즈는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숨길 수 없는 본심이 튀어 나갔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유리아나와 루나가 야호, 하고 소리치며 로즈에게 뛰어들었다. 두 손을 모은 페르니아도 행복하게 웃었다.
페르니아가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루시안. 어려운 선택을 해 줘서.”
그녀의 웃는 얼굴이 아침 햇살보다 반짝였다. 그래서 루시안은, 페르니아가 원하는 것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를 곁에 두는 것이라 해도.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향해 속삭였다.
“더 칭찬을 해 주세요, 니아.”
밤은 길고, 내일 밤은 더 길고, 이튿날 밤은 더욱 길 테니까.
훅 들어온 야릇한 말에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등을 소리 나도록 때렸다.
* * *
어쨌건 로즈는 다시 카르디엔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전과 바뀐 것이 있었다.
“네? 야, 양자라고요?”
페르니아는 두 손을 모으고는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양자. 오늘부터 너는 카르디엔 공작가의 아들이 되는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로즈는 혼란스러웠다.
‘내, 내가 페르니아 님의 아들이 된다고? 출신도 모르는 거리의 아이인 내가?’
로즈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페르니아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북부를 지배하는 카르디엔 공작 부인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니.”
그리고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히 일어난단다. 악마 공작 가문이 힘겹게 살아가던 귀염뽀짝한 아이를 입양하는 일 같은 건 클리셰 중의 클리셰란 말이지.”
로즈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로즈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가족이 된다는 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잖아.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들어 봐야지.’
누가 나 같은 걸 가족으로 받아 주고 싶겠냐고.
라는 불안함은 기우였다.
유리아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오래전부터 저는 포악한 짐승 같은 것보다 갓 구운 빵처럼 귀여운 동생을 원했으니까요.”
포악한 짐승이라는 말을 듣고 루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내 쪽도 마녀 같은 언니보다는 천사 같은 동생이 가지고 싶었다고.”
두 사람은 서로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다가, 로즈를 껴안으며 말했다.
“어쨌건 우리는 찬성이야.”
로즈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페르니아의 곁에 있던 루시안을 향해서였다.
로즈가 이 성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로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내가 성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해도, 아들이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잖아.’
이번에야말로 카르디엔 공작은 서슬 퍼런 분노를 내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루시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않아도 돼. 나도 동의한 일이니까.”
“저, 정말요?”
로즈는 믿을 수 없었다.
카르디엔 공작님은 그렇게까지 페르니아 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무리한 일까지 이해해 준 것일까?
두 눈을 깜빡거리는 로즈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그녀는 너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모양이더군.”
“……”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네게 주고 싶다고.”
그렇게 애틋한 마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루시안은 로즈를 마주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로즈의 눈동자는 맑았다.
자신과 같은 붉은 눈동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리아나와 루나와도 달라.’
유리아나와 루나의 외양은 페르니아를 많이 닮았으나, 성격은 루시안을 꼭 빼닮았다.
페르니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많이 억눌러지긴 했으나, 어여쁜 소녀들의 안에는 잔혹한 성정이 숨겨져 있었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러나 로즈는 아니었다.
흉악한 짐승들도 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허브처럼, 로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만 해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페르니아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로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텐데, 로즈에게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죽여 버리기는커녕, 아주 조금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개미 똥만큼이었지만.)
루시안은 글썽이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로즈를 보며 생각했다.
‘이런 아이가 곁에 있는 것도 좋겠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두 딸에게도, 혼자 포악한 짐승을 세 마리나 돌보는 그녀에게도.’
무엇보다 로즈는 어린 시절의 루시안과 많이 닮았다.
자신을 닮은 아이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다면 어떻게 될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이 루시안이 로즈를 받아들인 이유였다.
짝! 페르니아가 손뼉을 쳤다.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인 첫날이네. 오늘을 기념하는 파티를 하자.”
유리아나와 루나가 어찌할 바 모르는 로즈의 두 손을 잡고 소리쳤다.
“좋아요!”
로즈의 곁에 있던 깜깜이도 좋은 생각이라는 듯 울었다.
이야옹.
이내 카르디엔 성은 복작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빵 냄새, 고소한 수프 냄새,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성안을 가득 채웠다.
“로즈, 내 옆에 앉아.”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 옆에 앉아야지.”
로즈는 옥신각신하는 누나들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루시안은 그 모습을 얼음 같은 얼굴로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것을 알아챈 페르니아가 잽싸게 루시안의 입 안으로 동그란 포도를 넣어 주었다.
‘나만 신경 써요.’
라는 듯이.
루시안은 입을 우물거리며 순순히 페르니아로 시선을 돌렸다. 페르니아는 잘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악마 공작가에 입양되었습니다,
fin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