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2
신필천하(神筆天下) 102화
진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동추, 나는 동문으로서 자네가 개과천선하길 바라네. 사부님은 아직도 자네 걱정을 하고 계시네. 하지만 자네는 전혀 깨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흥! 시끄럽다! 아이들을 돌려줄 거야, 말 거야?”
여동추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진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부님과 내가 다른 점이 뭔 줄 아는가? 사부님은 자네의 과거를 딱하게 여기시지만, 나는 자네의 과거를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일세.”
그때 눈썹이 짙고 피부가 검은 중년인이 헛기침을 하더니 동추를 향해 물었다.
“추야, 이자가 바로 그자냐?”
“예, 사부님.”
여동추가 깍듯하게 대답하자, 중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진양도 그가 바로 무적관의 관주인 장도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도식이 한 걸음 나서더니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가서 관주를 모셔오게.”
그러자 유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가 바로 학립관의 새로운 관주예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지금 하시면 될 거예요.”
유설의 말에 장도식은 물론 여동추까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장도식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진양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자네가 정말 관주…… 란 말인가?”
“그렇소.”
“그럼 자네 사부는?”
“여전히 학립관에 계시지만 학립관을 이끄는 전권을 내게 위임하셨소.”
장도식은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다가 차츰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자네 무공이 제법 출중하다고 들었네. 하지만 힘자랑은 아무 곳에서나 하는 법이 아니지. 아이들을 다시 예정대로 보내주게. 물론 데려간 아이들은 돌려줘야겠네.”
“흥! 역시나 그 사부에 그 제자로군! 똑똑히 들으시오. 학립관은 앞으로 무적관에 어떤 아이도 보내지 않을 것이오.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 말고 돌아가 주시기 바라오.”
진양이 불이라도 뿜을 듯 노려보며 말하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만 보던 노인이 불쑥 나섰다.
“어린것이 눈에 뵈는 것이 없나 보구나! 장 관주! 도대체 이런 애송이 하나 때문에 나까지 부른 것이오?”
그러자 장도식이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구 장로님.”
‘구 장로’라고 불린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외면했다.
장도식은 여동추를 향해 힐난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여동추의 말만 듣고 진양이 상당한 무림고수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한데 막상 와서 보니 그야말로 새파란 애송이가 아닌가?
이럴 줄 알았다면 철혈문에서 구 장로를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구 장로는 더 이상 기다리기도 지루하다는 듯 허리춤에서 도를 ‘스릉!’ 뽑아 들었다. 칼등이 완만하게 굽은 만도(蠻刀)였다. 그러자 그의 뒤로 도열해 있던 삼십여 명의 무인이 일제히 도를 뽑아 들었다. 모두 구 장로와 같은 모양의 칼을 손에 들었다. 이들 모두 철혈문에서 파견되어 온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구 장로가 진양을 향해 말했다.
“아이야, 어르신의 칼을 받아보겠느냐, 순순히 머리를 숙이겠느냐?”
그때 시커먼 바람이 한 줄기 분다 싶더니, 어느새 진양 곁에 다가선 비연리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구 장로를 쏘아보았다.
구 장로는 생각지도 못한 고수의 등장에 내심 놀라며 상대를 눈여겨보았다.
비연리가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
“언제부터 철혈문이 본 련을 기만했소?”
그 말에 구 장로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심지어 그는 몸을 가늘게 떨며 진양과 비연리를 번갈아 보았다.
“당, 당신은…… 설마…….”
비연리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철혈문주가 천상련의 장례식에 다녀왔다면 들은 소문이 있을 터인데?”
순간 구 장로는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의 기억 저편에서 문주로부터 전해 들은 한 가지 이야기가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진양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이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 둘의 묘한 관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구 장로가 진양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소인이 높은 분을 몰라 뵀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진양은 누구보다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구 장로의 이마에서는 이제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진양이 얼른 말했다.
“갑자기 구 장로께서는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양 공자님을 몰라본 죄!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부디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 장로님과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어서 일어나시지요.”
“양 공자님의 너른 아량에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구 장로는 벌떡 일어나 포권하며 허리까지 꾸벅 숙였다. 진양은 마음속으로 상대와 싸울 준비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이런 대우를 받게 되니 얼떨결에 맞절을 하며 반례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황당해진 여동추가 눈살을 구기며 말했다.
“구 장로님, 도대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놈이 바로 철혈문으로 보낼 아이들을 데려간…….”
순간 구 장로의 몸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동추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였다.
짜악!
공력을 실어 후려쳤는지 또 졸지에 뺨을 얻어맞은 여동추는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는데, 구 장로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닥쳐라! 이 못난 것! 감히 양 공자님 앞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인단 말이냐? 네놈도 어서 절을 올리고 사죄를 드려라!”
“뭐, 뭐라고요?”
여동추가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구 장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장도식이 나서서 소리쳤다.
“구 장로!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동추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장로께서는 이 장 아무개를 능멸하는 것이오?”
“능멸이든 뭐든 장 관주도 어서 양 공자께 사죄드리시오!”
“뭐, 뭐요?”
이제 장도식과 여동추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건 진양과 유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구 장로를 보면서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1. 학립관을 찾는 사람들
장도식은 어이가 없어 그저 입만 척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여동추는 여전히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면서 씨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 장로는 진양에게 다가가더니 포권을 취하며 한없이 비굴한 태도로 말했다.
“양 공자님, 소인은 철혈문에서 온 구계악(丘桂岳)이라고 합니다. 양 공자께서 학립관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후에 저희 철혈문에서 적절한 예물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상대가 이렇듯 허리를 굽히며 나오자 진양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가 반례하며 답했다.
“구 장로께서는 어찌 스스로를 이처럼 낮추십니까? 예물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우리 학립관은 앞으로 아이들을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고말고요! 학립관에서 배출되는 인재들은 더욱 좋은 곳으로 가야 마땅함이지요. 혹시 앞서 제가 드린 말씀이 신경 쓰였다면 차라리 소인을 죽여주시지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서로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양 공자께서 그리 이해해 주시니 소인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구계악은 연신 굽실거리며 말했다.
장도식은 이제 황당함을 넘어서 슬슬 노기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신의 제자인 여동추가 뺨까지 얻어맞은 상황이라 그는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버럭 고함부터 내질렀다.
“구 장로! 도대체 이게 무슨 추태요? 나보고 저 새파란 애송이에게 사죄하라니!”
구계악이 장도식을 슬쩍 쳐다보더니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태라? 그럼 장 관주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철혈문은 더 이상 무적관을 돕지 않을 것이오!”
“뭐라? 흥! 구 장로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철혈문과 무적관의 동맹관계는 그쪽 문주와 내가 정한 것이오. 한데 구 장로가 뭔데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오? 문주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그러자 구계악이 냉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우리 문주께서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오. 내 무적관과의 지난 정을 생각해서 더 이상 실랑이 벌이지 않고 물러가겠소. 나를 더 건드리지 마시오.”
“뭐, 뭐 저런……!”
장도식이 부들부들 떠는 손가락으로 구계악을 가리켰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무적관의 무인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구계악과 함께 온 철혈문의 무인이 대다수였다.
뱃속부터 울분이 치밀어 오르기는 하지만 당장 수를 쓸 방법이 없었다.
구계악이 진양을 향해 다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 철혈문은 무적관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양 공자께서는 이 점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럼 철혈문은 염치불고하고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례했다.
“살펴 가십시오.”
구계악은 돌아서서는 수하들을 모두 데리고 학립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장도식과 여동추는 이 어이없는 실태를 그저 눈만 끔뻑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철혈문의 무인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장도식과 여동추는 머쓱한 태도로 돌아섰다.
진양이 이 두 사람에게 살벌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 계속 이야기를 해볼까요?”
진양이 말을 뱉자마자 어디선가 무인들이 바람처럼 달려나와 두 사람을 완전히 포위했다.
장도식과 여동추는 졸지에 아군을 잃어버리고 적에게 온통 둘러싸이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뻔뻔한 장도식이라고 할지라도 차가운 칼날 앞에서 죽음을 감수할 정도로 배짱이 있진 못했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썩 좋지 못한 것 같으니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양, 양 관주.”
“아니오. 다음은 없습니다. 오늘 확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학립관 아이들이 필요한 것입니까?”
진양이 빤히 바라보며 묻자 장도식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했다.
“아니오. 앞으로 우리 무적관은 더 이상 학립관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진양이 그제야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주위를 에워싼 귀영대원들을 향해 일렀다.
“손님들께서 편히 가시도록 길을 열어주시오.”
그러자 귀영대원들이 정문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장도식과 여동추는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다가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누군가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면서 경계 태세를 보이곤 했다.
학립관 정문을 나선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렸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진양은 비연리를 데리고 지묵당 후원으로 걸어갔다.
진양이 비연리를 보며 물었다.
“철혈문이 갑자기 돌아간 연유가 무엇이오?”
비연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철혈문주는 천상련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관주님의 이야기를 대략이나마 들었을 것입니다. 천상련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관주님을 감히 철혈문에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흐음. 정말 그게 전부요?”
“예, 관주님.”
비연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양은 새삼 천상련의 권위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천상련에서 진양을 은인처럼 여긴다고 해서 철혈문이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쨌거나 진양으로서는 귀찮은 일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천상련의 영향력이 이 작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진양으로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일은 머지않아 학립관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