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17
신필천하(神筆天下) 117화
“그렇군. 정말 고맙소.”
진양이 소봉옥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소봉옥은 깜짝 놀랐지만, 얼굴만 살짝 붉힐 뿐 손을 빼내진 않았다.
진양이 그제야 실수를 깨닫고 얼른 손을 놓고 물러났다.
“소 곡주에게 정말 큰 도움을 받았소.”
“그럼 소녀가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오. 무엇이오?”
“양 관주님은 필체가 무척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혹 실례가 아니라면 양 관주님께 글 한 수를 받고 싶어요.”
“글이라면…… 어떤……?”
“혹시 양 관주님께서는 저희 음귀곡에 대해서 아시나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림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은 그였지만, 음귀곡에 대해서는 언젠가 접선선생 전학수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송대율과 소봉옥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진양은 사상이괴에게 음귀곡에 대해서 다시 자세히 물어보았다.
“대략은 알고 있소.”
“그럼 다행이네요. 우리 음귀곡을 위한 글을 적어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런 거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오.”
진양은 흔쾌히 수락하며 점소이를 불러 문방사우를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때 진양은 탁자에 서서 붓을 든 채 서운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음귀곡의 미녀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인들이 대부분이라오. 무림인에게 남편을 잃은 여인도 있고 부모나 아이를 잃은 여인도 있소. 그런 여인들이 모여 서로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음귀곡이 만들어졌다고 하오. 실제로 음귀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무인 중 그들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소.”
진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시가 가장 어울리겠구나.’
생각을 굳힌 진양이 화선지에 붓을 대고 매끄럽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광초체로 춤을 추듯 이어지는 글씨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十里黃雲白日?
北風吹雁雪紛紛
莫愁前路無知己
天下誰人不識君
십 리를 뻗은 구름 노을빛을 가렸는데
북풍에 눈 내리는 하늘을 기러기가 날아간다.
타향에 친구가 없다 하여 서러워 말아라.
천하에 누가 그대를 모르겠는가.
글을 모두 적은 진양이 붓을 내려놓자, 소봉옥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진양의 글씨만 내려다보았다.
이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고적(高適)이 지은 것으로, 음귀곡의 무인들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진양이 옮겨 적은 것이다.
소봉옥 역시 한때 학문을 익힌 적이 있는 여인이었는지 그 시를 알아보았다.
“고적의 시군요.”
“그렇소. 이 별동대(別董大)가 음귀곡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소.”
진양의 말을 끝으로 소봉옥은 다시 한동안 침묵했다.
시를 읽어본 사람들은 마음이 짠했다. 과연 음귀곡을 대입해서 읽어 보니 정말 그들의 이야기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만약 여러 시를 알고 있다면 이러한 시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봉옥은 이처럼 그 풍경과 심상이 고스란히 가슴을 파고드는 섬세한 필체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글씨는 첫 글자부터 부드럽게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선이 굵었다가 가늘어졌고, 다시 굵어지면서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음속을 찌르는 듯 들어온 것이다.
새삼 음귀곡의 미녀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되새겨진 탓인지, 아니면 필체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진양 일행은 괜히 숙연한 기분이 들어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봉옥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태어나서 이토록 아름다운 글씨는 처음 보았어요.”
“과찬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위로받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소녀가 오늘 안목을 크게 키웠답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다행이오.”
“들고말고요. 이 시는 제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음귀곡에 돌아가면 유능한 석공을 불러 곡 입구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 넣도록 해야겠어요. 그런데 석공이 과연 양 관주님의 필체를 본떠서 잘 조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긴…… 도저히 안 되면 그를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을 쓰면 될 테니까…….”
마지막 말은 소봉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양은 그녀의 독한 말에 내심 놀라서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훗날 음귀곡으로 돌아간다면 꼭 나를 초청해 주시기 바라오. 그럼 내가 가서 바위에 직접 새겨 드리리다.”
“정말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물론이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소?”
“그렇다면 정말 감사해요. 그때까지 죽지 마세요.”
소봉옥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진양은 이 아름다운 여인이 내뱉는 말마다 섬뜩해서 영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받은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진양은 부드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한데 음귀곡이라는 장소가 정말 있는 곳이오?”
그러자 소봉옥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중원 각처가 음귀곡이지요.”
모호한 대답에 진양은 그녀가 지금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객점 주인이 음식을 푸짐하게 내왔다.
“헤헤, 시장들 하실 텐데 좀 드시지요.”
하지만 소봉옥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양 관주님. 그럼 앞으로 우리는 친구 사이가 된 거죠?”
“친구로 여겨준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오.”
소봉옥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객점을 나갔다.
객점 주인이 차려놓은 음식을 어쩌지 못해 멀뚱히 서 있는데, 서요평이 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봐! 여기 음식들도 형편없군! 하지만 지금까지 먹은 것들 중에는 그나마 나은 것 같으니 지금 차려온 음식은 모두 챙겨 가겠네!”
“예, 예, 그럽지요.”
주인이 얼른 대답하며 물러갔다.
서운지가 진양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를 돕는 사람들뿐이니 정말 하늘이 돕는구려. 하하하!”
하지만 진양은 하늘이 도와서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풍천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풍천익이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지나가듯 던진 그의 한마디에 여러 사람이 발 벗고 나선 것이리라.
그러다 보니 진양으로서는 적지 않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7. 절체절명(絶體絶命)
진양 일행은 소봉옥의 말을 듣고 석가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석가장 어귀에 다다랐을 때다.
전방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요평이 얼른 언덕 위로 달려가서 내려다보니 석가장 어귀에 한 무리의 인파가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가 눈살을 구기고 가만히 살펴보니 모여든 자들이 모두 무인이었다.
“흥! 이번에야말로 십지독녀가 우리를 죽이려고 사주를 한 모양이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를 언덕 아래에 있는 누군가 들었는지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앗! 저기 사상이협이 아닌가?”
“음? 그렇군. 저분은 사상이협의 서요평 대협이시다!”
누군가 자신을 가리켜 대협이라고 부르니 서요평은 잠깐 기분이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들이 나를 대협이라고 부르며 아부를 떠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어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일 것이다! 흥, 이 서요평이 그런 꼼수에 당할 듯싶은가?’
그러는 사이 진양 일행이 서요평의 곁으로 다가섰다.
진양이 서요평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저기 십지독녀의 사주를 받은 녀석들이 우리를 치려고 모였다.”
진양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많은 무인이 모여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인상이 험상궂고 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분명 사파의 무인들인 듯했다.
진양은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무인이 길거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금룡표국에서 지낼 때 다수의 무인을 만났고, 천상련에서도 많은 무인과 대면했다.
하지만 이렇듯 길거리는 아니었다.
언덕 아래 모여 있는 무인들은 어림잡아 일백 명이 넘을 듯했다.
그때 무인들 중 한 명이 경신법을 펼쳐 진양 일행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의 경신법이 워낙 빨라 사람들 모두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서요평을 향해 포권을 취하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상이협을 다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불초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서요평이 그를 힐끗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네놈을 모른다! 사주를 받았으면 무기나 들어라!”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상대는 움찔 떨고는 서요평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못 알아보는 서요평이 조금 서운한 듯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십니까? 비천무영(飛天無影) 가신풍(賈迅風) 대협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그제야 가신풍은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불초를 기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소? 가 대협의 질풍 같은 경신법은 오늘까지도 잊지 못한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자 서요평이 서운지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지야, 네가 아는 자이냐?”
“형님도 알지 않수? 예전에 우리가 무당의 도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쫓길 때 여기 가 대협이 도와주지 않았소? 가 대협이 뛰어난 경신법으로 그들을 혼란케 해주는 덕에 우리가 무사했잖소.”
“흥! 그땐 도움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적으로 만났군.”
가신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희는 십지독녀의 사주를 받고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던 것이 아니냐?”
그러자 가신풍이 껄껄 웃었다.
“그게 아닙니다. 이곳에 모인 자들 모두가 양 관주님을 돕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 말에 서요평은 물론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거룡방과 음귀곡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때 무리 중 누군가 다시 훌쩍 날아와 일행 앞에 우뚝 섰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선 노인이었는데, 마치 신선처럼 백염을 가슴께까지 기르고 있었다.
“사상이협을 다시 보니 반갑소.”
이번에도 서운지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백염악선(白髥惡仙) 조위강(趙爲强) 대협이시군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위강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일행을 둘러보다가 진양을 보며 물었다.
“혹시 양 관주님?”
“예, 접니다.”
“노부는 양 관주님을 돕기 위해 먼 곳에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께서는 너무 예를 차리지 마십시오.”
“양 관주님은 이 시대의 영웅이십니다. 노부가 예를 차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진양도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때 다시 무리 중 누군가가 달려나왔다.
그는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소매가 찢어져서 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 목에 새겨진 검상이 눈에 띄었다.
“사도성(司徒盛)이 양 관주님을 뵙습니다.”