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5
2. 외전 흑화하는 서브 남주랍니다
“저주받은 악마 놈……!”
그것이 적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루시안의 검은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강력한 일격에 적장은 별다른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데구루루.
적장의 목이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확인한 루시안은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는 순간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과 상처 하나 없는 맑은 얼굴이 드러났다.
전쟁터의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붉은 눈동자만큼은, 전쟁의 악귀라는 별명처럼 섬뜩했다.
루시안은 피 묻은 검을 닦아 내며 부관 폴을 바라보았다.
“죽었다, 모두.”
성가대의 노랫소리처럼 맑은 목소리에 폴은 어깨를 흠칫하더니 소리쳤다.
“장군님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 제국의 승리다!”
폴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피범벅이 되어 싸우고 있던 병사들도 우와아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무려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전쟁의 승리를 이끈 루시안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그곳에는 이 전쟁터와 비교하면 복잡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충성의 서약을 맹세한 황제와, 겉으로는 웃으며 속으로는 자신을 경멸하는 귀족들, 그리고…….
에스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문드러졌다.
‘보고 싶지 않아.’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길고 긴 전쟁터로 지원을 한 것은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을 테니까. 그녀의 웃음을 보고 싶을 테니까.
감히.
‘감히 악마의 저주를 받은 나 따위가.’
에스텔은 늘 루시안의 가슴을 옭아매는 존재였다.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나를 보러 올 텐데.’
어떻게 그녀를 피할지 고민하는 것은 늘 괴로운 일이었다.
그때 폴이 다가왔다.
“루시안 님, 라일락 후작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라일락 후작가라는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2년 전, 루시안은 약혼을 했다.
황제가 제멋대로 진행한 것이었다.
[루시안, 네가 귀족들에게 뒷말을 듣는 이유의 반은 붉은 눈동자 때문이고, 또 나머지 반은 너의 신분 때문이다. 눈동자야 어쩔 수 없지만 신분은 아니야. 좋은 혼처를 정해 줄 테니 결혼을 하여 제대로 된 귀족의 일원이 되거라.]그렇게 정해진 약혼녀가 라일락 후작가의 외동딸 페르니아였다.
그는 페르니아의 얼굴도 알지 못했다.
‘초상화로 한 번 본 것이 전부지.’
강제적으로 약혼을 한 날 초상화가 한 장 날아왔다.
그녀는 구불거리는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든 미소와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는 까탈스러운 성격이 느껴졌다.
같은 부대에 있는 귀족 기사들에게 그녀에 관한 말을 들었다.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미녀.
칭찬과 더불어 항상 따라 오는 말은 ‘그런데 좀 많이 솔직하시죠.’였다.
귀족 문화에 익숙지 않은 루시안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성격이 더럽다는 이야기였다.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상관없었다.
강제적으로 한 약혼.
그것도 귀족 중의 귀족인 그녀가 자신 같은 남자와.
얼마나 끔찍해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그녀도 안됐구나.’
미안한 감정 한 조각.
그것이 루시안이 페르니아에게 가진 감정의 전부였다.
* * *
페르니아를 처음 만난 날, 루시안은 놀랐다.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나갔는데도 그녀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얼마나 이 약혼을 끔찍이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나 일찍 온 건지도 가늠이 안 되는 그녀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티스푼으로 커피 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조금 놀라며 루시안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안 카르디엔입니다.”
루시안의 목소리에 페르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더니 빙그르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페르니아 라일락입니다.”
‘아…….’
루시안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초상화와는 전혀 달랐다.
색이 선명한 청보라색 머리카락과 고양이같이 치켜 올라간 눈매는 똑같았으나, 뭐랄까. 느낌이…….
‘전혀 다르군.’
그녀는 마치 잘 익은 포도알 같았다.
꼬불꼬불 넝쿨이 진 싱그럽고,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나는 동글동글한 보라색 포도.
‘내가 무슨 생각을…….’
루시안은 제 생각이 어이가 없어 속으로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전쟁터에서 늘 검, 활, 독, 시체, 이런 것들만 생각했던 그에게 통통 튀는 포도는 너무 어색한 것이었다.
루시안은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포도를 밀어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야 영애를 만나러 와서 죄송합니다. 전쟁이 길어져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말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 번은 왔을 것이다.
그녀가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해사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것은 거기까지였다.
역시나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해 보았지만, 명문가의 귀족 아가씨에게 할 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야 이런 침묵이 익숙하지만 그녀는 아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까는데 그녀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치셨잖아요!”
토끼처럼 커다랗게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루시안의 목가에 나 있는 작은 상처였다.
루시안은 당황한 얼굴로 상처를 가렸다.
그는 몸에 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최대한 사람들에게 숨겼다.
역시 괴물이었다는 둥 끔찍한 말을 들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관심을 거둘 줄 알았다.
그러나 페르니아는 파우치에서 의료용 밴드를 꺼내더니 그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자 코끝에 진한 장미꽃 향기가 느껴졌다.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오랜 시간 전쟁터에 머물렀던 그에게 그 향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르니아는 천진한 얼굴로 그의 목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목에 붙은 밴드를 야무지게 꾹꾹 누르며 그녀가 말했다.
“작은 상처라도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해요. 감염이라도 되면 얼마나 아픈데요.”
루시안은 이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적이 많았다.
전쟁터에서 그는 베이고, 뚫리고, 얻어터졌으니까.
그런데 고작 손톱만 한 상처에 그런 말을 하는 그녀가 루시안은 신기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놀란 고양이처럼 커다랗게 눈을 뜬 페르니아는 아, 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을 한 건지 깨달은 것처럼.
루시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페르니아 영애는 소문과는 좀 다르시군요.”
그녀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떤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당차게 대답했다.
“소문은 원래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자극적인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소문과는 전혀 다르죠?”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강렬한 눈동자였다.
루시안은 결국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러네요.”
그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웃음이 나온 것은 요 근래 처음이었다.
* * *
저택에 도착한 루시안을 맞아 준 것은 부관 폴이었다.
폴은 신중한 얼굴로 상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폴은 남작가의 영식이었기에, 사교 파티에서 이따금 페르니아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오만하고 악독한 귀족 영애의 표본이었다.
같은 귀족이라도 자기보다 서열이 아래인 이들은 얼마나 멸시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였으니 아무리 제국의 영웅이라 하나, 평민에 고아 출신의 제 상사를 얼마나 무시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조심스러운 폴의 물음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상냥하더군.”
상냥?
언제부터 상냥이라는 말의 뜻이 바뀌었나, 하고 황당해하는 폴에게 루시안이 말했다.
“그리고 내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더군. 약혼식 때 성녀님과 축복의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예?”
폴은 눈을 깜빡거렸다.
물론 특별한 날을 맞이하는 이들이 성녀에게 축복의 춤을 청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성인이 됐다거나, 생일을 맞이했다거나, 작위를 세습받을때라든가.
하지만 약혼식 때 성녀에게 춤을 부탁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아무리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해도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싶은 여자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제안을 수락하셨습니까?”
“그래.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으니까.”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루시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폴은 필사적으로 두뇌를 가동시켰다.
도대체 왜 페르니아가 저런 제안을 했을까.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폴은 루시안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 루시안 님과 성녀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일 겁니다.”
“뭐?”
“약혼식 날은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다 오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서 루시안 님과 성녀님이 춤을 추신다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분명 어떻게든 흠을 잡아 평민이라 저렇게 춤을 춘다는 둥 두 분을 묶어 깎아내릴 게 뻔합니다. 자기보다 낮은 이들을 깔아뭉개고 싶을 때 쓰는 치졸한 수지요.”
폴의 말에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그런 거였나.’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았던 그녀에게 그런 의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조금 의외이긴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귀족이란 원래 웃는 가면을 쓰고 손으로는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그녀를 만나 웃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루시안 님, 지금이라도 거절하십시오. 루시안 님께서 페르니아 영애에게 휘둘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만의 문제라면 상관없었지만, 에스텔까지 엮어 일을 벌이는 것이라면 이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아침에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그녀의 말은 고맙지만 에스텔과 춤을 추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정중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한번 수락했던 말이 달라지냐며 화를 낸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편지가 도착했다.
페르니아가 보낸 편지였다.
‘오늘 만났는데 오늘 편지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다급하게 보냈을까 생각하며 봉투를 열었다.
편지지에는 휘갈겨 쓴 시원한 글씨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른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의 편.’
그것만 눈에 들어왔다.
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귀족들은 음습하며 잔혹하다.
결코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직까지 목에 붙어 있는 작은 밴드를 매만졌다.
밴드 안의 상처는 한참 전에 사라졌음에도 그는 그것을 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서 오세요, 페르니아 영애.”
그녀를 조금 믿고 싶어졌기 때문에.
* * *
첫날, 페르니아는 루시안의 엄청난 춤 실력에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안이 봐도 자신의 춤 실력은 끔찍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같은 동작을 가르쳐 주어야 했고, 겨우 익혔다 싶으면 다음 날 다시 동작이 꼬였다.
어떤 춤 선생이 와도 도망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페르니아는 하루도 쉬지 않고 찾아와 루시안에게 춤을 가르쳐 주었다.
루시안은 궁금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열심히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제가 만약 카르디엔 경이었다면 전 성녀님을 사랑했을 것 같아요.”
그 순간 루시안은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음을.
루시안은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벽한 비밀이 없는 법이라, 그의 감정을 알아챈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루시안의 감정을 인질 삼아 협박한 이도 있었다.
[저주받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성녀를 넘보다니. 성녀가 그 사실을 알면 참 재미있겠어. 그렇지?]루시안은 그의 입에 검을 박아 죽여 버렸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켜 버렸다는 초조함과, 그가 에스텔에게 제 감정을 지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자처럼 나를 협박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단순히 놀리고 싶은 거야?’
어떤 의도라도 그에겐 전혀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루시안의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루시안은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페르니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천진한 얼굴로 주스를 홀짝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매일같이, 아니 일분일초 단위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겠죠.”
루시안은 마치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시안은 최대한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농담이 심하시군요, 영애. 저주받은 남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도망가실 겁니다.”
제길.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깨무는 루시안을 향해 들려온 대답은 경쾌했다.
“설마요.”
페르니아는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도 평범한 여자인걸요. 아주 기이한 취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렇게 말하실걸요.”
페르니아는 커다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
“대―박.”
과장된 얼굴로 생전 처음 듣는 말을 내뱉은 그녀는 당부하듯 말했다.
“아무튼 내 말은, 카르디엔 경이 고백한다고 불쾌해할 사람은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말아요!”
그제야 루시안은 페르니아가 제게 한 행동의 이유를 알았다.
성녀에게 축복의 춤을 부탁한 것도, 자신에게 그토록 열심히 춤을 가르쳐 준 것도, 모두 그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응원해 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편’인 것처럼.
그 순간 루시안의 심장 한편이 간질거렸다.
어쩐지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 * *
약혼식 날.
루시안은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다. 하녀 둘과 폴이 그의 준비를 도왔다.
루시안이 옷 입는 것을 거들며 폴은 내내 불만을 터뜨렸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치러지는 약혼식이 어디 있습니까. 루시안 님, 지금이라도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십시오. 라일락 후작가와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겠다고. 그럼 분명 그 악독한 영애와 파혼할 수 있…….”
열심히 떠들던 폴은 힉 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시안이 얼음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은 루시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루시안은 결코 화내는 일이 없다. 하지만 제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서는 저렇듯 싸늘한 무표정을 짓고는 했다.
그제야 폴은 제가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폴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시안 님.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됐다. 어서 옷이나 입혀 주렴.”
“네.”
폴이 걸쳐 주는 재킷을 입으며 루시안은 페르니아를 떠올렸다.
[약혼식을 위해 큰마음 먹고 새 드레스를 맞췄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저한테 엄청 잘 어울리더라고요. 돈이 좋긴 좋아요.]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늘 솔직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만큼.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는군.’
루시안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친히 내린 예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그림 속에 나올 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 누구도 그가 부모도 없이 시꺼먼 얼룩이 진 옷을 입고 자란 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서 새빨간 피를 온몸에 묻히고 다녔던 이라고는 더더욱.
루시안은 폴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라일락 후작가에 도착한 루시안은 후작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페르니아의 방문 앞이었다.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자니 어쩐지 목이 말라 왔다.
루시안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2주 내내 그녀를 봤는데 새삼 왜 이러는 건지.’
루시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답지 않은 감정을 정리했다.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페르니아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미인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이따금 보인 미소가 꽃처럼 해사하다는 것도.
그러나 진한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심하게 매혹적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남들 앞에 선다고?’
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한 유치한 생각에 진한 환멸을 느끼는데 페르니아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멋져요.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꾸며 보았는데 역시 경을 이기는 건 무리였어요.”
어이가 없었다.
겸손이라고 하기에도,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도, 말이 안 됐다.
루시안은 이번만큼은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늘 페르니아 영애는 정말…….”
아름답다?
그 말로는 부족하다.
매력적이다?
그 말도 부족해.
루시안은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결국 루시안이 필사적으로 찾은 그녀를 향한 미사여구는 이 한마디였다.
“대박이십니다!”
그 말에 페르니아는 이 남자가 미쳤나, 라는 눈빛을 했지만 루시안은 그 말을 정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늘의 그녀는 정말로 대박 예뻤으니까. 그의 심장 한편이 파르르 떨릴 만큼.
* * *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난 이 제국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한 페르니아 라일락이야! 악녀 하나쯤은 진상 부리게 둘 수 있잖아!”
멀어진 마차를 향해 소리치는 페르니아를 바라보며 루시안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시선이 가고, 웃음이 나오고, 신경 쓰이고, 질투가 나고, 가슴이 에이고…… 안아 주고 싶고.
‘단순히 그녀가 나의 약혼녀라서? 나의 사랑을 알아채고 응원해 준 유일한 사람이라서?’
아니. 고작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루시안은 한 발짝 페르니아를 향해 다가갔다.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 같은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어린 모습을 보자 가슴 한편이 찌르르 떨려 왔다.
그녀는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까.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루시안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페르니아 영애, 저는 당신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제게 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 감정은 호감이 가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진득한 관심이라는 것을.
루시안은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소소하고 은밀한 것까지, 모든 것을 다.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