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13
신필천하(神筆天下) 113화
하지만 걸인은 여전히 돌아누운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진양은 곧 그가 돈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매를 뒤적이는데, 서요평이 불쑥 나서더니 다짜고짜 걸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어이쿠!”
걸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사람을 이렇게 때리다니! 약값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지만 그런 협박이 서요평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서요평은 다짜고짜 걸인의 뺨을 한차례 후려치더니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흥! 약값? 죽고 나면 약값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가 약값이 필요 없도록 아예 네놈을 죽여주마!”
그제야 걸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진양 일행을 다시 보았다. 진양만은 허리춤에 이상하게 생긴 붓을 차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긴 장검을 차고 있는 무인이 아닌가?
얼핏 나긋나긋한 진양을 보고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걸인이 두 손을 싹싹 빌며 사정했다.
“아이고, 나리! 제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그럼 어서 대답해라!”
“뭘 말입니까요?”
“아까 이 녀석이 물은 말에 대답하란 말이다!”
“아, 예. 사흘 전에 확실히 한 여인이 나타나서 제게 심부름을 시켰습지요.”
“나이는?”
“대충 마흔 정도로 보였습니다. 영락없는 시골 아낙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전 그 여인이 분명 무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더랬지요.”
“흥, 그러면서 이번에는 영 눈썰미가 없었군!”
서요평이 그를 비아냥거리면서 진양을 흘깃 돌아보았다.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매지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상을 입은 그녀가 축골공을 이용해서 호호백발 할머니로 변하는 것보다는 공력을 덜 소모할 수 있는 중년여인으로 변장하는 것이 더 쉬웠으리라.
그래도 혹시 몰라 진양이 물었다.
“혹시 팔색조가 어깨에 앉아 있진 않던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요. 못 본 것 같습니다.”
“하긴…… 팔색조를 항시 어깨에 올려두진 않으니.”
진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서요평이 걸인을 다그쳐 물었다.
“그년은 어디로 갔느냐?”
걸인이 손가락을 쭉 뻗어 길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북쪽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느냐?”
“모릅니다요. 그런 말을 저 같은 거지한테 왜 하겠습니까요? 저는 정말 거기까진 모릅니다요.”
“쳇,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서요평은 걸인을 길바닥에 냅다 집어 던졌다.
“어이쿠!”
걸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길바닥에서 서너 바퀴나 굴렀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이마를 땅에 찧으며 인사했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리!”
그러거나 말거나 서요평은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북쪽으로 갔다고 하니 우선은 쫓아가는 수밖에 없겠네. 가다 보면 또 단서가 나오겠지.”
“그러지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인에게 다가갔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받으십시오.”
진양이 이번에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은자 한 냥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걸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진양을 보며 연신 큰절을 올렸다.
“군자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모쪼록 하는 일마다 복 받으시고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면 서요평은 진양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 마음이 약해서 어디다 쓰겠는고?”
진양은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약한 자를 감싸는 것은 오히려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지요.”
“흥, 말만 번지르르하지.”
서요평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고, 일행은 다시 북쪽을 향해서 나아갔다.
진양 일행은 매지향의 행적을 추적하며 갔기에 이동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마을이 나타날 때나 큰 도시가 나타날 때마다 매지향의 행방에 대해서 수소문해 보았지만 매번 허탕만 칠 뿐이었다.
결국 진양 일행은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계속 북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동 속도는 더욱 느려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진양 일행이 수일이 지나서 도착한 곳은 개봉(開封)이었다.
늦은 저녁 개봉에 도착한 그들은 너른 강변에 위치한 객점에 들렀다. 그들은 모두 진양의 방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날이 갈수록 매 선배님의 행방이 묘연해지기만 하니 걱정입니다. 내일 강을 건널지 말지 고민되는군요.”
진양의 말에 서요평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강을 건넌다고 그곳에 십지독녀가 있겠느냐? 어차피 찾지 못할 거라면 괜히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돌려 찾아보자. 아니면 동쪽이든 서쪽이든 가면 될 일이지.”
“그랬다가 만약 매 선배님이 정말 강을 건넜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찾지 못할 겁니다.”
“강을 안 건넜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
그때 유설이 나서며 말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행적을 살펴보면 십지독녀는 이곳을 지나갔을 확률이 커요. 하지만 강을 건너지 않았을 수도 있죠. 만약 강을 건넜다면 이곳 사공들이 그녀를 기억할 수도 있구요. 그러니 내일 강변에 가서 사공들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서운지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거 좋은 방법이오!”
“좋긴 무슨 좋은 방법이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야!”
서요평의 핀잔에 서운지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형님은 그냥 발길을 돌리려고 했잖수?”
“내가 그냥 돌리려고 했는지 알아보고 가려고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나는 그저 말을 안 했을 뿐이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결국 일행은 다음 날 강변에서 십지독녀의 행방을 다시 한번 수소문하기로 정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진양 일행은 객점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는 길을 나섰다.
그들이 강변에 다다르자 아직 물안개가 자욱해서 사위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진양 일행이 사공들을 찾아 강변을 따라 걸어가는데, 마침 저만치 앞에서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고, 사공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진양 일행이 다가가서 그에게 십지독녀에 대해 물었으나,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진양 일행은 다른 사공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만난 사공이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그들 모두 하나같이 십지독녀를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결국 진양 일행이 강을 건너기를 포기하고 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힐 때쯤, 먼발치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워낙 배가 커서 움직임이 둔하게 느껴졌지만 실제로 다가오는 속도는 몹시 빨랐다.
그 배가 나타나자 강변에서 일을 하던 사공들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진양이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그러자 사공이 진양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이것저것 물건들을 챙기며 대꾸했다.
“저들은 거룡방(巨龍?)입니다. 손님도 얼른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괜히 저들에게 잘못 걸리면 목숨도 남아나지 않습니다요.”
말을 마친 사공은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그때 다가오는 배를 보던 서요평이 냉랭하게 비웃었다.
“흥! 거룡방 따위가 개봉까지 세력을 넓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진양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거룡방에 대해서 아십니까?”
“거룡방의 현 방주는 예전에 나와 무공을 겨룬 적이 있지.”
진양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거룡방 방주 따위가 내 적수가 되겠느냐? 내가 단단히 혼뜨검을 내주었지!”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유설이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알기론 거룡방주 왕방평(王方平)은 결코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물론 그가 아주 강한 절정고수는 아니지만, 그만큼 상대를 알아보고 처신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겠죠. 그런데 선배님께 졌다고 하니 정말 뜻밖이네요.”
그러자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의 대결은 사실 무승부였다오. 형님이 자존심이 워낙 강하니 이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뭐가 자존심이고 뭐가 무승부였단 말이냐! 너는 어째서 내 승리를 인정하지 않느냐? 나는 분명히 거룡방주를 이겼다!”
서요평이 발끈해서는 노발대발 소리쳤다.
서운지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그저 알았노라고 서요평을 다독였다.
진양과 유설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더 듣지 않아도 대충의 사정을 알 만했던 것이다.
진양이 유설에게 물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거룡방주는 처세술이 대단히 뛰어나겠구려.”
“맞아요. 만약 사상이협 두 분이 함께 있었다면 거룡방주는 결코 그 싸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죠. 제 말이 맞죠?”
유설이 서운지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혔소. 그 당시 나는 형님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 형님이 거룡방주에게 시비를 거는 바람에 형님만 그와 싸웠다오. 결국 두 사람은 반나절 동안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아서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지요.”
“그게 아니라니까! 그때 거룡방주는 훗날을 기약하자고 말하면서 사실은 내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니 그 싸움은 내가 이긴 것이야!”
“알겠수다, 알겠수.”
서운지가 다시 서요평을 달랬다.
그러는 사이 거룡방의 커다란 배는 강변에 다다랐다. 과연 뱃머리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는데, 커다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었다.
진양은 어쩌면 이들이 십지독녀의 행방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들이 하선하기를 기다렸다.
배가 완전히 정박하자 뱃머리에 한 사람이 나타나서 소리쳤다.
“혹시 그대들은 대별산에서 온 손님들을 보지 못했는가?”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공력이 꽤나 심후한 듯했다. 묻는 말투로 보아서는 아마도 진양 일행을 사공들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날이 밝으면서 안개가 많이 가시긴 했지만 아직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사람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던 탓이다.
진양이 대답도 하기 전에 서요평이 버럭 소리쳤다.
“우리가 대별산에서 왔는데, 설마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 혹시 네놈들은 십지독녀에게 사주라도 받은 것이냐?”
그러자 뱃머리에 선 사내는 흠칫거리는 듯하더니 다시 소리쳐 물어왔다.
“그것이 정말이오?”
“뭐가 말이냐?”
“여러분이 대별산에서 왔다는 것 말이오!”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 울렸지만, 말투만큼은 아까와 다르게 사뭇 공손해져 있었다.
서요평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정말이 아니면 거짓이겠느냐? 내가 네놈과 노닥거릴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실례지만 귀하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
“이런 우라질 놈을 봤나? 어르신의 성함을 캐물으려면 네놈의 썩어빠진 이름부터 대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 꼭대기에서 악다구니 쓰며 소리만 치지 말고 당장 이리 내려와라! 내 단칼에 너를 혼내줘야겠다!”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다시 소리쳤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그러더니 뱃머리에 비치던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잠시 후 뱃머리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나타났다. 덩치가 달라진 것으로 보아 아까 그 사내는 아닌 모양이었다.
한 명은 체격이 몹시 크고 장창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과거 삼국시대의 장비의 초상화가 연상됐다.
그리고 그 곁에는 키가 아주 작고 뚱뚱한 대머리사내가 함께 있었다.
대머리사내가 소리쳐 물었다.
“여러분은 대별산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