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3
1. 카르디엔 공작가의 후일담 -루시안&페르니아 편-
루시안이 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니아.”
입술을 깨문 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엄마와 헤어지게 된 아이도 저보다 슬픈 얼굴을 하진 않으리라.
나는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나도 그와 헤어지기 싫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를 끊어 내야 한다.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있어선 안 돼요, 루시안.”
“하지만…….”
루시안이 처절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제발, 니아.”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나 간절했다.
얼음처럼 매정하게 그를 밀어 내리라 결심했던 다짐이 사라질 만큼.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차였다.
“두 분 정말 너무 하십니다. 고작 한나절 집을 비우시는 것뿐인데 2시간씩이나 작별 인사를 하신다니요.”
원망과 경멸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르디엔 공작가의 집사 폴이었다.
루시안이 고개를 돌려 폴을 바라보았다. 감히 어떤 이물질이 주제도 모르고 우리 사이에 끼어드느냐는 눈빛이었다.
폴은 히익, 하고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할 말을 했다.
“오늘 사냥 대회에 오시는 분들이 모두 고위 귀족들이라 더 늦으면 일이 커집니다. 지금 나가셔야 해요.”
하아.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밥버러지 같은 귀족 놈들, 그냥 죽여 버릴까.
루시안은 딱 이런 얼굴을 했지만 다행히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시안의 등을 떠밀었다.
“폴의 말대로예요. 괜한 말 나오지 않게 어서 가요.”
루시안은 귀족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늘 나하고만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카르디엔 공작.
귀족들과의 관계를 아예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사냥 대회였다.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이 행사는 카르디엔 공작이 다른 귀족들과 관계를 견고하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알겠어요.”
루시안은 비 오는 날 쫓겨난 강아지보다 청승맞은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금방 올게요, 니아. 보고 싶을 거예요, 니아. 사랑해요, 니아.
애달픈 말을 속삭이면서.
* * *
나는 말을 타고 간 루시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곳을 처연히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히히, 자유 시간이다!”
루시안과 함께 있는 시간은 행복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혼자만의 시간도 내게는 소중하다.
‘루시안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모습도 있는 법인걸.’
콧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돌아간 나는 가장 먼저 몸에 꽉 끼는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나풀거리는 속옷 차림으로 나는 침대 위에 뛰어들었다.
두툼한 스펀지를 채운 매트리스가 내 몸을 기분 좋게 튕겨 냈다.
침실 침대는 킹사이즈 침대 두 개를 붙여놓은 것보다 크다. 그러나 나는 여태 이 크기를 온전히 느낄 틈이 거의 없었다.
‘침대 위에서는 늘 루시안과 붙어 있으니까.’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말이다.
물론 밤에는 제법 유용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큰 침대는 뒹굴어야 제맛이지.’
나는 김밥이라도 된 것처럼 침대에서 몸을 데구루루 굴렸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앤이 들어섰다. 앤이 내 모습을 보고 쿡쿡 웃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마님. 제 방에 고이 잘 모셔 두고 있었답니다.”
“고마워.”
나는 상기된 얼굴로 책을 만지작거렸다.
분홍색 표지에 화사한 꽃이 그려진 책은 제국 최고의 로맨스 작가 에릭스의 신간이었다.
제목은 《흔들리는 붕대 속에서, 네 비누 향이 느껴진 거야》
아아,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온다. 내 심장을 박살 내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나는 푹신한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와, 남주 얼굴 묘사 실화냐. 사람이 아니네, 사람이.”
“아오, 그렇게 좋아하는데 왜 고백을 안 하냐고. 이 바보 같은 남주야! 이럴 거면 서브 남주한테 남주 자리 넘기고 꺼져 버려.”
“흐아앙. 아까 한 말 취소. 넌 세상에서 완벽한 남주야.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참하고 멋있어. 너라면 마음 놓고 여주를 보낼 수 있다.”
에릭스는 정말 대단한 작가였다.
특히 남주를 묘사한 대목이 일품이었다.
내 앞에 있는 건 사실 활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일 뿐인데, 내 머릿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뇌쇄적이며 처연한 남자 주인공이 살아 움직였다.
‘역시 로맨스 소설은 남주 보는 맛에 보는 거지!’
……이런 이유로 루시안의 앞에선 절대 로맨스 소설을 보지 못했다.
내가 ‘핥핥 남주님.’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루시안은 아마…….
‘세상에 있는 모든 소설책을 불태워 버릴지도 몰라.’
게다가 이 책의 작가 에릭스의 정체는…… 루시안이 묘하게 거슬려 하는 황태자 칼릭스였다.
루시안이 작가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 거다.
카르디엔 공작과 황가의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
‘고작 로맨스 소설 한 권을 읽은 것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냐고!’
나는 소설 한 편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는 처지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앤이 들어왔다.
“참, 마님. 쿤 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도 뜯어 보셔야죠.”
그 말에 나는 눈을 반짝거렸다.
책을 읽느라 그걸 잊고 있었네.
의학 연구를 위해 이것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인 쿤은 신기한 걸 발견하면 카르디엔 성에 보내 주곤 했다.
쿤의 선물이 도착할 때마다 루시안은 섬뜩한 얼굴을 했다.
[쓸데없는 짓을.]루시안이 선물을 창밖으로 내던지려 하던 걸 나는 가까스로 막아 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루시안이 없을 때만 슬그머니 선물을 뜯어 보게 되었다.
쿤이 보내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신기해서 뜯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사람의 말을 하는 인형을, 지지난번에는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지 않는 꽃을 보내 주었지. 이번에는 어떤 선물일까?’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상자를 살폈다.
신비로운 문양이 그려진 상자에는 설명서가 적혀 있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녀가 만든 초콜릿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 것과 달리 상자 안에는 평범한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생김새, 빛깔, 향. 모든 것이 완벽한, 먹음직스러운 초콜릿 말이다.
꿀꺽.
초콜릿 덕후인 나는 군침이 돌았다.
이 수상쩍은 초콜릿을 먹어도 될까, 아니면 꾹 참고 먹지 말까?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쿤은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위험한 선물을 보낼 정도로 이상하진 않잖아. 딱 하나만 먹어 보자.’
나는 결심한 얼굴로 초콜릿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맛있엉!’
초콜릿은 믿기지 않을 만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황홀한 얼굴로 입을 우물거렸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어서 마법의 초콜릿인 거야?’
아니었다.
초콜릿을 꿀꺽 삼킨 순간 몸속에 묘한 감각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몸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 위로 부웅 뜨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느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초콜릿에 깃든 마법이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겁나지는 않았다. 이전에 받았던 물건들로 이런 신기한 현상에 면역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황홀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마법이라고 했지.’
날개가 생겨 하늘을 난다거나,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다든가, 새끼손톱만큼 몸이 작아진다거나, 하는 경험들일까?
그런 거라면 즐거울 것 같은데.
‘참,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야지!’
나는 루시안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진 그의 얼굴은 반짝반짝 아름다웠다.
이내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싸더니 정신이 흐릿해졌다.
* *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뜬 직후 가장 먼저 보인 건 폴의 얼굴이었다. 폴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폴이 왜 나와?’
마법이라고 해서 한껏 기대했건만 기껏 보이는 게 폴의 얼굴이라니. 큰 실망을 느끼는 내게 폴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루시안 님?”
“……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 폴은 내게 ‘루시안’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폴이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정수리가 훤히 보이잖아.’
나는 훌쩍 위에서 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나는 놀란 눈으로 손을 들어 펼쳤다.
길고 고운 손가락과 어울리지 않게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바닥.
내가 잘 알고 있는 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몸을 더듬었다.
근육이 잡힌 단단한 가슴. 군살이 전혀 없는 쏙 들어간 배. 까마득하게 느껴질 만큼 긴 다리.
루시안의 몸이었다.
‘내가 루시안이 되어 버린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황당한 마법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새삼 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초콜릿이었으면 자세히 설명해 줬어야지. 이 망할 쿤 놈아!’
으득으득 이를 갈고 있는데 폴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루시안 님, 저기 한 마리 옵니다!”
엥?
눈을 크게 떴다.
호랑이만 한 멧돼지가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루시안이 사냥터로 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난 루시안이 아니라고. 어서 나서서 막으란 말이야, 폴!
다급히 폴을 바라보았건만 폴은 잽싸게 내 뒤로 숨어 버렸다.
야, 이 자식아! 넌 해고야!
라고 소리칠 틈도 없이 멧돼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꺄악!”
나는 루시안의 얼굴을 하고 찢어지게 비명을 내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호기롭게 달려오던 멧돼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등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폴이 신나서 소리쳤다.
“역시 루시안 님! 일격에 끝내셨군요. 이로써 열아홉 마리째 잡으셨네요!”
“…….”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멧돼지를 그렇게 만든 건 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루시안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제야 손에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젠가 루시안의 검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강철로 만든 검은 너무나 무거워서 양손에 힘을 잔뜩 실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루시안은 어떻게 이런 걸 한 손으로 드냐고 감탄했는데 그에게는 이 정도의 무게였구나.’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옆에 있는 나무 위로 검을 슬쩍 휘둘러 보았다.
쿠웅.
거대한 나무가 반으로 갈라진 다음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
세상에나.
나는 놀란 얼굴로 쓰러진 나무를 내려다보다가 지면을 박차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단순한 점프였건만 몸이 얼마나 높이 솟아오르는지, 그대로 인간 로켓이 되어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리는 줄 알았다.
루시안의 신체 능력이 탈인간급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이야.
‘죽인다.’
밟아도 안 나가는 똥차를 타다가, 시속 300km 레이싱 카를 타면 이런 느낌일까.
켜지는 데만 10분씩 걸리는 고물 컴퓨터를 쓰다가 최신식 노트북을 쓰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가녀린 페르니아의 몸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희열을 느꼈다.
계속 루시안의 몸에 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마 초콜릿에 걸린 마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몸이 바뀌는 것일 거야. 지금 루시안은 내가 되어 버렸을 거란 말이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얼마나 놀랐을까.
한시라도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저 멀리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카르디엔 공작가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맞다. 오늘 이 사냥 대회는 귀족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기 위해 만든 자리였지.’
루시안이 갑자기 자리를 뜨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다닥 사냥을 마무리하고 돌아가자.’
루시안이 걱정되긴 하지만, 침대 위에 놓인 초콜릿 설명서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의연하게 검을 들었다.
* * *
카르디엔 공작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 하고 가자.
처음에는 분명 그런 순수한 의도였다. 그런데 사냥을 하면 할수록 나는 희번덕 눈을 뜨며 사냥감을 찾게 되었다.
“크아앙!”
거대한 두 발을 들고 울부짖는 검은 곰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곰의 미간에 딱밤을 날렸다. 머리통을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힘에 곰은 끄아앙 소리를 지르며 장렬하게 쓰러졌다.
“아오오!”
떼 지어 덤비는 붉은 늑대들에게는 돌멩이를 던졌다.
루시안의 몸은 워낙 신경이 기민해 먼 거리에서 조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돌멩이는 던지는 것마다 백발백중 명중했고 늑대들은 내게 오기도 전에 전멸했다.
“카아악.”
집채만 한 뱀은 두 손으로 잡아 리본 모양으로 묶어 주었다.
‘괴수 같은 짐승들을 이런 식으로 잡는 게 가능하다니. 너무 재밌다!’
그렇다.
나는 강인한 루시안의 육체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때 폴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루시안 님.”
“…….”
폴은 루시안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의 몸에 내가 들어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이런 황당한 상황을 알아차리겠어.
나중에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진실을 이야기해 줄 생각에 나는 속으로 낄낄 웃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좋구나. 그런데 사냥터에 있는 동물들이 하나같이 왜 이렇게 흉측한 거야?”
귀족들의 사냥이라는 건 보통 우아하게 사슴이나 토끼를 잡는 것 아니냐고.
폴은 새삼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숲은 맹수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까요. 마을에 내려가 인명 피해를 끼치는 맹수들의 개체 수를 줄일 겸 사냥터를 이곳으로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구나.
루시안이 그냥 사냥 대회라고 해서 그런 의도가 숨어 있는 줄은 몰랐다.
‘뭐, 루시안에게는 사슴을 잡는 것이나 맹수들을 잡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같이 사냥하는 귀족들만 고생이네.’
잡은 사냥감을 수레에 실은 폴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루시안 님 덕분에 오늘 영지민들이 포식할 수 있겠습니다. 이놈들은 덩치가 큰 만큼 먹을 게 많으니까요. 가죽도 두툼해서 비싼 값에 팔릴 테고 말이죠.”
척박한 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공작가의 집사다운 알뜰한 생활력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대충 잡은 것 같으니 마무리하자.”
“알겠습니다.”
폴은 나팔을 불었다.
잠시 후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귀족들이 모였다.
다시 보니 그들의 차림새는 평범한 사냥 복장이 아니었다. 묵직한 철 갑옷을 걸치고 데리고 온 병사의 수도 엄청났다. 게다가 핼쑥해진 얼굴까지.
마치 사냥이 아니라 전쟁을 나갔다 온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옆에 쌓여 있는 사냥감들을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다 카르디엔 공이 잡으신 사냥감이란 말입니까?”
“역시 듣던 대로 솜씨가 훌륭하십니다.”
그럼, 그럼. 누구 남자인데 당연하지.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던 나는 귀족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
붉은 눈의 공작, 루시안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나도 루시안의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루시안을 보는지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직접 루시안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자 그의 옆에서 지켜봤던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분명 공포심이 가득한데, 눈꼬리는 힘겹게 휘어져 있었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까마득한 두려움과 경멸이 담긴 얼굴을 미소로 겨우 숨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루시안은 늘 이런 시선을 받고 있었던 거야?’
심장이 아파 왔다.
그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귀족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며 이상함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카르디엔 공작?”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단 한 발짝도 내게, 아니 루시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그들과 루시안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루시안의 곁에 다가온 건 폴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폴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러나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왜냐면 누구보다 루시안을 따르는 폴의 눈동자조차 선연한 두려움이 어려 있었으니까.
그 순간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루시안의 육체는 단단하고 강한데,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싸늘했다.
마치 눈보라 치는 겨울날,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오늘의 사냥은 여기까지요. 다들 고생이 많았소.”
고개를 숙인 나는 낮은 목소리로 사냥의 끝을 알렸다.
* * *
나는 카르디엔 성을 향해 달렸다.
말은 타지 않았다. 진짜 힘을 발휘하면 루시안의 다리가 훨씬 빨랐으니까.
엄청난 속도로 내내 달렸음에도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다.
몸이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지도 않았다.
루시안의 육체는 너무나 강인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꼭 죽은 사람처럼.
“루시안!”
나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곳엔 페르니아의 모습을 한 루시안이 있었다.
페르니아의 몸으로 온갖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어 보며 인형 놀이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루시안은 두꺼운 이불을 돌돌 말고 있었다.
얼굴만 쏙 내민 채로.
우스운 모습이었는데도 웃음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평온하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쿵쿵 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뜨거운 열기가 몸속에 가득 찼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무런 색도, 향도 없는 세상 속에 오직 당신만이 알록달록하게 색이 있어요. ]라고 했던가.
그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루시안의 눈에 비친 나는 말도 안 될 만큼 예뻤으니까.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루시안을 와락 껴안았다.
온몸에 이불을 돌돌 감싸고 있던 루시안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면 안 돼요, 니아.”
“뭐가 안 돼요. 내가 내 몸 껴안는다는데.”
“내 몸은 힘이 너무 세요. 당신 몸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요. 몇 시간 동안 멧돼지 잡으면서 그 정도 힘 조절은 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래도…….”
루시안은 한껏 걱정이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니아, 당신의 몸은 너무나 여린걸요. 이렇게 작고 가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설마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놀랍게도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못 움직였다가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요.”
너무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루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페르니아의 녹색 눈동자에 한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보고 싶었던 얼굴을 이제야 보네요.”
루시안이 붉은 눈동자에 비친 여인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나도 그래요.”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맞추었다.
내 몸이었을 때나 그의 몸에 있을 때나, 키스는 똑같이 달콤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우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강인한 육체에서 비실거리는 육체로 돌아온 건 아쉽지만 괜찮았다.
진짜 루시안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내가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는지.
그래서 나는 빙긋 웃었다.
받아라, 반짝반짝 공격!
예상대로 루시안은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안&페르니아 편,
fin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