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7
신필천하(神筆天下) 107화
사흘이 지났지만 십지독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양이 걱정되는 마음에 사상이괴의 방을 찾아가 보니, 이미 서요평과 서운지는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진양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두 분을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허허, 이미 양 관주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그동안 받은 은혜만 해도 다 갚지 못할 정도로 크다오.”
하지만 서요평은 여전히 냉랭한 태도였다.
“저 녀석이 우리를 더 이상 돕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 않느냐? 너는 왜 자꾸 남의 공을 높여주지 못해 안달이냐?”
“하하,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않수?”
“쳇! 아무튼 이제 우리는 다시 학립관에 올 일이 없을 테니 그리 알게나!”
서요평은 짐을 등 뒤로 둘러메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으로 갔다. 그런데 그가 막 손을 내뻗는 순간, 방문이 저절로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그는 바로 단지겸이었다.
서요평이 화가 잔뜩 나서 소리쳤다.
“어르신의 방에 찾아오면서 어찌 인기척도 내지 않는단 말이냐?”
하지만 단지겸은 서요평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곧장 진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자네, 이것 좀 보게!”
진양이 서신을 읽어 보니 대별산 정상에서 생사를 걸고 승부를 내자는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진양이 얼른 단지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걸 누가 주던가?”
“조금 전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 내게 건네주었네. 자네에게 전해달라고 했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흐음. 혹시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가?”
“아니, 서신을 보고 놀라서 곧장 자네에게 온 것일세.”
“잘했네. 이에 대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나.”
“그건 또 왜 그런가?”
“별일 아닌 일에 괜히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네.”
단지겸은 가만히 진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함세.”
“고맙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그만 다른 용무를 봐도 좋네.”
“정말 별일 아닌 것이 확실하지?”
단지겸은 아무래도 불안한 듯 재차 물었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걱정 말게나.”
그제야 단지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갔다.
진양이 사상이괴를 돌아보며 말했다.
“십지독녀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두 선배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서요평이 등에 멘 짐을 침상으로 내던지며 대답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대별산 정상은 안개로 자욱했다.
진양과 사상이괴는 다소 긴장한 낯빛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별산 정상은 제법 너르고 평평한 터가 있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자칫 부주의할 경우에는 발을 헛디뎌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위험도 다분했다.
진양이 공터 한복판으로 걸어가서 두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학립관 양진양이 왔습니다! 십지독녀 선배님께서는 이곳에 계시면 나와주십시오!”
하지만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정상에는 진양과 사상이괴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진양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십지독녀 선배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십니까?”
그러자 낭떠러지 부근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진양과 사상이괴가 몸을 흠칫 떨고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워낙 짙은 안개 때문에 웃음소리는 마치 낭떠러지 밖의 허공에서 들려오는 듯 아스라이 느껴졌다. 진양이 그곳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십지독녀 매 선배님이신지요?”
“호호호호!”
이번에는 전혀 반대방향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양과 사상이괴는 마치 귀신한테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참다못한 서요평이 버럭 성을 냈다.
“도대체 지금 뭘 하자는 거요? 이곳에 있으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 대낮부터 귀신놀음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북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사상이괴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당신은 우리에게 해독약을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서요평은 욕지기를 내뱉지 못해 입술이 근질근질했지만, 혹여나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 봐 꾹 눌러 참았다.
매지향은 마치 그런 서요평의 기분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능청을 부렸다.
“흐응,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이익! 분명히 그렇게 말했소! 만약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했다간 천하가 십지독녀를 비웃을 것이오!”
“아아~ 이제 좀 기억이 나는 것 같네. 하지만 내 기억에는 반드시 해독약을 주기로 약속한 적은 없는데?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자 서요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가 어쩌면 되겠소?”
그가 한껏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십지독녀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오늘 나는 저 양씨 녀석과 생사를 걸고 싸우기로 했어요. 이 싸움이 끝나면 당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
다시 말해서 이 싸움에 함부로 나서면 절대로 해독약은 내놓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서요평은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매지향에게서 해독약을 빼앗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인내력을 발휘했다.
어차피 매지향이 진양과 겨루게 된다면 쉽게 날 승부는 아닐 터였다. 그 결과야 어떻게 되든 지쳐 있는 매지향을 기습한다면 해독약을 강제로 빼앗아 올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요평이 서운지의 소매를 이끌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알겠소.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을 뱉은 서요평은 눈길을 진양에게 던졌다.
진양은 그의 눈빛을 읽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상이괴는 자신이 이겨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진양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매 선배님!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매지향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남쪽에서 들렸다.
“호호호! 내가 왜 너에게 모습을 보여야 하느냐? 나는 일 년여 전에 네 목숨을 노리겠다고 했다. 굳이 정당한 대결을 벌여야 할 이유라도 있단 말이냐?”
그제야 진양은 매지향이 이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기습을 해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상황을 파악한 진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호호호호!”
다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들렸다. 이어서 동쪽에서 들리더니, 다시 북쪽에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극히 짧은 순간에 동서남북을 번쩍번쩍 오가며 웃음을 터뜨리니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과연 매 선배님이시다. 이렇듯 빠른 경신법을 펼치니 내가 쫓아가려고 해서는 큰 해를 당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진양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매지향이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도 매지향은 한참이나 웃음을 흘리며 동서남북을 끊임없이 오갔다.
사면팔방 어느 곳에서 공격을 해올지 알 수가 없으니, 진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매지향이 노리는 바였기에, 진양은 심호흡을 하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쒜에엑!
동쪽으로부터 날카로운 파공음이 이어졌다.
진양이 얼른 몸을 돌리며 수호필을 내려쳤다. 찰나, 진양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던 매지향이 몸을 슬쩍 비트는가 싶더니 수호필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버리고는 부채를 활짝 펼치며 지나쳤다.
촤악!
“크웃!”
날카롭게 펼쳐진 부채가 진양의 왼쪽 팔뚝을 찢었다.
진양은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매지향을 뒤쫓았다. 지금 그녀를 놓치면 다시 또 얼마나 불안감에 시달리며 공격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상의 안개는 매우 짙었기에 진양은 곧장 그녀를 뒤쫓으면서도 매지향의 뒷모습을 완전히 볼 수는 없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만을 간신히 알아보고는 달려갈 뿐이었다.
“호호호호!”
매지향은 진양이 뒤를 바짝 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웃음을 멈추지 않는 여인이 앞서 달리고 그 뒤를 젊은 남자가 죽어라 뒤쫓고 있으니, 제삼자가 보기에 이들의 모습은 퍽이나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진양이 있는 힘을 다해 달리다 보니 매지향과 그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진양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앞서 들은 매 선배님의 목소리로 보면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법이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나보다 느린 것일까?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던 차에 돌연 매지향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호호호호!”
진양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급히 걸음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기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이어 웃음소리가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상하군. 나는 분명 매 선배님을 뒤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리다니? 혹시 소 낭자가 매 선배님을 도와 나를 협공하는 것일까?’
하지만 진양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지향 같은 무림대종사가 제자를 이용해 자신을 협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는 매지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일이리라.
매지향의 웃음소리는 이번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니 진양은 정말이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남쪽 방면에서 서요평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거야 원, 안개가 너무 짙어서 뭐가 보여야지. 도대체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먼.”
그와 동시에 매지향의 웃음소리도 남쪽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남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서 선배님! 혹시 그곳에 매 선배님이 함께 계신지요?”
“으잉? 여기에? 여긴 우리밖에 없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왜 우리랑 같이 있단 말이냐?”
진양이 의아하게 여기는데, 문득 서요평의 대답에 이어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서 선배님! 혹시 그곳에 매 선배님이 함께 계신지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진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춤 물러났다. 처음에는 정말로 귀신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메아리다!’
진양은 순간 바닥을 박차고 남쪽 방면으로 달려갔다. 조금 나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사상이괴가 서 있었는데, 그들의 등 뒤로는 높고 널찍한 바위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서요평은 진양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다친 건가?”
“가벼운 상처입니다. 괜찮습니다.”
진양은 얼른 대답을 끝내고는 서요평이 뭐라고 하는 말을 더 듣지도 않고 다시 북쪽으로 달려갔다.
한데 북쪽 끝에 다다르자 그곳에도 역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다시 동쪽으로 가보았다.
역시 그곳에도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양은 서쪽으로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바위 몇 개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제야 진양은 매지향이 어떻게 그처럼 신출귀몰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어릴 적 그는 대별산 정상에 올라와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곳 바위는 원래 서쪽과 동쪽에만 있었다.
그래서 학립관의 생도들은 이곳 정상이 쇠뿔을 닮았다고 하여 우각봉(牛角峰)이라고도 불렀다.
한데 지금은 어찌 된 노릇인지 남쪽과 북쪽에도 바위가 하나씩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없던 바위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지향은 바로 이 지형을 이용한 것이리라. 사람의 말소리라면 메아리를 구분하기가 쉽겠지만, 공력을 담은 웃음소리라면 메아리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진양을 비롯한 사상이괴는 매지향의 웃음소리가 메아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몹시 빠른 경신법으로 이동하고 있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진양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매 선배님의 재주에 후배가 깊이 탄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