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36
4. 카르디엔 공작가의 후일담 -로즈 편-
올해 14살이 된 소년, 로즈 카르디엔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일단 그는 거대한 북부의 지배자 카르디엔 공작의 막내아들이었다.
공작 부인이 아들을 품속의 고양이처럼 예뻐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위의 두 누이는 어떤가.
장녀 유리아나는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북부의 사교계를 휘어잡았고, 차녀 루나는 기사단에 들어가 온갖 전투에서 승승장구 중이었다.
많은 이들이 로즈를 부러워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강인한 분들의 사랑을 받다니. 너는 참 행복하겠다.]그들의 말대로 로즈는 행복했다.
로즈의 세상은 풍요롭고, 사랑이 충만했으니까.
그래서 로즈는 늘 해사한 미소를 달고 살았다.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년의 미소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요즘 로즈가 변했다.
부쩍 말이 없어지고, 내리깐 눈매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심란한 얼굴로 창가를 바라보는 로즈를 몰래 지켜보는 세 여인이 있었다.
페르니아와 두 딸이었다.
“대체 로즈가 왜 저러는 거지?”
페르니아의 물음에 유리아나가 대답했다.
“왜 저러긴요. 로즈도 드디어 사춘기가 온 거죠. 딱 그럴 때잖아요.”
루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꼬맹이가 사춘기라니. 웃긴다.”
유리아나가 눈을 흘겼다.
“루나, 너도 이제 조심해. 로즈 방에 노크도 없이 훌렁훌렁 들어가지 말고. 로즈도 이제 어엿한 남자야.”
“흥, 남자는 무슨. 아직 수염도 한 가닥 안 나고 몸에 근육도 하나도 없는 앤데. 아직 아기야.”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데.”
“이 멍청이가.”
페르니아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옥신각신하는 딸들을 무시하고 다시 로즈를 바라보았다.
로즈는 얼마 전 수도에 다녀왔다.
제국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제국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명망 있는 교육 기관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런 곳이니 몇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올해 겨우 14살이 된 로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로즈의 불합격을 예상했다.
그리고 로즈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시험 결과가 걱정되어 저러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시험장에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거 아냐?’
로즈는 지금까지 대부분 시간을 카르디엔 성에서 보냈다.
공부도 가정교사를 초빙해서 배웠으니 딱히 외출할 일이 없었다.
종종 성 밖으로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걱정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이곳은 북부, 카르디엔이 지배하는 곳이었으니까.
북부의 백성들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로즈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수도는 다르다.
로즈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느껴 본 적 없던 시선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짙은 경멸과 적의 어린 시선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페르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수도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페르니아는 로즈가 그런 어두운 감정 따윈 모르고 크길 바랐다.
봄에 핀 꽃처럼, 따스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만 알길 바랐다.
그러나 그건 역시 너무 큰 욕심이었나 보다.
* * *
똑똑, 노크 소리에 로즈는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페르니아였다. 페르니아의 손에는 한입 크기로 잘라 놓은 과일과 우유가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페르니아를 보는 순간 로즈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페르니아는 공작부인임에도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간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페르니아가 로즈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좀 쉬고 해. 그러다 정말 몸이 상하겠어.”
수도에 다녀온 후, 로즈는 밤새워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공부를 성실하게 하는 타입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치열하지는 않았다.
페르니아는 글씨가 빼곡한 로즈의 노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복숭아 한 조각을 이제 막 입에 넣으려던 로즈가 동작을 멈췄다. 페르니아는 복숭아를 마저 로즈의 입속에 넣어 주며 말을 이었다.
“수도에 다녀온 후 부쩍 얼굴이 안 좋아서 그래. 내게는 말하기 곤란한 일이니?”
복숭아를 우물거리는 로즈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페르니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페르니아는 그것에 희망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천사처럼 순했지만, 로즈는 이제 14살이다.
한창 예민해질 시기. 엄마의 관심을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즈는 두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더니, 복숭아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
“……사실은요, 어머니.”
“응, 응.”
페르니아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해 봐.
뉘 집 아들이 괴롭혔니. 엄마가 당장 가서 귓방망이를 날려 줄게!
그러나 이어진 로즈의 말은 페르니아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 * *
아카데미 시험 당일, 로즈는 침착하게 문제를 풀었다.
워낙에 어려운 시험인지라 감히 합격을 자신할 순 없었지만, 다행히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왔다.
‘부디 합격하기를.’
속으로 기도를 하며 로즈는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장 바깥에는 오늘 시험을 본 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수도에서 살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로즈를 힐끗힐끗하며 수군거렸다.
“진짜 붉은 눈동자네.”
“합격하면 저런 애랑 아카데미 생활을 같이해야 한단 말이야? 소름 끼쳐.”
“그러니까. 너무 무섭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부정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페르니아와 두 딸이 알았더라면 ‘네 이놈들!’이라며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의외로 로즈는 태연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제국에는 오래전부터 붉은 눈동자는 악마가 내린 저주라고 보는 인식이 있었다.
게다가 붉은 눈을 가진 카르디엔 공작 덕분에 인식이 달라진 북부와 달리, 수도에는 아직도 붉은 눈동자가 낯선 존재였다.
그러니 그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했다.
‘괜찮아, 나는 악마의 저주 따위 받지 않았으니까. 나를 잘 알게 되면 저런 말들은 하지 않게 될 거야.’
그것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의 자신감이었다.
그래서 로즈는 소년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본 소년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과 황자님이시다!”
황녀와 황자라는 말에 소년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소년들이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창틀에 우르르 달라붙었다. 로즈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가까이 온 로즈를 보고 한 소년이 멈칫했지만, 로즈는 싹싹하게 말했다.
“나도 같이 보고 싶어. 괜찮지?”
그 목소리가 어찌나 상냥하던지. 게다가 로즈에게는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창틀에 무사히 안착한 로즈는, 소년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두 남녀가 보였다.
황태자의 자녀인 루시와 페시였다.
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황녀 루시와 새까만 머리카락과 얼음 조각상 같은 미모를 뽐내는 황자 페시. 전혀 다른 매력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소년들은 황홀한 얼굴을 했다.
“어쩜, 정말 멋지다.”
루시와 페시는 전 국민에게 사랑받았지만, 특히 10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영특한 머리, 고결한 황족의 핏줄까지 가지고 있으니 당연했다.
취향에 따라 루시파와 페시파로 나뉘었는데, 로즈 곁에 있던 소년들은 루시파였던 모양이다.
“꼭 여신께서 세상에 현신하신 것 같아.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우시지.”
“외모만이 아니야. 영특함도 최고지. 이번에 전쟁까지 갈 뻔했던 귀족들의 갈등을 해결하신 것도 루시 님이잖아.”
유명한 일화였다.
두 귀족 사이에 분란이 일어났다. 자칫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루시가 나섰다.
루시는 두 귀족 가문의 가주를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이쯤에서 화해하는 게 어떻소.] [싫습니다.] [싫습니다.]사이좋게 대답하는 두 사람을 향해 루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내 방식대로 처리해서 두 분을 사이좋게 만드는 수밖에.] […….] [예로부터 공통의 적이 생기면 돈독한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지. 내가 두 분의 적이 되겠소.]화사하게 웃는 황녀가 내뱉은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당장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황족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라는.
두 귀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현 황실은 제국 역사상 가장 황권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단단하게 황권을 잡고 있는 황제와 평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황태자비 에스텔,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신과 같은 존재인 루시와 페시까지.
황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귀족 가문 한두 개 따위 하루아침에 제국 역사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귀족은 언제 싸웠냐는 듯 엄청난 속도로 포옹했다.
[사랑하네!] [마찬가지네!]루시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턱을 치켜세운 루시는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친하게 지내니 얼마나 좋아.]아무튼, 이런 식으로 루시는 귀족들의 일에 관여하는 일이 많았다. 평민들에게 관심이 쏠려 있는 페시와는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소년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루시 님은 황제가 되실 분이니까.”
현 황제는 나이가 들어도 정정했다. 역사상 가장 오래 제위에 앉을 것이라는 예측이 세간에 돌 정도였다.
현 황태자인 칼릭스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연로하여 황위를 물려줄 즈음엔 나 또한 젊지는 않겠지.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기 위해서는 젊고 건강한 황제가 필요해. 그래서 나는 그때가 되면 장녀 루시에게 황위를 양도할 것이다.]많은 이가 황태자의 입장 표명에 놀랐지만, 누구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이미 오래전에 정무를 내팽개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이자 성녀인 에스텔의 내조를 하는 데만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납득했다.
그래. 아내 바보 황태자보다는 총명한 루시 님이 낫지.
무엇보다 루시는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이 있었다.
청초한 외모와 달리 불꽃같이 열정적이었고, 우아한 몸짓과 달리 폭풍우처럼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황제가 되리라.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대감을 품게 했다.
“…….”
소년들의 기대 어린 눈빛을 지켜보던 로즈는 자신이 먼지보다 초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디엔의 양자가 된 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기분이었다.
* * *
페르니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제 마음을 고백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페르니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루시가 너무 잘나서 패배감이 들었다는 거니?”
“그럴 리가요!”
정답이 아니었구나, 이런 젠장!
페르니아는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로즈는 입술을 깨문 채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나 같은 건 루시 님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괴로워진 거예요.”
“…….”
그제야 페르니아는 로즈가 가진 고통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아챘다.
사랑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매년 여름이 되면 카르디엔 성으로 루시와 페시가 놀러 왔다.
카르디엔 삼 남매와 두루두루 친남매처럼 잘 지내는 페시와 달리, 루시는 대놓고 로즈만 예뻐했다.
루시는 원래 (외모와 달리)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루시가 특정한 사람에게 잘해 주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빠도 돌같이 보는 얼음 같은 내 딸이 예뻐하는 놈이 생긴 것이 정말이냐!’ 하며 칼릭스가 쫓아와 구경하고 갔을 정도였다.
로즈도 그런 루시를 잘 따랐다.
당연했다.
제게 한없이 다정한,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페르니아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얼굴로 생각했다.
‘……단순히 누이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데다가 각자 부모들끼리 엄청난 절친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났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루시가 로즈에게 ‘내게 장가와~’ 타령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로즈가 너무 예뻐서 하는 장난일 테니까.
그런데 정작 로즈에게는 그 말이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로즈의 가슴속에서 루시는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제야 로즈가 왜 그렇게 이른 나이에 멀고 먼 수도에 있는 제국 아카데미 시험을 봤는지도 이해가 갔다.
‘루시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거구나.’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연정.
풋풋하고 미숙한 설익은 감정.
낄낄거리며 그건 첫사랑이라고, 언젠간 지나갈 거라고 말하기에는 로즈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보며 스스로의 미숙함에 속상해할 만큼.
‘이를 어쩐담.’
고민 끝에 페르니아가 말했다.
“로즈, 넌 아직 어려.”
그러니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돼. 그런 말을 듣게 되나 싶어 로즈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린 소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아직 다 크지 않았다는 거야. 어떤 어른이 될지 모른다는 거지. 넌 자작나무보다 클 수도 있고, 장미꽃보다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황금보다 빛날 수도 있단다.”
“…….”
“그러니까 난 왜 이렇게 어리냐며 풀 죽을 시간에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도록 해. 알겠니?”
톡 쏘는 목소리에는 애정이 충만했다.
로즈는 멍한 얼굴로 페르니아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고마워요, 어머니.”
페르니아는 아직 자신보다 작은 로즈의 등을 토닥이며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고뇌라니. 아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 컸네.’
대견한 만큼 아쉬움이 큰 걸 보니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아들 바보인가 보다.
* * *
며칠 후. 로즈는 훈련장에서 루나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루나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으니까.
반면 로즈는 일반 귀족들이 교양으로 배우는 정도만 검술을 익혔을 뿐이다.
“허리가 비었어!”
루나의 검이 매섭게 로즈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민첩한 로즈라도 번개처럼 빠른 검을 피할 수 없었다.
루나의 검이 로즈의 허리춤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안 봐줬으면 죽었어. 고맙지?”
“…….”
얼굴이 창백해진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가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으며 루나를 바라보았다.
“누님. 한 번 더 대련해 주세요.”
“…….”
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전 같으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나를 따라 검사의 길로 들어섰다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걸린단 말이지.’
그것은 본능적인 감이었다.
로즈가 갑자기 이렇게 열심히 검술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에는, 그리 즐겁지 않은 사정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감.
도대체 요즘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고 따지려던 차였다.
유리아나가 드레스를 살랑이며 훈련실에 들어와 말했다.
“얘들아. 루시 님이 오셨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로즈의 눈이 커다래졌다.
로즈의 얼굴은 한여름의 복숭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몇 년 전부터 루시는 무척 바빠졌다. 황위 계승자로서 황제의 정무를 본격적으로 배우면서부터였다.
자연스럽게 카르디엔 성에 오는 날도 적어졌다.
틈만 나면 왔던 이전과 달리, 최근에는 여름 휴가 때와 로즈의 생일날만 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루시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로즈를 설레게 했다.
‘무슨 일로 온 걸까.’
사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본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처럼 달려가던 로즈는 걸음을 멈추었다.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보인 두 사람 때문이었다.
루시와 루시안이었다.
루시가 루시안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루시안, 부인과 함께 황성에 놀러 오세요. 어머니께서 부인과 루시안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답니다.”
“……생각해 보지.”
“정말요? 그럼 약속해요.”
루시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루시안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루시안은 귀찮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이 단단히 얽힌 것을 본 루시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로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루시는 해사한 외모와 달리 사람들 앞에서 쉽게 웃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저렇게 어린아이 같은 미소는 더더욱.
그러나 루시는 루시안의 앞에서는 늘 저런 식으로 웃곤 했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저런 장면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루시의 시선이 로즈에게 닿았다.
“잘 지냈니, 로즈?”
루시가 조금 전보다 환하게 웃었지만 로즈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즈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물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전해 줄 게 있어서 왔어.”
잠시 로즈를 바라본 루시가 제 품에서 꺼낸 것은 한 장의 서류 봉투였다. 봉투 앞면에는 십자가와 책이 그려진 인장이 찍혀 있었다.
로즈의 눈이 커졌다.
“이건…….”
“그래. 제국 아카데미의 합격증이란다. 나오자마자 받아 왔지.”
루시의 얼굴에 한껏 기대감이 차올랐다.
로즈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아카데미의 합격 소식. 그것도 14살에 본 첫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엄청난 쾌거였다.
얼마나 기뻐할까.
너무 좋아 로즈답지 않게 소리를 지를지도. 아니면 감격해서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반응이라도 사랑스러울 거야.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루시는 먼 길을 찾아온 것이다.
루시의 기대대로 로즈는 기뻐했다.
붉은색 눈동자가 환희에 가득 찼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녹색 봉투를 소중히 품에 안은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축하해, 로즈.”
자연스럽게 루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로즈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로즈는 루시의 품속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기에 루시의 얼굴이 굳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로즈가, 저 귀여운 존재가 자신을 피했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런 루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로즈가 말했다.
“저 사실 루시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네가 내 포옹을 거부할 만큼 중요한 말?
그런 건 세상에 없어.
어딘가 섬뜩한 루시의 눈빛에 로즈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자리를 옮기자는 말이었다.
‘알았으니까 먼저 안기기나 해.’
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당장 저 작은 머리통을 제 품속으로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폭한 행동은 일절 하지 말 것.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천사처럼 행동할 것.
그것이 루시가 로즈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철칙이었으니까.
그래서 루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과 동시에 로즈는 다급한 얼굴로 루시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루시안을 힐끗 째려보며.
그 시선이 꼭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같아서 루시는 속으로 웃었다.
* * *
로즈는 루시를 제 방으로 안내했다. 루시는 여러 번 로즈의 방에 와 본 적이 있었기에 편안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쿵.
문이 닫히고, 조용힌 방 안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원래 키가 큰 데다가 구두까지 신은 루시는 로즈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루시를 올려다본 로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가 눈썹을 내렸다.
“왜 그래, 로즈? 오늘 정말 이상하구나.”
“…….”
루시가 로즈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속상한 일이라도 있어? 뭐든 말해 봐.”
어쩌면 이렇게 다정한지.
로즈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로즈가 말했다.
“실은 얼마 전에 알게 됐어요. 루시 님의 첫사랑이 아버지라는 사실이요.”
“아…….”
루시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루시는 아기였을 때부터 루시안을 좋아했다. 루시안과 만나면 껌딱지처럼 안겨 있었고, 루시안과 헤어지는 순간이면 목이 쉬도록 울었다.
그런 루시를 보며 칼릭스는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제 딸 옆에서 같이 울었고.
‘그런 적이 있었지.’
루시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추억을 회상했다.
지금은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루시안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렸을 때처럼 집요한 애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모르는 로즈는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저를 아껴 주신 거죠? 제가 아버지를 닮아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루시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루시가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 로즈가 고개를 들었다. 한없이 순진했던 붉은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감정이 어려 있었다.
질투였다.
그것을 본 루시는 등 뒤가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로즈가 말했다.
“요즘 루나 누님께 검술을 배우고 있어요. 누님 말로는 운동 신경이 좋아서 금방 실력이 늘 것이래요. 아버지만큼은 무리겠지만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
그제야 루시는 뽀얀 로즈의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여유 넘쳤던 루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감히.’
루시는 싸늘한 얼굴로 로즈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에 부드러운 손가락이 닿는 순간 로즈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루시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로즈는 괜찮다는 듯, 루시의 손에 편안하게 얼굴을 기댄 채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전 머리가 아주 뛰어나진 않지만 끈기 하나는 자신 있어요. 누구보다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최고의 학자가 될 거예요.”
루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즈가 귀여웠기 때문이다.
훌륭한 기사에 최고의 학자라니. 마치 어린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제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즈가 말을 잇는 순간, 루시는 머리에 망치를 땡, 하고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분명 루시 님께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죠?”
“…….”
대답 없는 루시를 향해 로즈가 필사적인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저라도 루시 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겠죠?”
루시는 그냥 로즈가 제 또래에 비해 영특하고 성실해서 이른 나이에 아카데미 시험을 봤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로즈가 제 뺨 위에 머무르고 있던 루시의 손을 잡았다.
로즈의 손은 아직 루시보다 작았다. 하지만 튀어나온 뼈마디와 긴 손가락은, 이제 곧 그의 손이 루시의 손보다 커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로즈가 루시의 손을 제 입술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제게 다시 청혼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제발요.”
로즈의 긴 속눈썹이 안쓰러울 만큼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로즈는 루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애틋하면서도 정열적인 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루시는 버릇처럼 로즈에게 말하곤 했다.
[로즈. 내게 장가오렴.]루시는 언젠가부터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로즈도, 다른 사람들도 루시가 어른이 되어 유치한 장난을 그만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답게 성장하는 로즈를 바라보며 루시는 위험한 충동을 느꼈다.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정말로 제 곁에 두고 싶은 욕심.
루시는 원하는 게 생길 때 한 번도 참고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참았다.
로즈는 너무 귀하고 예쁜 아이니까. 너무 소중한 아이니까.
그렇게 루시는 제 진심을 마음 깊숙이 묻어 두었다.
‘네가 조금 더 크면, 나와 눈이 마주칠 만큼 자라면,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네게 청혼을 할게.’
그렇게 숨겨두었던 진심을, 이런 식으로 로즈가 헤집어 꺼낼 줄은 몰랐다.
“남의 속도 모르고.”
“네?”
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진한 반응에 루시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짧은 시간에 훌쩍 커 버린 것 같더니 아직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니 지켜 줘야지.
지금 당장 황성에 끌고 가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루시는 웃었다. 로즈가 넋을 놓고 바라보곤 하는 천사의 미소였다.
“알았어. 네 말대로 그때가 되면 다시 청혼할게.”
“……!”
“그러니까 어서 크렴.”
쪽.
루시의 보드라운 입술이 로즈의 동그란 이마 위에 닿았다.
로즈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루시는 입꼬리를 올렸다.
로즈 편,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