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11
신필천하(神筆天下) 111화
“그중에 절 치료할 수 있는 해독약은 없어요.”
“그게 정말이오? 그럼 낭자의 독상은 어찌 치료해야 하오?”
“제 독상은 완치할 수 없어요. 다만 진행을 느리게 할 방법만 알 뿐이에요.”
진양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죽게 된 여인 앞에서 다른 사람을 살릴 해독약이 무엇인지 물어보기가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심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소담화가 툭 던지듯 말했다.
“오른손에 든 것은 사상이괴가 복용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왼손에 든 것은 당신이…… 당신의 독상을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서요평은 귀가 번쩍 틔었다.
“낭자! 그게 정말인가? 혹 우리를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흥! 믿기 싫음 전부 버리면 될 것 아닌가요?”
“아닐세, 아니야. 어차피 지금 내 아우는 시간이 없는 판이니 한번 믿어보지. 감사 인사는 운지가 기운을 차리면 그때 정식으로 하겠네.”
말을 마친 서요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양의 오른손에서 약병을 낚아채어 달려갔다.
진양은 왼손에 든 약병을 내려다보며 착잡한 심정으로 물었다.
“이 약병으로 낭자의 독상은 치료할 수 없소?”
“안 된다고 했잖아요. 사부님이 하나의 독만 쓰는 줄 아세요? 그분은 수십 가지의 독을 다루시는 분이에요. 제가 당한 독과 당신이 당한 독은 전혀 다른 독이라구요.”
말을 하던 도중에 그녀는 진승을 흘깃 보았다.
진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소담화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만약 같은 독이라고 한들 약병은 하나밖에 없는데 당신이…… 당신이 절 위해 그 해독약을 줄 리가 있겠어요?”
그러자 진양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만약 이 약물로 낭자의 독상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나는 기필코 낭자께 이 해독약을 주겠소. 진심이오.”
그 말에 진승의 낯빛이 흔들렸다.
소담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요?”
“물론이오.”
소담화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언뜻 편안하고도 행복한 표정이 되는가 하면, 씁쓸하고도 슬픈 기색이 서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다른 사람이 읽어내기에는 매우 미묘한 변화였으므로 주위의 누구도 쉽게 눈치챌 수가 없었다.
소담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 약을 제가 먹으면 전 더욱 독상이 심해져서 사흘 안에 죽고 말 거예요. 혹시 당신은 절 죽이고 싶은 건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자결해 드리죠. 어차피 독상을 당한 몸이니 제가 십 년을 살겠어요, 이십 년을 살겠어요?”
그녀가 갈수록 표독스럽게 말하자, 진양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면요? 혹시 당신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천만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소. 낭자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오?”
“흥! 그럼 왜 그 약을 바로 먹지 못하는 거죠? 역시 내 말을 믿지 못하니까 그런 거지!”
“절대 그렇지 않소. 나는 그저…… 낭자가 날 위해 두 번이나 나서주었는데, 이번에도 혼자 해독약을 복용하기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거짓말! 당신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뻔해! 그 약을 먹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말 아니오.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겠소?”
“그럼 그 약을 먹어봐요. 내 말을 믿는다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인데 먹지 못할 것은 없잖아요? 물론 내가 당신을 죽일 작정이라고 믿는다면 먹지 않아도 좋아요.”
“알겠소. 그럼 내 단숨에 이 약을 입안에 털어 넣지.”
진양은 약병의 마개를 뽑아내더니 정말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입 안에 약물을 털어 넣었다.
누군가 말릴 겨를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약물을 꿀꺽 삼키자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어찌나 뜨거운지 진양은 마치 내장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얼굴이 발갛게 물들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끄음.”
그가 한차례 신음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진양은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얼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튼 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양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화를 거듭했다.
사람의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가 붉게 변하길 반복하니, 주위 사람들은 좌불안석이 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쿨럭! 쿨럭!”
진양이 갑자기 기침을 내뱉자, 시커먼 핏덩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전학수가 깜짝 놀라며 소담화를 노려보았다.
“네 이년! 관주님이 마신 독이 무엇이냐?”
하지만 소담화는 전학수를 돌아보고 코웃음 치더니 이내 시선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쳐 죽일 잡년이!”
전학수가 정말로 일수에 쳐 죽일 듯 쥘부채를 한껏 치켜들었다.
그때 진승이 얼른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전 형.”
“끄음.”
독에 대해서 그나마 제일 잘 아는 진승의 말이니 전학수도 우선 노기를 억누르며 손을 내렸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니 진양의 얼굴색이 점점 편안하게 바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칠게 몰아쉬던 호흡도 점차 안정이 되고 혈색도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긴장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진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진양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관주님?”
진양이 심호흡을 하고 나서는 빙그레 웃으며 소담화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소? 나는 낭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소. 과연 십지독녀 선배님은 독공도 우수하고 해독약의 효력도 뛰어나구려. 이렇게 빨리 호전될 줄은 몰랐소.”
소담화 역시 다소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진양이 부드럽게 말을 건네 오자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사흘 동안은 정해진 시간에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럼 더 빨리 나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 고맙소, 낭자.”
소담화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그 약을 마셔서…… 다행이에요.”
진양은 소담화의 말을 들으며 흠칫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히 울먹임으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진양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소담화를 바라보았다. 창밖을 응시하는 소담화의 두 뺨에는 눈물이 기다란 선을 그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양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니, 진승만이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진 형, 혹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소?”
“그것이…….”
진승이 소담화의 눈치를 흘깃 살피며 말을 얼버무리자, 진양이 다시 추궁했다.
“말해보시오, 진 형.”
“사실 그 해독약은…….”
그때 소담화가 진승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말하지 마세요!”
진승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담화가 다시 소리쳤다.
“녹독수! 이번에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주둥이를 놀린다면 널 반드시 죽이겠어!”
그러자 진승이 그녀를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 낭자, 당신의 숭고한 마음에 나는 마음 깊이 감복했소. 하나 나는 지금 낭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소. 이분은 어쨌든 내가 주인으로 섬기고자 맹세한 분이오. 이분이 연유를 묻는데 내가 어찌 입을 닫고 있겠소? 만약 낭자가 내게 노여움을 느끼고 가르침을 내리려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이겠소. 이해해 주시오, 낭자.”
소담화는 이불을 꽉 말아 쥐고 진승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진승이 진양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사실…… 관주님께서 드신 해독약은 소 낭자의 독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진양은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양이 다그쳐 물었다.
“그럼…… 이 약물은 만독통치약이란 거요? 분명 그녀가 당한 독과 내가 당한 독이 다르다고 했는데…….”
“사실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두 분은 같은 독에 당했습니다. 사상이협이 당한 독과는 분명히 다릅니다만, 소 낭자와 관주님께서 당한 독은 같은 종류입니다.”
진양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떨리는 눈동자로 소담화를 바라보았다.
“낭자, 혹시 그 사실을 몰랐소?”
소담화는 참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 대신 진승이 대답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진양은 진승에게 대답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소담화에게 고정했다.
“한데…… 한데 왜? 어째서 내가 그 약을 마시도록 내버려 두었소?”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진양이 이맛살을 구기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나도 모른다고요! 당신만…… 당신만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걸 어쩌라고! 당신만 만나면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내가 어떻게 해?”
소담화가 한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마치 막혔던 둑이 터져 물이 쏟아지듯 거침이 없었다. 동시에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그칠 줄을 몰랐다.
진양은 흠칫 떨고는 주춤 물러났다.
‘그랬구나. 소 낭자가 나를 이처럼 마음 깊이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구나.’
진양은 무안한 마음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낭자…….”
“몰라요! 그만 나를 내버려 두고 전부 나가세요! 이제 됐잖아요? 당신은 살았고 사상이괴도 살았으니 된 것 아닌가요? 그만 날 내버려 두라고요!”
소담화는 그대로 드러눕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 버렸다.
진양이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차마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때 유설이 진양의 옷깃을 가만히 잡아끌었다.
진양이 돌아보니 유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해하지 말고 그만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결국 진양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진양을 비롯한 무인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다만 소담화가 덮어쓰고 있는 이불만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진양은 유설과 함께 후원으로 나와 거닐었다.
“소 낭자가 나를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할 줄이야. 나는 그녀를 앞으로 어찌 봐야 할지 모르겠소.”
유설이 진양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가 말하길, 독의 진행을 늦추는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당분간은 큰일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당장에라도 죽을 듯한 표정이었소.”
진양의 말에 유설도 내심 걱정이 됐다.
소담화는 정말 삶의 의지를 모두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복잡하고 혼란해서 그럴 거예요. 제가 나중에 그녀를 만나서 잘 설득해 볼게요. 그러니 당신은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진양은 유설에게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이렇듯 자신을 이해해 주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유설을 보니 마음 깊이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후 진양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운기조식을 취했다.
과연 소담화의 말대로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몸 안의 독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예전처럼 맑은 기운만이 감돌았다.
한편 소담화는 유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소담화가 필요한 약초와 약재를 이야기하면 진승이 그것들을 구해와서 제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도 독의 진행을 더디게 할 뿐 체내의 독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소담화의 건강이 걱정된 진양은 매일같이 그녀의 침소로 찾아가 봤지만, 소담화는 끝내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진양은 대학당에 무인들을 모으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언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십지독녀 선배를 찾아 떠나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