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09
신필천하(神筆天下) 109화
그녀의 위에서 서요평이 멋쩍은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의는 아니오.”
서요평의 손이 매지향의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 미친……!”
매지향은 당혹감과 함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수치심으로 전신을 부르르 떠는데, 서요평이 재빨리 매지향의 가슴팍을 뒤지더니 약병 두 개를 가지고 훌쩍 물러났다.
서요평이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킬킬! 그러게 왜 그리 꽁꽁 숨긴 거요? 어쩔 수 없었으니 서로 이해합시다!”
“이 죽일 놈!”
“이크!”
매지향이 벌떡 일어나자 서요평이 얼른 어깨를 움츠리더니 안개 너머로 훌쩍 사라졌다.
매지향은 바닥을 둘러보다가 근처에 떨어져 있는 검과 부채를 집어 들고는 서요평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하지만 안개가 자욱한 데다 서요평의 경신법이 워낙 빨라서 그의 뒷모습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매지향이 눈을 질끈 감고 분을 삭이고 있는데, 안개 속 어디선가 진양과 소담화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소, 소 낭자.”
진양의 사례에 소담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흥! 오해하지 말아요!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소?”
“만약 서요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 아마 당신을 찔렀을 거예요. 그때 당신은 공력 대결을 펼치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어차피 한 번 죽었던 목숨이니 소 낭자가 거둔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 거요.”
진양의 진지한 말투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소담화가 짐짓 냉랭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들뜬 듯했고, 얼핏 교태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흥!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겠어요? 당연히 그때 죽으면 당신이 말을 할 수는 없겠죠.”
“하하하! 그도 그렇구려!”
진양이 호쾌하게 웃었다.
매지향은 안개 속에서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 보니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어린것들이 나를 기만하는구나! 화야, 내가 너를 그리 예뻐했건만! 감히 네가 내 말을 무시해?’
매지향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애써 눌러 참으며 가만히 이야기를 엿들었다.
잠시 후 소담화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당신은 정말 바보 같군요?”
“음? 왜 그렇소?”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지금은 태연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낭자는 날 죽이지 않았잖소. 오히려 구해주었지요. 생명의 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엇이 문제요?”
“사부님이 돌아와서 내게 당신을 죽이라고 한다면…….”
“한다면……?”
“전…… 전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전 당신이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아까처럼 크게 웃으면 사부님이 금방 당신이 있는 곳을 알고 올 텐데…….”
“매 선배님은 지금 사상이괴 선배들을 뒤쫓아갔으니 당분간 여긴 안전할 거요.”
“그럼 사상이괴가 위험할 텐데 도와주지 않을 건가요?”
“그분들은 내가 나서는 것을 오히려 싫어할 거요. 게다가 지금 매 선배님은 아까 공력 대결에서 먼저 힘을 거두시는 바람에 내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러니 사상이괴 선배님들보다 오히려 매 선배님을 걱정해야 할 것이오. 게다가 서요평 선배님은 예전보다 더 강해지셨소.”
매지향은 진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금 전 서요평과 잠깐 겨루었을 때 그의 무공이 진일보했음을 느꼈던 것이다. 만약 이대로 자신이 서요평을 쫓아갔다고 한들 약병을 되찾아오거나 상대를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양의 말대로 그녀는 현재 내상을 입은 상태여서 온전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달려가서 진양을 공격한다면 자칫 자신이 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렇다고 소담화에게 공격하라고 명했다간 또 우유부단하게 망설일 것이 빤했다.
‘이 일이 끝나면 화에게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겠구나! 어리석은 것 같으니!’
매지향은 한껏 인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움직였다. 진양과 소담화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배후로 돌아가서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가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진양과 소담화는 매지향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담화가 물었다.
“당신은 왜 이곳에 왔나요?”
“매 선배님이 이곳에서 만나자고 서신을 남긴 것이 아니었소?”
“맞아요. 하지만 사부님은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세요. 그걸 알면서도 왜 왔냐는 거예요.”
“약속을 했으니 지키고자 했을 뿐이오.”
“차라리 당신은 멀리 도망을 갔어야 해요.”
“도망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소. 언젠간 닥칠 일이오. 하지만 나를 걱정해 줘서 고맙게 생각하오, 낭자.”
그러자 소담화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누, 누가 당신을 걱정했다고 그래요? 전, 전 당신이 그저…… 너무 바보 같아서…… 한심해서…….”
“하하! 어쨌든 고맙소.”
“정말 당신은 바보 같군요.”
그 순간, 매지향이 안개를 뚫으며 화살처럼 달려나갔다.
쒜에엑!
진양은 등 뒤에서 섬뜩한 예기를 느끼고는 얼른 몸을 돌리며 수호필을 후려쳤다.
부웅-!
이미 진양의 반응을 예상했던 매지향은 몸을 낮게 숙이며 수호필을 피했다. 이어서 그녀는 곧장 검을 내지르며 진양의 가슴을 노렸다.
“헉!”
갑작스러운 공격에 진양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피츗!
가슴팍의 옷깃이 찢어지며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뒤미처 매지향의 부채가 활짝 펼쳐지더니 진양의 복부를 가로로 후렸다. 그 일련의 행동이 그야말로 번개처럼 빠르고 신속해서 도저히 눈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촤아악!
부채의 모서리가 마치 칼날처럼 진양의 아랫배를 찢어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많은 피가 튀어 올랐다. 진양이 얼른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매지향은 오른손에 든 검을 집어 던졌다.
진양이 고개를 숙이며 피하는 동안 매지향이 쏜살처럼 달려 나가 손가락을 곧게 펴고 내질렀다.
이를 본 소담화가 저도 모르게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사부님! 안 돼요!”
하지만 매지향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시퍼렇게 물든 그녀의 손은 곧장 진양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갔다.
이미 두 번이나 살이 베었던 진양은 독기가 몸에 흐르면서 움직임이 용의치 않았다.
순간 소담화가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내던졌다.
푸욱!
“아악!”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파육음이 들렸다. 이어서 소담화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진양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로 앞에서 매지향의 독수를 막아낸 소담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아낸 것이 아니라 진양 대신 몸을 던져 맞은 것이다.
시퍼런 독 기운을 품은 매지향의 오른손은 소담화의 옆구리에 꽂혀 있었다.
매지향이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화, 화야! 너…… 너……!”
소담화가 부들부들 떨며 매지향의 손을 부여잡았다.
“사부님, 이제 그만…… 애증의 고통에서 벗어나세…… 요…….”
“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네가 왜 내 독수를 받아서…… 네가 왜……!”
소담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뺨에 눈물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자를 보면…… 마음이 복잡해져서…… 저도 모르게…….”
“이런…… 바보 같은…….”
매지향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해져서 손을 뽑아내고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소담화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어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울컥 토를 하자 입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매지향은 주저앉은 그녀 너머로 당황한 채 서 있는 진양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금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진양은 소담화를 보다가 매지향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매지향의 두 눈은 불덩이를 삼킨 듯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의 울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예전의 진양이었다면 그런 매지향을 보고 차갑게 힐난했을 터이다. 이번에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를 외면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양은 어쩐지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모든 번뇌와 분노, 광기를 홀로 뒤집어쓴 듯한 그녀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진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배님, 모든 번뇌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우선 몸을 좀 다스리시지요. 소 낭자를 빨리 옮겨서 치료해야겠습니다.”
“닥쳐라! 이 모든 것이 너 때문이다! 번뇌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고? 내 마음에 그 번뇌를 심은 것이 너란 놈이다! 그래서 내가 진작 널 죽이려고 한 것이다!”
매지향은 다짜고짜 부채를 휘두르며 진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양이 얼른 몸을 피하면서 소리쳤다.
“선배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소 낭자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매지향은 쓰러져 있는 소담화를 힐끗 보았다. 이제 소담화는 기력이 완전히 쇠진해서 숨만 가까스로 내쉬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제자였던 만큼 독기에 대한 내성이 강하기에 당장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을 터다.
하지만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출혈이 심하니 응급처치만큼은 빨리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매지향은 그녀를 보자 마음이 아프면서도 이 모든 것이 진양 때문이라는 생각에 더욱 노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노기는 광기와 독기의 형태로 표출됐다.
“흥! 제 사부를 기만하고 쓸데없는 감정에 허우적거린 대가다. 참 꼴좋군! 내가 저 아이를 이미 마음에서 지웠으니 저대로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선배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선배님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진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닥쳐라! 네가 나를 가르칠 생각이더냐?”
매지향은 더욱 매섭게 공세를 이어나갔다.
진양은 조금 전 부채에 살이 찢기면서 미약하게나마 중독되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계속 싸우게 된다면 정말로 소담화와 함께 저승의 길동무가 될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십지독녀 매 선배는 멈추시오!”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대별산 정상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더니 안개를 뚫고 은륜 세 개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정신없이 공격을 퍼붓던 매지향은 황급히 몸을 물리며 날아드는 은륜을 부챗살을 펼쳐 막아냈다.
따당! 땅!
은륜이 부챗살에 부딪치자 허공을 크게 선회하며 되돌아갔다.
“누구냐?”
매지향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안개 속에서 한 중년인이 걸어왔다.
반듯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바로 접선선생 전학수였다.
그가 부채를 활짝 펼치더니 천천히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접선입니다. 부채라면 저도 좀 가지고 놀지요.”
매지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더니 차갑게 비웃었다.
“흥! 혼자가 아니군.”
“과연 매 선배님이시군요.”
전학수가 빙그레 웃자, 기다렸다는 듯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는 무이오도가 모습을 드러냈고, 서쪽에서는 진승이, 북쪽에서는 죽반승이 나타났다.
북쪽에서 선장을 짚으며 나타난 죽반승은 대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노승은 혼자다. 왜냐하면 나는 나니까. 나는 여러 명이 될 수 없어. 하지만 세상에는 노승이 많다. 그러니까 노승은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노승은 나니까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