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4
2. 카르디엔 공작가의 후일담 -유리아나 편-
카르디엔 공작가의 장녀 유리아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다.
‘아버지는 어머니 생각뿐이고, 어머니도 아버지 생각뿐이고, 여동생은 칼 휘두를 생각뿐인 망나니잖아.’
그리고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 후부터 유리아나의 책임감은 더더욱 강해졌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 카르디엔 공작가를 키워야 해.’
악마의 힘을 가졌다는 루시안의 악명이 있기에 감히 카르디엔 공작가를 넘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국에서 손꼽힐 만한 명문가가 될 수는 없었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수많은 귀족과의 긴밀한 관계. 척박한 북부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재력. 붉은 눈동자임에도 많은 이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망.
물론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리아나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분야를 공부했다.
역사, 정치, 예술, 외교, 사교까지.
다행히 유리아나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다. 그녀는 스펀지처럼 수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아버지의 검술 실력을 이어받지는 못해 아쉽지만 그건 루나가 가지고 있으니까, 이걸로 충분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리아나는 아름다운 레이디가 되었다.
카르디엔 성의 서재. 유리아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읽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페르니아가 방에 들어섰다. 페르니아의 손에는 차와 다과를 담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차 한잔 마시고 하렴, 유리아나.”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 고마워요, 어머니.”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하는 딸을 보며 페르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부터 루시안의 일을 돕기 시작한 유리아나는 일에 미쳐 있었다.
유리아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카르디엔 공작가의 이름을 드높일지, 효율적으로 영지민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북부 개발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어쩜 저렇게 아빠와 다른지.’
최소한의 업무만 하고 페르니아의 옆에 달라붙어 있을 생각만 하는 루시안과는 천지 차이였다.
물론 일에 미친 것도 좋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리아나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늘 서류 더미와 함께 사는 딸이 안타까웠다.
페르니아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날씨가 화창하단다. 오늘 같은 날은 나가 놀면 얼마나 좋니.”
“일이 바빠요.”
“그렇게 일만 하다가 제대로 연애도 한 번 못 하고 나이 들면 억울해서 어쩌려고.”
그 말에 유리아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딸에게 연애를 들먹이는 공작 부인은 어머니밖에 없을 것이다.
작위가 높은 귀족일수록 연애란 불필요한 것이니까.
귀족들은 가문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자식들을 결혼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유리아나,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만나 보렴. 연애는 정말 재미있거든. 번개처럼 짜릿하고, 봄바람처럼 몽글몽글하고, 어느 날은 비 오는 날처럼 축축하기도 하단다.”
그렇게 말하는 페르니아는 행복해 보였다.
다 큰 자식을 둔 여인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유리아나는 페르니아가 아직도 저렇게 소녀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아나와는 전혀 달랐다.
유리아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와 교제한 적이 없다.
남자에게 호감이 생긴 적도 없지만, 무엇보다 연애를 하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혼자인 건 곤란하겠지.’
유리아나는 스무 살. 슬슬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다.
귀족에게 결혼의 의미는 컸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반편이 취급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최대한 가문에 도움이 되는 상대를 만나야 해.’
그런 시기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맑은 목소리로 유리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아나 영애. 오래전부터 당신을 흠모했습니다. 영애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유리아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휜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노들런드 대공의 다섯 번째 아들이지.’
노들런드 대공가는 황실의 핏줄을 이은 명망 있는 귀족 가문으로, 남부 전역을 지배했다.
노들런드 대공가와 인연을 맺는다면, 아직 변방에 머물러 있는 카르디엔 공작가는 단번에 중앙으로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섯째 아들이면 후에 결혼할 때도 문제가 없을 테고.’
유리아나는 카르디엔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데릴사위가 되어 카르디엔의 성을 따라 줄 남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눈앞의 남자는 최고의 결혼 상대였다.
‘……그리고 이 사람, 아빠를 닮았어.’
물론 남자가 아무리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한들, 대륙 최고의 미남자라 꼽히는 루시안과 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또렷한 시선이. 맑은 미소가 어린 얼굴이.
그래서 유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었다.
그렇게 유리아나의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 * *
유리아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남자와는 인연이 없었다.
카르디엔 공작가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보통 남자들은 카르디엔 공작을 두려워해 차마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했으니까.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이미지도 한몫했고.
그러나 아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서는 스스럼없이 유리아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아침 햇살을 보니 당신이 생각나서 찾아왔어요, 유리아나.”
“당신은 늘 아름다워요, 유리아나.”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
그의 목소리는 늘 애틋하고, 그의 눈빛은 늘 사랑이 넘쳤다.
아서는 쉴 새 없이 달콤한 말을 내뱉었고, 그가 그럴 때마다 유리아나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떻게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
빙긋 웃는 아서의 미소는 유리아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조건이 괜찮으니 만나 보자 했던 유리아나의 마음은 어느새 변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리아나는 아서가 무릎을 꿇고 청혼을 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유리아나를 껴안았다.
며칠 뒤, 아서가 말했다.
“유리아나. 부모님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괜찮으면 시간을 좀 내줄 수 있나요?”
유리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서와 교제를 하긴 했지만, 아직 한 번도 그의 부모를 만난 적이 없었다.
노들런드 대공 부부는 편안하게 만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니 만나 보는 게 좋겠지.’
유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들런드 대공가는 멀었다.
북부와 남부. 제국의 끝과 끝이었으니 당연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유리아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노들런드 성 앞에 선 유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과연. 제국의 부를 반이나 차지하고 있다는 대공가답구나.’
새하얀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한 성은 거대한 예술품 같았다.
어설프게 화려했다면 모든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가는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울 뿐이었다.
아서가 유리아나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죠, 유리아나.”
다정한 목소리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기죽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래서 유리아나는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아서를 따라 성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유리아나는 노들런드 대공 부부와 대면했다.
“카르디엔 공작가의 장녀 유리아나 인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유리아나는 바짝 긴장했다.
긴 역사를 가진 노들런드 대공가와 비교하면, 카르디엔 공작가는 갓 태어난 아기와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카르디엔 공작은 평민 출신.
그러니 무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주제도 모르고 제 아들과 교제를 하냐며 혼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대공 부부는 환한 미소로 유리아나를 맞이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서에게 듣던 대로 아름다운 아가씨로군요.”
“…….”
생각지도 못한 환대였다.
노들런드 대공은 유리아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아서에게 이야기를 들어 두 사람이 교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뻤지. 그 유명한 카르디엔 공작가와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니까.”
유리아나는 좀 얼떨떨했다.
카르디엔 공작의 섬뜩한 힘에 눈치를 보는 귀족은 많았지만, 저토록 순수하게 호의를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과연 대귀족은 다르구나.
유리아나는 감탄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공 전하. 아서에게 이 말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여인의 몸이긴 하나 저는 카르디엔 공작가의 후계자입니다. 제 남편은 카르디엔의 성을 이어받아야 해요.”
소중한 아들이 데릴사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볼품없는 평민도 내 아들이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하냐며 한탄하기 마련인데, 고고한 노들런드 대공가는 어련할까.
그러나 이번에도 대공의 반응은 유리아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 또한 알고 있다. 어차피 다섯 번째 아들이라 마땅한 작위도 내려주지 못해 마음이 쓰였는데 잘되었지.”
“…….”
너무도 온화한 대답은 유리아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옆에 있던 아서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요, 유리아나. 노들런드는 당신을 환영한다고.”
우리의 결합에는 축복만이 있을 뿐이에요.
부드러운 아서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우리가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이왕 놀러 왔으니 성을 둘러보도록 해요. 노들런드 성에는 볼거리가 많답니다.”
노들런드 대공비의 말에 아서와 유리아나는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아서는 유리아나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성을 안내해 주었다.
노들런드 성은 제국의 건국과 동시에 지어진 성이었다. 성은 제국의 유구한 역사와 남부의 풍요로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잘 정비된 거대한 호수, 벽에 걸린 수십 점의 명화, 어느 것 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리아나를 가장 흥분하게 하는 곳은 서재였다.
말이 서재지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거대한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으니까.
유리아나가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에. 절판된 책들이 이렇게 잔뜩 꽂혀 있다니 여긴 천국인가요?”
아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책을 사랑하는 유리아나에게는 천국보다 더 천국 같은 곳이죠.”
평소 차분했던 유리아나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책을 읽어도 되나요? 물론 먼지만큼도 상하지 않게 조심히 볼게요.”
“당연히 되죠.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건데.”
“고마워요!”
유리아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책장으로 향했다.
고개를 든 유리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또 정신을 놔 버렸구나.”
유리아나는 책에 한번 빠지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고요한 서재에는 유리아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아서가 잠시 나갔다가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유리아나는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책을 한 권 더 읽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그랬다가는 성을 나서는 시간이 너무 늦어질지도 몰라.’
아무리 노들런드 대공 부부가 자신을 잘 대해 준다고 해도 그런 실례를 저지를 순 없었다.
유리아나는 아서가 올 때까지 서재를 둘러보기로 했다. 책을 보면 참지 못하고 또 읽어 버릴 것 같아서 책장을 제외한 곳을 구경했다.
서재에서 책을 빼면 구경할 게 뭐가 있겠나 싶지만, 워낙에 크고 섬세하게 지어진 방이라 볼 게 많았다.
잠시 후 유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미묘하게 색이 다른 벽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 여기만 색이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벽돌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닥과 벽이 빙그르 돌더니 유리나를 벽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벽 안에는 우아하게 꾸며진 작은 방이 있었다. 그제야 유리아나는 벽돌의 정체를 깨달았다.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장치였구나.’
귀족의 성에는 위급할 때를 대비한 장소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곳도 그런 방이었다.
본의 아니게 들어온 은밀한 방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주인이 허락도 하지 않은 곳을 엿보는 건 예의가 아냐. 어서 나가자.’
다행히 아까와 같은 위치에 색이 다른 벽돌이 보였다. 벽돌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달칵.
벽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나?”
아서의 목소리였다.
그뿐이면 당장 나가겠는데, 이어진 목소리는 유리아나를 당황하게 했다.
“유리아나 영애가 없니?”
노들런드 대공비의 목소리였다.
‘부인께서 왜 여길 오신 거지?’
그 물음에 답하듯 노들런드 대공비가 말을 이었다.
“같이 차라도 한잔하고 싶어 왔는데 어딜 갔을까?”
“제가 없어서 서재를 나갔나 봐요.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인데. 어서 찾으러 가야겠어요.”
아니에요. 유리아나 카르디엔,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대공비의 목소리에 벽돌을 누르려던 유리아나의 손이 멈췄다.
“아서. 설마 그딴 계집애에게 진심이 된 건 아니지?”
‘……뭐?’
유리아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들런드 대공비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 계집애에게 다가간 건 카르디엔이 되기 위해서잖니. 그렇게 되면 너는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악마라고 불리는 카르디엔 공작도 사랑하는 딸의 남편에게는 손대지 못할 테고, 너는 손쉽게 북부에 자리 잡게 될 테지.”
“…….”
“그 후에는 노들런드의 힘을 이용하여 너를 북부의 실세로 만들어 줄 거야. 카르디엔의 성을 가진 노들런드의 핏줄이 북부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 계집을 아껴 주렴. 그래야 네게 모든 것을 퍼 줄 테니까.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건 용납 못 한다.”
유리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충격과 분노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리아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니라고 해.’
오늘 처음 만난 대공비가 아무리 뭐라고 한들, 아서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을 생각이었다.
그를 사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당연하죠.”
상냥한 목소리는 아서가 맞았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은 유리아나가 보아 왔던 아서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음흉했다.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싸하다고 해도 그 여자는 결국 악마의 자식이에요. 게다가 천박한 평민 출신이죠. 그런 여자에게 진짜 마음을 준 것이 아니냐니, 어찌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세요.”
그 순간 뚝 하고 유리아나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방금 전까지 가슴에 휘몰아치던 분노도, 눈가에 차올랐던 눈물도, 사그라들었다.
마치 그에 대한 감정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그제야 유리아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었구나.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거였어.
그가 날 사랑하는 만큼, 그를 사랑하기 위해.
그런데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건 즉, 더는 저 개소리를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유리아나는 벽돌 위에 손을 올렸다. 아까처럼 벽과 바닥이 빙그르 돌더니 유리아나는 서재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아서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유, 유리아나. 어째서 그런 곳에서…….”
유리아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황한 아서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었다.
유리아나는 아서의 옆에 놓여 있던 물병을 들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쨍그랑-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서의 정수리가 새빨간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현기증과 구토감이 밀려오는 듯, 그는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우욱.”
결국, 아서는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쓰려져 버렸다.
“세상에, 아서!”
노들런드 대공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공비가 다급히 다가와 아서를 부축했다. 아서가 바들바들 떨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아서는 패닉 상태에 빠져 파르르 떨고 있긴 했으나, 숨소리가 골랐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대공비는 유리아나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노들런드 대공가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냐!”
유리아나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부인. 저를 기만한 자를 고작 죽음이란 벌로 용서할 리 없잖아요.”
“뭐?”
유리아나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제발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괴롭혀 줄 생각입니다. 저는 그런 것에 자신이 있거든요.”
싸늘한 눈매로 입꼬리를 살짝 올린 모습은 조금 전까지 얌전해 보였던 영애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악마가 현신한 것 같았다.
그러나 노들런드 대공비 또한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짓눌리는 위압감을 떨쳐내며 소리쳤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이곳은 노들런드 성이야. 너의 편은 아무도 없다고! 당장 네 목을 벨 수도 있단 말이다.”
유리아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 보세요.”
“……!”
“장담하건대, 내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순간 노들런드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테니까. 내 아버지, 카르디엔 공작은 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각별하시거든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대공비는 눈을 부릅떴다.
카르디엔 공작가와 노들런드의 대공가의 전력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가 훨씬 우위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카르디엔 공작이 ‘정상적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
카르디엔 공작이 진짜 힘을 발휘하면, 그 앞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대공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녀의 눈빛에 어린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
유리아나는 눈동자를 내리깔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가문을 지키고 싶으면, 당신이 안고 있는 자를 카르디엔 성으로 보내도록 해요. 일주일 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말이에요.”
“……!”
명백한 협박이었다.
대공비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이내 대공비는 제 아들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아, 아서. 어서 용서를, 용서를 빌거라.”
그러나 아서는 출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즉 제대로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아파요, 아파요, 어머니.”
흐느끼는 아서를 향해 대공비가 소리쳤다.
“당장 사과하라고, 이 멍청아!”
어미나, 아들이나 하는 짓이 가관이었다.
유리아나는 서늘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나쳤다.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쓰레기의 말 따위 들을 가치가 어디 있다고. 닥치고 벌이나 받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일까. 유리아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성을 나왔다.
화려한 노들런드 성을 바라보며 유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역시 나한테 남자는 필요 없어.”
끔찍한 일을 겪었건만 어쩐지 마음은 후련했다.
* * *
며칠 후 카르디엔 성으로 아서가 도착했다. 아서는 유리아나를 보자마자 흐느꼈다.
“유리아나. 그때 일은 오해예요. 어머니께 장단을 맞추느라 그런 말을 했을 뿐 저는 정말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어.”
“네.”
아서는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후 유리아나가 아서에게 어떤 벌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예견했던 대로 아서는 제발 죽여 달라며 매일같이 빌었다.
시간이 흘러 유리아나는 2대 카르디엔 공작이 되었다. 그녀는 북부를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카르디엔 공작가는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의 가문으로 올라섰다.
유리아나는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자식은 있었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유리아나를 꼭 닮은 딸이었다.
“가장 탐나는 유전자를 가진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 낳았지. 후계자는 필요하니까 말이야.”
그녀는 아기의 뽀얀 뺨 위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왜 나는 엄마만 있냐는 궁금증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많은 걸 주마, 아가야.”
아기는 까르르 웃었다.
유리아나 편,
fin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