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1
신필천하(神筆天下) 11화
분명 글을 적는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다시 해보자!’
진양은 다시 붓을 들어 먹물을 찍은 다음 화선지에 글씨를 적어갔다. 바람이 굽이굽이 휘돌아 불 듯 풍(風) 자가 써졌고, 바위틈으로 물이 새어 흐르듯 결(決) 자가 써졌다. 마지막으로 권(拳) 자를 쓴 진양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거야. 이 권초의 요체는 결(決) 자에 있는 거야. 결은 쾌(?) 자에 물수 변(?)이 합한 거야. 물꼬가 터져 흐르는 모양이니까, 주먹을 뻗어낼 때도 마치 물꼬가 터져 흐르듯 내질러야 한다는 뜻일 거야!’
진양은 다시 한번 결(決) 자만 써보았다. 과연 이번의 글씨는 더욱 물꼬가 터져 흐르는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글자에서 영감을 받은 진양은 얼른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서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 재빨리 풍양권법의 일초인 풍결권을 시전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뚫고 물꼬가 터지듯 진양의 주먹이 허공을 내질렀다.
쉬이잇! 팡!
진양은 주먹을 힘껏 내지른 상태에서 그대로 멈췄다.
겨우 일 초를 시전했을 뿐인데 진양의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다른 사람이 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펼친 풍결권은 완벽한 자세였다는 것을.
‘해, 했다!’
진양은 다시 한번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머릿속으로 가상의 상대를 정해놓았다.
자신을 마주한 채 신중하게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상대. 순간 진양이 보법을 밟으며 풍결권을 내질렀다.
쉬이잇! 파앙!
진양의 주먹이 허공을 때리며 파공음을 터뜨렸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멋지게 들어간 풍결권이었다.
‘됐어! 이거야!’
신바람이 난 진양은 얼른 탁자로 달려갔다. 그리고 붓을 들어 다음 초식을 써보았다.
질풍권(疾風拳).
역시 초서로 적은 글씨였는데, 이번만큼은 아까와 달리 획이 굵고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가 날렵하게 이어지니 적힌 글씨에서 바람이 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진양은 한 가지 이치를 꿰뚫었다.
‘그렇구나. 질(疾) 자를 풀이하면 빙(?) 자와 엄(?) 자, 그리고 시(矢) 자가 합쳐진 거야. 이 심리는 결국 얼음[?]처럼 냉정하고, 바위[?]처럼 고집스럽고, 화살[矢]처럼 빠르고 곧다는 뜻이다. 결국 질풍권은 이 같은 심리와 움직임으로 펼쳐야 해.’
진양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글자를 적으면서 그 심상을 되새겨 보았다. 단지 질풍이라는 말이 풍기는 느낌과 이렇듯 글자를 해석해서 받아들인 느낌은 진양에게 있어서 천지차이였다.
이치를 깨닫게 되자 막연했던 초식의 움직임이 진양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시 방 한가운데로 걸어간 진양은 기수식을 취한 뒤에 질풍권 초식을 펼쳤다. 주먹에 체중이 실리면서 정해진 보법과 함께 매섭게 뻗어나갔다.
슈욱! 파앙!
파공음이 터지면서 진양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진양은 모르고 있었다.
내공도 없는 상태에서 이만큼 위력적으로 초식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아마도 천상련 내에서도 풍결권과 질풍권에 있어서만큼은 이제 진양보다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내공이 한 줌도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초식을 완벽하게 펼친 정도로는 그 위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진양은 뛸 듯이 기뻤다.
초식을 펼치는 재미에 푹 빠진 진양은 반 시진가량 이 두 초식을 연이어 펼쳤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자양진경도 이런 식으로 익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진양은 얼른 침상을 살펴보았다.
한참 동안 뒤적이던 진양은 침상 구석에 떨어진 책 한 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예전에 익히려다가 포기했던 자양진경이라는 책이었다.
책장을 열어보니 과연 수려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삼류 무공이든 뭐든 나는 한번 익혀볼 테야.’
진양은 얼른 탁자로 걸어가서 책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 붓을 들어 화선지에 책에 적힌 내용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한데 필사를 하다 보니 책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서인 줄 알았는데 필사를 하면서 깊이 생각하다 보니 이건 서예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글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게다가 집필법까지 일일이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진양은 내심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책에 새겨진 글씨가 워낙 수려했기 때문에 진양은 필법을 배운다는 기분으로 꾸준히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번째 장을 필사할 때였다.
진양은 문득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한 글자씩 쓸 때마다 호흡이 깊어지고, 전신의 근맥이 부드럽게 이완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진양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 순간 혈액의 흐름이 빨라지고 기의 순환이 원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진양은 마치 누군가 온몸을 안마해 주는 듯한 기분에 묘한 쾌감까지 느꼈다.
또한 스스로 필사한 글을 보니 그 뜻이 분명하게 와 닿고 필체가 훌륭하여 심미적인 쾌감까지 더해졌다.
결국 진양은 알 수 없는 흥분감에 휩싸여 밤이 새도록 책을 필사했다.
처음에는 해서체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행서체가 나오고 초서체로 이어지면서부터는 마치 붓이 스스로 춤을 추듯 글을 적어나갔다.
다음 날 아침 진양은 드디어 자양진경의 마지막 장을 필사했다.
단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필사했다면 어느 누가 믿으랴.
이윽고 붓을 내려놓은 진양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침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온몸이 나른해서 마치 꿈을 꾸는 듯했고, 발은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진양은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침상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운 진양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날 진양은 생애 처음으로 내공을 연마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현존하는 내공 중에서는 자양진기를 능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5. 도주
그날 이후 양진양은 하루도 빠짐없이 자양진경을 필사했다. 물론 자양진경을 필사하면서도 진양은 몸에 내공이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자양진경 구절 어디에도 내공과 관련된 글귀는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내공을 수련하면 단전호흡을 하면서 복부가 단단해지고 내단(內丹)이 쌓이게 마련이다.
하나 자양진기는 몸 전체에 내공이 고루 퍼져서 사지백해에 진기가 녹아든다. 물론 본인이 의식하면 곧바로 내단에 진기를 모을 수가 있다.
자양진기가 몸 전체에 고루 퍼져서 녹아 있는 이유는 일반적인 내공 수련과 달리 서예를 통해서 내공을 쌓기 때문이다.
보통 서예를 하면 손이나 팔만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올바른 자세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손가락, 손목, 어깨 힘을 사용하는 동시에 허리와 다리 힘을 함께 써야 한다. 만약 서서 글씨를 쓴다면 온몸의 각 부분이 모두 움직여야만 한다.
때문에 진양은 자양진경을 필사하면서 이러한 자세를 줄곧 유지해 왔고,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익힌 내공이 전신에 고루 퍼져 녹아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양진기의 특징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진양은 그저 습관처럼 자양진경을 필사했다. 자양진경을 필사하면 신기하게도 몸이 개운해지고 잡념도 사라져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필체 또한 수려해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필사를 할 때마다 내기가 원활하게 소통하니, 진양은 하루가 다르게 체격도 커져 갔다. 원래 동년배 중에서도 왜소한 편이었지만, 어느새 훤칠하게 자란 키는 이제 공소부보다도 컸다.
한편 곽연은 종종 진양에게 찾아와 응천부로 보낼 서신을 부탁했고, 그럴 때마다 진양은 시를 지어주거나 수려한 필체로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진양도 시간이 흐르면서 곽연과 편지를 주고받는 여인이 문득 궁금해졌다. 매번 보내오는 답장을 보면 필체가 상당히 아름다웠고 학식도 깊어 보였던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여인은 곽연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진양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사 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어느 날 진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자양진경을 펼쳐 놓고 필사하고 있었다.
그때 풍천익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순간 진양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녀석이?’
진양을 중심으로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편 진양은 풍천익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오로지 필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풍천익은 얼른 걸어가서 진양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 바람에 진양은 화들짝 놀라며 붓을 놓치고 말았다.
“각, 각주 어르신?”
진양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는데, 풍천익이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진양의 맥을 짚었다.
하지만 진양의 몸에서는 어떠한 공력도 감지되지 않았다.
보통 내공을 연마하다가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하게 되면 주화입마에 걸려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양진경은 글쓰기를 그만두는 순간 자연스럽게 내공 연마가 중단되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한 사지백해에 흘러들던 내공 역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녹아들기 때문에 타인이 감지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풍천익은 어떠한 기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군.’
풍천익이 고개를 들어 진양을 쏘아보았다.
“뭘 하고 있었느냐?”
“필사하고 있었어요.”
“하루 분량을 채우지 못했단 말이냐?”
“아뇨. 다른 걸 필사하고 있었어요.”
풍천익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탁자를 훑어보다가 펼쳐져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바로 진양이 필사하고 있던 자양진경이었다.
“이것이냐?”
“예.”
진양은 풍천익의 표정이 전에 없이 매섭다는 것을 알고 괜히 주눅이 들어 목을 움츠렸다.
풍천익은 이맛살을 잔뜩 구긴 채 자양진경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저 서법에 관한 책일 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물론 글자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언뜻언뜻 보이는 구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는 서예에 관한 이론서 대부분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풍천익은 의심을 거두고는 자양진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진양을 훑어보았다. 만약 진양이 그동안 남몰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동안 진양이 필사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그 책들은 모두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비전 절기였다.
‘아니지. 이 아이가 그 정도로 재능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풍천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그는 진양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팔을 불쑥 뻗어 진양의 천령개(天靈蓋)를 노리고 내려쳤다. 그의 오른손이 진양의 뇌문 중앙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을 향했고, 왼손은 관자놀이인 태양혈(太陽穴)을 향했다.
어느 쪽이든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 터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진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물러났다.
이는 무공을 모르는, 아니, 아예 싸움이라는 것 자체를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으앗!”
풍천익의 손길이 머리카락 한 올 차이를 두고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이 녀석은 정말 무공을 할 줄 모르는군.’
보통 이렇게 갑자기 공격을 받으면 본능적으로라도 방어 자세가 나와야 한다.
한편 저승 문턱에 발을 들이밀었던 진양은 울먹이며 물었다.
“저, 저한테 왜 그러세요?”
“흠. 미안하다. 내 너를 잠시 오해했다.”
풍천익은 손을 거두고 진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