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1
신필천하(神筆天下) 101화
“천상련에서도 현재 그쪽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천상련에서 기사멸조(欺師滅祖)의 대죄를 지은 곽연이니, 그곳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을 테지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곽연이 정말 천의교에 투신했다면, 앞으로 강호에는 또 어떤 피바람이 불어닥칠지 알 수가 없었다. 천상무운신공은 천상련을 사파제일의 집단으로 만든 절세신공이다. 지금은 곽연이 보잘것없는 존재일지라도 만약 그가 그 절세신공을 익히고 나면 천의교는 또 하나의 날개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진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선은 바로 앞에 놓인 문제만 생각하자.’
진양이 비연리를 보며 말을 돌렸다.
“귀영대는 앞으로 학립관의 소속이 될 것이니, 이제부터는 모든 신경을 학립관을 지키는 일에 쏟아부어야 하오.”
“물론입니다.”
“먼저 비 대주를 포함한 다섯 명만 내 호위를 맡아주시오. 나머지 무인들은 두 조로 나누어 학립관의 경계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조장은 비 대주가 선출하면 될 것이고, 유사시에는 모든 조를 총괄해서 움직일 수도 있을 거요.”
“예, 관주님.”
“그럼 이제 가봐도 좋소.”
비연리는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인 후 걸어갔다.
진양은 곧장 걸음을 돌려 대청 후원으로 갔다. 후원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마침 여인의 날카로운 기합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유설이 검을 뽑아 든 채 무공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익히는 무공은 천상련에서 가지고 온 북명패검이었다.
북명패검은 과거 북명표국을 강호 문파보다도 강하게 만들어준 전설적인 검법이다. 게다가 유설은 표국 출신이다 보니 더욱 북명패검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유설의 몸놀림은 굉장히 가벼웠는데, 뻗어 나가는 검날만큼은 섬뜩할 정도로 매섭고 예리했다.
한참 동안 검술을 펼치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아,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왔소. 실력이 많이 좋아졌군요.”
“그래야죠. 누가 가르쳐 준 덕분인데.”
유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요즘 진양은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유설과 흑표에게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다만 이들에게는 서예라기보다는 무공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렸다.
바로 자양진경을 이용해서 무공을 익히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글자에 대한 이해력과 서예 감각이 타고난 진양은 자양진경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익혔지만, 유설과 흑표는 배움이 느렸다. 오히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서예를 즐겼던 유설이 흑표보다도 그 진도가 빨랐다.
결국 진양은 자양진경을 좀 더 쉽게 풀이해서 유설과 흑표에게 가르치게 됐고, 두 사람의 방식에 맞춰 수련 방식을 바꾸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무공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유설은 북명패검을 벌써 사성 단계까지 익혔고, 흑표는 능파검을 육성까지 익혔다.
진양은 이렇듯 글자로 참뜻을 파헤치는 수련 방식을 파자공(破字功)이라고 이름 지었다.
다시 말해 파자공은 자양신공의 필사 방식과 진양 스스로 체득한 글자에 대한 풀이 방식을 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신 유설은 과거 진양에게 월야검법을 전수해 주었고, 흑표는 반수검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은 마치 한 동문의 사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유설이 검을 챙겨 넣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파자공 덕분에 수련이 정말 수월해졌어요. 어떤 절세신공이라도 막힘없이 익힐 수 있는 파자공이야말로 진정한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하하, 과찬이오. 그보다 낭자의 재능이 출중하기 때문이 아니겠소? 또한 낭자는 오래전부터 서예에 관심이 깊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도 이해력이 빠른 것이겠지요.”
진양의 말에 유설은 문득 과거에 진양과 주고받았던 서신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녀의 뺨에 발그레하니 달무리가 졌다.
“그, 그래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루기 힘들었겠죠.”
진양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유설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유설은 갑자기 끈끈한 시선을 느끼게 되자 당황스러워서 얼른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왜 그렇게 바라보세요?”
“요즘 난…… 낭자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꿈만 같소.”
그러자 유설은 가슴이 쿵쿵 뛰고 숨을 쉬기도 힘들어졌다. 그녀는 아까보다도 더욱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되어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그래요.”
그 작은 목소리는 진양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사실 지금까지 진양과 유설은 서로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선뜻 다가설 수가 없었다. 주위의 상황이 너무나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해서 진양은 언젠가 주변이 조용해지고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면 유설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청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막상 유설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려고 하자, 입안은 꿀을 머금은 것처럼 달콤한데 입 밖으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건물 모퉁이를 돌아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양 형,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좀 봐주시겠소?”
진양과 유설이 놀라서 돌아보니 흑표가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흑표는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헛기침을 했다.
“커험! 다, 다음에 물어보겠소. 갑자기 알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막 걸음을 돌리려고 하자, 유설이 얼른 말했다.
“아니에요. 전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유설이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얼른 달려갔다. 진양은 그녀를 붙잡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흑표가 영 미안한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형님. 모르는 부분은 어딘지요?”
“월랑삼검(月浪三劍). 바로 이 부분에서 이해가 안 되는구려.”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곤 막힘없이 대답했다.
“월랑삼검의 경우에는 필체의 분위기로 그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제가 보여 드리지요.”
진양은 수호필을 꺼내 쥐고는 후원 바닥에 커다랗게 글씨를 새겨 나가기 시작했다. 공력을 불어넣어 바닥에 새긴 글자는 바로 ‘월랑삼검’이었다.
흑표가 매료된 표정으로 그 글씨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달빛이 물결처럼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려.”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초식은 능파검에서도 익히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특히 파자공으로 익히기에도 난해 한 부분이 있는데, ‘월’ 자와 ‘랑’ 자, 그리고 ‘삼’ 자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파자공으로 이 검초를 익힐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글을 쓸 때 그 심상을 완벽하게 떠올리는 것입니다. 보다 수월하게 익히시려면 구름이 조금 있는 달밤에 펼쳐 보는 것도 좋겠군요.”
흑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양 형의 신필을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은 바이오. 고맙소!”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었다면 저로서도 다행입니다.”
흑표는 빙그레 웃더니 진양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양 형, 나는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오. 하지만 검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고 자부하오.”
“예?”
뜬금없는 말에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흑표가 속삭이듯 말했다.
“한 가지에서 도가 통하면 만 가지에서도 도가 통한다고 하지 않소? 그러니 여자든 검이든 다루는 법은 매한가지가 아니겠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소제가 불초해서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검을 대할 때 스스로를 속이지 않소. 솔직한 마음으로 검을 대하고, 알아내고 싶거나 구하는 것이 있다면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물론 정중한 방법으로 말이오. 즉, 상대를 기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숨김없이 대한다면 어떠한 해답도 구할 수 있소. 그게 바로 검이지. 그리고…… 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진양은 그제야 흑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흑표는 진양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어깨를 손으로 툭 치고는 걸어갔다.
진양이 미소를 지으며 불렀다.
“흑 형님.”
흑표가 슬쩍 돌아보자 진양이 포권하며 말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흑표는 말없이 엄지를 추켜올리고는 걸어갔다.
다시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학립관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역시 새 관주인 진양을 점점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환절기 막바지로 접어든 계절은 이제 제법 쌀쌀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진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묵당 대청에서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그는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는 탁자 사이를 거닐며 아이들의 글씨를 꼼꼼히 살폈다.
대청에 모인 아이들은 저마다 입술을 꼭 다물고 한 획 한 획을 정성을 다해 써나갔다.
“글을 적을 때는 글자의 참뜻을 마음으로 음미하도록 해라. 한 획 한 획이 그 뜻이 되어 살아나고, 너희의 마음이 되게 하라. 또한 서법에는 많은 묘책이 있으나, 골기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붓을 곧추 세워 잡고 붓과 지면이 수직이 되도록 해라.”
근엄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진양의 모습은 이제 영락없는 스승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진양은 아이들의 글씨를 둘러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글씨를 쓸 때는 손가락, 손목, 어깨 힘을 사용하는 동시에 허리와 다리 힘을 함께 써야 한다. 지금처럼 서서 글씨를 쓴다면 온몸의 각 부분이 모두 움직여야 한다. 호흡은 깊이 가져가도록 해라. 그럼 혈액의 흐름이 빨라지고 몸의 각 기관이 이완되니 생리적으로 큰 쾌감을 얻을 것이다. 그 후 너희가 완성된 글씨를 보았을 때, 심미적인 쾌감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바로 공력의 일 단계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진양의 말을 진리처럼 여기며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잠시 후, 대청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양은 아이들의 필체가 자못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엄하게 타일렀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모든 정신을 글자에만 집중해라. 너희는 계속 글을 쓰도록 해라.”
그렇게 말을 남긴 진양은 지묵당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학립관 정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음. 올 것이 왔구나. 여동추가 제 사부를 데리고 다시 찾아온 모양이군.’
진양은 두 눈에 힘을 주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정문으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인파 속에서 여동추의 모습이 보였다.
여동추는 유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던 전과 달리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글쎄, 성 관주는 어디 있소?”
“아직도 말을 못 알아듣는군요. 무슨 일로 왔는지 먼저 말씀하세요.”
“후후후! 낭자가 여기 있는 걸 보면 그 녀석도 아직 남아 있다는 말이군?”
그때 진양이 다가오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동추. 오늘은 무슨 일인가?”
여동추는 멀리서 걸어오는 진양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는 곧 믿는 구석이 있는지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맡겨둔 것을 돌려받으러 왔네.”
“맡겨둔 것?”
진양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어보자, 여동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 말일세.”
진양은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바였기에 별로 놀라지 않고 가만히 여동추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곁에 선 노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인은 이마에 깊은 주름 두 가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깡마른 체구에 눈이 유달리 가늘어 외골수 같은 인상을 풍겼다. 다시 그 곁에는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제법 정정한 중년인이 서 있었는데, 눈썹이 짙고 거뭇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이들 뒤로는 대략 서른 명 정도의 무인이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도열해 있었다.
진양이 다시 여동추를 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아는데.”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일세.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