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4
0.01퍼센트나 올려놓았던 호감도가 급속도로 하강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되지, 안 돼!
“사과하지 마세요. 사람이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게 있는 것도 당연하죠. 카르디엔 경은 전쟁터에서는 죽음의 춤으로 적들을 다 아작 내시잖아요? 홀에서 빙글빙글 도는 춤 따위야 좀 못 추더라도…….”
아니야. 이거 아니야. 위로가 아니라 비꼬는 것 같잖아. 나는 급격하게 말의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경에게 춤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예……?”
“어차피 약혼식 때 저와 춤을 추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지금 와서 춤 선생을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으실 테고요.”
이 기세를 살려 그가 마음 변하기 전에 휘몰아치는 거야, 페르니아!
“설마 약혼녀의 성의를 거절하실 만큼 무례하신 분은 아니겠죠?”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확신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 * *
‘피곤한 하루였어.’
나는 지친 얼굴로 저택에 돌아왔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왔구나, 페르니아. 카르디엔 경은 잘 만나고 왔니. 처음 만나는 자리라 어색했겠구나. 내가 그 마음을 정말 잘 알지. 나도 네 엄마를 처음 만났던 날 그랬거든. 어찌나 어색하고 입이 바짝 마르던지, 차를 다섯 번이나 새로 시켰단다. 그것을 보고 네 엄마가 나보고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하하하하. 아마도 내가 병이 있으면 파혼할 생각이 아니었나 싶어.”
내 아버지, 라일락 후작은 희대의 투머치토커였다.
나는 그 말을 얌전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단호하게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네. 잘 만나고 왔어요.”
말이 끊긴 아버지는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카르디엔 경은 다친 곳 없이 건강하더냐. 아무리 용맹한 기사라 해도 그토록 긴 시간 전쟁터에 있었으니······.”
“멀쩡했어요.”
이번에도 초반 방어에 성공했다.
아버지는 두 차례나 공격이 막히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쳐다보았자 내 귓구멍은 아버지의 투머치토크를 받아 줄 만큼 착하질 않았다.
“오…….”
이번에는 입을 벌리는 순간 방어했다.
“피곤하니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입을 뻐끔거리는 아버지를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잊지 말거라, 페르니아. 카르디엔경을 잡아야 라일락 가문이 사는 거야.”
웃겨, 진짜.
라일락 후작가는 사실 이름만 남은 가문이었다. 사업이 줄줄이 망해 가세가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반대로 루시안은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아 앞날이 창창한 제국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페르니아는 그토록 경멸하는 남자와 약혼을 했다.
문제는 약혼을 한 후에도 페르니아가 루시안을 무시하는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습은 늘 아버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루시안이 오만한 딸에게 정이 떨어져 약혼을 물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아버지, 이제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그가 이 약혼을 물리기 전에 내가 이 약혼을 물릴 생각이거든요.’
그와 조금 더 친해지면 기회를 봐서 그에게 약혼 파기에 대해 말해 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내가 애정하는 서브 남주라도, 다른 여자를 절절히 짝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그도 강제로 약혼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을 테지.’
그러니 더더욱 그와 성녀의 관계를 진전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앤.”
“네!”
하녀 앤이 쪼르르 달려왔다.
페르니아가 워낙 패악을 떨어 댄 덕에 앤의 몸놀림은 훈련받은 암살자처럼 재빨랐다.
“편지지와 펜을 가져다줘.”
“네!”
앤은 재빨리 향기가 나는 최고급 편지지와 펜을 준비해 왔다.
내가 쓴 편지는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성녀 에스텔에게.
이번 약혼식에서 나와 루시안에게 축복의 춤을 같이 춰 달라는 편지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 민폐가 아닌가 싶었지만, 루시안과는 친한 사이이니 들어주겠지?’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루시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아니, 이건 너무 내가 약혼녀라는 걸 어필하는 것 같잖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완성된 편지는 앤에게 바로 배달을 부탁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까.
* * *
루시안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받은 영지는 저 먼 북부에 있었다.
그래서 수도에 있는 동안은 황제가 마련해 준 저택에 묵는다고 했다.
나는 그곳을 수업 장소로 택했다.
저택에 도착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최고급 대리석이 반짝이는 어마어마한 대저택이었다.
새삼 그가 황제에게 총애받는 기사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쫄 거 없어.’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나도 지체 높은 후작가의 영애였다.
그것도 미인이지.
치켜 올라간 눈매가 조금 표독스럽긴 했으나 페르니아는 청보라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문이 열리는 순간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페르니아 영애.”
“······.”
와 씨, 욕 나올 뻔했어.
너무 예뻐서.
당연히 집사가 나올 줄 알고 방심한 탓에 그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타격이 컸다.
‘게다가 저 모습은 뭐야.’
얼마 전 카페에서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올리고, 주름 하나 없이 각 잡힌 정장 차림이었다.
지나치게 완벽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오히려 그의 미모가 덜 와 닿았다.
명화 속 그림이나,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하얀 얼굴 위로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그 아래로 단추가 두어 개 풀어진 새하얀 셔츠라니.
서브 남주에게 약하고, 미인에게 더더욱 약한 내게는 자극이 너무 심했다.
심상치 않은 내 표정에 루시안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몸에 달라붙는 정장이 익숙지 않아서요. 불쾌하시면 제대로 갖춰 입고 오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코피가 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예?”
“지금 모습 엄청 좋다고요.”
나는 눈을 크게 뜬 그를 지나쳐 갔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참으로 죄 많은 남자였다.
거대한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저택에는 고용인이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물리니, 연회장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거대한 홀에는 나와 그, 둘뿐이었다.
나는 먼저 그의 상태를 파악했다.
“춤을 아예 못 추시는 건가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춤을 제대로 출 줄 모른다는 것이 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부끄럽다는 핑계로 도망치지 않게 다독여 줄 필요가 있었다.
“사교춤이라고 해도 별거 없어요. 기본 왈츠죠. 사교계를 후끈 달아오르게 할 만한 댄스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전혀 어렵지 않아요. 며칠이면 익힐 수 있답니다.”
“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앞에 섰다.
“자, 첫 시작은 마주 보고 서는 거예요.”
나도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이었건만(게다가 구두까지 신었는데) 그와 눈을 맞추려면 한껏 고개를 들어야 했다.
옆에서 봤을 때보다 더 크네.
속으로 감탄을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눈을 마주치고······.”
“······.”
와,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루비 같아.
저렇게 예쁜데 왜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나왔을까.
아니, 나중에 가서는 악마의 저주를 받았던 게 맞기는 했다만 어쨌건 지금은 아니잖아?
흑화하지 않은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예쁘기만 했다.
잠시 후, 그가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페르니아 영애, 그렇게 계속 쳐다보셔야 합니까? 저는 그런 식의 시선이 무척 불편합니다.”
“아…….”
낮은 목소리에 아차 싶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나 이내 내 시선은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춤의 기본은 눈을 마주치는 것인걸요. 그러니 어쩔 수 없어요. 견디세요.”
내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인 그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빤히 쳐다보는 것이 불쾌해 저런 말을 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다.
살짝 빨개진 얼굴을 보니 부끄러워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귀여워 속으로 키득거렸다.
* * *
“인사하는 법은 안다고 했죠?”
“네.”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그의 앞에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도 한쪽 다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제대로 춤을 배워 본 적이 없는 것치고는 제법 우아한 동작이었다.
“자, 이제 손을 맞잡을 차례예요.”
그가 어색한 몸짓으로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 위로 손을 얹었다.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거치네.’
처음 닿은 그의 손은 딱딱한 물집이 잡힌 검사의 손이었다.
고생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아기처럼 보들보들한 내 손과는 전혀 달랐다.
“페르니아 영애?”
그의 목소리에 내가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위로 돌리며 말했다.
“스텝부터 알려 줄게요. 조금 어렵긴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카르디엔 경의 앞에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가 있으니까요.”
재수 없는 말이었지만 정말이었다.
페르니아는 비록 까칠하고 싸가지도 없었지만, 귀족 영애로서의 소양은 훌륭히 갖추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만한 나의 착각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루시안은…….
“왼발이 아니라 오른발이 앞으로 나와야 해요.”
“네.”
“아니, 지금은 왼발이 나와야 하고요.”
“……죄송합니다.”
“턴을 하면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왜 그렇게 멀리 가 버린 건가요?”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춤이 끝났는데도 음악이 계속 나오네요. 이거 되게 민망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끔찍한 몸치 앤 박치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신이 빚어 만든 것 같은 완벽한 남자가 몸치라니!
이보시오, 작가 양반. 설정이 너무 인간적인 것 아냐?
결국 반나절을 내리 연습했음에도 진도는 거의 나가질 못했다.
“······죄송합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나마 생기가 있었던 루시안은 완벽하게 풀이 죽었다.
환각처럼 축 처진 꼬리가 보일 정도였다.
“춤을 제대로 춰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도 이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죄인이 된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제게 역시 이런 것은 어울리지 않나 봅니다. 수업은 여기까지 하는 게…….”
“지금 누구 마음대로 수업을 끝내려는 거예요?”
“예?”
나는 흑화되는 그가 두려워 지금껏 (나름) 다정하게 대해 줬다.
그러나 조금 전의 엄청난 몸놀림을 보자 그런 것들을 차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형형한 눈빛으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수업을 시작한 것은 나. 그렇다면 끝낼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지금 수업을 끝낼 생각이 없고요.”
그것은 오기였다.
이런 엄청난 피지컬을 가지고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다니.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당장 일어나세요!”
무엇보다 약혼식에서 우스운 꼴을 보일 순 없어.
너는 내 최애캐니까!
* * *
며칠이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수업은 무기한 길어졌다.
다행히 루시안은 전쟁이 끝난 후 긴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약혼식은 아버지가 준비를 다 해 둔 상태라 나도 시간이 넘쳐났다.
덕분에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요. 여기서 등을 맞대고 동시에 턴.”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턴만 하면 구만리 밖으로 멀어져 있었다.
나는 빙그르 돌면서 염원했다.
있어라. 제발 어디 가지 말고 있어.
그리고…… 빙그르 한 바퀴 돌고 온 내 눈이 커졌다. 처음으로 그가 제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으흑.
눈물이 새어 나올 뻔했다.
역시 사람은 뭐든 하면 되는구나.
뭐, 스텝은 여전히 숭구리당당 숭당당에, 음악은 음악대로 나오거라 나는 내 길을 가련다 스러운 엇박자였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나아졌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정말 잘했어요!”
내 칭찬에 한껏 긴장했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렇습니까?”
“그래요. 적어도 지금은 춤처럼 보이잖아요.”
“……그 전에는 춤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네. 이세계의 마왕을 부르는 줄 알았다니까요.”
“······.”
단번에 분위기가 쏴아아 가라앉았다.
나는 뒤늦게 입을 막았다.
이놈의 입방정. 요즘 엄한 선생 역할에 너무 심취해 중요한 것을 잊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흑화하는 서브 남주.
절대 거슬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돼.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아~ 열심히 움직여서 그런가. 목이 마르네. 주스 한 잔 마시면서 할까요?”
“······예.”
그는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매일 얼굴을 마주 보고 춤을 춘 보람이 있었다.
그와 나를 둘러싼 공기는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적어도 국어책 읽듯이 어색하게 대화를 나눴던 첫날 같지는 않지.’
나는 색이 선명한 레몬 주스를 홀짝이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복숭아를 갈아 만든 분홍색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여워.’
소설을 읽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그의 소소한 면을 아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루시안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왜 이렇게 열심히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사실은요, 여주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져서 당신이 흑화해 버리거든요. 눈이 뒤집혀서 거슬리는 사람들은 다 죽여 버리더라고요.
원치도 않았는데 약혼녀랍시고 아롱다롱 매달려서 온갖 욕을 해 대던 저야 뭐, 하하하하.
저는 젊은 나이에 요절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라는 말을 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그럴듯한 답변을 말했다.
“제 약혼자니까요. 저는 제 약혼자가 춤을 제대로 추지 못한다고 사람들에게 뒷말 듣는 일 따위 용납하지 못해요.”
말을 내뱉고는 흠칫했다.
‘이 말 좀 재수 없지 않아?’
의도는 다분히 나는 네 편이야, 이었건만 페르니아의 까칠한 얼굴과 조금 높은 목소리 때문에 엄청나게 거만하게 들렸다.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카르디엔 경이 부끄럽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정말이라고!
최대한 내 말을 믿어 주길 바라며 두 눈을 이글거렸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있습니다.”
“······.”
“페르니아 영애는 내 편이니까.”
아, 그거.
내가 그에게 처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이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혹시 그 말이 마음에 들었나?’
역시 약혼녀라고 쓰지 않길 잘했다. 훌륭해, 과거의 나.
새삼 과거의 나를 칭찬하는데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게 내 편, 이라고 말해 준 건 페르니아 영애가 두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가 무척 인상 깊었어요.”
“첫 번째는 누군데요?”
나올 대답이 누구의 이름인지 알고 있으면서 물었다.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내 편’이라는 말이 손에 꼽을 만큼 외롭게 자랐던 그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에스텔 님이십니다.”
예상했던 대답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고작 그럴 뿐인데 어쩜 이렇게 애절할까.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붉은색 눈동자가, 그럼에도 숨기지 못한 감정의 파편이 보는 사람까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성녀님께서 카르디엔 경을 수도로 데리고 와 기사로 만들어 주셨죠?”
“맞습니다.”
굳이 그에게 물을 것도 없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제국 곳곳에 있는 매음굴이나 빈민가 같은 음지를 다니며 사람을 구제하고 다니던 에스텔은 한 빈민가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자라고 있던 루시안을 데리고 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데리고 있던 사내에게 돈을 주고 샀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에스텔의 보호 속에서 루시안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상을 마주 보았다.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검을 배우고, 사람과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그런 사람이니 사랑하게 되는 게 당연하지.’
차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만큼.
만나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까 봐 전쟁터를 헤매고 다닐 만큼.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야. 짜장면 하나도 먹지 못하고 구경만 하면 피눈물이 나는데, 저렇게 절절한 마음을 왜 숨기냐고.’
나중에는 그 마음이 감당이 되지 않아 악마가 되어 버릴 정도면서.
“제가 만약 카르디엔 경이었다면 전 성녀님을 사랑했을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내뱉은 내 말에 그가 미세하게 어깨를 움찔했다.
마치 정곡을 찔린 것처럼.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지옥 같은 곳에서 구원해 준 사람이니까.”
“······.”
“매일같이, 아니 일분일초 단위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겠죠.”
갑자기 웬 생뚱맞은 말이냐고 생각하겠지.
성격 이상한 약혼녀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꼭꼭 닫힌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리길 바라며.
나를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던 루시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 심하시군요, 영애. 저주받은 남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도망가실 겁니다.”
“설마요.”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두 눈을 휘며 웃었다
“그분도 평범한 여자인걸요. 아주 기이한 취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렇게 말하실걸요.”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대―박.”
아, 그러니까 난 왜 잘나가다가 늘 이 모양이냐고.
* * *
“……대박이요?”
루시안이 해괴한 말을 들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표정에서 엄청난 고뇌가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귀족 용어인가? 외국어인가?’
잔뜩 고민하고 있는 게 느껴져 나는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 카르디엔 경은 오랜 시간 전쟁터에 나가 계셔서 모르시군요. 그 말은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에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감탄을 할 때 쓰는 말이죠.”
“그렇군요.”
의심이라곤 1도 없는 얼굴을 보니 조금 찔리긴 하지만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니니까.
여기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유행하는 말이라 그렇지.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 말은, 카르디엔 경이 고백한다고 불쾌해할 사람은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말아요!”
유부녀만 아니면 성녀든 수녀님이든 직진하고 보란 말이야, 이 소심한 남자야!
내 말을 이해한 건지 만 건지, 루시안은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깔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페르니아 영애, 당신 정말…….”
…···응. 나도 주책인 거 알아.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해.
다행히도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 *
“오늘은 좀 일찍 도착했네.”
나는 루시안의 저택에 도착했다. 며칠 와 봤다고 거대한 저택의 크기에도 익숙해졌다.
나를 맞은 건 루시안의 부관인 폴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페르니아 님. 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루시안은 저택에 많은 일꾼을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폴이 저택의 관리와 그의 시중을 모두 맡고 있었다.
상사의 일과 일상을 모두 챙기는 충직한 부하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가 예전 페르니아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도 눈빛이 사납네.’
폴의 경계 어린 얼굴에는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루시안 님을 매일 만나러 오는 거지.’라는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는 폴을 따라 연회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있죠, 폴.”
“말씀하십시오.”
“믿기지 않겠지만 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카르디엔 경을 도우러 온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폴과 나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킨 후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너랑 나 같은 편. 오케이?
폴은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4년 전 영애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폴은 페르니아를 흉내 내는 듯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평민 출신에 악마의 저주를 받은 괴물이 최연소 기사로 임명되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라고요.”
왜 그랬어, 페르니아야.
무서울 게 없던 악녀 꿈나무 페르니아를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폴은 험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 와 제게 영애의 진심을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폴은 연회장의 문을 매정하게 닫고 사라져 버렸다.
‘너무해. 과거야 어쨌든 지금의 나는 루시안의 왕팬이라고.’
언젠간 폴과 루시안 공식 팬클럽의 회장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는 상상을 하며 나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적막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던 것도 처음 며칠뿐이었다.
지금은 아주 편하다.
‘괜히 고용인들 눈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어디 간 거지?’
보통 때는 나를 직접 맞아 주었던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이내 나는 루시안을 발견했다.
그는 구석에 놓여 있는 소파에 서 잠들어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그가 잠든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혹시라도 소리를 낼까 봐 입을 다물었다.
‘이런 횡재를 놓칠 수 있나.’
그는 놀랄 만큼 순진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의가 바르고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은빛의 긴 속눈썹도 살랑거렸다.
‘예쁘다. 그런데 얼굴이 좀 상했어.’
전쟁터에서 돌아온 직후 만났을 때조차 말끔했던 루시안의 얼굴에는 피로가 어려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제도 밤새 연습을 했나 보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어마어마한 몸치 앤 박치였던 그는 하루가 지나면 몸놀림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내가 돌아간 후로도 내내 연습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모든 것은…….
‘에스텔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겠지.’
약혼식의 다른 것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가 춤에만 유독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 뻔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에스텔을 좋아하는데 좀 더 용기를 내면 좋을 텐데.”
에스텔이 그의 마음을 받아 주냐, 주지 않느냐는 나중의 문제였다.
오랜 시간 숨겨 온 그의 마음이 더는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전했으면 했다.
진심이었다.
* * *
바스락.
작은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등을 기댄 루시안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피식 웃었다.
“잘 잤어요?”
“네.”
“더 잘래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네.”
잠에 취한 아기 고양이처럼 다시 눈을 감았던 그는 잠시 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싹 사라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한 시간 전에요.”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영애. 손님을 모셔 놓고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아요.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는걸요.”
“좋은 구경이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 그를 향해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얼굴이 붉어졌다.
“꼴이 엉망인 모양이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돈을 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거 아니야!
본의 아니게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경의 모습은 오늘도 아주 훌륭한걸요.”
그러니 내가 그렇게 넋 놓고 잠자는 모습을 봤지, 이 남자야.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찌나 잠을 얌전하게 자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게 다라고요.”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내 의도를 눈치챈 그가 잠시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만지기 쉽게 무릎을 살짝 굽혀 주기까지 했다.
명백한 허락이었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으니까.
상상대로였다.
“경의 머리카락은 꼭 이른 새벽의 거미줄 같네요. 가늘고 부드러워요. 내 머리카락은 억세고 구불거려서 이 맛이 안 나거든요.”
“그렇습니까?”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 부러워요.”
그 말에 루시안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 칭찬을 들은 것처럼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순한 말처럼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며 그가 말했다.
“영애는 늘 제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을 하시는군요.”
“혹시 불쾌하신가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니요.”
짧은 대답에 안도했다.
그만은 과거의 페르니아가 아닌, 지금의 나를 온전히 봐 주고 있는 것 같아서.
* * *
드디어 약혼식 날이 다가왔다.
“아가씨. 정말, 정말 아름다우세요!”
앤의 말은 단순히 성격 더러운 아가씨를 향한 아부만은 아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내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와!’
페르니아는 기본적으로 미인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메이크업, 드레스, 보석의 3단 콤보가 합쳐지니 평범한 미인은 어마어마한 미인으로 진화했다.
색이 선명한 청보라색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구불거렸고, 눈가에 바른 보랏빛 아이셰도 덕분에 녹색 눈동자가 더욱 또렷했다.
치켜 올라간 눈매와 붉은 입술마저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아버지가 없는 돈을 박박 긁어모아 구입해 준 붉은색 드레스까지 입으니 화려하면서도 도도했다.
‘쎈 언니 스타일. 완전 마음에 들어!’
나는 감격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다가 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장은 내가 했지만, 다른 건 모두 앤의 도움을 받았다. 보상은 확실히 해야지.
“고생했어, 앤. 보너스와 휴가를 줄게. 언제든 가고 싶은 날 다녀오렴.”
앤은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평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가씨!”
고용주가 뿌듯해할 만큼 훌륭한 리액션이었다.
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누구도 아가씨께 시선을 떼지 못할 거예요. 약혼자이신 카르디엔 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분명 아가씨께 한눈에 반해 버리실걸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이 꽤 훌륭하게 꾸며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루시안이 내게 반할 확률은 하루아침에 그가 댄스 머신이 될 확률보다 낮았다.
‘그토록 애절한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어?’
게다가 에스텔은 여주답게 세상에 있는 모든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제치고 그의 눈에 들 것이라는 기대는 눈곱만큼도 안 했다.
‘그보다는 좀 더 가능성 있는 일을 기대하는 게 낫지.’
나는 약혼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루시안뿐이었다. 나는 그간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붉은 눈동자가 저주의 상징이라고요?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달고 다녀야 그런 취급을 받는 거지, 미남이 달고 다니면 그냥 매력 포인트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영애. 저는 영애가 말씀하신 만큼의 미남이 아닙니다.]나는 무슨 소리냐며 구구절절 말하는 대신 그의 앞에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자, 딱 5초만 거울 속의 얼굴을 보세요. 자, 그 후엔 저기 창가에 있는 폴을 보세요! 어떻게 보여요?]폴에게는 많이 미안한 방법이긴 하지만 루시안에게는 직빵이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루시안을 향해 나는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나도 오징어로 보이니까. 계속 보다 보면 다시 폴로 보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어때요, 경은 미남이죠?]그는 더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씩이나마 자신감을 찾는 게 느껴졌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니아, 준비는 다 됐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몰락해 가는 후작 가문이라고 무시받으며 살다가, 오랜만에 저택에 유명 인사들이 우르르 찾아오니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다 됐어요. 지금 나갈게요.”
또 엄청난 투머치토크를 쏟아 낼까 봐 잽싸게 대답하며 문을 연 나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루시안이었다.
요 며칠 보았던 편안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붉은 루비가 장식된 하얀 예복을 입고, 은빛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진 예술품처럼, 완벽한 남자의 모습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맨날 홀려 놓고 오늘도 홀리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겨우 입을 뗐다.
“……일찍 도착했네요, 카르디엔 경.”
“······예.”
그답지 않게 한 박자 늦은 대답에 나는 키득 웃었다.
“오늘 정말 멋져요.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꾸며 보았는데 역시 경을 이기는 건 무리였어요.”
(진심이긴 했지만) 농담으로 한 말이었건만 루시안은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페르니아 영애야말로 정말…….”
아름답습니다, 라는 형식적인 칭찬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에게서 튀어나왔다.
“대박이십니다!”
이 남자 응용력 보소.
* * *
“아까부터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페르니아 영애.”
니가 대박 귀여워서요.
라는 말을 해 보았자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말을 돌렸다.
“와, 저기 에스테반 공작님도 오셨네요. 이런 연회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시지 않는 분인데. 우리 약혼식이 대단하긴 한가 봐요.”
나와 루시안은 약혼식에 온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고된 일이었지만 의외로 수월했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바람 인형처럼 온몸을 흔들며 인사를 빙자한 투머치토크 공격을 시전했다.
아버지의 공격으로 생기의 반을 빼앗긴 손님들은 한없이 점잖았다.
나는 손님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옆에 있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있죠, 카르디엔 경.”
“예.”
“이 약혼식, 폐하와 우리 가문이 우겨서 억지로 하는 거잖아요. 카르디엔 경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루시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난 괜찮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약혼식 도중에 갑자기 웬 여자가 나타나서 이 품속에 안겨 있는 아기가 카르디엔의 아기라고 소리 지르는 일이 생긴다거나…….”
“예……?”
“나타난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일 수도 있고.”
“페르니아 영애!”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다 이해하니까 경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표 내든, 고백을 하든 괜찮으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그가 나에 대한 책임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성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까 봐 말해 준 것인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이전에는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비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스산해져 있었다.
마치 핏빛처럼.
등 뒤로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왜 저러는 건데.’
지금까지 별별 말실수를 다 했어도 정색하지 않았던 남자가 저런 표정을 하니 움찔했다.
‘내가 뭔가 거슬리는 말을 했나? 그런 적 없는데. 아직 흑화할 때도 아니고.’
등 뒤로 땀을 뻘뻘 흘릴 때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태자가 온다는 말은 없었기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연회장에 들어서는 남자를 보는 순간 입을 막았다.
‘니가 거기서 왜 나와?’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당당하게 걷는 이는 분명 황태자 칼릭스였다.
원작 소설의 진짜 남주이자 희대의 개초딩 남주.
에스텔을 좋아하는 제 마음도 모르고 내내 삽질하다가, 그녀가 떠나간 후에야 질질 짜며 후회하는 찌질이.
그런 남자 따위에게 매력을 느낄쏘냐, 라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남주는 역시 남주네.’
칼릭스는 칠흑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강인하면서도 반항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미남이었다.
고결한 아름다움을 가진 루시안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안의 앞에 선 칼릭스는 험악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아바마마께서 하도 가라고 성화를 내셔서 온 것뿐이지.”
첫 대사 부터 개소리를 늘어놓는 칼릭스에게 루시안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저 그 뿐이었건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내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과연 남주와 서브 남주였다.
칼릭스는 루시안을 쳐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국의 위대한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라일락 후작가의 딸, 페르니아라고 합니다.”
“그래. 그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칼릭스는 남주답게 여주 외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도 먼지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이야기?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칼릭스가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성녀에게 아주 특별한 부탁을 했다면서?”
이거 뭔가 불길한데.
“축복의 춤을 춰 달라고 했다지. 그대와, 카르디엔 경에게.”
‘카르디엔’이라는 이름을 내뱉는 칼릭스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섬뜩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원작대로라면 아직 칼릭스와 에스텔은 본격적인 로맨스가 시작되기 전이다.
이 무렵의 칼릭스는 ‘난 사랑 따위 믿지 않아!’라며 에스텔을 향한 애정을 부정했다.
그런 주제에 에스텔을 향한 관심과 집착은 대단했다.
질투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스텔이 루시안과 춤을 춘다는 사실이 불쾌하다는 거지, 지금?’
그리고 루시안에게 굳이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나였다.
‘에라이, 유치한 놈아.’
라고 외쳐 주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나가질 않았다. 칼릭스의 눈빛은 너무 섬뜩했으니까.
‘무서워.’
생리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쥐는데, 내 옆에 서 있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전하. 감히 요청하건대…….”
루시안의 목소리에 칼릭스가 시선을 돌렸다. 루시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뭐?”
칼릭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한없이 온화하기만 했던 루시안이 그런 말을 하는 게 황당하다는 듯.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지금. 나를 도와준 거야?’
웬일이니, 웬일이야!
원작에서 루시안은 페르니아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냐면, 페르니아가 아무리 패악을 떨어 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정도 였다.
그런 그가 나를 위해 저런 말을 하다니.
솔직히, 감동했다.
‘2주 내내 춤을 가르쳐 준 보람이 있구나.’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데 칼릭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대가 감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개 주제에?”
아, 맞다. 이놈 중2병이었지.
칼릭스는 희대의 개초딩후회남 주답게, 성격이 더러웠다.
칼릭스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섬뜩해졌다.
그것은 내 옆에 있던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이 사라진 루시안의 얼굴에는 온화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보세요, 두 분.’
아까의 공기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질식사로 죽는 건 아닐까, 라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순간이었다.
“황태자 전하! 루시안!”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였기에, 나는 속으로 언니! 하고 소리 지를 뻔했다.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자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성녀,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은 연회장을 유유히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평범한 외모로 묘사됐다.
외양은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성격으로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킨다고.
작가, 이 개거짓말쟁이야.
‘하나도 평범하지 않잖아!’
* * *
티 없이 맑은 백옥 같은 피부. 넘실거리는 금빛 머리카락. 반짝이는 파란색 눈동자.
이목구비가 또렷한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호불호가 나뉠 것 같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핵 호감상.’
에스텔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게 분명해 보이는 두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분,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셨어요?”
맑은 목소리로 물어본 에스텔은 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회의 주인공께 인사부터 해야 하는데 제가 실수를 했네요.”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니아 님. 성녀 에스텔 샹그리에입니다.”
손가락 하나까지 신경 쓴 귀족의 완벽한 인사가 아니었다. 서투르고 어설펐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꽉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에스텔은 해사한 웃음으로 답했다.
미소 점수 500점 드립니다.
몸을 돌린 그녀는 칼릭스에게도 인사를 했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녕하셨는지요.”
고작 인사 한 번 했을 뿐인데 효과는 엄청났다.
방금 전까지 대륙을 박살 낼 것같이 굴던 칼릭스의 험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평온한 상태로 돌아온 칼릭스는 에스텔을 향해 말했다.
“여전히 어설픈 몸짓이로군. 평민다워.”
아오, 저 중2병 새퀴.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울컥할 정도인데도 에스텔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귓가까지 얼굴이 붉어졌을 뿐.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도 아직 서툰 모양이네요.”
그리고는 눈썹을 내려 애써 웃었다.
“다음에는 좀 더 숙녀다운 인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흑흑. 저건 천사가 아니라 보살이잖아.
에스텔의 예쁘디예쁜 말에 칼릭스는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에스텔의 시선은 루시안에게 돌려진 상태였으니까.
“약혼 축하해, 루시안.”
가까이 있던 나는 분명 보았다.
루시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잠시 후 루시안이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에스텔 님.”
루시안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낮지도 않았다.
그저 평온했다.
그래서 더 슬펐다.
저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얼마나 속마음이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왔다.
그러나 내가 그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냥 악역 조연에, 강제로 맺어진 약혼녀일 뿐인데.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그의 손등 위로 손가락을 톡톡 쳤다.
‘괜찮아?’
그런 의미였다.
그가 그 의미를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손을 움찔하더니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 * *
약혼식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사랑스럽고 우아하며 춤과 보석을 사랑하는 나의 딸 페르니아와 제국의 가장 위대한 기사이자 황제 폐하에게 가장 신임받는 기사인 카르디엔 경의 약혼식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귀한 분들을 맞이한 이 홀은 무려 3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초대 라일락 후작이자 저의 선조이신 리치몬드 라일락 님께서 결혼식을 치른 곳으로, 당대에 이름 높았던 건축가 레오나도요가 설계 및 건축을 한 곳입니다. 최고급 르마블 대리석을 사용하였기에 3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채를 발하는 곳으로…….”
희대의 투머치토커 아버지의 인사가 너무 긴 것이 치명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길어도 너무 긴 인사를 끝낸 것은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칼릭스였다.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데?”
굿잡.
아버지께는 미안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아버지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했지만, 차마 칼릭스에게 네가 뭔데 내 말을 끊느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상으로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어딘가에서 박수가 새어 나왔다. 아버지의 눈빛을 받고 이내 그쳤지만.
인사가 끝난 후에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됐다. 춤의 첫 주인공은 당연히 나와 루시안이었다.
나와 루시안이 홀에 나가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약혼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공식적인 석상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귓속말을 열심히 속닥였다.
‘뭐, 무슨 말을 할지는 안 들어도 뻔하지만.’
누군가는 고고한 후작가의 영애가 출신도 변변찮은 남자와 약혼을 맺어 귀족의 자존심을 버렸다며 비아냥거릴 테고, 누군가는 저주받은 남자와 약혼을 한 페르니아를 동정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은 말은 아닐 테지.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평소처럼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살짝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떨려요?”
“예.”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100만 명의 적군 앞에서 검을 들고 싸웠다는 사람이 겨우 이런 것으로 긴장을 하다니 귀여웠다.
“걱정 마요. 나는 결코 만만하게 경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리며 말했다.
“혹시라도 못 춘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혼내 줄게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작 2주일의 훈련으로 그가 춤신춤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스텝도 겨우겨우 쫓아가고, 동작이 한 박자 늦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얼굴 연기에서 압승!’
그는 나와 연습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내게 내내 보여 주었던 당황해하고, 놀라고, 풀 죽었던 얼굴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여유가 넘치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워낙에 절세미남이니 그 효과가 대단했다.
“페르니아 영애가 훌륭한 실력을 가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카르디엔 경도 저렇게 춤을 잘 추시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그러게요. 정말 잘생겼어요.”
춤을 잘 춘다는 칭찬에 잘생겼다는 답변이라니. 도무지 그 둘의 상관관계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얼굴이 잘생겨서 좋긴 좋네.”
나는 중얼거리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라스트예요. 금방 돌아올 테니 잘 받아 주셔야 해요?”
또 엄한 데 가 있지 말고.
“예.”
루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급작스럽게 지진이 나서 땅이 반으로 갈라져도 그 자리에 있을 태세였다.
춤의 마지막 동작은 여자가 빙글빙글 돈 후 파트너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있으니 나도 조금 욕심이 생겼다.
‘악역 조연이 뭘 어떻게 해도 여주 같은 후광은 안 날 테지만, 자기만족이다, 뭐.
스텝을 좀 더 신경 썼을 뿐이지만 연습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리고, 풍성한 머리카락도 보기 좋게 흩날렸다.
빙그르르― 우아하게 몸을 돌린 후, 돌아간 곳은 루시안의 품속이었다.
그의 품속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박하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좋다.’
코를 찡긋하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어땠어요? 신경 좀 썼는데.”
“아…….”
루시안이 눈을 깜빡이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빙그르 돌아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눈을 찡긋하며 입술로 작게 말했다.
‘인사.’
내 말을 알아들은 루시안이 이내 허리를 곧게 펴더니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아버지는 물개 박수를 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훌륭한 한 쌍입니다! 사실 페르니아가 태어나던 날 이름을 지어 준 점쟁이가 그런 말을 했지요. 페르니아는 제국을 위기에서 구할 존재가 될 것이라고요. 그리고 카르디엔 경께서 실제로 긴 전쟁을 끝내 제국을 구해 내시지 않았습니까. 이래저래 두 사람은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 분명합니다.”
아, 아버지, 뻘소리 좀 그만해.
나는 아버지 옆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귀족들을 동정하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참 잘했어요.”
루시안이 제가 한 일이 믿기지 않는 듯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모두 영애 덕분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성공적으로 춤을 마친 것을 여유롭게 즐길 새가 없었다. 귀족들이 나와 루시안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두 분, 정말 훌륭한 춤이었어요!”
“제 심장이 다 콩닥콩닥했답니다.”
“언제 그렇게 연습을 하신 거예요?”
나는 루시안을 향해 소곤거렸다.
“일단 임무에 충실하죠.”
* * *
시간이 지나자 나와 루시안에게 향했던 관심은 사라지고, 연회장의 인기는 둘로 나뉘었다.
“카르디엔 경, 이렇게 연회장에서 뵈니 정말 좋네요. 앞으로도 자주 모습을 보여 주세요.”
“괜한 말로 부담 주지 마십시오. 늘 전쟁터에서 사시는 분이 그런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일명 카르디엔파.
대부분 젊은 귀족들이었다.
나이가 많은 귀족들은 그가 평민이라면서 암암리에 무시했지만 젊은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제국에서 가장 용맹한 기사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카르디엔 경, 경이 혼자 백 명이 넘는 적군과 싸웠다는 게 정말인가요?”
“아니요. 백 명이 아니라 백한 명요. 맞지요, 카르디엔 경?”
두 눈을 반짝이며 카르디엔에 관한 온갖 말을 떠들어 대는 이들은 어엿한 카르디엔 덕후라고 할 수 있었다.
‘옳은지고.’
나는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 흐뭇함을 느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전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일명 황태자파였다.
아이돌이라도 만난 듯 눈을 반짝이며 달라붙는 루시안 패거리와 달리 이쪽은 세상 깍듯한 태도로 칼릭스를 대하고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충성을 바친 기사를 위해 이런 곳까지 행차해 주시다니, 황태자 전하의 자애로움에 놀랄 따름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물론 마음 없는 아부만은 아니었다.
칼릭스를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과 동경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겁도 없이 칼릭스를 뿅간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들도 수두룩했다.
‘에비. 아서요, 언니들. 그놈은 여주가 아니면 사람으로 안 보는 놈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내가 예상한 대로 무표정한 칼릭스의 시선은 내내 한곳만 향해 있었다.
에스텔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향한 호감으로 가득 찬 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성별의 비율을 따지면 남자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과연, 여주야.’
하긴, 내가 남자라도 괜히 멀쩡한 인간을 오징어로 만드는 사내 두 놈보다는 에스텔의 곁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상냥하고, 부드럽고, 예쁜, 호감도 만렙의 성녀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절대 남주 앞에서 여주 주변을 서성거리진 않을 거야. 거기 모여 있는 남자들아, 너희는 정말 저 시선이 안 느껴지니?’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나조차 느낄 만큼 칼릭스의 시선은 흉흉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눈치를 집에 두고 연회장에 온 건지, 아니면 어여쁜 여주를 보느라 잠깐 마취를 당한 건지 에스텔을 향해 헤실헤실 웃기 바빴다.
그에 맞춰 칼릭스의 눈동자는 점점 스산해졌다.
남자들의 목숨이 걱정되는 한편 꼬시기도 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 입덕 부정기라서 뭐라고 말도 못 하겠고.’
역시. 개초딩 남주는 삽질할 때가 제일 꿀잼.
반면 루시안은 의외로 에스텔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얼굴도 담담해 보였다.
‘최대한 자기감정을 표 내지 않으려고 저러는 거겠지. 바보.’
그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며 나는 포도를 오물오물 씹었다.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저건 너무 심하잖아요. 이런 자리에 오면서 저런 초라한 드레스라니.”
들고 있던 포도가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러게 말이에요. 귀족의 약혼식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 평민들 생각은 알 수가 없어요.”
그녀들은 이 연회장에서 주인공 삼인방을 둘러싼 이들을 제외한 무리.
일명 페르니아파.
다시 말해, 주류에서 벗어난 악역 엑스트라들이었다.
여인들은 나를 향해 한껏 못된 얼굴을 하고 물었다.
“페르니아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니. 절대 아닌데?
그러나 내 대답이 나가기도 전에 여인들은 또다시 쑥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성녀가 얼마 전에 허락도 없이 황태자 전하의 방에 들어갔다면서요?”
“맞아요. 알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상처 입은 걸 치료해 주려고 그런 것이었다지만, 황태자 전하의 방에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건 좀 아니잖아요. 그것도 여자 혼자.”
“문란한 건지, 무식한 건지.”
이 아가씨들아, 미쳤어?
그녀들은 일부러 크게 말했다.
몇 발짝 떨어져 있는 에스텔에게 들릴 수 있게.
에스텔은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담담했다.
그녀는 애초에 이런 말에 휘둘려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개초딩 남주와 가슴에 흑염룡을 품고 사는 서브 남주였다.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이미 기분이 한껏 상해 있던 칼릭스는 사람 열댓 명을 죽인 살인마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루시안의 표정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두 남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진정해, 페르니아. 그렇게 깝쳐 댔어도 원작의 페르니아는 여기에서 죽지 않았어. 적어도 두 사람은 여기서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어떻게든 수습하면 된다.
최대한 빨리.
아이돌 콘서트 예매를 시작했을 때보다 빠르게.
나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아니요. 저는 성녀님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몰라. 문맥이고 맥락이고 그냥 결론부터 얘기하자.
그래야 시한폭탄 같은 두 남자와 에스텔의 기분이 한시라도 빨리 풀어질 테니까.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몸이 아프시더라도 쉽게 표 내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래서 황성의 의원조차 그날 전하께서 몸이 불편하신 걸 몰랐다고 들었어요. 유일하게 성녀님만 그 사실을 눈치채고 전하의 방에 들어가 치료를 했다고 하더군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병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요. 이 얼마나 자애롭고 용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인지!”
이때만큼 이 몸 안에 흐르는 투머치토커의 피가 고마운 적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진실하게 보이길 원하며, 두 눈을 사르르 휘며 말했다.
“성녀님 최고!”
엄지손가락도 들고 싶은 걸 참았다.
그것까지 하면 진짜 장난치는 것으로 보일까 봐.
연회장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루시안도, 에스텔도,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여인들도 다를 건 없었다.
‘니가 어떻게 우릴 배신해?’
라는 표정으로 날 보는 여인들이 또다시 사망 플래그를 시전하기 전에 나는 에스텔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성녀님, 편지로 부탁드린 축복의 춤을 지금 청해도 될까요?”
“……네.”
에스텔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과 나는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제야 겨우 안심했다.
‘여주와 함께 있는 한 무서울 건 없지.’
운석이 직격탄으로 날아와서 대륙의 반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주 주변의 반경 50센티는 안전할 것이다.
저 두 남자에게는 더더욱 그럴 테고.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아버지가 재빨리 손짓하자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화려한 음악과는 전혀 다른, 은은한 음악이었다.
사실 축복의 춤이라고 해도 별건 없었다.
평범한 왈츠다.
단지 춤추는 상대가 성녀라는 것이 다를 뿐.
“제가 성녀님보다 키가 크니 리드를 할게요.”
“네.”
에스텔은 나보다 한 뼘은 작아서 슬쩍 시선을 내려야 했다.
‘귀엽다.’
남자들이 왜 키 작은 여자를 사랑스럽다고 느끼는지 알 것 같다.
뭐랄까.
동그란 정수리라든가, 위에서 보는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귀여웠다.
‘아무리 악역 패거리라도 이런 사랑스러운 여주에게 그런 막말을 하다니.’
못됐어. 나빴어.
나는 스텝을 밟으며 에스텔에게 말했다.
“아까 들은 말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셨죠?”
에스텔이 눈을 크게 뜨더니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전 괜찮아요. 저런 말을 들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요.”
그 말에 가슴이 찡해 왔다.
에스텔은 여주인공답게 별별 고생을 다 한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박받고, 멸시받고, 오해받고, 음모에 휘말리고.
그런데도 그녀는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성녀니까.
그런데 있지. 그렇게 살다가는 암 걸린다, 에스텔아?
사람은 적당히 할 말 하면서 살아야 해.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며 말했다.
“가시 돋친 말은 매일 듣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좀, 잘 참게 되는 거지.”
“······.”
“똑같이 아파요. 한결같이 밉고.”
빙그르 도는 그녀를 잡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참지 말고 짜증 나는 것들은 다 조져 버려요.”
내 품속에 들어온 에스텔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두 볼을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제게 그런 말을 해 준 분은 페르니아 님이 처음이에요.”
음,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이런 여잔 니가 처음이야, 하고 남주가 한눈에 반한 여주에게 내뱉는 로맨스의 고전 대사였다.
‘이거 장르가 바뀐 건 아니죠?’
다행히 에스텔은 거기서 더 진도를 나가진 않았다.
내게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할 뿐이었다.
급작스러운 장르 변환의 위협에 잠시 정신이 나가 있던 나는 홀을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성녀님, 같이 춤을 춰 주셔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잖아요.”
“아, 그렇죠.”
나는 저쪽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시안을 불렀다.
“카르디엔 경, 경도 성녀님의 축복을 받으셔야죠.”
머뭇거리는 루시안을 재촉했다.
“어, 서, 요.”
이글이글 타는 내 눈동자는 조금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근데, 위협 맞아.
당장 오지 않으면 당신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한 마리 지랄 영애를 보게 될 것이야.
나의 눈빛이 먹힌 건지 다행히도 루시안은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루시안을 에스텔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소개팅을 주선해 주러 온 뚜쟁이 같은 말을 하고 나는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나와 에스텔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에스텔과 루시안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 눈물이 나올 뻔했다.
‘결혼식장에서 아빠가 딸을 사위한테 보낼 때 이런 느낌인 걸까.’
뭔가 아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나오지도 않는 눈가를 누르며 흐뭇하게 웃었다.
‘참 잘 어울리네.’
은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루시안과 찰랑이는 금빛 머리카락의 에스텔.
서브 남주와 여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투 샷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물질이 끼어들었다.
두 사람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보던 칼릭스였다.
‘저, 저, 저 빌어먹을 남주 놈이!’
나는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칼릭스는 그대로 에스텔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전하?”
에스텔은 커다래진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루시안이 움직였다.
루시안은 손을 뻗어 칼릭스의 손을 잡았다. 칼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감히 누구의 손을 잡는 거냐.”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에스텔 님의 손을 놓으십시오.”
“루시안 카르디엔!”
쿠쿠궁, 대기가 진동한다고 착각할 만큼 어마어마한 분노가 칼릭스에게서 새어 나왔다. 그러나 루시안도 만만치 않았다.
차가운 표정에선 아무리 칼릭스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끔찍한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질투의 화신 개초딩 남주가 언제든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너무 방심했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에 빠져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괜찮아.”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의 시선이 향한 곳은 루시안이었다.
“그러니까 손 놔, 루시안.”
“에스텔 님!”
루시안이 소리를 내뱉었지만 에스텔의 얼굴은 차분했다.
“어서.”
루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깨문 그는 많은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칼릭스를 잡았던 손을 뗐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니지?’
누가 좀 아니라고 말해.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것이 끝이었다.
험상궂은 얼굴로 손을 잡아끄는 칼릭스를 따라 에스텔은 연회장을 나갔다.
방금 전까지 에스텔과 루시안이 나란히 서 있던 자리에는, 루시안만이 허망한 얼굴로 혼자 서 있었다.
마치 그곳이 서브 남주의 자리라는 것처럼.
‘말도 안 돼.’
연회장에 드리워진 침묵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나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
‘지금이라도 다시 에스텔을 데리고 오자.’
루시안이 당신과 춤을 추는 것을 많이 고대했다고, 그러니까 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 될지도 몰라.
그녀는 루시안을 소중히 생각하니까.
방금 전에 내게 호의 어린 표정을 지어 줬으니까.
그러니까, 분명…….
“누구도 따라오지 말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해 칼릭스의 호위 기사들에게 막혀 버렸다.
“성녀님께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요!”
그러나 내 외침에도 기사들은 기계 같은 말만 반복했다.
“명령입니다.”
“이봐요, 당신들!”
그러는 사이에 칼릭스와 에스텔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난 이 제국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한 페르니아 라일락이야! 악녀 하나쯤은 진상 부리게 둘 수 있잖아!”
내 억지에 기사들은 조금 주춤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악녀에게 자비가 없었다.
“안 됩니다.”
결국 칼릭스와 에스텔을 태운 마차는 출발하고 말았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는 마차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올 정도였다.
‘뭐야. 뭐냐고, 이게.’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은 남자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잠을 자지 못해 고운 피부가 상할 정도로.
천 번을 반복해도 박자를 맞출 수 없어서 만 번을 반복할 정도로.
‘고백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저…….’
그저 그녀와 단 한 번 춤을 추기를 바랐던 것뿐인데.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귀족은 절대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말아야 한다는 규범 따윈 개나 주라지.
체면도 잊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데, 시야에 익숙한 신발이 나타났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신사의 구두.
“페르니아 영애.”
귀를 감싸듯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나는 알았다.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루시안이 무릎을 굽혔다.
눈앞에 다가온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 홀로 신파극을 찍다가 급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왜 이러고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당신이 에스텔과 춤을 추지 않은 게 울 만큼 속상했다는 말은 너무 이상했다.
그렇다고 황태자 놈과 성녀님이 가시는 게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나왔다는 건 더 이상하고.
무슨 대답을 해도 정신 나간 약혼녀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문 나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내 마음을 알았던 거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루시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은 알아채기가 쉬워요. 나 같은 사람도 속마음을 알아챌 정도로.”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아까보다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가 맞는데?
내가 아는 순진하고 착해 빠진 서브 남주.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보였다.
맑고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했으나, 수줍음이 사라진 그의 모습은 어딘가 조금…… 섹시해 보였다.
“페르니아 영애.”
“…….”
왜 그런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데.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심장이 콩닥거렸다.
루시안은 어린아이를 위로하듯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저는 당신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네?
“제게 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오싹, 하고 등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