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
신필천하(神筆天下) 10화
하지만 진양이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풍천익의 날카로운 외침이 이어졌다.
“뭘 꾸물거리느냐, 어서 잡지 않고!”
“네? 아, 네!”
진양이 얼른 풍천익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러자 풍천익이 훌쩍 몸을 날렸다. 진양은 마치 풍천익의 손에 이끌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풍천익은 담벼락을 밟고 사뿐히 내려서더니 이어서 담 바깥으로 내려섰다. 신기하게도 진양도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풍천익을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아, 나도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풍천익은 싱글벙글한 진양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하루 분량을 늘릴 것이다.”
“네.”
진양은 풍천익의 손을 잡은 채 한적한 길목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풍천익이 이처럼 선심을 쓰는 것은 단지 진양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여 마음의 병이 생겨 진양이 하는 일에 영향을 끼치게 될까 염려한 탓이었다. 그만큼 무공서 필사는 중요했으므로.
이날 후, 진양은 단 한 번도 천보각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이따금씩 풍천익은 진양을 데리고 나가곤 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천상련의 조벽(照壁:중국식 담장의 일종)을 타고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이내 서늘한 바람을 타고 꽃잎이 떨어지더니 어느새 사위는 하얀 눈으로 덮여갔다.
날이 갈수록 양진양은 필사 속도가 늘어갔다. 이제 반나절만 할애하면 하루 분량의 필사를 마칠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양진양은 필사를 끝낸 후 일층으로 내려가서 서적을 살펴보았다. 요즘 진양은 여가 시간에 의학 서적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직 어린 진양이 읽기에는 어려운 말이 많았지만, 다른 종류의 책들은 거의 다 읽은 상태였다. 게다가 천보각에 소장된 책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지금으로선 의술서가 그나마 읽기 편한 축에 속했다.
양진양이 의술서 하나를 들고 이층으로 막 오르려고 할 때였다.
마침 천보각 문을 열고 들어오던 곽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양진양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각주님, 왜 그렇게 한숨을 쉬세요?”
“알 것 없다!”
곽연은 돌연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런데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는 양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그가 굉장히 기분 나쁜 상태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원래 곽연은 상당히 편협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기분이 나쁠 때는 괜히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진양이 막 계단을 올라서려고 하는데 곽연이 소리쳐 불렀다.
“잠깐!”
“네?”
“너, 이리 와봐.”
양진양은 괜히 꾸지람을 듣겠다 싶어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곽연은 진양의 손에 들린 의술서를 힐끔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런 걸 본들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냐?”
“잘 모르지만 마땅히 할 게 없어서 보는 거예요.”
곽연은 다시 한번 콧방귀를 뀌더니 양진양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진양은 졸지에 관찰 대상이 되자 은근히 기분이 나빠져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곽연이 불쑥 말했다.
“나 좀 따라와라.”
그는 몸을 홱 돌리더니 집무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진양도 별다른 수가 없어 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로 들어선 곽연은 탁자 위에 서신 한 장을 내려놓았다.
“너,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양진양이 서신을 보니 한 편의 시가 고운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남자를 보고 싶어 하는 여인의 시였다.
진양은 아주 어려서부터 서예를 익히며 옛 고시를 많이 읽고, 천보각에 온 이후에도 다양한 서적을 탐독했다. 때문에 남녀 간의 연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시의 내용이 어떤 그리움을 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건 한 여인이 곽연에게 보낸 시였다.
며칠 전, 곽연은 풍천익을 따라서 잠시 수도 응천부(應天府)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풍천익과 친분이 있는 어느 양갓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곽연은 마침 그 집에 들른 아름다운 여인을 목격했다.
첫눈에 반한 곽연은 어떻게든 그녀에게 접근해 보고 싶었지만 각주인 풍천익이 함께 있는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곽연은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사람을 시켜 그 여인이 사는 곳을 남몰래 알아보았을 뿐이다.
한데 천상련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염치불고하고 평소 친구 사이로 지내던 승천각의 부각주 녹배상(祿背相)을 찾아갔다. 녹배상은 타고난 체질의 한계 때문에 실제 무공 실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무공의 요체를 파악하는 재능은 상당히 뛰어난 자였다. 게다가 학식도 풍부했다.
곽연은 녹배상에게 사정을 이야기한 후 자기 대신 여인에게 보낼 서신을 한 장 써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녹배상은 흔쾌히 시 한 구절을 적어주었다.
곽연은 마치 그것을 자신이 쓴 것처럼 꾸민 다음 응천부에 있는 그 여인에게 보냈다.
한데 그 여인 역시 학식이 풍부하고 시를 무척 좋아했다. 여인이 답가로 시를 적어서 보내오니, 곽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녹배상은 불과 이틀 전에 장기 임무를 맡아서 천상련을 떠난 상황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답가를 적어줘야만 하는데, 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여간 난감한 노릇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은 천하의 악필이었기에 감히 서신을 직접 적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략의 사정을 설명한 곽연이 진양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떠냐? 너라면 답가를 적을 수 있겠느냐?”
“제 주제에 어떻게 답가를 적을 수 있겠어요.”
양진양이 넌지시 발을 뺐다.
사실 진양은 아직 어리긴 했지만, 곽연의 방식이 자못 비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서신을 보내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곽연은 진양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지 말고 한번 시를 써보아라. 내가 읽어보고 판단하마.”
결국 진양은 알겠노라 대답하고는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답가로 쓸 만한 시에 대해서 구상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니잖아? 그냥 쉽게 생각해서 쓰자.’
마음을 가볍게 먹었더니 오히려 머릿속은 더욱 맑아졌다.
진양은 눈 내리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영감이 스쳐 곧장 탁자로 걸어가 붓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시 한 편을 적어나갔다.
白雪東飛來 하얀 눈 동쪽에서 날아오니
空庭滿積想 텅 빈 정원에 그리움 가득 쌓이네.
深夜望月光 깊은 밤 달빛 바라보니
玉容思念長 옥 같은 얼굴 떠올라 한밤을 지새우네.
행서로 적어나간 필체는 첫 구절에서 마치 눈발이 흩날리듯하더니, 둘째 구절에서는 고요한 움직임을, 세 번째 구절에서는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구에서는 자못 애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필세가 흐르니 진득한 그리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양진양이 적은 시는 기존의 시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창작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 진양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리움의 대상을 돌아가신 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쓴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애틋한 감정이 배가되어 필체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또한 응천부는 천상련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으니, 동풍을 타고 오는 눈으로 표현한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셈이기도 했다.
왠지 어려운 숙제 하나를 끝냈다는 생각이 들자 진양은 평소보다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진양은 곽연을 만나 어제 적은 시를 보여주었다.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던 곽연은 시큰둥한 태도로 진양이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시를 읽자마자 곽연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걸 정말 네가 적었단 말이냐?”
“네. 이상한가요?”
곽연은 진양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다시 한번 시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한낱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건가? 게다가 유려한 필체 때문에 시의 감동이 배가되지 않나.’
곽연이 짐짓 엄한 투로 물었다.
“혹시 어디선가 본 고시를 베꼈거나 인용한 것은 아니더냐?”
“아니에요. 제가 생각해서 적은 거예요. 어제 눈이 내렸잖아요.”
“만약 네 말에 거짓이 있어서 내가 창피당할 일이 생기거든 용서하지 않겠다.”
곽연의 말에 진양은 내심 기분이 나빴다.
기껏 밤늦은 시간까지 고민하며 시를 적어주었다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다니.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직접 쓰면 되잖아? 치!’
하지만 속내를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단지 눈살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대꾸했다.
“정말로 제가 창작해서 쓴 시예요.”
곽연이 가만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가 이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내 일찍이 네놈 재주를 알아보았지! 아주 잘 썼다. 오히려 녹 부각주보다 네놈이 낫구나. 하하하!”
곽연은 진양의 시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심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수려한 필체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인데, 감수성 풍부한 여인이 본다면 그 감동이 얼마나 더 크겠는가?
기분이 좋아진 곽연이 진양에게 물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아라. 내가 오늘은 네 부탁을 무엇이든 들어주마.”
양진양은 갑작스러운 그의 호의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놓칠 순 없었다. 그래서 진양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곧바로 말했다.
“정말 아무거나 말해도 되나요?”
“그래. 오늘만큼은 네 부탁을 무엇이든 들어주마.”
“그럼…… 저……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음? 무공을?”
“네.”
양진양이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곽연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천보각의 부각주인 그는 진양이 무공서를 필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진양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진양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다가 풍천익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호된 질책을 들어야 할 터였다.
곽연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말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느냐? 아무래도 그건 좀…….”
“그럼…… 없어요.”
양진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곽연은 진양의 표정을 보면서 잠시 갈등했다.
‘이 녀석의 재주는 앞으로도 종종 써먹을 일이 생길 텐데, 내가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이 녀석에게 또 도움을 받기가 힘들어질지도 모르잖아. 할 수 없지. 어차피 무공을 가르쳐 줘도 재능이 없으니 제대로 익히지도 못할 거다. 게다가 이 아이는 내공이 없으니 초식만 가르쳐 준다고 한들 별 소용도 없을 게다.’
생각을 정리한 곽연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좋아! 내가 가르쳐 주마!”
“정말요?”
“물론이지. 약속을 했으니 가르쳐 주마. 그 전에 나는 서신을 보내고 와야겠다.”
“네!”
곽연은 오후 내내 진양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가 가르친 것은 겨우 권법 두 초식이었다. 천상련의 독문 무공 중 풍양권법(風陽拳法)이라는 무공의 초식이었는데, 하나는 풍결권(風決拳)이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질풍권(疾風拳)이었다.
풍결권은 공격 대상의 등 뒤로 돌아가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방법이었고, 질풍권은 주먹에 체중을 실어 갑자기 뻗어내는 방식이었다.
이 두 가지는 풍양권법의 초식 중에서도 아주 기본에 속하는 것이었다.
곽연은 이 두 가지 초식을 시범으로 보여주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실 워낙 기본적인 초식이었기에 옆에서 일일이 지도해 줄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진양은 정오에 시작해서 해질 무렵까지 연습하면서도 이 간단한 두 개의 초식조차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곽연이 가끔씩 돌아와서 보고는 한숨만 내쉬고는 돌아가곤 했다.
“내가 살다 살다 너처럼 무공에 재능없는 녀석은 처음 봤다. 넌 그냥 글이나 써라.”
양진양은 곽연의 성의없는 지도가 내심 불만이었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가 깜깜해질 때까지 두 개의 권초를 연마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몸치인 진양은 끝내 제대로 된 초식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진양은 탁자에 앉아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난 무공에 재능이 없는 걸까?’
원래 진양은 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천상련으로 오고 나서 보고 듣는 것이 전부 무공에 관한 것이다 보니 슬슬 호기심과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이 따라가지 않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양진양은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붓대를 들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아무 글이나 적으면 어느 정도 편안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진양은 화선지를 깔아놓고 가만히 보다가 떠오르는 글씨를 초서로 적어갔다. 마치 바람이 불 듯, 물결이 흐르듯 필획이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게 흘러갔다.
풍결권(風決拳).
그런데 마지막 획을 마친 진양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양진양은 입을 딱 벌린 채 자신이 적은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