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6
3.
짹짹. 참새 소리가 들리는 아침이 되었다.
“아가씨, 앤이 돌아왔어요. 그간 잘 지내셨죠?”
3일간 휴가를 다녀온 앤의 목소리였다.
어딜 다녀왔는지 보기 좋게 탄 얼굴로 방문을 연 앤은 꺄아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제, 제가 없는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럴 만했다.
거지가 와서 ‘너 좀 하는데?’라고 할 정도로 내 꼴은 엉망이었으니까.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다크서클이 턱 밑으로 탈출할 만큼 내려와 있었다.
“어머머, 어떻게 해.”
365일 완벽하게 나를 관리해 오던 앤은 충격받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앤. 고작 며칠 관리 안 했다고 이 모양이 되었어. 난 일주일 내내 똥밭을 굴러도 풀 메이크업이 가능한 주인공 버프 따윈 없는 악역 조연이라…….”
“예?”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냥 잠이 덜 깨서 한 소리니까 무시하렴.”
앤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의자에 앉혔다.
“아가씨 좀 잘 부탁한다고 했더니 도대체 다른 하녀들은 뭘 한 거야.”
앤은 구시렁대며 나를 다시 어여쁜 후작 영애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우아한 후작 영애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른 하녀들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앤. 내가 이 몰골이 된 건 다 루시안 때문이니까.’
나는 약혼식 날 들었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저는 당신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습니다.]그의 말을 떠올리는 순간 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그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남자가 여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이유가 뭐겠어. 마음에 든다는 거지.’
나는 그 답을 즉각 기각했다.
물론 페르니아는 미녀였다. 거기다 귀족이야.
성격이 더럽다는 게 흠이었지만, 내가 빙의하면서 그런 점도 좀 나아졌다.
그래도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 내게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짝사랑의 거목, 찐통 서브 남주 루시안 카르디엔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잘 안다.
에스텔을 향한 그의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 순둥순둥한 사람이 흑화까지 하겠어.
‘그럼 대체 왜?’
그걸 생각하느라 며칠 동안 방 안에서 꿈쩍 않고 지냈더니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나는 브러시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주고 있는 거울 속의 앤을 보며 말했다.
“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물어보셔요.”
“내 얘기는 아니고, 내 친구 얘기인데…….”
그 말에 앤의 눈이 가늘어졌다. 페르니아는 친구 따위는 절대 만들지 않는 악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말을 수정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아는 영애의 친구의 이야기…….”
그제야 앤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풀어졌다.
나는 절대 내 이야기가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어떤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든? 그런데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무도 몰라. 왜냐면 그는 자기 마음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거든. 그런데 그 남자의 마음을 눈치챈 여자가 나타난 거야. 그 남자도 그걸 알게 됐어. 그 남자가, 자기 마음을 알아챈 여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했는데요?”
“글쎄, 당신을 알고 싶대! 이게 무슨 의미 같아?”
“그냥 바람둥이인 거 아니에요?”
심드렁한 대답에 나는 팔짝 뛰었다.
“그건 아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루시안이 그럴 리 없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해도 내 자식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옹호하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부정했다.
앤은 그 모습에 흠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거 아닐까요?”
“뭐?”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앤을 바라보았다.
내 머리카락을 완벽하게 땋아 늘어뜨린 앤이 말했다.
“그 남자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면서요.”
“응.”
“그런데 유일하게 그걸 아는 여자가 나타났고.”
“응.”
앤이 음습해진 얼굴로 말했다.
“자기 비밀을 아는 여자를 협박하는 거죠. 너에 대해 앞으로도 내내 감시할 테니 떠들어 대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말에 내 눈빛은 세차게 흔들렸다.
어쩜 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니?”
“과찬이십니다.”
내 칭찬에 앤은 한껏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얼핏 황당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 대답이 정답일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원작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시안의 약점을 알아낸답시고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루시안의 마음을 알아챈 귀족이 있었지.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으면 성녀에게 말해 버린다고 깐죽대었다가 그대로 아웃.’
흑화한 루시안이 아닌 평소의 루시안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만큼 루시안은 제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차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난…….’
[제가 만약 카르디엔 경이었다면 전 에스텔 님을 사랑했을 것 같아요.] [아무튼 내 말은, 카르디엔 경이 고백한다고 불쾌해할 사람은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말아요!]루시안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깐죽거리는 나를 볼 때마다 그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 여자를 언제 없앨까.’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악!”
뒤늦게야 내 어리석음을 깨달은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앤이 깜짝 놀라 ‘아가씨?’ 하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으허엉, 하고 우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망했어. 다 망했어!
* * *
안 그래도 하나 있던 끔살 엔딩에 또 다른 루트의 끔살 엔딩을 추가한 것을 안 나는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잔혹했다.
“페르니아! 카르디엔 경이 오셨다!”
문밖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말에 나는 짜증이 치솟았다.
‘아, 좀! 아프다고 했잖아!’
몸도, 마음도 아프니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내 말을 똥으로 알았다.
새삼 어제 다녀간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꾀병입니다.]그런 진단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눈치 없는 아버지라도 이 시점에서 루시안을 내 방까지 데리고 오진 않았을 텐데.
“페르니아 영애, 괜찮으십니까?”
문 너머로 루시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이없게도 조금 심장이 흔들렸다.
‘날 언제 죽일지 모르는 사람한테 이러고 싶니?’
눈치코치도 없이, 예쁘고 멋진 것이면 죄 반응하는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한번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니아 영애,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안 돼요.”
“······.”
말을 내뱉고 나니 이 말이 너무 오만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 지금 꼴이 엉망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론 앤이 저택을 비웠을 때만큼 거지꼴은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방 안에 처박혀 있었으니 훌륭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럴듯한 핑계를 대었으니 제발 그만 돌아가.’
라고 간절히 바라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럼 눈을 가리고 들어가겠습니다.”
“네?”
어이없는 말에 입을 크게 벌리는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될까요?”
응. 안 돼.
그러니까 제발 너희 별로 돌아가.
가련한 악역 엑스트라는 건드리지 말고.
그런데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방금 들은 그 목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문밖의 그가 꼭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들어와요.”
“고맙습니다, 페르니아 영애.”
지금 고맙다는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잖아, 이 사람아.
‘이런 걸 보면 참 착한데…….’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에스텔과 관련된 일이라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니까.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고,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 버릴까. 에스텔이고 루시안이고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빡빡 우기면 자기가 어쩔 거야.
만나자마자 ‘앗!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이라고 소리치며 데굴데굴 구르면 조금 먹힐지도…….
그러나 침대 앞으로 다가온 그를 본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온갖 주접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니까.
색이 선명한 보라색 팬지꽃 수백 송이였다.
“페르니아 영애, 오랜만입니다.”
꽃다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정말 눈을 가리고 들어왔어요?”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얼굴 바로 앞에 다가온 꽃다발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병문안 선물이에요.”
나는 수백 송이의 팬지꽃을 바라보다가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 꽃을 받자마자 몸이 휘청거렸다.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꾀병 선물치고는 너무 과하네요.”
“꾀병도 병이니까요.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거대한 꽃다발 속에 파묻으며 말했다.
“지금 정말 안 보이는 거 맞죠?”
“네.”
“그런 것치고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전쟁터에서 갈고닦은 기사의 감 덕분입니다.”
새하얀 손수건 아래로 보이는 루시안의 입가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으. 얼굴의 반을 가려 놨는데 왜 잘생긴 거냐고.’
미남은 코와 입만으로 표가 나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머물렀다.
꼭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루시안을 내내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을 하자.’
내가 너무 주제도 모르고 당신의 일에 끼어들었다고, 이제부터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그도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도 모른다.
내가 주먹을 꾹 쥐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그날 그런 말을 해서 나를 피한 거죠?”
하얀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음에도 루시안은 마치 내가 보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그 말이 정답이었으니까.
그는 내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영애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미소가 아니었다.
억지로 입매를 올린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이다음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안 돼. 하지 마.
“미안합니다, 페르니아 영애. 누구라도 제게 그런 말을 듣는다면 당연히 싫을…….”
“리가 없잖아요. 완전 대박이죠!”
흑흑. 나는 어쩔 수 없는 루시안 편이었다.
“제가 그때 말씀드렸었잖아요. 세상에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고, 카르디엔 경은 미남이고, 고로 카르디엔을 싫어할 여자는 없다고. 저를 잘 알고 싶다는 말도 마찬가지였어요. 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 같아서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답니다.”
미쳤어, 페르니아?
그러나 나도 모르는 제2의 인격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가 무섭다. 그의 의도도 수상해 미치겠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그가 저런 식으로 땅을 파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나 같은 건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존재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마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루시안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고말고요. 무서워서 가슴이 쿵쾅쿵쾅 떨렸거든요.
나는 그 말을 생략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 왜 저를 피하셨나요?”
“그, 그건…… 카르디엔 경은 어차피 나와 약혼한 사이잖아요. 그런데 새삼 그런 말을 하시니 조금 놀랐답니다. 우리 사이에 여기서 더 알고 말고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엄청난 이유가 있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이유가 뭔데요?”
“이 약혼은 저와 페르니아 영애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니까요.”
“······.”
그건 그렇지. 황제와 아버지가 두 남녀를 억지로 끌어다 붙인 관계에 불과했다.
“저는 그런 형식적인 사이가 아니라, 좀 더 진솔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영애를 제대로 알고 싶은 거고요.”
……뭐야, 그런 거였어?
예상치 못한 말에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바짝 긴장했던 심장이 몽글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페르니아.
아무리 정중하게 말한다 한들, 그는 흑화하는 서브 남주였다.
괜히 이리저리 얽히는 것은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최대한 내 목소리가 온화하게 들리길 바라며 말했다.
“좋아요. 경의 생각은 잘 이해했어요. 하지만 역시 전 예전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어째서입니까?”
“경의 말대로 우리는 정략적으로 맺어진 약혼 관계일 뿐이니까요. 지금 와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된들 하나도 좋을 게 없어요.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보이면 결혼하기만 싫어질 거 아니에요. 아니면…….”
나는 루시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흰색 손수건에 가려져 있었지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약혼이 파기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건가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루시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후에 그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입을 막았다.
그 말은 곧 그나 내가 원하면 파혼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웬일이야?’
예상치 못한 수확에 속으로 기쁨의 댄스를 추는데 루시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기 전에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탓일까. 그는 평소와는 달리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서 나는 청량한 박하 향과 품에 들고 있는 꽃향기가 뒤섞여 아찔해졌다.
“저는 파혼까지도 감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
“영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여기까지 온 이상 예전 같은 형식적인 사이로 되돌아가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내가 나가야 할 방향은 하나.
적당히 그와 어울리다가, 나를 향한 관심이 멀어질 때쯤 살며시 파혼하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순간 그가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말을 들은 것처럼.
보기 좋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이 남자, 역시 위험해.’
나도 모르게 콩닥거리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희롱하듯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럼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페르니아 영애.”
도대체 뭘 최선을 다할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 겁날 만큼, 야릇한 목소리였다.
그가 눈을 가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터져 버릴 것처럼 빨갛게 익은 내 얼굴을 봐 버렸을 테니까.
* * *
“페르니아 영애는 어떤 것을 좋아하십니까?”
“예쁘고, 반짝반짝한 것이라면 뭐든지요.”
“싫어하는 것은요?”
“악역 조연에게 한없이 박한 남주랑 서브 남주요.”
“예……?”
루시안은 열심히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그의 눈빛에 나는 다급히 대답했다.
“저는 종종 헛소리를 즐겨 한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군요.”
루시안은 또 하나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게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햇볕이 따사로운 시간에 찾아온 루시안은 심층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름의 유래, 별자리, 좋아하는 음식, 가장 감동한 선물,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등등…….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순진한 질문들이었다.
섬세한 글씨로 나에 대한 문장을 채워 놓은 그를 바라보며 나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카르디엔 경, 경은 이런 질의문답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한계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다행히 그 점은 저와 생각이 같네요.”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런 인터뷰는 그만하고 함께해 보시면 어때요?”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입 속에 있는 초콜릿을 오도독 깨물며 빙긋 웃었다.
그가 나를 알고 싶다는 게 말 그대로의 의미인 것을 안 지금, 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상태였다.
적어도 그를 조금 불쾌하게 만든다고 해서, 나를 끔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제멋대로 굴어도 되지 않을까?
“저의 취미 생활이요.”
* * *
“페르니아 영애, 정말 이런 것이 좋으신 겁니까?”
루시안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팔짱을 낀 오만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좋아합니다.”
내 말에 그의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루시안은 그런 나를 보더니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니아 영애, 당신 정말…….”
네. 훌륭한 변태지요.
나는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떠올리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 선 그는 몸에 딱 맞는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올 시즌 사교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신사복이었다.
몸의 라인이 확 드러나는 옷이라,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 긴 다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피팅 룸 주변에 서 있던 직원들조차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꾹 쥐었다.
‘역시 미남에게는 블랙 정장이 진리야!’
흡족한 얼굴을 한 나를 향해 루시안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분명 예쁘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쁘고 반짝이는 것 맞잖아요?”
이 이상 그 말에 어울리는 게 어디 있어?
루시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붉어진 얼굴에 그의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여실히 드러났다.
금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심플한 블랙 정장을 입은 아름다운 남자가 그런 표정을 하니 뭐랄까.
‘야릇하잖아.’
묘한 감정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직원들 중 몇 명은 흐읍, 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귀족 영애인 내가 그런 품위 없는 반응을 보일 순 없는지라 나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잡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코피가 새어 나올까 봐 코끝에 힘을 주며 말했다.
“검정색 정장이 정말 잘 어울려요, 카르디엔 경. 정중한 신사 같으면서도 어딘가 아슬아슬한, 퇴폐미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런가요?”
“네. 물론 아까 전에 입었던 하늘색 리넨 셔츠도 좋았지만요. 셔츠 색과 목에 두른 푸른색 스카프가 경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우러져서 참 아름답더군요.”
“······그렇군요.”
“음, 그렇지만 처음에 입었던 승마복도 좋았어요. 역시 승마복은 군살 하나 없는 몸에 걸쳐야 해요. 아버지가 승마복을 입으셨을 때는 몸을 꽉 조이는 조끼 때문에 배가 많이 불쌍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경의 배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어요. 참 행복해 보였답니다.”
“…….”
루시안은 이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겼다.
‘가세가 기울면서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 달간 모은 액수는 제법 커. 그걸 다 모으면…….’
계산을 마친 나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지금까지 입은 옷 모두 계산해 주세요!”
우렁찬 목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내내 홀린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던 직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직원이 내민 청구서에 호기롭게 사인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피팅 룸에서 다급하게 나온 루시안이 청구서를 잡았다.
“페르니아 영애, 설마 이 옷들을 다 제게 주려고 구입하시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그런 게 아니면 왜 몇 시간이나 경을 귀찮게 했겠어요.”
루시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루시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애의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받기에는 너무 과한 선물입니다.”
역시 철벽의 서브 남주.
여주가 아니니 옷 선물 하나 해 주는 것도 이렇게 어렵구나.
그러나 늦었다.
나는 이미 내가 고른 옷을 입은 그를 봐 버렸으니까.
그 좋은 것을 왜 한 번만 봐야 해?
나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말이죠, 예쁜 사람에게 내 취향의 옷을 선물해 주는 걸 정말 좋아해요. 삶의 낙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부탁해요. 오늘 이 옷을 경에게 선물하지 못하면 속상해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밑도 끝도 없는 생떼였다.
다행히도 루시안은 야박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수첩에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로 인형 놀이를 즐긴다. 변태인 듯’이라는 글귀가 적히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청구서에 사인을 했다.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루시안의 손에는 옷이 담긴 상자가 세 개나 들려 있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상자를 깃털처럼 가뿐히 드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겠다는 말을 쏙 집어넣었다.
거리를 걸으며 루시안이 말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인사도 못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애.”
맑은 목소리에선 다행히 불쾌해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루시안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고마우시면 제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시겠어요?”
“……무엇인가요?”
한 박자 늦게 대답한 거 티 났거든요.
나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저를 만나러 오는 날, 오늘 선물한 옷을 입고 나와 주세요. 경이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요.”
내 말에 루시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겠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키득 웃었다.
어쩜 저렇게 반응이 수줍을까.
‘꼭 입고 오세요. 그 옷을 벗겨 보고 싶으니까.’
라고 말하면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려고.
“페르니아 영애,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지으십니까?”
맑은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며칠 후에 열릴 연회를 떠올리니 즐거워서요.”
개똥 같은 변명이었건만, 루시안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 하고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후작가의 마차가 고장이 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날까지 수리가 다 끝나나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대여 마차를 알아보려고요.”
그 말에 루시안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제가 영애를 모시러 갈까요?”
“카르디엔 경이요?”
“네. 옷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고마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준비 다 됐습니다, 아가씨.”
앤의 말에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청보라색 머리카락 위로 반짝이는 나비 핀. 장미꽃이 섬세하게 수놓아진 진녹색 드레스.
짙은 눈 화장과 붉은 입술까지.
거울 속에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작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이 모습을 만든 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앤이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며 말했다.
“역시 목걸이라도 하나 새로 구입할 걸 그랬어요. 하나라면 모를까, 드레스부터 보석까지 모두 유행이 지난 것이 표가 나는걸요.”
나는 어른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집안 사정도 좋지 않은데 사치를 해서 뭐 하니. 그리고 중요한 연회도 아니고 귀족 영애들끼리 모여서 수다 떠는 자리인데, 뭐. 이 정도도 충분해.”
“아가씨!”
앤은 한껏 감동받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어린 눈에서 ‘개처럼 살던 아가씨가 정말 철이 들었구나.’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미안해, 앤. 사실 루시안 옷 사는 데 모은 용돈을 탈탈 털어 버렸어.’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앤도, 혹시나 그 말을 전해 들을 아버지도, 철없는 나의 행태에 피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대신 나는 의연한 얼굴로 부채를 챙겨 일어났다.
“어서 가자. 카르디엔 경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앤은 내 뒤를 쫑쫑 따라오며 연애 소설에 심취한 소녀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카르디엔 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아끼시는 것 같아요. 연회장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다며 오시다니요.”
“워낙 친절한 사람이잖아.”
“친절이라는 말로는 부족해요. 이건 러브예요, 러브.”
저런 엄한 말을 입에 담다니.
앤이 요즘 내가 많이 편해지긴 한 모양이다.
나는 한마디 말로 앤의 주접을 막았다.
“앤, 이 구역의 헛소리 대마왕은 나야.”
그러니까 셧업!
그제야 앤은 입을 다물고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잘 꾸며진 응접실 안에는 루시안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말했네. 내 마음은 아무나 가져갈 수 없는데, 그 대단한 일을 당신이 해낸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젊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지. 젊음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거야. 하하하하.”
도도한 레이디 같았던 나의 얼굴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아침부터 일이 있다고 나가셨었잖아요!”
“일이 좀 일찍 끝났단다. 집에 와 보니 카르디엔 경이 널 기다리고 있더구나. 심심해 보이기에 내가 말동무를 좀 해 주고 있었지.”
말동무가 아니라 고문이겠지!
아버지는 오랜만에 여한 없이 투머치토크를 한 덕에 한껏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 루시안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루시안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피부 뽀얌.
눈빛 맑음.
미소 예쁨.
다행히도 아버지의 공격 시간이 길진 않았는지 루시안의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눈썹을 내렸다.
“미안해요. 생각보다 준비가 오래 걸렸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서두를걸.”
“아닙니다.”
부드럽게 대답한 루시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민망해서 나는 되도 않는 농담을 내뱉었다.
“알아요. 너무 미인이죠?”
“네.”
조금의 거짓도, 아부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아버지와 나는 잠시 일시 멈춤 상태가 되어 버렸다.
엄청난 정적이 응접실에 흘렀다.
나는 살짝 열이 오른 얼굴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요망하게 대답하는 건 누구에게 배웠어요?”
“배운 게 아니라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얼굴에 나는 다시 한번 일시 멈춤 상태가 되었다.
이 대화를 더 이어 갔다간 타격이 클 것 같아 말했다.
“늦기 전에 어서 가죠.”
저택 앞에는 루시안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이게 바로 황제가 루시안에게 하사했다는 마차구나. 엄청나네.’
6개의 바퀴가 달린 마차는 일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흰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었다는 외관 장식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단단한 몸체에는 기사 카르디엔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물방울 꽃과 검이라니.’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루시안에게 딱인 문양이었다.
섬세하게 새겨진 문양을 구경하는데 루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타십시오, 페르니아 영애.”
그의 손을 잡고 마차 안에 들어선 후에는 더 감탄했다.
윤기가 나는 매끈한 가죽 의자는 착용감부터 남달랐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음에도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겉모습만 멀쩡하지 낡아 빠져서, 조금만 달려도 엉덩이가 후끈거리던 우리 집 마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이 바로 돈의 맛이로구나.’
새삼 느끼는 돈의 위력에 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맞은편에 앉은 루시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애.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설마요.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면 이 마차가 불편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런 마차라면 1년 내내 쉬지 않고 탈 수도 있을 것 같은걸요.”
내 말에 루시안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곧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 편히 계십시오.”
그렇게 말한 루시안은 노트를 꺼내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뭐, 이런 것이려나.
메모를 마친 루시안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마차 안이 넓다고 해도 마주 앉은 이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카르디엔 경.”
“네.”
“마차에 타고 나서 제 얼굴이 1밀리미터는 닳은 것 같아요.”
“아, 죄송합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은 다시 내게 돌아왔다.
보석처럼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나는 끙, 하고 곤란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끈적거리는 애정은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눈동자가 너무 맑았다. 정말 순수하게 나란 인간에 대해 알고 싶은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라고 물어보았자 그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 뻔했다.
나는 결국 묻고 싶은 말을 삼키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내가 사 준 옷, 입고 오지 않았네요. 막상 입으려고 하니 별로였나요?”
눈을 크게 뜬 루시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영애를 데려다준 후 바로 훈련장에 가야 해서 입지 않은 겁니다. 부하들의 훈련을 봐주다 보면 옷이 상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니까.
숨겨진 뜻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귓가가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보세요. 누가 보면 엄청나게 귀한 선물이라도 준 줄 알겠어.
‘그냥 옷 몇 벌일 뿐이잖아.’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구오구, 누가 그렇게 예쁜 말을 가르쳐 줬어요?’라며 그의 턱을 어루만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그럼 다음 만남 때 볼 수 있기를 기대할게요.”
* * *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가 열리는 저택 앞에 도착했다.
루시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인사했다.
“바래다주어서 고마워요. 덕분에 대여한 마차를 타고 오는 창피는 당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를 당하지 않은 게 뭐야. 오히려 어깨가 으쓱할 정도였다.
연회장에 도착한 마차들 사이에서 루시안의 마차는 단연 화려하고 거대했으니까.
귀족들은 부러움과 감탄이 뒤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벤츠, 벤츠 하는 거구나. 새삼 최고급 자동차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가 볼게요.”
“아, 잠시만요.”
루시안은 손을 들어 내 머리에 달린 핀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핀이 조금 삐뚤어졌어요. 이제 괜찮습니다.”
으으. 왜 이런 사소한 행동에 가슴이 뛰는 거냐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숨기는 나를 향해 루시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시간 맞추어 데리러 오겠습니다.”
주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 중 몇 명이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죄 많은 남자였다.
오늘 열리는 연회는 젊은 귀족 영애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정기 모임이었다.
초록 잔디가 깔린 정원에 놓인 하얀 테이블에는 곱게 꾸민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종달새처럼 까르륵거리던 여인들이 짠 듯이 말을 멈춘 것이다. 마치 오면 안 될 사람이 이곳에 온 것처럼.
‘뭐야, 이거?’
페르니아는 이 모임의 리더 격인 존재였다.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여인들이 몰려와 칭찬과 아부를 잔뜩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은 뭔데?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어 눈썹을 치켜뜨는데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페르니아와 가장 가까운 사이, 그러니까 가장 아끼는 부하인 백작 영애 에리카였다.
그녀는 듣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내뱉던 아부 대신,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어머나, 페르니아 영애 아니세요? 저희 같은 귀족보다 평민 성녀가 더 중요하신 분이 이 자리에는 왜 오신 걸까요?”
그 순간 나는 그녀들이 내게 등을 돌린 이유를 깨달았다.
나의 약혼식 날, 에리카를 포함한 귀족 영애들은 에스텔을 열심히 깎아내렸다.
진짜 에스텔을 고깝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페르니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이유도 컸을 것이다.
평소의 페르니아라면 그녀들의 험담을 신나게 받아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성녀님, 최고!’를 우렁차게 외쳐 버렸다.
그런 내가 고깝게 보일 테지.
‘이걸 생각 못 했네.’
나는 에리카의 뒤에 선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싸늘했다. 호의는커녕 적의마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녀들을 등에 업은 에리카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갑자기 왜 그렇게 영애의 행동이 바뀌었는지 생각을 해 봤어요. 영애는 누구보다 귀족의 자긍심이 높으셨던 분이니까요. 그런데…….”
에리카는 눈을 내리깔고 나를 훑어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하고 오신 행색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요즘 라일락 후작가의 재정이 많이 힘들다더니, 그래서 그러신 거군요. 평민 성녀의 기분을 맞춰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서.”
유행이 지난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걸친 내 모습을 한껏 조롱하는 말이었다.
에리카의 주변에 서 있던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도 이제야 납득이 되네요.”
“성녀는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병에 걸렸으니까요. 저 정도 행색이면 도움을 줄 만도 하죠.”
나와 에스텔을 싸잡아 비꼰 여인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와, 저것들. 어떻게 저렇게 얄밉지?
당장 달려가 머리채를 잡을까 하다가 참았다.
내 앞에서 한껏 밉상을 떠는 저 여자애들은 결국 나와 같은 가련한 악역 조연일 뿐이니까.
‘에휴, 작가가 설정을 저 모양으로 해 놨으니 저러지. 쟤네들이 무슨 죄야.’
나는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몇몇 여인이 어깨를 흠칫하며 뒷걸음질 치기는 했지만 내가 볼일이 있는 건 그녀들이 아니었다.
나는 여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피해, 구석진 곳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진짜 페르니아라면 절대 앉지 않았을 자리. 그러나 오늘은 이곳으로 충분했다.
늘 앉던 중앙 테이블에 앉으려고 했다가는 여인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같은 처지에 싸워서 뭐해. 툭하면 끔살당하는 운명인데 서로 잘 챙겨 줘야지. 내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으면 쟤들도 조용해지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처음엔 페르니아의 악명을 떠올리며 눈치를 보던 여인들은 내가 얌전히 차를 홀짝이자 말의 수위를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페르니아 영애가 카르디엔 경의 마차를 타고 함께 왔더군요. 아주 다정해 보였어요.”
“정말 놀랍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황제 폐하가 아끼는 기사라고 해도 결국 평민 고아라며 무시했잖아요.”
“뭐, 성녀의 비위를 맞추게 된 이유와 똑같겠죠. 출신이야 어떻든 약혼자에게 뭐라도 얻고 싶어 저러는 거 아니겠어요?”
에리카가 츳, 하고 혀를 찼다.
“역시 가난은 무서운 거예요.”
네가 더 무서워, 이 기집애야.
얄미운 말이긴 했으나 생각보다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못된 말과 못된 짓을 밥 먹듯이 했던 페르니아에게 돌아온 업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평온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우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알랑거려 봤자 카르디엔 경이 뭘 해 주겠어요? 카르디엔 경이 돈을 쓰는 건 오직 성녀가 운영하는 봉사 단체뿐이잖아요.”
“맞아요. 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그 많은 상여금도 몽땅 봉사 단체에 기부했죠.”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성녀에게 남자를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 순간 입가로 가져가려던 딸기 케이크가 허공 위에 멈췄다.
내 반응을 본 에리카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사냥감에게 미끼를 물리는 데 성공한 사냥꾼처럼.
에리카는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을 향해 신나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페르니아 영애의 약혼식 때 다들 기억하시죠? 황태자 전하가 성녀의 손을 잡아채 사라졌잖아요. 다른 사람과는 제대로 대화도 안 하는 카르디엔 경도 성녀에게는 꼼짝을 못 하고요. 그뿐인가요. 황제 폐하께서도 성녀를 편애 하시는 것으로 유명하잖아요.”
에리카의 말에 여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오라버니도 성녀만 마주치면 헤벌쭉하고 정신 나간 표정을 짓더라고요.”
“영애의 오라버니도요? 저희 남동생도 그래요.”
여인들은 저마다 성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주변 남자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에스텔은 여주인공 버프를 받고 있는 이 세계 최고의 매력 덩어리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여인들은 그녀의 매력을 악독한 방향으로 결론지었다.
“작정하고 남자를 유혹한 게 아니라면 이게 말이 돼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쯤 되면 그녀가 성녀라는 것도 의심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신의 가호가 아니라 이성의 가호를 받는 것 아니냐고요.”
에리카는 경멸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저급한 계집이에요.”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였다.
아무리 함께 보듬어 줘야 할 악역 조연 동지라지만, 선량한 여주에게 저런 말을 하게 둘 순 없었다.
“에리카 영애.”
단 한마디였지만, 신나게 떠들어 대던 여인들의 입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여인들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에리카도 있었다.
에리카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 같은 것에게 겁먹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왜 그러시죠, 페르니아 영애?”
한껏 오만한 얼굴에는 나를 깔아뭉개겠다는 야심이 가득했다.
그럴 만하다.
나를 따르던 귀족 영애들이 모두 그녀에게 붙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악녀는 니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내게는 에스텔처럼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매력도, 루시안처럼 수만 명의 적군을 이길 만한 전투 능력도, 칼릭스처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사람을 무릎 꿇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없다.
하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걸출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엑스트라 캐릭터들을 굴복시키는 능력이었다.
“케이크 맛 떨어지니까 그 입 좀 닥쳐 줄래요?”
고작 한마디에 에리카는 마치 케이크로 싸대기를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드러난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에리카는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 덕분이었다.
여인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에리카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페르니아 영애,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당신의 편은 아무도…….”
저 말을 다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기에 나는 그녀의 말을 칼같이 끊었다.
“상황 파악은 아주 잘되고 있답니다. 에리카 영애는 요즘 가르시안 후작과 약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죠? 그런데 그런 영애가 연회장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한 건…… 나일까요, 아니면 영애일까요?”
나의 공격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에리카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에리카와 그녀의 주변에 있는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내 시선이 닿은 여인들이 움찔거렸다. 바닥으로 시선을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꼭 고양이 앞에 겁먹은 생쥐 같았다.
“시끄럽게 떠들어 댈 때는 상대를 봐 가면서 하세요. 우아한 귀족 영애라면 그 정도 눈치는 필수 덕목이니까.”
말이 끝날 즈음 일부러 한껏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편이 더 악녀스러우니까.
* * *
저택을 나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루시안이 보였다.
내게 다가온 루시안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왜요?”
“저택을 나오는 영애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해서요. 전쟁터에서 괴수가 튀어나왔을 때 보았던 병사들과 똑같은 얼굴이라 걱정이 되더군요.”
어머나, 이 남자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루시안을 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하게 웃었다.
“화장이 떴나 보죠. 그런 것은 못 본 척해 주는 것이 매너랍니다.”
“아, 그렇군요.”
루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타려는 순간, 저 멀리 있는 에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꼬리를 말고 깨갱 할 줄 알았더니 그녀는 의외로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서 꼭 막돼먹은 짓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나는 마차에 앉아 앞으로 펼쳐질 소설의 내용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잠시 후 나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카르디엔 경, 한 달 후에 황실에서 연회가 열리죠?”
“예.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가 열립니다.”
그래, 이거구나.
한 달 후에 열리는 칼릭스의 생일.
주요 인물 3인방과 더불어 짜잘한 등장인물이 대거 출현하는 연회에서 한 사건이 터진다.
일명 성녀 조롱 사건.
페르니아를 포함한 귀족 영애들이 연회에 참석한 에스텔의 초라한 차림새를 대놓고 놀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 에스텔의 모습에 칼릭스는 분노한다.
그날 그는 에스텔을 괴롭힌 이들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그러면 뭐해. 더럽게 늦게 나타나는데.’
이미 싸대기 열 대 맞고, 얼굴에 물 한 사발까지 거하게 가격당했는데 그제야 나타나 봤자 좋아할 것 같아?
그리고 그건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주는 뒤늦게라도 나서지, 서브 남주는 에스텔을 피한답시고 연회에 아예 불참해 버려서 그 자리에 있지도 않는다.
이 무능한 서브 남주야.
루시안이 동물같이 기민한 감각으로 내 눈빛에 어린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르니아 영애,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앞으로 할 예정이지.
나는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네?”
나는 에스텔에게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수많은 사건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남주와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답답한 두 남자 대신 내가 나서야겠다.
‘귀족 영애는 귀족 영애가 상대해 주는 게 답이지.’
어딘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시안을 향해 물었다.
“카르디엔 경, 우리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신뢰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하시나요?”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의 귓가가 붉어졌다.
마치 고백이라도 들은 것 같은 수줍은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하던 대답이었다.
나는 잽싸게 건너편에 앉아 있는 루시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말인데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루시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긴장한 게 느껴졌지만 나는 거침없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냐면, 이건 아주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이야기거든.
“돈 좀 빌려주실래요?”
“······네?”
루시안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에스텔을 위해 싸우긴 해야 하는데 총알이 없었다.
며칠 전에 루시안의 옷을 사느라 몽땅 탕진해 버렸거든.
그런 내게 가장 수월하게 총알을 채워 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물론 돈을 빌려준다는 건 웬만한 사이가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인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페르니아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래서 루시안의 정적이 길어지자 조금 불안해졌다.
‘돈 빌려주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빙글빙글 돌며 재롱 잔치라도 해야 하나.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정 안 되면 아버지가 동화책 사이에 숨겨 둔 비상금이라도 빼돌리자.’
라는 잔혹한 생각을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액수를 말씀해 주시면 챙겨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호쾌한 대답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예.”
“우와!”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이야.
나는 신난 얼굴로 필요한 금액을 계산했다.
아무리 그가 나의 약혼자이며 돈 많은 기사님이라고 해도 빌린 돈의 무게란 엄청난 것이니까.
과하지 않게 딱 필요한 만큼만 빌려야 했다.
‘어디 보자. 일단 에스텔이 입을 드레스와 액세서리, 구두. 화장은 내가 해 주면 되고…….’
에스텔에게 잘 어울릴 법한 브랜드와 디자인을 생각하니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꾸미지 않은 미인을 꾸미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귓가에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이었다.
“페르니아 영애.”
“예?”
“언제까지 이렇게 계실 생각입니까.”
“아.”
그제야 내가 얼마나 충격적인 포즈를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의자 등받이에 그를 밀친 후 한쪽 팔로 그를 가두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이다.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 나올 때마다 한 대씩이다.’라고 말해도 위화감이 없는 포즈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앗,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절대 경에게 삥, 아니 돈을 뜯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다급히 사과했지만 이미 루시안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그가 고운 얼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항상 이렇게 돈을 빌리시는 겁니까?”
이 남자가 선량한 귀족 영애를 일진으로 모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돈을 빌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나의 단호한 대답에 그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에게 위험을 경고하듯 말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절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빌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대꾸하려다가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내 앞에는 번쩍이는 금화 500개가 놓였다.
“이렇게 큰돈이 무엇에 필요한 건지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내 말에 루시안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예쁜 사람에게 영애의 취향인 옷을 사 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영애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셨으니까.”
나는 조금 감동했다.
“맞아요. 그 말을 기억해 주시다니 기쁘네요.”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었는데 민망하게도 그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어딘가 불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막상 돈을 빌려주고 나니 후회가 되나. 그렇지만 이쪽으로 돈이 넘어온 이상 이 아이들은 내 것이다.
나는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금화를 가방 속에 넣었다.
‘이 정도 돈이면 에스텔이 귀족 영애들의 코를 납작 누를 만큼 꾸밀 수 있어.’
최고급 드레스는 무리였지만, 적당히 괜찮은 드레스로도 충분했다.
에스텔은 존재만으로 빛나는 여주니까.
‘문제는 그걸 어떻게 입히는가지.’
에스텔은 최씨 고집보다 더하다는 여주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여주가 데굴데굴 구르는 로맨스답게, 그녀는 굳이 힘든 길을 택하곤 했다.
‘지금 내가 그녀에게 이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가라고 해 봤자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지.’
황성에서 열리는 연회라 해도 그녀는 늘 낡은 드레스만 입었다.
가난한 이들을 어루만지는 성녀로서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고집이 어찌나 센지 그녀가 그럴듯한 드레스를 입는 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였다.
‘그것마저도 여주의 개가 된 황태자가 제발 한 번만 보고 싶다고 빌어서였지.’
하물며 나는 그녀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일개 악역 조연.
그녀가 내 말을 들어줄 리 없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
다음 날 아침, 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정말 그곳에 혼자 가실 거예요?”
“그렇다니까.”
“그러지 말고 카르디엔 님께 연락해서 같이 가시는 게 어때요. 요즘 아가씨가 가는 곳이면 아기 오리처럼 따라오셨잖아요.”
“안 돼.”
“왜요?”
앤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에스텔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나는 최근 그의 앞에서 에스텔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을 꺼내 보았자 ‘나는 니가 에스텔을 좋아하는 걸 알지롱. 얼레리꼴레리.’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기껏 잠잠해진 흑염룡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의 외출은 그에게 비밀이었다.
혹시 몰라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안다면 저택을 나선 지 10분도 되지 않아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내 행적을 알게 될 테니.
“사람들에게 괜한 걱정 시키기 싫어. 앤이 생각하는 것만큼 험악한 곳은 아니니까 걱정 마.”
앤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을 나왔다.
앤이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에스텔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은 이 수도에서 가장 허름하고 치안이 좋지 않은 빈민가였으니까.
에스텔은 성녀라는 이름과 달리 성스럽고 깨끗한 곳에 있지 않았다.
늘 가난과 고통에 찌든 이들과 함께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였다니.’
나는 눈에 보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빈민가에 들어서자마자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곳이 같은 수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곳은 허름하고 열악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담벼락과 집. 이곳저곳 널려 있는 오물에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악취가 났다.
쓰레기가 뒤섞인 동네 곳곳에 앉아 있는 이들의 눈빛도 오싹했다.
‘죽은 생선 같아.’
초점 없이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 하이에나 같은 눈빛으로 나를 살펴보는 이들도 있었다.
귀족이라는 것을 표 내지 않기 위해 허름한 망토를 걸쳐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부랑아들에게 돈을 뜯겼을 것이다.
후드를 뒤집어쓴 이마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새삼 에스텔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 것과 동시에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 있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후미진 골목을 지나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에스텔이 만든 봉사 단체가 운영하는 의료원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몸이 아픈 이들이 모여 있는 건물답게, 낡은 건물 안은 음산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하얀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깐깐한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딱 보기에도 크게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들어와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게…….”
“어머나, 페르니아 영애 아니세요?”
그 순간 꿉꿉한 건물 안이 순식간에 피톤치드 향으로 정화되는 것 같았다.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나는 에스텔을 보는 순간 비틀거리고 말았다.
‘눈부셔!’
에스텔의 모습은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사제복에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앞치마,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은 조금 헝클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반짝반짝 빛났다.
에스텔이 황급히 달려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가요?”
“아니요. 오늘 아침에도 케이크 한 판을 혼자 다 먹었는걸요. 아주 건강하답니다.”
에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깃들어 갔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나는 에스텔을 향해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자 왔습니다. 봉사자로 지원을 하고 싶어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 뭐가 있겠어.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할 법한 행동을 해서 점수를 따면 되는 거지!
“돈을 후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애께서 직접요?”
에스텔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연했다.
이곳은 하층민 중에서도 상황이 열악한 이들이 몸을 기대는 곳이었다.
그런 이들을 직접 돌본다는 것은 귀족의 품위를 버리는 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귀족들은 기부를 하거나 자신 대신 일할 하인을 보내 봉사를 하곤 했다.
나는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돈으로 후원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제 손으로 직접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참된 봉사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서요.”
뻥이야. 너 꼬시러 왔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이것도 뻥이야. 너 꼬시면 그만둘 거야.
그러나 나의 검은 속내를 모르는 에스텔의 눈빛은 신을 영접한 사제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약혼식 때도 느꼈지만 페르니아 영애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뻔뻔하게 웃을 뿐이었다.
* * *
에스텔과 함께 땀을 흘리며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친해지면 그녀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게 하는 것도 수월해질 테지.
페르니아가 된 후 너무 탱자탱자 먹고 놀기만 했으니 며칠 정도 좋은 일 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봉사자 신청에 당당하게 이름을 적었다.
귀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사람들이 어려워할까 봐 ‘니아’라는 애칭을 쓰는 센스까지 발휘하며.
……안일했다.
“니아, 여기 침구 좀 갈아 줘요. 카르만 씨가 피를 토해서 피투성이가 됐어요.”
“니아, 얄로 씨 좀 막아 봐요. 화장실 벽에 똥칠을 하고 계시대요.”
“니아, 르쉘 씨가 소변이 마려우시대요. 어서 도와주세요.”
……뭐죠, 이건?
로맨스에 나올 난이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니아, 어서!”
다급한 소리에 나는 헐레벌떡 달려가서 르쉘 씨의 소변을 받아 주었다. 속으로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고작 반나절을 일했을 뿐인데 반백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그냥 포기할까.’
여주를 향한 오지랖에서 시작한 일일 뿐, 나와 에스텔 사이에 큰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에스텔이 연회장에서 낡은 드레스를 입든, 예쁜 드레스를 입든, 상관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저 멀리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에스텔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환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얼굴의 반이 끔찍한 화상을 입은 환자였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내뱉는 말에 환자는 웃었다. 마치 여신의 구원을 받은 것처럼.
‘힘들 텐데.’
에스텔의 노동량은 다른 봉사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환자를 치료하고, 보살피고, 퇴원까지 도와주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다 신경 썼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밝았다.
보는 내 가슴이 다 뭉클해질 만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조금 힘들다고 이렇게 바로 포기하는 게 어디 있어. 며칠 더 버텨 보자.’
나는 르쉘 씨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환자 몇 명을 더 돌봐 준 후 잠깐 쉬는데 에스텔이 다가왔다.
“일이 많이 힘들지요?”
“네.”
번개처럼 빠른 내 대답에 에스텔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럴 거예요. 이곳은 보통의 의료원에 있는 환자들보다 상태가 심각하니까요.”
에스텔의 시선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향했다. 누워 있는 환자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처참했다.
두 쪽 팔이 없는 남자. 온몸에 화상을 입은 여인. 한쪽 눈에 붕대를 칭칭 감은 빼빼 마른 아이.
가난한 이들일수록 목숨을 걸고 험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상처는 하나같이 심각했다.
에스텔의 파란 눈동자에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제게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에스텔은 신의 힘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에는 제약이 있었다.
한번 사용하면 일주일 정도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스텔은 목숨이 오갈 만큼 긴박한 순간이 아니면 그 힘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수년간 공부해 익힌 의술로 사람들을 도왔다.
그녀는 그것이 못내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난 참 신기했다.
‘어쩜 저럴 수 있지?’
성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여주라서 그런 걸까.
그래서 저렇게 사람들에게 헌신적일 수 있는 걸까.
만약 내게 성녀의 힘과 여주 자리를 줄 테니 그녀처럼 살라고 하면 절대 무리였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젊음과 힘을 모두 바쳐야 한다니, 너무 가혹하잖아.
그때 에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에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엄청난 비명이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에스텔과 나는 놀란 얼굴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들것에 실려 온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남자의 모습은 끔찍했다.
한쪽 다리는 완전히 바스러져 있었고, 나머지 다리는 꺾여 있었다.
에스텔은 남자를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상태가 심각해요. 어서 침대로 옮기세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던 남자가 에스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성녀님, 성녀님이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에스텔은 남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신이시여!”
마치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에스텔의 두 손을 붙잡았다.
“서, 성녀님. 신의 힘으로 저를 치유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이대로 두면 저는 두 다리를 모두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처절한 부탁에 에스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신의 힘은 지금 사용할 수 없어요. 사제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제가 온전히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는 에스텔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지금 와서 평범한 치료는 소용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이미 내 다리는 박살이 났어요!”
듣는 이가 고통스러울 만큼 처연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에스텔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에스텔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에스텔과 사제들이 연신 남자를 다독이며 치료를 하려 했지만 남자는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남자는 에스텔이 가져온 소독약을 쳐 내며 소리쳤다.
“당신의 그 힘은 나 같은 사람들을 고치라고 신이 준 거잖아! 당장 고쳐 줘! 이대로 내가 불구가 되어 버리면 우리 가족은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이야!”
두 눈에 눈물을 달고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은 안쓰러웠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아?’
왜 에스텔은 죄인이 된 얼굴로 저 말을 다 들어줘야 하냔 말이야.
다른 사제들은 왜 저런 말을 계속 듣게 두는 거고?
마치 그것이 모두 성녀의 역할인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참지 못한 말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에게 돈 맡겨 놨어?”
“뭐?”
짜증이 짙게 묻어난 내 목소리에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텔도, 모여 있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자를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뭔가 크게 착각하나 본데, 성녀님이 당신의 박살 난 다리를 치료하는 건, 의무가 아니라 봉사야.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 주는 거라고.”
나는 최대한 악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선의를 얌전히 받아먹는 것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당장 꺼지시든가.”
스산한 말에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에스텔과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저, 저 여자가 지금 뭐라는 겁니까. 난 환자라고요.”
에스텔과 사제들이 반응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뭐 하세요, 다들. 치료하기 싫다고 하잖아요. 그럼 보내 줘야죠.”
“이, 이봐!”
“어서요.”
물론 에스텔과 사제들이 나의 개소리에 동조할 리 없다.
동조는커녕 어떻게 환자를 두고 그런 비정한 말을 하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 고압적인 태도를 보며 저를 내쫓을 만한 위치의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남자는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치료할 겁니다! 할 거라고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싸늘한 얼굴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그래야지. 여기서 가장 아쉬운 사람은 당신이니까.”
* * *
에스텔이 병실을 나온 건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복도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쩍 지친 얼굴이었다.
한없이 여린 그녀에게서 긴 수술을 마친 외과 의사 같은 묵직한 분위기가 났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처치는 잘됐나요?”
“네. 뼈가 부러진 것뿐이라 회복만 잘되면 원상태로 돌아올 거예요. 나머지 다리는 상태가 심각해 절단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우울한 얼굴로 말하는 에스텔을 향해 나는 눈썹을 내렸다.
“에스텔 님은 최선을 다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
“고생했어요, 정말.”
그 순간 굳건한 바위처럼 느껴졌던 그녀가 무너졌다.
에스텔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스물둘이란 제 나이로 보였다.
잠시 후 에스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페르니아 님.”
“뭐가요?”
“지금 해 주신 말도, 조금 전에 해 주신 말도 모두요.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실망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것에 자신감을 얻어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에스텔 님은 너무 참고 살아요. 사람들을 배려하는 건 정말 예쁜 마음이지만, 그게 너무 심해지면 마음에 병이 생긴다고요. 특히 성녀니까 당연히 자기한테 뭐라도 해 달라는 인간한테는 더더욱요. 똥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싶으면 당장에 엉덩이를 차 쫓아내 버려요. 그게 병자든, 귀족이든, 사제든, 누구든지요.”
에스텔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복숭아 같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랑스러운 대답에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에스텔이 두 손을 조물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페르니아 님과 만난 것이 오늘이 겨우 두 번째지요. 제가 페르니아 님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페르니아 님도 저에 대해서 아시는 바도 많지 않으시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길까, 이 아가씨가.
나는 인내심 있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에스텔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페르니아 님과 친해지고 싶어요.”
이거 전에도 한 번 나왔던 전개 같은데.
장르 변환의 위협이 느껴지는 그런 전개.
‘아니. 이 순간만큼은 장르가 달라져도 상관없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나도 그런데.”
“······!”
복숭아 같던 에스텔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할까요?”
일명 알콩달콩 친구 작전!
에스텔에 관한 끊임없는 고민 끝에 나온 작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성녀로 태어난 에스텔은 평범한 인간관계를 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은 많았으나 그들은 모두 에스텔을 성녀로 대할 뿐이었으니까.
‘그런 에스텔이라 개차반 남주가 먹혔던 거지만.’
허락도 안 받고 손목을 잡고 가고, 마주칠 때마다 비아냥거리고, 에스텔과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을 모두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나중에는 자기만 좋아해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모습이, 에스텔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에스텔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부딪쳐 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틈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친구요?”
예상대로였다.
에스텔은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조심스럽게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네.”
나는 눈썹을 내리며 물었다.
“저와 친구가 되는 게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에스텔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소리쳤다.
“정말 좋아요, 친구!”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말을 들은 것처럼 친구라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여주였다.
* * *
“니아 떤땡님, 노래 불러 주떼요. 네에?”
“불러 주떼요~”
저기요, 어르신들.
어제는 나보고 마녀라고 온갖 욕을 해 댔으면서 하루 만에 설정을 바꾸다니. 너무 자기 편하게 사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선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치매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어.’
나는 결국 병실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세 명이 한집에 있어.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서브 남주. 남자 주인공은 싸가지 없어. 여자 주인공은 엄청 예뻐. 서브 남주는 너무 무서워. 으쓱으쓱, 잘한다.”
병실에 도란도란 모여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와아, 소리치며 박수를 쳤다.
그 속에는 에스텔도 있었다.
끔찍한 노래에도 물개처럼 열심히 박수를 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쯤이면 연회에 대해서 말해도 되지 않을까?’
* * *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 나와 에스텔은 아주 가까워졌다.
건물 옥상에서 단둘이 간식을 먹을 만큼.
“니아 님, 아까 바빠서 제대로 식사도 못 드셨죠? 같이 먹어요.”
어느새 내 애칭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에스텔이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빵 하나를 건넸다.
며칠 전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나간 여인이 감사하다며 만들어 온 빵이었다.
빵은 한눈에 봐도 투박하고 거칠었다.
입 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딱딱한 돌덩이를 씹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더니 맛있네.’
역시 땀 흘리고 먹는 빵이 최고야, 라고 생각하며 우물거리는데 에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이봐요, 여주님. 그렇게 크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 설레잖아.
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귀족 영애치고는 품위가 좀 없죠? 빵순이라서 그만…….”
“그게 아니고, 신기해서요.”
의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르니아로 빙의한 후에, 싸가지 없다거나 요즘 들어 부쩍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신기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에스텔은 손에 든 빵 조각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통의 귀족은 이 빵을 그렇게 맛있게 먹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귀족의 식탁에는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빵만 올라오니까.
“처음 보는 노인들 앞에서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불러 주지도 않고요.”
에스텔아, 그건 귀족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일걸……. 내가 그런 흑역사를 만든 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야.
“그래서 니아 님이 좋아요.”
해사하게 웃는 에스텔의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주실래요?’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다듬으며 슬쩍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그런데 에스텔 님도 몇 주 뒤에 열리는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 때 참석하신다고 했죠?”
“네.”
“입고 갈 드레스는 정했어요?”
“니아 님의 약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입으려고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새어 나올 뻔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 드레스를 입으려는 건가.
그 드레스는 프릴과 자수 같은 장식이 완전히 배제된 빈곤함과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에스텔이 입어서 그나마 평범한 정도로 보인 것이지, 다른 여인이 입었더라면 50년 전 할머니가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왔냐며 놀림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보니 드레스가 무척 오래된 것 같던데 새로 구입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네, 없어요.”
단호한 대답이었다.
“왜요? 모처럼 연회인데 예쁜 드레스를 한 벌 맞추면 좋잖아요.”
“성녀가 그런 드레스를 입으면 보기에 좋지 않대요.”
“도대체 누가 그런 미친 말을 해요?”
에스텔은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요. 철없는 어린 시절에는 속상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해해요. 빵 한 조각 먹기도 힘든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성녀가 좋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면 어떻게 보이겠어요.”
이런 이유로 그녀에게 새 드레스를 입히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성녀의 책임감과 관련된 일이니까.
‘하지만 모두 예상했던 바야.’
에스텔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후 생각했다.
에스텔의 호감을 얻은 후에는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단순히 ‘당신을 아름답게 꾸며 주고 싶어요.’라는 말은 먹히지 않을 테지.
하지만 이건 어때?
나는 어깨를 내리고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럼 나랑 우정 드레스를 맞춰 입는 건 어렵겠네요.”
“우정 드레스요?”
“네.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요, 절친한 친구끼리 색상과 분위기를 맞추어 드레스를 입는 거예요. 에스텔 님과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
“안 되겠죠?”
나는 애써 아쉬움을 참는 듯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에스텔 님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거짓말이야. 부담 주려고 한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이 미끼를 물어.
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이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길 바라면서.
잠시 후, 조그마한 에스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렴한 드레스 한 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네. 니아 님의 말대로 지금 가지고 있는 드레스가 너무 낡기도 했으니까요.”
“와, 기뻐라.”
나는 에스텔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붕붕 돌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에스텔은 환하게 웃었다.
에스텔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히는 방법의 포인트는 역시 이거였어.
우정!
* * *
“아가씨, 오늘은 웬일로 드레스를 입으세요? 오늘은 꽃잔디의 집에 가지 않으세요?”
오랜만에 나를 꾸미느라 한껏 상기된 앤이 물었다.
“응.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
내 말에 앤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앤은 구불거리는 청보라색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재잘거렸다.
“다행이네요. 아가씨께서 거길 가실 때마다 험한 일이라도 겪으실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다녀오실 때마다 힘들다고 내내 앓으시고. 그럼 이제 안 가시는 건가요?”
꽃잔디의 집에 봉사를 다닌 지 어언 일주일.
에스텔과 친분도 쌓았으니 이제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니아 님!]내가 갈 때마다 강아지처럼 반기던 에스텔의 얼굴을 떠올리니 생각이 변했다.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종종 갈 거야.”
“예에?”
내 말에 앤은 울상을 지었다.
앤, 네가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건 알아. 하지만…….
“이 세상에 에스텔이 반겨 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본 사람은 없거든.”
그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내뱉은 말에 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헛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고급 스킬이었다.
“참, 아가씨. 카르디엔 님께 연락은 해 보셨나요?”
카르디엔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흥얼거리던 나의 콧노래가 뚝 멈췄다.
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로 눈동자만 굴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편지 몇 장이 쌓여 있었다.
은방울과 검 문양이 찍힌 편지 는 일주일 동안 루시안이 보내온 것이었다.
사실 편지라고 해도 별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편지에 ‘안 돼요.’라는 답장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내어서 카르디엔 님을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틀 간격으로 편지를 보내시는 걸 보면 아가씨를 애타게 찾으시는 것 같은데.”
물론 나도 번번이 퇴짜를 놓는 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는 그 몰래 에스텔을 만난다는 것이 찔려서였고, 하나는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주 긴 소설에 푹 빠져 있어서 정신없다고 했으니 카르디엔 경도 이해해 줄 거야.”
어쨌건 중요한 건 오늘의 약속이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레몬색 드레스에 섬세하게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꽃이 장식된 모자.
눈가에는 연보라색 아이섀도로 포인트를 줬다.
요 며칠 동안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던지라, 오랜만에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그러나 정확히 1초 후, 나는 뒷걸음질 쳐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나는 앤의 말에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내 앞에는, 오늘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의 미모에 순수하게 감탄하기엔 찔리는 게 많았다.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루시안이 말했다.
“무척 재미있는 책을 읽기 시작해서 방을 나오실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늘은 그 책을 읽지 않으시나 보죠?”
평범한 말인데 왜 무섭게 느껴질까.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겁먹지 마, 페르니아. 에스텔만 얽히지 않으면 루시안은 극도로 정상적인 사람이니까. 적어도 니가 감히 며칠이나 나를 물 먹였냐며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리 없다는 확신을 하며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나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카르디엔 경이야말로 연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이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쪽에 서 있는 앤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으니까.
“내가 돈 떼먹을까 봐 그래요?”
“네……?”
루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기한 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이자를 열 배로 내겠다고 계약서까지 썼잖아요.”
원래 방귀 뀐 놈이 성내는 법이다. 무조건 억울해하고 보자.
이렇게 청렴결백을 주장하는데 당장 돈을 갚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에스텔의 드레스도, 구두도, 목걸이도 사야 하는데 벌써 돈을 갚으라고 하면 곤란하다굿.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뭐랄까.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라는 표정이랄까.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에요?”
“……네.”
“그럼 여긴 왜 온 건데요?”
그게 아니라면 그가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계단 아래에서 아버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디엔 경, 차가 준비됐으니 어서 내려오시죠. 경을 위해서 일부러 아끼고 아껴 두었던 찻잎을 꺼냈습니다. 반년 전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구입한 ‘믹스르컾’이라는 차지요. 구입하는 데 고생을 좀 했지만 맛은 아주 훌륭합니다. 이 찻잎에 설탕과 우유를 섞어 먹으면 그 맛이 꿀맛입니다. 저는 늘 식후에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빠져 있답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이 저택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였어요?”
제대로 헛다리를 짚었다는 생각에 얼굴에 살짝 열이 올랐다.
나는 당황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의외의 친분이네요. 그런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힘들 거예요. 아버지가 말이 조금 많거든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으시면 한마디만 하세요. 후작님, 닭의 아내를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아한 은어예요. 아버지께서 조금 슬퍼하시긴 하겠지만 경의 고막이 터지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총총총, 하고 그를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페르니아 영애, 저는 영애에게 돈을 받으러 온 것도, 후작님과 친분을 쌓으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 찾아왔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나도 모르는 새에 귀가 고장 났나?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붉어진 얼굴은 수줍었으나, 붉은 눈동자는 선명히 빛났다.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것을 안 순간 나는 훅 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렇게 바보처럼 그를 쳐다보다가 겨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우리 만나지 않은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됐잖아요.”
루시안의 얼굴에 원망의 빛이 어렸다.
“벌써 일주일이나 된 거지요.”
“······.”
‘겨우’와 ‘벌써’의 차이.
고작 두 음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 시간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차이가 명백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는 경망스럽게 올라가는 입을 감추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떡해. 기분 좋아.’
아무래도 그는, 생각보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나 보다.
당장이라도 ‘오구오구 그래쪄요? 페르니아가 놀아 주까요?’ 하고 어화둥둥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겨우 내린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래도 오늘 경과 시간을 보내는 건 곤란해요. 저는 지금 나가 봐야 하거든요.”
“무슨 약속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친구랑 만나서 쇼핑하기로 했어요.”
이 정도면 납득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영애는 친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보세요.
예전 같았으면 자비 없는 팩폭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왜냐. 그 말은 진실이 아니거든.
“얼마 전에 생겼어요, 친구! 얼마나 마음이 잘 맞는데요. 만나서 쇼핑도 하고, 서로 교환 일기도 쓰기로 했어요.”
자랑하듯 내뱉은 말에 루시안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교환 일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영애와 그렇게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제게도 소개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저렇게 다정한 얼굴로 묻는데, 왜 등이 서늘해지는 걸까.
묘한 감각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은 당신이 너무너무 좋아해서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는 짝사랑 상대가 내 절친이랍니다. 왕왕 부럽죠?
라고 하면 절대 안 되겠지.
암, 안 될 거야.
그러나 내 마음과 달리 루시안은 한 번 더 물었다.
“말씀해 주세요, 영애. 어떤 분입니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는 순간이었다.
“카르디엔 경, 왜 내려오지 않나요?”
쏘옥, 하고 방 안으로 얼굴을 내밀고 아버지가 등장했다.
굿 타이밍!
그러나 호기롭게 등장한 아버지는 마주 선 루시안과 내 모습에 어떠한 불길한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페르니아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 보군요. 그럼 이야기 나누고 천천히 내려오시지요.”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해, 아버지!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아버지를 향해 마법의 주문을 외쳤다.
“아버지, 카르디엔 경에게 아버지의 연애 이야기를 해 주면 어때요? 그 이야기를 하기에 딱 좋은 봄날이잖아요.”
‘연애 이야기.’
그 말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내뱉지 않는 금기어였다.
저 구석에서 숨죽여 우리 대화를 듣던 앤조차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막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르디엔 경에게는 아직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나. 예비 사위에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버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직 루시안뿐이었다.
루시안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버지의 투머치토크 공격이 시작되었으니까.
“카르디엔 경도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이야기를 한번 들어 두면 좋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은 공부가 되니까요. 언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래. 내 사랑의 시작은 5살 때였어요. 나를 돌봐 주는 유모 에프란다에게는 나와 동갑인 딸이 있었죠. 이름은 애나였는데, 쏼라쏼라 생략생략…….”
그것은 한번 시작하면 48시간을 꼬박 채우는 아버지의 필살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은 루시안의 시선이 내게 닿았지만, 나는 모질게 그 시선을 외면했다.
‘미안. 미안해요, 루시안.’
하지만 난 가야 해요.
왜냐면…….
“니아 님, 여기예요.”
사랑스러운 에스텔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 * *
나는 분수 앞에서 손을 흔드는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일이 좀 생겨서 늦었어요. 많이 기다렸죠.”
“아니에요. 니아 님이야말로 괜찮나요. 큰일은 아니었나요?”
……큰일.
루시안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큰일이다. 심각한 재앙이지.
나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웃었다.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럼 다행이고요.”
에스텔은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크흡. 예뻐.’
황성도, 의료원도 아닌,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에서 만난 에스텔은 정말 고왔다.
장식이 없는 베이지색 드레스에 낡은 구두를 신었을 뿐인데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이 세계에 카메라가 없는 것이 슬플 정도였다.
‘내 머릿속에 저장밖에 없는 건가.’
내 시선에 에스텔의 귓가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화장을 하셨네요? 역시 니아 님은 화려하게 꾸민 게 잘 어울려요.”
“에스텔 님이야말로 하늘색 리본도 흰 피부와 찰떡인걸요?”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서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 얼굴이 좀 부었죠? 너무 배고파서 자기 전에 빵을 한 조각 먹어 버리고 말았거든요.”
“어머, 전혀요.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평소랑 똑같아요. 제 입술 색이야말로 너무 튀지 않나요? 선물 받은 립스틱인데 색이 너무 진해서 괜히 발랐나 싶어요.”
“아뇨. 니아 님께 정말 잘 어울려요.”
그래그래, 이거지.
절친끼리 주고받는 답정너 칭찬 타임!
오랜만에 듣는 무한한 칭찬에 나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 칭찬 타임을 가진 후에야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스텔 님은 어떤 드레스를 좋아해요? 사계절 내내 입을 거면 실크가 무난하겠지만, 곧 더워질 테니 모슬린 원단도 괜찮을 것 같아요. 드레스 라인도 너무 몸에 붙는 것보다는 풍성한 편이 좋을 것 같고요. 에스텔 님은 어때요?”
에스텔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머뭇거리더니, 엄청난 고백을 털어놓듯 말했다.
“실은, 저는 드레스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직접 드레스를 사는 게 오늘이 처음이라서요.”
컬쳐쇼크.
스물둘이나 된 아가씨가 드레스를 처음 사 본다고?
나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입은 드레스는 어떻게 골랐는데요?”
“사제님께서 선물해 주셨어요.”
허름하기 그지없었던 드레스가 어디서 주워 온 것이 아니라 선물 받은 드레스였다고?
그 부분이 더 놀라웠다.
망할, 사제 놈들. 이왕 선물해 줄 거면 제대로 된 걸 줄 것이지.
속으로 이를 으득거리는데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금통을 깨서 돈을 모아 오긴 했는데,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에요. 이 금액으로 제대로 된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행히도 이 부분은 예상했던 바이기에 나는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걱정하지 말아요. 가격대가 저렴한 드레스 숍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까.”
“정말요?”
“네.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요!”
* * *
우리는 수도의 거리에 즐비해 있는 화려한 드레스 숍을 지나쳤다.
대로변을 조금 벗어난 뒷골목에는 작은 간판이 달린 숍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에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모두가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모두가 고가의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구석진 숍을 잘 찾으면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드레스를 구할 수 있답니다.”
어떤 가게를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찾아간 곳은 간판조차 걸려 있지 않은 허름한 건물이었다.
끼이익.
녹슨 문을 열고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에스텔이 소곤거렸다.
“쓰레기장에 잘못 들어온 것 아닐까요?”
“마네킹과 천 쪼가리가 보이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내 말에도 에스텔의 의심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드레스 숍이라고 하기엔 가게 안의 상태가 심각했으니까.
고급 드레스 숍처럼 잘 꾸며진 쇼윈도에 드레스가 걸려 있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넓은 테이블 위에 수많은 천과 실이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공간은 개판이었다.
그럼에도 그 난장판 속에 걸려 있는 몇 벌의 드레스는 제법 훌륭했다.
“디자인이 무척 세련됐네요. 디자이너의 솜씨가 좋아 보여요.”
“그런가요. 저는 봐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에스텔과 드레스를 구경하던 참이었다.
가게 안쪽에서 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여인이 튀어나왔다.
“샤넬르의 드레스 숍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디자이너 샤넬르라고 해요. 어떤 드레스를 찾으시나요?”
나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렴한 가격에 완성도 높은 드레스를 찾고 있어요.”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개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완성도가 높으면 가격이 높고, 완성도가 낮으면 가격이 낮은 것이 진리였으니까.
샤넬르는 그 말을 지적하는 대신 물었다.
“실례지만 가지고 계신 예산이 어느 정도이신지요?”
나는 에스텔과 합의한 가격을 말했다.
“드레스 두 벌에 300골드요.”
아무리 허름한 숍이라고 해도 어이없어할 만큼 낮은 가격이었다.
샤넬르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비용이라면 제대로 된 드레스를 맞추시는 건 무리예요. 싸구려 중고 드레스라면 모를까…….”
그 말에 에스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샤넬르는 그런 에스텔을 보더니 말했다.
“혹시 이번 달에 열리는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 때 입기 위해 맞추시는 드레스인가요?”
“맞아요.”
그 순간 샤넬르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나, 귀한 손님들이셨군요.”
그러더니 그녀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보아하니 두 분, 예산이 넉넉지 않으신가 본데 이건 어때요? 제가 두 분을 위한 드레스를 제작해 드릴게요. 그것도 공짜로요.”
“공짜요?”
나와 에스텔이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샤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롭게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바로 드레스 디자인을 전적으로 제게 맡기는 거예요. 두 분은 완성된 드레스를 입고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 때 참석해 주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요?”
“숍의 홍보죠! 귀족들이 모두 모인 연회에서 아름다운 숙녀 두 분이 드레스를 입는 것만큼 입소문이 나기 좋은 상황은 없으니까요.”
“흐음.”
나는 턱을 두드리다가 에스텔의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어때요. 괜찮은 기회 같지 않아요?”
그러나 에스텔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 누군가가 열심히 만든 것을 받고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너무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어 주시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요.”
“만들어 준 드레스를 입고 숍의 홍보를 해 주는 일인걸요. 마땅한 보상을 치르는 셈이에요. 게다가 좀 화려하면 어때요. 황성에서 열리는 연회이니만큼 다들 엄청난 드레스를 입고 나올 텐데요. 분명 조금도 표 나지 않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머뭇거리는 에스텔을 향해, 나는 아쉬운 얼굴로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이곳 드레스 완전 내 스타일인데…….”
“……!”
나의 처연한 중얼거림에 에스텔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도 에스텔 님이 부담스럽다면 여기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나는 하나도 안 괜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스텔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좋아요. 우리 이곳에서 드레스를 제작하도록 해요. 돈도 아낄 수 있고 정말 좋은 기회 같아요.”
그 말에 우리를 지켜보던 샤넬르가 환하게 웃었다.
“훌륭한 결정이에요. 분명 후회하시지 않을 거예요. 이 샤넬르가 두 분께 최고의 드레스를 선물해 드릴 테니까요.”
“네. 염치없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에스텔이 샤넬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꾸벅 숙인 에스텔의 등 위에서 샤넬르와 눈이 마주쳤다. 샤넬르가 눈을 빛내며 입을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성녀님, 낚시 성공!’
* * *
일의 전말은 이렇다.
나는 에스텔에게 드레스를 입히기 위해 이겨 내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았다.
첫째, 그녀는 절대 내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간 쓸개를 다 떼어 주지만 정작 자신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을 강박적으로 싫어한다.
아무리 처음 사귄 친구라고 해도 내가 주는 고가의 드레스를 받지 않을 테지.
둘째, 설령 금액적인 걱정이 없어져도 그녀는 절대 괜찮은 드레스를 고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성녀가 고가의 드레스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는 가격의 드레스는 곤란했다.
그녀를 조롱하려고 작정한 오만한 귀족 영애들의 콧대를 짓눌러야 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찾은 디자이너가 바로 샤넬르였다.
패션에 대해 조금도 관심 없는 에스텔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샤넬르는 사실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디자이너였다.
수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거리에 샤넬르의 드레스 숍이 입점되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샤넬르를 찾아갔다.
내가 에스텔과 들어간 허름한 건물은 사실 그녀의 작업실이었다.
[드레스를 주문하고 싶어요.]샤넬르는 콧대가 높았다.
[예약 다 찼습니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수도의 날고 기는 귀족들의 주문이 쇄도하는 샤넬르에게, 나는 딱히 매력적인 고객이 아닐 테니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옷을 재단하는 샤넬르를 향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성녀님의 드레스도 제작하실 여유가 없나요?]‘성녀’라는 말에 샤넬르의 손이 멈췄다.
아름다운 외모와 성스러운 힘을 가진 에스텔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고, 그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페르니아 영애의 성격이 시원시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농담을 이렇게 잘하시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성녀님은 어떤 연회장에서도 한결같이 끔찍한 드레스를 입는 걸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그런 분의 드레스를 주문한다고요? 열심히 만들어 봤자 성녀님은 입지도 않을 텐데?]샤넬르의 말에는 에스텔이 결코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최고급 드레스를 입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사교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디자이너다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성녀님이 당신의 드레스를 입게 해 줄게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성녀님을 여기 데리고 와서 직접 당신에게 드레스 주문을 하게 만들 테니까.]그제야 샤넬르가 손에 들고 있던 천을 내려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아요.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진행했다 쳐요. 그럼 드레스의 대금은 어떻게 치르실 생각인지?]가세가 기운 후작가의 영애가 감당할 수 있겠냐는 눈빛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 최고의 디자이너인 샤넬르가 만드는 드레스의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최고의 품질로 만든 드레스는 작은 마차 하나의 값이었다.
루시안이 준 돈으로는 턱도 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난 자신이 있었다.
이 장사꾼과의 흥정에서 이길 자신이.
[돈은 지불하지 않아요. 이건 주문이 아니라 거래니까.] [뭐라고요?] [무상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줘요. 대신 드레스의 디자인은 당신에게 전적으로 맡기죠.]자신만만했던 샤넬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르면 값인 자신의 드레스를 무상으로 달라는 말을 개소리라고 무시하기엔 내가 제시한 미끼가 너무나 강력했으니까.
그 성녀에게, 온전히 자신의 판타지가 듬뿍 들어간 드레스를 입힐 수 있는 기회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샤넬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이 거래.]* * *
그렇게 체결된 성녀님 드레스 만들어 주기 대작전이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차를 홀짝였다.
에스텔은 샤넬르와 탈의실에 들어가 치수를 재는 중이었다.
닫힌 탈의실 문을 바라보며 나는 어둠의 계략가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가게에 온 흐름도, 샤넬르의 대사도 아주 자연스러웠어. 모든 것이 우연인 것처럼 설정해 두었으니 나중에 에스텔이 샤넬르가 유명한 디자이너인 걸 알아도 내가 이 계획을 꾸몄다고 의심하진 않을 거야.’
완전범죄가 바로 여기 있다! 호호호호!
마녀처럼 웃던 나는 탈의실 안에서 나오는 에스텔을 보며 음습한 미소를 말끔하게 지웠다.
“치수는 잘 쟀나요?”
“네. 디자이너님이 무척 꼼꼼하시더라고요. 니아 님의 말대로 솜씨가 좋으신 것 같아요.”
아무리 드레스를 잘 모르는 에스텔이라도 샤넬르의 실력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일류의 실력은 어디서든 표가 나는 법이니까.
나는 웃으며 에스텔에게 말했다.
“그럼 저도 치수를 재고 올게요.”
“네.”
소파에 앉아 옷을 정돈하는 에스텔을 뒤로하고 나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울어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 샤넬르가 있었다.
샤넬르는 혹시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줄자를 든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을 또르르 흘리던 그녀는 여신이라도 영접한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기적 같은 아름다움이더군요. 티끌 하나 없이 부드럽고 흰 피부에,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몸매, 찰랑이는 금빛 머리카락! 심지어 새끼발가락까지 성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녀는 차마 이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영감이, 영감이 솟아올라요! 자애로움, 우아함,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을 담은 디자인이!”
당장이라도 탈의실을 나가 드레스를 만들 것처럼 흥분한 샤넬르를 붙잡은 건 나의 목소리였다.
“내 치수는 재고 가야죠.”
불타오르는 디자인 혼을 억눌린 샤넬르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했으나, 내 곁에 와서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과연, 능숙한 솜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