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2
7. Dear Pernia
페르니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곧 루시안의 생일이잖아. 오늘부터 생일 파티를 준비해야지. 루시안이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깜짝 파티를 말이야.”
아이 같은 얼굴로 소녀 같은 말을 내뱉는 엄마와 달리 두 딸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유리아나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어머니. 해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아빠 생일 파티를 열어 주고 있잖아요. 냉정하게 말해서 깜짝이라는 말은 이제 빼야 하지 않을까요?”
옆에 있던 루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깜짝은 좀 아니지. 게다가 우리 나이가 몇인데. 이제는 깜짝 생일 파티랍시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척하다가 축하해 주는 것도 민망하다고. 솔직히 유치해 죽겠…….”
그러나 두 딸은 페르니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깨를 흠칫했다.
방금 전까지 호호 웃던 페르니아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딸은 대번에 태세를 바꿨다.
유리아나가 말했다.
“어머니 말이 맞아요. 1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루나도 힘차게 대답했다.
“암! 아빠도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니까. 영혼과 마음을 다해 생일 파티를 준비해야지!”
루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던 로즈까지 끌어들였다.
“그렇지, 로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로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통해 내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카르디엔 공작님의 생일 파티를 연다는 거지?’
로즈는 카르디엔가의 양자로 입적되긴 했지만, 루시안과 페르니아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편해서였다.
페르니아는 로즈의 마음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엄마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 부르라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아니란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서 페르니아는 로즈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로즈. 너도 깜짝 생일 파티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 주렴. 다 함께 준비하는 생일 파티니까 말이야.”
“네. 그럴게요.”
그 말에 페르니아는 배시시 웃었다.
지금 그녀는 거대한 북부의 성에 사는 공작 부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두 딸, 아니 세 아이를 둔 어머니 같지도 않았다.
“으음~ 올해는 뭘 하면 좋을까. 풍선 파티는 작년에 했고, 파자마 파티는 재작년에 했고.”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는 꼭 풋사랑을 하는 소녀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로즈는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두 분은 역시 서로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루시안과 페르니아를 바라보고 있으면 로즈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사랑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기도 했다.
두 눈을 반짝이는 로즈의 생각을 알아챈 듯 유리아나가 속삭였다.
“아니야, 로즈, 우리 부모님은 절대 평범하지 않아. 저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란다.”
루나도 속삭였다.
“그래. 저건 사랑이 아니라…….”
유리아나와 루나가 동시에 말했다.
“팔불출이지.”
* * *
많은 이들의 의견 속에서 페르니아는 올해 루시안의 생일 파티 콘셉트를 결정했다.
바로 ‘모두모두 모여라! 생일 파티’였다.
페르니아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본 지 오래되었으니까 이번 기회에 얼굴을 보면 좋지. 새로 생긴 귀여운 아들도 소개해 주고.”
유리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버지께서 좋아할까요?”
유리아나는 루시안을 잘 알았다. 루시안은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걱정 없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그 사람은 나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상관없는 사람이잖니.”
“……아무렴요.”
루나는 썩은 표정을 했다.
어쨌건 분주하게 생일 파티 준비가 진행됐다.
초대장은 유리아나가 만들었다.
유리아나가 솜씨 좋게 만든 초대장에는 간결한 글씨로 카르디엔 성으로 와 파티를 즐겨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루나는 로즈와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생일날까지 생일 선물이 어떤 것인지는 절대 비밀이야.”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떤 선물을 준비하는지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유리아나는 그런 동생을 향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하여간. 생일 파티가 유치하다고 툴툴거리면서 자기가 제일 열심히 한다니까.”
물론 가장 분주한 건 페르니아였다.
루시안이 성을 나간 틈을 타, 페르니아는 서둘러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오전 중에 준비를 끝내야 하니 시간이 빠듯했다.
가장 먼저 한 건 케이크 만들기였다.
페르니아는 요리에는 젬병이었으나, 루시안의 생일 케이크만큼은 늘 직접 만들었다.
카르디엔 성의 하녀장이자 요리에도 일가견 있는 앤이 페르니아를 도왔다.
페르니아는 미리 그려 둔 케이크 디자인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번 생일 파티의 콘셉트는 꽃이니까, 케이크 위를 꽃 모양으로 장식하면 좋겠어.”
“그럼 초콜릿으로 만든 꽃을 얹으면 되겠네요.”
케이크 빵이나 생크림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초콜릿 꽃이었다.
초콜릿 꽃은 만들기가 아주 어렵다. 색소를 섞어 만든 알록달록한 초콜릿을 녹여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 후, 그것을 또 한 번 굳힌 다음, 작은 칼로 섬세하게 조각해야 한다.
번거롭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페르니아는 하기 싫다든가, 앤에게 대신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간을 모으고 신중하게 초콜릿 꽃을 만드는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앤은 묘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많이 변하셨어.’
앤은 페르니아의 오래전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페르니아는 좋은 주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만하면서도 잔혹한 성정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의 전담 하녀인 앤애게는 더욱 그랬다. 페르니아는 늘 앤을 매섭게 혼내곤 했다.
[너는 이렇게밖에 주인을 못 모시니? 이따위로 할 거면 당장 짐 싸 들고 나가. 너 같은 하녀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어린 주인의 말은 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럼에도 앤은 페르니아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당연히 충성심 같은 건 아니었다.
시골에서 힘겹게 생활하는 가족을 위해 매달 받아야 하는 급료, 그리고 귀족가의 하녀로 입지를 다지고 싶다는 나름의 야망 때문이었다.
페르니아는 저를 모시다가 나간 하녀들의 험담을 여기저기 하고 다녔다. 귀족 세계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돈 하녀는 다시는 자리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절대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일을 그만둬서는 안 됐다.
‘조금만 참자.’
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폭군 같은 어린 주인을 모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 산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페르니아에게 뺨을 맞은 앤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정말 한계야.’
이번 달만 채우면 저택을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며칠이 되지 않아 앤의 결심은 흔들리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페르니아가 변했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앤의 손길에 의해 꾸며진 페르니아는 소리 높여 감탄했다.
[우와. 이게 정말 나야? 장난 아니다.]평소와 다른 말에 놀란 앤을 향해 페르니아는 웃었다.
[예쁘게 꾸며 줘서 고마워, 앤.]그 말을 들었을 때 앤은 진심으로 페르니아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연기를 하고 있다든가.
그게 아니면 저 싸가지 없는 아가씨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페르니아는 예전처럼 포악질을 부리지 않았다.
밝고 쾌활했다.
귀족의 오만함이나 잔혹함 따윈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앤은 점점 페르니아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앤, 이것 봐. 이 정도면 훌륭하지?”
힘겹게 완성한 초콜릿 꽃을 뿌듯한 얼굴로 자랑하는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앤은 미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급작스럽게 마님께서 변한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야.’
페르니아 덕분에 앤은 진심을 다해 평생 모실 수 있는 주인이 생겼으니까.
그것도 공작가의 하녀장이라는 엄청난 직위와 두둑한 보상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앤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예뻐요, 마님.”
케이크를 다 만든 페르니아가 서둘러 간 곳은 성에서 가장 커다란 연회장이었다.
이곳에서 생일 파티를 열 생각이었다.
“폴. 이쪽으로 수레를 가져다줘요.”
“알겠습니다.”
페르니아의 말에 집사 폴은 수레를 끌고 왔다. 수레에는 화사한 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북부는 겨울의 땅이라 꽃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꽃들은 마법의 힘으로 재배된 것이라 무척 값비쌌다.
어떤 꽃들은 보석보다 비쌀 정도였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주저 없이 꽃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이번 생일 파티의 콘셉트는 꽃이니까. 이럴 때 사치를 하지, 언제 사치를 해.’
페르니아는 폴과 함께 열심히 연회장을 꾸몄다.
그렇게 한나절 고생하자 연회장은 갖가지 꽃들로 가득 채워졌다.
은방울꽃, 라일락, 백합, 장미.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연회장은 꼭 봄이 온 것 같았다.
페르니아가 연회장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헤실 웃었다.
“루시안도 좋아하겠지?”
“…….”
폴은 그런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카르디엔 성으로 와 루시안과 페르니아를 모신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그래서 이제 폴은 페르니아가 얼마나 루시안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미쳤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남자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페르니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해냈다.
그녀는 루시안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평범함도, 온화함도, 그 무엇도.
그렇기에 루시안은 행복할 수 있었다.
루시안에게 페르니아는 최고의 배우자였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달리 말이지.’
폴은 복잡한 얼굴로 과거를 떠올렸다.
황제의 일방적인 주선으로 루시안이 페르니아와 약혼을 하게 되었을 때 폴은 분노했다.
페르니아가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제 주인을 무시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하는 순간, 안 그래도 고된 루시안의 인생이 더욱 고통스러워질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두 사람은 잘 살았다. 너무 잘 살아서 가까이서 모시는 것이 고역일 정도였다.
‘어쨌건 사이가 좋으셔서 다행이지. 앞으로도 이렇게 다정하게 사셔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는데 페르니아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연홍색 장미꽃이었다.
장미꽃을 본 폴의 눈이 커졌다.
‘줄리엣 로즈’라고 하는 이름의 이 장미꽃은 꽃에 문외한인 폴도 알 만큼 유명한 꽃이었다.
워낙에 키우기가 어려워 꽃 한 송이에 저택 한 채의 가격이 나간다는 어마어마한 꽃이었으니까.
‘이걸 왜 내게 주시지? 어딘가에 장식하라는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폴을 향해 페르니아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이건 폴에게 주려고 주문한 거야. 받아.”
그 말에 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폴은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제, 제게 앙갚음을 하시려는 거지요?”
“뭐?”
“마님께서 루시안 님과 처음 만났을 무렵, 제가 마님을 쌀쌀맞게 대했던 걸 기억하고 계신 거잖아요.”
페르니아는 황당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 얘기를 꺼내?’
그러나 폴은 확신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게 꽃 선물을 주신 거 아닙니까. 루시안 님께 시든 꽃잎처럼 갈기갈기 찢어 죽으라고 말입니다.”
“…….”
꽃으로 장식된 연회장에 정적이 머물렀다.
페르니아는 가만히 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역시!”
오버하는 폴을 향해 페르니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고 말할 리가 없잖아. 왜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해?”
“그, 그럼 갑자기 왜 제게 이 꽃을 주시는 건데요.”
그런 게 아니라면 페르니아가 이런 귀한 꽃을 제게 줄 이유가 없었다.
페르니아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톡 쏘듯 말했다.
“이 꽃 가지고 앤에게 제대로 프로포즈 좀 하라고.”
“아…….”
생각지 못한 말에 폴의 눈이 커졌다.
카르디엔 성의 집사 폴은 하녀장 앤을 짝사랑했다. 그 기간이 장장 10년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성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직장 동료일 뿐이었다.
폴이 앤에게 제대로 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르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리 앤이 결혼 생각이 없는 독신주의라고 선언했다 해도, 도전은 해 봐야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총각으로 삶을 마감할 생각이야?”
끔찍한 미래에 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건 아니지만…….”
페르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가까이서 앤과 폴을 지켜본 페르니아는 알 수 있었다.
앤이 폴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독신이라는 걸 포기할 만큼 큰 한 방이 없는 거지.’
그래서 페르니아는 ‘줄리엣 로즈’를 준비했다.
아름다운 장미꽃은 낭만적이면서도, 자본주의의 미덕을 두르고 있어서 앤의 마음을 흔들 만한 무기가 될 것이다.
페르니아는 폴의 손에 장미꽃을 쥐여 주며 단호히 말했다.
“기회를 봐서 앤과 단둘이 조용하게 있을 시간을 만들어 줄 테니까, 꽃을 내밀면서 말해 봐. 나와 결혼해 달라고. 이랬는데도 안 되면 이번에야말로 깔끔히 포기하고.”
“…….”
폴은 입을 벌리고 페르니아를 바라보다가 결국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폴은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응원해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 봐.”
페르니아는 폴의 등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폴. 루시안 같은 존잘이 10년 동안 한 여자만 바라보고 있으면 순정이지만, 폴 같은 평범한 남자가 10년 동안 한 여자만 바라보고 있는 건 솔직히 궁상이라고.’
그래서 도와주는 거야. 보기가 너무 답답해서.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 *
잠시 후,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페르니아의 아버지인 라일락 후작이었다. 아버지의 오랜 연인인 모앙셀 부인도 함께였다.
페르니아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한껏 반기는 대신 눈썹을 찡그렸다.
“세상에, 살이 더 쪘잖아요!”
라일락 후작은 예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후덕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동통한 열 손가락 위로 두꺼운 금반지가 반짝이고, 뽀얗고 두툼한 모피를 걸치고 있는 모습은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페르니아는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으, 아버지. 아무리 와일드 트리로 돈 좀 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갔잖아요. 꼭 돈벼락 맞은 너구리 같다고요.”
딸의 야멸찬 평가에 라일락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결혼하고 철 좀 들었나 싶었더니 여전하구나. 뭐, 옛날 비하면 훨씬 좋아지긴 했지만 말이야.”
그러더니 라일락 후작은 기나긴 혼잣말을 시작했다.
“페르니아. 솔직히 난 너를 키우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성격이 너무 포악하고 더러워서 친구는커녕 주변이 다 적이고, 너만 보면 이를 가는 사람들 천지였기 때문이지. 저러다 언젠간 누군가에게 칼이라도 맞는 건 아닐지 노심초사했단다.”
라일락 후작의 말에 페르니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라일락 후작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진짜’ 페르니아는 스무 살에 요절한다.
그것도 약혼자인 루시안의 손에 의해서.
그러나 누구도 페르니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며 웃는 사람들뿐이었다.
그중에 라일락 후작만이 울부짖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딸의 이름을 부르며.
‘책을 읽을 때는 그 부분에서 아무런 감흥도 안 들었는데.’
그러나 막상 페르니아가 되어, 라일락 후작의 딸이 되어 보니 그렇지 않았다.
라일락 후작은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아빠처럼 끔찍하게 딸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나름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하는 아빠였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이따금 라일락 후작을 보면 가슴이 지끈거리곤 했다.
‘페르니아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진짜 페르니아가 아니니까.’
후작을 속이고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페르니아의 귓가에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네가 그런 식으로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친구 하나 없는 욕쟁이 할망구가 되든, 애비도 몰라보는 망나니가 되든, 눈빛 사나운 악마의 아내가 되든, 뭐든 말이다. ……네가 잘못된다면 난 도저히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은 마치 ‘네가 온전한 내 딸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페르니아가 떨리는 눈동자로 라일락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러나 감동에 젖은 딸의 얼굴을 보며 라일락 후작은 정색했다.
“히익. 왜 그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거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러나 라일락 후작은 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라일락 후작은 재빨리 페르니아를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라일락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상자 안에는 보기만 해도 힘이 불끈 솟을 것 같은 황금빛의 와일드 트리가 들어 있었다.
페르니아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이건…….”
“그래. 골드 와일드 트리다.”
골드 와일드 트리는 평범한 와일드 트리가 아니다. 워낙에 재배하기가 힘들어, 와일드 트리 장인이라 불리는 라일락 후작도 1년에 한 뿌리를 재배할까 말까였다.
그렇게 귀한 약재였으니,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심지어 황실에서까지 제발 한 뿌리만 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라일락 후작은 골드 와일드 트리를 누군가에게 판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재배에 성공할 때마다 늘 딸에게 가져다주었으니까.
라일락 후작은 페르니아에게 신신당부했다.
“카 서방도, 애들도 주지 말고 너만 먹어. 알았느냐?”
“……아버지가 먹지.”
“난 와일드 트리를 빵보다 더 많이 먹어서 굳이 이 녀석까지는 안 먹어도 돼.”
“알겠어요. 고마워요.”
페르니아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상자를 야무지게 챙겼다.
“할아버지!”
저쪽에서 들려오는 두 손녀의 목소리에 라일락 후작은 투실투실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멀어졌다.
“아이구, 내 새끼들! 새로 왔다는 강아지는 어디 있니. 헉, 너라고? 아들이라고 들었는데? 뭐, 아들이라고? 허허허. 꼭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말이다…….”
처음 만난 손주에게도 어김없이 공포의 토크를 늘어놓는 후작을 바라보며 페르니아는 생각했다.
진짜 페르니아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좋은 딸이 되겠노라고.
잠시 후 황태자 부부도 도착했다. 칼릭스와 에스텔이었다. 그들을 꼭 빼닮은 쌍둥이 남매도 함께였다.
에스텔이 환하게 웃으며 페르니아에게 다가왔다.
“보고 싶었어요, 니아 님.”
“나도요.”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포옹했다.
칼릭스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 남매도 우아한 몸놀림으로 인사했다.
“페르니아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스텔을 꼭 닮은 청초한 외모의 소녀는 남매 중 누나인 루시였다.
“특별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해사한 얼굴로 인사하는 소년은 남매 중 동생인 페시였다. 페시는 아빠와 꼭 닮은 날카로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페르니아는 두 눈을 호강시켜 주는 아름다운 쌍둥이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저야말로 먼 길을 와 주셔서 고마워요.”
페르니아의 옆에 서 있던 유리아나와 루나도 남매에게 인사했다.
“고귀하신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점잖게 인사한 유리아나와 달리 루나는 아이처럼 촐싹거리며 인사했다.
“루시 님, 페시 오빠. 어서 와요!”
루시나 페시나 둘 다 같은 황손이었건만, 루나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루시에게는 조심스럽게 예의를 지키는 반면에, 페시에게는 팔을 툭툭 치며 장난을 쳤다.
그것은 단순히 루시가 쌍둥이 남매 중 누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다른 두 사람의 성격 때문이었다.
차가운 외모를 가진 페시가 엄마를 닮아 봄처럼 온화한 성격을 가진 것과 달리 루시는…….
“네가 카르디엔 공작가의 새로운 아이구나?”
루시와 마주친 로즈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 찼다.
콩닥콩닥.
로즈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실제로 공주님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금빛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공주님은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님 같아.’
홀린 듯 루시를 바라보던 로즈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모은 후 작은 머리통을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로즈라고 합니다.”
바닥에 머리가 닿을 만큼 허리를 구부린 로즈를 보며 루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카르디엔 공작을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상 이상인걸.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러더니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크면, 내게 장가올래?”
“예?”
로즈의 눈이 튀어 나갈 것처럼 커졌다.
루시는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쿡쿡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장래에 황제가 될 예정이거든. 그래서 황권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가문의 결혼 상대자가 필요해. 이왕이면 외모도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자라면 좋지 않겠니?”
루시의 첫사랑이 루시안이라는 건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녀의 취향이 은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라는 것도.
“…….”
그 사실을 조금도 모르는 로즈는 그녀가 농담을 하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유리아나가 곤란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황송합니다만, 루시 님. 로즈는 카르디엔 공작가의 귀한 아이라서 함부로 장래를 약속드릴 수 없답니다.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요.”
루나도 다급한 얼굴로 동조했다.
“맞아요. 얜 아직 글자도 다 못 뗀 꼬맹이예요.”
로즈는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8살 된 자신에게 장가오라는 아름다운 공주님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둘은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을 것 같았던 유리아나와 루나가 잔뜩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누나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무서운 분인 걸까.’
저렇게 천사처럼 생겼는데?
저를 빤히 보는 세 쌍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생긴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동생을 많이들 아끼는구나. 걱정 마. 당장 납치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
절대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루시는 에스텔을 똑 닮은 맑은 얼굴과는 반대로, 아버지인 칼릭스의 오만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만 했다.
그것을 안 남동생 페시가 로즈에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 마. 누님이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 로즈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순간 유리아나와 루나, 루시와 페시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귀여워!’
갓 들어온 막내의 인기를 예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 * *
오랜만에 만나 시끌벅적하게 회포를 푸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페르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는 칼릭스가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여독을 풀기 위해 편안히 테이블에 자리한 에스텔과 달리, 칼릭스는 연회장을 둘러본다며 페르니아를 따라왔다.
페르니아는 그 말이 너무 웃겼다.
‘언제부터 연회장 같은 것에 관심 있었다고.’
칼릭스가 이곳에 온 건 절대적으로 에스텔 때문이었다. 루시안의 생일 파티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연회장 타령을 하며 내 옆에 붙어 있는 이유가 뭐겠어.’
페르니아는 칼릭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싸운 건데요.”
“……!”
페르니아의 말에 위엄 넘치던 칼릭스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이때만큼은 최강의 카리스마를 가진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
‘눈치 제로, 센스 제로의 남자 말이야.’
가늘어진 페르니아의 눈과 마주친 칼릭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에스텔이 뭔가에 화가 났긴 했는데 도대체 뭣 때문인지 조금도 모르겠어.”
“아무렴요. 그런 게 한두 번인가.”
“…….”
“그때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칼릭스는 페르니아의 말에 울컥하는 대신, 그날의 일을 상세히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페르니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예전에 그린 에스텔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때 참 예뻤었지, 라고 말했다고요?”
“그래.”
칼릭스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을 떠올리며 아름답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에스텔은 그날 이후 단단히 삐져 버렸다.
칼릭스는 아무리 고민을 해도 왜 그녀의 마음이 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페르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뭐가?”
“‘예전에 참 예뻤다’라는 말은, 마치 지금은 그때처럼 예쁘지 않다는 말 같잖아요!”
“……!”
페르니아의 말에 칼릭스는 눈을 부릅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었다.
칼릭스가 차가운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해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늘 그 ‘아무 생각 없이’가 문제라고요.”
톡 쏘듯 내뱉은 페르니아는 칼릭스에게 눈짓했다.
“알았으면 당장 에스텔에게 가요!”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칼릭스가 가까이 오자 에스텔은 화가 다 풀리지 않은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칼릭스가 소리쳤다.
“에스텔. 넌 지금이 가장 예뻐!”
“…….”
쩌렁쩌렁 울리는 칼릭스의 목소리에, 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페르니아는 경악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우렁차게 외칠 필요는 없잖아, 이 센스 없는 남자야!’
그러나 페르니아의 마음도 모르고 칼릭스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에스텔. 넌 가을 석양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봄꽃처럼 은은하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샛별처럼 아름다워.”
페르니아는 주먹으로 칼릭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칼릭스의 끔찍한 공격을 정면에서 받은 에스텔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에스텔은 눈썹을 내리며 칼릭스의 어깨를 콩콩 쳤다.
“칼릭스도, 참.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뭘 어떡해.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정말이요?”
“그럼.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칼릭스.”
“……에스텔.”
두 사람은 서로의 두 손을 맞잡고 그들만의 세계로 돌입했다. 일명 남주 여주의 애정 만빵존이었다.
저 존에 들어가면 남주와 여주는 서로만 보이고, 서로의 목소리만 들린다.
두 사람은 질릴 만큼 서로를 향한 사랑을 속삭인 후에야 현실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그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괜히 가까이 있다가 눈과 귀를 고문당하고 싶지 않았다.
안전한 곳에 선 페르니아는 새삼 원작의 칼릭스를 떠올렸다.
원작의 칼릭스도 에스텔과 이어진 후에는 흐물흐물 풀어지긴 했지만, 저 정도로 바보가 되진 않았었다.
‘……혹시 나 때문인가.’
페르니아로 인해 에스텔과 가까워진 덕분일까.
칼릭스는 에스텔과의 애정 전선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페르니아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
지금은 페르니아의 말이라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에스텔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나를 어깨에 태우고 왈왈 짖어야 한다는 말을 해도 얌전히 따를 기세라니까.’
페르니아가 칼릭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로 이름을 날렸던 원작과는 달리, 칼릭스는 아직도 황태자다.
쿤에게 치료를 받아 건강해진 황제가 아직도 정정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건강한지, 이대로라면 칼릭스가 황위를 받는 것은 호호 할아버지가 될 때쯤일 거라는 추측이 오갈 정도였다.
황제가 황권을 공고히 하며 굳건히 나라를 다스리니, 황태자는 자연스럽게 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칼릭스는 편안하게 에스텔을 내조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는 에스텔을 따라다니며 호위는 물론, 꼼꼼한 일정 관리, 마차 픽업, 자질구레한 심부름까지.
칼릭스는 내조의 왕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촉망받던 황태자의 변화에 황태후는 머리라도 다친 게 아니냐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래도 뭐…….’
페르니아는 에스텔과 함께 둘만의 꽃밭에 가 있는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헤실거리는 칼릭스는 원작에서 보였던 것처럼 카리스마와는 오억만 년 정도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행복해 보였다.
‘……자기가 좋으면 된 거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페르니아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루시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파티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
생일 파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 마지막 손님이 도착했다.
쿤이었다.
한껏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던 다른 손님들과 달리, 쿤과의 인사는 짧았다.
쿤이 손을 내밀었다.
“여기, 약.”
루시안이 마시는 분홍색 물약을 받은 페르니아도 손을 내밀었다.
“여기, 화장품.”
페르니아가 건넨 것은 직접 만든 아이라이너였다. 이 아이라이너로 눈 화장을 하면, 땀을 폭포처럼 흘리거나 심지어 비를 맞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번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화장품을 품속에 넣었다.
이제는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눈 화장을 한 쿤을 바라보며 페르니아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평생 아이라인 짝짝이로 살았을까?’
상상만으로 웃픈 모습을 생각하는데, 쿤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것도 받아.”
“이게 뭐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페르니아를 향해 쿤이 말했다.
“그리폰이 준 거야.”
페르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도를 떠난 후 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페르니아는 쿤에게 어떻게 그를 아느냐고 질문하는 대신, 종이봉투를 열었다.
봉투에는 간결한 인사가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들아.]편지를 본 페르니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예전에는 루시안의 아버지라는 사실만으로, 그가 루시안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아니다.
제대로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고작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모 노릇을 하려는 것만큼 뻔뻔한 행동은 없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루시안에게 온 편지니 전해 주기는 할게요. 이따위 종잇조각을 왜 주냐는 얼굴을 할 테지만요. 그 후에 사이좋게 불태우죠, 뭐.”
쿤은 좋을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주인님께서 오십니다!”
폴의 목소리에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페르니아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급하게 움직였다.
“자,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준비한 구호는 잊지 않았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니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두근두근.
매해 여는 깜짝 생일 파티건만 왜 이렇게 떨리는지.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루시안이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얼굴 천재 루시안! 우주 존잘 루시안!”
그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라일락 후작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위! 어깨에 풀을 묻히고 다니면 어떡하나.”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바라본 루시안을 향해 후작은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뷰티풀!”
“…….”
결국 루시안은 싸늘한 얼굴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루시안은 오늘 페르니아가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매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치른 이벤트인데.
게다가 페르니아의 얼굴을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장난감을 숨긴 아이 같은 얼굴로, 발을 동동거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비밀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게 무척 즐거운 듯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몇 해 전부터 아예 생일날 아침에는 자리를 비웠다.
페르니아가 마음껏 파티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루시안이 자리를 비운 덕분에 페르니아는 하고 싶은 대로 파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알록달록한 풍선을 성안에 가득 채웠고, 어떤 때는 뽀송뽀송한 솜으로 만든 눈사람 인형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꽃과 사람인가.’
형형색색의 꽃들 사이에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마치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것 같았다.
물론 루시안은 그것들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루시안은 이내 넋을 놓았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페르니아가 그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에는 화려한 꽃 장식이 올라간 커다란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루시안의 앞에 선 페르니아가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시안, 생일 축하해요.”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루시안은 당장 페르니아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기 오리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온 세 아이 때문이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씩씩하게 인사한 유리아나와 루나는 가운데에 있던 로즈를 떠밀었다.
“하, 하지만…….”
버티는 로즈를 향해 두 소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이런 건 제일 귀여운 애가 주는 거야.”
결국 로즈가 품속에 선물을 안고 한 발짝 나왔다. 로즈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루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에 들린 것은, 루나와 함께 열심히 만든 은방울 꽃다발이었다.
“…….”
루시안은 제 앞에 서서 꽃을 내미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겁을 먹은 것인지, 긴장을 한 것인지, 꽃다발을 잡은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잔뜩 겁먹은 다람쥐 같았다. 그런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치는 모습이 조금 기특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부드럽게 로즈의 선물을 받았다.
“고맙다.”
고작 그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로즈는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커다란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로즈는 환하게 웃었다.
문득 언젠가 페르니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귀여운 건 정말 최고예요. 별것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그냥 흐뭇하거든요.’
라고 했던가.
그 말을 아주 조금 (참새 똥만큼이지만)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 본격적인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 * *
복작거리는 분위기 속에 가장 시끄러운 곳은 아이들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루시와 페시, 유리아나와 루나는 로즈를 둘러싸고는 한껏 귀여워해 주고 있었다.
로즈의 은색 머리카락이 예쁘다며 조몰락거리던 루시는 기어코 아이의 머리를 양옆으로 땋아서 돌돌 말아 올렸다.
아무리 어려도 소화하기 힘든 깜찍한 헤어 스타일을 로즈는 찰떡같이 소화했다.
네 사람은 인형 같은 로즈의 모습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귀여워!’
이번엔 루나 차례였다.
루나는 동그란 고기 완자를 가지고 와서 로즈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로즈는 앙 하고 입을 벌려 루나가 가져다준 고기 완자를 먹었다.
두 볼이 가득 차서 우물거리는 로즈를 바라보며 네 사람은 이번에도 주먹을 쥐었다.
‘귀엽다고!’
새로 생긴 막내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는 테이블이었다.
시끄러운 것만 치자면 라일락 후작이 앉은 테이블도 만만치 않았다.
라일락 후작의 대화 상대를 해 주고 있는 건 놀랍게도 쿤이었다.
“그러니까, 와일드 트리를 재배하는 방법의 포인트는 관심과 애정이란 말이야?”
라일락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왜 그토록 재배하기 어렵다는 와일드 트리가 내 손에만 오면 무처럼 쑥쑥 자랄까. 혹시 내 손에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라일락 저택에 와일트 트리가 잘 자랄 만한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연구 끝에 알아냈지요. 와일드 트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건 햇빛이나 토양, 영양제 같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키우는 이의 관심이었어요! 매일매일 쳐다보고, 말을 걸어 주고, 쓰다듬어 주면 쑥쑥 크더군요.”
쿤은 약초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와일드 트리는 밝혀진 게 많지 않은 신비한 약초였다. 그런 약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라일락 후작이었고.
좀 길긴 하지만 후작의 이야기는 들어 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쿤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좀 더 해 줘. 와일드 트리에 대한 이야기.”
라일락 후작의 눈이 흔들렸다.
평생 처음으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더 해 달라니.
“크흡.”
라일락 후작은 울 뻔했다. 후작은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껏 감동받은 얼굴로 기이이이이이일고 기이이이이이인 수다를 시작했다.
* * *
페르니아와 루시안, 에스텔과 칼릭스도 한 테이블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다의 지분은 대부분 페르니아와 에스텔에게 있었다.
까르르 웃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루시안과 칼릭스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귀엽다.’
흐뭇하게 웃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각자 사랑하는 여인들이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 따지자면 두 사람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의 호감도 가지지 못했다.
호감은커녕, 서로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불쾌해졌다.
페르니아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남주와 서브 남주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이에요. 호랑이와 사자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무슨 말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다.
“흥.”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 * *
산들산들, 바람이 불었다.
북부의 바람은 찼지만, 오늘만큼은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햇빛은 반짝였고, 연회장을 가득 채운 꽃들에서는 향기가 났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에스텔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루시안이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저쪽에서 사람들과 웃는 페르니아였다.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에는 많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한 질투. 그녀가 웃고 있다는 행복함. 그녀가 나만 봤으면 하는 소유욕.
그럼에도 루시안은 편안히 앉아 있었다.
오래전, 페르니아에 대한 감정이 흘러넘쳐 어찌할 줄 몰랐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에스텔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단순히 약 때문은 아닐 거야.’
페르니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루시안은 안정을 되찾았다.
마치 그녀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는 것처럼.
지금의 루시안은 누가 보아도 악마가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온전히 페르니아의 힘이었다.
에스텔은 웃으며 페르니아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시절, 에스텔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녀였다.
그래서 에스텔은 아무리 힘들어도 웃어야 했다. 누군가 자신을 모욕해도 참아야 했다.
그것은 아무리 그녀가 신의 은총을 가진 성녀라 해도 견딜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에스텔은 스스로가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을 처음 일깨워 준 사람이 페르니아였다.
[가시 돋친 말은 매일 듣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좀, 잘 참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너무 참지 말고 짜증 나는 것들은 다 조져 버려요.]처음으로 에스텔은 제 안에 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은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니아를 만나고서야 루시안은 비로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성녀로서 자신을 억눌러야 했던 에스텔과,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억눌렀던 루시안에게 그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에스텔이 맑은 눈동자 속에 루시안을 담으며 말했다.
“니아 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 너도.”
“…….”
에스텔의 말에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은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 그녀는 봄날의 찬란한 태양처럼 빛이 났다.
풍족한 행복과 사랑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빛이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제게도 저런 빛이 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설핏 웃음이 머물렀다.
* * *
어느덧 해가 지고, 생일 파티가 마무리될 시간이 되었다.
페르니아는 떠나는 손님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게 뭐냐?”
딸이 건넨 진홍색 꽃다발을 보고 라일락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를 닮은 꽃을 준비한 거예요. 금어초라는 꽃이랍니다.”
“허허. 내가 이렇게 예쁘다고?”
라일락 후작은 ‘꽃 같다’는 말에 실실 웃었다. 그런 후작을 바라보며 페르니아도 웃었다.
금어초의 꽃말은 ‘수다쟁이’였다.
“어머, 제게도 주는 건가요?”
라일락 후작의 피앙세인 모앙셀 부인에게 준 건 붉은색의 동백꽃이었다.
동백꽃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리다’.
라일락 후작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그녀에게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에스텔과 칼릭스도 받아요.”
페르니아가 에스텔에게 준 것은 자그마한 꽃이 핀 선인장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에스텔을 향해 페르니아가 말했다.
“선인장의 꽃말은 열정이래요. 에스텔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고요.”
페르니아의 말에 에스텔은 기쁘다는 듯 웃었다.
늘 받곤 했던 청초한 꽃이 아니라 좋았다.
반면 칼릭스도 평소에 받지 못했던 꽃을 받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장미꽃이었다.
페르니아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꽃말은 말 안 해도 알죠?”
빨간 장미꽃의 꽃말은 열렬한 사랑.
칼릭스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불평을 하진 않았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꽃을 인정했다.
“난 희귀 약초 아니면 안 받아.”
단호히 말하는 쿤에게도 선물을 건넸다.
앙증맞은 보랏빛 꽃이었다.
질색한 얼굴로 꽃을 받은 쿤이 슬며시 물었다.
“그래서 이 꽃말은 뭔데?”
빛나는 지성? 자유로운 영혼?
그러나 페르니아의 답변은 쿤의 얼굴을 굳게 하기에 충분했다.
“몰라요. 그냥 이름 때문에 고른 거니까.”
“……이름에 뭔데.”
“개불알꽃이요.”
“…….”
뭘까. 꽃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욕을 들은 것 같은 이 기분은.
쿤은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사라졌다.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는 꽃잎이 커다란 아마릴리스를 선물했다. 페르니아가 꽃송이를 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릴리스의 꽃은 자랑스러움이란다. 너희들은 그 자체만으로 사랑스럽고 대단한 아이들이야.”
애정이 가득한 말에 아이들은 꽃보다 어여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손님이 모두 돌아갔다.
“자, 그럼 아가씨와 도련님도 어서 들어가시죠.”
눈치 빠른 앤이 세 아이를 성안으로 데려갔다.
노을이 진 텅 빈 연회장에는 페르니아와 루시안만이 남았다.
바람이 불었다.
달콤한 꽃향기가 듬뿍 녹아든 바람 속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석양 때문일까.
루시안의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선명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니아. 내 선물은요?”
설마 나만 없는 건 아니죠?
라는 투정이 느껴지는 말에 페르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루시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기 있어요.”
루시안에게 다가간 페르니아가, 그의 목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페르니아 라일락.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랍니다.”
그 말에 루시안은 부드럽게 두 눈을 휘었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듯이.
Dear Pernia
(사랑하는 페르니아에게),
fin.
* * *
“미안, 루시안.”
에스텔의 목소리와 함께 루시안의 가슴 위로 검이 박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루시안은 죽었다.
“…….”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피처럼 붉은 눈물을 흘리며.
악마 카르디엔이 죽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성녀님이 이 제국을 구하셨다!”
성녀 에스텔의 이름이 대륙 곳곳에 울려 퍼졌다. 이제 그녀는 평범한 성녀가 아니었다.
대륙을 파멸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다.
젊은 황제, 칼릭스는 돌아온 에스텔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줘, 에스텔.”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는 평민인 에스텔이 칼릭스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온 제국민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다.
그녀는 휘날리는 꽃가루와 축복의 외침 속에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마침내 그녀와 이어진 칼릭스는 행복하게 웃었다.
“사랑해, 에스텔.”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았던 남자의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에게서는 이제 예전 같은 오만함이나 이기적인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에스텔과 함께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의 노력에 힘입어, 제국은 엄청난 속도로 악마에게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불탔던 건물들이 깨끗이 복원되고, 절망만이 가득했던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늘어갔다.
제국민들은 이렇게 악마 카르디엔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명만은 아니었다.
에스텔은 도저히 그들처럼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죽인 이가 다름 아닌 루시안이었기 때문에.
에스텔도 알고 있었다.
악마의 힘을 개화한 루시안은 더는 제가 알던 루시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에스텔에 대한 사랑을 빌미로 온 세상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갈 악마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루시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다.
지독한 죄책감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새까만 밤하늘에 붉은 달이 떴다.
멍하니 달을 바라보던 에스텔은 무언가가 씐 듯 방을 나섰다.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지 않고, 맨발로 방을 나선 그녀가 향한 곳은 신의 석상이 모셔진 신전이었다.
에스텔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신이시여. 당신의 딸, 에스텔입니다.”
에스텔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사사로운 감정으로 신에게 기도한 적이 없었다.
성녀는 늘 만인을 위해 기도해야 했으니까.
하물며 칼릭스에 대한 사랑으로 힘들어했을 때조차, 그녀는 신에게 어리광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녀는 성녀라는 직위를 내려놓고 신에게 처절히 빌었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루시안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께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의 영혼을 구원해 주십시오.”
어떤 식으로라도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게.
……제발.
* * *
“흐아아앙! 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루시안을 죽여 버리냐고.”
여인은 아이처럼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성녀 에스텔》이라고 쓰인 책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사랑하고 싶은 여인에게 조금이라도 사랑받고 싶어서 흑화해 버린 거잖아. 그럼 조금이라도 여지를 줄 수 있는 것 아니야? 꼭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잔인하게 죽였어야 해?”
여인은 빨개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죽게 하진 않았을 텐데…….”
적어도 그렇게 처절하게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의 편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잠시 후, 여인의 손에 들린 책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들의 바람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흑화하는 서브 남주의 아내랍니다,
fin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