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14
신필천하(神筆天下) 114화
이번에도 진양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서요평이 발끈하며 받아쳤다.
“니미럴! 대별산에 학립관 말고 또 무엇이 있더냐? 대별산하면 학립관이지! 네놈들이 대별산을 알면서 학립관을 모른다니 귓구멍이 막혔구나!”
뱃머리의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훌쩍 뛰어내렸다.
뭍으로 내려선 그들은 진양 일행에게 곧장 다가왔다.
진양이 나직한 목소리로 일행에게 물었다.
“저들이 정말 우리를 기다린 모양인 것 같은데 왜 그럴까요?”
“흥! 십지독녀가 사주를 했다면 오히려 꼬리를 잡았으니 반가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거룡방의 패거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이기기 힘들 겁니다.”
“뭣하러 그 많은 놈들을 죽이나? 어떤 조직이든 머리만 베면 자연히 무너지는 법. 저 텁석부리 녀석이 바로 거룡방주다. 저놈의 모가지만 따면 조무래기들은 알아서 물속에 숨어 버릴 터.”
서요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긴장한 듯 천천히 검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이윽고 뱃머리에서 내린 두 사내가 진양 일행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텁석부리사내는 사상이괴를 보더니 서요평을 보고 흠칫했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후후! 오랜만이군, 왕 방주.”
왕방평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양을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양 관주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게 용무가 있으신지요?”
진양이 공손히 되묻자 왕방평과 대머리사내가 서로 바라보더니 진양에게 포권하며 고개까지 숙였다.
“거룡방의 왕방평이 학립관의 양 관주님을 뵙습니다!”
“거룡방의 임평산(任平散)이 학립관의 양 관주님을 뵙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진양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두 분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물론 알다마다요. 강호에서 양 관주님의 명성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눈이 멀고 귀가 먼 것이지요.”
“하면 두 분께서는 제가 이곳에 온다는 걸 어찌 알았습니까?”
“양 관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무림인의 관심사입니다. 하물며 이렇게 먼 여행길에 오르셨는데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지요.”
“혹시 이번에도 천상련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러자 왕방평이 우물쭈물하더니 가까스로 대답했다.
“천상련을 떠나 양 관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진심입니다.”
“역시 천상련과 관련이 있군요.”
“사실…… 저희는 전서 한 장을 받았을 뿐입니다.”
“전서라면……?”
왕방평이 진양의 눈치를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 관주님께서 십지독녀 매지향을 쫓고 있으니 십지독녀를 목격한 자들은 적극 협조하라는…….”
그의 말에 유설이 빙그레 웃으며 진양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비 대주가 다시 천상련에 전서구로 알린 모양이군요. 풍 련주님은 다시 강호인들에게 알린 모양이구요.”
진양도 대충 짐작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 대주가 또 일을 벌였군. 앞으로 천상련의 도움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겠소. 염치가 없어 풍 련주는 또 어찌 봬야 할지…….”
그러자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천상련의 도움을 받아서 십지독녀를 빨리 찾아낸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시오, 양 관주.”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왕방평이 얼른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니 양 관주님께서는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마십시오.”
하지만 진양은 자신 때문에 강호의 무인들이 이처럼 움직이는 것이 적지 않게 부담되었다. 게다가 일개 방주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이처럼 몸을 사리며 예우를 다하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다고 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진양이 얼른 질문했다.
“그럼 십지독녀의 행방은 아시오?”
“물론입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십지독녀는 이곳에서 복양현(?陽縣)으로 갔다고 합니다.”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이 정도로 은혜라고 하면 저희 낯이 부끄럽습니다. 우선 저희 배에 오르셔서 강을 건너시지요.”
“고맙소이다.”
진양 일행은 거룡방의 선박에 올랐다.
거룡방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나자, 선박에 있던 무인들 모두가 뭍으로 내려와 진양을 배웅했다.
왕방평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모쪼록 하시는 일이 잘 풀리길 바랍니다.”
“왕 방주께서 이처럼 대접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거룡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왕방평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저는 양 관주님과 친분이 쌓인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부담은 갖지 마십시오.”
“그래도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사람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할 땐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왕방평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럼 사실 한 가지 청이 있긴 합니다만…….”
진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뭔가를 요구해 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그런데 왕방평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서요평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흥! 내 이럴 줄 알았지! 처음부터 우리를 도와준다고 나설 때부터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봤느냐, 지야! 이게 바로 강호인들의 얍삽한 꼼수다! 그러니 남의 호의를 마냥 좋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허허, 형님도 참. 아직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지도 않았잖소?”
“들어보나마나지! 어떤 부탁이든 거룡방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왕가야, 내 말이 틀렸느냐?”
서요평이 왕방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의 무례한 태도에 거룡방 무인들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아무리 사상이괴가 강호 사파인 사이에서는 무림 선배로 알려졌다지만, 한 방파의 주인에게 이처럼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거룡방의 무인 중 성질이 급한 몇몇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 따질 듯이 움찔 몸을 떨었다.
왕방평이 서요평을 보며 말했다.
“흐음, 확실히…… 거룡방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오.”
“흥! 그것 봐라! 지야, 이제 알겠느냐? 저자들은 결코 쉬운 부탁을 하지 않는다니까! 왕가야, 일전에 나와 겨룬 일을 기억하고 있느냐?”
서요평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왕방평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그때 서 형의 실력에 소제가 깊이 탄복했었지요.”
“그렇지. 그때 너는 내게 졌지?”
“글쎄……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승부를 내지 못했던 것 같소만.”
“뭣이? 네놈이 결국 승패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그럼 나와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보자!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내가 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디기가 힘든 참이다!”
그러자 왕방평 곁에 있던 임평산이 발끈하며 나섰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오! 우리 방주님께서 예의로 사상이괴를 대하고 있건만, 어찌 그쪽에서는 방주님을 이처럼 무례하게 대한단 말이오!”
“흥! 내가 네게 말 한마디 건넨 적도 없는데 왜 네가 나서서 지랄을 하는 거냐?”
서요평이 바락바락 마주 소리쳤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진양과 유설은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운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여전히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형님은 아까 배에 오르기 전부터 사실 거룡방주님과 한차례 승부를 내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괜히 이처럼 무례하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하지만 그저 무공을 겨루고 싶은 마음에 이러는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님이 하시는 말씀 전부가 진심은 아닙니다.”
“뭐야? 네가 내 진심을 어찌 알아? 너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느냐?”
서요평이 또 발끈해서 서운지에게 따졌다.
그때 왕방평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 형께서 소제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려는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오늘은 제가 양 관주님을 뵙고 인사드린 즐거운 만남이 아니오? 이왕이면 다음에 연이 닿았을 때, 소제에게도 가르침을 내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혹 반드시 승부를 지어야 한다면 오늘은 소제가 패한 것으로 칩시다.”
상대가 이처럼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자 서요평으로서도 더 이상 시비를 걸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서요평은 이제 다른 것에서 꼬투리를 잡아 따졌다.
“나는 승부를 지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고작 우리에게 강을 건너게 해주고 양 관주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그 작태가 괘씸해서 혼을 내주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으로 미루고말고 할 것도 없다! 어서 창이나 들어라!”
“그런 거라면 우선 제 부탁을 들은 후에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왕방평의 대꾸에 서요평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네 부탁이 무엇이냐?”
그러자 왕방평이 진양에게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듣기로 양 관주님은 필체가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제 부탁은 선실에 걸어놓을 ‘거룡방’이라는 글자를 써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진양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거라면 부탁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비록 제가 졸필이지만, 방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응당 써드릴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양 관주님.”
한편 이들의 대화를 듣던 서요평은 머쓱해지고 말았다. 거룡방이 부탁해 오는 내용이 이처럼 간단한 것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확실히 이런 부탁이라면 거룡방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
할 말이 없어진 서요평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괜히 화를 냈다.
“흥! 이번에는 내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오늘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방평은 진양과 함께 다시 배로 올랐다.
왕방평은 선실로 들어서자마자 수하를 시켜 커다란 흰색 천과 먹물을 준비하도록 했다. 붓도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진양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붓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진양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수호필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왕방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붓은 양 관주님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 그 붓으로 글씨를 적어주신다면 더욱 큰 영광일 것입니다.”
잠시 후 수하가 천과 먹물을 준비해 왔다.
진양은 수호필을 들어 먹물을 찍은 다음 하얀 천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나갔다.
拒龍?.
진양이 글을 모두 적은 뒤에 붓을 거두었다.
한데 선실 내의 분위기는 자못 이상했다. 거룡방의 무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술렁였고, 왕방평 역시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왕방평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명필이십니다. 한데…… 한 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군요. 우리 거룡방은 클 거(巨) 자를 쓰는데 여기에는 막을 거(拒) 자가 쓰였군요.”
그러자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일부러 그렇게 한번 써보았습니다.”
“일부러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방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진양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늘 거룡방을 만나기 전에 사공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한데 거룡방의 배가 나타나자 그 사공들은 모두 겁에 질려 부리나케 달아나더군요. 거룡방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지요.”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집단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억누를 줄 아는 자는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더욱 큰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을 더욱 크게 하려면 그 조직의 욕망을 억누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타인을 핍박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결국 조직에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스스로를 절제하고 막아낼 수 있도록 ‘거(拒)’ 자를 써보았습니다.”
“그런 뜻이…… 있었군요.”
“비록 기득권의 세력이 인정하지 않아 사파로 분류된다고 하더라도 무인으로서의 협의와 자부심마저 ‘사(邪)’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양의 말을 끝으로 선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마다 진양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하느라 누구도 입을 쉽게 열지 못한 것이다.
진양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런, 제가 주제넘게 떠들었군요. 죄송합니다, 방주님. 혹 이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써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왕방평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오늘 양 관주님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양 관주님의 이처럼 깊은 사려에 마음 깊이 탄복했습니다. 이걸 선실에 걸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볼 때마다 양 관주님의 말씀을 항상 되새기겠습니다!”
왕방평은 정말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진양의 손을 덥석 잡고는 흔들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