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6
신필천하(神筆天下) 106화
그러자 일도귀가 나서서 말했다.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그저 필요한 곳에 얼마든지 써주십시오.”
“도대체 여러분은 어디서 제 이야기를 듣고 오신 겁니까?”
그러자 모인 무인들이 저마다 우물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에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든 진양이 재차 물었다.
“혹시 여러분에게 누군가 시킨 것입니까?”
그러자 전학수가 먼저 손사래를 쳤다.
“하늘에 맹세코 저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양 공자께서는 제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그럼 접선선생께서는 어디서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강호인이라면 양 공자의 위명을 듣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요즘이면 어디서든 양 공자님의 명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양 공자께서는 현재 강호에서도 우리 사도…… 아니, 전 무인의 영웅호걸로 알려져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맞장구를 치며 소리친 사람은 바로 진승(眞乘)이라는 무인이었다. 그는 독공을 주로 익혀 손가락이 녹색으로 물들어있었는데, 그 때문에 녹독수(綠毒手)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진양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여 있는 이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이들은 모두 강호에서 나름 악명이 높은 자들이다. 이것이 진양의 마음에 걸리는 또 한 가지였다.
‘왜 하필 이런 자들만 전부 모였을까?’
진양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천상련으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은 분이 계십니까?”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앉아 있던 대머리에 긴 흉터가 새겨진 노인이 말했다. 그는 선장을 지팡이 삼아 짚고 있었는데, 불가의 무인이 아님에도 스스로를 ‘노승’이라고 일컬었고, 스님처럼 행동하는 것을 즐겼다.
“노승은 천상련주님을 뵀지만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풍 련주님은 예전에 절 구해준 은인이지만 제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양 공자께서 천상련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양 공자께서 학립관주가 되었으니 차후에 서로 보게 되면 예를 갖추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승은 학립관을 찾아왔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노승이 찾아온 것은 내 발이 여길 왔기 때문입니다.”
진양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과거에 뛰어난 무인이었지만, 한 번의 큰 싸움으로 인해 머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반인에 비해서는 사고력이 떨어지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백치역승(白痴力僧)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를 그저 죽반승(粥飯僧)이라고 불렀는데, 노인 역시 그 칭호를 제법 좋아했다.
어쨌거나 진양은 죽반승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모여 있던 무인 중 몇몇은 죽반승의 가벼운 입을 탓하느라 곁눈질을 하기도 했다.
진양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여러분은 모두 풍 련주님의 명에 따라 오신 겁니까?”
그러자 전학수가 얼른 일어나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관주님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풍 련주님께서는 정말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전 련주님이 돌아가시게 된 경위를 설명하시면서 양 공자님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풍 련주님은 그저 양 공자님을 만나뵙게 되거든 최대한의 예를 갖추라고 이르셨을 뿐입니다. 이곳에 찾아온 것은 오로지 저의 독단입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다른 분들 역시 저와 같을 것입니다.”
일도귀가 일어나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저희는 어떤 강요도 없이 그저 양 공자님의 의협심에 감탄하여 스스로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천상련과 풍 련주님께 받은 은혜도 무시할 수 없지만, 풍 련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여 명의 무인이 입을 모아 한목소리로 말했다.
진양은 그제야 대략의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스스로 결정한 사안이라지만, 이들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는 모두 천상련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천상련이 사도 무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이처럼 클 줄이야.’
진양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앞으로 고심을 해서 임무를 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는 여러분의 사부가 아니지만 여러분이 학립관을 위해 힘쓰시겠다면 하루에 몇 시간은 반드시 서예를 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제가 정한 첫 번째 규칙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관주님!”
진양이 이토록 서예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들의 악한 심성을 조금이나마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예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인간의 본성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무인들의 대답을 듣고 난 진양은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여러분이 묵을 장소는 지묵당주께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지묵당주란 바로 단지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무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관주님!”
진양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그는 잊은 것이 생각난 듯 녹독수 진승을 바라보았다.
“진 선배님께서는 저를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관주님!”
진승이 흔쾌히 대답하며 진양을 뒤따랐다.
진양은 진승을 데리고 사상이괴가 있는 방으로 갔다.
서요평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늦은 시간에 왜 찾아왔냐며 투덜거렸고, 서운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진양은 서운지를 가리키며 진승에게 일렀다.
“혹시 진맥을 해보시면 서 선배님이 당한 독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진승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바로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는 곧 침상에 걸터앉아서 서운지의 맥을 짚어보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관주님, 이분은 지금 십지독에 당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진양의 표정이 밝아졌다.
단지 맥을 짚음으로써 그 독의 종류를 파악했으니, 어쩌면 치료법을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든 것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십지독녀가 서운지 선배님을 이렇게 만들었지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십지독이 그리 강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지 여쭙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진승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십지독녀는 독인 사이에서도 가장 무서운 자입니다. 저로서는 그녀의 독을 해독할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던 진양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렇군요. 하면 그 독의 진행을 좀 늦출 수는 없을까요?”
“흐음.”
진승이 턱을 괴고 침음을 흘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소인이 한번 궁리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조금은 늦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관주님의 명이라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진승이 돌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양은 역시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서운지가 말했다.
“감사하오, 양 관주.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니…….”
“이미 선배님도 우리 학립관의 식구나 다름없지요.”
진양의 부드러운 말투에 서운지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날 이후 학립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사마외도의 무인들이 학립관을 찾아왔는데, 방문자가 많은 날은 하루에 열 명도 넘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문파는 물론 중원 각지의 크고 작은 사파에서 각종 예물을 보내왔다.
진양은 그때마다 번번이 사양하며 예물을 거절했지만, 끝내는 상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여가 지났을 때는 아이들보다도 사마외도의 무인들이 더욱 많게 되었다.
천하 각지에서 악명으로 이름을 떨친 자들이 모두 모였으니 그 흉흉한 분위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결국 이들이 묵을 공간조차 부족해졌기에 학립관은 근처 나무를 깎고 증축 공사에 착수했다.
이때쯤 학립관의 총관 직을 맡은 사람은 바로 유설이었다.
그녀는 표국에서 일했던 경험을 되새겨 자본금을 운영해 나갔다. 다행히 여러 문파로부터 갖가지 예물을 받은 덕분에 학립관의 자본금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인부로 고용했는데, 민심을 얻기 위해 늘 높은 임금을 챙겨주었다. 거기에 학립관을 찾아온 대다수의 무인들 역시 증축 공사를 거들게 되니 진행은 무척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두 달여가 다시 지나자 건물이 완공되었다. 증축된 건물들은 기존의 건물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으며 그 범위도 넓었다.
이로써 학립관의 위용이 더욱 높아졌다.
건물이 완공되던 날 진양은 그동안 고생했던 인부들과 무인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그날만큼은 학립관의 아이들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어 먹을 것을 충분히 주고 실컷 놀게 해주었다.
밤이 깊고 연회의 자리가 무르익자 흥이 오른 무인들은 서로 무예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하고, 팔씨름 따위를 하며 힘을 겨루기도 했다.
한데 서요평이 가만히 진양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전에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양 관주, 잠시 날 좀 보세.”
진양은 내심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욕부터 건네왔을 서요평이 아닌가?
한데 오늘따라 낯빛에 그늘이 잔뜩 져 있고 어깨도 축 처져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서요평은 진양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터벅터벅 걸어갔는데, 그 걸음걸이마저도 몹시 무거워 보였다.
진양이 몸을 일으키고 그의 뒤를 따라가 새로 지은 건물의 대청으로 들어섰다.
“무슨 용무이신지요, 선배님?”
조용한 대청에 둘만 남게 되자 서요평이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지독녀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진양은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십지독녀 말일세. 그녀와 자네는 일 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제야 진양은 서요평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은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십지독녀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양이 얼른 속셈을 해보니 벌써 십지독녀와 만나기로 한 날이 지나가 있었다.
진양으로서는 이대로 십지독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사상이괴는 달랐다. 만약 십지독녀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 서운지는 독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분명 죽고 말 터였다.
“흐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하지만 저도 그녀가 왜 나타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서요평이 돌연 냉랭한 표정으로 진양을 쏘아보았다.
“흥! 자네는 지금 내심 좋아하고 있겠지? 이대로 십지독녀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겠지?”
진양은 뭐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서요평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실 저 혼자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서운지 선배님이 학립관의 식구로 함께 지내고 있는데 제가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심정으로는 십지독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군요.”
“흥!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군!”
진양은 그러거나 말거나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서요평은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사흘 정도 더 기다려 볼 생각이네.”
“그 뒤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기다려서 오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 봐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든 그 년과 결판을 내야지!”
진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로서는 서요평을 붙잡을 수도, 떠밀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아무리 글로 뜻을 깨우친다지만, 곁에 있는 사람 한 명을 살려내지 못하는구나.’
진양은 착잡한 심정에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