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
신필천하(神筆天下) 1화
序. 토사구팽(兎死狗烹)
주원장은 오랜 세월 원나라 세력과 싸운 끝에 몽골족을 북방 지역으로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명교(明敎)를 기리기 위해 국호를 명(明)으로 정하고 연호는 홍무(洪武)라 칭했다. 그리고 이선장(李善長)과 서달(徐達)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의 관직과 작위를 모두 올려주었다.
하나 토끼 사냥이 끝나면 쓸모없어진 개는 삶아 먹는 법이라고 하던가.
주원장은 호유용(胡惟庸)이 역모를 꾀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의 일당을 참수했다. 그리고 이에 연좌된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그로부터 십 년 후에는 호유용과 사돈을 맺은 이선장 역시 공모한 죄를 물어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홍무 26년,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도 역모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다. 이에 연좌된 사람들의 수 역시 어마어마했다.
이렇듯 주원장은 집권 기간 동안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국공신들을 주살했고, 끝내 개국공신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에 연좌되어 죽어나간 사람들만 삼만여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호람지옥(胡藍之獄)이라 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역모와 무관한 사람도 많았다. 단지 평소에 개국공신들과 사사로이 친분을 나눴다는 이유만으로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으니, 이 망자들의 혼을 어찌 달래야 할까?
1. 서예 신동(書藝神童)
“사람을 하나 찾고 있네.”
노인의 말에 청의를 걸친 중년인의 표정이 굳었다. 중년인은 노인이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낼 때는 늘 곤란한 요구를 해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세공(細工)으로 다듬어진 도자기 찻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레 따랐다.
또로로롱.
찻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찻잔을 채웠다.
“차 맛이 좋습니다. 드시지요.”
중년인이 정중한 목소리로 시음을 청하고는 가만히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회색빛 도포를 걸친 노인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대신 이마에 주름 두 가닥을 깊이 새겨 넣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흥! 말을 돌릴 셈인가?”
중년인의 표정에 그늘이 짙어졌다.
“옛말에도 강물이 우물물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한데 어째서 천상련(天上聯)의 천보각주(天寶閣主)께서 자꾸만 하찮은 저희 학립관(鶴立館)을 찾으시는지요?”
그러자 천보각주라 불린 노인이 냉소를 지었다.
“날씨가 궂으면 바다도 강물을 침범하는 법이지. 하물며 강물이 범람하는 일이야 허다한 일 아니겠나?”
중년인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을 찾는지요?”
“나이는 열한 살이 넘었으면 좋겠군. 하나 열다섯은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네.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일수록 좋네.”
“마흔 명 정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혈육이 없는 고아였으면 하네.”
“열한 명 있습니다.”
“운동에는 소질이 없고 무예에는 젬병인 아이가 필요하네.”
“다섯 정도 있군요.”
“필체가 뛰어난 아이라면 좋겠네.”
“……한 명 있습니다.”
* * *
양진양(梁振揚)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묵당(紙墨堂) 대청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서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열 살 전후의 아이들만 가득했지만 대청에 흐르는 공기는 매우 무겁고 엄숙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책상 위에 화선지를 놓고 글을 쓰고 있었는데, 화선지 옆에는 사부님이 손수 쓴 글씨가 종이에 적혀 있었다. 글씨는 주로 유명한 고시이거나 격언들이었다.
아이들은 사부님의 글씨를 따라 쓰면서 서예 기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한데 대청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양진양만은 달랐다.
양진양의 책상 위에는 화선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을 뿐, 다른 견본은 눈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양진양은 이미 두 줄의 글귀를 적었고, 다시 두 줄의 글귀를 적어나가는 중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도 작은 키에 앳된 얼굴,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가냘프고 허약한 체구.
하지만 양진양이 손에 쥔 붓은 흘러가는 물결처럼 단숨에 한 줄의 글귀를 적어갔다. 그리고 다시 먹물을 묻힌 붓이 남은 한 줄의 글귀를 마저 적었다. 화선지 위를 미끄러져 가는 붓은 마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듯 유연하게 이어졌다.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
양진양의 붓놀림은 막힘이 없었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는 순간적인 고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붓대를 내려놓은 양진양은 가만히 자신이 쓴 글귀를 읽어보았다.
만약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누군가가 양진양의 글씨를 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問余何事棲碧山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양진양이 행서체로 쓴 글은 다름 아닌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였다.
행서체로 쓰인 글자 하나하나와 행 하나하나가 모두 정교하고 수려하며 물결처럼 자유롭게 흘렀다. 세(勢)에 따라 글씨를 이끌어가니 유유하고 즐겁게 행진한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이 글씨를 보고 이제 열두 살의 앳된 소년이 적은 것이라 믿을 수 있겠는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서예를 배우며 초서에 가까운 행서체를 쓴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지만, 그 필체가 이토록 자유분방하면서도 균일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이는 천하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양진양은 자신이 쓴 글씨를 보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적은 글씨에 만족해서가 아니었다.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적어도 시의 화자인 이백의 심상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던 탓이다.
푸른 산속에 들어앉아 시냇물에 복사꽃을 띄우니 그야말로 별천지가 아니던가?
양진양은 아직도 그 심상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진양의 코끝에는 여전히 복사꽃 향기가 스쳤고, 귓가에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검은 먹물이 진양의 화선지 위에 흩뿌려졌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필체 위로 방울진 먹물이 마치 곰보 자국처럼 보기 싫게 찍혔다.
깜짝 놀란 진양이 돌아보니 입관 동기인 여동추(呂董酋)가 먹물이 찍힌 붓을 들고 책상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양진양은 여동추가 고의로 한 짓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여동추는 서예 실력이 뛰어난 진양을 오래전부터 아니꼽게 보고 여차하면 시비를 걸어오곤 했다.
양진양은 내심 화가 났지만 꾹 눌러 참았다. 괜히 따져 봐야 자기 기분만 더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진양의 곁에 있던 동갑내기 단지겸(段知謙)이 이를 보고 여동추를 불러 세웠다.
“여동추, 네 먹물이 진양의 화선지에 튀었어.”
“응? 무슨 소리야?”
여동추가 몸을 돌려세우더니 능청을 떨었다.
단지겸이 진양의 화선지를 가리켰다.
“여기 봐. 네 먹물이 화선지에 튀었잖아.”
“어? 정말 화선지에 먹물이 찍혔네?”
여동추가 이죽거리자 단지겸이 또박또박 말했다.
“진양에게 사과해.”
그러자 여동추가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더니 콧방귀를 꼈다.
“뭐라는 거야?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해?”
“너도 봤잖아. 진양의 화선지에 먹물이 튀어 있는걸.”
“그래서? 그게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이렇게 되자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가 싶더니 이내 술렁거리며 양진양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양진양은 괜히 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지만, 자신을 위해 대신 나서준 단지겸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느새 주위에 몰려든 아이들은 두 패로 갈려서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동추는 또래 사이에서 힘깨나 쓰는 아이였고, 양진양은 운동신경이 젬병이었지만 너그럽고 소탈한 마음씨로 많은 친구를 둔 아이였다.
때문에 여동추를 지지하는 아이들과 양진양을 지지하는 아이들이 자연히 패를 나누어 서로 말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숙연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던 대청은 이제 저잣거리 복판과 다를 바 없이 시끄러워졌다.
단지겸이 눈을 부릅뜬 채 여동추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누가 그랬겠어? 네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잖아.”
“옆을 지나갔다고 내 짓이라는 거야? 그럼 옆자리에 있었던 너는? 아! 혹시 네가 실수로 먹물을 튀어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것 아냐?”
여동추의 말에 단지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해 용감하게 나서긴 했지만, 역시 아직은 열두 살의 어린아이였다. 단지겸은 갑자기 누명을 덮어쓰자 억울한 심정에 눈물까지 핑 돌 지경이었다.
“너…… 너……!”
단지겸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여동추를 가리킨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양진양에게 먼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는 게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한편 양진양은 지금껏 여동추의 행동을 모른 척했는데, 녀석이 이제 옆자리에 있던 단지겸까지 모함하자 불끈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양진양은 화를 내는 대신 단지겸을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한 게 아니란 것 알아. 그리고 글씨는 다시 쓰면 돼.”
그러자 여동추가 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뭐야? 그럼 내가 그랬단 말이야? 증거 있어?”
양진양은 여동추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선지를 걷어치우고 새로운 화선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서진으로 고정시켰다.
그러는 사이 여동추가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흥! 이제는 아예 무시하겠다는 거야? 우리 중에서 너 혼자 출첩(出帖:모방 없이 글 쓰는 단계)에 들어갔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야!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날 보란 말이야!”
양진양은 고함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절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붓을 들어 다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이번에는 글자 하나하나가 앞서 시구와 달리 강맹하고 힘이 넘쳤다. 필획에서 굳센 의지까지 느껴지니 아이들이 저마다 감탄을 내뱉었다.
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즉, 무례한 네놈 입은 보지도 않을 것이며, 네 이야기는 듣지도 않겠다는 뜻으로 교묘히 인용한 것이다.
여동추 역시 그 속뜻을 알고 있는 터라 더욱 화가 났다.
“이 자식!”
이윽고 여동추가 진양의 멱살을 잡았다.
학립관은 본래 서예당이었지만, 이제는 규모가 커지면서 가벼운 무예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여동추는 서예 실력은 볼품없었지만 무예 실력만큼은 또래 아이 중 으뜸으로 꼽혔다.
그런 여동추가 양진양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 그야말로 거센 바람결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는 격이었다.
양진양을 지지하는 아이들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여동추는 그럴수록 신나게 멱살 쥔 손을 흔들어댔다.
“날 무시하고 잘난 척했으니까 어서 사과해!”
“그만둬! 진양이 잘난 척한 적 없잖아!”
단지겸이 얼른 나서서 말렸지만 여동추는 막무가내였다.
“내 말을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잖아! 그게 잘난 척이 아니면 뭐야? 지금도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잖아?”
그 말대로 양진양은 멱살이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여동추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힘없는 양진양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나 다름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여동추는 양진양을 양손으로 번쩍 들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당!
양진양이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면서 무릎으로 책상을 쳤다. 그 바람에 벼루에 담긴 먹물이 넘쳐흐르면서 진양의 얼굴과 몸에 잔뜩 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