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the wife of an extra who turns evil RAW novel - Chapter 7
4.
웬만한 드레스 숍의 디자이너와는 차원이 달랐다.
샤넬르는 새초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샤넬르가 만든 드레스를 고작 500골드에 가져가시다니, 영애는 정말 대단한 행운을 얻으신 거예요.”
“행운이 아니라 수완이죠.”
내 말에 샤넬르의 입이 조금 더 튀어나왔다.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는 갔다.
왜냐면 내 드레스를 만드는 건 그녀가 원치 않았던 옵션이었기 때문이다.
[성녀님의 드레스와 같은 분위기로 내 드레스도 제작해 줘야 해요. 그게 이 작전의 포인트니까.]성녀의 드레스를 만들 생각에 신나 있던 샤넬르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나마 내 옷은 따로 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 그녀의 위안일 것이다.
샤넬르는 줄자를 이동시키며 말했다.
“페르니아 영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애의 드레스는 성녀님의 드레스와 비교하면 원단과 재료 질이 떨어질 거예요. 그 부분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가서 완성된 드레스 퀄리티가 다르다고 화내시면 곤란해요.”
당연한 말이었다.
애초에 샤넬르에게 고작 500골드를 내고 드레스 제작을 부탁하는 것부터가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 에스텔의 드레스와 똑같은 퀄리티를 요구한다면 말도 안 되지.
나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에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에스텔의 드레스 제작에나 최선을 다하세요.”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게 말이다.
그 후 에스텔과 나는 샤넬르와 어떤 디자인의 드레스를 만들지 의견을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자인 스케치가 완성되면 연락을 주겠다며 인사를 하는 샤넬르의 눈빛은 에스텔에게만 향해 있었다.
어디 감히 여주를 넘보나 싶어 그 눈빛이 고까웠지만, 에스텔이 그녀를 향해 한 말 덕에 기분이 풀렸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샤떼루 님.”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에스텔에게 샤넬르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보란 듯이 그런 에스텔의 팔짱을 끼며 인사했다.
“그럼 샤떼루 님, 수고하세요.”
여주를 독차지하는 이 기분, 늘 짜릿해! 새로워!
* * *
‘힝. 모처럼 외출인데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쉽다. 카페라도 가서 수다 떨면 좋을 텐데. 원래 친구랑 노는 루트는 그게 정석이잖아.’
하지만 나는 에스텔에게 선뜻 카페에 가서 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스텔은 성녀인 동시에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황족이 초대하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녀로서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카페처럼 세속적인 곳은 가지 않는다.
‘간다고 해도 설탕 같은 사치품이 듬뿍 들어 있는 디저트는 입에도 대지 않으니 곤란하기만 할 거야.’
그렇게 카페에 가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는데 에스텔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아 님 덕분에 좋은 가게를 알아 돈을 절약하게 됐어요. 카페라도 가서 맛있는 차와 디저트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돼요?”
“그럼요.”
어머머, 웬일이야.
이 타이밍에서 많은 이들은 ‘하지만 에스텔 님은 그런 곳을 좋아하시지 않잖아요. 저 때문에 무리해서 가실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테지만 나한테 그런 건 없다.
에스텔이 먼저 가자고 했잖아! 그럼 가야지!
나는 상기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럼 제가 가 보고 싶었던 카페에 갈까요? 마침 이 근처거든요.”
“좋아요.”
에스텔은 사르르 웃었다.
너무 좋아!
나는 에스텔과 팔짱을 끼고 한 카페로 향했다. 최근에 오픈한 카페라 귀족 영애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에스텔을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에스텔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카페를 둘러보았다.
“와, 카페가 정말 예뻐요.”
“그렇죠?”
나는 에스텔과 함께 진열대로 향했다.
유리로 만든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님들의 모습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소문대로야!’
앙증맞은 딸기가 올라간 딸기 케이크, 몽글몽글한 생크림 케이크, 보기만 해도 달콤사할 것 같은 초코 케이크까지.
예술 작품에 비견할 만한 아름다운 자태의 케이크였다.
쭉 늘어진 케이크를 구경하던 내 시선이 멈춘 곳은 화사한 장미꽃이 올라간 붉은색 케이크였다.
‘어라, 이 케이크 꼭…….’
케이크를 빤히 바라보는데 에스텔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케이크를 드실지 고르셨어요?”
“아, 저는…….”
나는 장미꽃 케이크를 한 번 더 봤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크는 뭐니 뭐니 해도 생크림이지!
“비가 온 후 화창한 아침의 뭉게구름요.”
케이크 작명 센스 좀 보소.
베*킨라*스에서 일하던 직원이 빙의했나.
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데 에스텔이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 눌렀다.
“더 시키세요. 저 돈 많아요.”
사실 많은 여인들이 그렇듯 내 몸속에도 케이크 배가 따로 있어서, 저런 조각 케이크쯤이야 다섯 개도 야금야금 먹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만뒀다.
에스텔의 낡은 지갑에 있는 돈이 얼마나 귀한 돈인지 아니까.
작은 케이크 하나의 가격은 그녀가 몇 달 동안 쓸 수 있는 돈일 테지.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하나면 충분해요.”
시럽이 듬뿍 들어간 커피와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를 앞에 둔 나와 달리 에스텔의 앞에는 물 한 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한 입 먹어 볼래요?”
예상대로 에스텔은 고개를 내저었다.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편히 드세요.”
먹지 않는다는 사람한테 계속 권하는 것이 더 실례다. 나는 에스텔에게 권하는 것을 그만두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이름대로잖아. 정말 맛있어!’
비가 온 후 화창한 아침의 뭉게구름처럼 생크림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케이크를 우물거리던 중 책상 옆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간행물이었다.
보통 최근 유행하는 드레스나 향수 같은, 귀족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가 적혀 있곤 했다.
‘오랜만에 봐 볼까.’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손에 든 나는 생크림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대체 누가 이런 어마어마한 글을 쓴 거야.’
나는 기가 찬 얼굴로 에스텔과 머리를 맞대고 글을 읽어 내렸다.
간행물은 종이 한 장을 꽉 채워 칼릭스와 루시안의 상극되는 매력에 대해 구구절절 서술하고 있었다.
외모, 성격, 배경, 능력, 모든 것에서 두 남자는 달랐다.
그렇기에 두 남자 중 한 명을 신랑감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극명하게 나뉠 수밖에 없었다.
카페 안에 있는 여인 중 많은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처럼 심각한 얼굴로 간행물을 읽었다.
그중에는 책자를 사이에 두고 열띤 얼굴로 토론을 하는 이들도 보였다.
나는 에스텔을 향해 물었다.
“에스텔 님은 두 남자 중 누가 더 훌륭한 신랑감인 것 같아요?”
툭 내뱉은 질문에 에스텔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찼다.
“그, 글쎄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럼 지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두 남자를 다 아니까 더 확실히 알 수 있잖아요.”
에스텔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선택을 알 것 같았다.
연애 감정에 한없이 둔한 탓에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이 시기에 이미 에스텔은 칼릭스에게 끌리고 있었다.
결국 대답하지 못한 에스텔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니아 님은 어떤 분이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나야 취향이 확고했다.
“당연히 루시안이죠.”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남주에게 마음이 가는 여주와 달리, 나는 지극히 객관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였다.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여자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루시안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루시안이 흑화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아름다운 외모에 다정하고,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잖아요. 그에 비해 황태자 전하는…….”
칼릭스는 성격이 더럽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단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최고의 신랑감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다.
“혼인하는 순간 황가가 시댁이 된다고요. 그것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어요?”
에스텔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내가 말한 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칼릭스의 친모이자 황후는 죽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친할머니인 황태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녀는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조금이라도 예법에 거슬리면 회초리질을 하는 건 물론이고, 상하 서열을 중요시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용서하지 않는다지.’
그런 황태후이니 평민 신분인 에스텔을 예뻐할 리 없었다.
칼릭스의 생일 연회에서 귀족들에게 조롱당하는 에스텔을 성 밖으로 쫓아낼 만큼.
그렇다.
그녀 또한 이번 에피소드에서 에스텔을 괴롭히는 악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원작처럼 고약한 짓은 하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에스텔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회장에 나타날 테니까.’
황태후조차 책잡을 수 없을 만큼.
내 시선에 에스텔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 * *
카페에 앉아 열심히 수다를 떨다가 헤어진 것은 어스름하게 해가 질 무렵이었다.
에스텔이 나를 향해 말했다.
“친구와 노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건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나도 그래요.”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서로를 향해 웃었다.
“또 만나서 놀아요.”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온기가 차올랐다.
처음에는 분명 자그마한 오지랖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가 좋다. 정말 너무 좋다.
그녀를 향한 애정으로 온몸이 충만해질 정도로.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경쾌한 목소리로 저택에 들어선 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왜 다시 겨울이 온 거지?’
집 안에는 오싹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차가운 기운을 내뿜은 사람은 바로…….
“친구와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루시안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히익 하고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확신했다.
루시안 카르디엔이 흑화했다!
‘아직 에스텔이 황태자와 가까워진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원작보다 훨씬 이른 흑화에 오들오들 온몸이 떨려 왔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어차피 금방 붙잡힐 텐데? 차라리 웃으면서 비위를 맞춰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에게서 어떻게 목숨을 지킬까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루시안의 등 뒤로 낯익은 얼굴이 쏘옥 나타났다.
“페르니아 왔구나. 집이 좀 어둡지? 카르디엔 경에게 16살에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모앙셀 영애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던 중에 기름이 떨어져서 등불을 갈고 있던 참이다. 마치 운명의 장난 같지 않느냐. 모앙셀 영애가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도 이렇게 등불이 나갔던 때였거든. 어둠 속에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 나처럼 주접 떠는 남자는 처음이라고.”
그제야 나는 루시안이 왜 흑화했는지 깨달았다.
16살의 이야기까지 왔다는 건, 1초도 쉬지 않고 온종일 아버지가 투머치토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아니지. 아버지가 저렇게 멀쩡하게 떠들고 있는 걸 보면 흑화한 건 아니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루시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가늘어진 눈과 꾹 다문 입.
나는 그의 상태를 정정했다.
‘지금 삐졌어요?’
루시안은 전쟁터가 아니라면, 지나가는 개미보다도 무해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페르니아도, 귀족들도 대놓고 그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그가 삐졌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다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구겨진 미간. 살짝 부어오른 볼. 꾹 다문 입.
‘역시 삐진 게 맞잖아!’
늘 그가 흑화하는 것만 걱정했지, 삐진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등 뒤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일단 삐짐 모드를 해제하자.’
대수롭지 않게 삐짐 모드를 방치하는 건 위험한 짓이다.
여기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평생 삐짐 모드가 해제되지 않을지 모르니까.
특히나 루시안처럼 언제 흑화할지 모르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위험했다.
‘그런데 어떻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봤지만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한마디밖에 없었다.
연애 고수였던 친구가 남자 친구 기분을 풀어 주는 데 최고라며 알려 주었던 방법이다.
[가슴 만질래?]그 말은 분명 효과가 있긴 할 것이다.
사람은 본디 미친 자에게는 삐지지도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약혼자에게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즐겁지 않아.’
그렇다면 답은 하나.
정공법으로 사과하기.
“미안해요!”
나는 루시안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친구와의 약속이 급하다고 해도 약혼자를 지옥의 늪에 빠뜨리고 사라져 버리다니, 그래선 안 됐어요. 저는 정말 천하에 빌어먹을 약혼녀예요. 저 같은 건 밥을 먹을 자격도 없어요. 오늘 저녁은 거르고 밤새 생각 의자에 앉아 벽 보고 반성하도록 할게요!”
포인트는 격하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이 세상에서 다시없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
루시안의 삐짐 모드가 단번에 풀어졌다.
루시안은 아까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당황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제 발로 후작님을 찾아온 건 접니다. 영애는 친구와 약속을 지키신 것뿐이고요. 영애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정말입니다.”
순순히 대답한다고 마음이 풀렸구나, 라고 물러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마무리까지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잽싸게 쇼핑백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것을 받아 주세요.”
루시안은 커다래진 눈으로 내가 내민 네모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요?”
“오늘 갔던 가게에서 본 건데 너무 예뻐서 하나 샀어요.”
“열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루시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 들어 있는 건 장미꽃이 장식된 붉은빛 케이크였다.
나는 신나서 주절거렸다.
“엄청 예쁘죠? 케이크 위에 올라간 장미꽃은 생화고, 생크림은 장미꽃을 녹여 만든 색소를 넣어 만들었다고 해요.”
“예쁘긴 합니다. 왜 이것을 제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케이크, 카르디엔 경의 눈동자 색을 닮았잖아요.”
보자마자 바로 루시안을 떠올렸다.
그런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까 말까 고민이 됐다. 드레스를 사는 데 돈을 다 써서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구입한 케이크였다.
“…….”
루시안의 얼굴에 삐진 기색은 이제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케이크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마치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그가 손을 내밀어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영애.”
……사길 정말 잘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아버지를 겨우 떼어 놓고 나는 루시안과 함께 저택을 나왔다.
“오늘은 내가 카르디엔의 저택까지 바래다드릴게요. 가다가 고막에서 피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피곤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피곤해요. 마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건데요, 뭘.”
루시안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루시안의 저택에 도착할 때 즈음이었다.
“페르니아 영애, 괜찮으시면 마차에서 내려 잠시 걸을 수 있을까요?”
“네?”
“영애와 잠시만 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말에 새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무려’ 일주일이나 나를 보지 못했다며 서운해하던 그가 떠올랐다.
고독한 서브 남주답게 놀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동그란 달이 뜬 밤하늘 아래, 나는 루시안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사람이 없는 거리는 적막했지만, 그래서 더 운치 있었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날려 꽃비가 되어 내렸다.
어딘가 사람을 설레게 하는, 그런 봄밤이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나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카르디엔 경, 다시 한번 아까 일은 사과할게요. 실은 경이 그렇게 오래 아버지의 말을 들어줄지 몰랐어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도망갈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가 아직도 저택에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루시안은 눈썹을 내려 웃었다.
“열정적으로 말을 하시니 중간에 끊기가 힘들었습니다. 재미있기도 했고요.”
“정말요?”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눈빛으로 채근하자 그가 고백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토록 자세하게 들어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물론 15살의 연애 이야기까지 갔다가, 빼먹은 이야기가 있다며 다시 5살 때의 이야기로 되돌아갔을 땐 조금 힘들긴 했지만요.”
흑흑. 내가 죄인입니다.
에스텔에게 눈이 멀어 가련한 남자를 지옥 속에 몰아넣고 갔구나, 라는 죄책감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을 슬쩍 닦아 내는데 루시안이 물었다.
“영애는요? 교환 일기를 쓸 정도로 절친한 친구분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아…….”
나는 슬쩍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주 즐거웠어요. 드레스 숍에서 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열심히 수다도 떨고 왔답니다.”
“······그랬군요.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영애와 그렇게 잘 맞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그걸 물어봤었지.
친구 없기로 유명했던 내게 생긴 친구가 어지간히 궁금한가 보다.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든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에스텔이라는 이름만 쏙 빼고 말하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테니.
“반짝반짝 빛이 나는 정말 예쁜 친구예요.”
본론만 딱 이야기했건만 루시안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잠시 후 그가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건 나라고 했으면서.”
“네?”
방금 뭔가 어마어마하게 깜찍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조금 새초롬해진 얼굴로 물었다.
“제게 빌린 돈으로 그 반짝거린다는 친구분에게 옷을 선물해 주신 겁니까?”
‘반짝’이라는 어여쁜 말에서 적의가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러려고 했지만, 더 좋은 방법이 생겨서 그러지 않았어요. 대신 경에게 빌린 돈으로는 제 드레스를 맞추었답니다.”
“영애의 드레스요?”
“네. 얼마 후면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가 열리잖아요.”
“…….”
“제작 기간이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분명 훌륭한 드레스가 완성될 거예요.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부탁했거든요.”
샤넬르가 만든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을 떠올리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누더기에 가까운 허름한 드레스를 입었어도 그렇게 예뻤는데 제대로 만든 드레스를 입으면 얼마나 예쁠까?’
그러나 나의 흐뭇한 상상은 이어진 그 목소리에 와장창 깨져 버렸다.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를 위해 드레스를 맞추셨다는 말이군요.”
평범한 말인데 왜 등이 오싹하냔 말이야.
나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안의 얼굴을 본 나는 히익, 하고 비명을 내뱉었다.
케이크 선물 하나 받았다고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던 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서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또 그러는데?’
약혼자에게 삥을 뜯어 새 드레스나 맞추는 내 무개념에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자기가 아버지에게 귀 고문을 당하는 사이 내가 드레스나 맞추며 희희낙락 놀았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것도 아니면 내 눈, 코, 입 위치가 마음에 안 들어서?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그가 분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시안이 말했다.
“이번 황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 때 제가 영애를 에스코트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 나갈 뻔했다.
왜냐면 원작에서 그는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그는 애초에 연회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연적인 황태자의 생일 연회라면 더더욱.
무엇보다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에스텔이 오는 자리였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픈 그녀가.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당신이 회장에 오면 내가 말한 친구가 에스텔이라는 사실을 들켜 버리잖아.’
그에게 영원한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입이 바짝 말라 왔다.
그러나 루시안은 자비 없이 물었다.
“괜찮겠지요, 페르니아 영애?”
그는 나의 약혼자였다.
약혼자가 약혼녀에게 공식적인 행사에 함께 가자고 하는데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럼요.”
하나도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다고!
* * *
황태자의 열여덟 살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칼릭스는 황족으로서 드물게 지금까지 약혼을 하지 않았다.
황태자비가 될 만한 마땅한 여인을 찾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실상 오늘 열리는 연회는 황태자의 상대를 찾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귀족 위주로 연회에 초대한 것만 봐도 목표가 뻔하지.’
그래서 아직 정혼자가 정해지지 않은 귀족 영애들은 엄청난 열의로 이날을 준비했다.
황태자를 유혹하기 위해서였다.
‘수도에 있는 드레스 숍이 모두 역대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했지. 고만고만한 가문의 영애조차 가세가 흔들릴 정도로 고가의 드레스를 주문했다고.’
나는 그 모든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황태자는 에스텔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거울 속의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샤넬르가 제작한 드레스는 예상대로 그냥 그랬다.
물론 기본 실력이 있기에 드레스의 디자인과 바느질 솜씨는 그럭저럭 훌륭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완성도가 떨어졌다.
아무리 잘 봐줘야 중급 정도.
다른 귀족 영애들이 기세등등하게 맞췄을 드레스와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있는 듯 없는 듯 있기에는 딱이지.’
괜히 튀어서 칼릭스의 눈에 거슬리거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나 흡족한 내 마음과 달리 앤은 잔뜩 속상한 얼굴이었다. 앤은 내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오리처럼 입을 삐죽거렸다.
“돈을 아끼느라 드레스 품질을 낮추신 건 이해해요. 하지만 이런 스타일은 아가씨께 어울리지 않잖아요.”
왜 이런 디자인으로 의뢰를 했냐는 원망이었다.
드레스는 연한 하늘색 색상으로, 전체적으로 여리여리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에스텔의 드레스와 분위기를 맞춰 만든 드레스라 어쩔 수 없었다.
에스텔에게는 찰떡이지만, 화려한 인상의 내게는 남의 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드레스 디자인이 이러니 화장도 진하게 하지 못하셨잖아요. 눈매를 진하게 그려서 한껏 표독스러워 보이는 게 아가씨의 매력인데……. 차라리 다른 드레스로 바꿔 입으시면 안 돼요?”
늘 내 말에 순종적인 앤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지금 내 모습이 별로이긴 한가 보다.
하지만 앤, 평상시 같은 악녀 메이크업과 화려한 드레스는 오늘만큼은 필요하지 않은걸.
왜냐면 오늘은…….
‘에스텔이 주인공인 날이니까!’
완성된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을 떠올리면 지금도 코피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 예뻤다.
‘원작에서 에스텔에게 거지가 입던 넝마를 주워 입고 온 거 아니냐며 낄낄거렸던 여자들은 죄다 입을 틀어막겠지. 생각만 해도 꿀잼!’
칼릭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덕 부정기 중인 남주 주제에 참지 못하고 에스텔에게 다가와 알랑거릴 테지.
그 모습을 볼 생각에 한껏 고양되었던 기분은 한마디 말에 가라앉아 버렸다.
“아가씨, 카르디엔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꿀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루시안이 등장하는 순간 이 소설의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라 신파극, 혹은 공포물로 변해 버린다.
내가 에스텔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반응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꾸민 에스텔과 칼릭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과연 그가 견뎌 낼 수 있을까?
‘이러다가 오늘 흑화해 버리는 것 아니냐고.’
가장 끔찍한 전개를 떠올리며 나는 심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루시안을 본 순간, 나는 입을 헤벌리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페르니아 영애.”
“…….”
“페르니아 영애?”
“…….”
어, 그러니까, 음, 저기…….
설마 그쪽도 오늘 칼릭스를 꼬시려고요?
그런 미친 생각을 할 만큼 오늘의 루시안은 굉장했다.
탄탄한 몸의 핏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정색 정장에 은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붉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다니.
반칙이다.
나는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물었다.
“제가 선물한 옷을 입으셨네요?”
“네. 오늘에서야 입었습니다.”
루시안은 두 눈을 가늘게 휘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반짝반짝 예쁜가요?”
졸라 예뻐!!!!!!!!!!!!!!!!!!!!!
너무 예뻐서 내가 이성을 잃고 흑화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감동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이 답이 되었나 보다.
루시안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출발하시죠.”
* * *
힐끗.
시선이 돌아갔다.
힐끗.
또 시선이 돌아갔다.
애써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또다시 힐끗 시선이 돌아갔다.
‘흑흑. 이 본능에 충실한 눈알아.’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본능처럼 루시안에게 향하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미치겠는 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짓는 그의 미소였다.
“……!”
그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나노 단위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평소와는 분명히 달랐다.
검정색 정장이야 내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했으니 입었다 쳐도, 저 미소는 도대체 뭐냐고!
평소의 은은하고 단정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눈가를 요염하게 휘는 것이 마치…….
‘나한테 끼 부리는 것 같잖아!’
마치 내가 돈 많은 사모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빌린 돈밖에 없는 가난한 약혼녀일 뿐인데?
나는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착각하지 마. 끼를 떤다 해도 그 상대는 내가 아니라 에스텔이겠지.’
에스텔이 오늘 연회에 온다는 건 그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런 옷을 입고 왔다는 게 더 신빙성이 높았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를 피하기 급급했던 그가 이제는 그녀를 당당하게 마주 보기로 결심했다는 거니까.
‘그럼 에스텔에 대해서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앞에서 절대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르디엔 경, 일전에 말한 제 친구 있잖아요.”
“네.”
“사실 에스텔 님이에요. 성녀님요.”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떻게 내가 에스텔과 친구가 됐냐고 의심할까.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할까.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렇군요.”
어딘가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 알고 있었어요?”
“……네.”
“어떻게요?”
“……폴에게 들었습니다.”
폴이 누구지.
한참 후에야 오랫동안 출현이 없어 잊고 있던 그의 부관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나와 에스텔의 관계를 아는 거지?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을 본 건가.’
생각해 보면 몇 번이나 에스텔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거리를 돌아다녔으니 봤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더는 엄청난 비밀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감안해도 루시안의 반응이 너무 덤덤했다.
‘내가 당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와 친하게 지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차마 묻지 못하고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페르니아 영애, 오늘은 평소와 느낌이 전혀 다르군요.”
“아, 눈치챘어요?”
하긴, 앤이 아니더라도 눈치챌 만큼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이었으니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스타일을 조금 바꿔 봤어요.”
거기서 대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루시안이 물었다.
“왜요?”
생각지 못한 물음에 조금 당황했다.
이 드레스에 얽힌 이야기를 구구절절 다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무난한 답을 찾아 대답했다.
“이편이 더 예쁠 것 같아서요.”
그 순간 살랑이던 루시안의 눈빛이 일순간 험악해졌다. 나는 그 모습이 눈썹을 모았다.
“그렇게 별로예요?”
“그게 아니라…….”
루시안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에 그는 더 이상 내 드레스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곤란한 대화를 피하려는 것처럼.
아무리 오늘 내 모습이 별로라고 해도 그런 반응은 너무하잖아!
나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상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금방 실패하고 또다시 그를 바라보고 말았지만.
흑흑. 본능에 충실한 안구는 가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황성에 도착했다.
황금으로 꾸며진 화려한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다리를 휘청거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바로 내 약혼자의 어마어마한 미모 때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카르디엔 경.”
“연회장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정말, 정말 잘 오셨어요.”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일전에 약혼식 때 초대받았었는데요.”
마치 불빛에 달라붙는 불나방처럼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루시안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봐요. 저도 같이 왔거든요.’
그러나 이미 그들의 눈에 나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사람을 유령 취급하는 것이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한편으론 흐뭇하기도 했다.
‘내 최애캐가 사랑받는 걸 보는 건 기쁜 일이야.’
물론 내 마음과 달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루시안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저렇게 예쁜데.’
세상 예쁨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은 미모에 사랑스럽기까지 한 남자건만,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워했다.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고 학대당하며 자란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늘 두려움을 가졌다.
제국의 가장 위대한 기사가 된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삽질하는 게 매력인 서브 남주라지만, 스스로에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면 좋을 텐데.’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여주를 향해 ‘설마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 나를, 니가 감히?’라며 부들거리는 오만한 남주처럼 말이다.
“무슨 속셈이지?”
와, 원숭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황태자 칼릭스였다.
남주 답게 등장하자마자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루시안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이들은 물론,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들의 시선에는 오만한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보다 큰 감정은 경이로움이었다.
완벽한 예술 작품을 마주한 듯한 감탄 말이다.
‘그래. 성격은 별로지만 잘생기긴 했지.’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신이 조각한 듯한 완벽한 얼굴. 길게 뻗은 다리와 단단한 몸.
그는 로맨스 소설의 남주가 어떤 존재인지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반경 100미터 안에 있는 이들을 중력으로 일그러뜨릴 것만 같은 묵직한 분위기가 압권이었다.
칼릭스는 불쾌감이 서린 눈빛으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에는 이런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았잖아. 네가 새삼스럽게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왔을 리도 없고…….”
그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건가?”
내 저럴 줄 알았지.
기승전에스텔.
칼릭스는 남주답게 모든 결론을 에스텔로 맺는 재주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다. 나도 은근슬쩍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루시안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아니요. 제 약혼녀를 에스코트하러 왔을 뿐입니다.”
저기요, 이 타이밍에서 왜 내가 나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칼릭스의 매서운 눈이 나를 향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아마 조금 전까지 루시안의 옆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같은 건 그에게 길가에 있는 작은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일 테니까.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딴 여자를 위해 연회장에 왔다고? 그 루시안 카르디엔이? 변명도 그럴듯하게 해야지.’
따위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어쩔 건데, 이 자식아.’
그러나 나는 일개 후작 영애. 그는 이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황태자.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이이가 그렇다네요, 라는 얼굴로 호호호 하고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이 무색하게 나를 바라보는 칼릭스의 눈빛은 싸늘할 뿐이었다.
‘여주 아니면 인간 취급을 안 하는 놈이니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역시 정면으로 남주의 눈빛 공격을 받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루시안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내 앞에 섰다. 마치 칼릭스에게서 나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전하, 이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그래. 약혼식 때도 이런 상황이 이었다.
칼릭스가 루시안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고, 루시안은 나를 감싸 줬었다.
그렇게 두 남자의 기세가 팽팽하게 맞부딪쳤을 때 에스텔이 나타났었지.
마치 그 순간이 여주인공이 나타날 타이밍이라는 듯이 말이야.
그래, 꼭 지금처럼.
에스텔이 연회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왜,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잖아.
평소에는 소박하게 입고 다니던 여주가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나 모여 있던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하는 장면.
나는 그런 장면을 가장 좋아했었다.
찌릿찌릿한 쾌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에스텔은 말도 안 되게 예뻤다.
최고의 디자이너인 샤넬르가 온 힘을 다해 만든 하늘색 드레스는 에스텔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엄청난 아우라를 내뿜었다.
마치 봄날의 꽃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연회장의 모두가 일시 멈춤 상태가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족의 우아함은 모두 잊어버린 듯, 입을 쩍 벌린 채로.
원래대로라면 나도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나는 저 모습을 한 번 본 터라 면역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나는 느긋하게 사람들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내 앞에 있는 칼릭스였다.
‘대박, 표정 봐.’
조금 전까지 한 마리의 흑표범처럼 으르렁거렸던 칼릭스는 여주의 미모에 놀란 일개 엑스트라 1이 되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안다면 두고두고 이불 킥을 할 텐데.’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루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쉽게도 그는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의 드넓은 등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표정으로 에스텔을 바라보고 있을까.’
남주가 저 모양이니 그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을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쩐지 마음이 묘했다.
그때 에스텔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아 님!”
에스텔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잡고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그리고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만큼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연회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기우였어요. 한눈에 니아 님을 찾았답니다.”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나, 나는 평소처럼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좋아할 수 없었다.
‘저기요, 여주님. 바로 옆에 서서 너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남주 두 명은 안 보이시나요?’
제대로 된 인사도 받지 못하고 공기 취급을 받은 두 남자는, 내 손을 잡고 꺅꺅거리는 에스텔을 엄청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칼릭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일을 겪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고, (꼬시다.) 루시안은 오묘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뜨고 있었다. (무서워.)
어쨌건 어느 쪽도 나에게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에스텔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스텔 님.”
“네?”
에스텔이 두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눈동자를 돌려 병풍이 되어 버린 두 남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에스텔은 아, 하고 입을 동그랗게 뜨더니 두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 루시안.”
재빠르게 인사한 그녀는 귀찮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니아 님, 오늘도 정말 예뻐요. 화려한 드레스도 잘 어울리지만 단아한 드레스도 최고예요.”
두 눈을 반짝이며 나에 대한 폭풍 칭찬을 늘어놓는 그녀는 두 남자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칼릭스의 눈빛이 변했다. 일그러진 눈빛에서 느껴진 감정은 선연한 질투였다.
평소라면 ‘흥, 너 같은 평민 여자 따위에게 이 몸이 관심을 줄 것 같으냐.’라고 츤츤거렸을 칼릭스는 에스텔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은 평소와 모습이 다르군. 연회 때마다 입고 왔던 걸레 조각 같던 드레스는 버린 모양이지?”
“…….”
“황족이나 귀족과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더니 오늘은 귀족 영애에게 들러붙어 꽤 알랑거리는군. 드디어 현실 파악이 된 건가?”
입에 썩은 걸레를 물었다는 게 큰 문제였지만.
‘저렇게 비호감인 말만 하는 것도 능력이다.’
과연 내내 여주를 상처 주다가 대성통곡하며 후회하는 남주다웠다.
예전의 에스텔이라면 칼릭스의 독설에 상처받았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예.”
에스텔은 그의 질문에 무서우 리만큼 대충 대답을 하고는 내게 팔짱을 꼈다.
“니아 님,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요.”
황태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반응에 칼릭스는 에스텔에게 귀싸대기를 열 대 정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니 솔직히 좀 꼬셨다.
나는 낄낄거릴 것 같은 얼굴을 필사적으로 정돈하며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칼릭스는 차마 우리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에스텔과 함께 칼릭스에게서 멀어지는데, 강아지처럼 뒤를 쫑쫑쫑 따라오는 존재가 있었다.
루시안이었다.
에스텔은 몸을 돌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루시안, 나 니아 님께 할 말이 있다니까? 너도 따라오지 마.”
“……!”
큰 충격을 받은 듯 루시안이 눈을 부릅떴지만 에스텔은 개의치 않았다.
에스텔의 손에 이끌려 가며 나는 힐끗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루시안은 엄청나게 원망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저 멀리 있는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쪽은 원망이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웠지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보세요들. 끌려가는 건 나라고요!’
그러나 두 남자가 내 억울한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졸지에 두 남주의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나는 어깨를 바짝 움츠리며 에스텔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작은 손만이 내 생명의 동아줄인 것처럼.
* * *
에스텔이 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연회장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휴게실이었다.
아무도 없었기에 우리는 편안한 얼굴로 마주 보고 앉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에스텔이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니아 님. 갑자기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놀라셨죠?”
놀란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요.
라는 속마음을 나는 점잖게 고갯짓 한 번으로 표현했다.
“네.”
내 대답에 에스텔의 얼굴이 붉어졌다.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주는 것은 조금 부끄러워서요.”
“선물이요?”
잠시 후 에스텔이 내게 내민 것은 화려한 나비 모양 핀이었다. 촘촘히 박힌 은색 비즈가 반짝이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에스텔의 말에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완전 내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
에스텔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내 손 위에 핀을 올려 주며 말했다.
“다 알고 있어요. 저 때문에 그 드레스를 입으신 거죠?”
“……!”
그 순간 제대로 잡지 못한 핀이 바닥에 데구루루 떨어졌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슬 맺힌 은방울꽃처럼 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처음에는 몰랐어요. 숍에서 완성된 드레스를 입은 니아 님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답니다. 일방적으로 저에게 잘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드레스를 맞춰 주셨다는 사실을요.”
에스텔이 워낙에 눈썰미가 없어서 끝까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기에 나는 당황했다.
“그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에스텔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샤넬르 님께 부탁해 니아 님의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핀을 하나 구했어요. 니아 님이 제게 베풀어 준 배려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서요.”
바닥에 떨어진 머리핀을 집어 든 에스텔은 나의 청보라색 머리카락 위로 은빛 나비 핀을 대어 주었다.
그러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두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예상대로예요. 정말 예뻐요.”
……작가님. 이 소설 장르 좀 바꿔 주세요.
내가 살다 살다 여주한테 두근거릴 순간이 올 줄이야.
나는 흥분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잘 받을게요. 하지만이 이상 내게 너무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지 말아요. 그저 내 욕심으로 벌인 일일 뿐이니까요. 나는 그저 에스텔 님이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요.”
“네, 그럴게요.”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생크림처럼 몽글몽글했다.
나는 이 따스한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화는 길지 않았다.
“어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쥐새끼라도 숨어들었나 했더니 두 분이었군요.”
얄미운 목소리로 등장한 사람은 바로 에리카와 그 일당들이었다.
등 뒤로 또래의 귀족 영애들을 시녀처럼 단 에리카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게 게임이라면 이런 내레이션이 나왔을 것이다.
나와 에스텔은 의자에 앉아 있었기에, 에리카를 보려면 고개를 한껏 올려야 했다.
반면 에리카는 콧구멍이 보일 정도로 턱을 치켜든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발닦개를 자청하던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 뒤에 붙어 있던 영애들이 제 뒤로 붙으니 살짝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두 분이 우정 드레스까지 맞춰 입을 정도로 친한지는 오늘 처음 알았네요. 뭐…….”
에리카는 나와 에스텔을 번갈아 보더니 세상에서 제일 밉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평민과 가세가 기울어 가는 후작 영애라니 딱이긴 하지만요.”
또 저 패턴이구나.
엑스트라답게 그녀의 공격 루트가 안쓰러울 만큼 단순하고 멍청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에스텔은 저런 말에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타격은 개뿔, 반격하기만 쉬웠다.
나는 에스텔을 향해 신나는 얼굴로 말했다.
“그것 봐요, 에스텔 님. 우정 드레스를 맞춰 입길 잘했죠? 우리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걸 모두가 알잖아요.”
내 말에 에스텔도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싸늘한 휴게실에서 에스텔과 나에게만 꽃가루가 날리는 것 같았다.
우리를 바라보는 에리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못 볼 꼴을 봤다는 얼굴로 입술을 아작아작 깨무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게 왜 악역 엑스트라가 주제도 모르고 여주에게 시비를 거냔 말이야.’
원래 에리카의 자리에서 에스텔을 괴롭히는 역할은 나였다.
페르니아는 에리카보다 능숙하고 악랄하게 에스텔을 몰아붙였다.
페르니아는 실수인 척 에스텔의 드레스에 와인을 들이붓고는 ‘칙칙한 드레스가 붉은색으로 물드니 조금 봐줄 만하네.’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소심한 에리카는 차마 그런 짓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같은 하찮은 시비가 전부였다.
‘에리카야, 억울하면 다음엔 메인 악녀로 태어나렴. 수명이 짧다는 게 흠이지만 너라면 꽤 즐길 수 있을 거야.’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남겼다.
그러나 에스텔을 향한 괴롭힘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황태후마마 납십니다.”
휴게실 바깥에서 들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후. 오늘 밤 맞서야 할 또 다른 악역이었다.
‘그냥 휴게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을까.’
나는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
나야 연회장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겠지만 에스텔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만 있었다가는 황태후를 보기 싫어 숨어 있다는 꼬투리가 잡혀 버릴지 모른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하는 상대야.’
마음을 다잡은 나는 에스텔을 향해 말했다.
“그럼 다시 연회장으로 나가 볼까요?”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회장은 아까와 달리 부쩍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황태후의 등장 때문이었다.
나는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과연.’
지긋한 나이에도 또렷한 눈매와 곧은 허리는 그녀가 얼마나 위세 높은 여인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엄청 좋아하던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시어머니처럼 생겼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황태자의 할머니였지만, 황후가 오래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실상 황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에스텔을 마땅치 않아 했다.
에스텔이 평민의 신분으로 황성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평민들과 일부 귀족들에게 성녀라고 추앙까지 받으면서.
‘뭐, 알량한 질투심인 것만은 아니지. 나중에는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손주가 이 여자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을 거라며 똥고집을 부리니까. 할머니의 본능적인 거부감인지도 몰라.’
그래도 아무 죄 없는 에스텔을 쥐 잡듯 잡는 건 너무했다.
황태후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사냥감을 발견한 흑표범처럼 이쪽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황태후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홀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황태후의 패악질을 막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칼릭스와 루시안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고?
작가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여주를 데굴데굴 굴리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아마 그들은 에스텔이 당할 만큼 당한 후에야 돌아올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에스텔도 황태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지금껏 황태후와 마주칠 때마다 고운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가온 황태후는 턱을 치켜든 오만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보다 키가 작았는데도 그게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과연 남주의 할머니였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도 칼릭스에게서 느껴졌던 숨 막히는 압박감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나와 에스텔은 표정을 관리하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고귀한 황태후마마를 뵙습니다. 라일락 후작가의 페르니아입니다.”
“제국의 고귀한 황태후마마를 뵙습니다. 성녀 에스텔입니다.”
억지로 입꼬리를 그러모아 사근사근하게 인사했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여간 저놈의 집안은 사람 말 씹는 게 가풍이구만.’
나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황태후는 우리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는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제국의 희망인 황태자를 축복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와 있구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나는 원작의 대사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였던가.
‘괜찮아. 오늘의 에스텔은 트집 잡힐 만한 게 없어.’
완벽한 드레스에, 황태후에게 지적당하곤 했던 서툰 예법까지도 완벽하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러니 별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기대 속에, 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페르니아 라일락, 그대를 보는 게 정말 곤욕스럽군.”
……엥?
생뚱맞게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분명 황태후가 저격한 것은 내가 맞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찌를 듯이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황당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향해 황태후가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그 꼴은 뭔가. 라일락 후작가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시정잡배도 걸치지 않을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다니, 지금 황실을 모욕하는 것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드레스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고, 에스텔이 입은 최상급 드레스와 비교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저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황태후의 의도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드레스를 책잡아서 나를 까고 싶은 거구나.’
그런데 왜? 난 성녀도 아니고 황태후와 조금도 관련 없는 후작가의 영애일 뿐인데?
답은 금세 나왔다.
“츳. 저 모양이니 체면도 잊고 평민과 어울리지.”
황태후가 가리킨 평민이란 에스텔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에스텔과 친한 것을 알고 날 건드리는 거구나. 에스텔에게는 책잡을 게 없으니까.’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에스텔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내게 먼지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나를 보호해 줄 만한 존재인 루시안은 이 자리에 없었다.
다른 귀족들은 내가 망신당하는 걸 구경할 생각에 한껏 기대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내 편은 없었다.
‘평소에 페르니아가 사람들에게 지랄 맞았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건가.’
억울해 미치겠지만 자업자득이었다.
‘그렇다고 황태후에게 꼼짝도 못 하는 에스텔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맑디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후마마,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에스텔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황태후를 마주 보고 말했다.
“아무리 고귀한 분이시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정성껏 준비해 입은 옷을 평가하시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근차근 할 말 다 하는 에스텔의 모습에 황태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에스텔은 결코 황태후에게 저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유순한 그녀가 강해지는 순간은 오직 가난한 자들과 남주 앞에서뿐이었으니까.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라는 위치 때문에 에스텔은 황태후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한마디 대꾸조차 한 적이 없다.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나.’
나는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에스텔은 황태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지금이라도 실언을 인정하시고 그녀에게 사과해 주세요.”
“뭐……?”
황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아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럴 만했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저보다 한참 어린 평민 여자가 제게 따박따박 말을 하며 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계집년이!’
라며 당장에 손찌검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황태후보다 에스텔이 입을 여는 것이 빨랐다.
“사과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 무엇도 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맑은 목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저는 무척 속상할 거예요.”
“…….”
“조금 많이요.”
단지 그뿐이었다.
에스텔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적의도, 고압적인 태도도 느낄 수 없었다.
아이처럼 천진한 아쉬움이 묻어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황태후는 엄청난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에스텔은 늘 모든 이에게 몸을 낮추고 소탈한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성녀’라는 것을.
그녀는 전능한 신의 힘을 쓸 수 있는 고귀한 존재이며, 그녀의 뒤에는 교단과 수많은 사제, 그녀를 따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
그 에스텔을 서운하게 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서운하게 한다는 것과 같았다.
‘제아무리 황태후라도 등 뒤가 서늘해질 이야기지.’
안 그래도 반짝거리던 에스텔의 뒤로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후광이 느껴졌다.
마치 강대한 적을 이기고 레벨 업을 한 주인공 같았다.
반면 기세등등하던 황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분노는 그것뿐이었다.
비록 사소한 것을 책잡아 에스텔을 쪼아 댈 만큼 옹졸한 여인이었으나, 그녀는 이 상황에서 에스텔에게 한 번 더 싸움을 걸 만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황태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힘겹게 말했다.
“성녀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실례를 한 것 같군.”
그러더니 나를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마음 풀거라.”
대애박.
그토록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일개 후작 영애인 내게 사과를 하다니.
‘역시 여주인공의 베프는 되고 볼 일이야!’
하지만 당한 게 있는데 여기서 괜찮다고 얌전히 넘어가는 건 아쉽지.
나는 황태후의 사과에 황송해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다지 사과를 받아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세상에서 가장 밉살맞은 얼굴로.
“……!”
그 순간 누그러졌던 황태후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왜! 뭐! 날 건드리면 우정과 사랑의 천사, 성녀 에스텔이 할멈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 눈빛이 통한 것인지, 아니면 내 옆에 있던 에스텔의 눈빛이 통한 것인지 (아마 이쪽이겠지만) 황태후는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좀 더 유쾌한 일로 만나길 바라네, 페르니아 영애.”
악당의 필수 덕목인 다음 회 예고를 협박처럼 남기고 사라질 뿐이었다.
그녀가 멀리 떠난 후에야 나는 내가 무척 긴장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치마 속에 감춰진 다리가 후들거렸다.
최대한 티 내지 않기 위해 테이블에 손을 받치고 기대어 서서 작게 숨을 내쉬는데 에스텔이 옆으로 다가왔다.
황태후 앞에서 위풍당당했던 그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에스텔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니아 님.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했어요.”
“…….”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올랐다.
어쩜 이렇게 착한 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덕분에 제법 스릴을 즐겼답니다.”
“하지만…….”
“그리고 에스텔이 날 위해 싸워 주었잖아요.”
나는 헤실 웃었다.
“정말 기뻤어요.”
에스텔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맑은 눈을 곱게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나 예쁜 미소였다.
뒤늦게 우리 곁을 향해 다가온 루시안과 칼릭스의 얼굴이 굳어 버릴 만큼.
그들이 얼마나 나를 질투할지 예상이 갔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 * *
길었던 연회가 끝났다. 귀족들은 저마다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타고 떠났다.
마차를 타고 오지 않은 이는 에스텔뿐이었다.
또 걸어서 돌아가려는 거겠지.
나는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카르디엔 경, 우리가 에스텔 님을 데려다주면 어때요?”
당연히 루시안이 절대 거절할 리 없을 거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호들갑을 떨며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던 루시안의 반응은 의외로 탐탁지 않았다.
“글쎄요. 에스텔 님은 마차를 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그래요?”
“네.”
연회장에서도 느꼈지만 루시안의 기분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답지 않은 반응에 볼에 바람이 들어갔다.
그때 우리를 향해 다가온 에스텔이 말했다.
“니아 님, 전 괜찮아요. 황제 폐하께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잠시 뵙고 갈 생각이거든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몸이 좋지 않은 황제는 오늘도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스텔을 찾다니. 역시 에스텔을 향한 애정이 깊구나.
원작에서 개같이 구는 칼릭스와 다르게 내내 에스텔을 챙겨 주었던 황제를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루시안과 나는 마차에 올랐다.
“…….”
“…….”
이 정적. 굉장히 불편합니다만.
결국 난 루시안을 향해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카르디엔 경, 전 이런 침묵은 정말 못 참겠거든요? 혹시 제게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얼마든지 들어 드릴 테니까요.”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정곡을 찔린 듯 떨렸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입을 다물지 않고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연회장에서 내내 에스텔 님과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나.
예상했던 이유였기에 놀랍지 않았다.
루시안의 말대로 나는 쉴 새 없이 에스텔과 대화를 나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가와 에스텔을 귀찮게 구니까.
내내 에스텔을 마음고생 시킨 칼릭스를 엿 먹이려는 속셈도 있었고.
나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에스텔에게 쉽게 다가올 수 없었고, 칼릭스는 내내 질투 어린 눈빛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았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우리 곁에서 웃고 있던 루시안도 다를 건 없었다는 점이지만.
새삼 서운함이 치밀어 올랐다.
내내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나라는 여자가 불쑥 나타나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고깝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의 약혼녀라고요.
너무한 거 아냐?
눈썹을 찡그리는 내게 루시안이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전 당신의 애칭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네?”
“제 약혼녀인데, 제가 더 영애를 만난 것이 오래되었는데……. 니아라니요.”
루시안은 괴로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반짝반짝이는 것도 제가 먼저였단 말입니다.”
……이 전개 뭔가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게 질투를 한 게 아니라…….
“설마 에스텔 님을 질투한 거예요?”
루시안의 은빛 속눈썹이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들킨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는 내 말에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그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어딘가 오싹한 시선에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영애가 입은 드레스가 에스텔 님과 맞추어 입은 드레스라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웬 드레스?
나는 아침에 보았던 그의 반응을 떠올렸다.
내 드레스를 보고 마땅치 않은 듯 찡그리던 그의 얼굴을.
별로냐고 묻던 내 물음에 부정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었지.
그때는 내 모습이 어지간히 별로인가 싶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실은 황태자 전하께 잘 보이려고 그러시는 건가 싶어서, 조금, 아니 많이 속상했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
그러더니 루시안은 내게 손을 뻗었다.
얼핏 고와 보이지만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이 볼에 닿았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예뻐요.”
그의 목소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오늘도.”
“…….”
“처음 만난 날도.”
“…….”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당신은 늘 예뻐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달콤한 말이, 쿵쾅거리는 심장이, 마주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루시안의 얼굴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
지만 사실 뽀뽀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요.
라는 개소리를 내뱉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 어깨 위로 쓰러진 루시안의 얼굴 때문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카르디엔 경?”
“…….”
“저기, 약혼자 씨?”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근거리는 그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하, 하고 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 연회장에서 똥 씹은 얼굴로 내내 술만 마셨지.”
술 마신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아 방심했다.
지금의 그는 흑화하는 서브 남주도, 제국 제일의 기사도,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말을 속삭이는 약혼자도 아니었다.
일개 술주정뱅이일 뿐.
술주정뱅이가 하는 말은 대부분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넓은 등을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말에 너무 큰 의미는 담지 않는 게 좋겠지?”
그런데 중얼거린 말과 달리 쿵쾅거리는 심장은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